1) 정의장원제는 농노에 의해 대규모 농경지가 경작되는 경제 체계를 말하는데 이는 봉건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장원은 자급자족적인 농촌 공동체로서 중세의 사회와 경제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기본적인 단위였다.2) 성립장원제도의 성립은 무엇보다도 게르만 민족의 이동 과정에서 촉진된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상층 자유민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유 사유지를 영주에게 양도하고 그것을 봉토로 되돌려 받고 그 대신 군역 등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나, 하층 자유민의 경우에는 영주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그것을 되돌려 받아 경작하는 대신에 지대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형성된 장원에는 토지에 대한 사적인 소유권은 물론이고 토지와 주민에 대한 조세 징수권과 재판권 등의 고유권력까지 부여되어 귀족들은 이틀 토지와 주민에 대한 경제외적 지배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3) 구조장원은 지역적, 시대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대다수 장원의 공통된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장원은 가신들이 주군으로부터 받은 봉토였고, 이것의 점유자는 영주라고 불렀다.1) 직영지- 영주 경제의 기반으로서 농노의 부역에 의하여 경작되는 토지.2) 보유지- 농민이 자기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경작하는 토지.3) 공유지- 촌락 주변의 목초지, 삼림, 소택, 황무지 등의 장원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1. 서양장원은 유럽 역사상 시장경제의 요소가 가장 희박하고 자급자족적 농업경제의 요소가 강했던 8~12세기경까지 거의 전유럽에 파급되어 있던 농촌 사회조직인 동시에 영주의 지배조직이다. 최근 장원구조의 지역차를 세밀히 조사 연구한 결과, 장원이 모든 농촌사회를 망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장원을 지배적인 농촌조직으로 보고 있다. 장원의 성립사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다.구(舊)로마령 갈리아(프랑스)의 교회령 ·왕령에서 7세기경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며, 9세기에는 이탈리아, 라인강 유역의 독일, 지중해안 에스파냐 등에도 거의 완성된 형태의 장원이 있었다. 영국은 그보다 늦었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장원조직의 한 전형이 만들어졌다. 장원의 조직적 조형(祖型)은 로마의 비라제(制)인데, 비라에서는 주로 노예의 노동을 사용한 데 대하여 장원에서는 토지를 점유하는 농민가족의 노동이 사용된 점에 차이가 있다.장원의 중심에는 장관(莊館)이 있고, 거기에는 영주 자신 또는 관리인이 살고 있으며, 하인과 직인(職人)의 오두막집 ·창고 ·작업장 등이 부속되어 있다. 농민의 가옥은 보통 취락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 조그만 채마밭과 창고 등을 가지고 독립해 있었다. 장원의 토지는 일괄적으로 2~3개의 큰 밭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여러 개의 가늘고 긴 지목(地目)으로 분할, 그 지목이 영주 직영지, 농민 보유지로 혼재되어 있었다. 큰 밭은 당시 농법이 윤작(輪作)이었으므로 필요했던 것이다.농민은 라틴계 제국의 만수스(mansus), 독일의 후페(Hufe), 영국의 하이드(hide)라고 불리는 표준 규모의 토지를 점유하였으며, 그것을 경작하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함과 아울러 영주 직영지에서 부역(賦役)을 행하여 영주경제를 지탱하였다. 영주경제의 지주(支柱)는 그와 같은 직영지로부터의 수입이었으며, 성계영주(聖界領主)나 국왕의 대장원에서는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의 비율이 반반에 가까운 곳이 많았다.그러나 직영지를 거의 또는 전혀 가지지 않은 장원도 많았는데, 그곳에서는 곡물 ·양모 ·마(麻) ·유산물(乳産物) ·포도주 ·가축 등 온갖 종류의 현물 공조(貢租) 이외에도, 성제일(聖祭日)의 음식물, 결혼할 때 부과되는 결혼세, 가장이 사망하여 보유 명의인을 변경할 때 납부되는 사망세, 영주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부과되는 제세(諸稅)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장원은 농업생활의 사회조직이기도 하여 흉작이나 기타 이유로 농민경제가 궁핍해졌을 때는 영주측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구제책이 강구되었다.장원과 촌락과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이 많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1촌(村) 1장원이라는 관계보다는 1촌이 몇 명의 영주에게 분유(分有)되는 상태의 것이 원칙적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한 마을에 많은 토지를 가진 영주는 그곳에 장관을 세우고, 직영지를 설정하여 동촌 내뿐만 아니라 주변 농촌의 장원 예속민으로부터도 부역과 공조를 받아들여 단위장원을 운영하였다. 수도원 등의 대장원에서는 단위장원이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20∼30개씩 산재하고 있어, 빌리카치온제(制)에 의하여 통관(統管)되고 있었다.또한 도시의 발달, 상업의 발전에 따라 자급자족을 명분으로 하는 장원도 화폐경제에 휩쓸려서 영주는 직영지를 감소시키고, 생산물 지대 또는 화폐지대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 말, 영국 ·독일에서는 13세기경부터 직영지와 부역이 없는 토지소유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영주와 농민의 관계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로 변화하였으며, 장원은 해체되어 갔다.2. 중국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후로 원(園:苑)이라 불리는 황족이나 부호의 별장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전원산림이 부속되어 있었다. 또 호족이나 부상(富商)에 의한 대토지소유도 발달하였으며, 노예 ·채무노예 ·예속농민[下戶]을 사역하고 자가소비뿐만 아니라 잉여생산물을 매출하는 경우도 많았다.위(魏) ·진(晉)나라를 거쳐 남북조의 지방호족, 특히 남조의 귀족들은 별서(別墅) ·별업(別業)이라고 칭하는 대사유지를 경영하고 그 생산물을 집적하는 창고[屯 ·邸]를 설치하였다. 이 무렵부터 대토지 소유지를 가리켜 장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천수택(山川藪澤)이라 칭하였고 큰 것은 주위 수십 리, 수백 경(頃)을 에워쌌으며, 신초어개(薪草魚介)의 이권과 과수원 경영 등을 포함하였다. 노동력은 노비 ·동() ·복(僕)과 전객(佃客)이라 불리는 예속민으로 충당되었다.수(隋) ·당(唐) 나라에서는 균전법(均田法)에 의한 토지규제가 행해졌으나, 귀족 관료는 신분적 특권으로서 광대한 토지의 점유를 인정받아, 노예 이외에도 유망(流亡)농민을 잡아두어 경작시켰으며, 황무지 개간이나 사여(賜與), 나아가 매매도 인정되어 대토지소유의 전개를 도와 주었다. 또한 사원이나 도관(道觀)도 기진(寄進)에 의하여 토지를 집적하였다. 다만 장원이란 말은 고래의 별장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당나라 중기 이후 농민층의 분해에 따라 민간에서도 점차 영리목적의 지주경영이 전개되어, 장원 또는 장(莊)이란 말도 이를 가리키게 되었다.당나라 말기 오대(五代) 무인정권하에서는 장원도 자연히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나, 지방의 호민(豪民)지주가 예하의 농민들로써 무장조직을 만들어 재지(在地)권력을 형성하였던 예도 적지 않다. 송(宋)나라 쓰촨[四川]의 호민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천 호의 방호(旁戶)를 역속(役屬)시키고 전란시에는 이들을 무장시켰다고 한다.
우리와 이슬람의 관계국제관계학과 20017975 임일웅Ⅰ. 서론이슬람 문화권은 전 세계 56개국 약 13~16억 정도의 인구를 가진 대단히 넓은 문화권이다. 제 2의 중동 붐을 예견하며 세계적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고조되고 있는 요즈음 이슬람권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이슬람 문화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무슬림 근로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실한 문제가 되고 있다. 21세기 국가 경쟁에서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는 생존의 문제이다. 이슬람세계에 비판적이고 폄하적인 서구 언론을 통해 이슬람 종교와 이슬람 사회의 사정을 접해온 우리의 시각을 교정할 때인 것이다.제 2의 중동 붐을 예견하며 세계적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고조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먼 나라들의 이야기로만 치부되고 있다. 또한 많은 기업체들이 이슬람권에 나가고 있는 요즈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Ⅱ. 이슬람의 기원과 그 시대적 배경1. 이슬람의 기원이슬람의 창시자는 서기 570년경 아라비아 반도의 오아시스 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이다. 이 때 반도 전체의 핵심적 사회 단위는 혈연에 바탕을 둔 부족공동체여서 그 규모가 국가공동체에 비하면 훨씬 작고 단순했다. 또 대부분의 아랍부족은 유목생활에 그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어서 광활한 사막에서 가축의 먹이인 초원을 찾아 헤매다 서로 충돌하여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부족 상호간의 관계는 우호적이기보다 경쟁적 내지 적대적이었다.다른 한편 일부 부족은 오아시스에 정착하여 농경작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으나 메카 지역은 오아시스의 물은 흡족했지만 그 토양이 비옥하지 못하여 주민의 다수는 상업에 종사하여 삶을 이어 나갔다. 이들 오아시스 주민들은 비록 정주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윤리 도덕 및 사회질서는 옛날의 유목생활 속에서 굳어진 의식 구조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생활에 맞지 않았다.농업과 상업기술의 발달로 그 생산력이 유목생활시보다 안정되고 또 향상하여 오아시스의 정주민 수는 팽창하였다. 그 결과 오아시스는 유목생활시보다 부족의 규모가 훨씬 커져서 도시 형태의 취작으로 발전하였다. 그에 따라 오아시스간의 교역뿐만 아니라 이웃 문명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삼각지, 시리아 및 예멘과 연결짓는 대상(Caravan) 활동도 활발하였다. 이 대상활동에 두각을 나타낸 도시가 바로 무함마드의 고향 메카였다.하지만 주민의 윤리 도덕 및 사회질서는 그 골격이 유목생활 시절에 형성된 것이어서 가족중심의 협동에 의존하는 농경 또는 상업 활동에 맞지 않아 새로운 형태의 사회질서가 요망되었다. 즉 무함마드가 생존한 시기(약 632)에 아라비아 반도에는 역사적 전환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 40에 이르러 예언자로 자처하고 아랍인의 우상 숭배적 신앙을 비난하고 사회혁신의 길에 나섰다.그의 선교활동은 곧 사회변혁운동으로 발전하자 메카 부족공동체의 강력한 보수 계층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국 박해에 견디지 못하고 생명의 보존마저 위험하게 되자 무함마드는 망명처를 찾던 중 마침 북쪽으로 400 ㎞ 떨어진 메디나 주민의 초청을 받아 622년 9월에 추종자들과 더불어 그곳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히즈라(hijrah)이니 곧 이슬람력의 기원이다.2. 이슬람의 시대적 배경메디나에는 당시 아우스(Aus)와 하즈라즈(Khazraj)라는 두 아랍부족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중재인 역을 맡는 대가로 그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솜씨로 임무를 수행하여 곧 메디나에다 이슬람 공동체(Ummah)를 구성할 정도로 그의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는 이 공동체의 조직에서 혈연적 요소보다 종교이념적 요소를 강화할 목적으로 그와 함께 메디나로 망명한 무하지룬(이주자)집단과 또 그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해 준 메디나의 주민 안사르(돕는이) 집단으로 구분하고 부족적 씨족적 분류를 가능한 한 회피했다.메카 상인들의 북부 무역통로에 위치한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의 지지세력 형성은 곧 메카의 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결국 두 도시는 세 차례(624, 625, 627년)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탁월한 전략가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승리자로 나타나자 그의 지위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그 후 다시 외교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630년에 메카에 무혈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그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 최초의 아랍민족국가를 창설하여 632년의 사망시까지 예언자 겸 통치자로 자리를 굳혔다.이슬람은 단순히 이승과 저승에서 개인의 사생활양식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영위방식도 제시하고 있으므로 그 가르침은 총체적이다. 즉,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도덕 및 윤리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을 총괄하고 있어서 완벽하다고 믿고 그 모범이 바로 무함마드의 생애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범처럼 무슬림에게는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구분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법에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 구분은 이슬람성법(샤리아,Shari'a)의 근원이 되는 꾸란과 하디스의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다.Ⅲ.우리나라와 이슬람의 교류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여말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 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 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의식들이 그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나 주위 한국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적 핵심 요소들이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오늘날 한국 무슬림 공동체의 형성에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1950년 한국 전쟁과 무슬림 군인들의 참전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다국적 군내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 병력을 파견하였다.이들 무슬림들은 전선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고 전쟁 고아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적인 모범을 보였다. 무슬림 군인들의 철저한 규율과 극한 상황에서의 인도적인 대민 봉사는 사령부 주위의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감명은 이들 무슬림들의 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이슬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유도되었다.그러나 종교적 대민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던 터키 군 여단 본부에서는 1955년 종군 이후 군 이맘을 통한 부분적인 종교 활동을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최초의 한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제 6터키여단의 군 이맘 압둘 가푸르 카리이스마일오울루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고, 터키의 삼순, 트라브존 지역에서 이슬람 지역 법관(무프티)을 역임한 명망 있는 무슬림이었다.이러한 터키 군내의 변화와 기존에 만주에서 무슬림이 된 한국인들의 끈질긴 접촉 노력으로 이슬람과 한국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곧 이전까지의 교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이 하나의 종교와 사상 문화로서보다도 개별 접촉의 차원에서 진행된 외국 무슬림들의 동화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주에서의 터키 계 무슬림들과의 접촉이 일말의 시초였다고 한다면 한국 동란을 계기로 참전한 터키 군인들과의 접촉은 차원을 달리하여 문화와 사상 그리고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1960년 대 들어 한국 무슬림들은 국내에서의 이슬람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해외 이슬람 단체들과의 접촉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한국 무슬림들은 국내의 이슬람 현황을 알리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을 순방하였으며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한국 이슬람의 실태 파악을 위해 직접 내국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무슬림 최초의 성지 순례자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로의 연수 길에 오르기도 하였다.1976년 5월 이슬람 국가들의 장관 및 국회 의원을 포함한 약 50여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원 개원식이 거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아랍 건축 양식에 의한 돔식 이슬람 성원이 건립되게 되었다.서울의 이슬람 성원의 개원으로 서서히 각 지방에서의 선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가정집, 비닐하우스 등에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이슬람을 알리는 노력은 지방에서의 이슬람 성원 건립을 유도하였으며, 외국 무슬림들의 지원으로 1980년 9월 부산 이슬람 성원이 남산동 두실에 개원하고, 이어 1981년 7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1986년 11월에는 전북 전주에서 이슬람 성원이 개원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외국 무슬림들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개원하기에 이르러 1986년 4월에는 안양의 한 한국인 무슬림이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이슬람 성원으로 개원하게 되었다.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실이 설치되어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에 힘쓰고 있으며, 약 4만 명의 무슬림들이 있다.
FTA의 의의와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국제관계학과 20017975 임일웅FTA란 무엇이며 우리는 이 FTA는 해야 하는 것인지 만약 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바람직할지에 대해 내 생각을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FTA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국가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서 모든 장벽을 제거시키는 협정을 말한다. FTA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국가간의 상호 무역증진을 위해 물자나 서비스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제반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철폐하여 무역자유화를 실현하기 위한 양국간 또는 지역 사이에 체결하는 특혜무역협정이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은 그 동안 대개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과 같이 인접국가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흔히 지역무역협정(RTA:regional trade agreement)으로 부르기도 한다.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모든 회원국이 자국의 고유한 관세와 수출입제도를 완전히 철폐하고 역내의 단일관세 및 수출입제도를 공동으로 유지해 가는 방식으로, 유럽연합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이 역내의 단일관세 및 수출입제도를 공동으로 유지하지 않고 자국의 고유관세 및 수출입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방식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대표적인 예이다.세계무역기구 체제와 다른 점은, WTO가 모든 회원국에게 최혜국대우를 보장해 주는 다자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무역체제인 반면, FTA는 양자주의 및 지역주의적인 특혜무역체제로, 회원국에만 무관세나 낮은 관세를 적용한다. 시장이 크게 확대되어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의 수출과 투자가 촉진되고, 동시에 무역전환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협정대상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산업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2002년 현재 WTO 회원국 가운데 거의 모든 국가가 1개 이상의 FTA를 체결하고 있으며, 2000년까지 WTO에 통보된 기체결 또는 협상 중인 FTA의 수는 240개, 실제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 협정만도 148개에 달했다. 한국은 1998년 11월 대외경제조정위원회에서 FTA 체결을 추진하기로 하고 첫 대상국으로 칠레를 선정한 이래, 총 6차에 걸친 협상 끝에 2002년 10월 24일 농축산물 분야의 협상을 타결하였다.우리나라와 칠레와의 FTA 타결의 의미와 전망을 알아보자면 오랜 숙원이었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우여곡절 끝에 타결됨에 따라 우리나라도 FTA 체결국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지난 99년 9월 양국 정상의 합의로 시작된 FTA 협상은 한국이 공산품, 칠레가 농산물 분야에서 한발씩 양보, 상품양허안 문제가 해소되면서 무난한 타결이 예상됐으나 막판에 금융서비스 시장개방 문제로 결렬 위기로 몰리기도 했다.◆3년 산고 끝 첫 FTA = 한.칠레 FTA는 경제적 실익보다는 한국이 맺은 첫 FTA로서 협상 노하우 습득을 통한 여타 국가와의 FTA 협상을 가속화하는 전기를 마련한데 더 큰 의미가 있다.또한 다자주의와 함께 세계 경제질서의 한 축인 지역주의라는 추세에 우리도 가담, 지역무역협정의 국제적 외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 우리나라가 대외적으로한 약속은 지킨다는 사실을 통해 신뢰도 제고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현재 한국과의 FTA 추진이 검토됐던 나라는 일본, 중국, 멕시코, 미국, 싱가포르, 동남아국가연합(ASEAN), 이스라엘, 태국, 뉴질랜드 등이지만 한.일 FTA 논의를 제외하면 별다른 실질적인 진전이 없는 상태다.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칠레와의 협상을 3년 넘게 끌면서 다른 국가와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면서 "지역협정이라는 블록화를 통해 역외국차별이 심해지고 있는 만큼 적극적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한편 정부는 연내에 양국 외교장관급 이상이 참석하는 정식 서명식을 갖고 국회비준을 거쳐 내년 상반기 안에 FTA를 정식 발효한다는 계획이지만 농민들의 반발에다 한나라당의 유보적 태도까지 고려하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는 시각도 있다.◆한국 공산품, 칠레 농산물서 양보 = 이번 한 칠레 FTA는 내용면에서 협상 타결을 우선 목표로 한발씩 양보를 통해 '주고 받기 전략'을 택한 FTA라는 평가다.칠레는 쌀. 사과. 배를 양허 예외품목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 세탁기 냉장고를 예외품목으로, 일부 공산품에 대해 최장 13년까지 관세자유화 유예기간을 인정받았다.한국무역협회 정재화 FTA 연구팀장은 "공산품의 경우 즉시 무관세화 품목이 60-70% 전후, 늦어도 5년 내 90% 이상이 무관세화되는 게 일반적인 전례"라며 "이에 비춰 한 칠레 FTA는 공산품 유예기간이 다소 긴 편"이라고 평가했다.하지만 불완전하나마 양국이 지지부진하던 협상을 지난 8월 이후 본격화한 것은 연말까지 FTA를 타결하겠다는 정부 의지와 한국에 아시아권의 교두보를 마련한 뒤 다른 국가와 FTA 협상을 서둘러야 하는 칠레 측 사정이 일치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경제적 효과 당초보다 미흡 =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한 칠레 FTA가 체결될 경우 제조업 전체의 대 칠레 수출은 6억3천600만 달러, 수입은 2억500만 달러 각각 증가, 4억3천100만 달러의 무역수지가 개선되는 것으로 추정됐다.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전품목이 즉시 무관세화 되는 상황을 가정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할 때 주요 품목이 양허 예외품목으로 지정되고 공산품의 단계적 무관세화기간이 다소 길어짐에 따라 실제 효과는 당초 기대에 못 미칠 전망이다.주요 수출품목인 무선전화기와 컬러TV, 승용차. 화물차 등이 즉시 무관세화 품목에 속한 것은 잘된 일이지만 타이어, 철강, 섬유 같은 공산품은 최고 13년에 걸친 무세화를 추진키로 해 이들 품목의 경우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정부는 또 이번 FTA에 포함된 정부조달협정에 따라 칠레가 추진 중인 연간 20억-30억달러 규모의 사회 간접자본 프로젝트에 우리 기업의 참여가 활성화된다는 점도이번 협상의 수확중 하나라고 설명했다.한편 한국은행은 최근 내놓은 자료에서 칠레와 FTA 체결시 수출은 연 3천 만달러 수입은 1천만 달러 증가해 연 2천만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발표, KIEP 추정치와 큰 차이를 보여 경제적 효과에 대해 다소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협상타결 득실 = 한 칠레 FTA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비교열위 상품인 농산물을 보호하기 위해 비교우위 상품인 공산품에서의 이득을 극대화하지 못했다는 것 연내 FTA 체결을 목표로 한 상황에서 시간에 쫓겼고 국내 농가의 피해와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심하다보니 공산품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을 일정부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물론 최대 관심사였던 쌀 사과 배를 양허 안에서 제외시킨 것은 협상의 쾌거라고 볼 수 있지만 향후 농산물에 관심이 많은 나라와 협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이 걸림돌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안고가야 할 숙제로 남은 셈이다.하지만 FTA 체결로 국내 농가가 일정부분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후속대책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주요 과일을 완전 무관세화할 경우 연간 2천800억원의 농가 피해를 예상했지만 사과.배가 양허품목에서 제외되고 나머지 농산물로 상당한 유예기간을 인정받아 10년후 연간 450억원 가량의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KIEP 정인교 팀장은 "다자간 무역자유화와 달리 FTA는 정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인 만큼 농민의 피해는 재정으로 보상돼야 한다."면서 "합리적 보상책을 강구하고 FTA 구조조정지원법 등을 통해 농업의 체질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그렇다면 우리나라는 FTA를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저는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협정이라고 생각합니다. FTA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NAFTA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북미 관세 협정의 경우를 본다면 세 국가 (미국, 캐나다, 멕시코) 모두에게 윈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단순히 우리 농민들을 위해 FTA를 반대하자는 것은 큰 숲을 바라보지 못한 매우 협소한 시각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캐나다에서는 그곳 현지의 과일이나 채소, 야채 등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품질 좋은 것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고 하지만 남미 쪽에서 수입하는 과일등도 매우 품질이 좋기 때문입니다. 농민들 또한 이 계기를 통해 조금 더 생산성이 있는 생산 패턴이나 그런 방향 모색이 필요할 거라 생각이 듭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 한시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느낌은 드시겠지만 우리 국가의 미래 지향적인 정책 등을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더 많은 협정이 반드시 필요할 거라 생각이 듭니다.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하자면 이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한국과 싱가폴 FTAFTA에 대한 일반국민의 인식 전환 및 다수 FTA 확보를 통한 FTA추진정책의 대내외 과시 등을 위해 정부는 농업분야에 대한 우려가 적은 싱가폴과의 FTA를 추진하기로 지난 10월 결정하였다.싱가폴의 인구와 내수시장의 규모, 관세를 포함한 개방적인 통상시스템, 산업구조상의 경쟁관계 등으로 볼 때, 양국간 FTA로 우리나라가 싱가폴의 시장진출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낮으나, 서비스 및 투자면에서 중장기적 긍정적인 측면과 선진개방에 대한 학습효과 등을 기대해 볼 수 있다.싱가폴과의 FTA는 우리 농업계가 '농업을 제외한 FTA 구축'차원에서 그동안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제안해 왔던 사안이다. 특히, 일본-싱가폴간 FTA에서 농업을 제외한 사례를 우리 정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싱가폴이 농업분야 자유화에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농업 제외가 가능하나, 이 경우 향후 우리나라가 추진할 다른 지역과의 FTA에서의 농업개방 문제와 상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분야자유화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싱가폴과의 FTA는 과거에 논의가 있었던 한-태국FTA, 현재 진행중인 한-아세안FTA, 동아시아FTA추진과 연관시키는 전략도 수립되야 할 것이다.
한중일의 가옥국제관계학과 20017975 임 일 웅들어가며..한국, 중국, 일본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다. 이 세 나라의 문화는 오래 전부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각 나라의 주거문화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각 나라의 주거의 특성과 다른 나라와의 주거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함으로써 세 나라의 주거문화를 이해해보도록 하자한국의 가옥전통가옥의 특징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에 중심을 둔 주거 공간 -우리의 전통가옥은 '개방적인' 공간구조 전통가옥의 공간배치 -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었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한옥의 구분안채안 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류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였다.사랑채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대청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 큰방 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칭한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온돌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춥기 때문에 가옥의 구조에도 계절적 온도 변화를 고려담한국 전통 가옥의 담은 치안을 위해서 높이 쌓거나 위협적으로 쌓는 일이 없이 나지막하고 은은한 장식을 하여 시적인 정취가 있다 담장을 장식한 무늬는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담중국의 가옥중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택유형은 다양한 기후대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많은 도시는 평지에 위치한다 중국의 주택에서 축과 대칭이라는 질서원리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도 이 같은 자연조건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주거건축에서 중심을 추구하는 영역 만들기가 중요한 개념이 되며 그러한 개념은 벽 쌓기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공간의 켜를 만들어나감으로써 구현된다.중국의 다양한 가옥중국 주택의 기본사합원의 공간과 구조중국에서는 일찍이 서주시대의 주거지에서 사합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사합원 형식이 주택 뿐 아니라 일반 건축의 기본 유형을 이루어 왔다. 사합원을 이루는 모든 건물은 중정을 향해서 개구부가 형성되는 반면 그 반대면 인 후면으로는 개구부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격식을 갖춘 사합원에는 목구조방식이 채용된다토루의 공간과 구조중국 역사상 비교적 늦게 출현한 토루는 중국의 다양한 주거유형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공동마당을 둘러싸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토루의 공간구성은 축선을 가지며 전체적으로는 대문과 조상을 모시는 단원(단위주택)인 조당을 잇는 선이 주축을 이룬다 토루는 외부가 토벽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목가구조로 구성된 이중 구조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흙으로 벽을 쌓아 5, 6층에 이르는 높이의 거대한 토루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사합원과 토루일본의 전통 가옥일본 열도는 남부와 북부의 기후차가 크므로 일본의 주거는 지역의 풍토와 밀접히 관련 남부지방의 기후는 '고온 다습'한 것이 특징으로 주택에서 난방방식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북부지방의 주택에서는 고다쯔나 이로리 등의 난로로 난방을 한다. 개방적이고 통풍이 잘되는 주택을 추구하였으며, 일본주택의 실내는 온화한 외기와 소통이 되도록 열린 공간으로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다고다쯔와 이로리일본주택의 형태일본의 주택은 일반적으로 목조주택이며 따라서 그 평면구성의 기준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인 간이다 주택의 전면은 의식공간, 후면은 일상생활공간으로 구성 실에는 다다미가 깔리는데, 다다미의 규격은 실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며 주택의 구성하는 기준척도가 된다.지붕의 종류입모옥조 : 우리나라의 팔작지붕과 유사한 형태이다. 기동조 : 우리나라의 우진각지붕과 유사한 형태이다. 절처조 : 우리나라의 맞배지붕과 유사한 형태이다.일본의 민가일본의 전통민가는, 건물 밖으로 정원을 둔다. 따라서 건물과 마당의 관계가 그리 다양하게 형성되지는 않는다 히로마형과 다노지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히로마형은 한랭한 동북 북륙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다노지형은 전자의 형태로 실들이 사분할되어 배열되는 평면형이다상류 주택침전조 -침전조는 헤이안시대에 형성된 일본 고대 및 중세의 상류계층 주택형식이다 -침전조에서는 주인 부부가 거처하는 본채인 침전을 대략 부지의 중앙에, 정원과 그 남쪽의 연못에 면하여 남향으로 둔다 -침전조의 구성은 초기에 좌우대칭을 추구 점차 대칭적인 배치가 사라지며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변모. -침전조는 중세 말에 서원조로 발전된다.서원조 -서원조는 무로마치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근세초기에 확립된 상류주택 양식으로, 무가주택을 이룬 주택형식이다 -서원조는 자시끼의 정면에 도꼬노마와 찌가이다나를 나란히 설치하고 양 측면에는 쯔께쇼인)과 쬬다이가마에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접대하기 위해 죠단가마에라 하여 가마찌 높이만큼 다다미바닥을 올렸다.침전조 내부모습서원조 내부모습도시 주택일본의 전통 도시주택은 마찌야로 대변된다. 마찌야는 공공의 도로에 면하여 미세 곧 상점 기능과 주거기능을 가진 도시주택을 말한다. 마찌야는 헤이안시대에 성립되었고, 중세 및 근세에 발달한 일본 도시주택의 유형이다. 세에 주거지의 밀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마찌야는 좁고 긴 대지에 의해 규정된 2층의 도시주거 유형으로 발전하였다.가옥으로 알아본 커뮤니케이션한중일 세 국가간에 가옥을 살펴 보았다. 세 국가 모두 비슷하면서도 고유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점에서는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 같고 그 문화가 다시 각 국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구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문화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받아 들일것은 과감하게 받아 들이고 거기에 국한 하지 말고 나의 것을 창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이 발표를 마친다{nameOfApplication=Show}
{캄 보 디 아 왕 국(Kingdom of Cambodia){목 차1. 캄보디아의 개관2. 캄보디아의 역사3. 캄보디아의 정치 및 군사4. 캄보디아의 경제5. 캄보디아의 교육, 사회·문화6. 캄보디아의 외교7. 캄보디아의 원조 현황8. 주변국과의 관계9. 우리나라와의 관계10. 캄보디아 내전 및 앙코르와트{캄보디아는 앙코르 제국의 영광된 역사와 전대미문의 킬링필드라는 오욕의 역사를 함께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캄보디아는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초원국가로 평지가 국토의 75%나 되는 얕은 대접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온순하고 보수적인 크메르족이 오랜 역사를 이 루며 살고 있고 국민의 95%이상이 불교를 믿는 전형적인 소승불교의 나라이다.캄보디아는 비극의 역사를 딛고 일어나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려는 나라이다.Ⅰ. 캄보디아의 개관1. 캄보디아의 개관.국 명 :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수 도 : Phnom Penh(인구: 약 120만명).정 체 : 입헌군주국(국왕: Norodom Sihamoni, 수상: Hun Sen){{.흰색문양(중앙) :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문화유적 인 앙코르와트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찬란한 크 메르 문화와 富를 상징.적색 : 불의에 대한 투쟁과 강인한 캄보디아의 정신을 상징.청색 : 농업과 환경을 상징.의 회 : 양원제(National Assembly 123석(임기 5년), Senate 61석(임기 6년).모 토 : 국민, 종교, 왕(Nation, Religion, King).국경일 : Independence Day(11.9).인 구 : 1,300,만명(2003년말 기준) - 인구밀도(㎢) : 64, 인구증가율 : 2.49%- 인구의 대부분이 본토의 크메르 족이 차지하고 있는데 90% 정도, 나머지는 중국에서 이주를 해온 화교출신들과 인근 베트남에서 넘어온 베트남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 소수민족은 주로 산악이나 강변에 접해 살고 있다..산업별 근로 인구(경제 활동인구 : 약 6백 만명)- 1차 산업(농.어총재로 하며, 부의장은 3인으로 구성- 부총리는 4인으로 구성(CPP 2인, 야당 각 1명).2003.12 민주연합측은 인민당(CPP)의 국회의장과 총리 동시표결 주장을 이유로 내세 워 신정부 구성 논의를 결렬- 이에 대해 국왕은 훈센 총리의 총리직 계속 수행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신병 치료차 출국(중국 및 북한 체류).2004.3월 이후 최근까지 인민당(CPP)과 제1야당인 훈신펙당간 소위 "2.5(two and a h alf) 권력분점" 방식을 전제로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실무협상 개최* 2.5방식 : 인민당과 훈신펙당을 주축으로 하되, 삼랑시당 소속 일부인사가 훈신펙에 참여,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식3) 제3기 연립정부 구성 합의.2004.6월초 훈센 총리와 라나리드 왕자(훈신펙당 총재)간 제2차 여야 영수회동을 통하 여 실무협상에서 합의되지 못한 아래 쟁점사항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 국회 원구성 및 연립정부 내각 인준안 동시 표결- 치아심(CPP 총재)을 상원의장으로, 라나리드 훈신펙당 총재를 국회의장으로 추대- 훈센(현 총리)을 정부수반으로 하는 CPP와 훈신펙당간 연립정부 구성.2004.6.26 연립정부 내각 구성을 위한 26개 부처 각료직 배분 및 연립정부 운영 방안 에 대해 합의- Co-Minister로 운영되는 상기 내무부, 국방부, 재경부의 3개 특별부처를 제외한 23 개 일반부처 장관 중 CPP에서 14명, 훈신펙에서 9명 임명- CPP(14) : 1관광부, 2외교부, 3기획부, 4상무부, 5농림수산부, 6국토관리부, 7 환경부, 8산업자원부, 9수자원기상부, ⑩사회복지부, ⑪체신부, ⑫공보부, ⑬법무부, ⑭대의회 및 감찰부- Funcinpec(9) : 1보건부, 2농촌개발부, 3공공사업교통부, 4교육청소년체육부, 5 문화예술부, 6노동부, 7여성부, 8종교부, 9관광부.2004.6.30 국회 원구성 및 내각 인준안 동시표결에 필요한 헌법규정 채택을 위해 임시 국회 개원에 합의.상기 여야간 "협력에 관한 합의의정서(Protocol of 하는 의류와 천연고무, 농산물, 수산물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및 석유제품, 직물, 섬유사, 자동차 및 부품, 기계류, 전기기기, 담배, 의약품, 기타 섬유제품, 철강제품 등이다.- 주요 수입대상국은 2002년 기준 태국, 싱가포르, 홍콩, 중국, 베트남 등이며, 한국산 제품은 캄보디아 수입시장에서 7위를 기록하였다.- 03년 수출은 총 수출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대 미국 수출이 18%나 증가한 섬유쿼타와 원자재 가격급등에 따른 천연고무 수출호조에 힘입어 14.4% 증가한 20 억불을 기록하였으며, 운송장비를 중심으로 수입도 증가세를 보이면서 수입은 전체적 로 12.5% 증가한 26억불을 기록하였다.{*자료원 : 캄보디아 수출입 통계 연보(2003)3. 경제정책 주요 동향.개 관- 최저생계선 조차 유지 못하고 있는 인구가 전체인구의 43%를 점하고 있을 정도로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캄보디아는 빈곤퇴치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2002년 국가 빈곤퇴치전략(National Poverty Reduction Strategy)을 수립함.- 이를 위해 정부는 재정수입 확대를 위한 행정분야의 제도 및 절차를 재정비하고, 불 요불급한 분야의 공공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음..농업분야- 현재 농가가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10%에 불과, 농가의 투자의욕을 저해 하는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경작가능 농토 중 비옥한 토지의 상당수가 정부소유로 묶여있어 농가의 농지확 보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중시, 정부는 농지사용법 개정을 추진 중임..제조업분야- 캄보디아 제조업 부문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섬유분야의 경우 2005년 쿼타제 철폐 시 캄보디아 경제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게 될 전망임.- 이에 따라 정부는 제조업 부문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관련 행정절차의 간소화를 도 모하고 운송비 절감, 비공식적인 준조세 철폐 및 노동기준 완화 등을 중심으로 개혁 을 추진 중임.무역분야- 03.9.11일 멕시코 칸쿤의 제5차 WT공식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인구의 95%가 크메르 족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 구성에서 가장 큰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질 적으로는 정부에서 밝히는 것보다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다.캄보디아의 소수계 중 가장 중요한 민족은 1975년까지 캄보디아의 경제계를 장악했었 던 화교들이다. 최근들어 해외에 있는 화교들의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캄보디아 경 제계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5만명, 비공식적으로는 약40만명의 화교가 캄보디아에 있다.캄보디아의 참(Cham) 무슬림(크메르 이슬람)은 공식적으로는 20만명, 비공식적으로는 50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75-79년 사이에 특히 탄압을 많이 받았으며, 대부분의 공동체가 붕괴 되었다. 이외 6-7만 명에 이르는 다양한 소수 산간 부족들이 산악 지역에 살고 있다.나. 사회 관습크메르 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체를 통털어 가장 사귀기 쉬운 사람들이다. 태국에서처럼 캄보디아 인들은 손을 기도하듯이 앞으로 모아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부를 때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야하며, 어 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된다.다. 의식주 및 생활 환경의식주 : 크메르족의 주식은 쌀과 생선이다 특히 생선은 보편화되어 있고 풍부한데 말 리거나 훈재해서 또는 생선소스를 만들어 양념으로 먹는다. 간혹 논 주위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과일을 먹기도 한다. 야자 나무로 덮은 전형적인 시골풍의 초가집은 진흙으로 덮은 지붕에다 대나무위에 지어진목조 건물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크메르 여인 의상 은 사롱처럼 생긴 스커트인 삼포트와 그 위에 브라우스를 입고 크라마라고 부르는 바둑 판 무늬의 베일(head covering)을 쓴다. 남자들 역시 삼포트를 입는다. 도시인들은 서 구식의 옷을 입는 경향이 있다.생활 환경 : 보건 위생관계는 빈약하다. 폴포트 정권(1975-1979)이 거의 모든 의사들 을 죽였기 때문이다. 1989년 통계로는.28.041.88.2국제금융기구IBRD/WB43.19.147.28.963.812.5IMF23.04.923.54.412.32.4ADB48.710.378.514.873.314.3소 계159.633.8191.436.1191.137.3NGO43.69.245.58.635.16.9총 계471.8100530.5100512.0100Ⅷ. 주변국과의 관계1. 베트남과의 관계 : 캄보디아 내전의 당사자, 아직도 불편한 관계1993년8월 라나리드와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양국간 국 경분쟁 및 캄보디아 거주 베트남인 지위 문제에 대해 논의함.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에 대한 크메르루즈의 공격행위를 강력 응 징하겠다고 발표, 캄보디아 정부에 베트남인 거주자에 대한 지위개선 및 약3만 명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인 난민에 대한 귀향 허용과 안전보장을 요청함.이에 대해 캄보디아측은 베트남인 문제는 신헌법에 국적 및 이민지침이 명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동년 9월에 채택된 신헌법에는 크메르인의 권리 만 명시되었음.캄보디아 내에는 1979년 이후 캄보디아로 이주하여 구정부가 발급한 신분증을 소지하 고 있는 베트남인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단 특수한 경우 (캄보디아인과의 혼 인, 베트남 국적포기 등)에만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남부 국경선 부근을 점차로 확대하는 베트남인에 대한 캄보디아 시민의 감정이 98년 선거에서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여 현 집권당을 당혹케 한 바 있음.2. 태국과의 관계 : 불편했던 관계를 극복하고 경제개발 파트너로 긴밀한 관계크메르루즈에 대한 태국의 군사 지원설로 인해 한 때 불편한 관계였으나, 양국 정부는 건설적인 관계개선 노력을 지속하여 내정 불간섭 공약, 양국간 경제· 사회· 과학· 기술 협력을 위한 공동위원회 및 공동국경위원회 설치에 합의하였음.현재 자유로운 국경 통과는 국경 부근의 경제에 활력소를 넣고 있으며, 향후 많은 교류 를 예고하고 있음.더욱이 향후 ADB계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