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의 ‘교육평준화정책’에 대하여? 목 차 ?I. 서 론 III. 결 론II. 본 론 IV. 참고문헌1) 교육평준화 과정2) 교육평준화의 문제점과 대안3) 한국교육의 균형적인 발전의 과제I. 서 론한국은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다. 그러니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교육은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신분상승의 가장 유력한 통로이기도 하다.교육평준화 정책은 산업화 시대에는 큰 역할을 했다. 지난 27년간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온 평준화 정책은 학교간 교육격차, 과열과외, 재수생의 누적 및 중등교육의 비정상화 등의 문제를 완화하고, 교육의 기회균등과 지역―사회계층간 위화감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데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사교육비가 공교육비를 능가하고, 조기 유학이나 교육 이민이 증가하며, 교실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학교 교육의 다양화, 전문화, 특성화를 방해해 학교 교육의 상품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그럼 지금 시점에서 “百年大計”인 교육문제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고 초석을 삼아야 할 것인지, 교육평준화 정책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고, 문제점과 대안을 생각하고 한국교육의 균형적인 발전을 생각해 보았다.II. 본 론1) 교육평준화 과정[1]평준화시책이란 “근본적으로 학생, 교원 및 시설을 고르게 하여 학교간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차별없는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으로써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대비한 입시위주 교육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당해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상화하며, 과열과외도 제거하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생들을 추첨에 의해 고르게 배정하는 것이 평준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교원의 평준화는 부적격 교원의 정비, 재교육 및 순환근무제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가능하지만 추첨제를 적용하여 고르게 배치한다거나 동일한 능력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는 없었으며, 시설의 평준화도 재원부족으로 인해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중학교 입시제도는 1968년까지 입학시험에 입각한 경쟁적 선발제도로 운영되었다. 이 제도 하에서 일류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입시경쟁의 격화는 가히 입시 “전쟁”을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입시문제를 해소하고자, 1969년 무시험 추첨진학제가 도입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평준화 시책의 시발이다. 1969년 서울을 4개 학군으로 구분하여 추첨제로 진학하게 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70년에는 10대 도시로 확대,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제도는 중학교 문호를 완전개방하여 진학희망자 전원의 진학을 보장하였고, 입시 대신 추첨으로 학생들을 배정함으로써 각 중학교 진학생들의 질을 확률적으로 평준화하였다.고등학교 입시제도 역시 1973년까지 시험진학제로 운영되었는 바, 이로 인한 입시경쟁은 중학교 입시경쟁에 못지 않았다. 특히, 무시험제 하에서 대량으로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고교에 진학기 시작한 1972년 이후 대도시에서 그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고교 입시문제를 해소하고자, 1974년부터 본고사를 폐지하고 연합고사(및 체력검사) 성적에 따라 지역(학군)별로 총입학 정원만큼을 선발한 다음, 인문고 지원자들은 추첨에 의해 배정하는 제2차 평준화시책이 도입되었다.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시작된 이제도는 1980년에 총 20개 대도시로 확대되었으나, 1985년까지 전국으로 확대하려던 당초 계획은 일단 보류되게 되었다.이제, 본격적인 입시경은 대학입시에만 유일하게 존속한다. 그런데, 대학 정원의 지속적인 증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 경쟁이 가속화되어 인문계 고교는 대입준비교육으로 인해 비정상화되고, 사교육(과외)은 가히 “망국적 과외”의 지경에 이르자, 1980년 7월 30일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재학생들의 과외공부가 일체 금지되고, 1982년부터 기존의 대학 본고사가 폐지되며, 대입예비고사에 대체된 대입학력고사 성적과 고교 내신성적 환산점수만으로 대입전형이 실시되게 되었다. 고교교육 정상화를 위해, 교육부는 내신성적의 반영비율을 통제하고(1994년 40%) 대입학력고사를 거의 전과목에 걸쳐 교과서 범위내에서 출제하도록 규제하였다. 과외금지 조치와 아울러, 1981년 2월 2일부터 KBS 교육TV의 방영으로 과외욕구를 해소하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과외수요는 결코 줄지 않아 급기야 1988년 9월 1일 대학생과외 및 학원수강 허용조치로 과외는 상당부분 자유화되었다. 1994년 대학입시는 부분적으로 자유화되어, 대학별로 본고사를 선별적으로 실시하도록 허용됨과 아울러, 기존의 대입학력고사는 대입수학능력시험으로 개편되었다.2) 교육평준화의 문제점과 대안[2]첫째, 평준화 교육시스템이 문제이다.인수분해도 못하는 학생과 미분ㆍ적분까지 마스터한 학생을 한 교실에 나란히 앉혀놓고 학습능력에 어울리는 질좋은 수업이 진행될 리 없다. 그래서 입시경쟁이 학교 교실이 아닌 학원강의실에서 결판나고 있는 것이다. EBS 인터넷 수능강의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그것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 같다. 또 주입식 교육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글로컬시대의 필수조건인 창의력 증진에는 한계가 있다.둘째, 현실과 동떨어진 공급자 위주의 이론교육을 지양해야 한다.학과 담당 선생님이 있기 때문에 교육과목이 있다는 식은 곤란하다. 대졸자 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주문식 교육으로 95% 이상의 취업률을 달성하고 있는 대구의 한 전문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는 질 높은 디지털 정보전문 교육은 필수다. 거기에 더해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하면 제2, 제3 외국어의 실용적 교육이 긴요하다. 미국ㆍ일본ㆍ중국ㆍ러시아 등4강 속에서 살아남자면 주변국들의 언어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이다. 아랍의 유태인이라고 불리는 레바논인들은 어려서부터 아랍어, 불어, 영어를 훈련받는다. 이와 함께 외국인과 외국문물에 대한 개방성을 위한 훈련도 뒤따라야 한다.마지막으로 바른 도덕성과 질서의식 훈련이필요하다. 이는 교육자를 비롯해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것이 최상의 교육임을 감안할 때 기성세대는 반성할 점이 많다.이상과 같은 기본교육이 충족돼야 글로컬시대를 맞아 각 분야에서 창조능력을 발휘해 선진한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3) 한국교육의 균형발전의 과제한국교육의 본질적 가치는 개인의 인격완성과 자아실현을 통하여 국가사회의 이상 실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현상은 교육의 수단적 가치와 목적적 가치의 갈등양상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두 교육의 목표는 인격완성이나 자아실현 등의 자적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실제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수단적 가치를 중심으로 교육이 실천되고 있으므로 양자간의 균형과 조화가 교육발전의 과제이다우선 교육의 양과 질의 균형발전의 문제는 일인당 교육비, 시설환경, 교육방법 등에 관한 과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교육평준화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하여 교육 수월성 추구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설, 환경, 재정등의 평준화를 추구하고 교육과정, 실천방법 등 교육과정요건에 있어서 수월성을 추구하는 일이다.첫째로, 학교교육의 내적 체제개선을 들 수 있다.단위학교에서의 자율적인 운영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학교 단위의 재량에 의한 자율적인 운영 및 조직을 존중하고 교육행정 기능을 활성화하여 각급 학교를 효율적으로 지원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교육시설, 교직원의 자질 및 지위향상을 위하여 행정?재정지원체제를 확립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풍부한 학습자료, 농촌학교에 우수한 교사 배치, 장학지도 위한 차량보조 등 지원강구를 말한다.
1. 1897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대 임오군란, 갑신정변기의 일본의대 조선정책의 특징임오군란)은 개항이래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청나라의 이홍장은 전통적 화이질서의 붕괴의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조선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태도는 먼저 일본이외의 국가들과의 조약체결을 청이 권유하면서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에서 보여지듯이 종주국으로서의 속방에 대한 조청관계의 새로운 국면이 조선의 대외관계에 투영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과의 속방관계는 인정하나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행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러한 조선을 둘러싼 새로운 국면에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이다. 즉, 전근대와 근대화의 접경에서 가치가 혼란된 상태로 자주적 근대화의 방향성을 찾지 못한채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7월 23일 구식군대에 대한 급미부정사건이 발단되어 임오군란이 발생하였고, 민중들의 불만은 민씨정권과 일본에 대해 폭발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청의 입장에서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즉시 무력개입 하였고 (대원군 납치사건) 일본도 무력을 동반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문제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청과 제물포조약에서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의 주병권을 획득하는 등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결과적으로 임오군란은 조선에서의 청의 종주권 강화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아울러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로의 길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 강화정책이 전개되자 조선의 개화파는 분열하여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민씨일족에게 협조적인 온건개화파를 형성하였고, 김옥균, 박영호, 홍윤식등은 민씨정권 주류와 대립하면서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철저한 내정개혁을 추진하는 급진개화파를 형성하였다.갑신정변의 주역들과 개화파가운데 앉은 사람이 박영효이고,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유길준이다갑신정변)은 1884년 청불전쟁발생으로 청이 곤경에 처하자 급진개화파는 민씨정권타도를 타도하고 국내외 정치를 개혁하는데 있었다. 조선주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급진개화파는 민씨정권의 중심인물인 민역익을 비롯한 수구파 관료들을 습격하고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일본 공사관 경비대에 호위를 맡겼다. 이과정에서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등이 살해되고 정변 이튿날 청조종속관 청산, 문벌이 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의 등용, 탐관오리처벌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혁신적인 14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신정권을 수립을 선포했으나 3일째 되는날 위안스카이(원세개)등이 이끄는 한성주둔 청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 선후처리를 위해 조일담판에 대한 훈령을 전달하며 일본은 이노우에 외무경을 대표로 육군2개 대대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등을 강요하였고, 조선정부와 1885년 1월에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으로 청정부와도 별도로 1885년 3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사이에 텐진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일양국 군대가 조선에 공동철병하게 되었고 행문지로조항에 의해 청?일양국 중 일방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일방도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내용을 결정했지만 당사국인 조선의 견해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인 일?청간의 결정이었다. 이후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독립정책의 결점으로 보는 인식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나 청국 및 조선은 물론 구미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내적인식의 단계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조선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방해받는 두 번째의 획기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권 확대를 중심으로 세력확대를 꾀하게 된다.2.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의미청일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오토리 케이스케 공사는 조선정부가 내정개혁의 권고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대를 동원하여 한성의 성문과 왕궁을 점검하는 겋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무쓰무네미쓰 외무대신에게 전해지며 이때부터 조선왕궁점령계획은 준비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일본의 개혁안을 거절하자 청국군의 철수와 함께 청조종속관계를 반영하는 조청간의 모든 조약의 파기를 조선정부에 요구하도록 하는 최후통첩이었다. 왕궁점령사건은 청일전쟁의 신호탄이당. 일본군은 조선정부로부터 청국군 축출에 대한 위임을 강압적으로 얻어내고 남진을 개시했다. 8월 1일 게이지천황은 대청 선전포고에 대한 관한 조칙을 내리고 또 전쟁은 만국공법에 입각하여 치러질 것임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전쟁기간 내내 조선의 독립을 전쟁수행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일본의 대청개전의 목적은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이를 열강으로부터 승인 받으려는데 있었던 것이다.무쓰무네미쓰는 조선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일본이 직접 간접으로 보전하고 나아가서 타국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인이 이를 방어한다는 정책안을 제출, 채택된다. 조선정부가 일본과 동맹을 맺도록 압력을 가해 대일본 대조선 양국맹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조선을 일본편에 설 것을 강요당하게 되고 친청적 행동은 물론 제 3국에 조정요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일본의 압도적인 우위속에서 전개되기는 했지만 열강의 간섭을 회피하며 강화조약이 조인된 후 러ㆍ블ㆍ독 3국 간섭이 일어났다. 3국은 일본에 대해 랴오둥반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청일전쟁의 의의는 조선의 독립을 청에 승인시킴으로 청의세력을 축출하고 일본의 지배권을 확립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형성하였다.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단축의 보호권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이를 국제사회에 공인시키려는 시도는 3국간섭이 상징하듯이 구미열강의 승인을 얻는 데에 실패하여 좌절되었기 때문이다.러일전쟁은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와 조선의 자주적 개혁 주장이 맞선 가운데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민씨정권이 무너지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제 1차 김홍집내각이 수립되고 7월 27일 개혁을 추진할 기관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어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일본은 일단 열강을 의식하여 적극적인 간여를 자제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원군이 동학군과 청군을 접촉한 사실을 들어 정계에서 은퇴시킨 후 11월 국왕을 알현하여 내정개혁 강령 20항을 제시 12월 군국기무처폐지, 박영효 등 친일내각의 핵심인물들이 발탁되었다. 이것이 제 2차 갑오개혁이라 한다. 개혁의 최대특징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기 쉽게 일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내려 한 점에 있다. 일본은 갑오개혁이 좌절되고 3국간섭으로 일본 위치가 약해지자 조선정부는 러시아 힘을 빌어 일본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명성왕후를 살해하므로 유학생과 동학농민군, 일반민중의 반일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원인은 명성왕후 암살에 대한 분노와 단발령이다. 3국간섭이래 러일사이의 대립은 아관파천후 일단 러시아의 승리로 귀착되었다.그후, ① 고무라-웨베르 각서(1896년 5월 14일) ② 야마가타-로바노프의 정서(1896년 6월 9일) ③ 로바노프와 민영환 사이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관 파견만을 수락 ④ 니시-로젠협정(1898년 4월 25일)고종은 1897년 2월만 1년 체재하던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을 외국과 평등한 국가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8월 연호를 광무로 하고 10월 즉위식을 열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열강의 이권침탈에 적극 저항하여 대한 제국의 자주독립과 권익을 수호하려고 출현한 것이 독립협회였다.청일전쟁이후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관계를 조명해보면 크게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표면적으로 불간섭정책을 내세우면서 내면에서는 정치, 경제적 이권 확대 정책이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고, 한국정부로서는 고종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근대 국가 만들기가 추진이 되나 근대국가의 방향성 설정에 있어서 오아실 중심의 한계가 노출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은 조선의 보호 국화를 최종목표로 착착 이권확대 정책을 추진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고종 19) 6월 9일 구식군대의 봉기로 일어난 병란.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이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일본·유럽·미국 등과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짐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에 제도개혁에 따른 의견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군제개편에 있어서 5영(五營)을 폐지하고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으로 폐합·축소하는 한편,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조직하자 5영 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전근대적 자급자족 경제체제가 무너지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씨척족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국고의 낭비 등 비정(秕政)으로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 목 차 】I. 서론 : 일본문화를 보는 시각1. 한국과 일본의 관련양상2. 일본문화란 무엇인가?3. 일본문화 이해의 목적II. 본론 : 일본문화의 특징1. 집단성2. 지역성3. 폐쇄성4. 중층성, 다양성5. 양면성6. 현세성III. 결론 : 일본문화 수용태도I. 서론 : 일본문화를 보는 시각1. 한국과 일본의 관련양상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반도국가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이들 주변 강대국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기본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이 주변국 중에서도 일본은 특수한 인접국이다. 지금까지의 한일관계사를 살펴보면 우호적인 인적, 물적교류의 시기가 없었던은 아니지만, 중세의 왜구, 근세의 임진왜란, 근대의 일제 식민지 지배등의 역사가 보여주듯 일본은 가해자?침략자로서 한국민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어왔다. 특히 일제시대에 한국민이 겪은 고통과 수치는 살아있는 역사로 한국인의 뇌리속에 각인되어 일본에 대한 강한 분노와 저항감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일관계사 속의 비극적 사건이 초래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또 다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우호관계를 맺어야하는 숙명과도 같은 관계를 지속해 왔다.현재 인접국 일본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 군사, 문화의 대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양국관계를 보면 한국경제는 일본과의 관계속에서 발전해 왔고, 근래 십여 년 동안에는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 군사, 학술, 문화 등의 제반분야로 양구의 교류가 확대되어 왔다.이와 같은 양국의 특수한 관계사와 밀접한 현실은 한국인에게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였고 역사인식이 잘못된 나라라는 부정적이니 이미지를 남겨 주었다. 동시에 일본은 경제대국으로서의 선진성과 친절, 질서의식이 몸에 배인 사회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여론조사때 마다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꼽히는 일본, 반면 일제는 믿을 수 있고 일본의 앞선 점은 배워야 한다는 식의 한국인의 이율배반적인 일본관 자체가 한일 관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2. 일본문화란 무엇인가?문화란, 세상이 진보되어 생활내용이 향상되는 것,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어떤 목적이나 생활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성과 즉 의식주, 생활양식, 기술, 학문, 예술, 정치, 제도 등의 총칭으로 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을 지칭한다고 정의하고 있다.문화는 포괄적인 인간의 모든 활동과 그 성과 특히 그 중에서도 정신적인 활동이나 그 소산을 말하고, 문명은 기술적, 물질적인 측면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일본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주체인 일본민족이 일본열도에서 행해 온 모든 활동과 그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본민족의 삶의 산물이고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3. 일본문화 이해의 목적문화연구의 목적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나아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명확히 알기 위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를 외국문화의 이해 차원으로 적용하면, 외국문화의 이해 차원으로 적용하면, 외국문화의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이를 통해 자국문화의 특성을 인식하고 나아가 야국문화의 보편적 특성을 발견해 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본문화에 관심을 갖고 알려는 근본적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문화의 이해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우리 한국문화를 재인식하고 개발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한일문화 교류시대에 일본문화의 구조파악을 통해 더욱 긴밀히 접촉해야 할 일본인, 일본문화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고 이와 다른 한국인, 한국문화의 특성을 살릴 수 있으며 보완할 수도 있다.다시 강조하면, 일본문화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한국사회나 한국문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문화가 발전하고, 그것이 일본문화에 자극이 되고 나아가 세계문화에 기여하는 상호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II. 본론 : 일본문화의 특징1. 집단성일본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섬나라로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고 살아왔다. 근대 이전에는 고려, 원의 일본침공이 있었지만 전투가 규슈 북부지역에 국한되었고, 일본전체가 이민족과의 전쟁터로 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바다로 둘러싸인 섬 안의 공간은 섬 밖과 명백히 구분된 일본인만의 세계를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지시켜주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일본민족의 폐쇄성과 집단성은 이와 같은 지정학적 요인에 의한 역사 발전과 깊은 관련 속에서 형성되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개인보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을 중요시하는 의식은, 집단의 단결과 질서 그리고 집단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회사형 인간으로 불리웠던 일본인에 의한 세계적 경제대국으로의 발전, 선진국 일본의 사회안정 등을 이루어낸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일본의 집단성을 들 수 있다.그렇지만, 이제 21세기는 개인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이것이 사회의 번영으로 이어지는 세계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집단성의 일본사회로는 개성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일본의 번영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사회는 갈등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일본사회의 안정과 단결을 가져다 준 집단성이 개성발휘와 새 문화창조의 시대에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지 주목되는 부분이다.2. 지역공동체성일본문화의 한 특색인 지역 공동체성은 집단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으며, 그 기반이 지역임을 잘 보여주는 있다. 집단성에서 언급된 것처럼, 일본은 높은 산과 바다로 격리되어 있어 각 지역이 분할되어 독자의 특성을 유지하여 왔다.이같은 지역의식은 마쓰리)를 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마쓰리의 내용도 각 촌락이나 지역의 신에 대한 보양축제에서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 지역 특산물에 관한 것등 다양한 특색을 보이는데, 점차 상실되어가는 지역공동체성의 강화, 지방자치의 활성화, 마쓰리의 관광상품화에 따른 경제적 이익 등으로 근대 이후 더욱 발달해 왔다.3. 폐쇄성섬나라 일본, 지역분할이 쉬운 지형적 요인, 외침이 거의 없었던 역사 등은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보다 강한 일본문화의 폐쇄성을 낳게 하였다.근대 이전의 일본 내의 각 지역을 보면, 독립된 하나의 세계처럼 타 지역에 대하여서는 닫혀진 사회를 만들어 왔다. 예를 들어 근세에 사쓰마(가고시마현)의 경우는 다른 藩과 다른 독자의 말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지역적 폐쇄성은 외부에 대하여는 닫힌 사회였지만, 반대로 내부적으로는 열린사회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와같은 예는 이에모트 중심의 유파, 직업집단, 지역집단은 각 집단의 폐쇄성을 유지한 채 더 큰 집단에 귀속되어 안정을 꾀하는데, 이들 집단의 가장 큰 테두리는 일본이라는 국가이다. 이러한 국가집단으로의 통합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사회의 특징이라 볼수 있다. 근대 일본은 지역분할적인 근세 봉건사회와 달리 천황을 정점으로 한 National-identity를 확립하여, 서구 세력에 대항하며, 일본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했다. 이는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이라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서구화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이념적, 정신적, 문화적으로는 외부와는 다른 일본민족만의 Identity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4. 중층성, 다양성일본인처럼 민감하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민족이 따로 없고, 또 일본인처럼 충실하게 옛 것을 보존하는 민족도 따로 없을 것이다. 일본은 옛 것이 다음 시대에 완전히 새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옛 것에 새 것이 덧붙여지는 문화라는 것이다.즉 일본은 고래부터의 토착문화와 일본화된 외래문화 그리고 외래문화가 공존하는 중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예를 들면, 토착세계관인 신도(伸道), 신불습합(伸?習合)등에 의한 불교의 일본화나 일본적인 주자학의 발달, 그리고 근대의 기독교와 사회주의 등이 오늘날에도 공존해 있다.5. 양면성일본인이나 일본문화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서적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다. 타이틀인 국화와 칼은 바로 일본인이나 일본문화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국화가 일본인의 미를 추구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친절하고, 축소지향적인 면을 나타낸다면, 칼은 날카롭고, 잔인하고, 합리적이고 대담한 확대지향적인 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양면성을 일상어로 흔히 쓰는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라는 말로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어떤 보편적 원칙, 외교적 수사, 극단적으로는 말이나 글로 표현된 것이 다테마에라면, 집단 내에서만 통하는 심정적 교감,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본심이 혼네라는 것이다. 이러한 혼네의 공유는 외부와의 구별, 집단의 폐쇄성을 조장하기도 한다. 드러나지 않은 서로의 혹은 집단의 혼네를 잘 헤아려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고, 역으로 그 만큼 외국인이 일본사회 속에 녹아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바로 혼네를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6. 현세성섬나라 일본에 고도로 조직화되고 세련된 외래의 초월적 세계관이 유입되었을 때 어떠한 경향이 나타났을까? 이에 가토 슈이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목 차 ??????????1. Prologue2. 일본의 미술문화1) 고대의 미술2) 불교와 중국의 영향3) 에도 시대의 미술4) 현대의 미술일본문화의 단편1) 어느 나라와도 사이좋게 지낸다?2) 경쟁과 체념의 이중성3. Epilogue1. Prologue여러 가지 요인들이 일본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기법과 미학적으로 일본 미술은 수세기에 걸쳐 중국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이들 중 일부는 한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 최근에는 서구의 기법과 예술적 가치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동화된 사고와 기법에서도 일본인의 독자적인 취향이 고유한 방법으로 표현되어 왔다.■ 고대의 미술 ■.. 일본 최초의 토착민인 조몬족 (繩文族) (BC 10,000∼BC 300년)은 ‘도구’라고 불리는 진흙 입상을 만들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여자의 모습을 빚은 것이었다. 기원 초에 그 기원이 다른 야요이족(彌生族)(BC 300∼AD 300년)들은 구리무기와 청동 종(鍾),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야요이 시대 이후인 고훈시대 (古墳時代 AD 300∼AD 710년) 의 공예품으로는 청동 거울과 무덤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하니와’(埴輪)라는 진흙원주가 있다. 야요이 시대의 도타쿠(銅鐸-종) 위에 새겨진 단순한 모양의 막대상과 코훈시대의 무덤내벽을 장식한 벽화는 일본회화의 기원이 되었다.■ 불교와 중국의 영향 ■..회화는 통치계급이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16세기에 번성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의 회화들은 중국의 6왕조시대(222∼589년)에 발달하였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부처의 일생이나 여러 불교신들을 묘사하고 있다.10세기 이후에 회화는 점차적으로 조도 신코(淨土信仰-정토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집권 계층의 추진으로 16세기후반과 17세기 초반에 걸쳐 사찰과수도원의 혼합적인 건물이 각지에 세워졌는데, 주목할 만한 곳으로 ‘아스카테라’(飛鳥寺), ‘시텐노지’(四天王寺)그린 ‘에마키’ (繪卷) 가 회화의 두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겐지 이야기’ (源氏物語 1130년에 출간)는 에마키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12세기 후반에는 무사계급으로 권력의 중심이 옮겨졌으나,여전히 귀족계급은 절과 신사의 운영자로서 부를 축적하고 다양한 예술 장르의 후원자로 남아있었다 . 가마쿠라 시대 (鎌倉時代 1185∼1333년)에는 무사계급의 기호에 맞는 사실주의와 귀족 계급의 미술적취향에 어울리는 보수주의가 2대 주류를 이루었다.사실주의는 조각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케이’학교(사실주의 조각)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던‘운케이’의 작품 중에는 ‘도다이지’ (東大寺)의 문에 새겨진 2개의 인왕신 조각상 과 2명의 인도현인 조각상, 고후쿠지(興福寺)의 ‘무차쿠’와 ‘세신’ 등이 있다.13세기에 유행하였던 선종은 다른 종파의 것과는 매우 상이한 건축과 미술작품을 소개했다. 14세기에는 두루마리화(畵)가 쇠퇴하고 ‘가마쿠라’와 ‘교토’의 유명한 선종 수도원에서 유래된 수묵화가 등장하였다. 선종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중국의‘성’(960∼1279년)과 ‘유안’(1279∼1368년)이 창시한 수묵 담채화를 선호했다. 1400년대 말엽에 선종 화가들과 교토의 후원자들은 ‘수이보쿠가’ (水墨畵)라고 불리는 수묵풍경화를 발전시켰다.선종 화가들 중‘셋슈’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회화를 공부하였다. 카노학교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카노 에이토쿠이다. 카노 학교는 그 영향력을 계속 확장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회화학원으로서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에도 시대의 중반에 활약한 ‘오가타 코린’은 ‘카노’ 의 화가로 재치 있는 구도와 귀족적인 구성으로 유명하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0∼1868년)의 미술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는 1600년에 집권하여 일본의 경제적 , 정치적인 안정과 평화를 확립하면서 계승되었다. 에도(江戶-동경)와 교토의 상인들은 막부정권 아래에서 부를 축적하여 점차 문화활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간에이(寬永 1624∼64적으로 정사(情事) 장면을 표현했다. ‘슌가’ 중에는 주석이 달린 그림책도 있었는데, 주로 머리를 감는 매춘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 이러한 장면에서 주로 초점이 되는 것은 매춘부들의 자세와 기모노를 걸친 모습 등이었다.후반기에 이르자 ‘우키요에’의 중심 활동은 교토 - 오사카 지역에서 에도 지역으로 옮겨갔으며,곳에서는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가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일반 서민들도 미인을 그린 ‘우키요에’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18세기 후반까지‘우키요에’는 황금기를 누렸다. 토리 기요나가의 작품에 나타난 키가 크고 우아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1780년대 주요 테마였다. 1790년 이후에는 오늘날 유명해진 여러 화가들-기타가와 우타마로 , 토스사이 사라쿠, 가츠시카 호쿠사이, 안도 히로시게, 우타가와 구니요시-에 의해서 새로운 형식이 도입되어 급속히 전파되었다.유럽의 훌륭한 화가들을 포함한 19세기 후반의 여러 서구화가들에게 ‘ 우키요에’ 는 외국의 미술형태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에드가드가’ 와‘빈센트 반 고호’등의 화가들은‘우키요에’의 구도 양식과 원근화법, 그리고 색채의 사용법 등을 이용했다. 또한 이들은 서구 미술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자연을 주제로 사용하여 화가들의 주제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유리 세공가였던 에밀갈레는‘호쿠사이’의 물고기 스케치를 꽃병장식에 사용했다.메이지 시대 (明治時代 1868∼1912년) 의 도래와 정부의 서구화 정책에 따라 주제와 생명력으로 대중과 가까웠던‘우키요에’는 급속히 쇠퇴했다.한편, 에도시대 말엽에는 유럽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가 수가 증가하였다. 마루야마 오쿄, 마츠무라 고슌,이토 자쿠츠와 같은 주요 화가들은 일본과 중국, 서구 형식의 특징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현대의 미술 ■..일본 문화는 메이지 시대에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 이시기는 정부가 서구의 기술과 관념에 대해 연구하고 적당한 요소를 국가적 장점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현대화 작업의 과정 동안 서구형식의 회화들은 정부의인 해석력을 가지도록 일본적요소를 서구형식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일본 회화의 현대화는‘야스다 유키히코’와 ‘고바야시 고케이’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다른 여러 화가들은 대중적인 주제를 채택하고 잦은 전시회를 가짐으로서 일본스타일의 회화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자 노력했다. 해외로 유학을 떠났던 화가들이 일본으로 돌아왔던 20세기 초반에 서구 스타일의 조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어거스트 로댕’ 의 기법을 도입하여 일본 조각의 현대화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오기와라 모리에’가 있다.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조각가로는 뛰어난 시인으로서 예술에 대한 로댕의 견해를 번역했던 ‘다카무라 고타로’가 있다.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는 팝 음악, 추상예술, 미니멀 아트, 동태예술 등의 서구문화사조가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일본미술은 그 와중에서도 그들 나름의 독창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른 문화를 전통적으로 수용한 일본 화가들은 세계 미술시장에 독창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는데 대표적인 화가 두 명으로는, 1953 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1970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의 상징인‘타이요 노 토’(太陽の塔- 태양의 탑) 를 디자인했던 ‘오카모토 타로’ 와 에로티시즘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는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이케다 마스오’가 있다. 이케다는 또한,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덧붙여‘히라야마 이쿠오’는 환상적인 실크로드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을 주로 그렸던 ‘이와사키 치히로’ 는 아이들의 초상화로 호평을 받았다. 그녀의 그림 중 대부분은 화집에 그려졌으며 이러한 화집은10개 이상의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어느 나라와도 사이좋게 지낸다? ■일본인은 '명분'과 '실속'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을 갖고 있으며 결국에는 '실속'을 택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현실 감각은 사상이나 종교 같은 정신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이진주만에서 비열한 행위를 저질렀을 떄 혼을 내 줘서 그 뒤로 좀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본성은 그대로이니 좀더 혼을 내 주어야 하겠다.' 라고 할 만큼 격분했다.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터지자, 일본은 바로 구 소련과 기술이나 문화 교류까지 끊는 등 이란 사태 때와 달리 미국을 고분고분하게 따랐다.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강경 자세는 실제 이익에 아무런 해가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베트남 평화 운동을 지지할 때에는 한 세대 전에 벌인 핵무기 금지 운동에 못지 않게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베트남 피난민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었다. 돈이 안드는 이념 운동에는, 실리에 어긋나면 여러 구실을 내세워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일본이다.이처럼 말로만 하는 것에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행동을 하지만, 실리와 관계가 있으면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구는 행동 양식은 일본의 정치, 문화, 외교 정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 나라와 일본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들이 여태까지 잇따라 일어났다.구한국 말기에 우리의 선각자들은 같은 동양인으로서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개화에 성공한 일본을 우러러보았고, 또 믿음직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일본은 개화를 하면서 겉으로는 동양의 평화를 내세웠으며, 그것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은 한국의 독립, 떄로는 중국의 독립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속셈은 그 정반대였다. 그 때의 일본 수상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그 따위 나라의 독립이란 일본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열되고 미개한 상태로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롭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중국의 구 세력과 혁신 세력에 고루 돈을 대면서 서로 싸우도록 부추키면서 자기들 실속만 차렸고, 수지만 맞는다면 무역 회사를 통해 북한에게도 서슴없이 중요한 군수품을 팔아 먹었다.평화 헌법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일본 헌법 전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세계 여러 국민의 공정과 신의를 믿고,... 그 어느 나라와도 사이좋게 지낸다.....” 비인간적인 행위가 있더라도 그 나
■ 목 차 ■I.서 론2II.본 론31. 통신언어예절에서 벗어난 예32. 사회적인 언어훼손43.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생기는 문제점4III.결 론5IV.참고문헌5I. 서 론지난 2004년 10월 9일은 558돌 한글날이었다.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업적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로서 우리는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는 날이기도 하다.세계 민족 중에 자기언어만을 가진 나라는 몇 나라되질 않는다. 그리고, 한글처럼 과학적이고, 소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언어와는 다른 독창적이고, 뛰어난 언어가 있을까?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채팅’이 등장한 이후 ‘할룽, 방가, 고딩, 중딩, ~헸슴다’ 등 새로운 은어들이 나타났다. 처음 이러한 단어들을 접하게 되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제 이처럼 채팅 시에 사용하는 은어들이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구분없이 청소년들의 언어로 자리잡았다. 채팅뿐 아니라 휴대폰 문자메시지, 친구들과 주고받는 편지에도 맞춤법에 어긋난 글자들이 가득하다. 소리나는 대로, 더욱 간결하고 짧게, 애교스럽고 독특한 자신만의 은어로 개성을 살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은어들을 일상생활에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게 되면 나중엔 어떤 말이 표준말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민족의 사랑과 감정?전통이 담긴 우리말이 사라지는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 다양해져 혼란스러워진 청소년들의 언어파괴의 결과물인 은어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규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윗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통신의 발달과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은어처럼 발전한 통신언어의 심각성은 오늘, 어제에 문제가 아니었고 현재 우리사회에 이러한 무분별한 통신언어예절에서 벗어난 예를 들어보고, 그에 따른 잘못된 사용과 언어훼손을 조사하였다.II. 본 론1. 통신언어예절에서 벗어난 예1) 줄임말과 축약된 말들- 몰긋다(모르겠다), 글쿤(그렇군), 즐겜(즐거운 게임), 비번(비밀번호),아뒤(아이디), 게임방(겜방),- ㅊㅋㅊㅋ(축하해), ㄱㅅ(감사), ㅈㅅ(죄송하다는 뜻), ㅃ2(잘가, bye),금20000(그럼 이만), ㅍ(피), ㅁㅈㅁㅈ(마저마저), ㅇㅋㅂㄹ(오케바리),ㄱㄱ(스타트, 시작), ㅋㅋ,ㅎㅎ(키키, 하하), 심심타(심심하다는 말)줄임말, 축약된 말은 무수히 많은데, 비속어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 이모티콘의 등장- --^ 황당하다, (--)(__)(--) 꾸벅인사,- -_- 무표정, -_-; 난감한 표정, -_-a 딴청부리는 표정. -_-+ 화난 표정,-_-* 부끄럽다 (능글맞다), T_T ㅠ_ㅠ 우는 표정, @_@ 어리둥절한 표정,*_* 눈빛이 초롱초롱한 표정, =_= 눈이 부은 표정 (의구심이 가득찬 표정),^_^ 웃는 표정, ^_^; 머쓱한 표정, ^_= 윙크하는 표정다양한 이모티콘은 핸드폰 문자 메세지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이는 한정된 문자전송내용에 다양한 감정을 표현을 위해 창안되어진 것으로 보이고, 많은 채팅프로그램에서는 이모티콘을 그림과 함께 제공하는 실정이다.3) 비속어(은어)의 고착- 병신가튼, 저뇬, 씹혔다(무시당하다), 쭉빵(몸매가 늘씬하면서도 풍만하다)- 얼짱(얼굴이 잘생긴), 학주(학생주임 선생님) ,고딩(고등학생) ,대딩(대학생),졸라, 열라, 존나 (매우, 엄청), 깔, 여친, 남친(이성친구), 당근(당연)4) 종결어미의 변형과 문장완결성의 미흡- 뭔일?, ‘방가’, ‘궁금’, ‘죄송’, ‘부럽’- 즐~~~, 조용~~~,- 다감당 할수있음..., 밥먹은거 아님, 인사안해줘서 삐짐^^ , 번개해봤음?- 아니 왜감당을 못함??‘음소 보태기’란 예를 들어 ‘-다’를 ‘-당’ 또는 ‘-닷’으로 적는 방식이며,‘음소 바꾸기’는 주로 모음을 다른 소리로 바꾸는 것이다.5) 음독, 훈독, 상형, 맞춤법의 의도적 왜곡- 罪˚송˚罪˚송˚˚킼 ˚킼˚ 킼˚˚깝˚훼˚활˚떵˚♨˚라˚궤(죄송죄송 큭 큭큭 카페 활동 열나게(열심히) 할께요.)- 에긍, 할 末二 읍돠(에그 할말이 없다)- 앙얼뤼묜 아글 얼己ㅣ냥?(내가 안 올리면 누가 글 올리겠냐?)- 얼愛㉲뉰네욥! (오랜만 이네요!)- 릐해해 즐거쯰? (이해해 줄거지)- 란뇽 경희얕 ㉯ 느근듸 알까욬( 안녕 경희야! 나 누군지 알까요?)2. 사회적인 언어훼손서울특별시가 ‘Hi seoul’ ‘Green 청계천’과 같은 영어 광고물을 남발하고, 시내버스 도안에도 불필요한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3.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생기는 문제점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첫째, 한글을 배울 나이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둘째, 우리 한글의 바른 맞춤법을 모르게 될 수도 있다.셋째, 언어적 정체성을 잃을 염려가 있다.넷째, 외국인들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다섯째, 세대간의 문화적 괴리감이 형성된다.이와 같이 통신언어는 줄임말과 축약된 이니셜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하고 있었으며, 비속어(은어)가 상당히 자주 쓰이게 되고, 짧은 말로 종결어미의 변형과 문장완결성의 미흡함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소리나는대로 사용하면서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받침을 마구 훼손하며 사용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단순히 간결하게 쓰는 것이 간편하고, 재미있다고 해서 자주 쓰이게 되는 큰 원인으로 파악되었다.III. 결 론1997년 한글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세계의 언어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정보화 사회에서 유용한 문자로서 한글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정작 그 주인인 우리는 그 가치를 잊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