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관련 오도기사"굶주린 북한동포에게 식량을 보내야 한다!""지금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북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한편으로 북한 사회가 외부 세계에 닫혀있는 까닭이요, 다른 한편 북한 관련 정보들이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까닭이다. 북한 사회에 관련하여 무엇이 정확한 정보인지 확인하기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자면 올 수확기까지 식량 부족분은 30만톤(통일원)이라거나 70-80만톤(FAO)이라는 등의 차이가 존재한다. 더구나 북한이 금수산 기념궁전과 관련하여 지출한 규모에 대해서는 2천만 달러라는 설부터 3억 달러라는 설까지 큰 차이를 보여준다. 외부에 개방되지 않은 폐쇄사회인 탓에 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또한 왜곡된 정보들의 예를 들어보자. 지난 5월 31일 주요 언론들은 "북한군, 지원식량 탈취때 총기위협"이라는 커다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북한 군인들은 지난 21일 남포항에서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제공된 미국의 원조 옥수수 5천t을 탈취할 때 총기로 하역 인부들을 위협했다"고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가 31일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6월 2일자 기사는 외무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로마에 본부를 둔 WFP의 툰 미얏트 수송자재국장은 31일 북한군이 지원식량을 탈취해갔다는 포르투갈 일간지 보도를 확인하는 한국공관 관계자에게 'WFP 평양상주사무소로부터 유사사건에 대한 보고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는 조그만 기사를 내보낸다.비슷한 실례는 북한동포돕기 성금을 유용했다는 보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성북경찰서와 중부경찰서는 우연하게도(?) 6월말을 전후하는 아주 꼭 같은 시기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사무실 운영비, 행사비, 상근자 월급 등에 성금을 유용한 혐의를 잡고 수사중이며 압수수색도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러나 두어 달이 지나가는 지금까지 이런 혐의로 구속, 또는 입건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은 없다. 이와 관련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못된 반공의 날조극이었다"는 말이 진짜 '진실' 로서 통용되어 굳어지는 한, 북한 무장공비의 일가족 5명 학살만행과 '남조선 적화혁명' 기도에 대한 세인의 일차적인 관심은 묘하게 희석 될 우려가 있다. 그에 대한 관심이 "그 기사는 조작이었다는데…"하는 쪽으 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양보할 수 없는 생존논리의 둔화와 퇴색을 은연중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기사 는 정확한 취재보도였다"는 월간조선 10월호 기사는 끝까지 논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얼마전 의 특종으로 장안의 새로운 화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진영의 판문점 총격요청설 은 어처구니없는 우리의 남북관계와 정치 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묘약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이 또한 어떠한 정략적 구도 속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정보가 공개되고 언론을 타게 되었는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없는 대포를 있다고 했을까? 그러나 ‘군 수사당국’을 인용한 이 보도는 사실을 뒤집은 것이었다. 기사가 나가기 직전 군은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잠수함에 대포는 없다”고 확언했다. 당시 합참 정보본부장은 왜 대포를 싣고 오지 않았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은 “대포는 있었다”고 정반대로 기사를 틀었다. 그렇다면 이 ‘없는’ 대포를 ‘있다’고 보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남한에 침투한 북한의 잠수함에는 대포가 ‘있어야’ 기사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남침 가능성은 언제나 ‘높아야’하고, 북한의 대규모 지하공사는 ‘핵관련 시설이어야’하고, 불순세력은 우리 사회의 ‘곳곳에 숨어 있어야’ 한다. 어차피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하 민언련) 신문모니터분과가 98년 8월호에 발표한 “조선일보의 ‘국가안보상업주의’ 곡필과 오보 10선”을 보면 의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그중 ‘박홍 주사파 발언’ 보도의 경우를 보자. 94년 7월18일 청와대 오찬에서 서강대 박홍 분석’ 기사에서도 “급진세력의 투쟁전략전술 일환 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는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했다. 민언련의 이유경 간사는 “의 곡필과 오보는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해주던 냉전·비민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가 자신들의 이런 그릇된 행태에 대해 정열과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정상회담 통일방향 합의에 관한 `따져봅시다'(21일치 11면)를 읽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미래와 7천만 동포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다. 우리가 통일을 역사적인 일로 추진해야 하고 7천만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생각하고 통일비용을 고려해 볼 때 한쪽 체제의 붕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설령 붕괴한다 하더라도 일으켜 세워서 통일을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한 점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해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점진적인 방식도 있지만, 가능하다면 통일을 앞당기고 양쪽이 규정된 틀 속에서 서서히 동질감을 회복해 나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양쪽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 것은 서로가 두개의 정부를 인정한 것이고 흡수 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서로 다른 두개의 정부가 합쳐서 하나의 정부를 이루면서 그 속에서 두개의 체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북쪽의 연방제가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면 배척해야 겠지만 단순히 북쪽의 주장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사고는 버려야 한다. 국민적 합의와 주변정세를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통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지나친 신중론도 어렵게 얻은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 열기를 희석시킬 수 있다. 지난기사의 북한의 영변 지하공사가 핵관련 시설로 추정된다는 기사가 1면 톱이다. 정부는 즉각 “몇년째 흙만 파내고 있어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다”며 “핵관련 시설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런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설로 러시아 크렘린의 소식통을 인용, 「사실무근」이라고 보도함으로써 「대하소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소식통은 당시 『그간의 성씨관련 보도는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 그녀는 현재 서방이 아닌 북한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서 요원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성혜림 오보」가 한국언론사에 지울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정정, 사과기사를 낸 언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성혜림 오보」는 언론이 얼마나 선정주의와 상업주의에 목을 매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해프닝이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보도와 함께 한 신문이 대응 댐 건설을 주장했고 이에 발맞춰 정부가 평화의 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 평화의 댐건설을 위해 전 국민적 모금운동을 펼친 끝에 총 661억 원이 모아졌는데 당시 국민들의 충격과 호응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93년 6월 감사원의 감사 결과, 수공 위험성이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이 확인되었고, 아이들의 코묻은 돈까지 성금모금에 열을 올린 정부에 분노하는 몇몇 국민이 전대통령을 사기혐의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의 영변 지하공사가 핵관련 시설로 추정된다는 기사가 1면 톱이다. 정부는 즉각 “몇년째 흙만 파내고 있어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다”며 “핵관련 시설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런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설로 경수로 지원 논의의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이르자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은 “외국보도는 믿고 제나라 장관 말은 믿지 않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소동은 북한이 지하시설 사찰을 허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잠잠해졌다. 월간조선 10월호는 68년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때 평창군 용평 면에 살던 나이 어린 소년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 다가 공비에게 살해당했다는 본보기사(68년 12월 11일자)가 정확한 보도 였음을 취재, 게재했다. 그 논거로 월간조선 기사는 유일한 생존자인 승 복군 "선거 때 흔히 내세우던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해 또다시 정보기관과 언론이 합작해 북한관련 정보를 고의로 유포하는 것이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적된 것이 95년 6월2일 거의 모든 일간지 1면에 실린 '평양 주민 1백만명 이주설' 이다. 북한이 3백 50만명으로 급증한 평양인구를 2백50만명 선으로 억제하고 체제 불만 세력을 격리하기 위해, 성분 불량자와 농촌연고자 등 백만명을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는 것이 보도의 골자였다. 이 보도는 정보출처가 평양축전에 다녀온 관광객, 해외동포 등의 전언에 한정돼 있다는 점,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 보도를 전후래 외신에 관련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 보도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점 등에서 그 진실성에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 관련 오보는 잘못된 관급 보도나 외신에 의존해서 나온 오보, 기자 개인 또는 언론사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에서 나온 오보, 공산권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현지 취재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으로 현지의 " ~라 하더라" 하는 이른바 '카더라 방송'을 그대로 인용한 데서 나온 오보, '무식하면 용감하다' 는 우스갯소리처럼 기자 개인이 북한 사정을 잘 몰라서 내는 오보들 그 원인도 다양하다. 이중 선거 같은 민감한 사안이 걸려 있을 때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로 국정원 산하 북한 전문 통신사인 내외통신을 이른바 전략기사를 만들어 각 언론사에 배포하거나, 국정원이나 통일원 간부가 직접 나서 관련 정보를 슬쩍 흘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평양 주민 1백만명 강제 이주설은 그 정형을 매우 충실하게 따른 보도라 할 수 있다. 이 보도는 지난 95년 6월2일자 가 대서특필한 것으로 국정원 책임자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슬쩍 흘린 첩보 수준의 정보를 기자들이 요구해 기사화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의한 오보의 폐해도 만만치 않다. 94년 6월2일 보도는 우성호 피랍 사건을 다루
※현대사상의 이해지리의 허구성과 허구의 진실성니체의 탈현대적 언어이해1. 니체의 도전과 포스트모더니즘니체가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한 지 이미 한 세기가 지나간 현시점에서 허무주의는 이미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표출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허무즈의는 오늘날 “일상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흰히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꼬리표를 붙이는 프랑스의 사상가들, 예를 들면 바스트, 바타이유, 블랑쇼,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은 모두 글읽고 글쓰는 방식에 있어 니체에 의존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니체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떤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인가? 그리고 세기전환기에 표출되고 있는 새로운 정신적 불투명성을 극복하는데 니체의 도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니체는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항능ㄹ 제시하였는가? 이 물음은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기전환기의 문화현상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신적 태도를 지칭하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니테의 허무주의가 진리의 해체, 절대적가치의 탈가치화라는 부정적 현상만 아니라 진리의 다원성을 철저하게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현대화를 야기하고 촉진시킨 것은 바로 분화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는 “전체가 진리이다”라는 전통적 세계이해에 대해 “부분이 진리이다”라는 명제를 대립시킨다. 친화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한 허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다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체와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전체를 실체화하지 않고서도 통일성을 사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포스트모던적 사유의 화두를 이룬다. 니체의 허무주의에 관한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성적중심적 계몽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하버마스는 니체가 미래지향적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전현대적 전통으로 희귀하고 있다고 주장하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합의한다. 역사적 이성의 사다리를 이용하여 근원으로 되돌아가지만, 이성의 타자라는 신화에 도달하면 이 이성의 사다리를 던져 버린다고 하버마스는 비판한다.탈현대적 삶을 규정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상실된 이야기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전체의 해체를 직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실된 전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는 다원성이다. 니체를 비판하는 하버마스 역시 현대의 특성이 다원성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다원성으로 말미암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있는 길을 합의에 이르는 합리적 담론에서 찾는다. 이성의 문제점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는 하버마스와는 달리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예술뿐이라고 확신한다. 허무주의 시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 즉 인간이 의미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였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전통적으로 통용되어 왔던 학문과 예술, 진리와 허구의 관계를 전도시켜 예술이 학문에 선행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니체가 해명하고자 하는 학문-예술-삶, 진리-허구-의미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학문과 예술에 관한 전통적 견해를 거부한다. 니체는 학문과 예술이 모두 삶의 표현이라고 이해랄 뿐만 아니라 양자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학문과 예술의 동근원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것은 “언어”라고 말한다. 언어에 관한 니체의 견해는 학문과 예술의 관계를 규정하는데 핵심적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삶의 의미에 관한 탈현대적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허무주의적 삶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잣대는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고, 또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만약 진리의 다원성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다른 형태의 삶읽기와 글쓰기 방식이 필요하다. 니체의 언어이해와 예술이해에 함축되어 있는 탈현대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개진함으로써 허무주의 극복의 실마리어로써 세계를 판단한다. 근본족으로 학문과 예술을 모두 인간의 세계이해 방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문이 세계에 대처하는 인간의 특정한 방식이라면, 예술도 역시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특정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학문과 예술이 비록 방법적 수단과 서술형식의 선택에 있어 차이가 있을지라도 근복적으로는 ‘동일한 토대’위에 서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니체는 우선 학문과 예쑬을 “삷의 증후”로 파악한다. 니체는 증후라는 낱말을 세계 내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와 세계에 대처하는 인간의 이해방식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도덕, 학문, 예술 등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결핍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허구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맥락에서 보면 학문과 예술의 이원론 마저도, 다시말해 진리와 허구의 분리마저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삶의 본질은 선악의 피안에서 찾아야 하며, 진리와 허위가 구분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선 삶의 원초적 방식이 “권력에의 의지”이며 두번째로 니체는 전통적 진리이론인 대응성을 해체함으로써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체론적 견해를 부정한다. 끝으로 니체는 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전제하였던 “해석”을 인간에 의한 의미창조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인간의 실존방식 자체가 해석임을 해명한다. 인간은 실존의 보존을 위해 이성과 인식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는데, 결국 인식에 의해 기만당하여 존재와 진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된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전통형이상학의 진리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철학은 진리를 “지성과 사태의 일치”로 파악한다. 니체는 이명제에서 지성과 사태의본질이 이미 자명한 사실로서 전제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니체는 “주체와 객체와 같이 절대적으로 상이한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인과성, 정당성, (대응적) 표현도 없으며, 기껏해야 예술적 태도만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인식주체와 객체를 특는 통상적 예술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예술이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만들어 놓은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행위는 인식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이 분명하다.3. 언어의 이중성 : 의식의 언어와 신체의 언어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언어는 한편으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권력의지의 산물이며, 동시게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사소통 수단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와 같은 언어의 이중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언어의 발생과정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지성의 주된 힘은 기만을 통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언어도 역시 자신의 본질을 왜곡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폭로한다. 언어는 근복적으로 비유로부터 발생한다. 니체의 이 주장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비유는 통상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학적 표현방법의 한 가지로서 인식된다. 언어 자체가 근복적으로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것이다. 비유는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니체는 언어의 힘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언어는 자연상태로부터 문화상태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진리의 언어는 사회적인것을 개별적인 것, 유일한 것보다 더욱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언어는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우 허구와 이상을 만들어 내고, 이 이상은 삶의 규칙을 부여하는 진리를 창조한다. 이 진리가 새로운 삶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하여 언어가 가지고 있는 비유적 능력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학문과 예술, 개념과 비유, 담론과 직관은 모두 “삶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라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니체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인간의신체이며, 신체와 연관된 인식능력과 언어이다. 니체는 바로 의식의 언어가 신체의 언어를 지배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식에 근거하고 있다. 진실성은 허구가 진리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 즉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를 진실성으로 대체하는 니체의 관점에서 탈현대적 글읽기와 글쓰기의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다양한 진리들에 대해 유일하게 구속력있는 공통지평은 자신의 진리가 허구의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진실성”뿐이다. 언어는 세계이해에 있어 한편으로는 포괄적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물질성 때문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를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에 의한 합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만 언어자체가 의사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발행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니체는 언어의 생성과정에는 ‘무의식적 예술’의 수단이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언어 속에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권력의지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권력의지의 표현이라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권력의 요소를 뽑아내는 수사학은 다름아닌 언어의 본질이라고 니체는 강조한다. 니체는 아포리즘을 “다른 모든 사람이 하나의 책에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것”이라고 정의한다. 대상지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가지고 대상으로 고정될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바로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한편으로 진리의 근원이 허구라는 허무주의적 인식에 근거한다. 그러나 니체는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로운 가치창조의 단초로 삼는다.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설정한 허구를 진리로서 고정시키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문제를 이미 해체되어 버린 전체성과 통일성을 복원함으로써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의 삶에 맞갖는 다른 형태의 이상과 허구를 필요로 한다. 과학과 기술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대적 실존을 구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