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70년대의 경제 성장 >< 목 차 >□ 머리말I. 1960년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정책1. 국가주도의 개발체제(1) 경제개발계획의 수립(2) 1ㆍ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2. 대외개방체제와 차관경제(1) 한일국교정상화 일본자본의 진출(2) 베트남파병 월남특수경기(3) 차관경제와 수출제일주의II. 1970년대 경제성장1. 중화학 공업의 추진(1) 재정?금융?조세지원(2) 사회간접지본 확충(3) 중화학제품 수입규제2. 중화학공업화의 성과(1) 주요경제지표(2) 공업구조의 변화(3) 무역구조의 변화Ⅲ.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 - 긍정적인 성과점□ 맺음말□ 머리말4월 혁명 이후 민중은 독재를 청산하여 민주화를 이룩하고 민족 분단을 해소하고자 노력하였다. 통일 운동은 분단 체제를 떠받쳐 온 반공 이데올로기를 차츰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반공의 그늘에서 안주해 왔던 세력들은 통일 운동이 확산되는 데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한편,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인도 ? 인도네시아 등 여러 신생 독립 국가들은 미국 등 강대국의 간섭을 거부하며 비동맹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국은 자기 나라의 군사비 부담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대외정책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로스토우를 비롯한 학자와 관리들이 이론으로 체계화한 ‘경제근대화론’을 이용하였다. 로스토우는 모든 사회는 ‘전통 사회→과도 사회→도약 과정의 사회→공업화한 성숙 사회→고도의 대량 소비 사회’로 발전하는데, 한국 같은 과도 사회와 도약 과정에 있는 사회가 근대화를 하려면 국가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므로 가장 잘 조직된 군부가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미국은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반공 전초 기지로 강화하고 일본을 자신의 대리자로 삼는 한 ? 미 ? 일 삼각 안보 체제를 이룩하려 하였다. 미국은 한국에 안정되고 강력한 반공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랐고 그 정부를 통해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시키려 하였다. 때문에 4월 혁명이 일어난 뒤-292.0-402.8-221.0-198.6-250.6수출(경상,100만달러)54.886.8119.1175.1253.7수입(경상,100만달러)421.8560.3405.0450.0673.0출처 : 역사학연구소,『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2004, p360.제1차 5개년계획에서 국민총생산의 연 평균 목표 성장률은 7.1%였으나 실제에 있어서 8.5%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계획 실시 이전의 5년간의 연 평균 성장률 5.4%에 비하여 3.1%가 높은 것이었다. 계획 기간 중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0년대의 82.60달러에서 1966년에는 126달러로 증가하여 연 평균 5.6%의 증가율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산업구조는 기준연도인 1960년에 1차 산업이 35.2%, 2차 산업이 19.2%, 3차 산업이 45.6%였던 것이 1966년에는 1차 산업이 31.7%, 2차 산업이 25.7%, 3차 산업이 42.6%로 바뀌었다. 즉 1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비중이 감소된 반면에 2차 산업의 비중이 커졌던 것이다. 이것은 광공업 등 2차 산업의 성장이 제1차 5개년계획의 높은 성장률을 주도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표2〉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적 ※1975년 달러 기준연도경제지표(단위)*************97019711967~71(평균)1인당 국민총생산(1975년달러기준)32*************경제성장률(%)6.611.313.87.69.49.7국민저축률(%)10.812.115.514.113.213.1산업구조(%)농림수산업37.534.233.230.428.8광공업15.116.717.519.520.9사회간접자본 기타47.449.149.350.150.3경상수지(만불)-191.9-440.3-548.6-622.5-847.5수출(경상,100만달러)3354866588821,132수입(경상,100만달러)9091,3221,6501,8042,178출처 :역사학연구소,『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2004, p361.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년∼1971년)권문제와 관련된 한국의 요구에 대하여 법률관계와 증거관계가 불명확하다고 하면서 요구를 묵살함에 따라 1961년 10월의 제6차 회담까지 현저한 대립만 보인 채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위해 외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대일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굴욕적 저자세로 대일회담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의 외상 오히라 사이의 회담에서 청구문제에 관한 기본원칙이 합의되었다.그 합의내용을 보면, 한국의 대일청구 명분은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이 아니고 약취해간 한국재산의 반환도 아닌 청구권의 해결 및 경제협력이었다. 일본이 제공하는 외자규모는 무상으로 3억 달러(10년간 분할지급), 정부간 차관으로 2억 달러, 민간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유상 3억 달러를 제외하면 3억 달러에 불과한 셈이다. 그 후 한국 국민의 강력한 반발과 민정이양 등 불안정한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협정체결의 구체적인 작업은 1965년까지 지연되다가 민간차관 자금을 2억 달러 증액시키고 어업협력자금으로 9천만 달러, 선박청구권문제 해결에 따른 선박관계 자금으로 3천만 달러를 공여하는 선에서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고 한일간 국교도 정상화되었다.한일국교 체결 이후 일본자본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전후 한국전쟁의 특수(特需)를 기초로 하여 부활 도약한 일본제국주의는 과잉자본의 배출구를 다시 한국에서 활보할 수 있었다. 일본은 1964년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고, 1966년 아시아 태평양각료이사회(ASPAC)ㆍ아시아개발은행을 발족시켜 자본수출의 기구를 정비하였다. 일본의 ‘경제협력’과 차관제공이 과잉유휴자본을 배출하면서 한일간 수직적 분업관계 형성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발간된 〈한일경제조사보고서〉에서 잘 나타난다.소득수준이 낮고 노동력이 풍부한 저개발국에서는 노동집약산업진흥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이 경우, 이러한 유형의 노동집약적 산업의 관세도 면제해주었다.1960년대 후반 수출은 이러한 국가독점적인 지원조치에 힘입어 급격히 증대하였다. 제2차5개년경제개발계획 기간중(1967~71년) 수출은 경상달러가격 기준으로 연평균 35% 증가하여 1971년의 수출규모는 11억 3,200만 달러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수출이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증가되었으며 수출 중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율도 크게 증대되었다.그러나 1963~1968년 동안 평균 8~9%의 높은 성장률을 거듭하던 한국경제는 1969년부터 불황 국면에 들어갔다. 불황은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이던 경공업 제품이 팔리지 않은 데 원인이 있었다. 차관으로 외국에서 자금과 원료를 들여와 낮은 임금의 노동력으로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단순가공무역형 공업구조가 위기에 빠졌다. 단순가공무역형 공업구조를 유지하려면 낮은 임금의 풍부한 노동력이 계속 공급되어야 하며, 수출을 위한 국제무역 환경이 좋아야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는 낮은 임금의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실질임금이 빠르게 상승했다. 또 수출을 위한 국제무역 환경도 나빠졌다. 세계경제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성장이 둔화되었고, 일본과 유럽경제가 성장하여 미국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 구조가 무너지면서 각국은 보호무역을 강화했다. 여기에다 동남아 국가들도 한국에 뒤이어 수출지향형 경공업 제품 생산에 나서게 되었다.정부는 처음에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환율인상이나 금리인하(1971.6), ‘물가경기 및 국제수지대책’(1972.4)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969년 뒤의 경제위기는 1960년대 종속적 자본축적 구조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조치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불황은 국민경제 전체를 침체시키는 구조적 불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외국에서 빌려온 자금과 원료를 가지고 상품을 만들어 외국시장에 판매해 왔던 한국자본주의는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긴축을 비롯한 정부의 여러 정책은 기업의 자금난을 더 압박하여 위이 차지하는 비중은 80~90%에 달했는데, 국민투자 기금 가운데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67.9%에 달했다. 또 대체로 매년 그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냈다.③ 중화학 공업에 대한 특혜대출중화학 공업화를 위해 국민투자기금 등을 통한 재정지원 뿐만 아니라 산업지원자금 형식의 금융지원도 행해졌는데, 이는 산업은행의 제조업에 대한 대출자금 중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비중은 1973년 71.3%였다가, 1976년에는 86.9%로 졍점에 이르렀고,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선 1979년에는 75.8%로 떨어졌으나 1980년에 다시 82.6%로 높아졌다. 그리고 산업은행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총대출액은 1973년~80년 사이에 1조 2,302억원에 달했다. 이것은 제조업 전체에 대한 총 대출액의 80%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금융지원이 중화학공업에 대해 매우 특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④ 개발금융기관의 기능강화중화학공업의 장기투자자본과 정책금융의 주요 제공자로서 한국산업은행)의 역할이 매우 컸다. 산업은행은 예금은행과 달리 대출재원을 예금에 의존하지 않고 국제금융기관이나 외국은행으로부터 차입과 채권발행을 통해 조달했는데, 이 자금은 장기 산업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의 총 시설재투자에 대한 대출 비율을 보면 1960년대 중반에 감소하던 것이 1972년에 40.3%로 상승했으며, 1975년과 1979년에 각각 44.7%, 49.6%로 상승세를 보이게 된다. 이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지원증가로 인한 것이며, 중화학공업의 성장정책과 함께 상승세를 보이게 된 것이었다. 이외에도 한국 수출입은행과 한국토지금고의 설립을 통해서도 금융지원을 도왔다.⑤ 외자도입과 할당우리나의 외자도입은 1,2차 석유파동을 거치고, 제 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작과 중화학공업화의 본격적인 진전에 의해 그 규모가 크게 증가되었다. 외자도입액은 1970년의 23억 달러에서 1975년에 85억 달러, 1978년에는단된다.
제국주의와 남성성)1. 들어가는 말2. 식민지의 영국인 : 로서의 남성성3. 타자의 몸 : 인종, 성, 계급의 교차점4. 제국의 선봉에 선 5. 성적 착취와 영국 제국주의6. 퍼블릭 스쿨과 남성성7. 영국 신사되기 : 『위대한 유산』8. 나오는 말1. 들어가는 말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즉위 기간 대영제국은 강력한 정책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넓혀갔다. 이 시기 영국은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넓히기 위해 전 세계에 상선을 보내어 교역을 촉구했다. 영국이 교역 국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특히 인도에 주목했던 것은 인도가 소유하고 있었던 향신료의 희소가치 때문이었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맨체스터 등의 도시에서 방적 공장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좀 더 값싸게 원료(면화)를 공급하기 위해 인도에 주목한 것이다.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영국은 인도를 단순한 교역 국가가 아닌 식민 국가로 지배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관계를 각인시켜야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한 지배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남성성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 글은 제국주의 시기 남성성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으며, 이를 통해 신사란 개념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말하고자 한다.2. 식민지의 영국인 : 18세기 중엽부터 이루어진 영국의 인도 지배는 경제적인 착취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사람들 간의 문화적 ? 사회적 관계는 원만한 모습을 유지했다. 영국은 식민 정책의 방향을 원주민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로 설정했으며, 우호정책의 일환으로 유럽 남성과 원주민 여성들과의 성적 관계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 같이 타협적 노선을 취하던 영국의 식민 정책은 19세기에 이르러 변화를 보인다. 영국과 인도간의 문화 교류는 일방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었으며, 강화된 정치적 규제들은 인도인들의 삶에 압박을 주었다. 영국의 식민 정책이 변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선 기독교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식민착취를 강인한 남성성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본래 그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내면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던 사람이 관객이 열광 하면서 실제로 나폴레옹이 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즉 식민지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의 강인한 남성성은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바뀌어 갔으며 인도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인종, 성별 사회 위계질서 등을 구축하는 기준이 되었다.3. 타자의 몸 : 인종, 성, 계급의 교차점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영국은 이상화된 남성상을 만들어냈으나, 이는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철저히 대타성을 통해 정형화된 것이다. 대타성의 형성은 식민지인과 영국인의 몸의 대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영국인에 반대되는 식민지인의 모습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국주의 위계질서에서 백인 남성 지도자를 최고의 자리로 올리기 위해 동원한 방법은 식민지인의 열등한 몸을 부각 시키는 것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기형적 신체를 가진 야만인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백인들 중에는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 전시되었지만, 유색인종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들을 구경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몸을 매개로 하여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영국인이 식민지인과 자신들의 몸을 별개로 생각하는 내면에는 인종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인종주의는 신체를 연구하는 생물학 인종주의와 집단 간의 차이에 주목하는 사회적 인종주의로 나뉘어 진다. 근대 인종주의의 출발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였으나, 20세기를 거치면서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주장했던 과학적 근거가 오류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19세기를 기점으로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에는 비유럽인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요소가 문화적 원을 정당화하는 밑받침이 되었고, 신대륙 발견 후 유럽에서는 원주민을 원숭이와 비교하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며, 원숭이의 특성과 유사한 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굳이 원숭이를 예로 든 것은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지만 인간에 비해 열등한 짐승인 것처럼 원주민 역시 자신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인종을 구분하는데 쓰였던 다른 방법은 그들 간의 체질의 차이를 통한 것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들은 원주민들의 몸이 백인과 비교해 열등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환경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몸은 무감각하고, 몸 자체는 문명을 습득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주장은 열등한 몸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과 동시에 노예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제국주의 시기 유럽과 비유럽, 백인과 식민지인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몸이 사용되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계급과 성별이 추가되면서 타자라는 개념이 재정립 되고 있다. 유럽은 비유럽이라는 바깥세상의 타자와 유럽내부의 타자 즉 전통적인 소외집단의 이미지를 교차시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다. 유럽내부의 타자는 유대인과 같은 열등한 종족이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에는 스코틀랜드인을 열등한 종족으로 간주했다. 즉 비유럽 국가의 인종과 비교해 정립된 정체성이 유럽 내부에도 적용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또 다른 타자의 전형적인 모습은 여성이었다. 고대부터 여성은 소외집단으로 간주되었으나, 18세기에 들어서 열등한 존재로 부각되었고, 19세기 의학의 발달로 인한 성적 차이의 강조로 인해 남성과 본질적으로 차이를 보인다고 간주되었다. 즉 유럽인들은 비유럽국가에서 사용했던 방식을 유럽 내부에 적용해 종족을 구별하고,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구별된 종족과 여성을 통합시켜 열등한 집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들의 새로운 주체성을 확립시켰다.유럽은 자신들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식민지인의 열등한 몸을 부각시켰으나, 자신들의 몸에 대해서는 한없이 우강화해야 한다는 정책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인도에서 폭동이 있을 때마다 폭동이 발생한 이유보다 영국 여성이 희생 되었다는 보도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영국 남성들은 다양한 문학 작품들 속에서 기사도를 갖춘 영웅이었으며, 그들은 침략자가 아니라 영국 여성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신사였다. 이들에 대한 이미지 우상화로 인해 많은 남성들이 인도 항쟁 당시 희생당했다는 현실은 감추어졌다. 이는 희생자로서의 남성의 이미지를 지우고 보다 강한 남성의 모습을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도항쟁은 영국 정부에 의해 독립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영국의 여성을 공격하는 하나의 폭동으로 바뀌게 되었다.인도 항쟁은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들에게 훌륭한 소재를 제공해주는 원천이었다. 많은 소설들 가운데 주목해볼 소설은 윌키 콜린스의 『문스톤』이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영국의 작은 시골에도 인도의 위협이 다가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문스톤이란 보석은 인도에서 신을 상징하는 황소의 이마에 붙어 있던 다이아몬드로, 한 영국인이 문스톤을 훔치는 것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문스톤은 인도의 위험을 상징하는 보석이었으며 이를 소유하게 된 레이첼은 위험에 처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보석을 약탈한 존 헌캐슬은 죽음을 맞이하고 조카인 레이첼 베린더의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보석을 레이첼에게 전달한다. 주인공은 레이첼이며 언뜻 보기에 한 소녀의 성장 소설로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이첼을 보호하는 영국 남성의 역할이다. 소설의 결말부분에서 레이첼이 결혼을 하고, 보석은 인도인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레이첼이 모험심이 강한 소녀였지만 남성의 보호 없이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이며, 결국에는 결혼을 통해 집안의 천사로 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석이 인도인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인도가 독립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소설의 전체 내용은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기보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상태가 원활하게 지속되니라 인종주의와 젠더,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계급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사례로 남아프리카 광산지대에서 나타났던 ‘소년마누라’ 현상을 들 수 있다. 이 소년 마누라들은 단지 성별만 남자였을 뿐 아내의 모든 역할을 수행했다. 이 소년마누라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혼란을 전혀 겪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제국주의 틀에서 그들은 당연히 젠더적 여성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흑인에 대한 백인의 성적 착취는 생물학적인 성별보다는 인종적 구분이 더 중요했던 제국주의의 섹슈얼리티의 특징을 보여준다.위와 같이 원주민과의 성적 접촉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태도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변화되었다. 1860년부터 고급관리와 장교들을 중심으로 원주민 여성을 첩으로 두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20세기 초반에는 하급 관리와 병사에게로 확대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으로 1857년 인도 항쟁 이후 영국이 시행한 피지배인과의 거리두기 정책을 들 수 있다. 또한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영국에서 인도로 많은 여성들이 도착했고 새로운 보수적 인종주의가 등장했다. 제국의 약화를 두려워한 정부는 기존의 관계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다. 19세기 후반 영국은 식민지국에서의 금욕적 태도 유지를 각인시켰기 때문에 성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염병 예방법’을 만들어서 매춘 여성뿐만 아니라 영국의 일반 도시에도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성을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으나 전염병 예방법을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크게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력한 ‘순결 캠페인’도 등장했다. 이제 모든 성적인 것이 감시와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19세기 후반 영국 사회내의 성관련 정책(태도)의 변화는 식민지 정책의 변화 - 거리두기 정책에 기인한다.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저인 질서유지를 위해 식민지인들과의 성 접촉은 금기시되고, 피치 못 할 경우 축첩보다는 상업적 매춘이 선호되는 등, 성에 대한 궁극적인 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성적 에너지의 ‘절제’.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조지 카치아피카스)1. 머리말2.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3. 1968년의 사회 운동들1). 구정공세와 포코이론2). 학생운동3). 신좌파와 1968년 5월의 프랑스4). 미국의 신좌파4.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5. 맺음말1. 머리말1968년을 전후하여 전세계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사회운동들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5월 총파업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반전시위가 일어났으며,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멕시코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며, 스페인에서는 학생들의 시위대열에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파키스탄, 일본, 라틴아메리카 등제에서도 기존의 체제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회운동들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혁명의 주체세력인 신좌파가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 운동이 무엇을 창출하고 염원하였는지는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투쟁의 목적이 무엇이었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현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다.이러한 작업을 위해 2장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신좌파의 목적과 사상적 기반을 살펴보고3장에서 목적 실행을 위한 투쟁이 실제 어떻게 전개되었나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서 이러한 투쟁이 현대 우리사회에 무엇을 남겼나를 알아볼 것이다.2.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역사적으로 위기와 혼란이 전 세계적 규모로 발생했던 시기는 드물다. 프랑스혁명 이후 1968년의 운동들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1848년)의 유럽혁명과 1905 ~ 1917년) 러시아혁명 정도이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적 봉기들이 자율적으로 발생하였고 기존의 질서를 거부한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폭동과 저항의 연쇄 반응 속에서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들은 이념과 지향의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대중, 프랑스에서의 각성된 혁명적 좌익세력, 제3세계의 혁명세력 등을 포함하고 있다.이러한 세력집단에 의해 전개된 신좌파 운동은 성격면에서 기존 마르크스 - 레닌주의 철학의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틀을 벗어나 오히려 네오 마르크시즘)에 접근하고 있다. 즉, 후기 산업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전면적인 문화혁명을 강조하며, 행동에 의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상 정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가 규정한 혁명 주체세력으로서의 노동자를 현대 서구사회에서 안주하며, 심각한 소외를 망각하고 풍요로운 소비에 마취되어 행복을 느끼며, 물질숭배에 빠져버린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자신의 계급의식이나 역사의식을 망각한 채 현실의 소비생활에 매달려 현실만이 최선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1차원 인간들이 지배하는 1차원적 사회의 1차원성을 타파하고, 거부하려는 새로운 대변인층을 지식인 계급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이와 같이 신좌파 운동은 좌파의 핵심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노동자를 배제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은 단지 과거의 꿈에 머무르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원지인 공장이나 거리의 바리케이트 대신 신좌파운동의 대결장은 대학 캠퍼스와 정치적 집회장으로 탈바꿈되었던 것이다.하지만 신좌파 사상은 결국 파괴적 성향을 띠게 되어 무정부주의적인 허무주의에 빠져버렸다. 학생시위가 폭력과 파괴를 수단으로 모든 것을 거부 내지 전복하려는 열정과 환상적 기대로만 치닫게 되자, 이에 반발하고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은 비협조와 무관심의 두터운 벽을 쌓았다.서구 산업사회 속에서 태동한 신좌파 운동이 결국 좌절과 허탈감, 환멸 속에 빠져들게 되자 세계혁명의 돌파구를 찾아 후진 자본주의국가 또는 제3세계로 유입되었다. 후진 자본주의국가에 이식된 신좌파 운동 역시 점진적인 사회 개혁의 방향보다는 기존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변혁을 위한 혁명을 위장하고 있는 게 오늘의 신좌파 운동의 실체이기도 하다.1968년에 폭발한 신좌파의 상상주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터키에서는 연좌 농성과 보이코트, 그리고 경찰과의 전투적 대치상황이 벌어졌고, 세네갈의 다카르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경찰들의 공격을 받아 3일 동안 시가전이 벌어졌다.학생들이 전개한 운동은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는데, 일상생활에 대한 자각을 전세계적으로 촉진시켰다. 소비주의에 대한 순응, 여성 억압,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에 의문을 가지고, 기존의 현실과 가치에 대비되는 전세계적 열망을 일치 단결시켰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국제적 사건들이 1968년의 학생운동을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왜 국제적이었던 것일까? 그것을 저자는 제3차 산업혁명과 생산의 전세계화라는 맥락에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 경제와 세계 경제가 상호 침투하여, 전세계적인 생산 체제의 중심에 대학과 학생들이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지적 노동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재통합 시키는데서 일어난 거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1968년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운동의 최선두에 학생들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이해관계가 세계의 기존 체제에서 억압받고 있던 사람들의 요구와 일치함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운동이 연계되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도화선이 된 총파업은 현존의 가치 체계들을 초월하고, 일상적 생활방식부터 변혁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구정공세와 포코이론 그리고 학생운동은 신좌파 운동을 전지구적 현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신좌파는 전지구적 문화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프랑스의 1968년 5월 총파업과 미국의 1970년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신좌파의 전지구적 문화 창출을 위한 투쟁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를 알아보자.3). 신좌파와 1968년 5월의 프랑스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하여 벌인 대규모의 운동은 칸대학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학생 시위가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분개한 힘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노동자들과 학생의 연합은 단절되었으며, 이는 혁명의 실패요인으로 작용하였다.신좌파는 노동자들과 연합하여 5월 혁명을 이끌었으며, 정치혁명으로 실패하였지만, 그 실패가 신좌파의 정신을 소멸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결과적으로 신좌파는 탈집중화, 문화적 다양성, 민주주의 과정 존중 및 권리의 확대, 실천성, 권위주의 대한 저항 등을 추구하였다. 이런 신좌파의 열망은 그들이 외쳤던 “민중에게 권력을”,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이와 동시에 혁명의 의미는 일상생활에서의 권력 문제를 포함하는 데에까지 확장됐으며, 혁명의 목표는 권력과 자원의 탈집중화와 자주관리 (self- management)가 되었다. 요컨대 자주관리는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생산을 계속 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자 원했던 프랑스 노동자들은 열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현대적 산업과 생산의 분절화가 등장하게 되자 다양한 경영인들이 생산장치의 필수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5월의 사건은 그것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4). 미국의 신좌파1970년 5월 미국에서 대규모의 학생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블랙 팬더 당원의 몇몇이 재판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시위에서 출발하였고,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번졌다.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을 중지할 것과 반정부 조직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학생들의 봉기는 거리봉쇄, 대학점거, 가두시위 등으로 나타났고, 학생뿐만 아니라 흑인과 노동자들도 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에서 연설자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총파업을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중들의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캄보디아 침공은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전역에 총파업을 불러 일으켰다. 캄보디아 침공은 전쟁 종식을 원하는 사람과 캠퍼스 봉기를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양극화시켰다. 전쟁의 종식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각 대학에서는 현대화 프로그램에 착수하였다. 캠퍼스 내에 개혁조치를 취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였다. ‘대학조정위원회’와 같은 위원회를 통하여 권력구조를 합리화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강화시켰다. 대학은 시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경찰과 검사와 결합하였으며, 법률을 제정하였다. 기업권력가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하여 노동조건을 노동자들에게 맞춰주었고, 노동자들과의 대립상황을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기업가들이 이러한 정책을 시행할수록 노동자 봉기는 안정적으로 변해갔고, 기업의 이윤과 생산성은 높아졌다. 그리고 미군은 1970년 군사 봉기의 교훈으로 펜타곤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베트남 전쟁의 장군들에게 높은 직책을 맡겼다.미국 경제는 갈수록 쇠퇴하였고, 국가의 기업 의존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초국적 기업은 거대 상업은행과 결합하여 전지구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통제하였고, 민주주의는 점차로 줄어들었다.미국의 학생과 노동자, 군대 집단에서 일어난 운동들은 결국 실패하였고, 국가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4. 신좌파의 정치적 유산지금까지 1968년 5월 프랑스와 1970년 5월 미국을 중심으로 신좌파의 투쟁이 어떻게 전개 되었는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1968년 사회운동들이 현대 사회에 남긴 영향은 무엇일까?1960년대 이래로 이루어진 수많은 법률적 개혁과 문화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국제 관계를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 구조를 변혁해 바꿔 나가며, 질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축하려는 신좌파의 열망은, 기아 상태가 증가하고 군국주의가 자라나며, 새롭게 유혈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는 유토피아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미국 내 소수 집단과 여성들의 전반적인 경제적 상황은 1968년 이래로 거의 개선되지 않았으며 전체 흑인 가족들 중의 1/4 이상이 연방 정부 차원에서 결정된 최저 빈곤선 이하의 소득만을 얻고 있고, 여성이 가장인 빈곤 가정의 수는 계속
유럽 낭만주의의 정신- H.G. 쉔크 -§ 목 차 §1. 머리말2. 낭만주의의 출발3. 희망의 상정4. 과거에 대한 향수 및 예언5. 종교와의 재통합 추구6. 낭만주의의 병 - 허무주의의 전반적인 성격6-1. 죽음의 추구6-2. 신에 대한 반항과 종교적 좌절6-3. 원시로의 회귀7. 신의 재상정(감성적 기독교 신앙)8. 낭만주의의 매혹8-1. 음악8-2. 낭만적 사랑과 우정9. 맺음말1. 머리말여지껏 우리는 낭만주의를 기사 문학의 영움담, 기괴하거나 독창적인 표현, 자유로운 형식을 선호하는 예술사조로 인식하고 그것들을 그저 아름답고 달콤한 모습으로 당시 사회 전반을 풍미했던 하나의 사상으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단순히 미화된 감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 존재하는 낭만주의 인사들의 다양한 각도에서 나타난 의식, 그에 따른 표출 방법 등이 혼재한 결코 간단히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낭만주의는 수천년간 이어져 온 서구의 의식세계를 뿌리부터 뒤흔든 혁명적인 사상이었으며 타인의 이상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관용과 이해의 사상이었으며, 계몽주의 시대 이성의 권위에 반기를 든 운동이었다.쉔크 박사는 주로 낭만주의 운동을 정통 기독교의 쇠퇴와 그에 따라 생겨난 정신적 피폐화를 벗어나기 위한 절망적 추구로 압축하고 이것이 어떤 때는 허무주의로, 어떤 때는 기독교로의 복귀로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 어떤 때에는 그 둘 사이의 고뇌에 찬 방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우리는 낭만주의 운동을 종교에 초점을 두어 그 흐름을 파악한 뒤, 세부적인 낭만주의의 성격을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2. 낭만주의의 출발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시대 이성의 절대적인 권위에 반기를 든 운동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고 강조했고, 사물의 영원불변하는 구조와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 중심의 갇힌 생활에서 자신의 의지로 종교를 판단하8세기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는 그 때까지도 프랑스 혁명의 근기에서 최고조에 달할 정도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혁명 초기의 낭만주의 세대는 이처럼 진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이것은 낭만주의와 혁명의 두 운동이 열정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데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세 가지의 혁명 슬로건 ‘자유, 평등, 박애’ 중 가장 자극적인 것이었는데, 이것은 초기 낭만주의의 ‘주관’ 이라는 점과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정치적 자유가 성취되어서 논쟁이 자유로운 사회는 인위적 제약으로 구속당하는 어떠한 유형의 문학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명분이 있는 자유가 프랑스에서 발판을 마련하게 되자 낭만주의자들은 혁명이 진보라는 의견에 대한 완전한 신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낭만주의자들의 실망은 이러한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들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권력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데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정치적 상황은 낭만주의자들의 기대감과는 달리 전혀 고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재와 부패한 행정부의 부도덕의 극치에 치달았다.4. 과거에 대한 향수 및 예언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흔히 과거를 그리워하며 이따금씩 그 과거에 안주하고자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적 성격 중 하나다.과거에 대한 낭만주의의 향수가 끼치는 영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정신적 불안과 식어가는 신앙의 시대에 경건하게 중세의 기독교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각 국가가 자기들이 정치적, 문화적 전성기에 도달했을 때를 되돌아보게 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과거의 엘리트 계급에 속해있던 사람들이나 별다른 개인적 동기가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기사도와 봉건주의의 시대가 지나감을 한탄할 수 있다.낭만주의자들의 향수는 그 대상이 중세로 맞추어졌다. 보통의 경우 중세는 암흑의 시기로 칭해지거나, 혹은 고대의 문명의 태동과 새로운 각성의 시대 사이에 있었던 수면의 시기로 문화의 통일성을 붕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1800년경에는 경제학이 자신의 법칙 이외의 어떠한 법에도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도구, 물건, 기계, 재산’으로 여기는 체제를 저주하게 되면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물질로 추락시켰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사회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것은 정치적인 혁명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사회적 인간에게 활력을 주는 것은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진 종교를 하나로 묶자는 논의가 나오게 되지만 결코 하나로 통합되지는 못한다.6. 낭만주의의 병 - 허무주의의 전반적인 성격사실 많은 낭만주의자들이 어떤 경우, 한 번 이상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허무주의란 것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 이란 뜻에서 나온 니힐리즘(nihilism) 이란 단어를 니체의 용어를 쫓아 우리들은 허무주의라고 정의하는 데 익숙해 있다.일단 허무주의의 한 편에는 절망적 허무주의가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다시 나뉘게 되는데, 모든 주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생에는 어떠한 의의도 없다고 규정하여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모든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쪽이 그것이다.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를 무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삶과 자유에의 길을 모색하는 방향을 연구하는 부류로서, 실존주의는 원래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낭만주의의 과거에 대한 가장 불길한 면모는 역사를 종교의 대치물로 삼으려는 경향에 있었다. ‘만약 과거가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면...’이란 의견이 간주될 경우 인간의 정신은 과거의 위안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내세의 천국의 행복을 얻는 희망에는 거의 집착하지 않을 위험이 확실해진다. 동시에 영혼이 가진 초월적 기독교 개념은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순전히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개념으로 대치되게 된다. 모든 진리와 신앙에 대한 부정. 허무주의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무주의자들의 특징을 분류해 살펴본다.6 - 1. 죽음의 추구사실 ‘허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전적인 희망부재나 어떤 신앙의 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허무주의자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면, 죽음을 추구한 이들은 공허함 그 자체를 믿었다. 허무주의자들이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면, 죽음을 추구한 이들은 삶으로부터의 철저한 해탈을 갈망했다. 신앙과 희망은 더 이상 현세나 내세의 생에 집착할 수 없으니, 모든 형태의 생명의 부정으로 인식되는 죽음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죽음에 대한 갈망의 예는 수없이 많다.“세상은 과거를 피곤해 하여 :이제 제발 죽음과 안식을 주소서!”)분명 낭만주의 운동을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많은 낭만주의자들의 요절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요절이 보편적인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요절의 원인으로 생의 고달픔만을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감정이 극단적인 경우에만 드러나는 생과 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견해의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6 - 2. 신에 대한 반항과 종교적 좌절신을 따르거나 신을 거절하거나 이 둘은 모두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인간적 특성이며 그 기원은 인간의 타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이전에는 이 두 현상이 뒤얽혀 있었던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전에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이 양면의 혼재가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노출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기독교 출현 이후 처음으로 18세기는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 기독교가 두드러지게 약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삶과 죽음이 의미를 잃어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낭만주의의 갈망은 종교적 좌절로 이어진다. 종교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무능이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 둘의 불협화음을 비판하기까지 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종교사상들 중 하나인 것이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아래에 있었다.그러나 이들 중에서 그러한 심리를 반항적으로 표출하여 신을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런 존재도 아니며,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들의 욕망은 최후의 환상을 깨뜨려도 완전하고 철저한 절망만이 남을 뿐, 현실은 비참할 뿐이다.이러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연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의 인생은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것이며 미래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은 권태를 느끼지 않는 짧은 순간에서 제공된다. 자연은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공허함이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때의 마지막 비상구였다.“쓰디쓴 인생 - 무미건조함,인생은 그것 이상도 아니다.지구는 흙덩어리일 뿐이야.“)이런 자연의 도피적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자연에게서 느끼는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고 점차 그 자연을 찾아다니게 되었다.워즈워드의 경우 산보가라고 불릴 만큼 산책을 즐겼는데 이것은 일상생활에 자연을 좀 더 가깝게 끌어들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매일 매일 떠돌면서평화롭게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곳으로.“)이 구절에서 워즈워드가 자연에게서 평온함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고,“자연으로부터 정서가 오며평화의 느낌은 역시 자연의 선물이고이것은 자연의 영광이요이 두 특성이 저연의 힘을 구성하는 한 쌍의 뿔이지요.”)이 구절에서는 자연숭배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일부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다가오는 자연을 낭만주의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도피처로서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예찬하였다.7. 신의 재상정 (감성적 기독교 신앙)흔히 ‘종교의 부재’는 불가피하게 현재의 문명을 몰락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주 점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안중에 들어오며, 다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온다, 다음이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인식의 발생이다.’ 라는 논리로 기독교의 내세관을 강조했다.그러나 이러한 딱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의 기독교 부흥을 위한 노력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띤다. 그 중 “경이의 부흥”은 가끔 낭만주의 운동의 바로 그 본질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
REPORT지역별 인간의 기본권리 보장과복지제도의 발달사- 스페인 -§ 목차 §Ⅰ. 머리말Ⅱ. 스페인 헌법의 역사Ⅲ. 신헌법의 기본권과 복지제도Ⅳ. 맺음말Ⅰ. 머리말스페인은 B.C 3세기부터 A.D 5세기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8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약 8세기 동안은 이슬람세력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국토회복전쟁 끝에 비로소 스페인이라는 국가가 성립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스페인은 일찍이 가톨릭의 힘이 매우 컸으며, 이는 가톨릭과 군주권을 옹호하는 보수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의 끊임없는 대립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국민들의 기본권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할 때마다 점진적으로 나아져 갔다.나는 스페인의 인간의 기본권리 보장과 복지제도의 발달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스페인의 역사 속에서 헌법이 언제, 어떻게 제정되었고, 또 거기서 나타나는 인간의 기본권리가 무엇인지 알아본 다음, 현재의 복지제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스페인 헌법의 역사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였을 때, 스페인 민중들은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스페인 남부 카디스에서 의회를 열어 1812년 3월에 10장 384조로 된 카디스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의 전통과 법령을 규범으로 하여, 형태 면에서는 1791년의 프랑스 헌법을 모방?축소한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주권 보장과 권력 분립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입헌군주 헌법이다. 이것은 모든 힘이 국민에게 있으며, 왕은 의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전까지의 절대왕정제와 대응되는 법이었다. 카디스 헌법에서는 영주의 특권과 검열제도 등을 폐지하고, 간접 보통선거를 실시한다는 점도 명시되어 있다.이 법으로 인해 귀족과 성직자 위주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과의 대립과 반목은 더욱 심각해졌다. 절대왕정체제가 다시 돌아오면 까디스 헌법이 무시되었고, 또 다시 자유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획득하면, 까디스 헌법이 부활되는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었다.1868년, 이사벨 2세가 프랑스로 도주하면서, 급진 자유주의자인 프림 장군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제1차 임시정부는 일련의 법령을 통하여 노동조합의 결성 허용, 신앙과 교육의 자유, 보통선거의 실시 및 헌정 의회 소집을 약속했다. 선거를 통해 헌정의회를 구성했는데, 여기에는 급진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온건 전통주의자 등 그 구성원이 매우 다양하여 헌법의 심의과정에서 정부의 형태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문제로 많은 대립이 있었다. 급진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공화주의자들은 종교의 자유와 국가로부터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고, 온건 및 전통주의자들은 국가와 종교의 통합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마침내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이 모아져 1869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주권재민, 3권 분립의 민주 군주제를 주요 내용으로 했는데, 이 헌법에는 인권의 보장과 거주, 집회, 결사, 출판, 교육 및 종교의 자유가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보통선거의 실시와 함께, 입법권이 선거에 의해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된 의회에 부여되었다.하지만 이러한 제1공화정은 11개월만에 알폰소 12세의 왕정 복고로 끝이 났다. 입헌군주제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1869년의 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다. 1876년에 새로 제정된 헌법은 1845년의 헌법과 1869년의 민주헌법을 각각 절충하여 모든 헌법에서 독소조항만을 개정했다. 이 헌법에는 주권이 의회와 왕에게 있다고 규정하는 입헌 군주제가 제시되었다. 왕은 의회와 함께 입법권, 법령의 재가와 거부권, 의회의 소집 및 해산권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새로 제정된 헌법은 왕자가 어려서 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의회가 섭정에 개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하고, 이전까지 교회에서 행해지던 교육의 세속화와 표현, 결사의 자유를 인정했다.1923년 바르셀로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러한 과정에서 카탈루냐의 총사령관이었던 쁘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실시하였다. 이때 1876년의 헌법을 중지시키고 국회를 폐쇄하였다. 그는 군대와 교회, 군주제의 복구를 위해 군사 검열제를 만들고 노동조합을 불법화시켰다.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이 닥쳤을 때 대중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고 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잦은 충돌이 일어나자, 그는 검열을 없애고 파업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1931년 4월 선거에서는 자유입헌주의자들이 승리함으로써 제2공화정이 만들어졌다. 12월에 새 법안을 승인하여 스페인은 ‘모든 계층의 노동자들의 민주공화국’임이 선포되었다.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스페인은 교회가 군림하는 가톨릭 국가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 명시되었다. 교회와 단절됨과 동시에 학교에서 행하던 종교 교육도 금해졌다. 1932년, 농경개혁법의 실시로 사회주의 모델을 따라 농민들에게 땅이 재분배되었다.1933년 선거에서는 우파가 다수 표를 획득하였지만, 내각을 구성하기에는 부족하여 중도연합을 구성했다. 그리고 1936년 선거에서는 좌파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7월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1947년의 선거를 통해 프랑코는 국교로서 가톨릭을 선택하였고, 그의 독재는 계속되었다. 1953년, 바티칸과의 종교협약을 통해서 가톨릭을 스페인의 유일한 종교라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955년 유엔에 가입하게 되면서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회보장제도가 많은 노동자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의료혜택과 주택보조금, 대학교육 등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종교자유법이, 1969년에는 출판법이 승인되었다.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후안 까를로스 1세가 집권하게 되었다. 프랑코 죽음 이후 10년 동안 스페인은 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이 계속 진행되었다. 1977년 6월 총선거에서 정치개혁법안이 통과되면서 모든 정당들이 합법화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78년 신헌법은 12월 6일의 국민투표에서 찬성 88%로 통과되었다.Ⅲ. 스페인 신헌법의 기본권과 복지제도1978년 제정된 신헌법에는 스페인의 정치형태를 입헌군주제 및 민주적 법치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제 1조를 살펴보면, 스페인은 자유, 정의, 평등을 가치로 주장하는 나라를 구성하며, 국가의 주권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속해있으며, 국가의 권력은 국민들에게서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와 관련한 제 10조에서는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의 고유를 침해할 수 없는 권리, 개성의 자유가 사회 안정의 기초이며,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의 상대적인 규범들은 세계인권선언과 국제협약 그리고 스페인 정부가 비준한 협의사항들에 따라 해석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서 스페인 국민은 자유, 정의, 평등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기본권을 획득하고 있다.제 7조에서는 프랑코가 무시했던 노동조합에 헌법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노조와 고용업주의 조합은 그들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이득의 보호와 그들의 항의와 그들의 활동의 발휘는 헌법과 법률이 지키는 범위내에서 자유로운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내부적 구조와 운영이 민주적이어야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서 스페인의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불만사항을 노조를 조직하여 자유롭게 표현하고 대항할 수 있다.제 38조에서는 스페인 정부가 사회적, 경제적, 법적으로 가정의 보호를 보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태생과 친모의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법앞에 평등한 아이들의 완전한 보호를 보증하며,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미성년자로 있는 동안은 모든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제 41조는 사회적 도움과, 사회적 도움이 필요할 때 충분한 사회적 봉사를 보증할 모든 시민들에게 사회적 보장제도를 유지할 것이며, 실업시에는 보완적인 원조와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스페인의 실업보험제도는 1961년에 도입되어 시행되었다. 대상은 보험가입자로 급여자격은 최소 18개월 가입자이며, 실업급여는 6개월간 지속되며, 최대 5년 가입자의 경우 최고 2년간 급여하고 있다. 스페인은 신헌법 제정 이후 실업보험제도에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을 추가하여 사회보험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스페인은 신헌법 제 40조에서 노동자 보호를 위해 전문적인 직업 훈련과 재적응을 보장하는 정책을 촉진하고, 직장 안전과 위생을 보장하며, 하루 업무 시간의 제한과 정기 휴가등을 통해 필요한 휴식을 보장하고 있다.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은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은 사회정책의 우선 순위를 고용에 두었으며, 현금지원과 사회적 지원 외에 복지 수혜자가 노동시장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노동시장 복귀’를 꾀하였다. 스페인 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고용 관련법을 개정하여 고용관련 규제의 완화를 추구하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퇴직금을 2/3 수준으로 낮추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기업에는 사회보장성 부담금을 완화해주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특히, 1997년에는 노사간 타협을 통해 18세~29세 청년실업자와 45세 이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기업에게는 2년간 사회보장 부담을 40~60%가량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스페인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생긴 150만개의 일자리 중 76%가 정규직에서 창출될 정도로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