佯務運動의 性格1861년 신유정변에 의해 서태후,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권이 성립된 이후, 1894년 청일전쟁까지를 일반적으로 양무운동 시기라 부른다. 이 운동은 태평천국을 비롯한 5,60년대의 여러 민중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으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한 청조가 자강 과 부강 을 표방하면서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 근대산업의 육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1860년 영·프 연합군의 북경공격은 청조정부에게는 일찍이 겪지 못한 위기였다. 황제는 열하로 몽진하고 원명원은 소실되었으며 북경은 영·프 연합군의 손에 장악되었다. 황제로부터 사태의 수습을 명받고 북경에 남은 공친왕은 연합군과 접촉하여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는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청조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을 북경에 상주시키고 11개소의 조약 항을 추가로 개방하였으며, 기독교의 포교권을 허용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신유정변으로 인해 새로운 정권은 함풍제의 두 황후인 동태후와 서태후를 섭정으로 하고 공친왕이 의정왕과 군기대신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공친왕은 내부의 도전을 진압한 후 외부의 도전에 대처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건의에 바탕을 두고 구미 국가들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할 총리아문 이 1961년 봄 설립되고 공친왕 및 대학사 겸 군기대신인 계량, 군기대신 겸 호부좌시랑인 문상 등이 총서대신으로 임명되었다.대외관계에서 안정을 찾은 청조는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의 근대적인 무기를 도입하였고 영국으로부터 군함의 도입을 계획하였고 전장에서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신속히 공급할 목적으로 이들 무기를 직접 제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로써 1870년대 후반까지 거의 모든 반란이 진압되었다.일반적으로 양무파로 지칭되는 양무운동의 핵심적인 추진세력은 중앙의 공친왕과 문상, 지방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일군의 관료집단이었다. 하지만 중앙의 세력의 정치적 지위는 강하지 못하여 공친왕은 결국 1884년 청·프전쟁의 발발과 함께 탄핵을 받아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앙 정부 내에서 양무운동 추진세력이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던 반면 민중 운동으로 붕괴된 청조의 지배체제를 재건하고 지방통치를 안정시키며 일련의 양무정책을 적극 추진한 세력은 태평천국난을 계기로 성장한 지방관료세력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등이다. 양무운동에서 이들 지방관료세력은 청조의 지배체제의 재건의 실질적인 초석이었으며 붕괴되는 왕조지배질서를 일시적이나마 회복할 수 있게 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방적 세력으로 머물고 중앙권력을 장악하여 근대화를 위한 통일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하게 되었다.티평천국의 진압과정에서 청조의 관료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서양식 총포류의 강력한 성능이었다. 그래서 1865년 이홍장에 의해 강남제조총국이 설립됨으로써 본격적인 군수공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강남제조총국에서는 총포 외 수뢰·탄약류, 군함과 각종 철강제 등이 생산되었다.태평천국의 진압에 해군의 필요성을 느낀 청조는 영국으로부터 군함을 구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직접 군함을 건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영국과 독일에서 여러 척의 군함을 구입하여 해군을 창설하였으나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1894년 일본과의 해전에서 쉽게 패배하게 되었다.1842년 남경조약으로 인해 5개항이 개항되고 내륙의 운하수송이 외국에 허용되면서 상인들의 전통적인 사선무역은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이를 주요운송 수단으로 삼아온 조량운송에도 곤란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정부와 상인들은 관상합판 기업을 설립하였으나 실패하고 관독상판방식을 취하여 윤선초상국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1850년대 말에서 1860년대에 걸쳐 개항장이 증가하고 외국기선의 왕래가 잦아지고 상해 등지의 개항장에 공장이 들어섬에 따라, 그 연료로써 석탄의 수요가 증가하여, 1870년대에 이르면 석탄의 사용량 또한 급격히 증가하여 16만 톤 가까이 이르게 된다. 석탄의 대부분은 수입되었는데 원활한 수급을 위해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면방직공업 또한 근대면업의 본격적인 발전을 맞게 된다.양무운동기에 추진된 근대적인 교통, 통신관계의 사업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전보국의 설립과 철도의 부설이다. 전신설의 가설은 자체가 청조의 군사적·행정적인 필요성과 합치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또한 대외무역의 활성화와 관련, 상인들의 요구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미 1870년대 초에 부설된 런던-상해간의 해저전선과 연결됨으로써 생사, 차 등의 무역에서 효율성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중국경제의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의 가속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의 철도의 부설은 풍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많이 부진하였다.양무운동시기에 창설된 대다수의 관독상판기업들은 초상국, 개평광무국 등 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유는 전문화되어야 할 기업경영에 관이 개입함으로서 부패와 비능률을 초래하고 상인자본을 침탈하여 관료의 사적인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근대적인 공업의 발전은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해체를 동반하여 진행되며 또한 그것은 중국경제의 세계경제로의 편입과 종속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결국 양무운동시기의 공업화의 실패의 원인은 관독상판 이라는 제도적인 차원이나 기업 내부의 관료와 상인의 관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청말의 경제구조 전반을 고찰함으로써 해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變法運動과 立憲運動변법과 입헌운동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고 있었던 혁명운동과 대비되는 청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구식 정치제도(의회제, 헌법)의 도입을 목표로 한 개혁운동이었다. 이는 양무운동을 잇는 자강운동의 후반단계라고도 하겠다.변법운동이 제기된 원인으로는 첫째, 대외적 위기 상황(대만사건, 청일전쟁, 청불전쟁)에서의 굴욕적 타협으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자각된 상황이었음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정관응의 반양무적 내지 변법론적 입장이 관독상판 형태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던데서도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통한 부강추구에 양무기업이 비호율적이라는 인식도 변법론으로의 추이에 작용하였음을 들 수 있다.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파탄이라는 인식으로 직결되었고, 전쟁 후의 여러 열강의 영토할양 요구에서 비롯된 망국 , 망종 , 과분 의 위기의식과 더불어 기존의 양무식 근대화 노선은 파탄되었다는 인식의 확대에서 바로 변법론이 하나의 운동으로 전화될 소지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이에 강유위는 제1차 상서로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합의제 심의기관으로서 훈의지관 을 신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로써 그의 정치활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호남성에서의 개혁은 전체변법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우선, 호남성은 지방적 차원에서는 유일하다시피한 실제 개혁운동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의 개혁운동이 단기간에, 그것도 대부분의 계획이 실천에 옮겨질 겨를이 없이 좌절된데 반하여 2~3년간이라는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실천에 옮겨질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개혁운동의 이론적 기반이나 인적 구성으로 볼 때 중앙에서의 개혁시도와 상당부분 동일한 성격의 것이면서 때로 중앙에서의 경우보다 더 급진적인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한편 중앙에서는 태후의 동의를 얻어 황제가 상유를 내려 무술개혁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전면적 개혁 추진체의 마련은 되지 않았고 수구파 대신을 처벌하도록 하면서 수구세력과 정면대결의 자세를 보이게 되었고, 제도국 개설 방향으로 접어들었다.한편 황제는 유명무실한 관료기구의 철폐, 무근전의 개설, 곧 전면적인 개혁추진체의 마련을 추진하였고, 이는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세력의 결집을 불러왔다.변법파에 대한 공격 내용 중 이들의 민주, 민권, 평등론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고 또 강유위가 황제에의 접근 전망이 불투명하던 5차 상서 때까지도 의회제 개설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던 사실등에서도 이들의 입헌군주제적 지향이 중요한 정치적 목표이자 동시에 수구파의 공격을 야기한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공자개제론이다. 중앙에서의 개혁운동의 목표는 군권의 능동적인 행사를 통해 개혁추진체를 마련하는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강유위 등은 전세계가 공교의 이상향인 대동적 평등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 우선 중국의 자존, 자립을 목표로 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변법파의 공자개제적 개혁이론이라든가 의회제적 지향에서 파생된 민권, 평등론 등이 수구파에 의해 확대 해석되어 백일개혁기 이전부터 이미 개혁운동에 대한 광범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인해 무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정변은 기본적으로 개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수구파의 이해관계상, 또 그들의 공자개제적 개혁론 및 민권 평등론과 연계된 의회제적 지향에 대한 저항에 기인한 것이었다.그리하여 8월 4일부터 서태후를 정점으로 한 수구파 집권당국의 역쿠데타로, 광서제가 연금되는 실질적인 정변이 개시되고 이등의 소견이 끝난 이후 6일에 훈정재재, 강유위 체포령 등이 선고되고 개혁기에 없앴던 용관의 복구, 사민상서의 철폐, 사묘의 학당전용 중지, 팔고문체 복구 등 개혁조치를 원상복구함으로써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정변으로 인해 개혁운동가들에게는 암흑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신축화의를 맺은 후 가장 수구적인 집권당국자 서태후로서도 어떤 형태로든 서구식 개혁을 하지 않을 채 조법묵수만을 고집하다가는 제국주의의 세계분할경쟁이라는 국제질서내에서 중국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조는 마지막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다. 개혁으로 팔고가 다시 폐지되고 과거제 자체가 폐지되었으며 신식학교 설립되어 과거제의 기능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군대를 육군부에 귀속케하여 병권집중화를 도모하고, 화폐통일을 시도하여 재정처를 설립하고 량·원을 표준으로 한 은본위제를 차례로 채택하여 재정집권를 도모하였다.
敎案 과 義化團중국근대사의 전개에서 교안(敎案)과 의화단운동은 전개된 시기와 지역이 길고 넓을 뿐 아니라 중국근대의 모든 역사주체를 직접·간접으로 포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더욱이 외국세력의 침략에 대한 봉건(封建) 체제에 대한 민중적 극복의 시도로 평가되어 온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과 함께 중국 근대민중운동사의 중심적 연구대상이기도 하다.당시 선교사들은 서구인으로는 중국의 사정에 비교적 밝았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본국의 대중국정책에 직접·간접으로 연관을 맺었다. 이러던 중 1844년 중미의 망하조약(望廈條約)과 중불의 황포조약(黃 條約)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교회 건립과 청정부의 교회보호 의무가 규정되었다. 프랑스는 특히 카톨릭 선교의 법적 지위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프랑스가 영국과는 달리 중구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희박하다는 취약점을 정치적 관계의 강화로 메꾸려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카톨릭 선교 사업의 보호자를 자임하고 나선 것은 종교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고려에서였다.선교사의 내지활돌은 지방관을 비롯한 중국 관신(官紳)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끝내 1856년 광서 서림에서 한 프랑스 선교사가 지방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중영전쟁에 참여해 북경조약에서 기독교 선교의 여러 특권을 얻어냈다.내지선교의 인정은 기독교세력 확장의 외적 조건일 뿐 아니라 각지에서 선교사 및 중국인 신도와 비신도 사이에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중국전역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반기독교운동의 계기가 되었다.교회의 해금으로 인해 교민의 수가 증가하자 지방당국의 행정질서와 지주, 신사층의 지방적 영향력에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이 되었다. 이것이 초기의 반기독교운동이 주로 관신에 의해 창도된 이유이다.1860년대 들어가면서 확산되어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이어지는 반기독교운동의 전개는 주도층과 운동의 성격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제1시기는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부터 1884년 중불전쟁의 시기로 지방관 및 신사층이 운동을 주창, 지도하였고, 그 주된 양상은 선교사, 교민 및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점철되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사천성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치열하였고, 베트남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주된 공격대상은 프랑스계 카톨릭교회였다.제2시기는 중불전쟁부터 1894년 중일전쟁의 시기로 관신이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선 대신 민중의 역할이 커지고 있으며 특히 민간비밀결사가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공격대상은 선교사, 교민, 교회를 넘어서 구미의 영사관, 상업시설, 주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제3시기는 중일전쟁부터 1900년 의화단운동의 시기로 열강의 자본침투, 세력범위의 확대에 따라 이른바 과분 에의 위기의식이 심화되는 가운데 관신이 다시 운동에 참여하면서 전국 각지가 반기독교운도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된다.수구적 관신의 입장에서 교민의 증대는 지배의 축소와 아울러 반민 집단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수구적 관신은 서구 열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청 정부의 탄압으로 점차 반기독교운동에서 이탈하고 회당을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이 운동의 주도세력을 떠오르게 되었다.수구적 관신의 반기독교이념의 핵심을 보위성도 를 위한 배외양이(拜外攘夷) 에 둔다면 민중의 입장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교회의 침탈로부터 향촌을 보위한다는 의식이 강하다.열강이 이권쟁탈에 돌입하는 1890년대 이후로는 그들의 현안이 영토할양 요구나 이권획득에 교안의 처리를 연계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영국은 호남의 개방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는데, 청조의 태도는 냉담하였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의 교안은 열강의 영토할양 요구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Desmond Morris의 『털 없는 원숭이』를 읽고…- 나의 개체 생명사와 연관하여…1. 序論영국의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 교수가 쓴 이 책 『털 없는 원숭이』는 우리 인간을 한 종의 동물로 파악하여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닌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쓴 책이다.이 책의 머리말에는 오늘날 지구상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192종은 온몸이 털로 덮여 있고, 단 한 가지 별종이 있으니,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라고 자처하는 털 없는 원숭이가 그것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이 바로 원숭이의 한 종에 불과하며 동물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한 종의 별종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한 종의 별종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이런 생각은 바로 나 자신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 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라는 개인의 역사와 기원인 개체사를 알고 파악해야 우리 라는 큰 단위의 역사인 집체사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체사와 집체사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보고 싶은 대로 , 보이는 대로 보게 되면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자신의 역사를 미화하게 되고 왜곡하거나 은폐하기 쉽기 때문이다.이러한 이유는 이 글에서는 나 자신의 역사인 개체 생명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임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2. 本論이 책은 인간이 인간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털 없는 원숭이 인 인간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다가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존재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며 여타의 동물과의 비교하기 조차 꺼리고 불쾌하게 생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대단한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동물들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곧 그러한 교만하고 오만불손한 사고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하며 각종 환경오염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 정복은 인간에게 신이 복을 내려 베푼 선물이라고 까지 믿는 사람들 아니던가? 이 책은 우리 인간에게 현실에 놓여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올바로 직시하게 하며, 신의 아들이나 된 듯한 망상에 가차 없는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자신의 전문적인 풍부한 식견으로 과학적인 사실과 자료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멸종의 위기에 빠뜨린, 혹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지도 모를 인간의 앞날에 대한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그는 먼저 털 없는 원숭이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다룸으로써 우리를 정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저자의 주된 연구 관심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우리 인류가 20세기에 이룩한 휘황찬란한 문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 본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예로 열거한 내용들을 보면 그의 말에 일정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가령, 사냥하던 원숭이는 일하는 원숭이로, 사냥터는 일터로, 소굴은 가정으로, 한 쌍의 암수관계는 결혼으로, 짝은 아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그의 이런 인간이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단락은 기원, 짝짓기,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손질,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순으로 동물적 인간 본성에 중심을 둔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주제와 단락들을 주체적이고 사실에 기초한 자료들을 이용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저자가 보기에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은 점차 자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 모든 사치문명마저도 결국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도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컨대, 저자의 수많은 예증과 연구의 축적은 대체적으로 다양한 인간행위들이 갖고 있는 동물적 의미를 찾아내려는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심코 그냥 보아 넘긴 인간의 행동들을 깊이 있게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갖고 있는 의미들이 결코 우리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과 무관치 않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의도했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폭발적 인구증가로 인한 인류의 멸종 위기를 지적하면서 흥미로운 동물들이 과거에 수 없이 멸종했듯이,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우리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인간이라는 명칭대신 털 없는 원숭이 라고 칭한 것도 이를 말하기 위함이며 이런 인간에 대한 자못 모독적인 명칭은 교만과 망상에 빠진 인간에게 균형감각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우리 생활의 껍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인류가 자신을 만물의 영장으로만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인식하게 하고 있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에 의하면 숲에 살던 원숭이가 숲을 떠나 평지(平地)로 나오면서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고 나아가 곧 털 없는 원숭이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보면 우리의 선조인 털 없는 원숭이는 최초의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모습을 보면 긴 팔을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원숭이 시절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는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생지는 아프리카의 남쪽이니 우리 민족의 기원이라고 판단되는 그 곳이니 나 는 물론 우리 민족의 기원도 털 없는 원숭이라는 말이 된다.물론 다른 민족들의 기원도 털 없는 원숭이 가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단에서 이동한 우리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을 하며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고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김새를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다.우리의 신체의 모습을 보면 아직까지 흔히 말하는 진화(進化) 가 아직까지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선 우리의 내장의 하나인 맹장과 엉덩이의 흔히 꼬리뼈 라고 부르는 그 부분이다. 맹장은 우리의 선조가 일찍이 채식을 주로 할 때 생겨나 다른 한 가지인 육식을 하게 되면서 퇴화(退化) 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은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꼬리뼈는 원숭이 시절을 지나 직립 보행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퇴화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은 부분인 듯하다.우리의 선조인 털 없는 원숭이는 전에는 다른 원숭이와 다름없는 원숭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나무에서만 생활을 하던 원숭이는 식량의 감소와 기후의 변화로 인해 나무에서 평지로 내려오게 되고 직립을 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손의 사용이 가능해 졌다. 이로 인해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었다. 여기에서 일부의 사냥하는 원숭이 집단이 먹이를 찾아 강가나 해변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물을 만나게 되고 이로 인해 수영을 하기 위해 털이 점점 없어졌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아프리카 남단 해변에서 발견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일은 기독교(基督敎) 측이나 많은 창조(創造)론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창조설만을 믿고 우리의 몸의 신체에 나타는 옛 흔적들이나 우리의 몇 만 년 전의 선조들이 식량을 찾아 이 곳 저 곳을 이동유목생활을 하며 살아왔던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과 동양의 문화는 미개의 문명이고 서양의 문명이야 말로 진정한 문명이라는 것도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종교적인 부분에서 털 없는 원숭이 시절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많은 종교들 가운데 어떤 성향의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털을 벗으면서 종교가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털 없는 원숭이 시절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사냥을 할 수 없거나 우리보다 힘이 센 동물들을 우상시 했을 것 같다. 또한 우리의 채식 생활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나 태양, 물 등을 우상시하고 숭배하였을 것이다. 이집트의 태양신도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한 중국의 상제(上帝)도 이곳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불의 사용으로 인해 무기가 점차 개발이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냥할 수 없는 동물이 없어짐에 따라 더 높은 것을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신(神)이고 이것으로부터 종교가 발생된 것이라 생각이 된다.
中華帝國秩序의 動搖중국인의 뿌리깊은 중화사상과 그 위에 기초한 중화제국의 세계질서는 19세기 중반 서구인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점증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열강의 압박이 세계의 중심임을 자부해온 중국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면서 전통적 정치질서의 재편을 불가피하게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인의 새로운 국제관계가 정세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전통적인 세계관의 조정과 변용이 서서히 진행되게 된다.제1·2차 중영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지배층은 위기위식을 느꼈고 서태후정권의 출현과 더불어 총리아문을 중심으로 하는 양무운동이 전개되게 된다.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을 계기로, 청조측의 대외위기위식이 크게 확산되면서 구래의 조공전례에서 벗어난 새로운 외교관계가 전개된다. 이러한 외교관계의 확대로 중국인의 대외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지만 국제 질서를 전통적인 세계관과 절충하려는 경향이 부각되었다.중국을 둘러싼 새로운 국제관계가 확대되는 중에, 종래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기도 했던 일본은 명치유신 단행 후 곧 양국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1870년 10월에는 외무대승 유원전광이 천진에 파견되어 조약체결을 요구한 결과, 청조측 내부의 대응논의를 거쳐 조약을 매개로 한 새로운 국제관계가 동아시아문화권에 속한 주변국가와의 관계에까지 확대되게 된다.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종례의 조공관계에서 평등관계로 바꾸면서 기존의 중화제국체제에 큰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대만사건으로 유구를 합병해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질서에서 유구가 완전히 이탈하게 된다.대외관계의 호전을 배경으로 1864년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되고 이어 염군이 평정되는 등 중국 내지의 안정이 회복되면서 이른바 중흥 의식이 대두하지만, 내지의 혼란을 틈타 확산된 변경지역의 반란은 여전히 중흥 의 완성을 지향하는 청조체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청조지배하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던 서북·서남지역 회민들의 반란은 청조의 대륙변경 및 주변의 조공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이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의 내륙변경 진출이 본격화된다.이런 중국의 지배체제의 동요를 틈타 각 지역 정권들이 청조의 조공체제나 간접지배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러시아의 이리점령과 영국과의 지부조약으로 1880년대까지 중국이 새 세계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포섭이 된다.중국 내부의 중흥 의식은 변국 의식으로 상당히 억제되었던 중국인의 문화적 우월감과 자신감을 다시 고취시킴으로써 보수적인 주장을 강화시키는데 작용을 하였다. 이런 중흥 의식의 확대 및 명분을 중시하는 전통적 세계관의 재흥으로 양무운동은 중앙의 집중적인 지원과 조정이 결여된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채 계속되게 된다.양무운동의 확대추진에도 불고하고 1870년대 중반의 대만사건과 마가리사건으로 청조의 대외적 위신이 더 실추된 가운데, 1880년대에는 월남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활동이 강화되면서 그에 대한 종주권을 고수하려는 청조측과 프랑스의 대립이 심화된다. 이러던 중 월남과 프랑스가 후에조약을 맺자, 중국에서는 반불감정이 크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서태후는 패전을 구실로 공친왕 세력을 일거에 타도하고 순친왕을 중용한다.하지만 또 다시 프랑스에게 패하게 되자 천진조약을 맺게 되고 청조는 월남에 대한 종주권 주장이 공식으로 부정되게 되고 전통적인 중화제국체제의 동요가 가속화되게 된다.청조는 무력을 실감하면서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증강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이에 이홍장이 관할하는 북양함대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고, 이홍장은 독일인 교습을 초빙하여 천진에 무비학당을 개설한다. 10월에는 해군활동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해군아문이 설치되고 대만이 독립성으로 승격되어 연해지역 방위에서의 그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조선은 전통적인 중화제국의 질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년 수차 입공하는 최대 조공국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수도인 북경지역의 방위에 중요한 울타리가 된다는 실제적·전략적 의미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