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두 세계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이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만민의 평등과 협조에 바탕을 둔 세계국가의 이념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정복이 너무나 혁혁한 것이어서 여러 세기동안 그 업적의 진정한 본질은 가려져 있었다. 이 위대한 장군은 장군의 진정한 모습은 망각되었고 전설로서 지금껏 우리 곁에 있다.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그리고 에피루스의 거칠고 격정적인 왕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실천적 인물이자 군사적인 천재로 야심만만하고 세련되고 사교적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든 쓰는 무자비한 책략가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에게서 군사적 재능과 냉철한 합리주의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신비주의, 낭만성, 격정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13세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정신은 철저히 그리스적인 특징을 갖게되었다. 그 그리스적 기질은 마케도니아의 소박하고 강건하고 역동적인 생활방식에 의해 조절되었다.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문명의 절정에 도달하여 있음에도 여러 가지 국·내외의 문제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는 필리포스는 아테네와 테베를 격파하여 그리스 반도의 종식권을 갖게되었고, 코린토스 동맹이라는 것을 맡게되었다. 필리포스는 페르시아를 응징하기 위한 총사령관으로 뽑힌 뒤에 원정을 준비하는 도중에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20살의 나이에 부친의 왕국, 군대, 아시아 원정 계획, 그리고 토린토스 동맹군 지휘를 맡게되었다.알렉산드로스가 준비한 아시아 원정 출정준비는 훌륭했다.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길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동하여 아시아의 각종 풍물을 탐구하도록 하였다.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원정군이 잘 패하지 않는 이유는 경보병 및 기병을 밀집대형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전투대형 배치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배치시켰다. 그의 원정군이 승리를 해갈수록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은 가능한 한 페르시아 제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하고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거듭하며 어느덧 그의 시야는 더욱 넓어졌고,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정복과 더불어 그는 제국을 어떻게 경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막중한 문제에 직면했다. 이제 수많은 인종이 포함된, 그리고 다양한 수준의 문명을 가진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인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야심이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므로, 세계국가에 통일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한층 중대한 일이었다.그는 기원전 334년에 행군을 시작하여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3세와 이수스전투라는 큰 전투를 치러냄으로서 페르시아 정복의 분수령을 만들었고 페르시아의 함대기지 티레를 점령하고 페르시아의 폭정을 증오하던 이집트를 손쉽게 함락한 뒤, 마지막으로 다리우스 3세와 티그리스 강 동쪽의 가우가멜라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계속하였다.박트리아 및 소그디아나(러시아령 투르키스탄)으로 행군하는 중에 필로타스의 반란음모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원정지역에서 세력이 강대해지고 권위가 드높아짐에 따라 기이한 언동을 일삼곤 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의 원정이 있기 전에는 마케도니아 왕의 지위란 귀족들보다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필로타스는 마케도니아 귀족들이 그들의 전통적 권리를 찾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 페르세 폴리스를 불태움으로써 시작된 보복전쟁은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동맹군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것을 의미했다.알렉산드로스가 직면한 실질적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오리엔트적 전제주의를 그리스적 전제주의로 대치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또, 여러 가지 사상을 구체화시키고 그의 세계국가 내부의 공동의 유대를 창출하는 일이야말로 알렉산드로스가 떠맡은 임무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이것의 해결을 위해 처음엔 도시건설에 주력하였다. 헬레니즘의 섬이라고 불리는 이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가 희망했듯이, 그리스의 지식이 확산되어 제국의 백성 모두를 통합시키는데 기여한 것이다.알렉산드로스가 처형시킨 장군을 따르던 그리스 기병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인을 병력으로 충원했다. 아시아 군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매우 값진 존재였다. 그들이 충성스러운 것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동부 이란 주민의 감정을 달래고 게릴라 전투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는 박트리아 왕의 딸인 록사나와 결혼하였다.
● 소크라테스(B.C. 469∼399)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네테 출생으로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각가였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를 듣고, 자주 깊은 몰이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고,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 중장보병으로 북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이때 훌륭한 인내심과 침착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종군때 이외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하였으나 그 뒤에는 인간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 체육관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인격과 유머가 있는 논법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를 형성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임에 들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 종결 5년 뒤인 B.C. 399년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에서 사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아 플라톤의 대화편(주로 초기)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계 저서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플라톤의 『향연』중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실레노스) 디오니소스이 종으로 최연장이며 지혜가 많다는 사티리콘와 마르시아스) 디오니소스의 벗으로 반인반수의 숲의 신와도 흡사하다고 설명하고 장난꾸러기라 표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해 반박을 할 수 없게끔 만듦으로서 오직 소크라테스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이 진정으로 무지했음을 또 겸손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게끔 만든 유일한 학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곧 소크라테스는 그 시대의 진정한 철학자임을 플라톤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는 복합적이고 암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각 시기마다 소크라테스의 어느 한 면을 부각시켜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맞춰 재해석해왔다. 다시 말해 역사의 각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재구성하였고, 이는 곧 그가 복합적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그리고 서구의 문화적 전통에서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지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변명』에서 "내가 오직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는 무엇일까.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는 자신을 의식하며,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는 무지함이다. 이는 곧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거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대화 상대자에게 반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결국 자신이 무지했음을 알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無知의 知'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무지를 고백할 때까지 줄기차게 사색과 질문을 계속 했다. 그리하여 저마다 보편적인 정의를 수립하는 대로 인도하고자 한 것이다.탐구 방법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체계화된 지식이나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미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상이나 신념에 회의를 느끼고 '내가 모르고 있다.'라는 경지까지 도달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소피스트가 상대주의에 서서 보편 타당한 것을 거부하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개념의 실재를 믿었고 이 바탕 위에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보편적인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관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그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무지를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시도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는 대신 저마다 생각하고 느끼도록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무지를 인정하고 보편 타당한 것에 이르게끔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화법이다. 그 대화방식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의식을 하고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캐묻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렇게 점증적인 의식획득 과정의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다. 그것은 조산술과 상기술이다.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산파였던 어머니 파이나레테(Phainarete)에 비교하여 상대방에게 잇따라 질문하고, 질문하면서 상대자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분석해서, 당사자가 이전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숨어 있는 지식을 표출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을 산파에 빗대어 얘기한 것이 조산술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도와서 그들이 지혜를 얻도록 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조산술은 숨어 있는 지식이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주는데 있는 것이었다.조산술은 다른 사람들이 지식을 얻어가도록 도와주는데 제한되어 있는 반면 상기술은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갑자기 우리를 일깨워 주는 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는 확신을 의미한다.많은 사상가들이 그랬듯 소크라테스도 덕에 대해 정의 내리고자 노력했다. 소크라테스가 덕을 정의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면서 내린 유일한 정의는 덕(德)은 지식(知)와 같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인간에 대해 너무 피상적인 것, 상대적인 것, 개별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데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을 도자기를 들어 설명해보자. 소피스트들은 각각의 도자기 모양과 용도의 차이에만 관심을 가져 각각의 도자기들은 다르다고 얘기했고,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모든 도자기도 그 재료가 흙"이라는 데 중점을 두어 얘기했다. 이처럼 진리니 보편적 기준이니 하는 것은 소피스트들의 관심이 아니다. 어떻게 하든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화려한 변론술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