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고10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것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100년 전 사람들이 뭘 했고, 뭘 먹고, 뭘 입고 살았는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별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이곳에서 100년 전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뭘 하고 지냈을까 하는 것을 알고 지금의 우리 생활과 비교 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것을 알기 위한 답으로 이자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100여 년 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게 되었다.영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 요크셔주의 귀족 집안에서 이자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태어났다. 그녀는 나이 50세에 그녀와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서 왕진을 온 10살 연하의 비숍(John Bishop) 박사와 결혼을 한다. 8개월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지난 후 1881년에 남편은 어느 선원을 수술하다가 단독증에 감염되어 1886년 3월 6일, 결혼 5주년 기념일을 2일 앞두고 사망한다. 이자벨라는 우울증과 고독으로 괴로워하다가 당시로서는 탐험가들의 대상이 되었던 극동의 오지 여행을 떠난다. 그는 1894년 1월에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1894년 2월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그때 이미 그의 나이는 63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1897년까지 3년 동안 극동에 머물면서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장기간 체류했다.그녀는 마적단의 습격을 무릅쓰고 시베리아의 한인촌을 탐사했으며,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봉천을 여행했다. 한국의 이 시기는 청일 양국이 동학농민전쟁을 꼬투리 삼아 조선 땅에 군대를 출병하려던 1894년부터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의 운명을 놓고 다시금 격돌하려던 1897년까지였기 때문에 그녀의 육성 증언은 그 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비숍 여사는 돌아가서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의 서두에서 처음에는 한국은 재미없는 나라란 인상으로 한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나 청일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정부 아래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강한 흥미를 가졌다고 말한다. 시베리아에서의 한국인들을 보면서 미래의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고 그것은 한국의 안좋은 첫인상를 잊어버리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100년 전 외국인들의 시각에서의 우리나라는 처음엔 불결해 보였지만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었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영국 왕립지리 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던 비숍 여사가 1894년부터 네 차례 한국을 답사한 뒤 자신 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여행기며, 무엇보다 당시 조선의 모습을 그린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서구인의 편견에서 벗어나 실증성을 바탕으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 가치를 평가받는다고 들었기에 고령의 나이에 힘든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사실적으로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비숍 여사는 나의 이런 생각을 간단히 되돌려 놓았다. 비숍 여사는 나룻배와 조랑말 혹은 걸어서 한반도 곳곳을 여 행하면서 위로는 고종부터 아래로는 최하층 빈민들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책 속에 담긴 한국의 식생활 요리 양념 빨래 결혼 장례식 등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은 물론 조랑말의 습성과 먹이, 상품들의 품질과 가격, 숙박요금, 기생과 무당의 춤, 당시의 유행가, 한국 귀신들의 내력 등에 관한 꼼꼼한 기록은 최초의 한국에 대한 인문지리서 「코레아」와 더불어 조선의 풍물과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받을 만 하였다.그녀는 한국에 머물면서 크기가 아주 작은 나룻배를 타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으며 남한강을 따라 양주, 여주, 청풍, 단양을 여행했으며, 다시 노새를 타고 금강산의 4대 사찰과 안변의 석왕사를 돌아보고 다시 파주, 안주, 덕천, 순천을 여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인의 삶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정착하고 있는 한인촌을 찾아보기도 했다.깔끔한 일본을 거쳐 내한한 그녀가 한국을 돌아보고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가난과 불결이었다. 그는 이러한 한국인의 생활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고 체념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놀란 것은 상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이었다. 그녀가 단양의 어느 토호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주인 마님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고, 남편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프랑스의 샴페인과 코냑을 두루 갖춘 채 영국제 시거를 물고 있었으며, 집안은 수단제 카페트를 깔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이 걸려 있고 탁자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이것을 읽고 지금의 얘기가 아니라 1890년대의 얘기라는 점에 너무나 놀랐다. 지금 이렇게 사치를 한다고 해도 사회의 지탄을 받을 정도니 말이다.그러던 차에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이 이주해 가서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원동지방의 한국인 정착촌도 방문했다. 여기서 비숍 여사는 새로운 한국인을 만난다. "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 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절과 더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 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 죽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 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富農(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그녀의 이런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의 한인들은 단양의 그 사치스런 토호와는 완전히 다르게 경제적으로 유복하면서도 검소하고 근면하며 인성도 착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이들의 삶을 시샘하는 러시아 정부가 한인들을 추방하기도 하고 유입을 집요하게 막기도 했지만 꿋꿋히 살아가는 이러한모습을 보면서 비숍 여사는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그들이 조선에서 살았더라면 이토록 근면하였을까? 라고 비숍 여사는 묻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 사는 하층민들은 왜 그렇게 불결하고 게으르며, 상층민들은 썩을 대로 썩어 있고,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은 왜 그토록 근면하고 유복한가하는 생각을 비숍 여사는 하게 된다.비숍 여사가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조선에 사는 한국인들이 가난한 것은 노동의 의욕이 낮고 따라서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 노동 의지와 생산성은 그토록 낮은가? 결론은 부패한 관리의 수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체념이 끝내 한국인을 가난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절망으로 인해서 한국인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무당의 주술에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고 그녀는 진단한다. 하지만 시베리아의 한인들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한국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 한국은 개으른 나라가 아니라 단지 개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한말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식생활 중에서 공통되게 놀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탐식증이었다. 이 것은 비숍 여사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의 이러한 식사 습관은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잔칫집에 가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야말로 그들이 아사와 영양 결핍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들을 데리고 잔칫집을 찾아가 굴뚝 뒤에서 등을 두드리며 자식들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에서 나는 이 상황과 내가 격지는 못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보릿고개 시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 해본다. 뭐 그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별달리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심을 굶으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요즘도 있으니 말이다.
Fancy Versus Reality: Sindbad the seaman and Sindbad the porter내용요약'공상 대 현실 : 선원 신밧드와 짐꾼 신밧드 '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신밧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이드(Id: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자아)와 에고(Ego:현실에 적응하려는 의식적 측면)간의 갈등과 조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이야기가 시작될 때 신밧드는 멋진 집 앞에서 집주인의 풍요로운 생활과 자신의 고통스런 생활을 생각한다. 이러한 언급들이 동일인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드와 에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신밧드는 자신과 궁전의 소유주에 대하여 "너의 혈통이 내 것이고, 나의 혈통이 너의 것이다."하고 말한다. 신밧드는 결국 궁전에 초대되어 7일 동안 궁전주인에게 7가지의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여행들 속에서 그는 충격적인 위험들을 접하게 되고, 결국 구출되어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귀향하게 된다. 이 이야기 동안 강도를 높여서 가난한 짐꾼과 엄청나게 부자인 선장의 실체를 강조하기 위해 선장은 이런 위험한 모험을 하도록 하는 힘을 내 안에 있는 오랜 나쁜 인간의 본심(이드)이고, 잔악한 인간의 마음은 자연히 사악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의 원초적 자아를 자극하는 인간의 나약한 이미지하고 말했다. 왜 이 옛날 이야기가 7부분으로 구성되었고, 왜 두 주인공들이 각각의 날을 분리해서 다음 번에 재구성하는가? 7은 일주일을 이루는 숫자를 의미하고 옛날 이야기에서는 그 주의 매일 매일을 나타내며 또한 우리 삶의 개별적인 날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 존재에 대한 실제 생활에서의 힘든 삶과 환상적인 모험의 삶, 이 두 가지 국면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이것을 낮과 밤이 있는 관점으로 본다면 그 이야기는 에고와 이드라는 두 가지 다른 투시법에서 얼마나 다른 삶이 언제 보여지는가를 주로 말한다.그 이야기는 힘들게 살아가는 신밧드를 어떻게 표현 하는가로 시작된다. 그가 존재하는 것이 고통스러워지면 그는 부유한 사람의 삶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만일 현실에 기인한 자아가 다 소진된다면 에고는 이드에 의해 압도된다. 이것은 뱃사람 신밧드의 항해하는 7가지 이야기에서 구체화된다. 뱃사람 신밧드는 그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 홀려서 환상적이 모험을 소망하고 끔찍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구출되어 큰 부자가 되어 여유로운 삶을 사는 상상이 걱정하는 상상보다 낫다. 하지만 신밧드는 다시 힘든 노동의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된다.그 옛날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드의 압력이 용감함으로 투영되었을 때와 상반되는 자아성향이 힘든 일에서 구체화될 때 우리는 이들 모순되는 이중적인 면들을 더 잘 가시화 할 수 있다. 이드 또한 에고만큼 우리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 이야기의 커다란 장점 중의 하나가 선원 신밧드와 짐꾼 신밧드가 동일하게 실체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 중 어느 쪽 측면이라도 매력적이라든가 중요하다던가, 정당하다던가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어느 정도 우리의 복잡한 내부성향의 분리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상반된 감정과 이를 통합하려는 우리의 욕구를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혼돈의 원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통합은 우리의 성향과 부조화 국면이 있는 이것들을 중요히 여기는 현실화를 요구하게 된다. 실은 청자들은 이들 두 형제가 왜 계속 분리되어야 하고, 매일 새롭게 다시 만나야 하는가를 궁금해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결말에 다소 실망을 한다. 표면적으로 만일 그들이 함께 영원히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살게 된다면 그 결말은 정신통합의 영웅의 성공적인 수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결말이었다면 다음날 밤의 이야기를 계속 말할 이유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