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영어의 발달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고대영어의 성립과 특징)가. 게르만족 침입이전의 영국선사시대의 영국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헌이 없으므로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영국이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5만년전 이전에 이미 혈거 수렵생활을 하던 원주민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들은 빙하시기에 없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영국 최초의 원주민은 아마도 구석기인으로 영국이 유럽 대륙의 일부였던 당시 이 지역에 등장하여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야생 식물을 먹고 풍부한 물고기와 사냥을 하며 생활하였다. 이들은 긴 두 개골(long-skulls)을 지니고 무기와 도구겸용으로 부싯돌을 사용하고 가축을 길렀다. 긴 두 개골을 지닌 점으로 보아 지중해나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에서 온 비인구어민족임이 분명하였다. 이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오늘날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들 선주민들은 그 후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초기(기원전 6-4세기)에 걸쳐 대륙에서 침입한 둥근 머리(round-heads)를 가진 인종 즉, 인구어 민족인 켈트인(Celts)에 의해 기원전 200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정복된다. 이 시기의 영국은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직후였으므로 켈트인은 주석과 구리의 합금인 청동(bronze)을 사용하였다. 콘월(Conrnwall) 지역에서는 주석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이 금속은 켈트인에게는 매우 유용하였던 것이다.켈트인은 누구였을까? 희랍인은 Keltori, 로마인은 Celtae라고 부른 이들은 원래 다뉴브강 유역, 현재의 북부 이태리,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도이치, 네덜란드의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갈리아(Gallia)지방과 알프스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호전적인 야만인들로서 전쟁을 즐겨 하였고 일부다처제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부족 중심의 사회체제를 이루고 각 부족단위로 싸움이 항상 계속되어 강인한 부족사회를 형성하였다.켈트인의 생활 양식에 관한 가장 정확한 문헌은 씨저(Caesar)가 쓴 갈리아 정복에 관한 기록인 갈리아칭하였다. 700년에 이르러 영국 전체의 언어는 Englisc로, 국민은 Angelcynn(=kin of the Angles)로 불리어졌다. 1000년경에는 영국이 Englaland (=land of the Angles)로 불리어지게 되었는데, Angle의 a가 England에서 e로 변화한 것은 소위 'front mutation' 현상으로, 이와 비슷한 예로는 Frankish > French ; man > men 등이 있다. 로마군의 철수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영국이 혼란의 와중에 있는 동안 원주민인 브리튼족(즉, 켈트인)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앵글로색슨족의 유일한 종교는 게르만족의 이교도 정신(paganism)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초기에는 반기를 든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게르만 전통의 이교도 관습과 신앙은 기독교화와는 관계없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내려 왔다. 요일을 가리키는 4 개의 고대영어 Tiwesd g, Wodnesd g, unresd g, Friged g는 게르만인의 신(deity)인 Tiw, Woden, Thudor, Frig를 형상화한 것이다. 기독교 휴일중에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활절(Paschal;Easter)도 게르만인의 여신(女神)인 Eastre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년의 마지막이며 첫 번째 해당하는 달에 적용되는 Giuli라는 말은 '한겨울'을 뜻하는 고대 이교도 명칭으로 오늘날 현대영어에 Yule이란 단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597년에 그레고리 교황이 성 어거스틴과 40명의 선교사를 켄트에 보낸 것이 앵글로색슨족의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애셀버트왕과 대륙의 프랑크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한 그의 왕비인 버사(Bertha)가 통치하던 켄트 왕국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애셀버트왕은 곧 세례를 받았고, 어거스틴의 사후 7년뒤에 켄트왕국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애셀버트왕이 그의 아내를 위해 켄터베리(Kent-wara -byrig)에 세운 작은 성당은로는 도덕성이 결여된 성직자의 교본으로 쓴 그레고리 교황의 사목지침서(Pope Gregory's Cura Pastoralis),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을 영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집필하도록 한 비드의 영국민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그리고 오로시우스의 세계사(Orosius's Universal History)가 있다. 이 책은 5세기 스페인의 성직자가 쓴 책으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따르고 이교도를 버린 결과 패망했다는 관념을 반박하기 위해 고대 문명의 흥망성쇄를 더듬어 추적한 책이다. 이밖에도 그레고리 교황의 설교집(Homilies)과 로마의 철학자인 보에시우스(Boethius:c. A.D.480-524)의 작품으로 5세기의 고전인 철학의 위안(Consolations of Philosophy)이 있다. 앨프레드왕이 자국어(즉, 고대영어)로 쓴 산문(prose)의 발달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원전 55년 영국을 침략한 시저 시기부터 영국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891년에 집필하도록 장려한 데 힘입은 바가 컸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연대기의 필자들은 초기에 단편적으로 쓰여진 이야기에서부터 앨프레드의 왕위 계승에 이르기까지 내려 온 이야기를 모두 모아 정확하면서도 때로는 유려한 문체로 앨프레드의 사후 1154년까지의 역사상의 사건들을 250년간에 걸쳐 기록하였다. 이런 점에서 앨프레드왕은 영국 산문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영국 교육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영어 산문이라는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두각을 나타낸 작가중에는 수도원장인 앨프릭( lfric)과 동시대인인 울프스탄(Wulfstan)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11세기초까지 살았으며 노르만정복이 일어나기 40년전에 죽었다. 이들이 남긴 작품으로는 설교집, 성자들의 이야기, 성서 주석등이 있으며 이들이 쓴 영어는 초기의 고대영어보다도 한층 더 우아하고 세련된 영어가 되었고 이제는 라전어로 나타낼 수 있는 처음에 와서 흔히 쓰인 h(예: hring 'ring'; hnecca 'neck')는 중세영어 초기에 없어졌다. v도 또한 프랑스 차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한층 더 중요하게 되었으며, fan, van의 두 첫소리를 구분하기 시작 하였다. 단어 끝에 오는 ŋ도 이 시기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는데 쓰였다.(예: thing vs thin). 본래, 단어의 어미를 구분해 주었던 모음의 음질(예: stanes 'stones', stanas 'stones')도 더 이상 효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어말에 쓰인 e는 1400년경까지 발음되었는데(예: tunge 'tongue'), 이 시기에 와서는 두 음절로 발음되면서 마지막 e는 / /의 음가를 지니게 되었다.문법면에서 보면, 중세영어 시기는 고대영어로부터 물려받은 굴절체계가 크게 무너져가는 특징을 보이는 시기이다. 이렇게 된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첫째, 영어와 고대 노르웨이어와의 혼합이다. 영어와 스칸디나비아어에 나타나는 단어들은 구별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비슷한 데가 많았으나, 굴절체계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확한 굴절형을 사용하려는 문제에 대한 의혹과 혼란이 당연히 일어났다. 둘째, 어말에서 강세를 받지 않는 음절이 상실되고 약화되는 현상으로, 이로 인해 고대영어에서 변별적인 굴절체계의 상당수 가 없어졌다. 예컨대, 고대영어의 명사 sunu는 중세영어로는 여격 복수형인 sonen을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에 sone가 된다.giefe 'gift', wine 'friend'와 같이 서로 다르게 변화하는 명사들의 예도 위에서와 똑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렇게해서 결과적으로 영어의 모든 굴절체계는 간소하게 되었다.굴절체계가 무너짐에 따라 이를 대체할 다른 문법적인 장치가 점점 더 활발하게 쓰이게 되었다. 그 하나로, 어순(word order)이 한층 중요해지고 더욱 엄격해졌다. 굴절체계의 상실로 인해 등장한 또 다른 문법 장치로는 굴절체계로 나타냈던 종전의 문법 기능을 대신 수행 품사가 거의 모든 다른 품사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음에 설명할 셰익스피어의 언어와 그의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넷째, 이 시기는 영어를 향상시키고 어휘를 늘리며 철자를 고정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끊임없이 나타난 시기였다. 16세기에는 상당한 양의 문학을 접하게 되는데, 라전어나 다른 언어로 쓴 작품에 대해 영어를 옹호하면서 학문적이고 문학적인 용도에는 영어게 더 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기운이 팽배하였다. 이와 동시에, 영어는 교양어로서도 가치가 있을뿐더러 젊은이들의 교육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긍지와 교양의 목적으로 영어를 배우려는 관심과 함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어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뒤따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나. 셰익스피어와 흠정역 성서르네상스 후반을 지배한 두 가지 커다란 영향은 말할 필요도 없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의 작품과 흠정역 성서(1611)이다. 이들이 영어에 끼친 영향은 어떠했을까? 이 시기는 철자법이 아직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쓰이던 때여서 발음도 이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쓰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문법적인 사항에 있어서도 일정한 규범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기운이 감돌던 시대였기 때문에, 영어는 여전히 유동적인 상태를 면치 못했다. 한편, 이러한 자유스러운 기풍은 작가의 경우, 마음대로 영어를 다룰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했는데, 이러한 여건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곧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는 철자, 발음, 문법의 전 분야에 걸쳐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 영어를 어떠한 단어든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주어와 동사 사이에 나타나는 '수의 일치'에 있어서 현대영어와는 달리, 글쓴 이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라 동사의 수(數)가 단수 또는 복수로 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수의 일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화려하고 난해한 단어는 거의 찾아볼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