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도자재단과 & 여주市 후원을 통한“MISS & MR. Ceramic 선발대회”◈ 남원의 ‘Miss 춘향’처럼 매년 개최◈ 여주市, 문화관광 도시로 부각◈ 지역 문화축제의 전국화, 세계화에 기여 ◈ 대한민국과 여주市 이미지 제고!! ◈ 수상자들, 여주市 관광홍보대사 위촉◈ 수상자들, 연예계 진출 기회 제공
1. 기획의도필리핀은 한국전쟁 참전동맹국 한국전쟁때 가장 먼저와서 도와준 나라가 필리핀이었다. 그런 필리핀과의 관계증진을 위해서 한류스타 샤이니의 공연을 추진하고자 한다. 새로운 한류 전파단순 K-POP을 바탕으로 한 홍보가 아닌 Shinee 브랜드만을 홍보하여 단독콘서트 진행
대회 취지미스어스는 환경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주제로한 미인대회이다. 2001년 부터 개최되어 왔으며 전세계 100여개국의 미인들이 참가를 한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매년 미스코리아 선이 대표로 출전을 한다. 매년 11월에 개최가 되며 1~4등을 Earth, Air, Water, Fire로 순위를 매긴다. 미스어스는 1년동안 UNEP(유엔환경연합)의 대변인을 맡게 된다.
Ⅰ. 序論현재 우리 나라의 학교나 학원 등의 교육기관에서 가르쳐 지고 있는 西洋音樂은 開化期 이후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한국 음악교육에 있어서 개화기는 매우 중요하고 혼란스러웠던 過渡期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傳統音樂도 이시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 변화를 하게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국 음악교육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한국 음악교육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Ⅱ. 傳統音樂의 변천開化期 音樂은 宮中音樂, 정악과 民俗樂 그리고 새로운 신문화 유입으로 인한 西洋音樂의 등장과 수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서양 音樂의 만남은 두 문화 사이에서 파생되는 문제, 즉 西洋音樂의 유입과정에서 전통음악과의 충돌, 갈등, 수용이 빚어낸 특수한 상황아래에서 전개되었다. 전통은 단절일 수 없는 계승이며 音樂에 있어서도 고유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는 양식으로서 韓國의 傳統音樂은 國樂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오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이미 뿌리를 굳힌 유교적 봉건제도 아래에서 형성된 문화유산으로서의 전통음악 위에 어떻게 서양음악이 유입되었고, 그 유입과정에서 나타난 傳統音樂의 제 양상과 전통 音樂敎育機關이 어떻게 변모 변천되었는지를 알아봄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1. 傳統音樂의 形成1) 正樂한국 전통음악의 한 갈래로서, 세종 때 박연의 문집 〈난계유고 蘭溪遺藁〉의 〈청정묘조정악소 請定廟朝正樂疏〉에서 보이는 정악은 우리 나라 음악이 아닌 중국계 아악을 말한다. 또 박효관의 〈가곡원류〉의 '정음'은 전통가곡을 뜻한다. 그러나 정악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인 것은 1911년 정악전습소에서 비롯되었다. 이때에 쓰인 정악의 뜻은 여창가곡·가사·여민락·도들이 등 민요·잡가를 제외한 전통음악을 일컬었다. 정악에는 가곡·가사·시조·줄풍류·대풍류·사관풍류 등이 속한다.2) 民俗樂민간 예능인들에 의해 꾸준히 그 脈을 이어 오던 民俗樂은 조선후기까지도 종합예술의 형태였으나 민간의 통속문화가 개화기에 상하계층간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지배적인 문화형태로 자리라 부르게 되었다.(2) 民謠와 雜歌民謠는 예로부터 민중들 사이에 불려오던 소박한 노래를 의미한다. 작사자·작곡자가 따로 없으며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민요는 민중들의 사상·생활·감정 등을 담고 있다. 또 민요는 민중의 생활을 노래한 단순한 노래의 차원을 넘어서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생산적인 노래라는 특징을 갖는다.지역마다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토리(조)라고 한다. 음악적 특징은 민요를 구성하고 있는 음과 음의 기능, 음이 움직이는 방식, 소리를 내는 발성법, 장식음의 사용법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그 지방 사람들의 음악어법을 말한다. 이러한 토리의 차이에 따른 민요권은 대개 경서토리권·메나리토리권·육자배기토리권·제주도토리권으로 나뉜다.雜歌는 17~18세기에 발생하여 1920년대까지 성행했던 시가의 한 갈래이다. 잡가는 18세기말경 〈청구영언〉 등에서 12가사와 대별되는 명칭으로 태동했으며, 서울지방의 긴 잡가로 남아 있는 12잡가로 기본적인 형태가 정립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대부분의 잡가들이 본격적으로 가창되었으며, 경기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1910년대, 1920년대초에 그 유행 범위를 넓혔다. 그뒤 일제강점기의 창가가 유행되기 전인 1930년대까지 잡가는 번창했다. 잡가는 근본적으로 민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차츰 정악의 시조나 가곡의 분화에 영향을 받아 가락이 시류에 맞게 변천했고, 타령의 장영(長詠)이 조선 후기에 내려올수록 확대되었다. 사설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시조·가사·민요·판소리 사설 등의 영향을 받아 점차 사설이 확대됨으로써 가락과 사설이 동시에 확대되는 동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3) 散調판소리·민요와 함께 민속음악의 대표적 음악양식이다. 19세기 말엽에 형성된 산조는 가야금산조를 비롯하여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아쟁산조·피리산조 등이 있다.산조는 남도소리의 시나위와 예인광대들의 음악인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들 음악을 기악독주곡의 이어서 도창(導唱)의 주도하에 각각의 배역을 나누어서 부르는 대화창(對話唱)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각 배역을 맡아 사실적인 연기를 동반하는 창극에 이르렀다.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전환하게 된 내적인 계기로는 판소리 본래의 극적인 성격과 발림을 들 수 있고, 외적인 계기로는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의 설립과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청국 창희(唱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고종황제 등극 40주년 축하예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집된 광대예인들로 구성된 궁내부 관할의 협률사(協律司)가 연희단체 협률사(協律社:1902~06)로 변모한 뒤 다시 이인직의 주도하에 원각사(圓覺社:1908~09)라는 연희단체로 재조직되었다. 협률사 무대에서 명창 김창환·강용환을 비롯한 광대들에 의해 1903년 〈춘향전〉, 1904년 〈심청전〉이 창극화되었다. 이 시기의 창극은 대화창에서 조금 더 나아간 초보적인 형태였다.2. 敎育機關1) 장악원조선시대 음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을 말한다. 각종 제사와 의례, 각종 행사의 음악과 음악교육, 악공(樂工)·악생(樂生)의 관리를 담당했다. 각종 행사에 음악을 수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교에서 음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교에서는 예악(禮樂)이라 하여 예와 악은 모두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간주했는데, 예는 인간의 사회질서를 가시화하고 유지시키는 기능을, 악은 인간의 마음과 덕에서 나오는 것으로 음악을 통해 인간이 화락(和樂)해진다고 보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악공은 천인출신들로 우방에 속했는데, 정원은 572명이었다. 악생은 양인출신으로 좌방에 속했으며 정원은 399명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들은 국역부담인으로 공사천·보충군·양인자제 등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에게는 봉족이 배당되었고, 소수가 체아직을 받아 녹봉을 받았다. 이들은 장악원 부근에 거주하면서 출퇴근했는데 생활에 곤란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의 장례원(掌禮院)으로 이속되면서 소멸했다. 장악원 건물은 처음에는 서부는 창가운동과 신문학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이와 같이 西洋音樂은 외부로부터 밀려온 신문화의 직접적인 문화접촉에 의하여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1. 서양음악의 수용과정1) 軍樂隊1896년 민영환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서 군악대를 인상 깊게 보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여, 1901년 일본 군악대를 20년 동안 지휘·지도한 독일인 지휘자 F. 에케르트가 지휘를 맡아 6월 발족되었다. 군악대 본연의 임무뿐만 아니라 왕실과 정부의 각종 행사에 연주를 하거나 시민위안연주회를 갖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탑골 공원 등에서 연주하기도 했는데 화려한 복장과 악기로 낯선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軍樂隊長은 백우용이었다.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악대는 洋樂隊로 이름이 바뀌었다. 황실의 재정난이 심각해지고, 1916년 지휘자 에케르트가 죽자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양악대는 부지휘자격에 있었던 백우용을 중심으로 경성악대라는 이름의 민간단체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강당에서 시민위안과 악대기금 모집을 위한 연주회를 열기도 했으며 운동장·극장 등을 전전하면서 연주를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1923년에 해산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군악대 할동이 음악에 기여한 점은 다음과 같다.1 대중들에게 새로운 西洋音樂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2 학교 밴드음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3 洋樂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4 본격적인 音樂敎育이 음악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2)改新敎 導入以前開化期 이전에도 西洋音樂이 소개되었지만 실제적인 활동이나 사회적인 수용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음악 수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따라서 洋樂의 도입은 기독교 전래의 역사와 脈을 같이 하며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서 서양음악, 주로 종교음악이 소개되어 洋樂의 역사는 100여 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3) 改新敎와 讚頌歌(1) 찬송가의 보급한국에서 찬송가는 근대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의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부르던 노래이다. 창가라는 명칭은 개항과 함께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가사라는 뜻을 지닌다. 가사(歌辭)를 단형화한 것, 민요에 의거하여 지은 것, 그리스도교 찬송가와 같은 서양노래 곡조에 얹어서 부르도록 지은 것 등 그 출처가 다양하다.창가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1869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축가〉이다. 이 작품의 곡조는 찬송가이고, 노랫말도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기 바로 전에는 항일 창가를 모은 창가집을 필사하거나 출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일합병 이후로는 일제에 순종하는 마음을 기르는 관변(官邊) 창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학부편찬의 〈보통교육창가집〉에는 모두 17편의 노래가 악보와 함께 실려 있는데, 막연하게 들뜬 문구로 자연을 예찬하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곡조와 일본인의 정서를 나타낸 사설이 많다. 일제의 이러한 책동으로 국내에서는 항일애국창가는 위축되고 유행가 이식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 뒤에는 국외에서 독립군의 독립군가가 항일창가의 맥락을 이었다. 국내에서는 창가를 계속 불렀지만 대부분 독립의지가 약화된 학교창가이거나 일상생활의 사소한 정감을 다룬 유행 창가여서 문학작품으로의 의의는 상실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창가'라는 말이 신식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그 성격이 모호해졌으며, 유행가와 뒤섞이기도 했다. 창가는 문학사적으로 볼 때 애국가·독립가 및 개화가사의 전통을 계승하고,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시가라고 할 수 있다.2. 敎育機關1) 학교 교육기관(1) 관립교육기관관립학교에서 창가과목은 명목상 교과목이었지 과할 수도 그렇지도 않을 수 있는 선택과목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찬송가나 창가가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으므로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포함하되 오히려 식민정책에 이용하고자하는 의도였다.(2) 사립교육기관1886년경에 우리 나라 신교육기관에서 처음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