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를 읽고모든 학문에서는 객관적 입장을 취하기 무척 어렵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과학에서 조차도 지금 우리가 '과학적인 사실'이라 믿는 것은, 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해 왔던 것들 - 예를 들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 의 연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관이라는 것은 그러한 면에서 상대적으로 상당히 주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에서는, 그러한 작가의 모습 그리고 그가 언급한 '가토 노리히로'간의 논쟁도 이러한 주관적인 역사관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라면, '상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래 역사적인 논의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상당히 철학적이고 '논쟁위주'의 글에서 느끼는 난해함 때문에, 읽는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을수록, 저자인 '다카하시 데츠야'씨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전후책임에 대해서,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다른 역사가나 지식인들이 벌이는 자국 중심의 이기주의 역사관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일본의 지식인들('자유주의사관론자'들)을 비판하는 방식의 논거 자체가 상당히 독특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전공이 '철학'인 탓인지 책 전반적인 분위기가 매우 철학적이었습니다. 실례로 처음에 저자가 'Response'라는 것을 '응답가능성'으로 해석하면서 일본의 전후책임 사죄는 '사회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며, 이는 사회생활에 있어 필수적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또 햄릿을 인용하여 이를 현실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 역시 매우 독특했습니다. 아마 이는 강연식으로 저술된 이 책을 독자들이(청중들이) 쉽게 이해하려는 저자의 의도라고 보입니다.솔직히 한국인으로서 나를 비롯한 많은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저 일본이 일제 36년·세계2차대전 때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들 때문에,'까닭 없이' 일본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치가나 사회 인사들은 1년에 한번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망언'을 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은 전후 10년부터 '전후는 끝났다'라고 하면서 정작 마땅히 해야 할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역사를 지속시켜 왔고, 그동안 침묵하여야만 해왔던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탈냉전이후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자신을 밝히면서 정식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세계기구가 일본에 대해서 추궁을 하고 있지만, 일본은 내부적으로 국민들에게 '거짓된 역사'를 가르치며 이를 회피해 왔습니다. 때문에 지금의 일본 국민들은 전후책임에 대해 '나의 일이 아니다(전후세대가 아니므로)'·'왜 아직까지도 전쟁의 책임을 물라는 것인가'라며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저자의 말에 나는 많은 부분 동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을 비판한다는 것에서 오히려 나는 하나의 '위안'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지식인들이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정작 일본 당국이나 일본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전혀 동요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죄나 보상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사관'을 가진 학자들도 있고 또는 가토씨와 같이 일본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사죄는 '2천만 아시아의 피해자' 보다 '3백만 일본병사들'에게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전후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학사관'이라고 비웃으면서 조롱을 하고 있고, 잘못된 역사교육은 전후 세대들에게 '왜 우리만'·'아직도'라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권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많은 인권단체들로부터 전쟁에 대해 사죄 할 것(위안부 문제 포함)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일본정부나 일본국민이 보지 않으려 해도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눈감고 아웅하기식의 일본의 전후 회피 행태는 물론 지금의 일본 국민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최근 일본이 세계의 리더로서 자리매김을 하려고 하는 외교행위에서도 드러난다고 봅니다. 이에 저는 지금 일본의 인사들이 가지는 사관과 요즘의 일본의 행보를 비교하면서 제 생각을 전개해 보고자 합니다.일본은 현재 전쟁을 일으킨 까닭에 '보통국가(normal state)'가 아닙니다. 때문에 일본은 정식 군대가 아닌 '자위대'만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일본은 세계의 '리더'입니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이 국제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해 경제적으로 협력을 하기 위해서 UN의 '상임이사국'에 넣으려 하고 있고 여기에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과 일본이 긴밀한 공조관계를 취하고 있는 것은 96년의 '新가이드 라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남경대학살'등으로 강한 반미감정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일본의 '외교적인 지위'의 회복을 결코 용납하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의 자위대는 UN의 PKO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게끔 법까지 개정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이나 중국 또 러시아에게 많은 위기감을 준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중-일 전쟁 그리고 러-일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며 이들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많은 피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은 해군을 비롯한 많은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습니다.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은 세계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일본이 자국이 저지른 만행을 감추려하고 최소화 시키려하고 또 '독일'까지 끌어들이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알 수 있는 이러한 논쟁들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겠지만, 사죄에 대한 외부의 위협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이 대외적으로 자국의 지위를 격상시키려 하면서 어째서 내부적으로는 자국이 세계에 대해서 저지른 일들을 외면하고자 하는 지 의아합니다. 일본 자신도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치욕을 당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국이 천황의 이름으로 전개했던 전쟁은 '원폭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이러한 원폭은 일본이 타국에 입힌 피해에 상응할 만한 아픔으로 남았습니다.어떠한 국가이든 간에 치욕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게는 '베트남 전'이, 독일로서는 '나치즘'이, 중국으로서는 '19세기의 서구열강의 할거'가 그러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도 '광주항쟁'은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원폭투하'가 그러한 치욕적인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은 자신의 전후 책임을 '공개적인 사과'와 '보상금'으로써 만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왜 '우리만' 이냐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하려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1년에 한번씩은 '이벤트'처럼 망언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전쟁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이 반갑지는 않은 일일 것입니다. 저자는 일본 국민들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천황의 이름이라는 이름 하에 죽어간 일본의 병사들도 '애도할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잘못된 지도자에 의해서 나간 전쟁이라는 측면에서는 물론 일본 병사의 죽음도 안타깝다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한국이나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등을 비롯하여 저지를 만행 들은 국가의 책임만이 아니므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도 생각됩니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문제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한지의 논쟁은 접어두더라도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일본'이 과연 사과할 의지가 있냐하는 것이고 이에대해 마땅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目 次Ⅰ. 서론Ⅱ. 袁世凱 와 軍閥政治1. 원세개와 淸의 滅亡2. 軍閥政治Ⅲ. 新文化운동1.『新靑年』과 文學改革혁명2. 新思想 운동Ⅳ. 五·四 運動1. 5·4 운동의 배경2. 5·4 事件3. 5·4 운동의 확산4. 6·3 운동5. 上海의 三罷 투쟁Ⅴ. 五·四 운동의 意義참고문헌Ⅰ. 서론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이며 암흑 속에 있는 중국 민중에게는 등불과 같았으나, 그것을 유발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중국은 일본에게 멸망당한다는 위기감이 널리 민중 속에 있었다는 것이 5·4운동을 국민적 규모로 투쟁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학생의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5·4운동은 민중의 저항의식을 깨우쳤으며 6·3운동을 거쳐서 공전의 민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과거의 소수의 志士仁人 의 혁명운동과 정객과 군벌의 세력다툼과는 전혀 이질적인 정치운동이며, 도 기아와 빈곤에 쫓긴 절망적인 폭동과 명확히 구별되는 자각적 민중운동이었다.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민중이 자기의 생활의 場에서 일어나 조직을 만들고 연합함으로써 政界라는 특수사회와는 관계가 없는 장소에서 정치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 후로 중국의 역사는 이 민중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환하게된다. 모든 사상·언론·정책·운동은 이 민중과 어떻게 관련되느냐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발생하는 갖가지 일들이 역사에 대해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평가할 경우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는 하는 의미에서 5·4운동은 새로운 역사적 단계를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Ⅱ. 袁世凱와 軍閥政治1. 원세개와 靑의 滅亡1908년 즉위한 나이 어린 溥儀 대신 부친 순친왕(醇親王)이 대풍(戴 )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정치에 방해가 되는 直隸總督 겸 北洋大臣인 원세개를 면직시켰다. 봉기가 일어나자 이미 통치기반이 흔들리고 있던 淸은 남창봉기가 일어나자 원세개에게 사태수습을 의뢰하였다. 지방의 각 省이 혁명에 호응하여 계속 독립을 선포하여 사태가 약화되자{) 당시 淸의 관할하의 지역은 直隸·河南·吉林·黑龍江 등의 몇 성에 불과 원세개는 마침내 帝制취소를 포고하고 총통 자리만이라도 보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 울분 끝에 1961년 6월에 병사하였다. 원세개가 죽자 부총통이었던 여원홍(黎元洪)이 임시 총통이 되어 혁명파와 협상하고 국회와 임시약법(臨時約法)을 부활하여 시국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군벌들의 암흑정치는 오히려 원세개가 사망한 이후에 더욱 심화되었다.2. 軍閥정치원세개 사후 중국은 군벌할거시대가 전개되었는데, 각지에 분포되어 있던 북양군이 원세개 사후 서로 독립하여 할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벌의 분포를 보면 北洋군벌은 그가 죽은 다음에 환계(晥系=安徽派: 단기서)와 직계(直系=直隸派: 풍국장, 曺 )로 나뉘어 졌다. 그리고 북양 군벌에서 떨어져 나온 풍계(馮系: 馮玉祥), 만주동북의 봉계(奉系=奉天派: 張作霖)가 있었다. 이 밖에 산서의 염계(閻系=山西派: 閻錫山)와 서남군벌로 전계( 系=雲南派: 당계요)와 계계(桂系: 陸榮廷), 월계( 系=廣東派: 陣炯明) 등이 있다.{) 신승하, 『중국사』, pp 458.이같이 각 지역에 근거한 군벌은 무력양성과 세력 신장을 위해 수십 종의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 징수하고 또 제국주의 세력과 야합하여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제공하는 대신 재정적 지원과 후원을 받았다. 그리고 서로 이합집산하면서 대립 충돌하였고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중국의 혁명과 근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봉건적 독소가 되었다.{) 이춘식, 『中國史序說』, pp 533.원세개 사후 북경정부를 둘러싼 싸움은 처음에 환파와 직파의 대립이 중심이었다. 원세개가 죽자 여원홍이 대총통, 풍극장이 부총통, 단기서가 국무총리가 되었는데 이때에 정치적 실권은 국무총리인 단기서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여부를 놓고 찬성한 국무총리 단기서와 반대의 국회가 충돌하였다. 중재과정에서 여원홍은 단기서를 해임하고 신변의 호위를 위해 안휘성의 張勳을 불러들였는데 장훈은 북경에 들어오자 즉시 쿠데타를 일으켜 퇴위하였던 선통제 부의를 옹립하는 復 사건을 다.{) 金時俊,『中國現代文學史』, 지식산업사, pp 74-76.당시 《신청년》은 봉건사회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儒敎의 윤리와 사상에 대한 철저한 비판, 白話운동의 전개, 대가족제도의 부정, 여성 해방 등의 주장을 전개했고 썩은 구사상을 버리고 新思考로 자각된 청년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신청년의 이 같은 논조는 암흑 속에서 좌절되고 고민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가슴에 희망과 빛을 부여하였다.1917년에 채원배(蔡元培)가 북경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진독수와 이대조(李大釗)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대거 북경대학 교수로 초빙하고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이래 致富와 관직승진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던 기풍을 일신하여 사상적 자유에 입각한 학문연구의 본산으로서 북경대학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자유주의적 진보적 원칙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하여 학생들의 개인적인 정치활동 참여를 허용하고 학생자치 및 학생단체의 설립을 인정하였다. 또한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여 新지식인층 상호간의 제휴가 北京大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진독수 이대조 이외에도 호적 周作人도 채원배의 초빙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원임의 錢玄同 沈尹默 劉半農 등과 함께 《신청년》에서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은 전부 북경대학에 모이게 되니 북경대학은 신문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1917년을 문학개혁의 제창기 라고 한다면 1918년은 문학개혁의 실천기 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문학개혁의 시도는 詩에서 시작되어《신청년》 제4권 1호에 중국 최초의 현대시 9수가 발표되었다.{) 胡適의「 子(합자)」·「人力車夫」·「一念」·「景不徙(경불사)」와 沈尹默, 「 子」·「人力車 夫」·「月夜」, 劉半農의 「相隔一層紙(상격일층지)」·「女兒小蕙週歲日造象」이다.이 작품들은 문학개혁 제창 이후 최초의 작품이 된다. 이 시들은 오랜 전통의 틀 속에 갇혀 있던 시의 형식과 내용을 해방시켰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호적은 모든 국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口語로 만들어 진 문학은 산 문학(活文學) 이고 그렇지 않은 문학은 죽은 문학(死文學)타낸 것을 1918년 5월에 체결한 「日華共同防敵協會」 즉 비밀군사조약{) 이 비밀조약은 일본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섭(시베리아출병)과 관련하여 혁명세력이 극동 전역 의 평화와 안전을 침해할 위험 에 대비해서 중국과 일본은 共同 으로 방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일본군의 중국영내에서의 자유행동과 군사기지 설정 및 중국군의 일본군에 대한 예속화를 실질 내 용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군의 중국令 내에서의 자유행동·군사기지설정 및 중국군 의 일본군에 대한 예속화를 초래한 것이었다.이다. 이러한 단기서의 독재적·매판적 정책에 대해서 서서히 저항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는데, 비밀교섭을 알아낸 在日中國人유학생들은 반대운동을 개시하고 항의의 표시로 귀국하여 국민에게 위기를 호소한 것이 국내학생·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귀국유학생들의 구국활동에 국내 학생들이 즉시 호응하여, 군사협정 조인반대 청원데모를 벌였고 각지의 총상회(總商會)도 호응을 하였다. 이 반대운동은 규모가 커지지도 않았고 또 눈에 뜨일만한 성과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군벌정권과 제국주의 세력의 결탁과 그 반동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운동의 실패경험으로부터 청년·학생들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각지에 작은 단체가 생겨났다. 운동을 주도했던 일부 학생들은 학생 구국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시켜 다음해 5·4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학생과 청년들의 움직임과 함께 일반 국민 중에서도 군벌 정치에 비판적인 움직임이 일어나, 1918년 10월에는 徐世昌이 대총통에 취임하고 단기서가 국무총리를 퇴임한 것을 계기로 군벌 전쟁 반대와 남북 和平통일의 함성이 급격히 높아져 갔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구미제국주의 강국들도 다시 중국에 눈길을 돌려서 이권확보를 위해 내전정지를 요구해 왔다.이러한 내외의 움직임에 밀려서 1919년 2월부터 열린 것이 上海南北和平會議다. 그러나 南北쌍방이 모두 자기세력에 손상을 줄만한 결정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을 뿐만 넘겨줄 수 없다 ·玉翠할지언정 瓦全하지 말라 · 국민이 國賊의 운명을 판결해야 한다 {) 이 구호들에는 정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당면 과제로 생 각했던 국가 주권의 수호와 통일 정부의 수립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북경 정부에 게, 정부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의 직분을 강력하게 다그치려는 의도를 명확히 나타내고 있었다.학생의 집합이 끝날 무렵 步軍總領 李長泰와 경찰총감 오병상(吳炳湘)이 나타나서 시위의 중지를 권고했지만, 학생들은 거절했고 경찰 측에서도 학생시위가 큰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해 힘으로 시위를 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학생들도 대부분은 시위의 목적이 국민의 분기를 촉구한다는 것과 외국에게 중국 국민의 민의를 전달한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평온한 시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어쨌든 위와 같은 구호를 내걸고 천안문을 떠난 시위대는 남쪽 中華門을 거쳐 前門을 경유해서, 다시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는 東交民巷 서쪽 입구에 도착했다. 이 때 시위대는 5월 3일 저녁과 4일 오전의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우선 미국공사를 만나서 公理 의 실천을 주지해 줄 것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사관 구역의 철문 앞까지 갔을 때 경비 중이던 군경에게 행진이 제지되었다. 학생들은 단석붕(段錫朋)·허덕형·나가륜(羅家倫) 등을 대표로 선출해서 미국과 영국공사관에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이날이 마침 공휴일이라 공사들이 없다는 핑계로 공사관 직원만 만나보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2시간동안 초여름의 강렬한 태양의 직사를 받으면서 길 한가운데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교섭 추이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교섭이 뜻대로 되지 못하자 격분의 감정이 고조되어 曹汝霖*의 집으로 가자! 라는 선동이 일어났다. 시위대가 조여림의 집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던 것은 시위 지도부의 최초 계획과는 무관했다. 단지 일부 학생들만이 조여림을 비롯한 매국노 가운데 일부를 테러할 계획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