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란 무엇인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중국엔 고대로 신화라는 말조차 없었다. 이 말은 역시 근래에 와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신화란 일반적으로 자연과의 투쟁의 반영이요, 또 광범한 예술적 보편화에 있어서의 사회생활의 반영인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탄생이 현실생활에 바탕을 둔 것이지 인류의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신화의 발생은 인류가 대자연에서 일어나는 각종현상, 예컨대 풍우, 번개, 수풀 속에서의 큰 불, 태양과 달의 운행, 무지개나 구름이나 안개 같은 형상... 이런 것들을 대하는 사이에서 얻는 경이로운 감각인 것이다. 그 놀라움을 안고 해석이 나지 않았을 때 그것들을 영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해, 달... 등을 신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가지가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메뚜기 같은 작은 생물마저도 신으로 여겨 숭앙하였다. 즉 이른바 애니미즘(animism)이다. 이러한 명연한 관념가운데서 원시신화와 원시종교는 생성된 것으로 이러한 원시신화 내지 원시 종교야 말로 정히 원시인들이 생활 가운데서 발전시키고 날로 총명해지는 두뇌로 창작해 낸 것이다. 또 신화 가운데서는 여러 신들의 저명한 자손들이 어떻게 하여 소를 부려서 밭은 갈았는가, 어떤 식으로 농업상의 공작기구를 발명하였는가, 어떻게 해서 수레와 배를 창조하였으며 어떻게 적을 막을 활이나 화살 그 밖의 무기를 만들었는지, 또 음악과 가무를 창제하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를 제조하였는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전설에 있어 창조와 발명은 태고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노작에 대한 찬미를 항상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고대신화에는 일찍이 여러 군데 신향, 악사의 전성이 있었는데. 이러한 신선고장에서의 이상의 극지는 일, 즉 힘써 일하지 않고도 세상을 유쾌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중국 고대 신화의 발자취중국이나 인도, 그리스, 이집트 등과 같은 몇몇 고대 문명 국가들은 제각기 풍부한 고대 신화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나 인도의 신화는 매우 완벽하게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는 데 반해 유독 중국에서만은 그렇지가 못하다. 원래 중국의 신화도 풍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전해지는 과정에서 많이 상실됨으로써 단편적인 신화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것마저 고인들의 저작 속에 분산되어 있었던 까닭에 내용상 조리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나 기타 민족의 신화와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까마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하늘을 비행하는 몽상을 꾸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에 관한 이야기가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빨리 달리고 싶은 몽상 때문에 달리는 신발에 관한 이야기도 있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외국 신화 중에 보이는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중국 신화에는 장비국(긴팔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나오는 장비(긴 팔)라든지 기고국(기이한 다리를 갖고 있는 나라)의 비거(날아 다니는 수레), 그리고 곰으로 변신하여 환원산을 뚫고 홍수를 다스렸다고 하는 우와 하룻밤 사이에 열벌의 옷을 만들었다고 하는 7선녀의 자매들 등의 각종 생동감이 넘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소박한 환상의 소산물이자 당시의 사회의식을 농후하게 띄고 있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중국의 고대 신화 중에는 선향락토에 관한 전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선향락토(仙鄕樂土)에 관한 최고의 이상은 불경이식, 부직이의(不耕而食, 不織而衣;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옷감을 짜지 않고도 잘 입을 수 있는)의 경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곧 힘들게 일을 하지 않고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중국의 단편적인 신화는 시인이나 철학자에 의해 적지 않게 보존되어 왔다. 이를테면 굴원의 이소나 구가, 천문, 원유와 같은 아름다운 시편속에는 신화나 전설의 매우 풍부한 자료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천문은 각종의 기괴한 내용을 두루 담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의 형식을 빌린데다 전부가 문어체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1천 8백여 년 전 동한의 왕일이 초사에다 최초로 주석을 달면서부터 문의를 벗어난 억설을 시도함에 따라 후세인들은 더욱더 자기 주장만을 펴기에 이르렀다.♣중국신화의 특징중국의 신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첫째, 중국의 상고신화는 타민족신화들과는 달리 완전한 신화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말하자면 주신이 없다. 아마도 중국민족이 원래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부족 사이의 전쟁과 접촉을 통해 타민족을 흡수하고 융합한데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 때문에 중국신화는 중신(衆神)을 통수하는 주신이 없을 뿐 아니라 같은 유형과 내용의 신화마저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계통이 다른 신화가 서로 융합된 결과로서 예를 들어, 천지개벽에 관해서도 음양이신, 여와, 반고등 서로 다른 신화가 있음을 볼 수 있다.둘째, 중국신화는 비교적 원시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지혜의 신, 희열의 신, 질투의 신, 등의 수많은 추상적 개념의 신들이 등장한다. 중국신화의 개념신은 단지 생명 혹은 죽음의 신인 대사명(大司命), 소사명(小司命)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절대다수는 자연신이거나 씨족신, 영웅신이다. 이밖에도 유럽과 아시아의 각 민족 신화에는 무역을 관장하는 신, 문자를 관장하는 신 등 사회적 속성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신화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개념신과 사회적 속성을 갖춘 신은 비교적 후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신화는 비교적 원시적이라고 볼 수 있다.셋째, 중국신화의 신들은 순수한 사람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비교적 적고 대다수가 짐승모습이거나 반인반수의 형상이다. 아마도 이는 원시 토테미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넷째, 중국신화에는 그네들만의 독특한 장르인 선화(仙話)가 있다. 봉건사회에 이르면 신화와 선화가 합쳐져 신화의 변종이 생겨난다. 신화와 선화의 구별을 살펴보자. 선화는 전국시대 후기의 신선사상과 한(漢) 이후의 도교사상을 선전하는 것으로 곡식을 배제하고 수심양성(修心養性)하는 것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그대로 신선에 관한, 장생불사에 관한 설화로서 중국신화의 변종 혹은 말류인데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선사상에 기반을 둔 이러한 선화는 제(齊) 선왕(宣王)과 위왕(威王), 연(燕) 소왕(昭王) 같은 당시 군주들의 애호를 받아 훗날 도가(道家)의 청정무위사상과 결합하여 도사들에 의해 이리저리 선양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 중심내용은 연단채약(煉丹採藥)하여 먹고나면 날아올라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화는 신성성을 근간으로 하는 신화와는 달리, 신선사상과 도교의 종교적 색채를 중심으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중국의 신화와 그 신화를 만든 신들▶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자연은 어떻게 생겼났는가?아득한 옛날 하늘과 땅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때 우주의 모습은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상태로 마치 거대한 계란 모양과도 같았다. 인류의 조상 반고(盤古)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업는 커다란 거인이었다. 그는 이 칠흑처럼 깜깜한 혼돈 상태의 게란 속에서 잉태되어 무려 1만 8천 년 동안이나 계속 잠을 잤으며 잠자는 동안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어늘 날 반고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부시시 몸을 일으킨 반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칠흑처럼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주는 반고가 그대로 참고 견디어 내기에는 너무나 어두운 혼돈이었다. 반고는 눈 앞의 암흑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어디선가 도끼를 가지고 와서는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쩍하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이 거대한 계란이 갑자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많은 조각들 가운데 가볍고 맑은 것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다. 그리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되었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나뉘어진 이후 반고는 또다시 하늘과 땅이 합쳐질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머리로는 하늘을 받쳐 이고 발로는 땅을 밟은 채 하늘과 땅의 한가운데에서 있었다. 당시 하늘과 땅은 나날이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변함에 따라 반고의 몸 역시 함께 변화해 갔다. 반고가 임종에 이르자 그의 온 몸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내쉬는 숨은 맑은 바람과 구름으로 목소리는 우레로 왼쪽 눈은 태양으로 오른족 눈은 달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의 수족과 몸뚱이는 대지의 사극과 이름난 다섯산으로 그의 피는 내와 강으로 근육은 길로 피부와 살은 비옥한 밭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로 피부와 그 위에 난 솜털은 풀과 나무로 이빨과 골수등은 번쩍거리는 금속과 단단한 암석과 아름다운 진주와 옥석으로 변하였다. 심지어 아무 쓸모도 없는 땀조차도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비와 이슬과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로 변하였다. 인류의 조상 반고는 새로이 탄생한 이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바쳤던 것이다.▶중국인의 보편적인 최고신 옥황상제도교의 고급 천신으로 삼청이나 사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옥황대제(玉皇大帝)에 대해선 부녀자건 어린 아이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옥황대제는 도관내 옥황전에 있는 나무나 흙으로 만든 옥황이 아니고 모든 신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천신과 지기와 인귀들을 총괄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최고의 옥황대제이다. 위세 당당하고 명성이 쟁쟁한 옥황대제는 당나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옥화대제가 나타난 이후, 송 진종의 추존으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여러 초능력을 가진 모든 중국인이 숭배하는 보편적인 최고의 신으로 정형화되었던 것이다.
진의건국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 B.C.909-B.C.895) 으로부터 진읍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 고대 중국 산시[陝西] ·산시[山西] 지역에 거주한 부족.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 B.C.781-B.C.771)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 B.C.770-B.C.720)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섬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로 승격하였다. 이가 양공(襄公 B.C.698-686)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B.C.715-677) 때부터 정복지를 현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감숙성(甘潚省) 동부에서 위수(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 : 섬서성 봉상현)으로 이동하였다.춘추시대의 진B.C. 659년에 이르러 목공(穆公 659-625)은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등을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으며,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자,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나라에 빼앗기는 등 진(秦)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나라 였으므로 초(楚)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나라와 싸웠다. 진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의 땅을 통일하였다.전국시대의 진B.C. 362년 효공(孝公 642-634)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 ))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보수파(保守派:儒家)와 투쟁하면서 형법(刑法)·가족법·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제국(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함양(咸陽)으로 옮겨 함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 B.C.337-B.C.311)은 공손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촉(蜀), 즉 사천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나라로부터는 한수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소양왕(昭襄王 B.C. 306-B.C. 251) 때에 이르러 성도(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사천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하남(河南)의 진(陳)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귀주성(貴州省)의 동부와 호남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 ‘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진의 통일B.C.247년에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 B.C.247-B.C.210)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B.C. 235.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 장양왕(莊襄王)때 승상을 지냈다.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 ?-BC 208. 봉건제에 반대하고 군현제를 진언하여 정위(廷尉)에서 승상(丞相)으로 진급하였고, 분서갱유를 단행시켰다.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전국말기 주변국의 사정을 보면 한(韓)·위(魏)·제(齊)는 이미 국력이 고갈되어 진에 대항할 수 없게 되고, 초(楚)는 영토는 넓었으나 아직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조(趙)는 장평전 이후 국력이 크게 기울어졌다. 그러므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진은 국경을 인접하고 있던 한을 먼저 멸하였다. 한은 원래 땅이 좁고 인구·물산 등이 모두 부족하였으며, 또 이미 영토의 절반 이상을 진에게 점령당하였다. 이같은 처지에서 이사(李斯)의 유혹에 빠진 한은 진에 대해 옥새(玉璽)를 바치고 칭신(稱臣) 하였으며, 남양 땅을 헌납 하였다. 그러나 진은 불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B.C.230년 한을 정벌하고 한왕을 포로로 하였다. 이에 한은 6국 가운데 제일 먼저 진에 병탄되었다.한을 멸망시킨 뒤에 B.C.228년 진은 다시 조를 멸하였다. 조는 비록 쇠약해졌으나 명장이 있어 진에 대항하고 있었는데 그를 모함하여 피살되게 하고 수도 한단(邯鄲)을 함락하였다. 마침내 조는 6국 가운데 두 번째로 진에 병탄되었다.한·조를 멸망시킨 후 진은 다시 위를 공략하였다. B.C.225년 위의 수도에 강물을 끌어들여 성을 파괴하고 위왕을 살해하고 위를 멸망시켰다. 위를 멸망시킨 진왕은 초를 멸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냈으나 초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후 여러번의 공략 끝에 B.C.223년 초를 멸망시켰다. 또 B.C.222년에는 燕을 공략하였다. 요동에 있는 연을 공략하여 연왕을 사로잡고 연을 멸하였다. 그리고 제의 수도를 기습 공격하여 제왕을 사로잡고 B.C.221년 제도 멸망시켰다. 이에 진은 마침내 6국을 병탄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건립하게 되었다.진왕 정(政)은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진나라의 통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때까지 행해져 온 주나라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새로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이 바로 군현제도(郡縣制度)이며 중앙 정부를 강력히 만들었던 정책으로, 주나라의 봉건제도(封建制度)와는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B.C. 220년부터 지방순시를 시작하여 5차례의 순시를 하였다. 또 그는 강력한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그 때까지 지방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쓰던 문자를 통일시키고 물건을 재는 도량형(度量衡)의 크기.길이를 통일시켜 상업과 문화의 발달을 촉진 시켰다. 그리고 이사(李斯)의 고문을 중요시 여겨 그의 고문에 따라 나라를 적절히 다스려 진나라는 내정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시황제는 대외적으로 힘을 뻗어 만주.몽고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광대한 대제국을 이룩하였다.그러나 그는 당시 백성들의 사상을 통일하기 위해 국가의 이념과 다른 모든 유학(儒學)의 사상을 통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유가의 학자들이 시황제의 정치를 비판하고 헐뜯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B.C. 213년 시황제는 역사책, 의약, 농업, 점치는 책 등 법가 사상에 관한 책만 제외하고, 수만 권의 책을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시황제의 '서적 소각 사건'으로 유생들과 학자들은 분노했고, 그들은 더더욱 시황제의 악행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진 시황은 B.C. 212년 약 460 명의 유학생들을 도처에서 잡아들여 산채로 땅에 묻어 죽이는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