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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학] 중국금융 평가C아쉬워요
    目 次Ⅰ. 金融改革의 展開過程 11. 改革開放 以前의 金融體制 (1978年 以前) 12. 體制轉換中의 金融體制(1978∼1993) 13. 市場經濟條件下의 金融制度(1993年 以後) 2Ⅱ. 現行 金融機關의 種類와 性格 21. 中央銀行 - 中國人民銀行 (People's Bank of China) 32. 政策性銀行 (Policy-related Bank) 33. 商業銀行 44. 非銀行金融機關 4Ⅲ. 金融機關의 不實實態와 그 原因 51. 商業銀行 51) 不實債權의 規模2) 貸出形態2. 非銀行 金融機關 63. 不實의 原因 7Ⅳ. 金融産業의 對外開放 現況 7Ⅴ. 韓國金融機關의 中國進出 現況 7Ⅵ. 中國 金融改革의 課題와 前望 81. 金融改革의 課題 81) 中央銀行의 技能 强化(獨立性 强化)2) 國有 商業銀行의 企業化 및 商業銀行化3) 金融機關 構造調整 勞力의 擴大4) 對外開放 擴大 및 外換管理制度 改善2. 金融改革의 前望 11Ⅰ. 金融改革의 展開過程1. 改革開放 以前의 金融體制 (1978年 以前)스탈린 모델의 중앙 집권경제체를 확립한 중공은 모든 생산수단과 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취하고 금융부분 역시 봉쇄하거나 중국인민은행에 흡수하거나 병합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인민은행이 실질적으로 중국유일의 은행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민은행은 정부의 한 단위로 중국인민은행의 소유자산은 모두 정부 소속이며, 직원 역시 공무원신분이였다. 따라서 당시 중국인민은행의 주요임무는 무원의 명령에 따라 재정자금을 분배하고 국영기업자금을 관리하는 정부의 회계기구였다. 기업은 그들의 영업이익을 정부에게 주고, 정부는 은행을 통해 기업의 적자를 메꾸어 준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중국의 금융제도는 기본적인 금융상품과 금융시장이 부존한 미완성적인 금융체계라고 할 수 있다.2. 體制轉換中의 金融體制(1978∼1993)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 중에 기존의 금융체계의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중국정부는 적합한 경제환경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국은행이 단일은18일에는 농촌금융을 담당하는 중국농업개발은행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2) 旣存의 專業銀行이 一般的인 商業銀行으로 轉換될 수 있는 基盤造成3) 1995年 中央銀行法 및 商業銀行法의 制定1995년 중앙은행법 및 상업은행법의 제정으로써 인민은행의 중앙은행화, 전업은행의 상업은행화를 위한 법적 조치가 정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중국의 금융개혁은 기본적인 정비를 종료하였다 할 수 있다.4) 外換管理制의 改革1994년부터 처음으로 인민폐환율이 일원화되었는데 이 개혁의 성공을 통해 이후 인민폐 환율이 안정적인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5) 金融機關의 多樣化중앙은행 산하에 정책은행, 국유상업은행, 기타 상업은행, 전국적 상업은행이 생기고, 또한 신탁투자회사, 재무회사, 리스회사, 도시 및 농촌신용합작사, 중국인민보험공사 등의 보험회사의 비금융기관의 탄생으로 인해 중국의 금융기관이 다양화되었다.Ⅱ. 現行 金融機關의 種類와 性格1. 中央銀行 - 中國人民銀行 (People's Bank of China)중국 인민은행은 중국의 중앙은행으로써 그 설립연도는 1948년 12월 1일이다. 현 29개 정부부처 중의 1개 부서로서 27위 서열 차지하며 그 총재는 戴相龍이다.) 1944년 10월생. 江蘇省 儀征에서 출생하였으며 1967년 中央財政金融學院 會計學科를 졸업하고 1973년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주요경력 : 중국인민은행 강소성 分行 副科長, 강소성 豊縣 부현장. 중국농업은행 강소성分行 副科長·부처장·부행장. 1985년 중국농업은행 부행장. 1989년 중국교통은행 黨組서기·지배인 겸 부이사장, 중국태평양보험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3년 7월 중국인민은행 부행장. 국무원 부빈개발지도팀 부팀장을 지내고, 1995년 6월 중국인민은행 행장으로 부임했다. 1997년 7월 중국화폐정책위원회 제1회 주석. 1998년 3월 18일 중국인민은행행장 재부임. 중공 제14회 중앙후보위원이며, 제15회 중앙위원도 맡고 있다.1995년 발표된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인민은행법에 명시된 인민은행의전업은행이 발행한 금융채 조달자금으로 영리사업은 전업은행 융자자금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정부의 재정지출은 늘어가고 영리사업에 대한 은행융자 증가로 신용팽창을 야기하였다. 또한 기업은 자금조달을 위해 무분별한 사채 및 주식을 발행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금융개혁을 통하여 공공사업과 중점사업은 3개의 정책성 은행이 맡게 하고 영리사업은 과거 전업은행을 상업화하여 상업은행이 대출을 하도록 하였다.정책성 은행은 3개가 있는데, 국가 중점사업의 융자를 수행하는 국가 개발은행, 수출입신용, 수출입 보험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중국수출입은행, 농촌의 금융을 담당하는 중국농업개발 은행이 그것이다.3. 商業銀行1) 國有商業銀行 (State Commercial Bank)국유 상업은행을 살펴보면, 중국 공상은행은 도시 상공업에 대한 신용대출 저축과 결산을 주요 업무내용으로 하는 은행이다. 중국 농업은행은 농촌 신용대출 계획과 집행업무를 조직하며, 농촌의 각종 예금과 대출들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중국 인민건설은행은 고정자산투자(건축업)에 쓰이는 국가재정의 지출과 대출을 관장하고 건축과 관련된 자금 대출, 채권을 발행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은행은 중국의 외환 업무를 처리하는 전문 은행이다.2) 全國綜合銀行 (Comprehensive or Universal Bank)전국성 상업은행은 전국적으로 영업망을 구축하고 종합적인 금융업무를 경영하고 있는 은행으로 주식제로 운영된다. 이에 중신보업은행, 교통은행, 화하 은행, 민생은행, 광대은행이 있다.3) 地方商業銀行지방상업은행은 1987년 이후 지역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상해, 심천지역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은행으로 해당지역에서만 영업이 가능한 은행이다. 광동발전은행, 심천발전은행, 복건흥업은행, 상해 포동발전은행 등이 있다.4. 非銀行金融機關1) 信託投資公司신탁투자회사는 은행들이 대출한도를 우회하려는 의도로 산하기관으로 설립되어 정부 및 기업의 잉여자금을 예치하여 투자프로젝트의 재원을 조달하는데 일조하였행 보다 높다고 볼 수 없다. 1996년 말까지 제2금융권의 부실자산은 총 자산의 50% 차지한다.신탁투자공사의 경우를 보면, 많은 신탁투자공사들이 1990년대에 들어 전통적으로 해온 대출에 의한 투자활동을 하지 않고, 위험성이 큰 주식이나 중개업 등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켰는데, 이러한 사업에 대한 투자실패는 신탁투자공사들의 부실을 가중시켰다.3. 不實의 原因1) 政治的 要因 - 당정간부의 간여, 지방정부의 개입과 압력행사중국 금융기관의 부실을 가져온 정치적 요인으로는 첫째, 지방정부의 관료들이 금융기관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금융기관에 대출결정 자율성이 결여되어 왔다는 점이다. 보통 상업은행 임직원의 인사권은 지방정부가 장악하고 있어 상업은행은 지방정부로부터 가해지는 각종 외압에 시달리고 있다. 지방은행을 관리감독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인민은행 지방분행들은 단지 지방정부의 경제 건설을 지원하는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할 뿐 지방정부의 부당한 금융행위를 묵과하고 있는 실정이었다.둘째, 국유상업은행들은 국무원에서 승인한 사업에 대한 정책금융을 「상업은행법」에 의거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했고, 대출의 회수여부가 불확실하더라도 정책금융을 계속 취급할 것을 요구받아 왔다.셋째, 중국 정부 당국의 방침이나 약속과 정책 등이 자주 바뀌어 왔다. 중국 중앙·지방 정부의 방침이나 약속 또는 정책을 믿고 대출을 한 은행들은, 부실채권이 발생하면 정부가 방침을 바꾸거나 약속·정책을 백지화하는 사례가 가끔 발생하여, 부실채권은 고스란히 은행의 몫이 된다.2) 法·經濟制度的 要因 - 다층적 관리·감독체제, 부실국유기업에 대한 지 원, 중앙은행의 자주권 부족, 좁은 지역에서의 극심한 경쟁중앙은행은 국무원의 지도하에 금융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업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금융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업무는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지점·출장소는 업무·인사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해당 지역정부의 심한 간섭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주요 지역마다 중앙은행의 , 5개의 외자독자은행 영업중이다. 외국 금융기관의 대표사무소는 540여 개 설치되었고, 170여 개의 외국계 금융기관 영업중이며, 외자은행의 종자산은 330억 달러, 대출총액은 231억 달러, 예금총액은 40억 달러, 96년 말 기준 중국 금융기관 총자산의 3.1%, 총외화자산의 14.2%이다.3. 中國銀行들의 海外進出 擴大1995년 말 577개의 자회사 또는 지점이 해외에 설립되었으며, 해외진출 은행의 규모는 매우 영세하고 영업기법이나 관리능력이 외국은행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4. 1996年 12月 一部 外國係 銀行에 人民幣 營業 許容인민폐 영업은 외국인과 외국기업에 한정되어있고, 중국기업이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민폐 영업은 허용되어 있지 않다.Ⅴ. 韓國金融機關의 中國進出 現況표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 은행의 중국진출 현황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출지역의 편중성의 문제이다. 상해, 북경, 천진 지역으로의 집중화로 인해서 다소간의 과다경쟁이 일어나게 되고 한국 경제에 대한 과대한 평가를 할 우려도 있게 된다. 둘째는 진출형태의 획일성의 문제이다. 중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우리나라 은행은 사무소를 통한 지점승격의 방법을 주로 택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지역경제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여 각 지역경제의 특성과 발전방향 등이 상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별로 지점, 합작은행, 자본참여 등으로 특화할 필요가 있으나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단지, 제일은행이 유일한 합자은행을 설립하였을구 분지점사무소현지법인진출일은행국민은행상해95.06.07기업은행천진97.10.21산업은행상해96.04.26북경92.12.15수출입은행북경93.02.01신한은행천진96.09.16외환은행천진93.12.29대련95.03.31북경96.08.26제일은행청도96.06.26조흥은행천진94.09.27하나은행상해96.07.19한빛은행상해95.03.14증권대우증권상해95.04.11동양증권상해96.10.08자료 :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기관 해외 진출현황, 2000.2뿐이다. 마지막 문제점은 위 결정
    인문/어학| 2002.06.20| 13페이지| 1,000원| 조회(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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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 북중관계
    북한-중국 관계Ⅰ. 탈냉전기 이전의 북한-중국 관계의 특징-'혈명관계', 혹은 '순치관계'로 묘사됨1. 북한-중국관계의 태반: 항일시기2. 국공내전시기 북한-중국관계3. 한국전쟁과 북한-중국관계4. 전후 북한-중국관계의 전개와 중·소분쟁5. 중국 대내외적 정치변동과 북한-중국관계의 굴절Ⅱ. 탈냉전기 북한-중국 관계의 변화: 전략적 협력관계로의 이행1980년대 말부터 북중관계는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인 추세에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변화를 겪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 변화 속에서 양국관계는 탈냉전이라는 환경적 요인과 기존의 동맹적 관성, 그리고 새로운 전략적 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양국관계는 동맹에서 전략적 협력관계로 변화해 왔다.1. 탈냉전 시대의 개막과 양국관계의 악화1) 탈냉전 초기: 우호관계 유지1980년대 중반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북·중 관계는 80년대 말부터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 80년대 들어서면서 이미 북·중간에는 발전노선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기도 했지만, 이는 양국의 이해관계상 억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이라는 대외환경의 변화는 이러한 양국관계의 이견을 표면으로 노출시켰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때 북한은 부분적으로나마 이전의 교조주의적인 발전방식과 대외노선을 변화하는 환경에 조금은 변화시켜나갔기 때문에 양국관계의 틈새는 그리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다.북한은 8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사회주의권 몰락과 함께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이에 북한은 위기극복을 위해 서방중심의 대외관계 확장을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전략의 하나로 북한은 그 동안 견지하던 자립경제와 사회주의 일변도의 무역 방식을 변경하여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또한 남북한 동시가입도 받아들였다. 일단 이러한 북한의 정책 변화는 북한-중국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지도부는 북한 경제의 회복을 위해 서방과의 무역관계 확대나합영·합작이 필요인들 앞에 굴복하면서 개방·개혁을 기조로 한 중국노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근접해 갔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북한 외교는 탈냉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도전 앞에서 자기 수정을 꽤하면서도 여전히 교조적이며 반서방적인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는 북한이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세계 각 국의 좌익정당들을 규합해 '사회주의 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라는 제목의 이른바 '평양선언'을 발표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중국은 양상곤 국가주석을 평양에 파견했지만 이 선언에 참여하지는 않았다.2) 한·중 수교(1992.8)와 양국관계의 냉각탈냉전 초기에 비교적 원만하던 북·중 관계는 1992년 8월에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냉각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강도 높은 실용주의 정책을 추구해 나가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한·중 수교였던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교차승인 반대'라는 자신의 일관된 주장이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더불어 거꾸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이전과는 거꾸로 북한이 수교를 간청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을 의미했다.결국 한·중 수교는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더욱이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 8월의 시점은 북한이 핵사찰 문제로 미국 등 서방에 의해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던 때였기에 이 사건으로 북한이 입은 타격은 실로 컸다.이후 북·중 관계는 냉각상태로 접어들었다. 한·중 수교 이전만 해도 조자양 중공당 총서기(89. 4), 강택민 중공당 총서기(90. 3), 이붕 국무원 총리(91. 5), 양상곤 국가 주석 등 중국 최고위급 인사들이 빈번히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역시 1989년 11월과 1991년 10월에 중국을 방문하는 등 양국관계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중 수교 후 양국 정상들의 상호방문은 뚝 끊겼다. 이는 역학구도와 역사적 관행을 고려해 양국의 전통적인 정치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특히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핵문제 타결이 이루어지면서 양국관계가 적대에서 협상단계로 이행하자, 중국은 여기에 대응해 북한과의 관계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한 1995년 10월, 중국 공산당 총서기 강택민은 조선노동당 50주년 기념 주중 북한대사관 연회에서 "앞으로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은 변함 없이 중·조 우호합작 관계를 유지·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다."고 이례적으로 강한 톤으로 양국관계의 유대를 강조했다.북한-중국 관계가 비록 동맹관계로의 복원은 아니지만 정상화 단계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였다. 북한은 이때부터 그동안 단절되었던 대 중국 정상외교를 복원시키며 적극적으로 관계개선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6월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홍성남 내각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 이후 총리급 이상으로는 8년만의 방중이었다. 따라서 김영남의 중국 방문은 1992년 4월 양상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끝으로 끊어졌던 양국 정상급 지도자들의 상호방문 관례를 복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이는 결국 심각한 내부자원 고갈과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진 북한이 중국과의 장기적인 관계소원은 결코 이득이 될게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특히 2000년 5월 말에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비공식 방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김정일은 중대사안에 대해서 '사전에 통보한다'라는 전통적인 관례를 활용하여 비밀 방중을 전격 단행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면서 몇 가지 외교적 이득-중국과의 관계를 공고화시키고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지원을 약속 받는 것-을 챙기게 되었다.이렇듯 북한-중국 관계가 회복되는 중요한 계기는 역시 북한의 경제난에 있었다. 중국은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북한과 현금 결제 및 원조금지 등 새로운 경제관계를 모 시사했다.그런데 중국의 대규모 대북경제지원과는 달리 90년대 양국의 무역관계는 븍한의 극심한 무역역조 속에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8년까지의 양국 공식 교역 현황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북한-중국 경제교역 현황단위: 억 달러*************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1998북한의 대중수출2.362.341.851.240.861.552.971.990.630.691.220.57북한의 대중수입2.773.453.773.585.255.416.024.244.864.975.353.56총계5.135.795.624.826.116.968.996.235.495.666.574.13한편 한·중 수교로 북·중 관계가 냉각에 접어들었을 때도 군사관계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한·중수교가 있던 1992년에 이례적으로 3개의 군사대표단과 5개의 우호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했다. 이는 북·중 군사동맹관계가 한·중 수교에 크게 영향 받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실제로 중국은 1996년 5월에 맺은 북한에 대한 원조협정에 군사원조를 포함시킴으로써 양국관계의 특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90년대 양국의 군사교류는 북한측이 상대적으로 군사력 강화나 북·중 군사관계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는 실무대표단 파견에 치중하는데 비해, 중국은 양국의 유대를 상징적으로 과시하는 우호대표단 파견에 치우침으로써 대조를 보였다.중국은 90년대 들어서 북·중 군사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한 것을 비롯해 94년과 95년에도 대표단을 파견해 양국 간의 깊은 군사적 유대를 과시했다. 1997년 기준으로 중국 권력구조상 군 최고지도부를 이루고 있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9명 중 5명이 중국인민지원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이렇듯 냉각 후 회복된 북·중 관계는 냉전기 동맹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전략적 협력관계로 정립되었다. 전략적 협력관계력지침'(신가이드라인)의 적용 대상에 한반도와 대만 해협이 포함되면서 중국과 북한의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크게 고조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북·중간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북한-중국의 정치적 동맹관계가 실용주의적 흐름에 휩쓸려 그대로 해체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국관계는 이제 중국을 자기 체제의 마지막 안전판으로 여기는 북한의 이해와 '사회주의 북한'의 동요를 막고 미국을 견제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동맹에서 전략적 협력관계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양국 간에 여전히 과소평가할 수 없는 정치·군사적인 실리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Ⅲ. 탈냉전기 북한-중국 관계 변화의 원인1. 대외환경의 변화1) 사회주의권의 몰락 - 사회주의 국제시장 소멸사회주의권의 몰락은 그동안 북한이 크게 의존했던 사회주의 국제시장을 소멸시켰다. 90년대의 북한은 이미 내부자원의 고갈로 인해 외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으면 체제유지가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그 동안 북한 경제의 최대 지원국이던 소련의 붕괴와 뒤이은 러시아의 경제불안은, 경제지원은 고사하고 양국 간의 정상적인 경제관계마저도 완전히 차단시킴으로써 식량과 에서지난을 심화시켰다.2) 경제적 실용주의탈냉전은 북·중 관계를 특징 지웠던 동맹관계의 기본요소인 이데올로기를 국제사회의 관행기준으로부터 추방시키고 대신에 경제적 실용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중국은 대외관계의 운용을 급격히 이데올로기에서 경제적 실리중심으로 전환시켰으며, 대북 관계도 여기서 예외일수 없었다.중국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양국 무역에서 국제가격의 절반이하로 상대방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우호가격제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져 온 기존의 방식 대신에 북한에 시장원리에 기초한 현금 결제 방식을 요구했다. 반면에 탈냉전에 수동적으로 대처한 북한은 여전히 중국이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동맹자로 인식해 주기를 원했다 바로 여기서 양국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는 한·중수교를 계기 차이
    인문/어학| 2002.06.20| 9페이지| 1,000원| 조회(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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