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ne d'Arc 와 역사의 비교유럽의 가장 처절했던 전쟁 중의 하나인 백년전쟁, 프랑스를 구한 애국소녀 Jeanne d'Arc의 스토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막상 감상문을 쓰자니 한 번 더 보아야 했다. 또한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보았을 때, 심리묘사가 많았던 연기의 이해적 측면에서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비디오방에 가서 Jeanne d'Arc DVD를 빌려서 새로 감상해 보게 되었다. 과제를 핑계 삼아 한 번 더 보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더 의미 있는 접근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용히, 강하게 밀려오는 신의 계시에 대한 의문과 계시의 신빙성에 대해서 혼란스러웠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린 소녀가 전쟁에 나섰다는 것 그 자체가 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옳고 그름을 일일이 따지려 들지 않기로 했다.영화는 2부로 되어있으며 내용 또한 크게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Jeanne의 성장과정과 백년전쟁에 참여해서 포로로 잡히는 과정이고, 포로로 잡힌 이후 화형당하는 장면까지가 두 번째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Jeanne d'Arc의 생애는 그 시기가 오래되었고 신분이 평범한 소녀였기 때문에 기록물이 거의 없어 정확히 서술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당시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백년전쟁 중에 프랑스 왕태자로 알려진 발루아 왕조의 샤를6세의 아들과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가 프랑스 왕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잉글랜드 군대는 부르고뉴 공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프랑스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1428년 Jeanne d'Arc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는 왕태자가 프랑스 왕권을 차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등장한 Jeanne의 생애를 재판받는 잔이 직접 진술한 내용과 다른 사람들이 증언한 내용을 참고로 하여 서술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이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412년(일설에 따르면) 공현절에 동레미라는 변경의 마을에서 부농의 딸로 태어나 열여섯 살에 하늘의 ‘음성’을 듣고 1429년 2월 보쿨뢰르를 출발하기까지 둘째 쉬농에서 왕세자 샤를을 접견한 뒤부터 오를레앙을 해방하고렝스로 진격하여 국왕의 축성식을 거행하는 등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이듬해 콩피에뉴에서 포로로 잡히기까지, 셋째 루앙에서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주재하고파리대학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신성모독, 우상 및 악마숭배, 배고 및 이단, 유혈선동, 남장이라는 긴 죄목으로 1431년 화형터에서 사라지기까지 로 생각해 볼 수 있다.물론 역사에서 Jeanne d'Arc가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하다. 아마도 프랑스 정치·군사의 역사에서 보다 인간용기의 역사에서 잔은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프랑스의 내란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를레앙의 구출은 분명 빛나는 승리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북부의 일부가 샤를7세 편에 섰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Jeanne의 사후에도 22년간 더 진행되었으며, 발루아 왕조 재건의 기초가 된 것은 1435년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샤를 7세와 강화를 맺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Jeanne이 내세운 사명의 성격을 두고 역사가·신학자·심리학자 들은 계속 논란을 벌여왔다. Jeanne의 전투 행적, 그 지지자들과 적들의 동기와 행동 등 셀 수 없는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어왔다.이러한 논란의 이면에는 무지한 농부의 딸인 순박한 시골처녀가 신의 계시를 받아 왕국을 위기에서 구원한 위대한 전쟁지도자가 되었다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불가사의 하고 한 편의 잘 짜여 진 소설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관한 논쟁이다. 뒤의 세대들은 잔의 사명이 가지는 의미를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관련해 파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입장에 따라 왜곡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전주의시대에는 그녀의 등장을 왕좌의 후광을 더하는 은총의 한 증거로 여겼으며 나폴레옹은 조국의 영광에 대한 애국적 열정으로 불타는 여자 나폴레옹으로, 좌파 지식인들은 잔을 불의에 항거한 농민 ‘선량한 Jeanne’ 이자 배은망덕한 국왕과 영주들, 타락한 성직자들에게 배신당한 민중적 애국심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걸친 드레퓌스 사건에서 다양한 부류의 민족주의자들은 반드레퓌스주의 기치 아래 집결하면서 잔은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민족주의세력의 구심점이 되어갔으며 “유대인-프리메이슨들” 공화국에 맞서 민족적 메시아주의를 구현하는 인물로 선전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외국에 대한 저항의 화신으로, 비시체제에서는 돈과 이데올로기 썩은 문명에 물든 유대인들에 맞서 전통적·농촌적·가톨릭적 가치를 구현하는 도덕적 재무장, 이른바 “갱생인간”의 귀감으로, 레지스탕스 진영에서는 자유의 투사요 불굴의 저항자로 선전했다. 이토록 Jeanne은 수세기에 걸쳐 후세의 기억 속에서 더욱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다.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Jeanne의 말과 행동들의 불일치점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전반부에서 나타났던 관객들조차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간과했을 지도 모르는 장면들에서 잔의 행동이 정상인의 그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잔이 신들린 듯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적군을 향해 막무가내로 뛰어드는 대목에서부터 이미 영화는 잔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다소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령탑을 탈환한 뒤 토막 난 시체가 된 병사들과 사방에 흥건한 피를 바라보다가 어린 시절 계시를 주었던 신이 피를 흘리며 눈앞에 나타나는 환각을 경험하는 대목에서 거의 확실해진다. 오를레앙에서의 전투 승리 직후에 잔은 주검들의 속에서 “What are you doing, Jeanne?”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때 그녀의 대답이 압권인데 바로 “I'm playing.”이다. 신의 목소리와 그녀 자신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뚜렷이 드러내는 장면이다. 또한, 이후에 재판 과정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잔의 눈앞에 나타나는 모자 쓴 사람의 존재는 영화 속의 잔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더욱 여실히 드러낸다. Jeanne이 어린 시절부터 길러오던 투철한 신앙심, 그리고 눈앞에서 강간 살해당하는 언니의 참혹한 모습과 이를 자행한 영국 병사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고 느낀 정신적인 충격이 만난다면, 영화 속의 잔과 같은 인물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영화를 보고나서 예전에 가졌던 Jeanne에 대한 막연한 성녀의 느낌이 극대화되는 대신, 이 영화를 보면서 Jeanne의 잔인한 모습만 계속해서 느꼈다. 그런 생각은 오를레앙 전투 이후의 전투에서 극대화 된다. 아마 극 초반 잔의 언니인 까뜨린느의 죽음과 겹쳐져서 일까? 전쟁을 계속 해야 된다는 Jeanne의 주장은 마치 죽은 언니에 대한 복수심으로 느껴졌었다. 마지막의 내면과의 갈등 부분은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사실적이고 웅장했던 영화가 갑자기 코믹영화로 바뀐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Jeanne이 과연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 진정한 영웅인지, 또한 과연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전쟁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영웅적인 행동만으로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The Zoo Story1. 작가 - Edward AlbeeEdward Albee는 1928년 워싱턴에서 출생하여 생후 2주일 만에 뉴욕의 대부호인 올비가문의 양자가 된다. (이 영향으로‘입양된 아기’라는 모티프가 작품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는 호화스러운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지만 양부모에 대한 반항심과 친부모에 대한 원망을 잊지 못했다. 결국 애정의 결핍이 원인이 되어 문제아로 자라났다. (이는 후에 작품 주제의 방향이 가정불화, 부부의 갈등 등으로 기울어졌다.)18세에 발표한 첫 습작극 은 오닐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감상적인 내용이며, 형식적인 도덕률, 진실?허위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신적인 고갈과 껍질뿐인 형식적 도덕률에 집착하였고 나아가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진실과 허위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그러나 2년 후 양부모와의 불화와 작가가 되려는 야망으로 가출하여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와 소설을 습작하였다. 그러다가 극작으로 전향하여 현대인의 고립을 그린 『동물원 이야기 The Zoo Story(1950)』를 썼다. 이것은 처음에 미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1959년 서베를린에서 먼저 상연되었고 그 이듬해에야 뉴욕의 오프 브로드웨이에서도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는 하루아침에 Albee를 유명 극작가로 만들어 놓음과 동시에 미국 연극에 ‘부조리 극’이라는 연극 사조를 유행시키며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그 후 『미국의 꿈 The American Dream(1961)』을 포함한 단막극이 차례로 공연되고, 62년에는 황폐한 가정의 실체를 그린 대표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1962, 초연)』의 성공으로 T.윌리엄스, A.밀러 이후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인정받았다.《작은 앨리스 Tiny Alice》(1965),《미묘한 균형 Delicate Balance》(1966) 등의 비판극도 발표하였는데,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고독(孤獨)과 언어의 비전달성으로 인한 괴로움이 그려져 있다. 또한 사실주의적이고 격렬한 언어를 사용하며 극중 인물 사이의 관계와 장소 등이 한결같이 모호한 것이 특징이다.고아?낙오자?사회 주변적 인물에 대한 관심이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주된 관건은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 황폐 속에서 부도덕한 미국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Albee의 특징은 미국의 꿈에 대한 허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점에 있다. 특히 가정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잔혹함이나 고독이 가져오는 황폐를 파헤치는 등 예리한 필치로 문명비평을 했다.1994년에 세 번째 퓰리처 상 수상했으며, 계속해서 극작품을 통해 실험적 수법을 추구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하고 있다.2. 줄거리어느 일요일 오후, 뉴욕의 센트럴 파크 안의 한 벤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Peter에게 Jerry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낸다.Peter는 연봉 1만 8천불을 받는 출판사의 간부로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앵무새와 고양이를 키우며 사회적인 모든 평범함과 행복의 조건에 순응하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중산층 가장이다.Jerry는 '동물원에 갔다 왔어요' 라는 말로 피터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Peter에게는 떠돌이 부랑아처럼 보이는 Jerry의 말에 관심이 없다. '동물원에 갔다 왔어요'라고 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지만 peter는 여전히 Jerry의 접근을 피하려고만 한다. Jerry는 Peter에게 계속 말을 건다. 그러면서 오늘밤이나 내일 TV나 신문에서 기사를 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 Jerry는 Peter에게 가족, 애완동물 직업 등에 관해 물어본다. Peter는 간혹 곤란해 하고 화를 내기도 하나, 성실히 답변해준다. 그리고는 Jerry는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와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Jerry가 사는 하숙집은 좁고 누추한 곳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도 흑인 호모 ,매일 서럽게 우는 여자 등이다. 게다가 하숙집의 여자는 뚱뚱하고 추하며 Jerry를 유혹하고자 하나 그는 여주인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매번 피한다. 그 여주인의 개는 검은색의 괴물 같은 개인데 이때까지 Jerry에게 무관심한 여타 동물들과 달리 으르렁거리며 Jerry를 볼 때마다 달려든다.Jerry는 개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며칠동안 Jerry는 햄버거를 사다가 개에게 던져준다. 개는 킁킁거리며 햄버거를 잽싸게 먹고는 배를 깔고 앉아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러나 다시 Jerry에게 덤벼드는 것이다. 며칠 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고 Jerry는 마침내 개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햄버거에 독약을 섞어서 개에게 준다. 그러나 개는 죽지 않고 살아났고, 그 뒤로 개는 Jerry에게 달려들지 않게 되었고 Jerry와 개는 서로 동상처럼 쳐다만 보고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게 된다. Jerry는 개와 자신은 서로를 이해하게는 되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며 서글퍼한다.이야기가 끝난 후 Peter는 가려고 하지만 Jerry는 동물원에 간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peter를 가지 못하게 한다. Jerry는 동물원 이야기를 하며 옆에 앉은 Peter를 자꾸 비키라고 찌르며 벤치에서 Peter를 밀어낸다. 그러고는 Peter에게 이 벤치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Jerry는 또 Peter에게 모욕을 가하고 , 공원벤치를 빼앗기 위한 싸움에 Peter를 끌어낸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Peter의 발에 던졌던 칼을 잡은 Peter에게 달려들어 의도적으로 칼에 찔려 자신을 죽이게 한다. 그리고 오늘 밤 TV에서 보게 될 것이 이것이었다고 말하며 Peter에게 도망치라고 한다. Peter는 괴로워하며 망설이다가 뒷걸음질치며 도망가고 Jerry는 죽는다.3. 용어정리1) 부조리 연극의 발생배경과 특징a. 발생배경부조리극(Theater of the absurd)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혁명적이고 전위적인 극작품 형식을 결합한 연극이다.부조리(Absurd)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카뮈로서, 그의 저서인 『시지프 신화』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부조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이혼, 즉 절연(絶緣)이다. 그것은 서로 비교되는 두 요소의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두 가지의 대비에서 생겨난다." 나와 타자, 나와 세계, 나와 그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부조리인 것이다. 이 신념은 당시의 극작가들의 중심 주제가 되었으며, 이들은 하나의 파로서 형성되어 갔다.마침내 1960년 경 헝가리 출신의 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마틴 에슬린이 그들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들의 사상을 '부조리주의(Absurdism)'라 명명하였다.부조리극은 대전을 겪는 동안 유럽의 지식층이 느꼈던 불안감과 가치관과 신앙의 상실, 고독과 소외감, 여기에 따르는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불가능 그리고 개성의 상실이라는 시대의 비극적 상황의 산물이다.b. 특징부조리극은 이전의 연극을 지배해왔던 심리나 성격을 부정하고 극의 주제, 시작, 결말이 없으며, 꿈이나 악몽이 사회적인 진술을 대신한다. 일관성 있는 이야기나 확실한 플롯으로 작품을 전개하지 않고, 인정할 만한 성격 묘사도 없이 거의 기계적인 인물을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또한 무의미하면서도 앞뒤가 맞지 않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언어의 불합리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부조리극에서는 마치 시처럼 암시와 함축, 응축된 언어, 이미지와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이 세계 그대로의 부조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2) 시지프 신화시지프는 그리스신화의 인물로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서 시지프는 영원토록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카뮈는 시지프 안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자각하면서 이 부조리에 대하여 반항을 기도하는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이 인간의 운명에 비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데 그의 독자성이 있다. 인간은 결국 시지프스와 같다. 책에서는 “숙명적 부조리”라는 것을 언급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 이것이“숙명적 부조리”이다.4. 분석1) 주제인간간의 의사소통의 결여와 접촉의 결여로 인한,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소외’라는 상황, 또는 그러한 한계는 우리 인간들이 극복해야 할 벽이며, 이러한 단절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타인과 교류(交流)를 구하려고 하면 결국은 폭력과 싸움으로 끝난다는 것을 테마로 하였다. 도시의 고독과 절망· 단절을 묘사하였다.2) 동물원 이야기에서의 부조리극Peter와 Jerry는 현대인이 보여주는 소외, 고립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 타자에 대한 불신과 배타성으로 뭉쳐져 있는 편협한 생각,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안정된 삶이라 여기는 환상의 틀, 이러한 것들로 인해 사람들과의 접촉, 대화는 단절되고 의사소통은 되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극에서 보여지듯이 폭력이나 자학으로서만 인간적인 접촉이 가능하게 되는 부조리한 삶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무의미한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대고만 있을 뿐이다.
1. 작가소개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 Williams) 본명 Thomas Lanier Williams그는 아서 밀러와 더불어 미국 현대극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작가로, 주로 인간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폭력, 인간소외, 성에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그는 1911년 미국 미시시피주 콜럼버스에서 제화업체의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와 성공회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도시로 판촉을 다니는 자유분방한 상인으로 술과 여자, 도박으로 가정 파탄을 불러온 장본인이었고, 어머니는 절도있고 품위있는 여성이었다. 그의 친가는 전통 깊은 귀족집안이었고, 외가는 청교도 집안이었다. 이처럼 외가 쪽과 친가 쪽의 불안하게 조합된 그의 배경은 작품에서도 종종 엿볼 수 있는 양면성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출장이 잦은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내었고, 어려서 앓은 디프테리아 후유증으로 마비되어버린 한쪽 다리 때문에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더 심해져 자꾸만 상상 속으로 도피하게 된다. 글재주가 뛰어난 그는 1929년 미주리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희곡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재능을 인정받지만,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 때문에 1931년 대학을 중퇴하고 제화공장에 들어간다. 예술가적 기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답답한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현실을 훗날 에서 주인공 Tom을 통해 표현했고 에 나오는 이주민 노동자 스탠리는 이때의 점원생활에서 만난 인간유형이라고 한다. 1937년 아이오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졸업 후 그의 첫 장편 희곡 을 발표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1944년 자신의 불우한 가정을 소재로 한 이 기적적인 흥행을 거두면서 563회를 상연하는 기록을 세우고, 1974년 가 855회 장기공연기록을 세우면서 플리처상과 뉴욕 극평가상을 휩쓰는 등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잇달아 신화적 성공을 낳는다. 동성애자로 알려진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극작 생활에 몰두하지만, 말년에 과로와 정신적 붕괴로 정이곳에 온 이후 최초로 자신이 붙어 있을 수 없는 곳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블랑쉬의 무의식중에 내재되어 있었던 소외된 욕망의 발현스탠리는 쇼라는 친구에게 로렐에서 블랑쉬를 본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블랑쉬는 스탠리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은 연약하고, 보호와 생존을 위해서는 아름답게 보여야 된다고 믿고 있는 블랑쉬에게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다. 그런 중, 스텔라와 스탠리가 위층 주인부부와 외출하여 혼자가 된 사이에 젊은 수금원이 신문요금을 받으러 온다. 블랑쉬는 젊은 수금원에게 키스를 하며 무의식중에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가까워진 블랑쉬와 미치그동안 어느 정도 가까워진 블랑쉬와 미치는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다. 블랑쉬는 미치와의 사이에서 특히 거짓말을 많이 한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자기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하도록 전등에 종이 갓을 씌우고, 한낮의 만남은 절대로 피한다. 이날 블랑쉬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자살한 남편 엘런에 대해 이야기하고, 블랑쉬와 미치는 서로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블랑쉬의 과거에 대한 스탠리의 추적과 폭로스탠리에 의해 블랑쉬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블랑쉬의 생일상을 차리고 있는 스텔라에게 스탠리는 자신이 입수한 블랑쉬의 과거를 말한다. 스텔라가 미치를 초대했으나 이미 스탠리가 블랑쉬의 과거를 폭로했기 때문에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스탠리의 블랑쉬에 대한 포고갈 곳 없는 블랑쉬를 내쫓으려고 하는 스탠리는 그녀에게 버스표를 생일선물로 준다. 곧이어 해산을 앞둔 스텔라의 진통이 시작된다. 블랑쉬와 비치, 그 관계의 파멸스탠리가 스텔라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이 미치가 찾아온다. 미치는 그동안 자신에게 거짓말말 해온 블랑쉬에게 불결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며 블랑쉬를 거절한다. 그녀의 불길한 앞날을 암시라도 하듯이 한 눈 먼 여자가 제사에 쓰이는 꽃을 팔며 나타난다. 블랑쉬를 구해줄 마지막 끈마저 끊어져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다. 블랑쉬의 완전한 파괴스텔라를 로 상징주의는 사실주의(이성주의)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상징주의는 사실주의와 연관성을 갖는다. 상징주의 연극은 낭만주의 연극이 화려하고 공허하며, 사실주의가 일상적인 표면에 집착한다고 비판하고, 내면의 대화와, 인물과 영혼과의 화합 및 우주를 움직이는 힘과 영혼의 화합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실주의가 관찰과 오감에 의거한다면, 상징주의는 직관에 의존한다. 또한 자연주의의 과학적 논리를 거부하고 "창의성"과 "천재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내면적 정신적 리얼리티를 재현하였다.상징주의 연극의 특징가. 사회의 환경과 문제, 갈등이 아닌 삶과 죽음,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사용한다.(보편성은 신고전주의 특징이지만 상징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이성보다는 감성 측면에서,논리를 배제하면서 차별화 된다)나. 직관과 암시, 상징으로 장면을 연결한다.다. 단순대사 혹은 시적대사, 혹은 시로 대사를 만들었다.라. 인물들은 뚜렷한 목적도 욕망도 없는 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마. 극의 배경은 신비한 분위기와 불편한 침묵으로 채워진다.남부사회의 특징미국의 남부사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 때문에 역사적으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구분되었다. 작물의 긴 생장기간, 주종작물 중심의 농경방식, 대농장 체제, 흑인 노예와 자유 흑인 노동자를 이용한 노동력 등이 남부의 특징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1880년대이래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에는 대이민(the Great Immigration)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약 1,400만의 이민이 주로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밀어닥치면서 미국의 인구 구성뿐만 아니라 도시의 모습과 전반적인 생활양식까지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이 이민들은 그때까지 서유럽 계통의 유럽인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를 급속히 해체하면서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모국에서 밀려나고 미국에서 버림받은 가운데 대부분 동북부의 대도시로, 일부는 남부로 유입되어 빈민가를 형성하면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길에 들어섰다. 그들iams는 이러한 상황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자신의 중심 주제를 그의 작품에서 전형적인 남부 인이며 현대사회에 좌절하여 무기력하게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되어버린 실물을 통해서, 또한 그들의 가치와 삶의 척도를 설정하는 근원이 되고 있는 남부라는 배경을 통해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그 예가 남부 귀족의 상징인 블랑쉬와 20세기의 산업화된 물질세계를 대표하는 스탠리와의 갈등을 묘사한 것인데, 이것은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의 갈등이요, 개인적으론 인간 내면의 동물적 요소와 문명적 요소와의 갈등이기도 하다. 또한 블랑쉬의 이중성은 바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문명적 요소와 야만적 요소의 양면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개막 장면의 상징성」개막 장면에서 흑인과 백인 두 여자가 나란히 층계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은 흑과 백을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대조 시켜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상반된 것들의 갈등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개막 장면에서 Stanley와 Stella 부부의 sex 이미지가 Stanley가 아내 Stella에게 원시성의 상징인 '푸줏간에서 사온 고기뭉치'를 공격적인 방법으로 '던지는'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이를 받아 들고 자지러지게 웃는 Stella의 태도를 통해 동물적인 'sexuality'를 노골적으로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Stanley가 Blanche를 겁탈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과도 맞닿아 있는데, 따라서 이와 같은 sex의 비정상적 이미지가 극의 흐름에 따라 증폭함으로써 단단한 구성상의 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갈등을 주도하는 상징물」A. Elysian Fields, Belle Reve, Mitch Elysian Fields는 Stanley에겐 마음대로 성생활을 즐길 수 있고 친구들과 술판이나 노름판을 마음대로 벌일 수 있는 남성적 쾌락추구와 지배본능을 과시할 수 있는 지상 천국 인을 끄길 바라고, 중국 상점에서 사온 'adorable little colored paper lantern'(전등 갓)을 전등 위에 씌운다. Blanche가 밝은 빛을 싫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나이를 숨기려는 전형적인 여성의 허영심이라 볼 수 있지만, 전구의 불빛은 Blanche에게 있어서 더 큰 중요성을 띄고 있다. 덮개 없이 드러난 전구는 사실적인 현대 세계의 상징으로서, 밝은 전구의 불빛을 가리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과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며, 아울러 자신의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고자하는 욕구를 상징하고 있다.이에 반해 Stanley는 가능한 많은 불빛을 좋아하며, Blanche와는 달리 사실적이며 실제적인 것을 보여주는 노출된 불빛을 좋아한다. 삶의 진리에 대해 Blanche와는 상반되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Stanley는 어둠 속에 묻혀있는 Blanche의 얼굴을 잘 볼 수 있게끔 종이 전등갓을 찢게 하는데 이때 Blanche는 자신의 현실이 폭로되는 양 절규하는 듯한 비명을 지른다. 극의 마지막 장에서 Blanche가 끌려갈 때 Stanley는 다시 한번 이 전등갓을 찢어서 Blanche에게 던진다. 이때 Blanche는 마치 그 전등갓이 자기인양 또 다시 비명을 지른다. Blanche는 전등갓만큼이나 섬세하며 애처로운 현실에서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으며, 강한 불빛으로 상징되고 있는 스탠리는 현실세계의 비전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작가가 남부와 주인공에 대해 갖는 감정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사람다운 훈기를 간직한 남부에의 진한 향수를 즐겨 그려냈다. 극 속에서 어둡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주인공들의 공통된 환상의 출구는 항상 남부이다. 그들은 이미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 농촌 사회의 도덕과 정서를 환상으로 간직하고 동경하다 가혹한 현실 앞에 위로 받지 못하고 파멸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에 있어서 남부에 대한 향수와 집착은 그의 문학의 종착역이기도 하다.그의 작품세계의 원천은 그의 기복 많은 성장시절의 자전적 체험에서다.
고도를 기다리며..내가 읽어보았던 책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등장인물은 5명이 전부이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앞을 뒤적여야했고, 뒤적이며 끝까지 읽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해하기는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없다.이 작품의 결론은 나와 있지 않다. 이들은 누군지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이 작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각각의 연속된 하루하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삶의 연장선을 나타내주는 어제와 오늘이며 또다시, 그것은 오늘과 내일이 될 것이다. 과연 특정한 줄거리도, 극적 장면도 없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고도에 대한 내 첫 번째 해석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 희망, 꿈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가 보통 꿈을 기다리는데 있어서 꿈이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설령 그 꿈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꾼다. 그리고는 또 다시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꿈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 작품의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이유이자 이 작품의 숨어있는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기다리던 고도 즉, 꿈이 실현 된다할지라도 그들은 또 다른 고도를 찾을 것이며 또 다른 고도를 계속해서 기다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반대로, 어쩌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기다리는 고도는 세상 어느 곳도 존재하지 않고, 또 그 ‘고도가 없다’ 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흔히 말하는 꿈과 이상향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없는 줄 알면서도 만들어가는 것, 지금을 살아가고 기다리는 것 그런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그러한 삶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두 번째 내 해석은 고도를 일종의 구원자로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도대체 고도는 누구일까. 그들은 고도가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도는 일종의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주위에 가족이 있고 아무리 친구가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나 혼자라는 고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절대자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고도는 그러한 상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는 인물은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면서 두서없이 떠들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기다리는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두 주인공은 ‘고도’라는 사람이 오기만을 맹목적으로 기다림으로써 그들 자신들이 직접 그를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고도’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불확실한 꿈을 쫒으며 그것이 자기에게 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비견될 수 있다. 안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맹목적으로 기다리며 어제와 오늘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무엇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두 주인공의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 물질문명과 산업 사회의 구조 속에서 정형화되고 기계처럼 반복된 일만을 하며 그것이 오히려 목적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삶에 대한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스스로 자살을 할 수도 없고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으로만 비추어진다. 목 메달자고 이야기는 매일 하면서도 목 메달 끈을 가져오지 않아 죽지 못하고 고도를 기다려야한다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도만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고도가 무엇인지는 내가 책을 더 많이 읽어보아야겠지만, 지금 내가 정의내린 고도에서 희망이라고 가정할 때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위해 꿈을 위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음이다.
이 책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읽었다. 영화로도 학교 선생님께서 보여주셔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과거에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다. 하지만 단순히 재미로만 읽었을 뿐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게 되었고, 이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는 듯 했다.내용은 한병태라는 사람이 30년 전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서울에 살던 병태는 시골로 전학을 간다. 병태는 서울에 살던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했지만, 그곳의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석대라는 급장을 만나게 되는데, 서울에서의 급장과는 달리, 석대라는 아이는 선생님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반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어서 모든 아이들은 석대의 편이고, 석대의 말이라면 꼼짝하지 못한다. 병태는 불합리와 폭력이 있는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석대에게 저항하고, 아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여러 방법들을 사용한다.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석대의 권위와 그 권위 아래 있는 아이들의 행동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고 부모님, 선생님도 석대의 편을 든다. 그렇게 되어 병태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온갖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병태는 저항을 포기하게 되고, 결국 그 환경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바뀌고 석대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석대는 몰락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석대의 잘못을 말할 때, 병태는 석대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다. 석대는 떠나고, 그 반은 처음에는 약간 불안했지만 정상적인 반으로 돌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서 병태는 고급 세일즈맨이 되었지만, 실패하여 실업자가 되고, 그 때 다시 석대가 떠오르게 된다. 병태는 많은 사람들이 석대를 비웃어도, 석대를 과소평가하면 안된다고 느낀다. 하지만 결국 병태는 형사에게 잡혀가는 석대의 모습을 보게 된다.여기에서, 그 반의 모습은 사회의 여러 모습들, 특히 우리나라의 4·19전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석대는 이승만 정권처럼, 독재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학을 와서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태의 모습은 합리와 자유 속에 살다가 독재 체제에 와서 적응하지 못하여 독재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승만 독재 정권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석대를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아이들이 병태를 못살게 굴어서, 병태가 결국에는 굴복하였듯이, 이승만 정권, 즉 독재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참하고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고, 결국 몇몇은 독재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중에 부정 시험이 걸려서, 담임선생님의 힘으로 석대는 몰락하게 되고, 아이들이 배신을 하는 모습은, 4·19 때, 부정 선거가 드러나면서, 학생들의 힘에 의해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게 되고,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변심하여 이승만 정권을 욕하며 다시 새로운 정권에서 일하는 모습에 비교할 수 있다.병태가 배신을 하지 않는 모습은, 그것은 독재가 끝나기를 바랬지만, 변절자들의 더러운 대열에 끼기 싫어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작가는 4·19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러한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석대가 몰락하고 며칠 후에 4·19가 일어났다는 것이 책에 나오는데, 이것은 이러한 추측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그러면 이 소설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먼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석대의 잘못을 말하고, 부정적이었던 석대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잘한 일이다.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변심한 것이지, 절대 정의를 위해 변심한 것이 아니다. 석대가 반을 휘어잡고 있을 때, 그들은 석대를 위해 병태를 괴롭히는 등, 여러 행동을 한다. 석대의 세상 안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 석대의 위치가 불리해지자, 석대의 잘못을 낱낱이 파헤쳐서 석대가 완전히 몰락하게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석대의 잘못을 고발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석대의 권위는 이미 추락하고, 선생님의 힘이 더 세니, 선생님의 편에 붙어서 편하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지, 절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우리는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와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모든 행동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아이들처럼 행동을 하면, 이 글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솔직히 이럴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 더 올바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나에게 이익인가'를 생각할 때가 더 많다.나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계산적이기 마련이다. 사회가 그만큼 삭막해지고 각막한것도 사실이다.그래서 이익을 위해 친구를 이용할 때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나중에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후회도 하지만, 나중에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이 글을 읽을 때도 약간 가슴이 찔렸다. 이제는 그러한 행동은 하지 말고,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