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사무라이 라고 하면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특별히 생소하지도 않은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고, 특히 요즘 청소년들은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렇다. 많이 들었고 많이 봐 왔다. 그런데 막상 사무라이가 뭔데? 라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일본의 무사 라는 정도 밖에는 특별히 떠오르는 것도 아는 것도 없었다. 사무라이정신이니 일본의 무사도니 하는 말을 들으면 일단 거부감이랄까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일본의 것이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고, 적은 지식으로 알고있는 할복자살도 굉장히 미련하고 잔인해 보였기 때문이다. 라스트사무라이라는 영화가 많은 인기와 찬사를 받을 때도 나는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사무라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나라에도 멋진 사상과 무사들이 많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일본 문화의 이해를 들으면서 조금 생각의 방향이 달라졌다. 왜? 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내가 무조건 싫어했고 이상하다고만 여겼던 문화들이 나름대로의 이유와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되면서 왜?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일본의 사무라이는 영화화 돼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찬사를 받고 미국에서도 찬사를 받는가? 그렇다 나는 사무라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면 그 무엇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사무라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개념은 아닐지라도 내가 한번쯤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주로 인터넷의 자료를 검색하면서 조사하였고, 조사중 또다른 의문이 생겼을때 다시 그것에 대해 조사하는 방식으로 썼다. 그리고 문장 앞에 (-)표시를 붙인 문장은 나의 개인적 의견임을 밝힌다.< 사무라이 >1) 사무라이란사무라이는 배를 주릴망정 명예에 죽고 사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들에게는 충성, 희생, 신의, 염치, 예의, 결백 등의 철칙이 따랐다. 사무라이의 두 칼(다이쇼)은 그들의 무기이자 째. 기습용하나는 쾌검식(빠르게 휘두르며 적을 베는 초식)을 구사하면서 베고 하나는 가까이 붙었을때 뽑아 (단도) 복부를 찌른다고 합니다.넷째. 할복용싸움에서 만약 패배할 경우 하라키리(할복 자살)를 행하여 주인의 불명예를 씻어주는 칼이었다.- 모두가 다 일리가 있는 말로 보인다. 어떤 한 가지 이유에서 출발했더라도 결국엔 네가지 상황에 모두 쓰이게 되지 않았을까. 결국엔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이 이유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칼이라고 해서 몸속에 지니는 단도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실물 사진과 사이즈를 보니 그렇게 짧은 것만은 아니었다.{와키자시(脇差), 쇼토(小刀) wakizashi길 이 : 40~70cm무 게 : 0.3~0.6kg설 명 : 가타나(打刀)의 일종으로서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짧게(1자에서 2자 사이의 크 기) 만들어 휴대한 칼이다. 에도시대 부터 사무라이나 높은 직급의 사람만이 긴칼 (daito) 과 짧은칼(shoto)로 다이쇼(daisho)라는 한 쌍의 칼을 착용하였으며 에도 시대에 상인과 기술자들도 1척 8촌 이하의 짧은 칼은 착용하는 것이 허용됐으므로 주로 와키자히를 패용하였다. 실전에서도 좁은 장소에서 싸우거나 기습을 하는 경 우 와키자히가 애용되었으며 왜구와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은 양손에 각각 가타나와 와키자히를 들고 돌격하였다.{{ -다음으로 사무라이의 특권중 상공인이 무사에 대해 무례를 범했을 때 칼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는 대목에서 이것은 과도한 특권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무라이의 입장에서 해석해서 사람을 죽이는 명분을 만들기에 너무 충분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특권에 대해서는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어떻게 그럴수 있나는 생각이 들었었다.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베어서 버려도(切り捨て) 벌을 받지 않는다(御免)는 것이다. 무제한으로 허용된 권리는 아니었으며, 死後에 반드시 조사가 뒷따랐으며 정당한 이유없이 양민을 살해한 경우00석을 걷든 고쿠시의 자유인 것이다.즉 고쿠시 자리는 점점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가 되고, 농민들은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원을 더욱더 넓히기 위해서 땅을 개간하게 되었다. 이때 민간인이 개간을 하여서 장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부른다. 이들은 고쿠시와 트러블이 많이 생겼고, 결국엔 유력귀족들의 아래로 들어가 그들의 부하가 된 다음, 유력가문의 신하가 되어 사유장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영주라고 해서 다토와 비슷한 과정으로 스스로 독립하여 장원을 마련한 이들도 생겼다.이런 다토나 개발영주는 고쿠시로서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압박을 해 왔고, 그 와중에 무력도 사용이 되었다. 이러자 고쿠시에게 당하기만 한 농민이나 다토, 개발영주들은 힘을 합하여, 지역별 독자적으로 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인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토지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힘을 합쳐 일어났다.이런 사무라이의 등장에 귀족들은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거나 개인 신변 보호를 해야 했는데, 그런다고 해서 중앙의 군대를 자기 밑으로 배속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때 사무라이가 생겼으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사무라이를 불러서 돈을 주며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용병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시종이라는 의미의 '시(侍)'가 사무라이를 의미하는 말이 된 것이다.이들은 결국에 가서는 자신들을 용병으로 삼은 중앙귀족을 밀쳐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 사무라이 중 우두머리가 쇼군이고, 그 쇼군이 만든 정부가 바쿠후이다. 이 막부정권은 시대별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로 구분이 된다.-결국에 가서 사무라이들은 자기들을 용병으로 삼은 중앙귀족을 밀쳐내게 된 것인데, 이것이 무사도이고 충일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물론 한가지 결과만 가지고 모든걸 결론내어 서는 안될 것이지만, 진정한 무사도와 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자기 배를 그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할복의 실패를 막고 참혹한 고통을 빨리 없애기위해 스스로 배를 찌르려할때 뒤에서 동시에 목을 쳐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4명이 있으면 2명이 남은 2명의 목을 치고 살아남은 2명중 또 한명이 한명의 목을 치고 최후에 남은자는 혼자서 할복해 죽어야 했다.그래서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더 무사적인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말도 있다.- 할복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할복하는 장소가 따로 있었다는 자료와, 요즘 야쿠자들의 손가락 자르는 관습도 할복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할복장소가 따로 있었다는 자료가 있다. 히메지성은 1346년 짓기 시작했다고하는데 성의 한쪽 구석에 외부랑 다 차단된 작은 공간이 있었으며 그곳이 바로 할복장소이었다.아예 할복장소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일본 사무라이들은 일단 패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할복을 하면 높이 칭송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이런 일본 무사의 충의와 신의를 상징하는 것이 할복이 됐으며 현재 일본의 조직폭력배 야쿠자들도 무사도 충의와 신의의 덕을 강조하며 충을 표시하는 단지(指つめ : 손가락을 자르는 관습)를 행하고 있다.일본의 가장 큰 조직은 야마구치구미(山口組 - 조직원 19,000명), 스미요시가이(住吉會 - 조직원 6,700명), 이나가와가이(稻川會 - 조직원 5,650명) 등 3대 광역조직으로 이들 3대 조직을 3대 집안이라는 의미의 '고산케(御三家)'라 부르는데 자신들의 시조를 무사 조베이라는 인물로 정하고 무사도의 충성과 신의의를 야쿠자의 충성과 신의로 정당성을 명분화하고 있다.또한 할복은 그저 죽음이 아니라 뜻을 죽음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는데첫째, 자신이 진 죄를 스스로 벌한다는 의미둘째,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다는 의미셋째, 불명예를 씻기 위한 행동넷째, 동료의 죄를 대신한 자신의 죽음으로 동료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함다섯째,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수단- 개인적으로 할복이라는 것이 마치신중함, 한치의 오차도 없는 친절과 겸손, 깍듯한 예의 , 투철한 장인 정신, 집단 조직주의 등 오랜 사무라이 시대를 거치며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처신하지 않았다가는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비롯된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인들의 생활 곳곳 모든 분야에 투영돼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전쟁에서도 사무라이 정신을 볼 수 있다. 일본의 호전적인 사무라이 정신은 대외적으로 많은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대내적으로도 암살 테러 습격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예로부터 수많은 정치가가 자객의 칼과 총에 의해 희생되었다6) 사무라이 무술에서 검도로일본은 1900연대부터 왕권이 확립되었고 모든 군대를 화기로 대체함으로 막부의 장군(쇼군)과 사무라이의 검(劍)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사무라이(낭인)들은 충성할 쇼군을 잃게되고 그들의 검술(켄짓수)은 전쟁에 쓰이는 것이 아니고 그들 낭인郞人(사무라이) 들은 돈을 받고 칼을 쓰는 자객들과 야꾸샤 라는 조직폭력배로 타락하게 되었다. 이에 뜻 있는 일본의 검술가들은 그들의 검술(켄짓수)을 다음 세대의 정신수련을 위한 켄짓수(劍術)의 도장을 개설하여 켄도(劍道)라는 무도이름으로 일본무술 술법들을 현대의 무도(武道)이름으로 바꾸어서 그들의 무도 정신을 확립시켰다.- 사무라이의 무술과 정신이 야쿠자라는 조직폭력배로 이어지는 안좋은 상황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무도로 만들어 냈다는 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야쿠자라는 폭력배가 지금도 존재하고 그것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보고만 있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사무라이의 문화와 정신이 지금보다는 그 위치가 더 낮게 평가될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야쿠자라는 잘못된 인연을 뺀다면 전통을 중요시하는 마음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같다.7) 사무라이 갑옷과 투구, 칼, 활의 장신구- 일본에서는 사내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소형모형의 중세시대의 투구와 갑옷 하나쯤은 진열해 놓는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건전한 정신과 육체, 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