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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오공과대학교 삼족오캐릭터 표지 속지
    학교| 2007.04.07| 3페이지| 1,000원| 조회(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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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건축사]건축가 안토니오가우디 평가B괜찮아요
    차 례1. 안토니오 가우디의 배경 ‥‥‥‥‥‥‥‥‥‥‥‥‥‥‥‥‥‥‥‥‥‥‥‥ 021-1. 시대적 배경1-2. 지역적 배경2. 건축사적 배경 ‥‥‥‥‥‥‥‥‥‥‥‥‥‥‥‥‥‥‥‥‥‥‥‥‥‥‥‥‥ 032-1. 아르누보(Art Nouveau)2-2. 특 성3. 대표하는 건축가 ‥‥‥‥‥‥‥‥‥‥‥‥‥‥‥‥‥‥‥‥‥‥‥‥‥‥‥‥ 044.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o Gaudi) ‥‥‥‥‥‥‥‥‥‥‥‥‥‥‥‥‥‥‥‥ 044-1. 악마인지, 천재인지4-2. 안토니오 가우디의 약력표(Antonio Gaudi's chronological table)4-3.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s History)5. 안토니오가우디 건축작품의 시기별개요 ‥‥‥‥‥‥‥‥‥‥‥‥‥‥‥‥‥‥ 095-1. 가우디의 건축이론5-1-1. 제1기 건축작품5-1-2. 제2기 건축 작품5-1-3. 제3기 건축 작품1) 사그라다 패밀리어 (성가족 속죄 성당) (1883-) SAGRADA FAMILIA2) 구엘 공원(1900-14)2-1) 구엘공원(1900-14)3) 카사 바트료(1904-06)4) 카사 미라(1906-10)6. 안토니오가우디의 작품분석 ‥‥‥‥‥‥‥‥‥‥‥‥‥‥‥‥‥‥‥‥‥‥‥ 156- 1. 비센스 주택(Casa Vicens)6- 2.구엘 주택(Palacio Guell)6- 3. 칼베 저택(Casa Calvet)6- 4. 벨레스 구아드(Bellesguard)6- 5.바틀로 주택(Casa Battlo)6- 6.밀라 주택6- 7.구엘 공원(Parque Guell)6- 8. 꼴로니아 구엘 지하성당(Cripta Colonia Guell)6- 9.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6-10.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부속학교7. 후대에 이르러 평가 받고 있는 가우디 ‥‥‥‥‥‥‥‥‥‥‥‥‥‥‥‥‥ 22(나의 가우디에 대한 생각)8. 참고문헌 ‥‥‥‥‥‥‥‥‥‥‥‥‥‥‥‥‥‥‥‥‥‥‥‥‥‥‥‥‥‥‥‥ 231. 안토니오 가우디의 배경1-1. 시대적 배경년도시대적 상황1853크림전쟁 (~1856)그엘저, 그엘공원, 코로니아 그엘교회등, 가우디의 건축에는 몇개도 그엘의 이름이 씌워 있다.1883년, 가우디는사그라다 패밀리어 성당의 주임 건축가에게 임명된다. 이후, 그는 이 건축의 설계에 장년부터 만년에 건40년이상을 소비하고, 게다가 1917년으로부터는 다른 일체의 일을 끓어 이것에 전념하고 있다.사그라다 패밀리어의 주임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와 그 근교가 많게의 중요한 건축물의 설계를 손수 다룬다. 특히 도중에서 건축이 중지되어 버렸지만, 코로니아 그엘교회 지하 성당은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말해지고 있다.한때, 정신적으로 곤란한 시기를 맞이한 가우디는, 자살도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 위기를 타기 자른 그는 차츰 사그라다 패밀리어의 설계에 몰두하게 되고, 저절로 폐거 사사에 일절상관없게 된다.1926년6월7일저녁때,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노면 전차에는 들 . 학생 시대는 당디인 (일)것으로(에서) 유명했던 그도, 마치 부랑자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에 병원에 수용되는 것이 지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10일오후5시, 시내 성자 크루-스병원에서 사망한다. 유체는사그라다 패밀리어 성당에 매장된다.「악마인지, 천재인지」 . 가우디의 졸업 설계를 본 빌리-르교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말한다.4-2. 안토니오 가우디의 약력표(Antonio Gaudi's chronological table)서기안트니오 가우디 관련 사항18526월25일, 바르셀로나 남서의 상업도시 레우스에서 아버지 프랜 샌프란시스코 가우디, 어머니안트니아 코르네의 미츠오로서 태어났다.집은 동판기구직하는 집안이었다.1863학원 입학, 초등 교육을 받는다(-68). 성적은 평범한 것이었다. 친구 와 함께, 주간지를 발행하고, 가우디는 그 삽화를 그린다. 또, 극단을 만들고, 무대 장치를 담당한다. 한창때에는 포브렛에 있는 수도원의 수복계획을 입안.1868이과목을 유급하여, 오학년생을 졸업할 수 없고. 9월바르셀로나에 옮긴다. 건축 학교에로의 입학을 준비한다.1869바르셀로나 현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소위 밀폐된 천장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석고나 석회 맷돌로 된 조그만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벽돌 2-3개 정도로만 이루어진 가느다란 형태의 천장 양식으로 15세기 이후로 매우 보편화된 양식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쌍곡선의 포물체 천장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조각 방식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난로나 환풍기 Mila 저택의 계단 출구는 조각의 측면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모두 카탈란 방식의 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Bellesguard와 빠티요 집의 지붕과 동일한 양식이다. 그는 건축에 대한 천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전 일생동안 건축 이외에는 한 것이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글도 많이 쓰지 않았으며 여행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건축에만 관심이 있었다.가우디는 소박하고 수줍으면서도 매우 예민한 사람으로서 자연을 관찰하면서 건축 형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고향과 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관계로 평생동안 레우스 지역의 억양으로 말을 하였고 카탈류나의 그 지역이 예술 창조를 위해서 매우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가우디의 연구가인 네델란드 건축가 장 모레마에 의하면 가우디는 레우스에서 보다 가까이 태어난 사람이 보다 총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이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양의 빛이 45도 각도로 비추게 되며 모든 물체를 어떠한 굴절없이 완벽하게 밝힐 수 있다. 가우디에 의하면 지중해 사람들은 종합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북쪽 사람들은 분석적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석력은 필요하지만 예술적인 창조는 종합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지중해의 풍경과 그 지역 국가들의 땅이 지니고 있었던 크나큰 열정은 가우디의 종교적인 정신에 의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자연을 샌프란시스코 데 아시시 식으로 사랑하였다. 자연이 신의 작품이라고 간주하고 그곳으로부터 건축 양식을 이러한 전,후기의 가우디의 사상은 고딕복고양식의 이론적 바탕이 된 퓨전의 이론과 유사함을 볼수 있다.5-1-1. 제1기 건축작품이시기의 작품들은 다양한 기존 양식의 수용과 변형을 통한 새로운 건축 형태에 대한 실험의 기간으로 보인다. 1878년에서 1888년 까지 10년의 기간을 통해서 지어진 비센스 주택은 지상3층, 지하1층의 벽돌조 건물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가우디가 기존 양식의 기법을 수용 재해석 한다. 지상3층, 지하1층인 카프리초 별장은 1883년에서 1885년 사이에 지어진 벽돌조 건물이었다. 평면은 기하학적인 원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입면은 레리프된 타일이 사용되었다. 가장특징적요소는 현관의 4개의 기둥으로 지탱된 콘크리트 일체 포르티코와 가는 철봉에 의해 지탱되는 탑의 머릿부분이다. 가우디 작품의 대부분은 지붕이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작품의 특징적 요소가 되는 돌출 수법이 나타난다.가우디의 전기작품중 걸작으로 꼽히는 “구엘 주택”은 1886년 에서 1889년 가지의 기간에 세워진 지상4층, 지하1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지붕 환기탑의 나무와 같은 모습이 처음 나타나는 작품이다.127개의 기둥과 구조는 현대에서도 모두 증명되지 모하였다. 건물전체로 보면 내부공간에서의 아치와 옥상의 환기탑들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기기학적인 직선과 곡선이 사용되고 있다. 1891년에서 1892년까지 1년만에 지어진 로스 보티네스 주택은 지상4층, 지하1층의 건물로 지상층이 2미터가량 상승하여 창을 통해 지하층에도 빛이 들어가게 하고 있다. 가우디의 작품중에 천연슬레이트를 사용한 작품은 이 작품하나이다.5-1-2. 제2기 건축 작품벽돌 외관이 돋보이는 칼베 주택은 1898년에서 1900년사이에 형성되었다. 이시기 그가 연구하던 동물뼈의 모델사진을 통해 아나토미크한 연구를 하였다고 보며 따라서 가구나 내부 장식에 이러한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곡선의 경향은 문에서 시작하며 현관 홀의 기둥과 아치는 연속된 곡선의 많은 장식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작품전체로 보를 이용한 다양한 천정 형태 로 풍부한 공간감을 형성하려고 하였으나 주로 원근법에 의한 벽화로, 공간적인 깊이는 보이지 않는다.*형태 : 외부는 제도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Paper Design의 결과로 보여지는 정형적인 수직, 수평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서리부의 트리뷴과 평지붕 사이에 나타나는 첨탑들이 강조요소로 사용되었다. 내부형태는 레리프, 조각, 벽화등 다양한 장식요소에 의해 다양한 인상을 형성한다. 2층 전면도 로를 향한 모서리부에 외부를 볼 수 있는 목재 부라인드가 있는 트리뷴이 계획되었다.*세부구성 : 정사각형 타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모자이크가 외부와 내부에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타 일은 단색 타일이 주로 사용되었고 식물을 레리프한 타일이 강조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개구 부는 장방형 형태의 윗부분에 삼각형을 덧붙인 형태로 테레사 수녀원, 벨레스구아드저택에 비슷한 형태가 사용된다. 강한 빛에 의한 직사일광을 막기 위해 개구부는 벽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흡연실 천장은 그라나다 나사리 왕조의 알함브라궁 대사접견실 천장 과 같은 종유석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구조 : 지하부는 카탈로니안 볼트로 구성되었으며, 벽은 막돌을 회벽칠 사이에 난적(難積)하는 수법으 로 하중을 지지하도록 하였다. 내력벽 위로 목조 보가 천정과 바닥을 지탱하게 된다. 후기에 나 타나는 특이한 구조는 사용되지 않았다.*색채 : 외부에선 타일에 의한 원색과 막돌 쌓기에 의한 어두운 색에 대조 요소로 작용하며 내부에서는 벽화, 조상, 조각, 가구 등 많은 색채 요소가 작용하고 모자이크 수법이 주로 사용된다.6-2.구엘 주택(Palacio Guell)*공간 : 3층 높이의 중정으로 된 거실을 중심으로 각 실들이 주위를 에워싼 평면구성을 갖 는다. 비센 스 주택보다 더 개방된 공간 형상이 기둥으로 반 개폐 되어 연결된 여러실 사이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기둥은 모두 127개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실의 모습은 기하학적인 장방형 형태를 고수하고 있으며 파사드는 큰 가로와 연관되어 있다;
    공학/기술| 2003.05.18| 23페이지| 1,500원| 조회(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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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건축사] 봉정사에 관하여
    봉정사(鳳停寺)1. 봉정사 창건에 관한 설이 사찰은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에 속하는데 한골 또는 화원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고려 때 왕의 태를 묻었다고 해서 옛태무지, 태장촌이라 부르게 되었다.봉정사는 창건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신라 신문왕12년(672)에 의상 대사가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을 짓고 신림등의 제자에게 불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또 절의 창건설화가 전해지는데, 의상대사가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천등산에 올랐을 때 선녀들이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지금의 대웅전 자리였다고 한다. 이 산 이름이 천마산이라 지어진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고, 대사가 수도를 마친 다음에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렸더니 가학산을 맴돌아 다시 기도처인 대웅전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서 봉이 머문 자리를 뜻하는 봉정사가 되었다. 둘째, 신라 문무왕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께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 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고 명명하였다고 전해지는 설이 있다. 그 뒤 6차에 걸쳐 중수하였다. 봉정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평가되고 있는 극락전이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비롯해서 보물 제55호로 지정된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단,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을 위시하여 덕휘루, 해회당, 양화루, 장경고 등 중요한 건축물이 21동이나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및 자연모양의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아려져 있다. 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로 지은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구는 기둥 윗몸에 창방을 두르고 주두를 놓은 후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려 구성하였다. 첨차는 도리방향으로든 보방향으로든 행공첨차를 쓰지 않았고, 출목의 첨차로 외목도리를 받치고 이로써 지붕 전체를 받치게 하였다. 건물 바깥쪽으로는 정면 가운데 칸에 판장문을 달고 양옆간에는 넓은 창을 내었으며 그 밖의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아 건물을 구성하였다. 정면 창방 위에는 산 모양으로 만든 복화반대공을 매 칸마다 얹어서 뜬장혀를 받쳤다. 기둥머리에 짜 올린 공포가운데 도리방향으로 놓은 첨차로 위 뜬장혀를 받치고 다시 뜬장혀 위에 놓은 첨차로 주심도리와 외목도리를 받쳤다. 측면의 가구는 기둥 높이에 변화를 주어 귀기둥을 평주로, 그 안쪽의 두 기둥을 약간 높은 고주로 하고, 가운데 고주는 마루도리까지 올라가게 하였다. 여기에 따라 보의 높이에도 변화를 주었다. 기둥머리 위에는 3겹으로 포갠 첨차와 장혀 및 주심도리가 길게 튀어나온 채 측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종도리 및 외목도리와 더불어 9량가를 이루고 있다. 한편, 마루도리와 주심도리를 잇는 팔자형 소슬 합장을 둔 것이 특색이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 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닫집을 마련하였다. 대들보 위에 2개의 복화반대공을 놓아 덧보를 받치고 이 위에 종보를 놓았고, 종보 위에는 다시 대들보 위에 복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의 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받았다. 종도리 양옆에는 소슬 합장을 두어 측면으로 힘을 전달하도록 처리하였다. 이 건물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197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1625년작 상량문에 의하면 1363년에 건물의 지붕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서, 적어도 고려중기인 12∼13세기에 세워진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극락전 전체의 구조체계는 매우 작은 집임에도 불구하고 7m 정도의 측면에 5개의 기둥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측면은 4칸이 되어 정면의 3칸보다 칸수가 많아지는 기형적인 칸살구성이다. 이는 측면이 가장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다음으로 아름다운 측면을 지닌 건축물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기둥 역시 높은 기둥은 종도리까지, 옆에 중간기둥을 그리고 양 끝에 낮은 기둥을 세운후 3단의 수평재를 걸어 기둥을 잡아맨다. 기둥상부에 7개의 도리를 걸치고 다시 도리사이를 경사진 합장부재들로 연결했다. 이는 마치 견고한 내력벽과 같이 구성된다. 이러한 구조체계가 다른 건물과는 확연하게 다른 계통으로 보아야 한다. 굴도리인 내목도리와 중도리 사이에 납도리가 사용되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9개의 도리와 5개의 기둥이 확연하게 노출되어 의장미가 한층더 돋보였다.3. 봉정사 대웅전봉정사에 있는 주불전으로 보물 제55호이다. 이 대웅전은 조선초기의 불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고려말에 만들어진 건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1625년과 1809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이다. 자연석의 막돌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기둥은 주간 크기에 비하여 얕은 감이 있으나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는데, 주간이 넓고 5포작이라서 포벽이 넓게 보인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쪽은 교두형으로 짜였는데 그 수법이 고려말·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간장치는 전면에 모두 창호를 달았다. 가구는 일고주9량가인제, 천장이 우물천장으로 되어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를 이용하여 후불벽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수미단에 안치하였고, 이 수미단에는 모란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말부터 조각에 등장했다. 오른쪽에 문수보살, 왼쪽에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후불 벽에서 여산회상도라는 벽화가 1997년에 발견되었다. 가로 4m가 넘는 이 벽화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는 당면을 그린 것이다. 테두리의 연화 당초무늬나 꽃비가 내리는 표현 등이 고려시대 벽화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 지금은 사진으로 모셔져 있다. 후불벽 양 기둥에는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용은 보통 동양사상에서 보면 임금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봉정사의 대웅전도 고려 공민왕이라는 개혁군주와 얽힌 일화가 있다. 용은 또한 기린, 봉황, 거북과 아울러 사령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동물로 통한다. 단청은 매우 고풍스럽고 아룸다우며 색체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고색 창연하다.4. 봉정사 고금당(古今堂)봉정사 경내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499호. 극락전 앞 왼쪽에 세워져 있으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 가구는 무고주 7량가인 요사 건물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 띠살문을 달았고,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기둥 위에만 포작을 짜 올린 주심포계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주두밑에 헛첨자를 끼우고 그 위에 주두 위에서 나온 살미첨차를 포개놓았다. 이 위에 도리 방향으로 일출목의 행공첨차를 얹어서 외목도리를 받고 있다. 이러한 가구법으로 인하여 익공계로 이해되기도 한다. 측면 가구는 벽 중앙에 귀기둥보다 약간 긴 고주를 놓아 대들보를 받치고,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이 위에 다시 짧은 기둥을 세워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도리와 장혀를 밖으로 길게 빼내어서 측면 지붕에 깊이감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정사 경내에 있어서에 건물을 중수할 때 상량문이 발견되어서 1616년(광해군8년) 중수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1969년에 중수하기 전에는 북쪽 지붕은 팔작지붕이었고, 방 앞쪽에 쪽마루를 달아 놓았으며, 매 칸마다 외짝 여살문을 달아 놓았다. 또 주두에서 좌우로 뻗은 첨차와 창방등이 벽 속에 묻혀 있는데, 건물 뒷면을 기준으로 삼아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한 것이다.5. 봉정사 화엄강당(華嚴講堂)봉정사 경내에 있는 조선후기 목조건물. 보물 제448호. 정면 3칸, 측면 2칸인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과 극락전사이에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정면 왼쪽 1칸은 방으로 창을 달았고, 나머지 2칸은 마루로 국판이 있는 띠살문을 4분합으로 만들어 달았다. 측면에는 가운데에 단면이 4각형인 기둥을 두어 대들보를 받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얹고 이 위에 마루보를 놓은 다음 파련대공으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조그만 살창을 둔 것이 특이하다. 한편, 이 건물의 공포는 이른바 주심포계에서 익공계로 변화해 가는 초기 절충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둥머리 아래 기둥윗몸에 헛첨차를 짜서 기둥머리 위에서 나온 1출목 첨차를 받쳤고, 이 첨차는 다시 외목도리를, 외목도리는 지붕서까래를 차례대로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둥 간격이 짧은 반면 기둥이 굵고 짧으며, 공포 부재도 높고 굵어서 벽면 대 지붕의 비례가 1:1에 가깝다. 한편 1969년에 해체, 복원하면서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1588년(선조21년)에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6. 만세루 (덕휘루)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만들어진 만세루는 사찰의 중심공간인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곧 속세를 떠나 온갖 번뇌와 망상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부처의 세계로 귀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 있다.
    공학/기술| 2003.12.13| 7페이지| 1,500원| 조회(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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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건축] 하회마을
    하 회 마 을하회마을의 소개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화회리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안동의 사족가운데 명문대가로 손꼽히는 풍산류씨가 600여년 간 대대로 살아오던 집성촌으로 풍산류씨를 하회류씨라고도 불린다. 낙동강이 태극모양으로 돌아 흐른다고 하여 하회(河回) 또는 물돌이동이라고 하며, 다른 말들로는 곡강(曲江), 하상(河上), 강촌(江村), 하촌(河村) 등으로도 불리어 진다. 경관이 아름답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 고장으로 고려말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공이 풍산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특히 이 마을은 위대한 성리학자이고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는 겸암(謙巖) 류운룡선생과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 형제분이 나신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하회마을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로 지정되면서 주위 160만평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이는 풍산류씨의 종택으로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이 출생한 보물 306호 양진당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 명필로 꼽히는 미수 어목이 서애 류성룡이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단아한 전서로 써준 현판이 있는 충효당(忠孝堂), 중요민속자료 84호이고 하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림집으로 북촌유거(北村幽居)와 수신와(須愼窩)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 90호로 하회 남촌을 대표하는 남촌댁, 그 밖에도 규모가 있는 살림집으로 작천고택, 주일재, 하동고택들이 모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이다. 국보 1점(징비록), 충효당 둥 보물 4점, 사적1(병산서원), 중요무형문화재인 '하회별신굿탈놀이', 중요민속자료 10점 등 총 18점의 문화재가 있고 충효당 앞의 영모각에는 서애 류성룡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회탈 9개와 병산탈 2개는 국보 121호로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 출처 - http://www.hahoe.or.kr/(안동하회마을)허씨와 안씨 하회마을 정착내력고려 말 전승을 지내던 김해 허씨 한 분이 조정에서 물러나 팔도의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다 안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하회의 터가 너무나 좋은 나머지 웃골 거먹실(남산 팔선대 맞은편 지역)에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강 건너 건짓골에 허정승의 묘소가 있어 자손인 김해 허씨들이 묘소를 찾아왔었다. 하회탈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허도령 역시 김해 허씨이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산지 백년 뒤 광주 안씨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하회에 와서 보니 산수가 너무나 좋아 화산 기슭 향교골에 처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천곡 안성이란 분의 아들 안종생은 사헌부 감찰까지 지냈는데 배소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대동보'에 의하면 안성은 전서공(류혜종)과 동시대인물이기 때문에 전서공이 고개 밖에 터를 잡던 시기와 같은 때에 하회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안씨는 하회에 들어와 35대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 역사가 유구했음을 알 수 있다.안씨와 허씨에 얽힌 전설고려시대 때 가난한 안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있는 행각승을 만났다. 안씨 부부는 이를 가엽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림살이가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알뜰하게 구완을 해주었다. 건강을 회복한 스님이 고마운 뜻의 보답으로 명당을 하나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후손에 삼정승이 나는 집터명당과, 당 년에 천 석을 하는 묘지명당이 있는데 이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안씨 부부는 살림이 워낙 찌들린 터라 올해 당장 천 석하는 표지명당을 원했다. 스님은 묘 터 하나를 잡아주고 떠났는데 안씨 부부는 스님이 잡아준 자리에다 부모 묘를 이장하였다. 그랬더니 그 여름에 장마가 지면서 물길이 바뀌더니 묘 아래쪽에 드넓은 개펄이 생겨서 들을 이루었다. 안씨 부부는 형편이 어려워 이곳에 벼를 못 뿌리고 피를 뿌렸더니 그 해에 피 천 석을 수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씨 묘를 일컬어 '피천석묘'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허씨들은 하회탈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고려 말엽 이 마을에 허도령이 살았는데 어느 날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목욕재계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수 있도록 금줄을 치면서 이르기를 탈이 다 완성될 때까지는 절대로 방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는 마을 처녀(당시 17세의 무진생 의성 김씨로 알려져 있음, 별신굿을 할 때 무진생 김씨 할매 서낭님 이라고 부르는데서 유추)가 그 사모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허도령의 얼굴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어서 방문을 살짝 열었다. 입신 지경에서 탈의 거의 완성해가고 있던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허도령이 마지막으로 만들다 만 탈은 마무리가 제대로 안돼 턱이 없는 탈이 되고 말았다. 허도령이 죽자 처녀도 번민하다가 따라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처녀와 허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를 올리고 그 탈을 쓰고 굿을하였는데 이것이 하회별신굿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 69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국보 제 12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것이 그때 허도령이 만들다 만 탈이라고 한다.- 자료 출처 - http://www.poongsoojiri.co.kr/all_401.asp(풍수지리)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정착과 설화풍산 류씨는 고려말 호장을 지낸 휘 절을 시조로 한다. 이분이 지금의 풍산읍상리에 살다가 7세 공조전서(공조전서) 류종혜 공에 이르러 하회 큰고개 밖에 집을 지었다. 입향조인 공조전서는 하회 화산 꼭대기에 올라 하회마을의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 면밀히 관찰·검토하여 하회의 뒷산인 화산은 명산(名山)으로 주변의 산들과 비교했다. 화산은 강을 끼고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물을 거슬러 다시 올라오는 역수형(逆水形)을 띄고 있으며, 화산은 산이 겹으로 두텁게 이루어져 있다.입향조가 집을 지으려 할 때의 일이다. 천년기지로 택한 지금의 양진당 터에다 곧 바로 살집을 지었다. 형편이 넉넉했던 터라 비교적 큰 집을 지으려 했던 모양인데, 뜻밖에도 기둥을 세우면 넘어지곤 하기를 수차 반복하게 되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하루는 곤히 자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곳은 네 터가 아니다. 굳이 네 터를 만들려면 삼년동안 활만인(活萬人-만명의 사람들을 구원해 주라.)을 하도록 하여라" 라고 불가능에 가까운 산신령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집을 짓기 위한 집념도 만만치 않아 지금의 큰고개 밖에다 원두막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집을 마련하고, 여름이면 밭에 외도 갈아 오가는 이들에게 먹이고 짚신을 삼아 길손들에게 주기도 하고, 가마솥에 밥을 지어 가난하고 굶주린 행인에게 대접하는 등 지극 정성으로 삼년동안 만여명에게 공덕을 베푼 뒤 기둥을 세우니 산신령의 말 그대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자료 출처 - http://www.ppost.go.kr/ha3.htm#top하회마을의 자연경관과 풍수지리① 지리적 위치와 물돌이동의 고립하회가 속해 있는 풍천면은 동쪽으로는 풍산읍과 이웃해 있고 서쪽으로는 예천군 지보면, 남쪽으로는 의성군 신평면, 북쪽으로는 예천군 호평면과 이웃해 있다. 그러나 하회는 이름그대로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 안고 돌아 흐르므로 마을이다. 이로인해 들고 나가는 길은 오직 화산의 큰고개를 거쳐들어가는 육로 밖에 없었다. 다만 나룻배를 이용하는 뱃길이 있으되 이 뱃길 또한 통과로와 연결되지 않은 관계로 공식적인 통로 구실은 못하고 있다. 민송정 끝에 위치한 배나들에서 나룻배를 타고 화천을 건너 부용대 기슭의 옥연정사에 이르면 여기서 다른 마을로 갈 수 있다. 하회 사람들이 생활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뱃길일 뿐 공로의 구실은 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고장을 가가 위하여 이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은 옛부터 없어서 이러한 고립성이 하회의 독자적인 마을 형성과 절묘한 자연경관, 그리고 풍수지리상의 길지로 주목받게 하는 동시에,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개성있는 전통문화를 생성하고 전승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군사적 안전지대로서 왜적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어 한 차례도 전란을 겪지않아 전통문화가 더욱 잘 보존되어 있다.② 모둠살이의 형상과 자연경관의 특성하회마을의 모둠살이는 낮은 구렁 형태의 골을 따라 주택들이 모여있고 완만한 자연경사와 삼면을 감싸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좌향을 제각기 잡고 있어 여느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가옥배치를 보여준다. 마을의 주택 좌향을 '제각기'나 '동서남북 사방'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형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삿갓이나 대접을 엎어놓은 것처럼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아있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졌다는 사실과 집의 분포가 대충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꽃이 물위에 뜬 모양과 같다고 해서 연화부수형이라고도 하고 재래식 다리미 형국이라고도 한다. 마을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까닭은 산기슭에 자리잡지 않고, 강줄기의 흐름에 따라 둥글게 분포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배산임수는 산을 등지고 강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논밭과 같은 농경지는 마을과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지만 하회는 산에서 제법멀리 떨어져있는 채 강폭에 휩싸여 있어서 그런 것이다.) 또한 하회는 강을 끼고 있으되 마을과 강 사이가 아니라 마을과 산 사이에 논들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마을과 강이 지나치게 가까이 위치해 있어 들이 끼어 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과 산 사이 에 조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기슭에 이미 들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마을은 들을 피해 강 가까이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거이다. 지금 풍산 류씨들이 세서하는 마을은 그 이전부터 화산 기슭에 자리잡았던 허씨나 안씨들 마을 이후에 들어선 것이다.
    공학/기술| 2003.11.28| 7페이지| 1,500원| 조회(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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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건축]신라의 건축 불국사 평가A좋아요
    신라의 건축 불국사(佛國寺)불국사의 명칭의 의미불국사 경애를 3영역으로 구분하여 상징할 수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은《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의 사바세계 불국이요 연호교와 칠보고를 지나 안양문으로 들어서서 극락전 일곽에 당도하는 지역은《무량수경》을 형상화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뒷동산 제일 높은 자리의 비로전 일곽은《화엄경》을 구현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 불국을 상징한다. 다보여래는 법신불(法身佛 : 보이지 않는 본체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마음)이며, 석가여래는 보신불(報身佛)즉, 화신불(化身佛)로 변화하여 나타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부처님이다. 현실 세계에서의 인간들에게 영원한 부처의 음성을 듣고 그 의식 구조를 완전히 바꾸게 되면 그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불국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국사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들이 해석한 불교의 이상을 한국전통의 수리로 조형화한 세계문화재이다. 돌로 단을 쌓아 현세와 천상을 구분하고 돌다리를 오르고 건너 극락으로 가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불국사 창건과 사상적 배경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 1호로 지정되어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것은 신라중대 불교와 김대성의 불교라고 하겠다. 신라중대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화엄종과 법상종의 두 계통이 불국사 창건에서 주된 배경으로 불교학 강의의 중심은 화엄경이었으며, 계통을 달리하는 삼성의 강원이 있었던 점에서 신라중대 융성한 불교학의 성과가 불국사를 통하여 상호 교류을 맺었고 후대에 전수 되었다. 불국사는 화엄 불국의 이상을 구현한 사찰이며, 경덕왕대에 창건되기 시작하여 화엄종과 법상종을 중심으로 한 신라중대 불교의 다양한 면모가 종합되어 있다. 이것은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 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환영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무영탑의 전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옛 백제 땅의 이름난 석공 아사달이 불려 올라와 석가탑 창작을 담당했다. 고향에는 갓 결혼한 아사녀가 남편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십 년이 흘러 중년이 된 아낙은 소식도 없는 남편의 얼굴이라도 볼까 머나먼 경주로 고달픈 여행을 떠났다. 드디어 불국사 현장에 온 아사녀는 면회를 간청했지만, 국법으로 면회와 출입금지를 정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며칠을 애원하는 아사녀가 불쌍해서 공사장 경비대장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기서 십리 떨어진 곳에 영지라는 못이 있는데, 남편이 공사를 완성하면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 이요, 그러면 만날 수 있으니 가서 기다리시오.' 영지에 가서 학수고대하기를 몇 년, 드디어 호수에 석탑의 그림자가 비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사달의 석가탑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다보탑만 비치는 것이 아닌가? 크게 낙담한 아사녀는 물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부터 석가탑은 '무영탑', 다보답은 '유영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내용은 시중에 알려진 전설과는 디테일이 다르고, 《불국사 고금창기》에 전하는 설화와도 차이가 있다.불국사 배치형식불국사지는 남향으로 중문(자하문) ·금당(대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을 말하는데, 가람배치의 중심으로 모든 건물들이 이 금당을 기준으로 배치된다. 《삼국유사》에 금당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금당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이라는 명칭은 전당 안을 금색으로 칠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금색의 본존불을 내부에 안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대개 금당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에는 탑·범종이 있는 종루, 불경을 모신 경각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금당을 포함한 가람배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산호. 마노. 호박의 일곱가지 다리라는 의미이다.4. 당간지주(幢竿支柱)불국사 앞쪽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2매 1조의 형태로 서 있는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동양 문화권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당간지주는 불보살의 공덕이나 벽사적 목적으로 기를 달 때 깃대를 고정시키는 기둥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중간부에 한 단의 턱을 지어 변화를 주고 있다. 정상부는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안쪽에 간구가 마련되어 있다. 간대석은 별다른 장식 없이 지름 45㎝ 크기의 얕은 원공을 표현하고 있다.5. 안양문(安養門)연화, 칠보의 두 다리를 올라서서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시는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성역(聖域)이다. 안양이란 바로 이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그 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안양문은 1960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설계했다. 원래의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집의 규모를 설정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공포는 고려 말의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만들었고, 지붕은 단층의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로 만들었다.6. 자하문(紫霞門)자하문이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으로 이것은 부처님 몸에서 자금색의 빛을 이 문까지 그 빛이 서린다는 것, 즉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서러있다는 뜻은 바로 지하문 아래에 있는 폭포수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폭포수는 자하문과 범영루 사이의 석축 앞쪽으로 튀어나온 석루조에서 떨어지는 것인데, 석루조는 물이 흘러나가는 구멍으로 대웅전 일곽의 안뜰에 모인 빗물을 모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한다. 석루조에서 폭포처럼 떨어진 물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흘러 내려간 곳에 '구품연지'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연못이 있어야 돛 그림자가 비칠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나무를 심어 잘 가꾼 마당이지만 원래는 연못이 있었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겨지나 구체적으로 그 상징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석주 사이의 공간은 항아리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안상(眼像) 같이도 보여 수미범종각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 상징을 알아내기 위하여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아래에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당초 건축자들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지금의 범영루는 본래의 모습보다는 훨씬 축소한 형태로 보여지고, 그 이름도 누각의 그림자가 청운, 백운교 아래 있었던 구품연지(九品蓮池)에 어린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현재 이곳에는 돌거북 조각 위에 세워진 북이 있다.10. 대웅전(大雄展)대웅전은 대웅전 일곽의 중심 건물로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셨다. 불교가 먼저 전래된 중국에서 사람들이 영웅을 좋아하다 보니 부처님께서도 '크게 깨달은 큰 영웅'이라고 하여 그 분을 모신 집을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이라고 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765년(건륭30)에 중창된 것이며 기단부 및 초석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다. (신라시대의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 초석, 석단 등은 수차례 개수를 거듭했으나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5칸인데 당당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건물 기단은 높지도 얕지도 않은 알맞은 높이로서 4.2척 정도이다. 건물의 전체 높이는 43척(13미터)이고 기단 4면에 계단을 설치하여 건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동 서 양측면 중앙으로는 동 서회랑에서 꺾여 들어온 익랑(翼廊)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다포식 팔작지붕 단층 불전으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구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대운전의 정면 5칸의 五間四에서 사면에 돌계단이 있고 좌우는 행랑에 연결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의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목조의 석가 삼존불이 안치되었다. 삼존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였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두 제자상이 모셔전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부터 극락정토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주불을 모시는 불단 위에는 닫집인 천개(天蓋)를 달고 여의주를 문 용이나 극락조를 조각하여 장식한다. 기둥과 천장에는 단청을 하고 삼존불 뒤쪽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을 그린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 등을 건다. 이밖에 후불탱화로는 아미타불화·아미타불내영도·관음도 등을 건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후 근 200년만인 영조 26년에 중창되었고, 1925년 일제하에 다시 중창되었다.건물 내부의 불단은 중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 극락전 건물은 평면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3.5척의 기단 위에 총높이 30.33척 크기의 건물로 정면이 측면보다 8척 정도 작은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의 평면에서의 특이한 점은 뒷면의 도리칸 주칸은 정면과 달리 4칸으로 한 것이며, 정면에서도 3칸이기는 하나 중앙칸에 2개의 샛기둥을 넣어 5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는 아마 중앙칸의 크기가 18척이나 되는 긴 주칸이라 위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어 보조적 기둥이 필요하였는지 모른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첨자에 초화무늬와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과치장(過治粧)을 한 느낌을 준다. 가구 형식은 고주 위에 초화 2고주 5량가 형식으로 고주머리에 각 판재를 얹어 종도리를 그 위에 놓게 한 특이한 수법을 써서 내부 공간의 활용을 최대한 넓히려 시도했다.13. 관음전(觀音展)관음전은 비로전 동쪽 언덕위에 있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모신 전당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남쪽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 중에서 한 쪽에 초록버들이 늘어져 넘실거리고 한쪽에는 푸른 대(竹)가 뻗어 올라 휘청거리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도와달라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곧 구원의 손길을 뻗치니 천 개의 손이 있고 천 개의 눈이 있다한다. 그래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千手깔았다.
    공학/기술| 2003.11.28| 15페이지| 1,500원| 조회(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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