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사행정의 발전과정서론우리 나라의 공무원제도는 20세기초기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중국식 관인국가의 영향을 받아 중앙집권적인 절대 관료 체제를 유지하여 왔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수난기를 거쳐 1945년 해방된 후 선전제국의 민주제도를 도입하여 실적주의 제도를 바탕으로 한 현대 민주 국가적 공무원제도를 추구해 왔다고 하겠다.우리 나라의 공무원제도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의 독서삼품과{) 문 성왕 4년 즉 788년 일종의 제한경쟁제도를 채택하여 예기, 논어 등 일정한 과목은 이수한 자 중에서 고시를 실시하여 관리로 등용하였다.라로 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관리등용의 수단인 시험제도 뿐 만 아니라 인사행정 전반에 걸친 제도 발전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여기에서는 한국의 인사행정 발전과정을 조선왕조 이전부터 현대까지 시대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제1절 조선시대 이전조선시대 이전의 것은 중요성이 그리 대단치 않고, 조선시대 이후에 인사행정에 뛰어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간략히 설명하도록 하겠다.(1) 삼국시대1) 고구려고구려의 신분제도는 왕족과 왕비족이 중심이 되어 수상인 대대로를 선거 할 수 있었으며 고대국가로 성장한 후에는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관제가 정립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전제군주로서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족장과 귀족들에 의해서 견제를 받고 있었다.2) 백제백제는 씨족이나 부족중심이 아닌 귀족들이 연합하여 세습적인 전제국가를 확립함으로써 비교적 왕권이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또한, 중국식의 관제를 도입하여 관서의 조직과 관계 및 관직의 구별이 발달되었다.3) 신라신라는 배타적이며 외적과의 투쟁이라는 경험이 없이 씨족적 유대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선진문화를 흡수해 국력신장과 삼국통일의 기반조성을 이룰 수가 있었다.(2) 신라의 삼국 통일왕권의 전제화가 뚜렷하게 나타나 귀족세력을 억압하여 중 고시인 독서삼품과라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귀족주의 관리등용으로부터 학벌·시험 위주의 인사제도로 바꾸어 나갔다.(3) 발해발해는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과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였으나 고구려의 전통계층이라는 주체적 측면에서는 고구려의 행정제도를 유지·발전시키는 면도 있었다. 발해의 멸망은 토착적인 행정유산의 멸실과 동시에 한국사의 위축을 가져왔다.(4) 고려초기에는 당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행정조직이 정비되었으며 왕권과 재상 권이 균형을 이루었다.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건국되었으므로 서 귀족적인 문치주의 행정이 펼쳐질 수 있었다.향리층 에게 가장 매력적인 과거시험은 문벌귀족의 정치참여를 허락하여 그들의 공동이익을 보장하는 관리등용제도이었다. 또한, 문벌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음서제와 같은 관리등용제도를 원하였다.후기에는 재상권이 왕권을 억압하여 행정조직의 위계질서가 무너져 정상적인 인사행정제도가 붕괴되었으며 지배층의 사회적 구조까지도 변화되었다.제2절 조선시대조선의 집권적 관료제는 유교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으며, 지배계급인 소수의 양반계급출신의 관료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특권을 향유하여 모든 가치체계를 지배하였다.당시 인사행정의 기본법으로는 경국대전{) 경국대전이라 함은 조선시대 정치의 기준이 된 법전으로서 세조때 최항, 노사신 등에 명하여 1460년(세조6)형전, 1461년(세조7),1469년(예종 원년)에 나머지 4권이 완성되었고, 성종 2년(1470)에 준수·시행되었다. 한우근,한국통사(서울:을유문화사,1972),p.232., 대전회통{) 대전통편을 기본으로 해서 이후 90년간의 왕의 교명과 규칙 및 격식을 보록한 책으로서 1865년(고종27) 조두순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하였다.등을 들 수 있으며 인사기관은 육조중 이조였다.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인사제도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열해 보고자 한다.첫째, 법규범 적인 차원에서 엄격한 절대주의적 신분계급이 뚜렷하고 고전적관료체제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Max Weber의 고전적 관료제의 채용으로서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것은 식년과거(3년시)와 부정기과거로 양분되며 식년시는 다시 문과시험, 무과시험, 그리고 잡과시험의 3종류로 나누어진다. 부정기시는 특별시로 국경일을 기념하여 실시되는 경우를 말한다.아래의 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절차를 보여주는 것이다.{단계명칭시기장소시험과목시험관선발인원제1단계소과초시(감시·생진시)식년전 가을한성부 및8도1.진사과(제술과):부1편, 고·시·명·침 중1편(후에는 부1편)1.한성시:따로 시험관을 선정하였음.2.향시:관료사(감사),군수2인 또는 파견된 경시관2인각 과700인씩(후에는 540인씩)제2단계소학복시(회시)식년 봄(대개 2월)성균관소과초시와 동일문관 2품인 2인, 3품인 3인.(감독:사헌부 감찰)각 과 100인씩제3단계대과 초시(동당초시)식년전 가을한성부 및 8도1.진사과(제술시)ⅰ초장:오경사서의 의·의·논 중2편ⅱ중장:시·공명·잠·기 중1편ⅲ종장:대책2.생원과(명경시):오경사서 중에서 선정1.한성시:문관정 3품이하 3인(감독:사헌부 감찰)2.향시:관료사340인(후에는 223인)제4단계대과복시(동당복시)식년 봄(대개 3월)한성부1.초장:사서오경의 강서로서 경서는 배강,기타는 임문.2.중장:부 1편,표·전 중의1편3.종장:대책 1편종 2품 이상 3인,정3품 이하 4인(감독:양사에서 각각1인)33인제5단계대과전시식년 봄전정대책·잠·송·제소 중 1편(후에는 논·부·명 을추가)독권관 3인(의정1인,종 2품 이상2인),대독관 4인(정3품이하)갑과 3인(장원,방안, 탐화),을과 7인,병과 23인※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절차※참고임문:시험방법의 일종으로서 서책을 앞에 펴놓고 강독하는 것을 말한다.대책:한나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선비를 선발할 때 국왕이 정치의 득실을 물으면 이에 대한 대책을 쓰는 글제:제왕의 제도지명을 제서라고 하였고 그글을 제조라고 하였다.자료:박연호,인사행정신론(서울:법문사,1984),p.46.셋째, 관료의 우계와 등급이 철저하게 구별된 계층제적 고전적 관료제였고 수직적인 상하복종관계가 뚜렷한 계급의 구획은 8도로 나누고 다시 1소도부,6부,5대도호부 20목, 74도호부, 73군,154현 등으로 구분하여 334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장동희,한국행정사(서울:법문사,1988),p.191.조선왕조에는 각도의 행정장관으로 관찰사를 두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지방 수령의 품계를 6품관으로 높였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제도의 사역인으로 전락시켜 15세기 중엽에는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체제가 완비되었다.승진에는 근무연한, 학식, 이력, 선적 등이 고려되었으며 왕명에 의한 특별승진제도가 있었다. 보수는 등급에 따라 액수가 다르며 상후하박이 극심하였다.제3절 일본제국주의 시대1905년 통감부를 설치한 후 1907년 정미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정부의 법령제정과 주요한 행정처분에 대하여서는 일본통감의 승인을 얻도록 하고, 한국고급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였으며,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고급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일제 식민 통치 아래에서는 일정한 공무원법이 없었고 총독부에서 제정, 공포하는 속령{) 속령이란 천황이 발하는 명령으로서 그것은 의회의 의결이나 심의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효력을 발생하는 일종의 법령이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속령에는 관리의 복무규율을, 고등고시령, 문관임용령, 문관징계령 등이 있었다.인사행정조직은 철저한 고전적 관료제에 의한 절대주의적 권위주의적 계서구조로서 일반국민들의 가지지 못하는 특권의식과 관존민비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일제식민지하의 관리채용은 등급에 따라 상이하다. 칙임문관은 원칙적으로 자유임용되었으며, 주임관은 고등문관 시험위원회의 전형을 거쳤고, 판임문관은 보통 문관시험위원회의 전형을 기타 고용원과 기술관은 공개시험이 아닌 전형으로 채용되었다{) 김영중,신인사행정 및 정책론(서울:형설출판사,1995),p.59..관료의 임용권이 천황에게 있었으므로 천황중심적인 절대주의적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민봉사라는 현대민주주의적 공공성은 거의 없었다.특히,행정의 중심과 기초지식이 으로 강제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제한된 것이었고 총독부에서 일방적으로 입법기능과 함께 행정과 사법,국사 등의 권한까지 보유한 무단통치적 권위주의적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제4절 미군정시대1945년 종전과 함께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얄타협정에 따라 미·소 군정을 받게 되었으며 남한에는 미군정이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기구를 개편하는 일방인사제도개혁을 시도하여 과료조직은 종래의 총독지위가 군정장관으로 대치되었다.미 근정은 현상유지에 주력 하였으나 인사행정만은 미국의 제도를 직수입 하였다. 즉 미 군정시대의 인사행정에 있어서는 직위분류제, 보수의 조정, 채용시험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군정당국자의 한국사회에 대한 예비지식의 결여 및 한국인의 행정경험부족으로 혼란을 야기 하였으며, 제도와 실제간의 괴리가 심하여 실제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계급제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직무를 일일이 분석하여 분류하는 기술적·분석적 방법의 적용은 무리한 적용으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김동익,한국행정신론(서울:법문사,1999),p.9.제5절 대한민국건국 이후대한민국 건국이후의 시기를 하나로 고찰해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제1공부터 6공까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하겠다.(1)제1공화국(1948~1960)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60년 민주적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어 행정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행정부의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고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 의한 정권의 유지는 합리적인 행정보다는 엽관주의와 정실주의적 인사행정의 환경을 조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권력분립의 균형있는 통치가 아닌 대통령의 개인적인 지배의 원리로 변질되었다.제 1공화국의 정부조직은 1948년 7월17일에 제정된 정부조직을 세 차례의 개편을 통하여 인사조직의 근대화를 시도 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인사행정의 반 조성기에 불과 하지만 1948년 제정된 헌법과 1949년의 국가 공무원 법에 의하여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상당히 근대적 인사제도의 흔적을 볼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