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1. 이마트 개발 배경2. 할인점 마케팅의 변천3. 이마트의 성장4. 이마트의 마케팅 전략5. SWOT 분석을 통해 본 현재의 이마트6. 그밖의 고객지원 제도이마트의 성장배경과 마케팅1. 이마트 개발 배경첫째, 당시 백화점 부문은 고인건비와 치열한 경쟁의 광고판촉으로 인한 과다지출로, 그리고 입지투자의 과다로 인해 백화점업체가 저성장의 상황이었고, 대체소매업태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둘째, 소비자의 의식이 셀프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셋째, 해외여행이나 해외출장 등을 통하여 브랜드보다는 품질을 선호하는 상품정보를 습득하는 기회가 많음으로써 대형할인점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넷째, 주부의 사회진출이 증가되면서 계획구매가 생겨나고 주단위 장보기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다섯째,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해 상권입지의 중요도가 하락하였다는 것도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이러한 배경하에 탄생한 이마트는 할인점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켜 국내 할인점 시장의 기회를 선점하고 기업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대형백화점 중심의 시장을 소매업 중심의 유통환경으로 변화시켰고, 비용절감노력을 유도함으로써 소비자 물가안정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이마트의 등장은 소비자의 쇼핑 형태에도 변화를 유도해 계획적인 구매와 가족쇼핑을 유도하였다.2. 할인점 마케팅의 변천●태동기 (1993 ~ 1996)국내에 할인점이 최초로 선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93년을 전후로 해서이다. 당시 이마트 역시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오픈하면서 국내 최초의 할인점 탄생을 기점으로 일산, 안산, 부평등 서울 인근 지역부터 점을 오픈시키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대적인 부동산 투자와 점포 확장에 열을 올리던 뉴코아 백화점 역시 킴스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규모없이 중소점포들을 지속적으로 출점하는 추세였다. 여기에 외국계 할인점으로는 프라이스 클럽, 까르프, 마크로 등이 국내에 진출하였다.이시기의 이마트는 LOW COST OPERATION(이하 LCO)을 바탕으로 EVERY DAY LOW PRICE라는 슬로건 아래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유통업계에서 힘을 키워나가는 한편 소비자들에게 경제적인 쇼핑문화를 선보이고 있었다.●성장기 (1997 ~ 1998)이시기 역시 이마트는 LCO, EDLP를 기본으로 한 디스카운트 스토어를 표방하면서 외국계 할인점의 본격진출에 맞서고 있었다. 당시 본격적으로 국내진출을 한 외국계 할인점으로는 까르프, 월마트가 있다. 이시기 국내 할인점은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이마트의 경우 IMF의 영향으로 가격에 민감해진 소비자들 때문에 다소 득을 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격정책과 함께 이마트는 이시기에 여러가지 정책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최저가격 2배 보상제도이다. 즉 동일상권에서 이마트 보다 싼 상품이 있다면 차액의 두배를 환불해 주는 제도로써 동업계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와 함께 1차식품에 관한 신선도 만족 보장제, 지역단체 재원 지원 프로그램등이 이시기에 나온 정책들이다.●성숙기 (99년 이후)99년 이후 IMF 체제를 벗어나면서 할인점들은 다점포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격적인 경쟁체제도 도입하게 된다. 국내 할인점으로는 이마트, 롯데의 자금력을 바탕으로한 마그넷, 농협과 1차식품 유통의 잇점을 활용한 하나로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외국계 할인점으로는 까르프, 월마트가 본격적인 점포 확장을 도모 있다. 또한 국내업체와 외국업체의 합작인 삼성 테스코의 홈 플러스 역시 점포를 늘려 가면서 할인점 MS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이시기의 경쟁양상은 여러계통의 할인점이 난립하여 가격경쟁과 함께 백화점 수준에 맞먹는 판촉경쟁을 하였으며 최근 들어서는 백화점과도 경쟁을 하고 있는 양상인데 대표적인 예로 백화점 세일 기간에 대대적인 판촉을 벌여 백화점 고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이제 더 이상 할인점들은 싼가격으로 알아서 사가라는 식의 판매에서 벗어나 백화점 수준에 근접한 서비스와 접객으로 소비자 끌어안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마트 역시 그동안 LCO, EDLP를 기본으로 한 디스카운트 스토어에서 벗어나 디스카운트 스토어와 GMS(General merchandise store)를 접목한 대형 저가격 판매점의 형태를 띄어 나가고 있다.이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90년대 중반들어 프라이스, 까르푸, 마크로 등의 외국할인점들이 국내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국내최초의 할인점인 이마트 창동점이 탄생하였다. 그 당시의 이마트 전략은 LCO를 기본전략으로하여 배달無, 세일無, 판촉사원無 등의 소극적인 마케팅이었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월마트 등의 외국할인점들이 본격 진출하면서 국내할인점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마트는 이 시기에 선언적마케팅, 최저가격보상제, 신선도 만족 보상제, 지역단체 재원 지원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대대적인 마케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최근들어서는 할인점 시장이 본격적으로 경쟁에 돌입하면서 할인점들이 다점포에 박차를 가하면서, 할인점간의 무분별한 판촉전개로 경쟁이 격화되고 있으며, 또한 백화점과의 경쟁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으로 이마트의 마케팅전략에 있어서도 새로운 재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3. 이마트의 성장이마트 창동점의 개점 초기에는 창고형식의 매장으로 별로 그 매력을 끌지 못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언론에서 새로운 형태의 창고형 매장이 생겼다는 것을 전 매체를 통해서 홍보해 주었다. 그러한 매체를 접한 소비자들이 멀리서 창동으로 까지 구경을 오면서 입에서 입을 통해 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매출면에서는 상당히 저조한 매출이었다. 그래서 실패가 아니겠냐는 우려가 더 많았었다. 그러나 이마트는 그러한 예상과는 달리 성장을 거듭하였다.이마트의 성장에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홍보였다. 그리고 또하나는 소비자의 입을 통한 구전효과였다. 특히 구전효과는 외국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월마트, 프라이스클럽 등에 대한 경험과 향수가 남아있어 쉽게 어필할 수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97년말부터 시작된 IMF 경제위기도 백화점의 수요가 이마트로 많이 몰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민층은 값싼 이마트의 매력으로 인해 백화점에서 이마트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또 한 번의 기회는 오히려 위기속에서 찾아왔다. 90년대 말에 외국할인점 월마트 등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들어왔을 때, 여러 언론들은 이마트가 "순토종"이라는 것을 부각시켜주어서 또 한 번 큰 힘을 얻게 되었다.이마트는 출발 당시에는 별 전망과 기대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여러 주위의 여건들이 점점 이마트의 성장을 유리하게 하는 호재로 등장하였으며, 그러한 여건들을 십분 활용하여 급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러한 호재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으로 이마트의 위치를 지키고 보다 적극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4. 이마트의 마케팅 전략이마트의 경영 마케팅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다.‘고객과 함께하는 우리의 이마트, E가격, E기분, E마트’라는 이미지, 다점포 전략을 기반으로 한 구매력 강화, 저비용 투자로 고효율의 수익창출, 점포표준화를 통해 기존 점포의 지속적인 안정화와 신규점포의 조기 안정화, 윤리경영체제 정착등을 들 수 있다.이마트개점 초기에는 최초 창동점에서 크게 성공을 하였으나, 분당점을 개점하면서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저가격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새로운 마케팅을 전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최저가격보상제"이다. 이것은 분당에서 실시하여 "우리 상점에서 보다 싼 가격의 제품이 있다면 그 가격을 보상해 준다"는 것으로 월마트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것은 큰 효과를 발휘하여 매출액의 획기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이마트의 마케팅 전략의 특색은 "선언적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슈가 있으면 그 이슈에 맞게 대항해서 마케팅을 전개해 나간 것이 그대로 효과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저가격보상제, 신선도만족보상제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이마트는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는데, 불만제품에 대해 무제한 보상을 실시하였는데, 실제로 2년전에 구입한 전기밥솥과 가구를 교환하러 온 고객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보상해준 사례가 있었다. 그 후 그러한 교환에 대한 요구는 없었지만 신뢰성이 더욱더 고객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마트에서는 언제나 반품이 가능하다는 신뢰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비용의 발생없이 더 많이 고객이 찾는 효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최저가격보상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리보다 소비자들이 더 많이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소비자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그러한 효과가 있었다.문제는 모든 경쟁업체들이 거의 동일한 마케팅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계속해서 새로운 마케팅을 다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인점의 무부분별한 판촉전개로 경쟁이 격화되고, 백화점과도 경쟁에 돌입하면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이마트 또한 디스카운트 정책만으로는 안되며 이마트 본질 및 마케팅전략의 재정립이 필요하게 되므로써 한국형 저가격 정책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 목 차 ---1. 중국의 권역 구분과 8대 권역1) 동북 지역2) 북부 연해 지역3) 동부연해 지역4) 남부연해 지역5) 황하중류 지역6) 장강중류 지역7) 서남지역8) 서북지역2. 자연 및 인구통계 환경3. 경제 환경1) 경제규모와 구조2) 대외 개방3) 시장 규모와 거주민 소비4) 공업 생산력4. 지역별 진출산업의 투자환경과 전망기업의 중국진출을 위한중국의 지역별 특성과 진출지역 선택1. 중국의 권역 구분과 8대 권역중국은 960만㎢에 이르는 국토면적과 12.76억명(2001년말 기준) 인구를 31개 성, 직할시, 자치구에 보유한 대국이며, 여러 역사적ㆍ현실적 원인으로 각지역간 발전수준 및 소득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청대 이전부터 장강과 황하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적인 지역구분과, 중심인 하남성을 기준으로 화중, 화동, 화남, 화북을 나누는 4분법이 통용되었다. 중국의 7대 고도 중 개봉과 낙양이 있는 하남성은 중국의 중심인 중원으로 불리던 곳으로 9개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1979 년부터 등소평이 실시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은 크게 연안지역과 내륙지역으로 양분된 후, 3대 권역, 7개 권역 등 다양한 권역 구분 방법에 제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고에서는 8대 권역을 기준으로 중국의 지역별 경제 환경을 살펴 보고자 한다.8 대 권역 구분법은 국무원 산하 장기 경제전략 개발 연구기관인 국무원 발전연구중심(한국 KDI에 해당)이 제시한 주요 구분법이다. 8대 권역은 지리적 인접성, 자연조건 및 천연자원 부존의 유사성, 경제발전 수준의 근접성, 사회구조 유사성, 균형적인 규모 배분, 역사적 연속성 등이 고려되었으며, 또한 현재의 행정 구획 형태가 참고 되었다.1) 동북 지역요녕, 길림, 흑룡강성을 포함한다. 총면적은 79만㎢, 2001년 기준 총인구는 1억 696만명이다. 동지역은 자연조건과 보유하고 있는 천연자원이 서로 유사하고 역사적인 관계가 역시 밀접하다. 또한 자원 고갈 문제라든지 산업 구조 개선 문제(제조업 부문의 부실 중대형 국유개의 省이 포함된다. 총면적은 37만㎢, 2001년 기준 총인구는 1억 8,127만명이다.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는 동지역은 교통이 발달되었고, 과학기술, 교육, 문화사업이 발달하였다. 지리적으로 북부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개방에 따른 가장 큰 수혜 지역이다.3) 동부연해 지역상해, 강소, 절강으로 1개의 직할시와 2개 성이 포함된다. 총면적은 21만㎢, 2001년 기준 총인구는 1억 3,582만명이다.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이 지역은 일찍이 현대화를 시작하였고, 역사적으로도 대외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혁 개방의 많은 영역에서 선두주자로 인력 자본이 풍부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 GDP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4) 남부연해 지역복건, 광동, 해남으로 3개의 省을 포함한다. 총면적은 33만㎢, 2001년 총인구 1억 2,019만명이다. 이 지역은 홍콩, 마카오, 대만에 근접해 있어 해외 사회 자원이 풍부하고 대외개방 수준이 높다. 또한 화교 경제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도시 거주민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5) 황하중류 지역섬서, 산서, 하남, 내몽고로 3개의 성과 1개의 자치구를 포함한다. 총면적 160만㎢, 2001년 총인구는 1억8,863만명이다. 이 지역은 천연자원, 특히 석탄과 천연가스가 풍부하다. 지리적으로 내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는 중요시되고 있지만, 주요 산업부문에 대한 국유기업 지배력이 강해 대외개방이 늦어 지고 있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데도 힘든 실정이다. 이중 내몽고자치구와 섬서성은 서부대개발 해당 권역이다.6) 장강중류 지역호북, 호남, 강서, 안휘로 4개의 성이 포함된다. 총면적은 68만㎢, 2001년 총인구는 2억3,085만명이다. 이 지역은 농업의 생산여건이 좋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대외개방 수준이 낮다. 산업 전환의 필요성이 가중되고 있다.7) 서남지역운남, 귀주, 사천, 중경, 광서로 3개 省과 1개 직할시, 1개 자치구를 포함한다. 총면적 134만㎢, 2001년 총인구 2억4치하고 있고, 척박한 토지로 인해 저소득층 인구가 많다. 반면, 서남 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에 비교적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모두 서부대개발 해당 지역으로 향후 발전이 기대되는 지역이다.8) 서북지역감숙, 청해, 녕하, 서장, 신강으로 2개 省과 3개 자치구가 포함된다. 총면적은 398만㎢, 2001년 총인구는 5,800만명이다. 자연 조건이 열악하여, 큰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고 경제력 미비로 소비시장이 협소하다. 중앙 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에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들 5개 지역 역시 서부대개발 해당 권역이다.2. 자연 및 인구통계 환경중국 각 지역은 면적과 인구수에서 비교적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지역 면적을 보면, 서북지역이 398만㎢로 전 국토의 41.42%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동부연해지역은 21만㎢로 2.14%를 차지하여 가장 작다. 인구 규모로는 최대 인구를 가진 사천성(중경시 포함) 권역을 포함한 서남지역이 2억 4,611만명(2001년)으로 전국의 19.28%를 점유하여 가장 많고, 서북지역은 5,800만 명으로 4.5%를 점유 가장 적다. 인구밀도는 2001년 동부연해지역이 660명/㎢로 가장 조밀하고, 서북지역은 15명/㎢로 가장 낮다.각 지역별 도시화 현황을 보면, 연해지역의 도시화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산동성 강소성 광동성 3개지역은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를 41~52개 보유하고 있으며, 도시화 정도가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특히 산동성은 거의 모든 도시가 인구 50만명 이상의 대형 도시로써 광동성 보다 높은 집약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소위 도시라 함은 각기 다른 정도의 4대 네트워크 인프라(도로ㆍ철도ㆍ지하철 등 교통망, 병의원 상하수도 설비 등 위생 보건망, 도시가스ㆍ난방열 공급 등 에너지망, 금융 및 물류 시스템 등 유통망)를 갖추고 있는 일반 도시로써, 여기에 부합되는 내수시장을 조성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3. 경제 환경1) 경제규모와 구조2001년 동부연해지역의 2001년 GD차지하여 경제규모가 가장 작다. 두 지역의 격차는 6.4배나 되는 규모이다.1 인당 GDP를 보면 동부연해지역의 1인당 GDP는 15,617원으로 가장 높다. 서남지역의 1인당 GDP는 4,698원으로 가장 낮다. 두 지역의 차이는 3.3배이다. 1인당 GDP가 전국 평균(7,516원)을 초과하는 지역은 동북, 북부연해, 동부연해 및 남부연해 4곳이며, 전국 평균보다 낮은 지역은 황하중류, 장강중류, 서남 및 서북지역 등 나머지 4곳이다. 연해지역에서도 남북의 격차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2001년 동부 연해지역의 1인당 GDP는 북부 연해지역의 43.68%를 초과했다.2) 대외 개방수출입 현황이나 외자유치 현황을 막론하고, 남부연해지역의 개방 수준과 대외 의존도가 가장 높다. 2001년, 남부연해지역의 수출입은 전국 수출입 총액의 40.42%를 차지했다. 수입은 41.80%, 수출은 38.90%이고, 실제 유치된 외자는 37.30%, 실제 유치된 FDI(해외직접투자)는 35.19%이다.남부연해 지역의 GDP에 대한 수출입 의존도는 110.44%로서, 수입 의존도가 59.63%, 수출 의존도는 50.80%이다. 실제 유치된 외자는 고정자산 투자의 33.48%를 차지하고, 실제 외국기업의 직접 투자는 고정자산 투자의 30.32%를 차지한다.북부·동부·남부 연해지역의 개방 수준은 기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수출입 및 외자 유치가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본다면, 서북지역의 대외 개방 수준이 가장 낮다. 2001년, 서북지역의 수출입 비중은 전국의 0.84%를 점유하며, 실제 외자유치비중이 전국의 0.31%에 불과해, 개방 수준이 가장 높은 남부연해 지역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만약 수출입 의존도만을 보면, 장강중류 지역의 대외개방 수준이 가장 낮다. 장강중류 지역의 수출입 의존도는 7.36%로 수입의존도가 3.99%, 수출의존도는 3.37%에 불과하다. 남부연해지역과의 차이는 103.08%pt에 달한다.3) 시장 규모와 거주민 소비시장 규모를 살펴보면, 사품 소매 총액은 7,286억元으로 전국의 18.72%를 차지한다.연해지역 시장 규모는 동부, 북부, 남부연해 순으로 크다. 특히 북부연해지역은 3차산업 위주인 상업 및 음식업 규모가 가장 크다. 북부연해의 도, 소매, 음식업 종업원 수는 98.9만명으로 중국 전체의 20.51%를 차지했다.서북지역은 시장 규모가 가장 작은 지역으로 서북지역의 사회 소비제품 소매총액은 1,040억 元으로 전국의 2.77%에 불과하며, 이는 동부연해지역의 1/7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도·소매업, 음식업 종업원 수는 15.5만명으로 전국의 3.22%를 점유하고, 이는 북부연해지역의 1/6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도시민 거주민의 구매력은, 남부연해지역에서 가장 높고, 동부연해와 북부 연해지역이 그 다음이며, 황하중류지역이 가장 낮다. 2001년, 남부연해지역 도시 인구의 1인당 평균 수입은 9,510元이고, 1인당 평균 소비지출액은 7,255원이다. 가장 저소득 지역인 황하중류지역의 도시민 1인당 평균 수입은 5,364원이고 1인당 평균 소비지출은 4,225元으로, 남부연해지역의 56%와 58% 수준에 머물렀다.8 개 지역의 농촌 주민의 구매력은 도시민 구매력간의 차이보다 크다. 2001년, 8개 지역의 도시민 1인당 평균 수입의 표준편차는 0.6158로, 농촌 주민 1인당 평균 순수입 표준편차 0.9592보다 낮다.4) 공업 생산력공업 생산능력의 경우, 동북지역의 광업 생산능력이 가장 높았고, 그 점유비는 전국의 21.18%였다. 동부연해지역은 생산재 소비재, 자본재에 대한 최강의 제조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 점유비는 각각 전국의 22.56%와 23.47%, 28.10%였다. 동부연해지역의 광업 생산능력은 가장 미약했고, 그 증가율은 전국의 4.23%이다.서북지역은 생산재와 소비재, 자본재에 대한 제조능력이 가장 미약했고, 그 점유비는 각각 전국의 1.78%와 3.12% 및 1.17%로, 제조능력이 가장 강한 동부 연해 지역에 비해 20%pt이상 뒤 떨어졌다.4. 지역별 진 기본
---- 차 례 ----1. 러시아 혁명이란?2. 〔역사적 전제〕3. 〔제1차혁명〕4. 〔재편의 한계와 제1차세계대전〕5. 〔2월혁명〕6. 〔10월혁명〕7. 〔소비에트정권〕8. 〔내전과 간섭전쟁〕9. 〔세계에 미친 영향〕10. 결론(개인의 생각)-- Russian Revolution --1. 러시아 혁명이란?제정러시아에서 일어난 1905년의 부르주아적 혁명운동과 17년~21년의 사회주의혁명 및 내전을 총칭하는 말. 사회주의 이름 아래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 내는 한편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혁명운동을 세계로 확대시키는 근원을 형성하여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은 크게 나누어 1905년 제 1 차 혁명과 17년의 혁명으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과 으로 구분된다. 은 러시아혁명의 전(全)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을 이루었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사회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권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이라는 명칭은 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2.〔역사적 전제〕20세기 초의 러시아는 핀란드의 자치를 인정하면서도 지배하고 폴란드와 카프카스를 완전히 병합하여 동으로는 시베리아에서극동까지를 판도로 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대러시아민족이 제국의 주민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국가권력은 신분제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사법제도와 전 신분적 지방자치제, 그리고국민개병제 군대를 가진, 개량된 무제한 전제군주제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에 의해 육성된철도와 중기계공업, 외국 자본으로 발전한 철강·석탄·석유업이 자립적으로 성장한 면공업과 병존하는 후진자본주의적 공업체제와, 지주적 토지소유가 말·농기구를 가진 공동체 농민의 노동에 의해 지탱되는 고용제적 농업구조가 출신지로부터 유출된 노동자의 저임금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체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으나, 20세기에 접어들자 공황으로 인해 경제성장이 멈추었으며, 구조적 잘못으로부터 갖가지 사회운동이 분출되기 시작했다단체가 국고에로의 납세거부를 호소하는 을 발표하자,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다음날 페테르스부르크소비에트의 대의원 전원을 체포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2월 7일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시작되자 당국은 노동자들이 조직한 무장자위대에 공격을 가했으며, 페테르스부르크와 폴란드로부터 증원군을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한 노동자들을 분쇄했다. 이 때 약 700명의 노동자·시민이 사망했다. 이는 통상 라 불리는데, 무장한 노동자가 혁명의 기득권과 해방된 공간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었다. 위기를 벗어난 황제와 보수파는 약속한 대개혁을 실시하지 않고 12월 11일 우선 선거법을 약간 수정한 정도의 국회선거법을 제정하였고, 다시 1906년 2월 20일에는 황제의 법률재가권을 인정한 국회·국가평의회의 2원입법제를 발표했다. 국회개원 직전인 같은해 4월 23일(신력 5월 6일) 계속해서 황제에게 이 속한다는 신국가기본법이 공포되었다. 혁명의 결과는 무제한 전제로부터 국회와 국가평의회의 2원에 의해 제한되는 전제로의 이행이라는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끝난 것이다. 4월 27일 국회는 개회했으나, 자유주의자의 정당인 입헌민주당과 무당파 급진농민들로 구성된 트루도비키파가 의원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정부와 대립했다. 7월 8일 정부가 국회를 해산하자, 181명의 의원들은 비보르크에 모여 반정부투쟁을 호소했으나, 발트함대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쳤다. 국회해산과 함께 총리를 겸임하기에 이른 내무장관 스톨리핀은 이후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공동체의 해체를 노린 개혁을 추진, 1907년 6월 3일 제2국회의 해산과 동시에 지주세력을 우대하는 신국회선거법을 공포하고, 강제로 국회를 정부에 협력기관으로 만듦으로써(6월 3일의 쿠데타) 제1차혁명은 종결되었다.4.〔재편의 한계와 제1차세계대전〕스톨리핀의 집권하에서 경제는 다시 호황을 맞이하여 은행의 힘이 강해졌으며, 부르주아문화가 발전했으나, 제1차혁명이 낳은 모순은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각 관청에 대한 접수가 행해졌는데, 국회의 대표자가 교통부에 들어가 철도 운행을 지휘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것은 모길료프의 총지휘부에 있던 황제가 이바노프장군에게 명하여 수도에서 발생한 혁명에 대해 진압군을 출동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총지휘부의 군 수뇌들은 국회의장 M.V.로잔코와 접촉하면서 황제에게 계속해서 양보를 진언하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3월 1일 병사들이 최종적으로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것이 라는 문서로 정리되었다. 노동자와 병사가 소비에트에 충성을 표시하고 관리와 장교가 국회임시위원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상태가 이른바 상태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소비에트의 승인을 받아,3월 2일 국회임시위원회는 총리 G.E. 리보프, 외무장관 P.N. 밀류코프, 상공장관 A.I. 코노발로프 등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백군수뇌 들은 로잔코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태자에게 양위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일단 이를 받아들였으나, 황태자의 병을 고려하여 자신의 동생 미하일에게 양위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하일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여기서 제정은 붕괴하게 되었다. 제정을 타도한 혁명 중의 하나는 이며, 다른 하나는 이었다. 이 2개의 혁명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 혁명의 수익자로서 농민과 피압박민족이 새로이 만들어진 자유의공간 속에서 혁명에 나서게 되었다. 농민들은 공동체단위로 행동했으며 볼로스티(군과 면의 중간 행정단위) 차원의 위원회를 조직했다. 피압박민족들도 조직체를 형성했는데, 우크라이나에서는 3월 4일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우크라이나중앙라다(평의회라는 뜻)를 성립시켰다. 이 이후의 과 의 전개는 과 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임시정부는 정치범의 대사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신분제의 폐지, 종교적·민족적 차별의 철폐를 실현하여 러시아를 자유로운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에 있었다.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혁명은 보다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 예비의회를 발족시켰으며, A.I.코노발로프 부총리로 맞이하여 제3차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농민혁명이 고양되어, 지주저택에 대한 방화행위가 확대되어 갔으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부의 수명은 이미 다해 있었다. 잠행중인 레닌은 임시정부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의 결행을 동지들에게 제안했으나 당중앙위원회는 이에 즉시 찬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G.E. 지노비예프와 L.B. 카메네프 등의 고참 간부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권력장악에의 준비는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의 의장이 된 L. 트로츠키의 판단으로 진행되어, 10월 12일 반혁명로부터의 소비에트의 방위라는 목적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가 위원을 파견하여 페트로그라드의 군사조직을 그 지휘하에 두려고 하자, 군관사령부와 충돌했다. 23일 밤 임시정부는 이 도전을 분쇄할 것을 결의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볼셰비키측을 공격했다. 그러나 24일 중으로 수도 내의 주요 거점은 모두 혁명파병사와 노동자적위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동궁에 고립되었다. 10월 25일(신력 11월 7일) 오전 10시 군사위원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었음을 선언했다. 동궁은 26일, 약간의 전투 끝에 함락되어, 케렌스키를 제외한 각료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 행동은 25일 밤 11시에 열린 제2차 전러시아노동자·병사소비에트대회에 기정사실로서 제시되었다. 소비에트우파는 이에 항의하여 퇴장했고, 남은 볼셰비키와 좌파사회혁명당, 그 외 약간의 당파들은 소비에트권력의 행동강령을 담은 호소문, 와 를 레닌의 제안에 의해 가결했다. 민주적 강화와 즉시휴전, 지주의 토지몰수, 군대의 민주화,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헌법제정회의의 소집, 식량의 확보, 민족자결권의 보장 등이 새로운 권력의 목표로 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사실이다. 목표에 관해서는 모두 일치했으나, 좌파사회혁명당에 의해 입각을 거절당한 볼셰비키가 레닌을 수반으로 하고 트로츠키를 외무인민위원으로하는 단독정부를 제안하자, 타당들은소정권을 옹립했다. 그리고 8월 2일과 3일에는 미국과 일본이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출병을 선언했다. 연합국은 동부전선의 재건을 위해 무력간섭의 기회를 노리고 있있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반란에 의해 사마라(현재 쿠이비셰프)에 헌법제정회의의원들이 반소정권을 수립했다. 소비에트정권은 이 위기에 처하여 적군을 징병제군대로 전환했으며, 8월 30일 레닌이 암살자에게 저격되어 중상을 입자 체카(KGB의 전신)를 중심으로 적색테러로써 대항했다. 반볼셰비키파들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후원을 받는 사회혁명당파와 구군인·제정파·자유주의파의 대립은 뿌리 깊은 것이었으나, 9월 우파에서 열린 국가회의에서 타협이 성립되어 5인의 집정부하에 전러시아통일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단명에 그쳤다. 11월 17일 육해군장관 A.V. 콜차크는 쿠데타를 일으켜 최고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리하여 제정파군인이 반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콜차크는 연해주에서 일본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펴고 있던 G.M. 세묘노프도 일단 휘하에 두고, 전시베리아지배자로서의 지위를 굳힌 뒤, 19년 3월 우랄에서 서쪽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4월에는 카잔과 사마라에서 80㎞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했다. 이 때 북서부에서는 에스토니아로부터 로잔코군이 페트로그라드를 목표로 침공해 들어가 협공의 형태를 취했으나, 적군은 이를 잘 막아내어, 결국 6월 9일 V.I.차파예프군이 우파를 탈환했으며, 콜차크군을 퇴각시켰다. 이미 시베리아에서는 콜차크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농민파르티잔이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앙부의 농민들은 소비에트정권의 곡물징발에 고생하면서도, 필연적으로 지주제의 부활을 가져올 제정파의 승리를 두려워하여 적군을 도와주었다. 이것이 적군이 승리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다. 콜차크군의 진격이 저지되자, 이번에는 남쪽으로부터 A.I.데니킨군이 공격해 왔다. 6월 24일 하리코프를 함락시킨 데니킨군은 7월 3일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개시했다. 적군측의 작전상 혼란도 있
심리학 레포트한국인의 문화적 규법과 일치하는행위양식이 대인관계에 어떻게기능하는가?과 목심리학 개론제 출 일 자학 과학 번이 름◎한국인의 사회심리와 대인관계친구들이 어울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을 비교해 볼 때 나타나는 흥미로운 차이점 하나는 돈을 지불하는 행위이다.한국에서는 일행들이 저마다 자기가 전체의 음식 값을 치루겠다며 나서다가 한사람이 치루는 반면에 미국에서는 계산서를 받고서 각기가 먹은 음식값과 세금을 계산하느라고 부산을 피운다. 한국인이 미국인들의 이같은 행위를 의아해 하듯이 미국인도 한국인의 행위를 의아해 한다. 이같은 사례는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한가지 예일 뿐이다. 우리들은 매일 다양한 장면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교류상황들을 눈여겨 관찰한 사람들은 다양한 행위양상을 들어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각기 무관한듯이 제시되어 서로간에 일관성이 없거나 심지어는 모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의혹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교류특성이라 여겨지는 체면세우기, 눈치보기, 핑계대기 및 다양한 심정들이(정 또는 한) 각기 독립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들 행위들로 부터 한국인의 심리특성을 유추하여 한국인은 집단주의적이라고 하는 반면에 어떤이는 개인주의가 또한 강하다고 한다. 한국인은 표리부동하다는 주장들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전래의 믿음과 대립되기도 한다.◎ 한국인의 심리와 대인관계한국인들의 정서에는 ‘한’의 감정이 흐르고 있으며 ...... 미국인들이 가지는 서구적 사고 방식에서는 개인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는 데, 한국에서는 ‘개인성’이라는 것이 나쁜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 서구에서는 행위 또는 행동을 중시하여 행동으로서의 반응을 가리켜 책임이라고보는 데 비해 한국식 책임의식은 그 자리나 위치를 중시한다 ...... 미국에서는 규칙이나 기준이 구체적이고 실행여부를따라 더 많은 만족 또는 불만족을 느끼게 되며, 이런 과정을 통해 상대에 대해 평가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대화에서 ‘지가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라는 말을 상대에 대해 섭섭하거나 야박하게 느낄 때 사용한다. 서양인같으면 상대의 나쁜 행동을 객관적으로 열거하여 상대를 합리적으로 비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대와 기설정된 특정관계를 전제로 하고 거기에서 상대가 기대수준 이하의 행동을 했을 때 섭섭 또는 야박하다는 말을 하게 된다.즉 미국에서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대상화 (objectify)하고, 한국에서는 상대를 관계 속에서 주관화 (Subjectify)한다고 볼 수 있다. 상대를 독립된 개체로 파악하는 서양의 문화권에서는 타인을 제 3 자로 파악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이 적합할 것이나, 타인을 자신과의 관계적 틀 속에서 파악하여 그 틀에서 규정된 주관적 기대와 상대의 행동이 얼마나 일치 또는 불일치하는가를 경험하여 상대를 평가하는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그 관계 속에 이미 개인의 감정과 관여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더욱 적합할 수 있다. 당사자 심리학에서는 상대방이 객관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기에 “정 각각 흉 각각”이라는 속담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상대방이 객관적으로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어도 상대방에 대해 정을 가질 수 있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말 속에도 상대방의 단점이 정의 형성에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그러나 “Likability”라는 말이 통하는 미국사회에서는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가의 문제 즉 ‘Who is he?’의 문제가 상대방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한국인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정이 많이 들었다 또는 들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왜 누구와 정이 들게 되었는 가를 물을 때, 그 해답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likability)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어떤 특성 때문에 정이 들었다황에 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한탄조의 생각이 恨을 그대로 머물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섭섭함이나 야박함을 유발하는 행동을 했을 때,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문제된 사안과 직접 관계가 없는 자기 희생이나 자기 고통을 실제로 만들기까지 하여 자신의 미안한 심정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하기도 한다. 고 3 수험생을 둔 어머니가 자식과 함께 불필요한(?) 밤새우기를 자녀에게 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는 것은 극히 한국적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노인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할머니들이 강의를 청취하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恨의 이야기를 토로하는데 더욱 열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분들은 자신의 심정을 알아줄 사람을 찾기 위해 노인대학에 나온다.1. 한국인의 심층심리 구조얼굴을 가리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 생각, 행동 등을 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고유한 한국인의 심리적 단서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필자는 가장 한국인다운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을 ‘한’과 ‘정’으로 잡고, 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수행해 왔다. 한은 한국인의 성격 및 정서체계의 원형이며, 정은 한국인의 대인관계의 기본적 심리문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한국인의 한은 매우 복잡한 문화, 심리적 구조이며, 매우 미묘한 심층 심리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한의 심리는 ‘억울함’의 심리를 그 기저에 깔고 있으며, 억울함의 ‘한’심리 속에는 부당함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부당한 차별대우나 피해를 받았을 때 억울함을 느끼며, 동시에 그 가해 당사자에 대한 증오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한의 심리상태는 이 증오의 심리상태를 극복했을 때 나타나게 된다. 극복의 방법은 피해나 차별대우의 책임을 자신에게 해를 입힌 가해 당사자와 분리시키는 것이며, 흔히 그 방법은 그 책임을 자신의 무능력이나 팔자 또는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해당사자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심리 기술과 상식적 수준의 한국인 심리이론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이론체계 구성에서 기본적 사실 또는 합리적 지식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한국인의 심성을 다룬 거의 대부분의 논저들은 착실한 자료의 뒷받침이나 성숙된 개념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인의 심성을 의식구조 또는 가치관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이 정이 많고 한이 깊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정이 어떤 현상이며, 한이 어떤 상태의 심리인가를 먼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배경 위에서 한국인이 정이 많고 한이 깊다는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정이나 한과 같은 개념은 한국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개념의 차원을 넘어 그것이 어떤 심리적 속성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심리현상이 나타나는 심리적 역동과정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이나 한과 같은 한국인의 심리특성 기술개념은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개념이다.2. 한국인의 심정주의서양인들은 사회적 행동이나 대인관계에서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대해 주었느냐의 문제를 따지기 보다는 상대가 나에게 무슨 행동을 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은 관찰이 가능한 외현적 행동에 준해 그 사람의 인격, 책임, 인간성 등을 논하는 경향이 있으며,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은 속마음이나 심정은 책임성의 문제나 인격의 문제를 논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채택되지 않는 경향이 높다.그러나 한국인의 경우는 외현적으로 표출된 행동보다 그러한 행동을 유발시킨 동기나 심정을 더욱 중요시하거나, 이들을 행동의 해석에서 비중있게 고려한다. 어떤 면에서 한국인에게 있어 외적 행동은 내적 심리 즉 마음씨의 표출 단서 내지 부산물에 불과하며, 따라서 한국인은 그러한 상대방 행동의 뒷면에 있는 의도나 마음씨를 읽는데 매우 민감하며 그러한 활동을 통해 추론한 속마음이 어떤 것이냐의 문제가 대인관계나 인상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적 틀로 하고 있다는 점은 情이 들기 어려운 사람에 대한 한국인의 기술을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의 응답자들은 情이 들기 어려운 사람의 특성를 세가지 범주에서 반응하는 바, 그 내용은 솔직성 결여, 자기과시, 이기적 타산성 등이다. 이러한 특성은 가족에서의 인간관계 특성과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란 점에서 情이 가족관계에서 출발함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그러나 情은 그 자체로 대인간의 밀착성을 스스로 지각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 즉 情의 강도가 높거나 情이 많이 들었다고 해서 情을 가진 당사자가 情의 대상인물인 상대를 반드시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情이 ‘우리’라는 의식표상의 그릇 속에 담겨질 때 情은 그 본체를 드러내면서 우리 밀착의 아교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지금까지 필자의 우리의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면, 한국인에 있어, ‘우리’는 상대와 남남이 아님을 뜻하며 우리관계를 느낄 때 情을 느끼면 친밀감을 경험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으로 나타났다. 情, 친밀함, 마음 편안함 등은 모두 가족관계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경험상태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인의 ‘우리’라는 개념속에는 ‘남’이 아니라 ‘식구’처럼 느낀다는 감정과 인지체계를 그 내포적 속성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한국인은 우리 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어떤 개인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라는 범주인식이 되는 순간부터 상대에 대해 이해하고 가깝게 대하고 비밀이 없이 행동해야 된다는 예기와 의도가 생겨나게 된다. 결국 ‘情’과 ‘우리’는 서로가 상대를 채워주려는 상호 수반성을 갖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떤 면에서 情은 우리관계의 현상적 경험상태라면, ‘우리’는 情이라는 현상적 경험에 대한 인식체계라고 볼 수도 있다.다음으로 한국인의 情이 어떻게 심정심리라는 현상학적 특질을 진하게 내포하고 있는 개념인가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먼저 情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장기간의 접촉과정에서 이슬비에 옷이 젖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다.
-- 홍 매 자 --● 개 요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2m정도인데. 가지는 가늘며 약간 능선이 지고 자갈색이며 날카로운 가시가 3개로 갈라진다. 잎은 어린 가지에서 어긋나기로 달리고 짧은 가지에서는 모여나기하며, 거꾸로 선 피침형이고 끝은 뾰족하며 절지이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그리고 또 잎의 표면은 초록빛이고 뒷면은 흰빛이 돌며 가을에 빨갛게 단풍이 드는 것을 당매자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개량한 품종인 키 50cm 정도의 사철 붉은 빛을 띠는 잎을 가진 홍매자기있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 4, 5월에 피고 노랑 빛이지만 표면은 붉은빛이 돌며 짧은 가지 위의 총상화서에 달리는데 열매는 타원형이고 길이 1cm정도의 장과가 9월에 빨갛게 익는다.생태적 특성내한성강양분요구도비옥토개화기5월결실기6~8월외형적 특성형태낙엽활엽교목잎잎은 호생하며 피침형, 넓은 피침형 긴 타원형이고 예두이며 넓은 예저이고 길이 3~9cm, 폭 1~2cm로서 가장자리에 파상의 잔톱니가 있고 엽병은 길이 4~6mm이다.꽃꽃은 양성화로 5월에 잎과 같이 피며 적색으로 만첩이고 소화경은 길이 1cm정도로서 잔털이 있다. 꽃받침통은 도란형이며 꽃받침잎은 뒤로 젖혀지고 선상의 잔톱니가 있으며 꽃잎은 타원형으로 암술대와 지방에 털이 없으나 간혹 잔털이 있는 것도 있다.열매열매는 거의 둥글고 털이 없는 적색 핵과로 지름 1~1.3cm이며 6~8월에 성숙한다.가지 및 줄기 : 가지에 털이 없고 총생하며 소지는 회갈색이다.가지 및 줄기가지에 털이 없고 총생하며 소지는 회갈색이다.이용가치 및 용도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먹음직스러워 정원의 관상수로 적합하다.재배 및 관리내한성이 강하고 습지에도 잘 견디나 건조에는 약하다. 사질양토의 비옥한 토양에서 생장이 좋고, 햇빛이 잘 드는 양지에서 개화결실이 잘된다.번식방법실생, 삽목, 분주에 의해 번식한다. 여름에 익은 열매를 채취하여 직파하여 발아가 되고 새로 자란 가지로 꺾꽃이 하면 발근이 되며, 원줄기에서 돋아나는 어린 묘목을 포기나누기하여 증식한다.PART Ⅰ3월 16일에 집근처에있는 집에서 화분에 2cm정도 자라있는 홍매자를 구입했다. 홍매자를 선택한 이유는 화분에 붙어있는 홍매자에 관한사진 때문이었다. 화려한색의 꽃들로 치장된 개화된 홍매자는 그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며 봄의 내음을 힘껏 품고 있는 듯 했다.꽃집 주인에게서 홍매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볕이 잘드는 곳에 놓아주고 물을 충분히 줘야한다는 말에 따라 집의 베란다 창가에 놔두었다. 내한성도 좋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물은 매일 마다 주었고 햇빛도 충분히 받게 위치를 잡아주고 홍매자의 관찰을 시작했다.PART Ⅱ< 구입당시의 홍매자 화분>●날 짜 : 2007년 3월 16일●크 기 : 2cm●특 징 : 구입당시의 홍매자는 2cm정도의 크기로 잎이 이미 나와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다른 식물과 마찬가지로 녹색을 띄고있었는데 녹색보다는 연두색에 가까운 연녹색이었다. 그리고 그 크기가 너무 작아 과연 제대로 자라줄지 의문스러웠다. 줄기나 잎부분에 다른 식물에서 보는것처럼 솜털이 난다거나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고 잎은 고구마의 잎과 같은 무늬가 있다. 줄기는 다른 화분과는 조금 다르게 나뭇가지와 같이 생겼으며 상당히 딱딱했다.●감 상 : 태어나서 혼자 화분을 키우는 건 처음이다. 보통은 지나가면서 흔하게 보는 꽃들도 식물들도 아무런 느낌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이 조그마한 식물이 자라나고 꽃을 피는 것을 보면서 이런 무심한 마음이 조금이 나마 바뀌길 바란다.●날 짜 : 2007년 3월 27일●크 기 : 4cm●특 징 : 처음보다 2cm정도가 자라나 4cm로 커졌다. 잎이 더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고 다만 잎의 크기가 약간 커졌을 뿐 처음의 모습과 비슷했다. 즉, 처음의 모습모다 전체적으로 약간 크기만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감 상 : 지금까지는 처음과 큰 변화가 없었기에 그저 크기가 자란것에 만족하고 바라보고있다. 매일같이 화분에 물을 주는 일도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날 짜 : 2007년 4월 16일●크 기 : 8cm●특 징 : 처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많이 자라난 것이 눈에도 확실히 보인다. 전체길이는 8cm정도로 자라났고 줄기가 자리 거기에 새로운 잎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잎들중에서 반 정도가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다. 잎들의 색깔변화는 위에부분부터 일어났으며 잎의 바깥쪽부터 해서 안쪽으로 붉은 색이 물들고 있다. 몇몇 잎과 줄기 사이에 새로운 잎이 조그맣게 나오고 있다. 맨 밑부분의 입하나가 상처를 입었는지 입 끝부분이 마르기 기작했고 안쪽으로 말리고 있다. 그 잎 하나만 그런 것으로 보아 상처로 인한 것 같다.●감 상 : 어제와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베란다에 있던 화분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베란다에 두었더니 바람이 많이 불어 화분에 있던 흙이 많이 날아가 바닥에 버려진 것을 보고 이렇게 조그마한 화분하나 키우는것도 참 힘든일이라고 한숨도 쉬어본다. 집옆에 꽃들이 심어진 화단에 가서 비슷해 보이는 흙을 가져와 화분에 넣었다. 부디 잘 자리 주었으면 좋겠다.●날 짜 : 5월 15일●크 기 : 12cm●특 징 : 전체 길이는 12cm정도로 자라났고 줄기의 윗부분에 새로운 잎이 아주 작게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잎의 많은 부분의 색이 붉은색을 띄고있다. 5월달에 꽃이핀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꽃은 피지 않았고 서서히 꽃필수 있는 준비를 하는 듯 하다. 홍매자의 꽃은 피지 않았지만 홍매자는 잎이 참 보기 좋은 것 같다. 붉은색을 띄는 잎은 꽃에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맨 윗부분에는 집게발처럼 뾰족한 것이 나왔는데 잎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윗부분과 아랫부분 모두 새로운 잎이 나고 있는데 윗부분에서 나는 잎들은 붉은색을 띄고있는데반해 밑의 부분에서 나고있는 잎은 녹색의 색을 띄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