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 리포트와 논문 담당교수: 임석규 학번: 01162417의 재해석채 승 윤1. 서론시를 감상하는 것은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가능하다. 그렇지만 비전문가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핸디캡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시의 총체적인 감상은 어렵다. 더군다나 입시 위주의 풍토에서 점수를 획득하기위한 시의 감상은 시가 전달하고픈 사고의 전달을 방해하였다. 즉, 감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의미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시를 따분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필자는 이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사실 문학은 즐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작품선정에 있어서 가급적 널리 알려진 시를 채택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동주의 를 선택하였다.필자는 필자 스스로 모든 논의를 진행시키기엔 어렵다고 판단, 몇 개의 윤동주에 관한 연구 서적을 참고하였고 이러한 서적의 해석 및 주석을 주 논의방법으로 하고자 한다. 이미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왔고 이에 또 다른 연구를 붙임은 사족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해석은 다소 창조적이지 못할 수 있지만 소기의 목적을 고려한다면 능히 그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논의 방법은 초, 중, 고등학교에서 수많은 선생님들께서 행하였다고 여겨지지만 글로 옮겨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각 해설서는 작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소지가 크므로 텍스트언어학적 혹은 내재적 의미의 탐구는 적절치 않다고 여겨진다. 윤동주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시인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재적, 외재적 의미의 가림 없이 종합적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해와 감상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다.이 글이 시를 읽고 나서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자극이 된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여겨진다.2. 의 해석이 시가 쓰인 것은 1942년 6월 3일로 되어있다. 즉,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여름방학을 앞둔 때이다.) 윤동주의 일대기에서 보자면 가장 후반부에 쓰인 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시대적 상황을 명확히 해 두는 이유는 배경이 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가 쓰인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작품을 접한다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시 전문을 접해 보도록 하자.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六疊房은 남의 나라.詩人이란 슬픈 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詩를 적어 볼까.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까?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六疊房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쉽게 쓰여진 詩」전문첫 번째 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시어는 바로 '六疊房'일 것이다. 육첩방은 일본의 '다다미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자가 육첩방에 누워 창 밖의 밤비소리를 듣는 다는 것은 화자에게 있어서의 '남의 나라' 의식이다.) 즉,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구분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화자는 분명하게 민족적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창 밖에 밤비가 내린다는 설정은 우리나라의 어두운 시정을 비춘 것이다. 시를 쓰고 있는 곳이 조국이 아닌 '남의 나라' 일본이라는 사실은 화자를 침통하게 만들고 있다.두 번째 연에서 화자는 시인의 명분이 슬픈 천명이라 하였다. 왜 시인은 슬픈 천명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시인이란 직분은 뭔가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직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중근, 윤봉길과 같은 사람은 자신이 직접 행동함으로써 일제 저항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시를 씀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었을 뿐이다. 사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윤동주의 시가 그의 저항성에서 온 것은 아니며, 더구나 그의 시가 저항시일 수는 없다는 의견 또한 재기되어 온 것이다.) 그렇지만 순국 전의 판결문에 따르면 그의 죄목은 독립 운동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후쿠오카 감옥에서 이러한 죄목에 대한 별다른 저항 없이 순국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면 그는 분명히 저항적 사상을 전개한 시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출생지는 투쟁의 본거지인 북간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평가에도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시를 적어 나가기 시작한다. 참으로 그는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은 화자의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집에서 보내준 학비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생 본연의 모습에 있어서도 화자는 부끄러움을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네 번째 연의 '늙은'이란 수식어의 사용은 강의를 듣는 것이 그리 떳떳한 일이 아님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화자의 입장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아무런 민족적 의식에 따른 행동 없이 일본의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다. 아무런 실천 없이 무기력하게 강의실에서 쳐다본 대학교수의 얼굴은 설령 나이가 젊더라도 늙어 보였을 것이다. 관조적인 자세를 취함이 옮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다섯 번째 연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료의 죽음을 토로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화자는 북간도 출신이었으며 북간도 출신의 어릴 적 동무들은 투쟁활동을 하다 전사한 것이다. 따라서 여섯 번째 연에서 그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숨어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가 싹튼 것이다.일곱 번째 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부끄러운 사람임을 인정한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를 끝마치고 마음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앞으로 취하고자 할 자세를 언급하려 한다.여덟 번째 연에서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상황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하였다.
KBS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 출산파업’ 편은 한국사회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라는 현상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대책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사실 본인에게 출산율 저하 현상은 현재 일간지(중앙일보)를 통해 특집기사로 다뤄지고 있기도 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던 터다.한국 경제의 급격한 성장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시대에 결혼과 출산, 자녀의 양육은 기존의 한국사회의 모습과는 다른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자아실현에 대한 가능성이 커짐으로서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이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부인 할 수는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경제성장에 대한 반대급부로 야기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빈곤층에게 자녀 양육에 대한 경제력을 상실케 하여 양육을 회피하도록 한 측면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은 부모의 이기심으로 자신의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뒤쳐지는 것을 눈뜨고 못 보겠다는 심정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의 사회참여로 자녀의 양육을 돌볼 시간이 없다는 것과 경제력의 부족으로 자녀의 교육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모두 이러한 이기심의 발로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출산율의 저하는 국가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을 보여주었다. 젊은이들의 감소로 국방력의 악화가 우려되며 기업체에서도 젊은이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절실한 시점에서 젊은이들의 인구 감소는 그리 반길만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또한 기존의 젊은이들은 노인부양에 대한 부담이 더욱 가중될 것이고 젊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구인난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다.따라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서 출산율 저하 현상으로 야기될 많은 사회문제들을 미리 예방코자 한다. 먼저 출산율이 늘어나고 있는 프랑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정부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인프라 구축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여성의 사회활동과 자녀 양육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을 펴기를 바라고 있다.본인은 이러한 출산율 저하 현상을 단순히 사회문제를 접근하는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좀 더 인문적인 접근을 하고자 한다. 인간의 삶과 출생 결혼과 출산, 양육은 보통사람의 보편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한 후에도 자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각자 다른 삶의 조건 속에 부모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보편적인 입장에서 수순을 뒤집어 보았을 때 우리의 부모님들도 역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을 거라 여겨진다. 몇십년 전이든 몇백년 전이든 출산과 양육은 그에 따른 의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보편적인 사고방식에는 지금과 변함이 없다. 즉, 우리의 조상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비슷한 전철을 밟아 왔을 거라 여겨보는 것이다. 봉건적인 제도 아래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출산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는 것이다.사람과 사람간의 인간관계는 역시 상대방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 그 의미가 깊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단순히 양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가는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즉,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부모님의 속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삶의 깨달음이라는 커다한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이러한 깨달음은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과 됨됨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혼과 출산은 효(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따라서 사회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과연 이러한 삶의 과정을 밟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라고 본다. 결혼과 출산과 양육을 통해 체득된 경험과 지혜는 사회 발전과 자신의 삶의 발전에 보이지 않게 여러모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의 사회생활 경험을 비추어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온 사람과 아닌 사람, 결혼을 한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전자와 후자간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업무 능력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끼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말투와 행동, 직장상사와의 대화, 의사소통에서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다른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늘 하던 대로에 젖어있는 현대 사회인들에게는 특히나 그러할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요즘 한편의 드라마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전편에서 기존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본 드라마를 쓴 인정옥 작가의 두 번째 드라마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는 ‘입양’을 소재로 하여 기존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고 하니 기존 드라마의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구성과 내용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안길 것으로 보인다.이렇듯 사회를 향한 시선은 끊임없이 재해석 되고 재구조 되고 재조명을 받는다. 속칭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필자는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막연하게나마 대통령이 가장 훌륭하게 보였을 시기였지만 차차 학교에 진학하고 사회생활도 해 본 결과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접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사회의 인식을 조금씩 깨달아 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은 또 다르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장벽에 닿으면 개선을 촉구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에 입문하게 될 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가치관이란 늘 새로 만들어졌다가 깨졌다가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먼저 필자는 ‘삐딱한 시선’을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이러한 사회 인식들 때문에 사람들은 정확한 속뜻도 모른 채 좌절하고 포기하는 경우를 수 없이 보게 된다. 정작 본인이 답답하여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더라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물 안 개구리 식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즉,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으면 잘못 정립된 가치관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우리가 얼마만큼 인식을 하고 있느냐 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러하면 가치관의 재정립은 불가능할 것이고 좀 더 낳은 삶에 대한 욕구 또한 무시될 수 있다. 그러기에 ‘삐딱한 시선’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 절충이라는 새로운 의무를 부여 받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의견이 수많이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관계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의견 절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자 개개인의 개성적인 가치관 확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환경과 조건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분명 가치관에 변화를 불러 오게 된다.사실 ‘삐딱한 시선’은 권장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고업계는 늘 새로운 발상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오곤 한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놀라움을 느끼게 되고 광고주의 입장에선 뚜렷한 효과를 보게 된다. 얼마 전 새로 서비스를 개시한 한 포털 사이트의 경우 경쟁업체의 포털 사이트에 자신들의 광고를 실어 다소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재까지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삐딱한 시선은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몇 년 전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의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 책은 그 동안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돈과 경제에 대한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단순히 직장을 구하고 봉급을 받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에는 훨씬 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제시하였고 현금흐름을 주지하여 현재의 경제적 관리 상태를 측정하고 향후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과 행복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세 번째 의미로서 ‘삐딱한 시선’은 개인의 발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다.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은 물론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그 시작은 다른 관점에서 관찰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아무런 비판적인 시각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는 좋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삐딱한 시선’이란 엉뚱하게 생각한다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다 각도의 분석과 그 분석을 토대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릴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또 현재의 생활에 비추어 옮고 그름이 언제든지 뒤바뀜을 인식하고 있을 때 비로소 상호간의 신뢰를 기본으로 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명시하고자 한다. 대화는 서로간의 편견에 대한 확인일 뿐이지만 편견의 확인만으로도 상식과 편견의 경계는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과제물 # 2과목 : 철학의 이해학교 : 서울 산업 대학교 학과 : 건설공학과군학번 : 01162417성명 : 채승윤뮤직 비디오는 최근 몇 년 사이 위성방송과 케이블 T.V 시청이 늘어나면서부터 부각된 영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음악을 시각화한 점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데 오직 들을 수만 있었던 음악을 눈으로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꽤나 고무적인 현상이다.사실 뮤직 비디오가 생긴 것이 몇 년 전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가요라는 것이 생기면서 뮤직 비디오도 단순하지만 존재했었다. 그냥 쉽게 말해서 가수가 경치 좋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찍고는 그것을 뮤직 비디오라고 여겼었다. 물론 뮤직 비디오가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들어와 대중가요 시장이 상업화 되어가면서 뮤직 비디오는 꽤나 그 음악 또는 가수의 인기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청각의 영향력 보단 시각의 영향력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노래와 가수이름을 대중에게 각인 시켜야하는 기획사 입장에선 단순히 귀에 의존하는 음악을 만들어 홍보하기 보단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좀 더 영향력이 있는 시각을 이용하자라는 계산이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T.V가 흑백에서 컬러로, 또 몇 대 없던 시절에서 가정에 따라 2대 이상이 되면서부터 라디오 청취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시각을 통한 자극은 청각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기획사 측에서 놓칠 리가 없을 것이다. 뮤직 비디오는 이렇듯 시장의 요구에 발맞춰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조성모가 이렇게 큰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이유를 뮤직 비디오의 성공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요인에 의해 이제 신인가수가 데뷔할 때 뮤직 비디오도 꽤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우리나라에서 뮤직 비디오는 이렇듯 최근 몇 년 전의 이야기지만 미국의 경우 꽤나 예전의 이야기다. 미국도 케이블 T.V의 시청이 늘어나면서 뮤직 비디오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이블 T.V 채널, MTV에서는 케이블 T.V 개국과 더불어 인기있는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마구 틀어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마이클 잭슨이나 너바나가 8,90 년대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MTV라는 방송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뮤직비디오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뮤직 비디오는 순수한 음악에 비음악적인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음악을 해치고 있다. 음악 은 오로지 음악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하는데 뮤직 비디오는 비음악적인 의상이나 외모와 같은 요소를 통해 순수한 음악을 왜곡하고 있다.바로 상업적인 뮤직 비디오에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의 입장도 이와 성격은 다르지만 같은 입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음악적인 요소가 바로 청각이 아닌 시각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악 자체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성모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다음에 조성모를 대할 때는 조성모의 노래를 먼저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뮤직비디오가 어떤지에 더 관심이 가는 현상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뭔가 잘못 되고 있는 것이다. 가수에 관심이 간다면 먼저 그의 노래가 어떤지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처음에 말했듯이 뮤직 비디오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시각적인 효과를 더함으로써 전체적인 감상에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가 감동적인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그 영화의 감상을 더욱 심화시켜 준다.본인은 이러한 뮤직 비디오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진척시킬 수가 없다. 물론 찬성, 혹은 반대 입장에 설 수도 있겠지만 두 주장에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어느쪽에 선다는 것이 사실 매우 힘들다. 따라서 좀 더 근본적인 즉 본인이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겠다.먼저 이 과제를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은 뮤직 비디오 역시 음악의 하위개념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이라는 전제다. 무엇보다도 이 논의가 지향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극복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말이 많기 보단 충분한 논의를 통해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뮤직비디오에 대한 장점을 하나의 예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96년 미국에서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와 MTV 뮤직 어워드(MTV Music Awards)를 휩쓴 Alanis Morissette 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있다. 굳이 그녀를 예로 드는 이유는 그래미 어워드와 MTV 어워드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가장 보수적인 평가 방식으로 유명한 그래미 어워드와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가장 혁신적인 매체의 시상식으로 알려진 MTV 어워드 이 둘을 섭렵한 싱어송라이터 라는점이다. 이러한 점은 뮤직 비디오의 양쪽 주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그녀를 통해 뮤직 비디오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불식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곡과 뮤직 비디오가 너무나 잘 맞아 떨어 졌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뮤직 비디오를 통해 전체적인 감상이 가능해지고, 순수한 음악의 본질도 왜곡되지 않았다.그녀의 곡 중에 Unsent 라는 곡이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편지로 부치지 못한 아쉬움을 곡으로 써낸 음악이다. 이 자리에 그 곡을 소개할 수는 없다. 곡을 글로 아무리 잘 표현해도 백문이불여일견 이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하게마나 가사(Lyrics)를 소개하도록 하겠다.dear matthew I like you a lot I realize you're in a relationship with someone right now...........dear jonathan I like you too much I used to be attracted to boys who would lie to me...........dear terrance ........이런 식으로 총 다섯명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이 곡이다. 그러면 뮤직 비디오는 어떤가? 본인의 생각에 이 곡의 뮤직 비디오는 그 곡에 대한 감상을 더욱 심화시켜 줄 수 있다고 본다. 뮤직 비디오의 내용은 너무도 단순하고 소박하다. alanis가 5명의 친구를 차례대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영상에 재현하였다. 그러다가 노래가 dear ... 로 상대가 바뀌면 뮤직 비디오도 그 영상이 전환된다. 사실 곡 자체가 이러한 뮤직 비디오의 내용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형식이 가장 뮤직 비디오에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본인은 판단한다. 이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정말 절묘하게 곡과 맞아 떨어진다고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즉 본인은 전체적인 감상을 한 것이다.뮤직 비디오에 대해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대안을 들어보면 좀 실망스럽다. 문제점을 지적했으면 (비판했다면) 올바른 대안을 내 놓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안이란 겨우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참고 수준 밖에 되질 못한다. 즉 좀 외모나 의상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하지 말아달라 는 식의 대안밖에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대안 자체는 훌륭하다. 정말 공감이 간다.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이 분명히 지녀야할 정언 명령 같은 것이다. 하지만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뮤직 비디오에 문제가 있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뮤직 자체에 어떤 변화를 꾀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고기가 오염되어 죽었다면 오염된 물에 적응하지 못한 물고기를 탓할 것이 아니라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 즉 상업화된 뮤직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야 하지 않은가? 물론 뮤직 비디오의 성장이 상업화된 가요 덕택에 성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뮤직 비디오의 성장이 기획사의 의도에 의해 성장했기 때문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즉 순수한 목적이 아닌 목적에 의해 성장한 뮤직 비디오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런 뮤직 비디오를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우스운 것일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음악 자체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