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순환과 경제윤리’를 읽고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분업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고 그 범위 역시 매우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어 자신의 분야 외에는 파악하기가 힘들다. 효과적인 분업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사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으로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며 또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분업의 동기가 자아를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대목은 내 삶의 가치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흔히 보수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이런 것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미래를 설계하여 볼 때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바탕으로 선택한 직업만이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균형 잡힌 교환을 형성하기 위해서 독과점 형성을 막고 시장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하며 동등성과 평등성 실현을 중요하게 꼽았다. 또한 이 책에서는 경제불황의 원인을 신뢰부족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불황을 겪고 있어 소비심리의 위축을 비롯하여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한 미래예측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신뢰회복이 경제불황을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도 근본적인 방법일 것이다.소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성과 효율성의 적절한 조화이다. 또는 경제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의 조화로운 관계 형성이다. 평등성을 강조할 경우 공산주의 사회의 몰락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 사회의 하향 평준화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효율성만을 강조할 경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지며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 발전에 저해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적 존재가치를 내세운다.
Intel 80x86 ~ Pentium41970년 말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된 이후에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무어의 법칙에 힘입어서 더욱더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인텔은 새로운 기술인 DIB과 MMX, SEC 카트리지 방식을 채용한 강력한 프로세서를 출시하였다. 여기에서 현재까지의 출시된 CPU를 살펴보고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상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발전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Intel 계열인텔계열 CPU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텔에서 출시되어 일반 PC에 사용되어진 프로세서들이다. 일반적으로 86계열의 프로세서라고 부르며, 펜티엄 이상의 펜티엄II 또는 펜티엄Ⅲ의 경우는 그냥 펜티엄 계열의 프로세서라고 지칭하고 있다.◆ 8086인텔이 1978년도에 발표한 것이 8086이다. 8086의 장점은 기존의 8비트 CPU들이 가지고있던 64KB의 메모리 제한을 없앴다는 점이다. 8086은 기존의 8비트 프로세서인 8080, 8085의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는 없지만 명령어가 상당히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명령어 코드를 수정하게 되면 8086에서 구동이 가능하다. 8086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세그먼트(SEGMENT)의 도입8086은 기존의 메모리의 한계인 64KB를 넘어서 최대 1MB의 메모리 공간을 관리할 수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20비트의 어드레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8086의 레지스터는 16비트까지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메모리상의 한 어드레스에 억세스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그먼트의 위치를 지정한 후에 그 세그먼트 안에서 위치(오프셋:offset)를 지정하는 방식을 쓴다. 이것이 바로 8086의 큰 특징인 세그먼트에 의한 메모리 관리이다.실행 명령의 고속화8086의 내부는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실행 유니트(EU)와 버스 인터페이스 유니트(BIU)의 2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BIU는 메모리 사이에서 명령이나 데이터 교환을 행하는 모듈로서, CPU의 메모리 버스가 비어 있는 동안 명령을 먼저 읽어서 실행 후에 각 명령어를 CPU 내부의 명령이가 짧아졌다.80386은 8086과의 호환성을 유지하는 리얼 모드(real mode)와 80286의 보호 모드(protected mode)를 가진다. MS-DOS 상에서 사용하는 리얼모드는 8088에서 사용되는 모드로 메모리의 사용도 1M로 한정됐으며, 선보이고 있는 거의 모든 PC용 프로그램들이 이 모드에서 동작하도록 작성됐다. 따라서 리얼모드로 설계된 프로그램들을 보호 모드에서 동작시키려면 많은 수정을 가해야만 한다.보호 모드는 메모리를 쓸 때 리얼 모드와 같이 1M의 한계가 없으며,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물리적 메모리를 충돌 없이 공유할 수 있어서 멀티태스킹 구현에 알맞다. 또 가상 메모리 기법을 사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논리적 메모리의 양이 거의 무한대로 늘어난다. OS/2는 바로 이 보호모드를 이용하는 OS로서 도스의 한계인 640K 메모리를 넘으며 멀티태스킹을 하드웨어적으로 구현했다.일부 도스용 프로그램들도 보호 모드 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멀티태스킹의 구현과 메모리 사용한계를 극복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로터스, 오토캐드(도스용), 매쓰매티카 등이며 이들을 도스 확장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보호 모드에서 8086용 명령을 실행하는 '가상 8086 모드' 모드는 보호 모드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8086용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하나의 태스크로서 실행하게 된다. 이 모드에서 동작하는 8086용 프로그램은 8086 CPU상에서와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이 태스크가 규칙에 위반되는 명령을 실행하려고 하면 OS가 가로막고 적절하게 처리한다.386에 추가된 가상 86모드는 80386칩 내부에 여러 개의 8086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88대신 86을 사용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실제로 8086칩이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8086계열에는 8086, 8088, 80286, 80386, 80486등 여섯 종류가 있으며, 높은 것은 낮은 것에 호환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하위 호환성이라고 한다.V86 모드는 386 전용 멀티태스킹 프로그램들이 사che memory)80386에서는 캐쉬 메모리를 내장하고 있지 않고, 캐쉬 메모리 컨트롤러와의 인터페이스를 위한 신호 핀이 나와 있을 뿐이었으나 80486에서는 8K 바이트의 데이터 명령 캐쉬를 가지고 있다.와이어드 로직(wired logic) 사용80386까지는 명령 해석, 실행에 마이크로프로그램을 사용했지만, 80486에서는 이를 와이어드 로직으로 수행한다. 이 때문에 복잡한 명령 실행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실행 사이클 수가 줄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80486sx486SX는 인텔의 정책상 나온 칩으로 초기의 486DX 가격이 고가였기 때문에 초기의 판매량은 미비했다. 따라서 좀더 저렴한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486SX는 486DX에서 코프로세서 기능을 뺀 것이다. 코프로세서의 기능을 삭제했기 때문에 가격 면에서 상당히 저렴했다. 따라서 많은 사용자층을 확보하게 되었으므로 인텔에서는 다시 487SX라는 칩을 사용해서 코프로세서의 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487SX는 완전한 486DX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487SX를 장착하게 되면 486SX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혼자서 486DX의 일을 하게 된다. 80486SX에서 보여준 인텔의 마케팅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에 인텔은 그러한 정책을 계속적으로 밀고 나가게 되었다. 487SX는 부동소수점을 보조해주는 프로세서가 아니고 그자체적으로 완전한 CPU이다. 비록 핀배열이 다른 방식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487SX 프로세서를 소켓에 바로 장착할 수가 없었다. 코프로세서들은 원칙적으로 메인프로세서와 유기적으로 동작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487SX는 CPU의 기능을 정지시킨 후에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80486DX2 50/66/80MHz486DX4 75/100MHzODPODP ODP(Over Drive Processor) 서서히 386 CPU에서 486 CPU 쪽으로 관심이 옮겨지던 92년 5월 26일 인텔은 오버드라이브 프로세서(OverDrive Processor)라는 이름의 새로운 프로세와 데이터 캐시기능을 동시에 처리하는 8KB 온칩 캐시 한 개가 있었다. 펜티엄 프로세서는 캐시를 두 개로 분리하여 코드 캐시와 데이터 캐시의 2개의 캐시를 가지고 있다.310만개의 트랜지스터에 의해 제공되는 회로를 추가 사용하여 온칩 코드캐시와 온칩 데이터캐시를 분리하여 상호 충돌을 줄임으로써 각각의 캐시를 보다 자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상대적으로 이용 효율을 높일 수 있다.각각의 캐쉬는 8KB 크기이며, 캐쉬 전체를 사용하지 않고 미리 지정된 32바이트 세그먼트 단위로 검색하는 Two way set associative 캐시로 구성되어 있다. 32 바이트 라인은 펜티엄 프로세서의 버스폭에 적합하다.데이터캐시는 파이프라인별로 1개씩 모두 2개의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어 하나의 클럭 사이클로 2개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데이터 캐시는 메인 메모리까지 가지 않고 캐시에서 쓰기 작업을 한 후 데이터 캐시에서 데이터가 지워질 때 변경된 내용을 메인 메모리에 기록하는 라이트백(writeback) 캐싱 기술을 사용한다. 이 기술은 버스 이용 횟수를 줄여 시스템 병목현상을 방지한다. 또한 MESI(Modified, Exclusive, Shared, Invalid)프로토콜은 캐시와 메인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가 일관성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해준다.부동소수점유닛(FloatingPointUnit)최근에는 많은 부동 소수점연산 작업이 필요한 그래픽 중심의 32비트 소프트웨어가 많이 출시되고 있다. 부동소수점 유닛은 그래픽, 수치계산, 비디오 애플리케이션 작업을 PC에서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으로 인텔486에서 처음으로 부동소수점 연산에 쓰이는 별도의 코프로세서가 프로세서상에 통합, 설계되었다. 펜티엄의 부동소수점 유닛은 8단계의 파이프라인으로 매 클럭 사이클마다 한 개의 부동소수점 연산을 실행할 수 있다. 처음 4단계는 정수 파이프라인과 동일하고 나머지 4단계에서는 2단계의 부동소수점 실행, 레지스터 파일에 결과 기록, 에러 리프트 과정이 수행된다. 3단계 부동소수점명령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 줄이기 위해 읽어온 데이터나 코드를 임시로 캐시에 저장해 놓는데 만약 다음 번에 같은 데이터를 읽는다면 그 때는 빠른 캐시램에서 직접 읽을 수 있으므로 억세스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이 케시가 두 배가 된다면 Hit Ratio가 늘어나므로 더 빠른 성능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기존의 펜티엄 200MHz보다 펜티엄 MMX 166MHz가 더 나은 성능을 보일 수 있는 이유이다.P6 펜티엄 프로펜티엄 발표후 오류발견에 이어 경쟁업체들의 맹렬한 추격전이 가속화되자 인텔은 펜티엄의 2배 성능을 지닌 P6를 발표했다. 펜티엄 발표 후 2년 뒤인 95년 초이다. 따라서 인텔은 펜티엄의 오류와 파워 PC의 추격에 재빠르게 P6를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인텔을 뒤쫓고 있는 업체들이 주로 채용한 방식은 RISC 방식으로 기존의 CISC 방식의 프로세서를 만들던 인텔도 이 방식을 486부터 프로세서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RISC방식은 축소형 명령어방식으로 처리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프로세서가 실해하는 명령어의 수를 최소로 줄인 것이다. 따라서 인텔 CPU는 기존의 프로세서와의 호환을 위한 CISC방식과 미래형 CPU방식인 RISC방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인텔은 P6의 기능을 혁신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의 기술들을 채용했다.◆ 펜티엄 II인텔의 펜티엄II는 펜티엄프로에서의 많은 문제점으로 일반 컴퓨터 사용자들의 불만을 잠식시킨 제품이다.SECC(Single Edge Contac Catridge)펜티엄 프로세서는 L2 캐쉬를 프로세서와 함께 내장하는 방식으로 캐쉬에 의존적인 프로세서의 가격과 성능을 보이게 된다. 즉, 캐쉬 메모리의 양이 많을 수록 프로세서의 제작에 필요한 트랜지스터의 개수가 증가되고 이것은 프로세서의 생산 효율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 실제로 펜티엄프로 200MHz 512KB 모델이 200불 정도의 가격일 때, 동일 속도의 2MB 모델은 2000불 정도의 가격다.
대중매체의 여성상여성잡지 속의 여성현재 우리사회에는 여러 가지의 대중매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여성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중매체로는 T.V 가 있을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여성잡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사회전반에 대해서 말할 때). 미장원이나, 병원, 은행 같은 장소에 비치되어있는 잡지는 대부분이 여성잡지이다. 또한 서점에서 잡지코너에 있어서도 여성 잡지는 여타 다른 잡지에 비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곧 여성잡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음을 말할 것이고, 이런 잡지들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나오기 때문에 여성잡지로 인한 여성들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잡지는 20대 이후 여성들만 이 보는 것이 아니라, 중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초등학생들까지도 여성잡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잡지에 비취는 여성상은 사회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여성잡지는 어떤 여성상을 나타내고 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여성잡지는 시대가 변하면서 그 내용 또한 많이 바뀌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여성잡지 첫 번째 세대인 같은 잡지의 경우,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와 시대적 변화에 잘 적응하도록 여러 가지고 도움을 주는 계몽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여성잡지의 내용도 시대의 흐름인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다. 요즘시대의 여성잡지는 대체적으로 독자가 알게 모르게 현모양처적인 여성, 외모지향적인 여성,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요하고 있으며, 정치인, 연예인들 등의 뒷 얘기들로 이루어진 선정적 폭로적인 형태도 띄고있고,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일하는 여성 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 져있다. 하지만 좀 더 덧붙이자면 일하는 여성에 관한 내용도 결국 전통적인 틀 내에서의 소극적 의미의 자아실현적인 여성상의 내용들이 일반적이다. 20대나 10대 미혼여성을 위한 잡지의 경우 대부분의 내용이 외모치장하기 나 수많은 성형외과 광고 등으로 치장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30대의 기혼여성을 위한 잡지의 경우도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잡지의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예전의 가부장제도아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여성잡지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여성 잡지사들의 과다경쟁을 하나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주제로 한정된 독자를 끌기 위해서 선정적인 저널리즘을 지향하게 되는 구조이다. 이는 결국 여성잡지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여성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획일적이고 저질적인 문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여성 문화 발전에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1723-1790)는 18세기의 계몽주의자이며 정치경제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거기서 보냈다. 글래스고우 대학의 교수로도 잠시 봉직(1751-1764)한 그의 최초 저서는『도덕 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이고 이어서 가장 유명한『국부론 Wealth of Nations』(1776)이 나왔다. 스미스는 사상의 형성에서 루소처럼 17세기의 홉즈와 로크의 신세를 졌다. 그 위에서 독특하게 정치학을 윤리학과 경제학에 결합하였다. 그것은 뒤에 밀(J.S.Mill)과 마르크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다. 그의 최고 걸작『국부론』은 경제학 저술인 동시에 정치학적 저술이다. 스미스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경제와 정치를 바라보는데 이 때 영혼의 문제는 고려사항이 되지 않고 오직 세속세계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는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사회철학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철학의 뉴튼이라는 평가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아담 스미스의 사상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잠시 돌이켜 보면 스코틀랜드는 1707년 잉글랜드와 연방으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세계이해에서 한 사회의 도덕적 및 정치적 조건은 경제적 조건과 직결되어 있다는 각성으로 이끌었고 이들의 지적인 세계관은 유럽의 계몽주의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와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특히 몽떼스키외는 새로운 사회철학의 베이컨으로까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 가운데 스미스가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은 흄(David Hume)이다 흄은 일련의 논문들 가운데서 경제발전의 바람직함과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의 가치체계와 정치제도의 적절한 변화의 필요성 등을 논하였던 바 흄의 통찰력은 스미스에게 끊임없는 지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새로운 사회철학의 형성에서 흄과 스미스의 관계는 갈릴레오와 뉴튼의 관계와 비슷하다.본래 스미스는 대학에서 도덕과 법률학에 관한 강의를 하였고 그것은 크게 첫째 정의, 둘째 정는 '제 국민의 부의 성질 및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스미스가 부의 원인을 알아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제목 자체부터가 스미스를 계몽주의 전통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이다. 책 내용은 더더욱 확실하게 계몽사상을 답습하고 있는데, 스미스는 '경제분야의 각 배역들'을 지배하고 이끄는 법칙들을 설명하고 이러한 행동의 법칙들이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스미스가 쓴 '경제분야의 배역'이라는 용어는 전문용어처럼 들릴지 모르나 사실은 그냥 보통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루종일 아무런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기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스미스의 연극무대 위로 올라가는 셈이다.국부론의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스미스는 인간의 공통적 욕구, 혹은 '성향'을 정의하는데, 이는 스미스 경제 분석의 바탕이 되고, 나아가서 고전학파 경제학의 기초를 이룬다. 그 첫 번째 성향은 바로 '모든 인간은 보다 잘 살고싶어한다.'하는 꽤 초보적인 명제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무덤에까지 이르는 기간동안 "인간이 아무런 더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원치 않을 만큼 현실에 대해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만족할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라고 스미스는 적고 있다. 두 번째로, 스미스는 인간의 교역 본능을 지적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의 것과 바꾸고 싶어하는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공통된 성향이다."라고 스미스는 말한다.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해서 국부론을 시작해 보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제시하는 신세계는 아주 평범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번잡스런 시장 통에 나가기만 하면 누구나 스미스가 보았던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무엇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계획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가 공급되고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가 발견한 신세계는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는 신분제도에 근거를 둔 낡아빠진 관습이나 중앙 정부의 계획 또는 명령 의 제체계, 즉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학파의 견해 및 정책체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전자에 대한 구체적 비판(1~8장)과 후자에 대한 간략하고 호의적인 비판(9장)을 하고 있다. 제 5 편은 재정학에 대한 내용으로 경비론(1장), 조세론(2장), 공채론(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이제 각 편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스미스는 {국부론} 제 1 편 제 1장 첫머리에서 분업론을 다루면서 사회적 분업이 생산기술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노동생산성의 증진 및 노동의 숙련, 기교의 향상 등이 그러한 분업의 결과로서 지적되고 있다. 분업의 효과를 예증하기 위하여 언급된 핀(pin) 제조업자의 경우는 유명하다. 그런데 분업이 널리 행하여질수록 자신의 노동생산물로 자신의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부분은 점차 축소되므로 자기 생산물의 잉여부분을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자와 교환함으로써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생활필수품을 획득할 수 있다. 이처럼 분업의 초기에는 물물교환을 통하여 경제생활이 유지되었으나 시장이 확대되자 물물교환은 운영상의 혼란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화폐의 등장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렇듯이 여러 사람이 화폐와 재화를 교환하는 경우가 보편화한다면 사람들이 시장을 통한 교환행위에서 자연히 준수해야 하는 법칙이 존재할 것이고 이 때문에 가치론이 필요하게 된다.스미스는 제상품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제원칙을 구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첫째, 가치의 진정한 척도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스미스는 어떤 상품이 지배하는 노동을 그 상품의 교환가치의 척도로서 본다. 둘째, 상품가치의 구성부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스미스는 모든 상품의 가격은 궁극적으로 임금, 이윤, 지대 중 어느 하나 또는 전부로 구성된다고 하여 생산비론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그는 가격을 자연가격(임금, 이윤, 지대의 자연율의 합에 의하여 결정됨)과 시장가격(시장에서 실제로 공급된 상품의 양과 유효수요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정됨)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다임)으로서 작용했는데, 특히 19세기 경제학자들의 저작은 그의 이론에 대한 논박과 수정을 탈피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중상주의 정책하의 각종 통제, 속박 및 독점행위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자연적 질서관에 입각한 경제적 자유주의 이념은 사상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를 포함한 후세대 주류경제학의 사상적 틀로서 역할하고 있다. 셋째, 민간주도형 경제질서에 대한 주장뒤에 존재하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철학은 90년대 초 사회주의 경제권의 완전한 붕괴이후 그 통찰력과 의미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보이지 않는 손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사용한 말로서 개개의 모든 이해(利害)는 궁극적·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상이다.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저서 《도덕감정론》(1759)과 《국부론(國富論)》(1776)에서 각각 한 번씩 사용한 말로서 개개의 모든 이해(利害)는 궁극적·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상이다. 스미스는 이 용어를 1758년 이전에 사용하였으나, 사후(死後)인 1795년에 출판된 《철학논문집》의 편에 주피터의 ‘보이지 않는 손(the invisible hand of Jupiter)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신(神)은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하여 사물의 규칙적 운행을 정 지시키거나 교란시키는 존재로 등장, 후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의 신과는 역전적(逆轉的) 위치에 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무지한 미개인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신의 질서에 관한 17~18세기적 이해에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도덕감정론》에서 이 말은, 역전되어 신은 전능하며 사랑의 존재로서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은 개개인의 이익추구의 에너지를 인류 일반의 이익으로 연결시키는 통할자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자연적 유신론(有神論)은 보이지 않는 손을 기술적(記述的)·연역적(演繹的)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다.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은 보다 경제학적 색채를 띠고 자연적 자유체제의 주장과 결부되어 중상주의적(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수요는 유효수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상품은 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시장에 나오는 상품량이 유효수요보다 적다면, [그 상품을 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지대 임금 이윤의 가치총액을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원하는 양을 공급받을 수는 없다. 약간의 사람들은 그 상품을 포기하기보다는 좀더 높게 지불하려고 할 것이다. 곧 그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될 것이고, 부족의 크기나 경쟁자들의 부와 끝없는 사치가 경쟁의 열기를 선동하는 것에 따라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을 다소 상회할 것이다. 경쟁자들 사이에 부 사치의 정도가 동등하고 상품부족의 크기가 동일하더라도, 그 상품획득이 그들에게 가지는 중요성에 따라 경쟁열기가 일반적으로 달라진다. 따라서 도시의 봉쇄기간이나 기근에서는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놀랄 만큼 상승한다.(중략)시장에 나오는 상품량은 자연히 유효수요에 적응한다. 왜냐하면 그 양이 결코 유효수요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품을 시장에 출하하는데 자기의 토지 노동 자본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그 공급량이 결코 유효수요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여타 사람들 모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어느 때 공급량이 유효수요를 초과한다면, 그 가격 구성부분들 중의 약간은 자기의 자연적인 수준보다 낮은 지불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지대라면 토지소유자는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곧 자기 토지의 일부를 그 사업으로부터 끌어낼 것이고, 만약 그것이 임금 또는 이윤이라면 노동자 또는 고용주는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들의 노동 또는 자본의 일부를 그 사업으로부터 끌어낼 것이다. 이리하여 시장에 나오는 양은 곧 유효수요를 충족시키는데 매우 적합하게 될 것이다. 상품가격의 각종 부분들 모두는 자기의 자연적인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고, 가격전체는 자연가격으로 상승할 것이다.이와 반대로 시장에 나오는 양이 유효수요보다 적을 때가 있다면, 상품가격 구성부분들 중 약
~ 서울역사 ~序論우주상에서 地球가 形成된 이래 대략 36억년 전에 生物體가 形成되어 進化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生物體의 등장 배경을 細心하게 생각해 보면 生物體가 등장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要因은 地球에 산소를 중심으로 한 대기층이 形成되지않았던 環境에서 紫外線·赤外線을 비롯한 太陽光線을 막아준 바다, 즉 물 때문이다. 따라서 물에 의해 形成된 生物體는 물을 기준으로 進化하기 시작한다. 人類도 이 生物體에 한 부분이기 때문에 물을 중심으로 進化하기 시작했다. 다음 世界의 몇 古代文明들을 예로 보고 서울이 왜? 韓半島에 중심이 되며, 왜? 메갈로폴리스로 形成되었는지 그 이유와 그 이유가 造成되기 위한 環境的 要因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림 1-1 고대문명권과 최초인류의 입지위치 >그림 1-1은 BC 3200년경부터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통일할 때까지 약 3,000년간 오리엔트 지방에 번영했던 世界 最古의 文明인 오리엔트 文明과 최초 인류의 입지위치를 나타낸다. 오리엔트’라는 말은 로마인이 太陽이 솟아오르는 東方을‘오리엔스(Oriens)’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집트와 서아시아 일대를 총칭한다. 이 지방의 중심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로서, 두 지방 모두 BC 3000년 전후에 국가가 성립되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고대 오리엔트문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 고대문명들의 입지 선정에 있어 가장 큰 요인 바로 앞서 언급한 물이다. 메소포타미아? 어원 그대로 두 강사이의 땅 이라는 뜻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서 형성되었는데 그 원인은,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의존적인 사상 수렵과 채집경제로부터 맨 먼저 벗어나서 농경·목축이라는 생산경제로 전환한 데 있다. 그 외의 문명을 보면 이집트 문명은 훔볼트(역사학의 아버지)의 말처럼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바로 이집트는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에 의하여 형성된 delta(삼각주도 몰락하여 갔다. 그런 가운데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혜공왕 때에 다시 그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되었다. 아울러 혜공왕 때에 와서는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고, 그런 와중에서 왕이 피살되면서 마침내 전제 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대 약 150여 년 간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어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김경신과 김주원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는데, 이 때 승리한 김경신이 왕위에 올라 원성왕이 된 반면, 김주원은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연고지인 강릉으로 퇴거하여 지방 호족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손자인 범문도 나을 일으키다가 제거되었다. 이후에도 지방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잇단 천재 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거나, 각처에서 초적이 되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저항하였다. 이 때 최치원 등 6두품 지식인들은 신라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수립을 시도하였지만, 중앙 진골 귀족들에 의해 탄압당하거나 배척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 중심의 과거 제도와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중앙 진골 귀족들은 아직도 골품 제도에 집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의 불교나 화랑도에서 항상 강조해 오던 국가 정신을 잊어 버리고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가중한 수취가 농촌 사회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으므로,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후 신라 하대 사회는 호족들에 의하여 움직여 갔다.고 사상적으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적 생활까지도 유교 사상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고려 이래 사회 관습상의 잔재로 이상적인 유교 이론을 수용하는 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민 사회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 등이 그대로 잔존하였다.(8) 중앙의 정치 조직유교적 통치 이념은 정치 구조에 방영되어 동·서 양반의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정치 구조를 법제화한 것이다. 중앙의 기본적 정치 구조는 의정부와 6조 체계로 편성되었다. 의정부는 최고의 관부로서, 재상들의 합의를 통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6조는 직능에 따라 행정을 분담하였다. 이것은 행정의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킨 것이다. 행정 분야와는 다르게 간쟁권을 가진 언관으로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3사가 있었다. 사간원, 사헌부는 양사 또는 대간이라 불렀는데, 간쟁과 감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대간은 서경권을 가지고 있어 관리 임명에 신분, 경력 등을 조사하여 그 승인에 간여하였다. 홍문관은 유교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정책 결정에 자문하였다. 한편,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하여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왕권의 강화와 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밖에, 역사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과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가 있었다. 또, 학식 있는 신하들이 국왕과 만나 자연스럽게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두었다.(9) 지방의 행정 조직전국을 8도로 나누고, 8도에는 관찰사(감사)를 파견하였는데, 관찰사는 부, 목, 군, 현의 행정을 감찰하였다. 수령인 부사, 목사, 군수, 현령(현감)은 왕에 의하여 임명되어, 백성들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였다.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 행정 단위에는 중앙의 6조에 상응하는 6방의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사무는 토착의 향리들이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담당하였다.{< 그림 4 1866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중 리델(Ridel)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에게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는 조선은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청국은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사실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 국가라는점 등을 들어 프랑스 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 해협을 중심으로한 수도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조선 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등 3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로 내침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려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보복을 밝혔다. 강화도가 실수(失守)됨으로서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도피하였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소위를 살해하고 일본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더 강력해진 폭동군민들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흥인군(興寅君) 이최응과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 파괴되고 군민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시켰으나 실패하였다. 점점 사태가 위급하게 번지자 당면의 책임자를 문책한다는 뜻에서 선혜청당상 민겸호, 도봉소당상 심순택(沈舜澤),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壯禦大將)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李載冕)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上護軍)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領兵官) 윤웅렬(尹雄烈)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군민들의 공격으로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국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 때 허욱의 지휘하에 구훈국병(舊訓局兵)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