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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통일과 신라의 재통일
    한국사 Report삼국의멸망과 후삼국담당: 음선혁 교수님약학대학 약학과20084250송 정 재?신라의 삼국통일1.고구려의 멸망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수나라와의 오랜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침을 적극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그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게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는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북의 부여성(지금 농안 부근)에서 남의 비사성(지금 발해만 부근)에 이르는 방어선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영류왕과 온건파들이 태자를 당에 보내고 당 장수에게 지리를 익히고 군사상황을 살피도록 길을 열어 준 것에 불만을 품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이 반정을 일으켰다(642년). 연개소문은 왕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에 강력한 대외정책을 펴서 신라와 당에 강경히 대응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국왕살해를 문책한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하를 건너 요동성 등 몇 개 성을 점령하고 이어 안시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 양만춘과 백성의 용감한 저항과 안시성의 지리적 요건 때문에 60여 일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제국 수·당의 거듭된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한편 신라와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660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지만 연개소문은 강력한 저항으로 나당군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외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평도 높아졌으며, 밖으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에 복속되어 요동방위선이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연개소문이 죽자(666년) 고구려 지배층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평양성던 중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내통하였다. 좌평 사택지적은 좌평에서 물러나 나가성으로 은둔하여 조용한 생활을 즐기려고 하였다. 이들은 좌평의 관등을 가진 백제의 최고 귀족이었다. 의자왕 즉위 이후 지배층으로서 의자왕과 더불어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의자왕 15년 이후 왕의 미움을 받아 유배를 당하거나 지방으로 물러났다. 성충, 흥수 등은 자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국왕과 결탁한 신진세력들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된 것으로 이해된다.의자왕은 초기에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밖으로는 신라에 빼앗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과 당항성을 되찾아 한때 국위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만년에는 좌평 성충 등의 충고를 듣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는데, 이때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러면서 백제 왕조가 결국 패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군대를 맞아 항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왕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웅진으로 피난갔다가 항복하고 말았다. 왕과 태자 등 1만 2천여 명은 소정방에 의해서 당나라로 끌려가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나. 사비성의 입지조건이 방어에 매우 취약하고, 충신의 말을 듣지 않고 향락에 빠졌으며, 적극적인 외적의 침공에 대비한 근본적 대책에 미흡했던 점이 패망의 큰 원인이었다.?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양국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당이 차지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당은 신라까지 도모하려 하였다. 당은 문무왕을 계림도독부에 임명하는 등 부조리한 행사를 하였고, 신라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선 백제 유민의 포섭에 힘썼다. 백제의 관리들에게 골품제에 입각하여 신라의 관등을 부여한 것은 그 하나였다. 당도 백제의 유민의 민심을 받기 위하여 사로잡아 갔던 백제 태자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돌려보냈다. 그 아니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지역에 대한 직접통치를 포기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무창)으로 옮겨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보장왕은 신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말갈족과 연락하여 당에 투쟁을 시도하였으나 일이 탈로가 나 다시 당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당은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룩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바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우리 민족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을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국의 문화가 기본적으로 중국세력과 대항하는 측면에서 민족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성립한 문화였다는 점을 확인하는 역사 경험이다.3.나당전쟁과 삼국통일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663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이라고 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배후에서 부추겨 당군에 대항하게 하고, 백제 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되었다. 이후 신라는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80여 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다. 당의 장군 설인귀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지역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했다. 671년 당군과 말갈군이 압록강 남쪽 깊이 쳐들어와 다음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과 마읍성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다.674년초 당 고종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해버렸다고 하여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675년 9월에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이었던 풍훈을 향도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천성에 쳐들어왔으나 실패했다. 또 그해 9월말 당은 이근행을 총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이 중심이 된 경우보다도 그것이 민족사에 제시하는 의미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사회의 건전성이야말로 백제, 고구려 양국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지닌 후진적인 한계성은 그 삼국통일에도 반영되었다고하겠다.?후삼국의 성립1.구려의 성립과 쇠퇴궁예는 신라왕족출신으로 알려져있으며 신라말기 전국 각지에서 호족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성여왕 5년 죽주에서 웅거한 도둑의 괴수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 892년에는 북원의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893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주천?내성 등을 공략하여 항복받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를 점령하였다. 이는 양길의 명에 따른 것일 터이지만 그 때 궁예가 장군을 자칭하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신라하대의 대호족들이 장군을 지칭하였다. 그렇다면 궁예는 양길로부터 얻은 병력을 기반으로 하여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명주출신의 승려 허월의 도움과 반 신라적 성향이 있는 김주원계 대호족의 협조 내지 그들과의 타협 속에서 명주에서 자립을 할 수 있었다. 명주에 들어간 궁예는 3천 5백 여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그들을 14대로 나누고 부장을 두었으며 사족들에 의해 장군을 자칭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부대의 체제를 정비하고 지휘권을 확립하였다. 이에 궁예가 명주에 머무는 동안 즉 894년 10월부터 895년 8월 이전에 자립하였다고 본다.궁예는 당초 혁명의 기치를 내걸면서 고구려 부흥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해서 국호도 고려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 범위가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 및 평양으로까지 급속히 확대되어 가자, 고구려 부흥이라는 기치만 가지고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고구려를 뛰어넘는 더 큰 차원의 웅장한 국가를 창건하여 미래를 열어야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진'과 태봉'의 국호가 나왔다.궁예는 후백제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한편 공격과 회유를 번갈아 구사하면서 신고,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보호해 줄 주변세력들을 스스로 내친 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 궁궐을 화려하고 장대하게 짓게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부역과 과세의 부담으로 인해 주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민심의 이탈도 잇따랐다.민중의 군주였던 궁예가 이처럼 가혹한 부역을 강요하게 되자 백성들은 그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엔 민의 지지인데, 민으로부터 출발한 궁예가 민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것은 그의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만 것이다.2.백제의 성립900년(효공왕4)에 견훤은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그는 건국의 의미를 의자왕의 원한을 씻어내는데 두었다. 물론 이것만이 그가 국가를 세운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주현을 공격하고 가는 곳마다 당시 사회의 실상을 이야기하고 인심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견훤 자신이 신라 하대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주장을 반복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그의 자세가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세력을 형성하는데 수월하였을 것이다. 견훤은 완산주에서 국가체제를 완전히 갖췄다. 그는 도성과 궁궐, 관직을 설치하고 관리에게 직무를 나누어주었는데 그 내용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휘하에 있던 신하들이 이찬, 파진찬, 아찬과 같은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고 추측되어진다. 그리고 태봉의 궁예정권 뿐만 아니라 견훤도 호족연합정권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지방의 유력자인 호족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는데, 호족연합정책의 구체적인 예로써 혼인정책이 있다. 그것은 견훤(실제 확인된 왕비가 18명에 이른다.)뿐만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지방 유력 호족들과 혼인시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견훤은 건국 후 중국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는 한편, 해상활동에 유리한 거점을했다.
    인문/어학| 2009.06.30| 10페이지| 1,000원| 조회(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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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으로 배우는 증권투자
    일반적인 투자론은 성경적 세계관을 무시하고 있고 지나치게 일론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개인의 투자수익 극대화에만 관심을 두고 있고, 투자가 다른 사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반면에 '성경으로 배우는 증권투자'는 성경 중 잠언 1장 7절의 말을 잠시 인용해 보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고 하였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투자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투자원리를 고려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가치관을 고려한 증권 투자론이 바로 '성경으로 배우는 증권투자'이다. 투자가 나의 수익에도 영향을 주지만 사회에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성경으로 배우는 증권투자에서는 투자결정을 내릴 때 자연히 윤리적인 측면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첫째 이유는 투자론의 내용이 까다로워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그것을 실제 투자에 적용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 투자자의 경우 투자 실패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조사에서는 100명중 90명 정도는 투자손실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졌다.둘째, 저자의 투자경험에 비추어볼 때 투자론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투자에 대한 것을 온전히 배울 수 없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투자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실제 투자에 적용했을 때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었고 투자성과도 높일 수 있었다. 예컨대, 저자는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묵상하면서 ‘창조적 투자론’이라는 논문을 ‘통합연구’에 게재하게 되었고 이 원리를 지금도 실제 투자에 적용하고 있다. 또한 속히 부자가 되기 위해 빚을 내어 투자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저자는 로마서 13장 8절을 묵상하였다. 묵상을 통해서 저자는 빌려서 투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빚을 갚고는 다시는 빚내서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성경을 구원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부귀와 재물과 공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자산인 하나님과 지혜를 항상 사랑해야한다. 인적자산은 사람의 가치를 살펴보면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이미지를 따라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존귀한 존재이다. 예수는 더러운 사람 한명을 구하기 위해 돼지 2천마리를 몰살케 하실 정도로 한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우리도 실제투자를 하면서 자기자신의 건강과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상처주거나 희생시켜서는 안될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물적자산에 대해 지극히 작은 것으로 평가한다. 지극히 작은것은 재물을 말하며 재물의 가치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을 정직하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일반적 투자론과는 달리 성경으로 배우는 증권투자에서는 물적자산 뿐만 아니라 인적자산 그리고 진리자산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성경에서는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실무자산의 종류를 살펴보면 창세기 24장 35절에 나오는 소, 양, 은·금, 종들, 낙타와 나귀가 실문자산에 속한다. 그렇다면 금융자산의 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매입한 기록이 나온다 . 창세기 23장 20절의 내용에서 아브라함이 정당한 가격을 주고 자기 소유로 확정했다는 것은 부동산 권리 증서를 작성해서 부동산을 양수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아브라함이 작성한 권리증서가 바로 금융 자산인 셈이다.책의 내용에 따르면 돈이 없으면 투자를 못한다는 사람들은 투자를 협의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0장에서 소개되는 ‘포도원 품꿈의 비유’를 보면 자기 몸을 하루 투자해서 한 데나리온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를 통해서 속에는 주인이 먼 나라에서 돌아올 때까지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인생이 그 전에 끝날 수도 있다. 다섯째, 우리는 이 비유에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 개념을 배울 수 있다.마지막으로, 이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돈이 비록 그 가치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16:10달란트는 일종의 부 또는 재산이다. 투자하기 위한 좋은 자금인 것이다. 한 달란트를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우리나라 평균 노동자 일년 수입이 2천만 원이라고 한다면약 4억 정도 되는 큰돈이다.분산투자의 원리는 우리가 투자할 금액을 한 자산에 모두 투자하는 대신에 여러 자산에 나누어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증권가에서는 분산 투자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분산 투자에 대한 원리는 수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이것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을 바로 포트폴리오 이론이라고 부른다. 총 투자 위험은 분산 가능한 위험과 분산 불가능한 위험으로 나눌 수 있는데 포트폴리오에 포함되는 투자종목 수를 계속 늘리면 이론적으로는 분산 가능한 위험은 완전히 줄일 수 있다. 물론 이자율 위험과 같은 시장위험은 제거할 수 없다. 분산 투자의 원리를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도서 11:1-2. 이 말씀을 보면, 투자란 우리 삶에 필요한 떡을 위험한 물에 던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위험을 수용하게 되면 일정 기간 뒤에는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투자자금을 일곱 군데나 여덟 군데 나누어 투자할 때 땅에 일어나는 재앙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된다.먼저 친구가 빌린 돈으로 찾았으리라”누가복음 19:23 장사하는 것은 일종의 직접 투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사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은행에 맡겨서 간접 투자를 하여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요컨대, 재물은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인식하고 비록 그 금액이 적다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열 므나를 남긴 종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관리하여 투자수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는 칭찬과 보상을 받는 투자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주식은 기업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증서이다. 주주는 사업의 일부분에 대한 소유자이다. 따라서 주주는 사업의 이익을 분배받을 권리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주주의 권리는 채권자보다 우선순위에서 뒤진다.주식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주주 권리의 우선권 여부에 따라 보통주와 우선주가 있다. 보통주는 주주의 권리를 평등하게 가진 주식으로서 이익배당이나 잔여재산의 분배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주식이다. 우선주는 이익배당이나 잔여재산의 분배 등 여러 면에서 우선적 지위가 인정된 주식이다. 우선주는 이익배당이나 잔여재산의 분배 등 여러 면에서 우선적 지위가 인정된 주식이다. 배당우선의 경우 보통주보다 대개 배당률이 더 높은 대신 의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주식은 투자수익률도 높지만 위험도 매우 높다. 경영학과 수업 시간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의 원칙이다. 물론 항상 고수익이 고위험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년간의 실제 투자수익률과 위험을 계산한 결과 주식은 연평균 수익률이 18.6%였지만 위험은 35.7%였다. 이것은 회사채나 국채에 비해 수익률도 높았지만 위험도 훨씬 더 컸다.주식에는 투기적 주식, 성장주식, 우량주, 그리고 공익사업주식으로 나눌 수 있다.먼저 투기 주식은 이제 막 창업한 기업이나 어떤 이유로 약한 기업의 소유권을 말한다. 보통 투자자는 이런 주식은 투자 대상으로 회피하는 것이 상책이다.성장 다른 결실을 맺는다.‘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는 천국 말씀, 즉 복음을 말한다. 그리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씨를 뿌린 장소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의 네 곳인데 길가에 뿌려진 자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자를 의미하며 돌밭에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따랐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의미한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는 천국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히는 자이다. 이 세 종류의 자들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아까운 씨만 버린 셈이지만 마지막으로 좋은땅에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로서 이런 사람은 결실을 맺어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배, 그리고 삼십배가 된다. 이것을 스크리닝에 적용해보면 씨는 투자자에게 종자돈 또는 자본이며 땅은 투자하는 투자처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길가, 돌밭은 비생산적인 기업을 의미하기 때문에 투자자는 좋은 땅과 같은 기업을 찾아내서 높은 투자수익을 올려야 하는데 이것이 포지티브 스크리닝의 원리이며 길가, 돌밭, 길가와 같은 비생산적인 기업을 배제하는 것이 네거티비 스크리닝의 원리이다.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현실속의 성공적인 투자사례의 예로 신세계와 포스코를 들고 있다. 신세계의 경우 액면가가 5,000원이지만 1월 29일 기준으로 599,000원인데 이것은 액면가의 100배를 훨씬 넘는 가격이다. 그리고 포스코 역시 액면가 5,000원에 비해 1월 29일 주가가 502,000원으로 액면가의 100배나 되는 셈이다. 책에서 소개 되지 않은 예로 기업의 핵심가치 중 정도경영(곧은 마음과 진실 되고 바른 행동으로 명예와 품위를 지키며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정도를 추구한다)과 상생경영(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지역사회 , 국가 , 인류 의 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한다.)을 내세우는 삼성전자는 5월 19일 기준 728, 있다.
    경영/경제| 2009.01.27| 10페이지| 2,000원| 조회(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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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운동
    한국사 Report동학농민운동2 0 0 8 4 2 5 0약 학 과송 정 재1. 동학농민운동의 원인과 배경1-1 시대적 상황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해지기 시작한 18세기부터 조선을 이끌어 왔던 봉건질서가 파탄을 맞게 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 당시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집권자들의 탄압이 가중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 중국 등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침투가 계속되어 조선왕조는 크게 동요하였고 민중은 위기의식을 느꼈다.대원군의 집권기간 10년 동안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탐관오리를 없애려는 조정의 의지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이루는 듯 했으나 대원군이 물러나고 등장한 민씨 척족정권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무능으로 일관하여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탐관오리의 횡행으로 민생은 피폐해지고 국가재정은 고갈되었다.그런 가운데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조선 팔도의농민들이 예외 없이 이런 형편에 처해 있었으나 산업의 거의 전부가 농업이었던 호남지방은, 농업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벼슬하는 자들의 경제적 욕심을 가장 풍족하게 채워줄 수 있는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의 농민들보다 더 극심한 수탈을 겪어야 했다.실제로 호남지방은 국가재정의 절대적 기반으로 전세미 전국의 64.5%였고 콩, 목면, 세전을 합해 전국 조세수입의 51.7%를 부담했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이 수탈대상으로 노리는 호남지역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매양 황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그 욕심을 메워 줄 수가 있었다. 대체로 벼슬하는 자들은 백성을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보고 마음대로 묶고 베이고 일생동안 종처럼 치고 북처럼 두드려서 모두 제 마음대로 재물을 갖다 썼다. 그런 까닭에 서울 동요에 이르기를 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1-2 동학농민운동의 원인동학농민운동은 크게 네가지의 원인에 의해서 발발하게 되었다. 1)농민층의 양극화, 2)조세 수취제도의 모순과 문란, 3)정치세력의 부패, 4)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그것이다.1-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계기로 작용하였다.국가재정의 위기를 농민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바로 삼정 문란을 야기시켰고, 그 가운데 세금의 부담은 자꾸만 빈농층에게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민씨정권은 통제력의 이완으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탐관오리를 대량으로 양산하며 관리의 수탈을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부패구조의 최종적인 희생자가 일반농민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1-2-4 열강의 경제적 침탈1876년 조선은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항이후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의 수출품은 주로 농수산물과 귀금속이었다. 수입품은 일본산 면포와 생필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대외 무역구조는 곧바로 조선의 농업, 수공업 기반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조선 수출입의 절대량을 차지하던 일본은, 값싼 식량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쌀을 수입하였다. 다량의 쌀 유출은 쌀이 모자라던 조선에 심각한 쌀 부족 현상을 불러왔고 이는 쌀값 앙등(昻騰)으로 이어졌다. 쌀값의 앙등은 소수 지주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의미했으나 임금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결국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집적해 가는 반대편에서 영세한 자?소작농들은 생활기반인 집과 토지마저 상실하고 몰락해 갔다. 수공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외국산 면포(무명)는 가내수공업 단계에 있던 조선의 면포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그 결과 조선의 면포산업은 몰락단계에 놓였다. 값싼 생필품의 수입 역시 조선의 수공업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상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1887년부터 외국상인들 특히 청?일 상인들이 조선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영세한 조선 상인의 활동 기반을 위협하였다. 결국 아무런 대안과 준비 없는 문호개방 속에서 농촌의 양극 분화는 심화되었고 영세한 수유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동학을 종교사상의 자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 변혁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이를 통해 비로소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어지러운 사회상황에 동학이라는 민족적 종교가 이념의 바탕이 되어 1894년 우리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2.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1차봉기 :고부농민봉기(1894년 1~3월) ⇒ 3월봉기(3~5월:전주점령) ⇒ 집강소시기(5~9월)◆ 2차봉기(9~12월) :청일정쟁에서 일본승리 ⇒ 일본침략 가속화 ⇒ 남북접 합세 ⇒ 우금치패배2-1 고부농민봉기(조병갑의 폭정, 1894년 1~3월)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고 백성들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하였다. 조병갑은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쌓게하고, 가을에는 수세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계속되는 조병갑의 횡포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동학의 고부접주로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게 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양군은 계속 조선에 출병했으니 조선을 싸움터로 하는 청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전주성에서의 처음 관군과 교전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몇 차례 관군과 충돌이 있었지만 그렇다 할 무력충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전주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처음 내세웠던 목표처럼 군병을 몰고 서울에 들어가서 외척세력과 귀족들을 모두 없앤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를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뜻밖에 아산지역에 출동한 청군과 서울근교에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이미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리하여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병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우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정부와 농민간의 협조는 전봉준이 20여 간부들을 데리고 10읍을 순행했고, 또한 동학의 포교권을 가지며, 6월에는 관찰사가 전봉준과 민(民)에 대해서 상의하고 개혁정치를 실행할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실행할 집강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폐정개혁안 12개조1 도인(동학인)과 정부 사이에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정에 협력할 것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3 횡포한 부호들은 그 죄목에 따라 엄하게 다스릴 것5 노비문서를 소각할 것6 칠반천인(신분은 양민이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일곱가지 직역의 사람)의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는 평양립을 벗겨버릴 것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가할 것8 무명잡세는 일체 부과하지 말 것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10 왜와 서로 통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릴 것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빚은 모두 없앨 것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할 것집강소는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농민의 계급적 입장을 대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지향한 농민군의 지방 자치기구였다. 집강소 질서 하의 폐정개혁안은 대체로 지켜졌다. 봉건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는 은 전주성 해산 이후 4개월 여만에 재무장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북상에 있어 최시형 휘하의 충청도 동학교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최시형은 동학교인에 대한 관군의 횡포가 계속되고 자신의 휘하에서도 봉기요청이 빗발치듯 이어지자 마침내 손병희 등에게 봉기를 허락하였다. 최시형의 명이 떨어지자 충청도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던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충청도도 사실상 전지역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봉기한 동학농민군 모두가 최시형이 있는 보은으로 모인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지역의 농민군은 해당지역에서 세력을 이룬 가운데 해당 관아를 점령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군과 힘을 합쳐 주변지역을 공격함으로써 북상하는 주력 동학농민군을 측면 지원하였다. 충청도의 봉기사실은 전봉준에게도 알려졌고, 이에 전봉준은 4,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삼례를 출발하여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도 보은을 출발하여 15일경에는 논산에 합류하였다. 거의 같은 때인 14일 김개남은 8,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이렇게 10월 16일까지는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손병희는 북상하고, 김개남은 북상군의 거점지인 전주에 남아 후일에 대비하고, 나머지 동학농민군은 후방을 수비하는 총력전의 형태를 갖추었다. 10월 중순에는 실질적으로 무력 봉기할 수 있는 체제가 완성되어 본격적인 북상이 시작되었다.한편,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출병하고 남하 도중에 일본군대와 합류하였다. 정부군과 일본군은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펼쳤다.또한, 이들 2차봉기와 때를 비슷하게 하여 경상도?강원도?경기도?황해도 등 전지역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인문/어학| 2009.01.27| 11페이지| 1,5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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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우병
    일반생물학(광 우 병)20084250약 학 과송 정 재1.광우병의 유래약 200년전부터 동물들에게서 발생하는 일련의 비슷한 질환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질환에 걸린 동물들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명 중심을 잡지못하고 자꾸 쓰러지며 결국은 수개월 수년이 못되어 죽어버리고 만다. 사망한 동물의 뇌를 부검해 보았더니 뇌가 위축되어 있었으며 현미경으로 조사해 보면 정상적인 신경세포는 별로 안남아 있고 신경세포가 소실된 부분이 마치 빈 방처럼 비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이를 공포현상이라 하며 공포현상이 많은 뇌는 스폰지처럼 말랑말랑해 지기 때문에 이러한 질환에 해면상 뇌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이러한 질환의 하나인 광우병 즉 소의 해면상 뇌증이 세인의 주목을 끈 이유는 광우병으로 사망한 소의 수사 80년대 후반까지 급격히 증가햇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처럼 광우병이 증가한는 원인을 생각해 보았는데 70년대에 양의 뼈를 갈라서 만든 사료를 소에게 준것이 그 원인 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해면상 뇌증에 걸린 양을 소가 먹어 광우병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 생각하에 영국정부는 80년대 중반부터 양의 뼈 가루를 소 사료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 했으며 이후 광우병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광우병은 더큰 문제의 시작에 불과했다. 90년대부터는 광우병에 걸린 소들을 먹은 인간이 해면상 뇌증에 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병을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인간광우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소에서 발생되는 우해면상 뇌증, 일명 광우병과 사람에서 발생되는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콥병, 일명 인간 광우병은 변형된 프리온 단백질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변형된 프리온 단백질에 의해 유발되는 질환으로는 사람의 경우 쿠루, 크로이츠펠트 야콥병, 저스만 스트라우슬러 쉥커병 등이 있으며 양이나 염소에서 발생되는 스크래피 밍크에서 발생되는 전염성 밍크 뇌증 등이 있다.사람에서 발생되는 대표적인 질환인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독일의 신경과학자인 크로이츠펠트와 야콥에 의해서 1920년대에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전세계적으로 매년 백만명당 1명꼴로 발병한다. 이 질병은 4가지 형태 중 한 가지로 발병되는데 발병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발병하는 모든 크로이츠 펠트 야콥병은 발병하는 모든 크로이츠 펠트 야콥병 중에서 85%를 차지 한다.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여러 가지 경로로 발병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에 걸린 사람을 수술한 수술도구 등의 재사용 또는 환자로부터 유래한 조직이나 장기이식 등으로 발병할 수 있다. 최근 새로 분류된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우해면상 뇌증에 걸린 쇠고기 등을 섭취함으로써 발병되는 새로운 형태로 보고되고 있다.◎프리온 질환의 개념1997년 노벨상을 받은 프루시너와 그의 동료들은 스폰지형 뇌병증을 일으킨 동물과 사람의 뇌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감염된 뇌 조직에서 27~30kDa 크기의 단백질 분해효소(proteinase K)에 저항성을 나태내는 단백질 구조물을 발견했다. 이들 단백 분획은 가장 높은 감염력을 나타내므로 그들은 바이러스가 아닌 이 단백질이 바로 그 감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를 프리온 (prion, proteinaeous infectious only)단백질이라고 명명했다. 이 프리온 단백질은 새로운 단백질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20번째 염색체의 short arm.에서 유래되는 정상단백질과 거의 동일하다. P계단백은 생체내게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으나 특히 뇌 신경세포에 고밀도로 존재한다. 이 단백질의 기능은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다.33kDa의 정상 프리온 단백질은 단백질 분해효소에 의해 완전분해되지만 감염 뇌조직에서 추출된 프리온 단백질은 5kDa로 절단될 뿐 나머지 분획은 그대로 남는다. 정상 33kDa 단백질을 PrPc라 부르고 비정상적인 27kDa 단백질을 PrPsc 라고 부르는데 이들 단백질을 코딩하는 염기서열 ,mRNA 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이 두가지 단백질은 그 삼차원적인 구조가 다를뿐이다. 우리 몸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PrPc 단백질은 외부에서 들어온 비정상적인 PrPsc를 만나면 자신도 구조가 바뀌어 PrPsc형태로 변화게 되고 이과정이 반복하여 뇌에 PrPsc가 많아지면 이것이 뇌신경 세포를 사멸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프루시너가 제창한 이 이론은 프리온설이라 한다. PrPsc단백질이 많아지면 어떤방식으로 주위의 신경세포를 손상 시키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자세히 모르고 있다. 하지만 ‘세포자살기전의 유도’, ‘미토콘드리아 기능저하’, ‘유리산소의 증가’ 등의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아무튼 단백질이 이 질환의 감염경로에 중요하다는 주장이 현재로써는 유력하고 이러한 프리온설로 인해 프루시너는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이 질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전염성이지만 매우 긴 잠복기를 가진다.♠. 염증반응이 없다.♠. 일단 발병하면 수개월 수년내에 모두 사망한다.♠. 다른 장기보다는 뇌를 주로 손상시키며 뇌손상증세를 일으킨다.♠. 종 간의 벽을 넘어서 전염이 가능하다.3.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무엇인가?첫째, 현재 DNA염기서열은 모두 밝혀진 상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DNA, mRNA를 통해서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그 단백질의 예측불가능한 변화에 의해서 인간의 상태가 결정되고 질병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러한 단백질의 변화와 그 변화의 기작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그리 깊지 못하다. 프리온설에 의하면 DNA, mRNA가 똑같아도 단지 마지막 산물인 단백질의 단순한 모양의 변화에 의해서 심각한 질병이 발생될 수 있는일이다. 이는 앞으로의 질병연구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의 발상을 한번 더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둘째 프리온 질환은 퇴행성 뇌질환의 모델이 되어줄 수 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퇴행성 질환들이 늘어나도 있다. 이주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알츠하이머병 일명 치매이다. 그런데 알츠하이머와 프리온질환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두 질환 모두 뇌에만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며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프리온 질환의 연구가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씨병등의 심각한 퇴행성 질환의 기작을 밝히고 치료책을 제시해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과학| 2009.01.27| 5페이지| 1,500원| 조회(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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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문화의 정체성 평가A좋아요
    문화를 파악하는 방법에는 문화유형론과 사회구조론이 있다 둘은 서로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유형론이 환경과의 적응내지 극복과정에서 얻은 결과를 역사적 맥락에 결부시켜 패턴화 하고 있다면 구조론은 사회구조의 기능적 형태 및 양태속에서 파악하려한다. 이를 바캉으로 우리는 러시아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서 살펴보려한다. 문화적 정체성은 자연적 조건속에서 혹은 역사적 과정속에서 문화적 형태로 유형화 된다. 러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크게 자연적인 조건과 역사적 조건으로 나누고 다시 자연적 조건을 지형,기후적 조건으로 역사적 조건을 민족적,정치적 ,종교적 조건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첫째, 지형적 조건에 대해서 살펴보자. 러시아 영토의 거의 절반 가량은 유순하고 경사가 완만한 대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유라시아 평원이라 부른다. 이 유라시아 대평원은 교통의 용이함을 제공했지만 자연적인 장애물이 없이 평탄한 지형은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먼저 혹독한 추위이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는 북극과 인접해 있어 북국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거침없이 대륙을 몰아친다. 또한 유라시아 대평원은 동서로 방비벽이 없어 예로부터 수많은 침략군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아시아로부터 따따르족, 유럽의 폴란드 스웨덴 독일 프랑스등이 끊임없이 침공해왔다. 이러한 잦은 외침으로 러시아 인들은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 있는 편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짓는 산맥인 우랄산맥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리 높지 않은 고도를 가지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막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남부의 코카서스 산맥, 중국 몽고와 접한 쩬샨 산맥과 알타이산맥, 중동과 접한 파미르 산맥은 비교적 효과적인 방어막 역할을 했지만 동서 방향의 강대국 영향하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국방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관행을 낳게 되었으면 20세기 중반까지도 세계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다. 사회주의 영향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최근 다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방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또한 넓은 영토는 러시아인들에게 관대한 사고 방식도 가지게 했다. 서로 비슷한 조건이 조금은 상대적인 국민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둘째, 기후조건이다. 기후는 지형적인 조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릐 기후는 크게 대륙성, 균일성, 건조함을 특징으로 한다. 큰 연교차와 바다의 부재로 인한 건조함이 그 원인이다. 또한 여름에는 전역이 시원하고 겨울에는 전역이 아주 추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토의 많은 지역이 건조하기 때문에 국토의 많은 부분에서 경자깅 쉽지않다. 이처럼 가혹한 기후적 조건으로 러시아인들은 인내와 겸손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토양과 수목의 상태는 심원성과 평화적 정신을 낳게했다. 그리고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선구자적 위치에 서 있었으며 수많은 대 문호와 음악가를 배출한 문화 선진국으로서 발전 할 수 있었다.셋째, 민족적,정치적 측면이다. 러시아는 70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그리고 러시아 토착민들은 수렵에 종사하는 유목민이었고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러시아인들은 상대적으로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을것이다. 그리스 이주민을 통한 문화의 전파는 러시아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9세기에 비잔틴 선교사와 바란진족(바이킹족)의 통치는 러시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슬라브어 자모가 만들어 졌고 그것을 토대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슬라브족은 바란진족의 통치로 인해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러시아에 항해술, 상업, 국가행정조직 등을 전파했다.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통합의 기틀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통합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했다.키예프 공국의 몰락 후 전제주의는 국가통합의 가장 효율적 방법으로 인정되어 채택되었다. 이는 여러 이민족의 침략으로 분열된 키예프공국의 후예들의 규합에 있어서 용이했고 침략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목적, 그리고 영토확장의 목적과 맞물려서 지지를 받았다. 이처럼 전제주의는 국가적 방어차원에서도 타당성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영토가 광활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관리방식의 효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근대화 조건속에서도 전제주의는 발전속도와 효율성 면에서 정당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전제적 개혁이 힘을 받게 되었다. 러시아의 전제주의는 사회구조적 이해관계를 무시한 이기적이고 독선적 유형을 창출했다. 대부분 농민들은 노예화 되었고 궁중 쿠테타가 빈번히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분열이 빈번했는데 이러한 전제정치 속에서도 상부정치구조의 끊임없는 분열 양상이 계속 되었다. 이 같은 분열은 지리적 악조건과 외세의 빈번한 수탈속에서 나온 안보의식의 산물이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형성된 본능적인 행태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다.
    사회과학| 2009.01.27| 3페이지| 1,500원| 조회(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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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