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페라의 정의개관오페라의 기원과 탄생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무대예술. 가극(歌劇)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오페라는 단순히 음악극이라는 뜻은 아니다. 음악을 주로 한 극이라면 오페레타나 뮤지컬도 있지만, 그것들을 오페라라고 하지는 않는다. 즉 오페라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만 한다. 첫째,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음악극의 흐름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유럽에 있었던 종교적인 음악극은 오페라가 아니며 또 이 흐름에 속하지 않는 음악극, 예컨대 창극 같은 것도 오페라가 아니다. 둘째, 대체로 그 작품전체가 작곡되어 있어야 한다. 즉 모든 대사가 노래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페레타나 뮤지컬은 이런 점에서 오페라가 아니다. 그러나 간혹 예외가 있어서 징슈필계열에 속하는 《마적(魔笛)》 《피델리오》 《마탄(魔彈)의 사수(射手)》 등과 민속 오페라 계열의 《팔려간 신부》 등, 그리고 오페라 코미크로서의 《카르멘》 등은 노래 아닌 대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오페라에 포함시키고 있다. 오페라는 원래 라틴어 오푸스(opus:작품)의 복수형이다. 오페라 발생기에는 드라마인 무지카(dramma in musica) 또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dramma per musica)라고 하였다. 이것은 ‘음악에 의한(을 위한) 극’을 의미하는데 나중에 오페라 인 무지카(opera in musica)가 되고 다시 오페라로 약칭되었다. 오페라는 복잡한 종합무대예술로 음악적인 요소는 물론이요, 문학 또는 시적인 요소(대사), 연극적인 요소(극으로서의 구성·연기), 미술적인 요소(무대장치·의상), 무용적인 요소 등이 합쳐진 것인 만큼 매력도 큰 데 비하여, 자칫 작품으로서의 통일성을 잃게 되기 쉽다. 특히 음악적인 요소와 극적인 요소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또는 어느 편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지금까지 항상 오페라의 숙제가 되어 왔다. 오페라는 원래 대사에 음악을 붙인 것이며 음악은 독창과 합창 및 관현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독창은 영국에는 희극적 오페라의 영역에 발라드 오페라가 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러시아에도 국민오페라가 출현하여 내용이나 음악에서 독특한 러시아양식을 만들어냈다.오페라는 르네상스 말기인 1597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 저택에서 탄생하였다. 바르디 백작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극의 부활을 목표로 그리스신화에서 취재한 새로운 음악극 《다프네》를 만들어서 상연하였다. 이것이 오페라의 효시로서, 독창을 주로 하고 악기 반주가 따르는 단성음악적(單聲音樂的)인 작품이었다. 이 악보는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가장 오래 된 오페라는 1600년에 상연된 《에우리디케》로서 대체로 앞서의 작품과 같은 사람들(대본 카치너, 작곡 페리, 리누치니)이 제작을 담당하였다. 이 두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비슷한 작품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피렌체로부터 이탈리아 전역에 보급되어 오늘날 오페라의 기원이 되었다. 다음에 오페라는 베네치아에 보급되어 번창하였으며 베네치아악파(樂派)의 작곡가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극적 성격을 높였다. 이 도시에는 1637년에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개관되고 17세기 말에는 그 수가 약 15개소에 달하였다. 18세기 들어서 오페라는 나폴리에서 성행했으며 스카를라티나 페르골레시 같은 뛰어난 작곡가가 나타났다. 그러나 오페라는 벨 칸토 창법이 발달하여 그 후 점차 명가수의 기교(技巧)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오페라는 17세기 후기부터 유럽 각국으로 옮겨가 프랑스에서는 륄리, 라모 등이 오페라의 프랑스양식을 확립하였다. 영국에서는 퍼셀이 오페라를 작곡하고, 독일에서는 슈츠가 작곡을 시도했으나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글루크는 빈에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1762) 이후의 작품을 가지고 극과 음악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오페라의 대개혁을 이룩하였다. 또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오페라의 테두리 안에서 독일음악의 특색이 풍부한 명작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적(魔笛)》 등을 작곡하였고, 베토벤의 작품네치아 오페라에서는 막간에 익살스러운 내용의 짧은 연극을넣고 인터메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인기를 얻어 그 뒤 나폴리 시대에는 독립된 오페라가 되어 오페라 부파로 불렸다. 제재는 서민적인 일상생활의 유머를 다루고, 음악은 현악합주의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독창, 중창을 중심으로한 '명랑한 내용'으로 되었다. 서창 부분에서는 쳄벌로 등의 건반악기가 반주를 맡는 것이 특징이다.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1733)는 본래 그의 오페라 세리아의 막간극으로 작곡, 상영한 것인데 오히려 이것이 더 유명해져 오페라 부파의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꼽히며, 이후 롯시니가 "세빌리아의 이발사"(1812)에 의해 오페라 부파의 마지막 대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죠바니"는 내용적으로 반드시 가벼운 것은 아니나 양식상으로는 오페라 부파에 속한다.[2] 오페라 세리아 (Opera Seria)그리스신화나 고대의 영웅담을 제재로 한 엄숙하고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오페라 부파(희가극의 하나)에 상대되는 말로 정가극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오페라 세리아에서는 레시타티보와 아리아를 특히중요시하고 중창이나 합창을 그다지 쓰지 않는다, 그리고 18세기 나폴리파 오페라에서 발전하여 고전파에서 쇠퇴하였다. 반주는 현악합주에 의한 간단한 오케스트라가 맡고, 음악은 독창자의 기교를 극도로 중시했기 때문에 극적인 박력이 부족하였다. 헨델은 40곡 이상의 오페라를 남겨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의 최고봉으로 불리고 있다. 또 오페라 세리아에서는 여주인공역을 맡는 남성가수로서 카스트라토(거세 남성가수-영화 '파리넬리'참조)가 16-19세기에 걸쳐 성행하여 인기가 있었다.[3] 오페라 코믹 (Opera Comic)프랑스의 희극적 오페라. '익살스러운 오페라"란 뜻이지만 프랑스에서는 희가극의 총칭인 영어의 코믹 오페라와는 다른 특수한 의미를 지녔다. 즉 반드시 희극적 내용이 아니더라도 대화로 이루어지는 대사가 있는 오페라는 '오페라 코믹' 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비제의 '중적인 음악인 팝뮤직과 팝송으로 엮은 음악극 또는 음악영화를 말한다*라디오와 TV오페라:최근에 와서 라디오는 물론 텔레비젼도 음악 메체에 한 몫을 차지하는데 메노티는 이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은 오페라를 써냈다. 미국 NBC방송의 위촉으로 '도둔과 처녀'를, 텔레비젼에서 '아말과 밤에 온 손님'을 발표했다.오페라의 구성요소대본:오페라에서 대본을 리브레토(libretto)라고 하는데, 바그너처럼 직접 대본까지 집필한 작곡가가 있었던 반면,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전문 작가들에게 의뢰하였다. 모짜르트와 디 폰테, 베르디와 피아베, 푸치니와 쟈코자등이 좋은 예이다. 초기의 대본은 그리스 비극이나 영웅이야기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오페라 부파의 발달로 그 당시의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하였고 낭만시대로 접어들면서는 다양한 소제의 대본들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존 아담스의 '중국의 닉슨'처럼 시사성을 다룬 것, 일정한 구성없이 자음과 모음으로만 노래하는 추상적인 것까지 작곡되었다.아리아:오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목이 아리아 인데 이것은 극적인 느낌을 시적이며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노래이다. 오페라에서 아리아는 플롯이 전개되다가 잠깐 멎어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해주는 독창곡이다.서창(recitative):극의 진행에 사용되는 대화체의 노래이다. 그러나, 노래라기보다는 연극적인 말에 가까운 음높이와 리듬을 가지며,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레시타티브는 세코와 아콤파토네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콘티누오 악기(쳄발로, 첼로 등)가 넣어주는 화음 반주 위주에 부르기 때문에 말의 억양에 더욱 가깝다. 후자는 관현악 반주에 의한 레시타티브로 서정성이나 극적인 성격에 더욱 강하다.서곡:오페라가 시작되기 전에 극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기악곡으로 전주곡이라고도 부른다. 역시 시대적인 특징이 뚜렸하다.간주곡:막과 막 사이에 연주되는 기악곡으로 원래는 막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막간에 극적 흐름을 돕는 기악곡이다. 간주곡 역시 아름다운 서정을 담은 곡들이 많다앙상블:각기 서로 다른 파트너를 찾는 인 생겨난다. 바로 그럼 이유에서 오페라는 처음부터 그 인위적인 측면을 이해하고 접금해야 감상 자체가 의미있게 된다. 이 같은 비현실성을 개선하기 위해 "극의 3단일성"이라는 규칙이 만들어 졌다. 극의 3단일성이란 장소의 단일성, 시간의 단일성, 사건의 단일성이다.ex)피가로의 결혼시간의 단일성: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어나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장소의 단일성: 전체극이 알마비바백작의 궁 안에서 일어남.사건의 단일성: 피가로와 수잔나의 결혼오페라의 용어2. 오페라 용어1) Aria(아리아)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독일에서 성행한 서사적 내용을 지닌 시 및 그 시에 의한 가곡, 성악곡을 가리키는 경우와 그 영향을 받아 발생한 표제 음악적 또는 성격적인 기악곡, 특히 피아노 독주곡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나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 에서의 젠타의 발라드 는 좋은 예가 된다.3) Barcarolle(바카롤) 18, 19세기의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 나타나는 Aria(아리아)보다도 단순한 형식의 독창곡. 프레이즈나 가사의 반복이 없다. 가요적 성격의 기악곡에도 사용된다.11) Coloratura(콜로라투라) 빠른 패시지나 트릴 등에 의해 기교적으로 화려하고 장식된 선율 또는 이를 특기로 하는 가수에서 붙이는 꾸밈말이다.18, 19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다.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에서의 밤의 여왕이나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에서의 비운의 여주인공 루치아가 대표적인 경우이다.12) Contralto(콘트랄토)여성의 성부 중 가장 낮은 음역이다.소프라노나 메조 소프라노보다 약 5도 이상이 낮다. 브람스가 이 음성의 어둡고 풍부한 음색을 사용하여 쓴 알토 랩소디 는 유명하다.13) Countertenor(카운터테너)가장 높은 음역을 소화하는 남성의 성부이다.16, 17세기의 교회음악. 특히 영국에서 사용되었다.이 성부를 위한 작품으로는 퍼셀과 헨델의 작품이 유명하다.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영국의 위대한 카운터테너너)
백남운은 1894년 부안, 고부와 일환을 이루면서 지주제와 미곡 유통이 발달하여 계급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서 백낙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주자학연마와 예학적 생활관을 중시한 노론 계열의 향반가문이었고 그의 부친 백낙규 역시 노론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송병선 문하 출신의 유생이었다.1912년 농업전반에 관해 교육을 하던 수원농림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 수원 농림학교는 1910년대 조선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최고의 官立學部였으며 조선총독부 부설 권업모범장의 관할아래 있었다. 특히 이 학교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농정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되었기에 이곳에서 백남운은 식민지 현실이 농촌 사회의 계급적 대립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백남운이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한 것은 일본 동경상과대학 예과시기의 사상적 학문적 편력과정을 거치고 1922년 본과에 진학하여 자신의 실천적 과제를 구체화시키면서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3.1운동의 좌절 이후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노농운동의 조직화가 모색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맑스주의의 확대와 함께 노농운동, 무산발당 운동이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부르주아 사상과 맑스주의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동향속에서 백남운은 식민지 민족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이미 수원 농림학교 시절 농업문제, 지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경제현실과 모순을 익히 파악하였던 그는 폭넓은 사회과학적 훈련을 통해 일제의 조선 지배구조와 논리를 학문적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그는 역사학과를 비록한 일본 부르주아 사상, 학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자각하였다. 자신의 스승이 확립한 '민족성론'과 '조선정체성론'이 그 전형이었다. 그는 이들 일본 부르주아 사상, 학문을 식민직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간주하였다. 이와같은 학문적 성장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민족적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수 잇는 이동론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에 대한 모색이 주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1925년 연전 상과교수로 부임한 백남우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주도로 결성된 조선사정조사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대중적 학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당시의 과제와 관련하여 유학기의 학문적 성과와 실천적 논점을 총괄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그는 맑스주의 방법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한국 자본주의발달사를 정리하고 민족협동전선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한국사인식, 현실인식의 기본골격은 이때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이화 함께 그의 초기 정치사상, 민족관의 면모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1927년 1월의 자치운동론 비판이었다. 그는 자치의 본질이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일환임을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자치운동의 본질이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일환임을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자치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였다. 자치는 제국주의가 노예적 지배를 당하는 식민지민에게 베푸는 최고통치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치운동은 주관적 의도가 어떠하든간에 반민족적이며, 민족협동전선을 교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자치운동론 비판은 新幹會 결성을 앞두고 나온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 옹호론이었다.그러나, 백남운은 자치운동론 비판을 분기로 사회활동을 절제하면서 '조선경제사'연구와 맑스주의 이론 탐구에 몰입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까지는 백남운의 학문과 사상이 확립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는 맑스주의에 대한 이론수준이 한 단계 발달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론이 정착되어 사회주의 사상사, 운동사의 한 분기점이 되고 있었다. 그는 맑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들을 재검토하면서 맑스주의 이론을 심화시키과, 사회과학 방법론을 포괄적으로 정리하였다.백남운이 맑스주의 학문의 수립과 '조선인식'의 진흥을 본격적으로 창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경제사' 작업이 한 단계 정리되는 1930년대 초였다. 이때에는 미증유의 세계공황기에 접어들면서 제반 정세가 크게 변하여 조선군국주의 파시즘체제의 물적다. 말하자면 그의 맑스주의 '조선인식' 진흥론은 사회주의 운동, 노농운동 진영에 대한 학문적 옹호였다.백남운은 이를 위해 크게 세 작업을 추진하였다. 첫째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맑스주의 과학방법론을 주창하고 그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적유물론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일제하의 모순관계와 식민지 수탈의 논리를 비판하고 '역사법칙의 불퇴성'을 논증함으로써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전망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일제 관학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주아 과학이론과 '조선인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부르주아 학문이 관념론적 순수학문관을 내세우며 자본주의의 영속화를 꾀하는 사상적 논거를 사회진화론적 자유주의사회관으로 정리하고, 이것이 민족성론에 입각한 일제 관학의 '조선인식'기반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관학의 역사관과 실증주의 방법론을 집중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실증주의와 사회구성체론의 방법론적 대립을 이 시기 민족적 대립의 학문적 반영으로 간주하였다. 셋째, 맑스주의 과학 수립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조선인식'의 진흥을 위한 실천방안으로서 학술진영의 조직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1933년 '중앙아카데미' 창립 제안이 그 일환이었다. 학술진영의 조직화는 '조선경제사'의 체계화, 맑스주의 과학 진흥과 더불어 일제하 백남운이 설정한 가장 구체적인 실천목표였다.이러한 가운데 백남운은 개인적으로 '조선'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맑스주의 역사사상과 정치경제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가 '조선경제사'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점은 사적유물론의 적용문제, 일제 관학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주아 역사학 비판, 한국사 발전단계론의 구성 등 크게 세 가지 문제였다. 그는 사적유물론의 본질을 일원론적 역사법칙과 내면적 발전법칙 두 가지로 파악하였다. 특히 그의 역사학 전반을 규정하며 한국사인식의 독자성을 부여한 것은 내적 발전론에 기초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관점이었다. 그는 보편성을 일탈하는 특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특수성은 사회구성 단계의 시대적 특수론구성의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대구분의 재조정이 불가피하였는데, 그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고 해방후 한국사인식을 총괄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를 해결하였다.한편 현실인식은 민족의 정치적 진로와 방침을 결정하는 이론적 논거였다.당시 백남운의 세계자본주의 인식은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론'으로 일반화된 전형적인 세계 맑스주의 진영의 국제정세관에 입각하였다. 그 이론적 기반은 맑스와 레닌의 자본축적론, 공황론, 제국주의론 등이었다. 이에 입각하여 그는 1930년대 대공황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추진한 '경제통제 = 계획경제'와 그 정치형태로서의 '파쇼화' 과정을 자본주의 몰락과정의 '혈로;로 간주하였다. 또한 '블록경제'에 의한 제국주의 상호 간의 정치군사적 모순 증대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의 도래를 전망하였다.그러나 '일반적 위기론'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세 인식에 는 당시 국제적으로 노정된 맑스주의 진졍의 한계가 반영되었다. 즉 맑스주의 진영은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론'과 표리관계에 있는 '사회파시즘론'에 입각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 일반을 파시즘과 동일시하였는데. 이는 백남운의 파시즘 인식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1930년대 전반 백남운이 사회주의 진영의 일반적 성향을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좌경적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맑스주의 학문 차온에 진력한 내면에는 이와 같은 대공황기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백남운은 개괄적이나마 일제 강점하의 조선사회의 성격과 모순구조를 정리하여 민족의 정치적 진로를 전망하였다. 그는 일제하 조선의 경제적 사회구성을 봉건유제를 내포한 이식자본주의사회로 파악하였다. 즉 조선후기, 한말에 걸쳐 진행된 내재적 자본주의의 발전 가능성이 일제에 의해 폭력적으로 저지되면서 조선은 일본자본주의와 완전히 통일된 이식자본주의로 전환하였고, 대공황기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에 따라 통제경제를 동반한 독점적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식자본주의론에 입각하여 그는 일제하해체과정과 근대적 사상체계의 발전과정, 그리고 일제에 의한 내재적 자본주의 발전의 폭력적 왜곡과정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조선인식'이나 정치, 경제적 전망이 여타 사회주의자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 맑스주의 '조선인식'의 분화과정에 잘 반영되어 있듯이, 그것은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는 인식론적 관점이나 민족문제 인식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백남운은 '조선사'의 합벅칙적 발전과 '조선민족' 형성의 역사적 특수성,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전일적 성격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맑ㅅ스주의 과학자들은 많은 경우 교조적인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계급주의적 민족관에 입각하여 '조선사'의 합법칙적 발전과 '조선민족' 형성의 역사적 특수성,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전일적 성격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맑스주의 과학자들은 많은 경우 교조적인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계급주의적 민족관에 입각하여 '조선사'의 합법칙적 발전과 '조선민족' 형성의 역사적 특수성,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전일적 성격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맑스주의 과학자들은 맣은 경우 교조적인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계급주의적 민족관에 입각하여 '조선사'의 타율적 발전과 정체적 본질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조선인식' 관점과 밀접한 관련하에 코민테른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논리에 충실하여 민족 내부의 계급모순을 민족모순과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학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민족의 진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면화되는 것은 해방후 국가건설 운동을 통해서였다.해방 직후 백남운은 일제하 학술운동의 연장에서 조선학술원을 중심으로 당면 국책수립과 교육건설 문제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점령정책이 골격을 드러내고 보수우익과 민군정의 고나계가 밀접해지는 가운데, 더불어 좌우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그의 문화건설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탁통치문제 제기 이후 모든 국가건설의 문.
-유럽 팽창의 주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과제물중 이 책을 선택한 동기는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에 대한 호기심이었다.책을 읽어 가는 동안 작가의 직관력과 통찰력으로 제시된 수많은 사례들이 이루어내는 생태학과 역사학의 조합은 너무나 새로웠고 그 동안 간과했던 새로운 부분과 제국주의 대한 재고찰의 기회로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 책의 논지는 우리가 역사상 알고있는 유럽의 팽창의 요인중 생태적 요인을 가장 크게 부각시켜 현재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등이 어떻게 네오 유럽이란 곳으로 불리게 되었는가를 생태적 관점에서 풀이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유럽과 현재 네오 유럽으로 불리는 성공적인 영속 식민지들의 관계가 정치적, 군사적 요인 보다 생태적, 생물학적 우열관계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달리 생각해보면 유럽의 팽창이 진행되어가는 동안 유럽의 문화권이 다른 지역의 그것과 충돌할 때 생태적 요인이 작용했음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환기시키는 그러한 요인들이 이 책을 통하여 이전에 얼마나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나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책은 001. 감사의 말, 002. 프롤로그 003. 판게아 재론. 신석기 시대 재고 004. 노르웨이인과 십자군 전사 005. 행운의 섬들 006. 바람 007. 범위 내에 있지만 지배하지 못한 곳들 008. 잡초 009. 동물 010. 질병 011. 뉴질랜드 012. 설명 013. 결론 014. 부록 1789년 뉴사우스웨일즈에서 "천연두"는 무엇이었는가? 015. 주 016. 역자 후기017. 찾아보기 로 구성되어있는데첫 장에서는 현재 네오 유럽이라고 불리는 신대륙(물론 유럽인의 입장에서)과 유럽이 비슷한 기후를 가지게된, 즉 이 책에서 유럽인이 정복이 가능했던 이유를 2억년전 판게아까지 거슬려 올라가며 설명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10세기말과 11세기말 유럽의 팽창이 전염병 때문에 좌절되었던 일례를 들어가며 생태적 요인의 중요성을 풀이하기 위한 전제를 깔고 있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유럽인이 어떻게 신대륙의 인종보다 더 강한 질병에 적응되어 갔는지도 나타나있다. 4장에서는 동대서양의 마데이라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에서 유럽인의 생태가 이곳에 얼마나 잘 적응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며 이후 네오 유럽의 건설의 시발점을 나타내고 있다.5장 '바람'에서는 바다의 영웅들로 명명된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의 예에서 그들이 편서풍, 무역풍등의 바람을 어떻게 이용하여 판게의 틈을 건넜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6장 '범위 내에 있지만 지배하지 못한 곳들'에서는 북회귀선 이북의 기후가 비슷한 태평양 아시아 지역, 즉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정주 식민지를 세우지 못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7장에서 9장까지는 작가가 제시하고 자 했던 유럽의 팽창의 생태적 요인들인 잡초, 동물, 질병의 역할을 풍부한 실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마지막 장에서는 앞장의 모든 것이 어우러진 결과를 결국 첫장에서 언급된 기후적 요소에 기인해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현재 네오 유럽의 식량자원의 생산성과 그에 의지하고 있는 체제와 지역을 막론한 세계에 대해 언급하며 자원의 보고로서의 네 오 유럽을 보호하고 운영하여할 당위성에 대해 간략하게 호소하고 있다.생태학적인 입장에서도 역사학적인 입장에서도 이 책은 매우 신선한 충격 준다고 생각되며 부정할 수 없고 책을 읽어가는 동안에도 새로운 관점과 소소한 지식의 습득의 즐거움을누린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작가의 태도에 대해선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첫 번째는 바로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해 작가의 태도이다.어쩌면 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듯 한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해 과연 그것이 그렇게 가볍게 치부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되짚어 봐야한다.책에선 마우리족이나 관체족, 어메리칸 인디안등의 네오 유럽의 토착민들의 비극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방법이 단지 그들 스스로 '서양의 신들이 자신들을 멸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술된 것 처럼 그들이 일방적인 생물학적 우열에 의해 탈락해 갔으며 이는 불가항력이었으며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결국 유럽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책임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단지 생태적 우열관계에서 응당 그들이 탈락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는 결국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정도라는 식의 작가의 수수방관자적 태도에 대해선 분노까지 일어난다.유럽의 이주민들과 토착민들의 너무나 일방적인 관계는 비단 그것을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할수 있을까?책의 7장 '범위 내에 있지만 지배하지 못한 것들'을 살펴보자.아프리카, 열대아시아의 경우엔 물론 이 책의 생태적 관점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는 기후문제에 충분한 근거가 될듯하지만 동북아와 중동의 경우엔 이곳들의 강력한 중앙정부와 제도, 문화적 자부심등의 요인을 그곳의 곡물, 가축, 미생물들 보다 더 큰 요인으로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생물학적 우월 관계의 구체적인 분석보다는 다른 장에서 부수적으로 다룬 머스킷 소총같은 부분에 더 큰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일반적인 주장이 왜 이 부분에선 충분한 근거를 들지 못한 것일까? 결국 제국주의 팽창의 근본 요인인 식민지 토착인에 대한 강력한 무력적 우위를 부수적인 것만으로 취급할 수 는 없을 것이다.또한 이 책의 8, 9장을 보면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유럽이 생태적으로 신대륙을 식민지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식물과 동물군이 그 자체의 생장만이 아닌 유럽인의 결정적 간섭의 의해 도태되고 선택되어져 신대륙에 퍼져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럽의 동, 식물과 신세계의 그것의 경쟁의 우열관계엔 유럽인의 인위적인 손길이 깊이 간섭했다는 것이며 그것이 한층 더욱 현재의 네오 유럽이 건설되게 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유럽인의 인위적인 손길, 간섭이란 측면은 저자에 대한 두 번째 반론에 연관되어 진다.저자가 생태학적 입장에서 이 책을 서술했다고 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결여는 물론
「三·一運動의 性格과 意義」- 三·一運動의 內因과 外因, 主體, 方法論을 통하여-국사학과 9614038 이 태훈{-목 차-1. 머리말2. 三·一 運動대한 硏究 動向3. 三·一 運動의 展開4. 三·一 運動의 外因5. 三·一 運動의 內因6. 三·一 運動의 主體 問題7. 三·一 運動의 方法論8. 맷음말9. 참고문헌머리말3.1運動은 한국인이 日本帝國主義의 植民통치를 반대하고 나라의 獨立을 쟁취하기 위한 거족적인 독립투쟁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처음 서울을 발원지로 하여 일어났으나 순식간에 한국 곳곳으로 파급되어갔으며 세계 곳곳에서도 한국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에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일시적인 시위운동에 그치지 않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항일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각국의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높게 평가하고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은 전개된 지역, 참가군중의 구성, 운동의 持續性 등으로 보아 장엄한 군중운동이었고 그러했던 만큼 국제적인 반응도 자못 컸다.그만큼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전민족적 항일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개항 이래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제반의 운동들이 근대 공화주의와 민족자결의 원칙 아래 전민족적인 항일투쟁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또한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운동사 속에서도 하나의 커다란 좌표로서 위치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제까지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일제강점기와 당시 세계정세 속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그 동안 3.1운동의 외인으로 논의되어 왔던 러시아 10월 혁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문제와 종래 대두된 내인문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과 3.1운동성격을 규정하는데 주요한 요인인 주체층 문제, 또 폭력, 비폭력의 운동의 방법론을 고찰해 봄으로써 3.1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꾀한다.1. 三·一 運動에 대한 硏究動向먼저 지금까지 연구 결과를 몇 단계로 경제의 동향」등의 매우 주요한 논 문이 실렸다.을 편찬 발행되어 3.1운동 연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이 논문집에 의해 3.1운동이 일제하 독립운동의 하나의 분수령으로서, 그 이전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이 3.1운동에 합류하고, 그 이후의 모든 독립운동이 3.1운동에서 원동력을 공급받아 전개되었음이 명료해졌다.한편,이 논문집의 약간의 문제점은 3.1운동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규명되지 않았으며, 3.1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민족사적 의의에 치중되고 세계사적 의의가 경시된 점에 있다.이 밖에 『역사학보』도 1969년의 제 41집을 3.1운동 특집호로 편집하여 4편의 논문{) 안병직, 「3.1운동에 참가한 사회계층과 그 사상」.성대경, 「3.1운동운동 시기의 한국노동자의 활 동에 대하여」. 김용덕,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민우(1910-1918)」 上 등을 수록했으며, 또한 『아세아연구』도 1969년의 제 12권 제1호(통권33호)를 3.1운동 특집호{) 김성직, 「한국학생운동의 사상적 배경 -특히 2.8독립선언문을 중심으로-」. 한기삼, 「사학의 발전 과 3.1운동 - 사학정신과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의 시도」. 김영모, 「3.1운동의 사회계층분석」로 하였다.이 시기에 국외에서도 3.1운동 연구가 진전되어 중국에서는 왕립달의 『조선삼일운동』(1962)이 간행되었으며 몇 편의 논문들이 나왔으며 또한 서양에서 2편의 3.1운동에 관련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게 되었다.제 4단계는 1970년부터 현재까지의 3.1운동 연구이다. 이 단계에서는 위에서의 1969년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하여 3.1운동 연구의 깊이와 폭이 학문적으로 대폭 확대되었다.이 시기의 논문들은 엄밀한 실증적 객관적 학술연구 논문{) 권병탁, 「3.1운동의 경제적 기반」,『산업경제』 제4집, 1970. 김호일,「 일제하 학생단체의 조직과 활동」, 『사학연구』 제22호, 1973. 문인현,「 3.1운동과 개신교지도자 연구」,『사총 제20집』, 1976. 강만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 『아세아는 관심을 갖지 않고, 파리강화회의의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국내에서 적극적인 시위를 통해 표시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독자적인 운동 계획을 세웠으나 일단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한 거사계획에 합류하기로 하였고 그리하여 학생층에 의해 선언서의 배포, 군중동원, 시위주도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919년 3·1운동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의주·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계속해 서 기독교·천도교 관계 지역인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로 확대되었다. 그리 고 3월 15일을 전후해서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로 확대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4월까지 지속되었고, 지역적으로 도시등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부터 차츰 농촌이나 산간벽촌으로 전파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운동에 참가하는 계층과 숫자가 확대되면서 운동의 양상도 평화적인 만세시위에서 폭력적 투쟁 으로 변모하였다.3월 상순에는 경기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도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천도교의 조직력이 강한 지역에서 시위가 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과 연계되어 운동이 전개된 지역은 초기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3월 이후 지속된 전국의 운동은 통일된 지도부에 의해 조직되고 지휘되기보다는 지방마다 고립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교사·학생·하급종교지도자·비밀결사단원 등 이른바 지식사회의 식자층이었다. 이들은 유포된 선언서 등 각종 유인물과 시위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서울의 학생들은 3월 1일 첫 시위에 이은 후속작업으로 3월 5일 서울시위를 계획·주도를 하였다. 지방의 운동조직화에도 청년·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주위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일시적인 시위·봉기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각종 비밀결사·결사대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어 갔다. 경기도 부천의 血誠團, 조치원의 청년단, 朝鮮獨立高興團, 전남 순천의 桃蘭社, 대구의 彗星團 등은 대표적인 비밀결사였다.{) 박걸순, 한국의 독립운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자유와 국가적 독립을 위한 운동인 것이며,그것은 볼세비즘이나 오늘날의 다른 어느 급진주의와도 관련되었다고 무작정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듯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왜곡된 주장이라 하겠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이 운동을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어느 연구자도 부정하지 않는다. 연구자들 간의 시각과 차이점은 미국이 내세운 이 원칙의 본질은 무엇이며, 국내의 민족운동 세력들이 이 원칙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있다. 볼드윈은 민족자결주의를 윌슨의 이상적인 국제질서관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민족운동 세력이 이 이상 의 뒷면에 있는 현실 의 한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친 기대를 한 점을 문제삼는다.{) F.볼드윈,1969「윌슨,민족자결주의,3.1운동」,『3.1운동 50주년기념논집』,동아일보사.이 견해는 미국 외교정책의 외면상의 이상주의와 내면의 제국주의성이 가지는 괴리를 이상과 현실의 차이로 단순화하여 설명하는 일상화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반면 민족자결주의를 이상적인 국제질서관이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에 맞서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키고, 자본주의 열강간의 격화된 식민지 쟁탈전으로 말미암은 체제 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고 제 1차 세계대전과 같은 파국적인 전쟁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윌슨은 이 원칙에 의거하여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해체하여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패전국에 대한 승전국의 과도한 식민지 분할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가운데 미국이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정휴,1989, 「3.1운동과미국」,『3.1민족해방운동연구』,461p이 견해는 33인이 민족자결주의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한국이 독립될 수 있다는 환상속에서 3.1운동을오늘날 우리 청년동포 중에서 미국 대통령의 선언을 존중하여 민족자결주의, 정의, 인도, 자유, 평등에 언급하여 득의만면한 자가 있으나 이보다 더 심한 잘못은 없을 것이다. (중략) 개인간에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대등하게 주장할 수 잇을지 모르나 국가로서, 단체로서 실력의 양성이 없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이다.라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의 취지에 따라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한 까닭은 무엇인가?그것은 나라가 망한 후부터 이미 독립사상을 품고 있던 지도층 인사들이 그 실행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세계대전이 끝나,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민족의 자결권을 국내외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3.1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3. 三·一 運動의 內因앞에서 살펴본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 모두 3.1운동이 일어나는 데에는 근본적인 요인이 아닌 외적 계기로서 작용하였을 뿐이며, 이 운동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에 따른 민족의식의 심화와 일제의 통제하에서도 민족해방운동 역량이 성숙하였던 데 있기 때문이다.3.1 운동의 내적 요인에 대해서는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 및 당시 사회경제상태가 점차 해명되면서, 무단통치->전민족적 분노->전민족적봉기 의 도식과 무단통치->모든 운동조직 해체->종교계, 학생의 운동지도라는 단순 도식을 극복할 수 잇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으며 2.8독립선언과 고종황제의 붕우 또한 결정적인 계기로 인식되고 있다.{) 앞에책, 『3.1운동』p.591910년대의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 시기의 민족해방운동은 반일 의병투쟁이 일제의 전면적인 탄압으로 1915년경에 소멸한 가운데, 종교단체, 학교를 이용한 공개적 교육문화운동, 비밀결사운동, 노동자, 농민의 식민지 경제수탈 반대운동의 세 계열로 진행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윤병석비밀결사운동은 한말계몽운동 좌파
{▷ 과 목 : 대중문화의 이해▷ 제출자: 국민대 국사학과 9614038 이 태훈▷ 지도 교수: 홍 명표 교수님▷ 제출일 : 2002 . 1. 4< 들어가는 글 >2001년 연말 , ‘2001년 최고 화제의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같은 해 12월 19일자 조선 일보의 스포츠면에 실렸다. 이 설문조사는 e-메일 매거진 포털사이트인 인포메일(www.infomail.co.kr)이 12-18일 동안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 인데 전체 참여자 14만46명중 56%인 7만8천850명이 지난 9월 11일 미국 무역센터 빌딩에 비행기 테러를 가한 배후인물 오사마 빈 라덴이 국내 네티즌 사이에 올해의 최고의 화제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이어 히로뽕 투약 파문의 여주인공인 탤런트 황수정이 전체 응답자의 21%인 3만294표를 획득, 2위를 차지했으며 트랜스젠더의 열풍을 몰고 온 연예인 하리수가 12%인 1만8천127표로 3위에 올랐다.{) http://www.chosun.com -2001. 12 . 19 기사2001년 초 도도 빨간통 파우더란 제품의 광고 모델로 처음 대중에게 얼굴을 내민 하리수가불과 1년도 안되는 사이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또한, 이런 유명세를 얻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본문은 스타시스템 에 관련하여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이하 하리수에 대하여는 하 로 언급함{먼저 하 가 대중에게 단기간 어필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그녀가 트렌스젠더(Trans-gender)라는 점, 둘째, 광고매체를 통해 등장하였다는 점. 셋째, 사회적으로 공감되는 뛰어는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라 여겨진다.종합해보면 하 는 성전환자 , 미모 , 광고 라는 소비대중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마케팅에서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1) 성전환자트랜스젠더라는 용어적 정의는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성을 지칭하는 영어로 sex, Gender. sexuality등 다양한 단어들을 떠올릴수 있다. sex'라 할 광고 모델로 쓴 기업들도 하 가 과거 남자였다는 사실을 소비자들이 인식해 주기를 바랐다고 한다. 실제 하 가 남자의 특징인 울대뼈(목에 볼록 나온 뼈)를 내보이는 화장품 TV 광고는 큰 효과를 보았다. 해당 제품이 날개 돋힌 듯 팔리게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하 에겐 울대뼈가 없기 때문에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 광고를 제작했다.{) http://www.hani.co.kr/ 한겨레 2001. 4. 23)외모{물론{하 가 단순히 미모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지금의 하 의 스타로의 길은 불확실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하 의 미모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만약 하 가 단순한 성전환자였다면 과연 지금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겠는가? 좋은 예로, 한때 화두가 되었던 텔런트 홍석천을 들 수 있다. 그는 하 의 출현 6개월전 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방송에서 밝혔다가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가 최근 겨우 방송에 복귀하였다. 이 두 사람의 대비로 인해 하 가 주목받는 이유가 단순히 성전환자라는 성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받았는가 하는 의문이 한때 논란이 되었었다.앞선 하 의 현재 자리 매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타시스템이 무엇이지 또한 그 스타시스템과 미디어의 생리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스타 시스템먼저 스타 시스템 (Star-System)은 영화에서 시작되었다..영화 역사가들은 흔히 헐리우드에서 스타가 최초로 등장했던 시기를 1908년에서 1909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이 영화 특허권리심(Mppc)에 의한 제 1차 독과점 시기로 형성한 예이다.이로 인해 독립 영화 제작사들은 타격을 받게 되고 페이머스 플레이스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페이머스 플레이스사의 프로듀서였던 Czrl Laemmle은 이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는데 바로 스타를 통한 영화 배급망 확보였다. 칼 램몰은 당시 바이오 그래프사에 소속되어 있는 플로렌스 로렌스 (Florence Lawrence)를 스카웃해서 그녀를 스타로 만든다.그는다.Pirre Bourdieu는 그의 책{) Pierre Bourdieu外,1998 동문선에서 텔레비젼은 보여주면서 감추는 선별된 것을 구성하는 작업을 하며 이것은 선정적인것과 구경거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에 의해 텔레비젼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극화 를 요구한다고 밝힌다.{) 위의 책.pp31즉 텔레비젼은 사건을 이미지로 연출하고, 그 중요성, 심각성과 함께 극적 , 비극적 성격을 과장하며 널리즘은 속성은 순수성 같은 장들의 구조와 상동적인 구조에 의해 조직된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서 상업성 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 위의 책. pp123또한 이 저널리즘과 TV로 대표되는 매채에 나타나는 것이 의사사건이다.의사사건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계획적인 것이다. 기차사고나 지진은 의사사건이 아니지만 인터뷰는 의사사건이다. 의사사건은 보도되거나 재생산 되기 위한 즉각적인 목적을 위해 계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사건의 발생은 미디어에 의해 보도되거나 재생산되기에 편리하도록 계획된다. 그 성공을 얼마나 크게 널리 보도되었는가에 따라 측정된다.의사사건이 실제 현실과 맺는 관계는 애매하다. 바로 그런 애매함 때문에 의사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된다. 사사건은 자기 충족적 예언 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의도를 갖고 있다. 스타는 바로 이런 의사사건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강준만, 2000, 개마고원. pp106미디어와 하리수의 상품성지금까지 스타시스템과 대중매체의 생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과적으로 하 는 대중매체의 타겟 청중에 대한 상품성을 가지고 있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없다.그렇다면, 위에 언급된 스타시스템과 대중매체 안에서 스타라는 상품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는 하 에 대해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앞서 언급했듯이 하 는 광고라는 매체를 통하여 대중에게 나타났으며 이미 성전환자, 미모라는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방송매체 이런 상품을 놓칠리 없었고 그들의 포커스를 하 에게 맞추게 된다.4월 화장품 광고 이후 5월까지 대한민국 8개 일간지와 4"고 말했다고 한다.{) http://www.hani.co.kr/ 2001. 6. 23이때까지 하리수의 설정은 일반 젊은이들보다 많은 아픔과 고민 속에 살아왔으며 세상에 대한{{나름대로의 깊은 눈을 가지고 있는 듯, 또한 성적 소수자의 대표로서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이나 혐오감대신 동정과 인정을 호소하는 분위기 였다고 파악된다.< 수술전 하리수의 모습> 또한 하 는 1년 전부터 연예계 데뷔를 준비했음을 밝히고 모델로 데뷔해 영화배우 꿈까지는 이뤘지만, 현재 가수를 목표로 녹음 작업에 한창이다라고 말했다. 카메라는 컬트삼총사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된 하리수를 따라가기도 했는데. 하리수는 노출이 심했던 이 촬영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http://www.chosun.com/ 2001. 6. 12이후 19일 밤엔 KBS 2 ‘서세원쇼’와 SBS ‘두남자쇼’ 등 2개의 프로그램에 겹치기 출연했고, 는 `하리수 스페셜'이라는 부제를 달아 야외무대에서 대화를 나눴으며, 는 프로그램 전체를 하리수씨와의 대화로 채웠다.{{두 프로그램은 하 에게도 프로그램 자체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실제 두 프로그램이 성전환 수술과 외모, 연애 등에 초점을 맞춰 진행됐다. 는 프로그램 초반부터 하씨에게 춤솜씨를 선보이도록 했으며, 도 중간에 `나이트 클럽에서 부킹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자연스레 하 에게 `댄스 시범'을 요청했다. 싸이의 춤이 두 프로그램에서 시차를 두고 반복됐다. 하 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아무개씨를 출연시켜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 것도 똑 같았다. 이런 비슷하고 흥미를 잃은 프로그램에 대해 한 네티즌은 “`인간 하리수'가 아니라 `연예인 하리수'에 초점을 맞춰 아주 밀어주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처럼 방송을 하고 있다”며 “하리수의 예쁜 얼굴이 벌써 질린다”고 꼬집었다. {) http://www.chosun.com/ 2001. 6. 23좌: 서세원쇼우: 두 남자쇼하 쪽은 “음반을 발표하는 7월진들에선 과감한 하 의 노출사진들이 있는데 아마 하 는 이 엣세이집을 통해 성적소수자로서의 얻을 대중의 지지와 성적 매력으로 얻을 남성적, 또한 동경으로서의 여성적 대중의 호응을 획득하려는 목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후 보름 후 하 의 첫 번째 노래 앨범이 나오게 되는데 포토 엣세이집은 역시 이 앨범에 앞선 마케팅 전략으로 보여진다.{발매된 앨범의 콘셉트는 변신, 자유로움, 당당함, 유혹. 타이틀곡 은 떠나간 연인을 그리는 잔잔한 발라드. 그밖에도 댄스와 발라드에 걸쳐 다양한 곡을 담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리수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그대로 실려있고 음악성이 뛰어나거 가창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데 있다.{) http://www.hani.co.kr/ 한겨레 2001. 8. 30그렇기에 하리수의 뮤직 비디오가 현란하다 못해 선정적이기 까지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쥬얼적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하리수는 여느 프로그램에서도 자신의 여성다움의 몸의 매력을 과시하는데 치중해 왔었고 이런 묘한 섹스어필을 각 매스 미디어들은 하 를 여성으로 인정하는 포용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겉포장하여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영상 이미지의 강력한 효과는 주로 그 비인지적 특성과 관련한 듯 하다. 문자적 메시지는 간접적으로 습득 과정을 거치는데 비해서 영상의 경우 물체와 사건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여 직접적으로 인식될 뿐 아니라 인지적(cognitive) 과정 보다는 인간 본성에 신속히어필하는 간접적 과정이라는 것이다.(Arnheimm. 1986) 영상물의 위력은 영상물 자체의 영향력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감정과 욕망에서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피드버그는 사람들은 그림과 조각으로부터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 그들은 그림과 조각을 본다. 그림과 조작을 깨뜨리고 거기에 키스하고 그 앞에서 운다. 이러한 반증은 바로 그것이 너무부끄러운 것이고 야비하고 격렬하고 세련되지 못하기 때문에 간접의 대상이 될 것이고,.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