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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경영] 한국의 해외직접투자(outword중심으로) 평가C아쉬워요
    한국의 해외직접투자(outward를 중심으로..)목차1. 서론2. 해외직접투자의 동기3.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현황4.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성공사례-LG전자의 인도네시아 진출5.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영향6.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개선방안7. 소결1. 서 론세계는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지식정보혁명을 겪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인 국경개념이 사라지고 세계경제가 하나로 통합되는 급속한 세계화가 진행 중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로 인한 경쟁우위 확보가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기업들은 글로벌 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와 북미 및 유럽에 각각 생산거점을 선정하고 이들 지역에 대규모 투자를 실시함으로써 세계경쟁체제에서 기업의 존속과 성장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해외직접투자의 유출과 유입은 세계경제의 상황변동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 유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기의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국가와 경제주체들에게 새로운 전략이 요구되고 있는 지금, 세계경제의 자유화와 함께 국가간 무역의 핵으로 자리매김한 해외직접투자를 우리나라의 해외직접투자 동향과 사례를 통해 분석해 보고 이것이 한국경제에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울러 나름의 전략과 함께 세계화와 이에 따른 국민국가의 역할에 관하여 재조명하고자 한다.2. 해외직접투자의 동기해외직접투자의 동기는 투자국의 경제발전단계에 따라 다르며 동일한 경제발전단계에 있다하더라도 투자업종별, 투자대상국별 및 투자기업별로 매우 다양하다.해외직접투자를 설명하기위해 코스(R. H. Coase :1932), 하이머(S. H. Hymer :1460)를 필두로 더닝(J. H. Dunning :1981), 루그만(A. M. Rugman :1981)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연구가 이루어져왔으며, 각 이론마다 해외직접투자의 동기를 각기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를 아이트만(D. K. Eiteman)은 전략적, 행동적, 경제적, 재무적 동기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규모의 경제, 전문적 경영관리기법, 제품 및 생산요소 시장에 대한 충분한 지식, 전문적 기술, 충분한 자금공급능력 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의 경제는 생산, 마케팅, 재무, 연구개발, 운송, 구매 등 전 분야에 걸쳐 비교우위의 폭을 확대하였으며 해외직접투자는 이업의 다국적화 과정의 매개물로 기업의 대규모화에 따른 필요적 산물이다.4) 재무적 동기해외직접투자는 재무적 동기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데 이는 기업이 재무위험을 국제적으로 분산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투자자는 어떤 투자안에 대한 최저필수 수익률은 다음과 같다.R = r + risk premiumR = 자산j에 대한 최저필수 수익률r = 위험이 없는 증권의 명목이자율(무위험 수익률)risk premium : 위험에 따른 할증률위의 식에서 투자자산의 수익률이 상이하면 투자자산의 위험도가 차이가 있으므로 자산의 분산 다양화는 집중의 경우보다 위험이 적게 된다. 이는 유가증권의 적절한 분산으로 인한 체계적 위험은 그 자산의 총위험보다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외직접자산은 투자에 따른 위험에 대한 ‘premium'의 수준이 국내시장에 다양화가 이루어졌을 경우, 부담하여야 할 체계적 위험에 대한 수익보다 클 경우에 이루어진다.이상 네 가지 차원의 기저를 복합적으로 고려해 봄으로써 일정 시장여건 하의 기업이 해외직접투자를 실시하는 이유와 동기에 관하여 파악할 수 있다.3.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현황1) 해외직접투자의 발전추이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제1단계는 68년부터 81년까지의 해외투자 도입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견제는 낙후되고 외환이 절대 부족했던 상황 하에서 해외투자정책은 장려보다는 사업계획에 대한 사전승인과 투자가의 엄격한 자본금 요건 등 자본유출을 우려한 규제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 단계동안 한국의 해외 총투자는 401건, 1억 7,341만 달러로 아주 미약했으며, 건당 투자규모도 43만 달러에 불과하여 시험적인 소규모투자위주로 실행되었다. 당시.2)50.6(△18.9)건수1,266 (76.6)2,258(78.4)2,289(1.4)2,460(7.5)(단위 : 억불, 증가율)자료 : 재정경제부 (2002. 12)3) 지역별 해외투자 동향지역별로는 유럽, 북미지역은 감소한 반면 아시아지역에 대한 투자는 對중국 투자증가 등으로 1,794건 24.9억불을 기록, 전년(1,541건, 18.7억불)대비 건수?, 금액 면에서 각각 16.4%, 33.2%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지역 투자는 전체 해외투자의 49.2%를 차지하였으며 유럽지역은 ‘01년 LG 전자의 대규모투자(네덜란드 15억불)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큰 폭의 감소세를 띈다.‘99‘00‘01‘02아시아18.3(△32.2)22.0 (20.2)18.7(△15.0)24.9 (33.2)유럽8.1 (△23.6)3.4(△58.0)22.7 (567.6)8.3(△63.4)북미18.3(△41.9)13.4(△26.8)18.7 (39.6)13.8(△26.2)(단위 : 억불, 증가율)자료 : 재정경제부 (2002. 12)4) 기업규모별 해외투자동향기업규모별로는 대기업투자가 37.7% 감소한 반면, 중소기업 및 개인의 투자가 각각 43.8%, 23.8% 증가하였다.‘99‘00‘01‘02대기업41.1(△22.6)28.4(△30.9)47.5(67.3)29.6(△37.7)중소기업7.7 (75.0)28.5 (270.1)12.8(△55.1)18.4 (43.8)개인 및 기타1.2 (100.0)2.4 (100.0)2.1(△12.5)2.6 (23.8)(단위 : 억불, 증가율)자료 : 재정경제부 (2002. 12)5) 국가별 해외투자동향국가별로는 중국(1,357건, 17.2억불), 미국(451건, 13.7억불), 네덜란드(1건, 3.8억불), 홍콩(55건, 2.1억불), 베트남(92건, 1.9억불)순이다. 중국이 우리기업의 최대 투자대상국으로 미국을 앞섰으며 홍콩,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 투자도 활발히 이루어졌다.‘99‘00‘01‘02미국18.1 (47.2)13.0(△28.2)18.2(40로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5년 이후에 발생할 것’이라는 응답도 34.9%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중소제조업이 산업공동화가 발생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상에서 우리나라 해외직접투자의 부정적 측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제조업 중심의 對중국투자 증가는 우리나라의 산업공동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한국기업의 해외직접투자 성공사례(LG전자의 인도네시아진출)1) 투자배경 및 동기LGEDI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근교의 베카시 공단에 위치한 LG전자의 해외생산법인이다. 이 법인의 주요 생산 품목은 브라운관과 모니터로 인도네시아 진출 당시 브라운관 생산업은 국애에서 이미 3D업종으로 취급되어 숙련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임금이 너무 높아 원가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이에, LG전자는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하고자 투자지역을 물색한 끝에 인도네시아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미 동남아 지역에는 TV공장이 많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현지 TV공장에 브라운관을 적기에 공급함으로써 고객밀착 경영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내에서 수직적 계열화를 구축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네시아가 인구 2억 1천만의 거대시장으로 성장잠재력이 클 것으로 기대하여 시장을 선점하는 것도 중요한 투자동기였으며 그 밖에 인도네시아가 GSP관세를 누리고 있고 인접한 말레이시아에 비해 경쟁강도가 약한 지역이라는 점도 중요한 진출동기로 작용하였다.인도네시아는 성장잠재력이 크기는 하지만 일인당 GDP가 1.000달러 미만으로 아직까지 내수시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LGEDI는 대부분의 생산품을 외국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생산량의 8%정도만 국애에서 판매하고 있다. D이에 따라 수출 마케팅은 본사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LGEDI는 국내 판매만 담당하고 있다. 즉, LGEDI는 단순 글로벌 생신기지로서 생산활동만 담당하며 대부분의 마케팅 활동은 본사원 및 가족의 신변 안전에 대한 위협도 무시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물론, LGEDI가공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당장 폭동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진 않지만 최근국가 전반적으로 집단욕구가 폭발하고 있고 특정 단체의 압력이 증대하고 있어 현지인 직원들도 그에 편승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또, 불투명한 정부정책도 경영활동에 대한 큰 애로요인이다. 정부정책 방향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정해진 규정과 절차에 의한 업무 수행이 곤란한 실정이며, 상당수의 관료들이 말로는 좋다고 해놓고서 실제 집행을 계속 미뤄 경영상 어려움이 많다.중간관리자 계층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경영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현지 채용 인력들에게 LG문화를 주입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오랜 기간 힘들여 중간관리자들을 육성해도 이들의 역량 발휘가 저조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끝으로, 열악한 인프라 문제이다. 외국업체들의 기술이전 기피로 소재산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부품조달에 어려움이 있으며 유통구조가 취약하여 판매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기술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기계/설비를 조작하는 인력은 충분하지만 유지/보수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설계인력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어서 경영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4) 성공 요인LGEDI의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본사의 적극적인 지원이었다. 투자분석 시점부터 DD사업본부는 투자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DD사업본부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본사의 경영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이전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짧은 기간에 높은 품질수준을 확보하고 3년 만에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다음으로, 현지법인은 초기부터 가시적인 성과보다 인프라 구축에 중심을 두고 경영활동을 수행한 결과 단기간에 생산 및 관리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구축하였다. 동반업체를 포함한 아웃소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원가절감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이로부터 해외투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사의 적극적인 지원다.
    경영/경제| 2004.01.19| 14페이지| 1,000원| 조회(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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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경영] 국민국가와 다국적기업 -세계화의 시대 국민국가는 어디로? 평가C아쉬워요
    국민국가와 다국적기업-세계화의 시대 국민국가는 어디로? -Ⅰ.서론Ⅱ.궁지에 몰린 국가주권1.세계화와 다국적기업의 전 지구적 활동2.세계화와 국가주권의 약화3.다국적기업과 국가의 관계(왜 국가는 다국적기업을 통제하지 못하는가?)Ⅲ.변화하는 국민국가의 역할과 한국의 대응 방향1.국민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존재하는가?2.한국의 향후 통상, 산업정책을 통해서 본 국민국가의 역할변화Ⅳ.결론Ⅰ.서론현재 우리의 삶은 세계화(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국민국가의 문화, 경제, 그리고 국경이 해체되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범세계적으로 통합된 시장과 여기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다국적기업의 출현으로 국민국가의 독자적인 정책과 전략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부터 국내산업 구조조정 및 개방을 포함한 통상, 산업정책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해외 다국적기업과 IMF등 외부적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민족 국가들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들이 오늘날 세계경제의 주역인지, 자의적이고 역사적으로 우연히 그려진 그들의 국경선들이, 오늘날 경제적 국경선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또한 국가와 세계경제(소위 다국적 기업을 위시한 새로운 단위들)중 보다 인간과 그 활동을 위한 충분한, 그리고 정확한 규모 및 범위를 가진 집합체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더불어 다국적기업의 직접투자 또는 진출기간의 장기화에 따라, 경제적 후생효과의 감소와 이에 따른 현지국 정부와 다국적기업 간 마찰 가능성이 증가하는데 이렇게 정부개입의 필요성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다국적기업 통제에 실패하는 이유를 알아보고 국민국가가 세계화라는 외부적 압력을 맞아 과연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가 쇠퇴 내지 소멸한다는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Ⅱ.궁지에 몰린 국가주권1. 세계화와 다국적기업의 전지구적 활동다국적 기같은 기업들이 자신들의 자회사를 현지 사정에 조용히 융합하고자 한다하여도 그것을 꼭 그들의 국제 정체성의 상실이라고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다국적기업은 우수한 기술 및 경영능력과 같은 기업 특수자산(독점우위)을 보유함으로써 타국의 현지기업과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국민 국가의 목표와 수단, 그리고 사적 다국적 기업의 목표와 수단 사이(국민국가가 대변하는 것과 다국적 기업이 대변하는 것 간)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2.세계화와 국민국가 주권의 약화세계화의 등장이 국민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시장이 국민국가의 정치, 사회적 규제의 망을 이탈하여 범세계적으로 통합됨에 따라 국민국가는 더 이상 자신의 국내 경제정책을 효과적이며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힘이 국민국가를 대신하여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국가의 전통적인 권위와 지위는 현저하게 저하 내지는 소멸하게 한다. 특히 다국적기업들의 급증으로 이들에 의한 한정된 세계자원의 지배가 초래됨에 따라 이러한 자원을 필요로 하는 국민국가들은 다국적 기업들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가) Kenichi Ohmae의 주장국민국가의 주권약화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하기 앞서 Kenichi Ohmae가 말하는4I(Investment, Industry, Information technology, Individual) 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세계 선진국에서는 자본시장이 투자 가능한 잉여자금으로 넘친다.) 예를 들어 일본은 국가 자체는 파산 직전이라도 갖가지 연금기금이나 생명보험에는 엄청난 자금이 축적되어있다. 문제는 이런 돈이 모여 있는 곳과 동일한 지리적 위치에서 투자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을 국경선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본시장은 다양한 매커니즘을 개발해 왔고 그 매개자 역할을 다국적기업이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첫째, 투자(investment)는 더 이상 지리적 제약을 당하지 않는다. 과거 정부-정부 사이의 고 말할 수 있다.다시 말해, 국가는 집단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으로부터 물러났는데, 옛 소비에트 연방지도자들이 사회주의자 경영 아래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던 세계의 1/6이 사적 소유권으로 전이 중이며, 인도, 브라질, 중국 등 수많은 개발도상국에서도 국유 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생산 및 발전과정을 민간 부문에 맡기는데 정력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둘째, 다국적 기업이 지난 10년간 선진 산업국가에서 더 가난한 개발도상국으로 부를 재분배하는데 국가나 국제 원조기구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다. 투자 및 무역은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였다. 소위 ‘제3세계’는 오로지 해외 원조의 거대한 증가와 무역 정책의 급진적 변화만을 기대했었고, 국가 원조 프로그램이 별 소득을 보이지 않자 부국의 정책과 개발 도상국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적 기획의 변화를 위한 관점도 낙관적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기술변화와 자본의 더 큰 유동성과 운송 및 커뮤니케이션의 진보가 가속화되면서 아메리카, 유럽 그리고 일본의 제조업 기업들은 생산을 개발 도상국으로 이전하고자 하였으며, 그들은 개발 도상국의 근대화를 가속화시켰다.)셋째, 노동-경영 관계라는 중요한 영역에서 다국적기업들이 이익마찰을 해결하거나 처리하는데 있어서의 주요 역할을 정부로부터 빼앗았다. 과거 국가가 노동의 이익과, 경영과 투자가의 이익이 조절되도록 그리고 정부의 전반적 전략과 조절되는 기획을 개시하고 감독했다. 전형적인 연간 협상은 가격(인플레이션율) 임금 및 편의를 위해 설정된 목표에 대해 이뤄졌다. 즉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경영과 노동력과의 관계는 공공정책의 필수적 관점을 고려했다. 그러나 현 국가 경제 경영은 금융 시장 내 혼란에 종속되었고, 정부통제를 넘어서서 경제적 세력에 종속되었다. 노동관계의 정치적 경영이 정부 집무실에서 기업들의 중역회의실로 이전하였고 이를 통해 다국적 기업들이 확실히 국가 정부의 권력 영역에 침해하였다고 결론 내릴 수 추진하고자 한다. 이 같은 틀에서 현지국 정부는 유권자 대중이 다국적기업의 활동에 대해 비효율(유권자가 느끼는 전형적인 비효율은 다국적기업 철수로 인한 실업임)을 느껴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때에 한해 다국적기업활동에 대해 규제나 개입을 하고자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주축을 이루는 유권자들은 다국적기업의 활동에 대해 쉽게 비효용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효율적 정부 개입이 제약을 받는다.2)정부개입의 외부적 제약요인정부개입의 외부적 제약요인으로는 먼저 다국적기업의 반발을 들 수 있다. 더닝이나 케이브스에 의하면 다국적기업의 저항은 투자기간이 오래 되었을수록 거세어진다. 초기 공장건설, 현지시장 적응 등을 위해 치러야 했던 외국비용(cost of foreignness)의 부담에서 벗어나 상당한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의 활동을 통해 다국적기업은 그들의 저항을 뒷받침할 수 있는 동맹세력을 현지국 사회 내부에 구축한다.)둘째로 투자국 정부의 지원을 들 수 있는데 바구와티, 돈부쉬 등이 지적하듯이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자국 기업의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공격적 통상정책을 펼친다. 투자국 정부가 현지국에 대해 월등한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현지국 정부 개입에 상당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셋째로 국제통상규범 또한 다국적기업에 대한 국가개입을 어렵게 만든다. WTO의 규범은 회원국에 구속력을 가지는데, 이에 WTO회원국은 WTO규범에 배치되는 국내 규범을 수정해야 하고 WTO정신과 규범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만약 현지국과 다국적기업간의 마찰이 WTO분쟁해결기구로 갈 경우 WTO분쟁해결기구의 결정사항은 현지국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게 되므로 정부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키게 된다. 다국적기업 활동에 개입하고자 하는 현지국으로선 강력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WTO의 각종규범과 결정에 구속되는 것이다.)****************************************************************특정지역 경기 변동에 국내경기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취약성을 지닌다. 두 번째로 국내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정당하게 해외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대외적 협상력을 제고했어야 했다. 세 번째로 국내 이익집단 보호문제를 들 수 있는데 경쟁력, 수출 중심주의가 대기업 과 중소 기업간의 비대칭성을 가져왔다. 네 번째로 국내 관계 부처간의 적절한 협의가 이 루어지지 못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산 마늘분쟁을 들 수 있다. 마늘분쟁은 1999년 11월 중국산 냉동마늘과 초산조제 마늘의 관세율을 30%에서 31.5%로 대폭 올리는 잠정 관세부과조치를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자 중국이 우리나라에서 수출하는 휴대전화 화학제품의 수입을 금지시키며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결국 정부는 관세를 환원시키고 3 만 2000t의 마늘을 수입해주기로 합의했다.(2000년 8월))다음으로 산업정책 분야를 살펴보자. 한국 기존 산업정책에도 통상정책과 마찬가지로 많 은 문제점이 있었다. 기존의 동아시아 모델의 주된 특징인 강한 국가로서의 산업정책이 다. 과거에는 국가 주도적 발전모델이 적절한 성장의 동인이 될 수 있었지만 IT시대, 지식 산업화 시대 기존의 수직적 산업구조 국가주도모델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즉, 국가에 의한 인위적이며 강압적인 구조 조정책이 더 이상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또한 산업정책의 방향 및 합의가 부족했다. 그 예로 동아시아 모델의 대표국인 한국의 국 가 주도적 지원 육성책을 들 수 있다. 한국은 1960년에 수출 진흥정책을 시작으로 1975년 중화학 공업 육성책, 1980년 외부압력(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규범 (신자유주의) 그리고 1990 년에는 시장중심의 개혁추진 방법으로 금융자유화, 국가 통제를 받던 금융기관을 민영화 하였다. 이는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외부압력주장에 정부가 무조건 적으로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변화된 상황 하에서는 국가의 새로운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정부 혹은 국가의 종언이 아니라 정부의 어느 부분이 작아지다.
    경영/경제| 2004.01.19| 12페이지| 1,000원| 조회(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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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교정치] 근대사회를 향한 민주주의적 통로 평가A+최고예요
    근대사회를 향한 민주주의적 통로200021742임 경 애들어가는 말베링턴 무어는 근대사회로의 3가지 길과 더불어 4번째 길로 영국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인도의 근대화의 길을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은19세기말 20세기초 근대사회의 형성기와 더불어 곧바로 일본제국주의 독점적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차단되고 식민지적 근대의 길을 걷고 해방과 동시에 2가지 체제로 양분된 우리 사회의 근대화의 길은 인도적 코스와 유사사하지만 또 다른 근대적 길을 경험하였다고 생각합니다.그럼 한반도가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어떤 길을 가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선 베링턴 무어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변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되는 영국과, 조선시대-식민지시대 을 거쳐 근대 사회로 변화해온 한국을 살펴보고 비교해 보기로 하자.1) 배링턴 무어의 견해배링턴무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몇몇 중요한 국가에서 농민계급과 상층지주 계급이 근대화의 전개 과정에서 정치체제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그 3가지 통로를 살펴보기로 하자.첫 번째는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 체계로 나아갔던 부르조아 혁명인데 그것은 독자적인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집단의 발전적 결과로서 나타났으며 이러한 혁명은 민주주의적 정치결과를 가져오는데 장애가 되었던 것들을 파괴 시켰다는 것이다. 근대의 산업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된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사회가 보여 주었던 일종의 폭력적인 변동을 역사학자들은 영국의 경우는 청교도 혁명(civil war 라고 도 한다)과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경우는 남북 전쟁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혁명에서의 핵심적인 성격은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있는 사회의 어느 특정 집단이 발전을 했다는 사실이며, 이들 집단은 내생적인 자본주의의 민주주의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공격하게 된다는 점이다.근대화의 두 번째 통로는 위로부터의 자본주의의 길을 통해 파시즘의 형태로 간 반동적 노선(독일,일본) . 이들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의 발전을 위해 요구 되었던 정치적 경제적인 변동은 그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토지소유 귀족들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체제는 귀족 출신의 개혁가들에 의해서 점유되었던 유사 의회에 의해서 그 성격을 보여주었으며 이어서 불안정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보여 주다가 마침내 파시스트 정치 체제로 결과 되고 말았다.세번째의 통로는 농업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의 길(러시아,중국) 근대 세계로의 압력은 마침내 이들 농민 계급을 체제 도전적인 세력으로 대두 시켰으며 그 사회를 공산주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이렇게 베링턴 무어는 왜 농업적인 사회 구조가 근대화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독재로, 또 어떤 경우에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그 농촌 사회의 성격과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고, 특히 농민 계급과 상층지주계급이 근대화의 전개 과정에서 정치 체제 형성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가 중요한문제라고 생각 한 것 같다.2) 영국사회의 근대화제1의 통로에 해당하는 영국의 사례 분석에서 베링턴 무어는 “왜 산업화의 전개과정이 비교적 자유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근대사회로 귀결 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베링턴 무어는 이에 대한 해답을 증세 말기부터 행해졌던 양모교역의 발전이 상업 지향적인 귀족들과 도시의 상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준 영국에서 찾고 있다. 상업적인 근대화의 충격은 영국사회를 맨 윗 층에서부터 최하 말단에 이르기까지 소용돌이 속에 떨어지게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났던 내란은 무어의 견해에 따르면 계급적인 갈등이라고는 말 할 수없다. 재산권의 보호와 자유의 확대를 전제로 하는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전개는 의회의 일종의 지주 위원회와 같은 성격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 폭력적인 과정을 통하여 의회에서 상업 지향적인 토지 소유 계급들은 상업 자본주의나 산업 자본주의의 정치적 전위 세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영국에 있어서 민주주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지주 젠트리와 귀족왕권으로부터의 독립,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상공업 계급의 성장 이에 발맞춘 젠트리와 귀족의 상업적 농업 경영 방식의 채택, 그리고 농민 문제의 소멸을 들 수 있다.3) 한국사회의근대화(1) 조선 및 일제하의 국가와 계급한국은 이씨왕조로 500년간 지속되어온 농경관료왕국이었으며 그 국민들은 계급과 국가 지주와 소작인 토지와 그 생산물 그리고 문화적 우월성과 무지의 관점에서 사고했다.조선은 주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경제에 개입하였지만 그것은 체제 현상유지 수준에 머물렀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은 전통적인 중국의 국가나 주요업무를 단기적 유지와 적응에만 두는 여타의 관료정권과 같았다. 조선에서 양반귀족과 국가는 이용가능한 잉여자원을 얻기위해 서로 경쟁하였지만 국가가 흔히 패배하였다. 이조국가는 표면적으로 중심은 강했으나 주변부와의 연결은 약했다. 정말로 강조해야 할 점은 지주계급이 그 지배를 영속화 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한국민족이 외부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시민계층은 19세기 초기의 봉건적 반동에 부딪쳐 성장은 침체, 둔화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럽 문화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될 수 없었으며, 또한 정권에 참여할 만하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또한 개항 당시의 집권자 중에 혁신세력이 적었다는 점과 혁신정책에 소요되는 재원의 결핍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19세기 초의 봉건적 반동으로 상공업이 위축되고 민간자본의 축척이 충분치 못하였으며, 귀족양반들의 농민지 수탈, 민란의 발생, 외세의 침입 등으로 국가재정은 고갈되어 유럽문화의 상륙할 즈음에도 이것을 자주적을 도입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란. 외침을 진입하기 위한 무기조차도 구입랄 만한 재정상태에 있지 못한 것이 정부의 재정실태였다.한국은 1910년 합방되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을 식민지화 하면서 일본인들은 500년 동안 한국을 다스려왔고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가져왔던 농업관료 왕조의 통치자들을 구슬리고 보상해 주기도 하며 혹은 파괴도 해야했다.식민지 국가는 권위적이고 억압적 통제를 하면서 한국 사회위에 군림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세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철저하게 자원을 동원하고 추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존의 중앙관료기구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과거의 주변부에 대해 연결이 약한 관료기구 대신에 아래부터 위까지 철저한 침투성을 갖는 명령체계를 확립하였다. 19세기 후반 한국은 시장이나 화폐경제를 갖지 못했다. 단지 제한된 상업만이 국가의 감시하에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 한국의 상업은 폐쇄적이었음이 분명했다. 한편으로는 반공집단에의 가입 광산에서의 노동 , 전쟁수행 적으로의 일본에 대한 증오가 있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치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한국 농민들 사이에 정치의식이 생겨났다. 한국내에서 몇몇 집단들은 소작쟁의 파업 때로는 폭력행동을 통하여 직접적인 정면대결을 계속하였다.(2) 일제하의 사회 경제적 변동이씨왕조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기 보다는 옛것의 갱신에 더 가까웠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양반지배층의 구성은 별로 변화지 않았다. 어쨋든 19세기와 마찬가지로 조선초기에도 예속농민을 부리는 양반지주층이 존재했다 18세기 초기에서 1945년 까지 계속되는 토지소유체제가 성립 되었다. 한국에는 일본의 기업적 소농이나 영국의 자작농에 해당하는 하나의 계급적 범주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수의 새로운 지주 신분으로 부상한 사람들이나 소규모의 땅을 갖게된 사람들은 하나의 시민 계급을 구성하지 못했다.일제통치는 한국의 전통적인 지주 계급을 제거 한 것이 아니라 영속화 시켰다.일제하와 그 후 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시장의 출현과 공업 발전이었다.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 혁명의 출발이었다. 영국에서나 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시장경제는 사회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어떤 다른 계급보다도 토지에서 배제되어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농민이었다 .농업 부분에서 시장은 생활 그 자체의 동기를 이윤추구의 동기로 대체 시켜 버렸다. 시장체계가 발전함에 따라 그것이 농촌의 계급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궁핍화되었고 새로운 쌀 수출항 부근에 위치한 소수의 상업적 농가만이 부유한 농민이나 지주의 위치로 이동하였다. 소농과 소작농은 조그만 땅밖에 경작할 수 없는데 비하여 시장은 마음대로 공산품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은 빚더미에 있는 재산마저 모두 잃어버리거나 분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에 저항하는 농민들도 많아져 농촌에서는 갈등이 심했다.
    사회과학| 2003.12.19| 6페이지| 1,000원| 조회(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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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한 관계] 제 1․2 북한핵 위기와 전망 및 해결 방안 평가C아쉬워요
    제 12 북한핵 위기와 전망 및 해결 방안l. 서론북. 미 핵문제의 사건경과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알다시피 김영삼 정부말기에 한반도에선 전쟁 직전까지 갔다.클린턴정부시절 제네바 핵합의 이후 북한에선 제네바합의를 어기고 영변 핵시설을 가동한 것이 사실로 들어나 미국은 정밀폭격을 계획하고 미군과 미국인을 철수시킬려고 했으나 주변국가와 한국의 극렬반대로 무산되었다.(1994년도)물론 미국도 제네바합의에 의한 중유제공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원전건설도 많이 지연되었다.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 체제로 가면서 북한은 극도의 경제. 식량난을 겪게 된다탈북자가 늘어나고 공장가동률은 바닥이고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국가가 기울어가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세계에서 유일할 정도로 완벽한 주민통제를 바탕으로 체제 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핵을 계속 개발하였다.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북한은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는 김정일 체제를 부정하므로 한국과 미국사이에서도 많은 갈등을 겪었다. 미국에선 이라크다음은 북한, 이란, 시리아등 몇 개 나라를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니네들도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말이다.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당사국인 한국은 모두 북한이 한번에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 충격파가 너무 부담되기 때문이다이라크문제가 마무리 되어가면서 미국이 압박해 들어오자 북한은 영변 핵감시 카메라를 제거하고 핵연료를 재처리하겠다고 발표하게 되고 한반도는 긴장에 쌓이게 되고 나중에는 핵을 만들 수 있는 원료를 이미 추출했다는 것까지 시인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002)본 연구는 북한 핵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음에도 불과하고 이시기를 두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그이유는 북한 핵으로 인해 한반도 위기까지 갔던 상황이 유사점으로 보고 두사건을 비교 대조하는데 쉽게 하기위해 임의대로 구분하고 자한다. 1993년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NPT 탈퇴 선언부터를을 통해서 핵문제는 유엔이 아닌 북한과 미국이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함으로 김장분위기를 조성한 후 유연하게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해결가능성을 시사함으로써, 궁지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대미 주도권을 행사하고, IAEA와 한국을 배제하는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3) 북한의 NPT 탈퇴선언의 목적NPT 탈퇴선언의 목적은 일단 1993년 3월 25일로 정해진 특별사찰에 대한 최후 통첩을 회피함으로써 핵개발 확증요소 포착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나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핵능력에 대한 모호성 정책을 가시적으로 시행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의 NPT 탈퇴선언은 북한의 재처리 능력, 플루토늄 보유 유무 등 사실상의 핵무장 옵션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장 옵션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장 옵션을 공식적으로 부인함으로써 핵보유국 지위를 공개하는 이상의 군사적, 정치,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였다.첫째, 러시아나 중국이 군사동맹을 통한 북한 안보를 확실히 보장받기 보다는 동맹의 성격자체를 변화 또는 약화시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핵무장 위협을 가시화 함으로써 이들 특히 중국으로부터 확실한 대북한 방위보장을 유도하였다.둘째, 북한은 핵폭제조 가능성에 근거한 핵무장 위협으로 대외관계에 있어서 외교적으로 특히 미국의 대남한 군사지원(팀스피리트 훈련, 핵우산 체제, 주한미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였다.셋째, 북한은 미국이 북한 핵무장을 염려하여 이를 부추길 가능성이 큰 남한의 핵무장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였다.넷째, 북한은 핵협상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경험과 원조 등을 요구하였으며 궁극적인 관계개선을 의도하였다.3. 제네바 합의 협상과정1) 제네바 기본합의문 합의과정북한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제거하고 ▲팀훈련을 영구중단하며 ▲북한과의 관계개선 용의를 약속하면 NPT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클린턴 정부 안에서 역학관계는 온건파에게다. 또한 국제 컨소시엄 즉,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도 예정대로 ‘95년 3월 9일 공식출범함으로써 대북 경수로 제공사업이 본격 추진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2단계는 북한이 ‘미래의 핵활동’을 동결하고, 국제 컨소시엄 즉 KEDO의 경수로 건설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북한의 흑연로 및 관련시설의 동결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IAEA의 임시 일반사찰이 실시되는 한편, 그 대가로 북한은 대체에너지의 제공(1년 이내 중유 10만t, 이후 매년 50만t)을 받게 된다.3단계에서는 북한이 보관중인 사용 후 핵연료를 제 3국을 이전하고 기존의 핵시설을 완전 해체해야 한다. 물론 북한은 경수로와 관련된 주요 핵심 부품 인도시기에 맞추어 과거 핵활동에 대한 IAEA의 특별사찰을 받도록 되어 있다.다. 제네바 합의의 의의제네바 「기본합의문」의 합의에 대해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 북미간 합의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첫째, 북한 핵활동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핵투명성을 확보하게 한다. 둘째,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완전 복귀하기로 합의 하였다. 셋째, 특별사찰을 포함하여 모든 핵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을 수락하였으며, 넷째 현재와 미래의 핵활동을 전면 동결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기존 핵시설을 해체한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다섯째,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 사업에 있어 우리가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는 한편,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이행과 남북대화의 재개에 합의하였다 이재봉. 1998. “미국의 대동북아시아 정책과 북미 관계의 전망”. 국제정치논집 제 37집 3호. pp. 118-119.이처럼 북미간 제네바 핵 합의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이루어진 것 보다는 일종의 “톱니바퀴”식으로 짜여져 양측이 단계적으로 성실하게 합의사항을 이행해야만 완수될 수 있도록 되었다. 따라서 쌍방 중 어느 한쪽이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전체 합의가 진전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 제재시 야기될 수 있는 한반도의 초긴장상태 및 이에 북한의 진지한 정도를 살피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였고, 켈리 방북의 최대 성과는 기껏해야 앞으로 잭 프리처드 한반도 특사 등의 실무급에서 북한과 대화를 재개키로 합의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하지만 내심 김정일 국방위원장측이 뜻밖의 제의를 해 양국 대화가 가속화할 가능성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켈리 특사 일행은 5일까지 평양에서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등 북한 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갖었고, 켈리 특사는 WMD와 재래식 군비, 인권개선 등 우려사항을 모두 밝히는 가운데 우선 WMD 위협을 해소하고 재래식 군비 등은 대화를 통해 점차 해결하자는 방안을 전하였고 반면 북측은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과 합의했던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 등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북미는 이러한 현안에 서로에 대한 인식차만 확인하고 구체적 합의는 도출하지 못하였다.< 표 4 북-미 대화 의제에 대한 양측 입장 비교>의제북한 입장미국 입장핵문제。핵사찰에 앞선 전력보장。핵사찰 시기는 경수로 핵심부품인도전 3개월이면 충분。제네바 합의 이행。빠른시일내 핵사찰 수용미사일。미사일 개발은 자위권 문제。개발 포기등에 따른 보상。발사유예재확인。생산 개발 배치 수출중단。북한측에 경제적 대가 제공불가재래식 군비。주한미군 철수。군사작 신뢰구축 조치。대규모 병력 축소 및 후방배치생화학 무기。생화학무기는 가지고있지않다。생화학 무기 단게적 폐지북한 주민 인권。주권문제로 논의대상 아니다。주민 인권 개선관계 개선조치。적대정책포기 및 북한 체제 보장。인도적 지원 가능6. 북한의 핵 개발 시인에 관한 내용1) 북한 핵 개발 계획 시인 발표미국의 뉴욕 타임지에 의하면 현재 진행되는 핵 위기는 다음처럼 발발 하였다. 2002년 10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특사가 북한 대표들에게 북한이 핵을 다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역정을 부리며 이를 부인 했다. 그때 켈리는 북한이 부정하기 어려운 미국이 취득한 정보를 들어 내밀었다. 북한은 다음날 아침기 위협제거 대신 핵 선제공격 대상화, 제4조 선 경수로 비핵 부품(터빈, 발전기등) 완전 납입 후 사찰 실시 왜곡 등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선전포고로 북미공동성명과 기본합의문을 완전히 무효화하고 핵무기전파방지조약과 북남 비핵화 공동선언을 백지화한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조항합의 내용위반 내용제 1조경수로 발전소 2003년 완공기초 구덩이 판데 불과제 2조정치. 경제관계 정상화전대정책, 경제제제 지속,‘악의 축’으로 공격제 3종핵무기 불사용 담보핵 선제공격 대상화제 4조비핵 부품(터빈, 발전소등) 납입후 핵사찰즉각 사찰 일방 주장이와 같은 점들을 정리해 볼 때, 제네바 협의 위반은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보유하고 있다고 시인함으로서 북한이 어긴 것 같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이 제네바 협의를 시행하지 않고, 강도 높은 미국의 북한비난, 경제압박 등 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3) 북한 핵 계발 시인 후 진행과정2002년 10월 북한에 의한 핵개발 인정 이후 북한 핵을 둘러싼 이슈의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http://www.kinds.or.kr/뉴스검색.-2002년 10. 17: 한,미 북 핵개발 계획 시인 발표12. 12: 북한 핵 동결 해체 선언12. 12: 북한 미사일 운반선 예멘 근해에서 나포12. 22: 핵시설에 대한 봉인과 감시카메라 제거작업 개시 발포12. 27: IAEA 감시단원 추방 결정-2003년 1. 10: 북한 NPT 탈퇴 선언3. 20: 미국 이라크 공격 시작4. 9: 미국군 바그다드 함락4. 12: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 포기 시 형식 구애 없이 미국과 대화4. 18: 북 외무성 대변인 8천여 개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진행 발표4. 22: 북한 마약 수출선 호주에서 나포4. 30: 북 외무성 대변인 “우리는 필요한 물리적 억제력을 갖추기로 결심,행동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5. 15: 한미 정상회담 북핵문제 평화적으로 문이다.
    사회과학| 2003.12.19| 32페이지| 3,000원| 조회(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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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슨독트린과 한국의 핵개발 프로그램과 판문점 도까 만행 사건
    닉슨독트린, 한국의 핵개발 프로그램, 판문점 도까 만행 사건200021742 국제관계학과 임 경 애1. 서론닉슨독트린, 핵개발 계획,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 세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 미국과 박정희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이 사건들을 알아보면서 미국의 영향을 얼마나 받으며, 박정희와 미국간의 견해 차이가 얼마나 났었는지 그리고 그 견해 차이가 정책이나 그들의 움직임에 얼마나 많은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1). 닉슨독트린(1) 닉슨독트린 의미격동의 요인은 1969년의 닉슨 독트린입니다. 닉슨 독트린은 달러의 위기속에 서구와 일본의 경제가 강화되고 미국 경제력의 약화, 인도차이나 전쟁과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 그리고 중국, 일본등 아시아 국가의 상대적 힘의 향상,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등 이러한 미국에로의 도전을 해소하려는 의지와 대외정책의 재편성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미국의 대통령인 닉슨이 표방한 것으로 그 목적은 2가지로 요약됩니다.첫번째는, 소극적 의미로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철수”입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논리와 일치할 뿐만아니라 전체의 철수가 아닌 다수의 철수로써 아시아내의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 즉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아쉬워하는 것은 아시아 국가이므로 앞으로의 미국의 입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베트남과 대만, 한국에서도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Richard M. Nixon, “Asia after Vietnam,” Foreign Affairs, Vol. 46 (October 1967), p.121.두번째는, 적극적 의미로 “중국에 대한 접근”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구소련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부터 주적인 소련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중국과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아시아 국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에 다가가기 위한 조건은 충족한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1971년 미국의 탁구단을 중국에 파견함으로써 서서히 무 북한이 최초로 남북 적십자 회담에 참석한 것을 들 수 있는 데, 그것은 회담으로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의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남한도 사전통고 없이 갑자스럽게 미.중관계 정상화를 우려하여 남북 적십자 회담에 참석하였습니다.(2) 한반도 영향미국 닉슨독트린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국제적 데탕트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이런 국제적상황이 변화하고 있을때, 한반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닉슨은 월맹의 강력한 두 후원국인 중국 및 소련과의 관계를 동시에 개선함으로써 강대국들의 게임에서 월맹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남북한은 강대국들의 게임에 심한 불안감을 갖게 돼 처음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서로간 갈등해결 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북한 관점에서 중국이 미국과 급작스럽게 우호적 관계로 돌아선 것은 미 제국주의에 대항한 중-북한공동투쟁에서 일종의 배반이었다. DMZ남쪽에 주둔해 있는 미군들에게 북한이 노출되게 버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 국왕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남한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남한에서는 닉슨독트린 발표이후 미군은 점진적인 철수쪽으로 정책을 바꾼 듯이 보였다. 1971년초 미국은 미군의월남 철수와 동시에 박대통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6만2천명중 2만명 철수시켰다. 이에 남한은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있을까가 남한 정부의 당면 문제였다.그래서 김일성의 86선언 후 남한은 재빨리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안했고 북한은 남한의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8년만인 1971년 8월 20일 남북 적십자 대표단이 판문점에서 처음 만났다.그해 11월 20일 3개월에 걸쳐 9차례의 결실없는 승강이 끝에 한국 정홍진(중앙정보구 협의조정국장)은 북한 보도부장 김덕현(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책임지도원)에게 별도의 단독회담을 제안하는 쪽지를 전달했다. 남한측의 고위급 회담 제의는 즉각 받아 들여졌다.남북 접촉이 시작되면서 비밀리에 소집된 북한 노동당 중결하는 직통전화가 비밀리에 개통됐다.남북 고위급 비밀접촉의 남한측 당사자인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박대통령으로부터 평양방문에 대한 서면 지시를 받은 이후락은 5월 초 비밀리에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 갔다.그러나 이러한 남북회담이 정체되게 되는 데는 2가지 요인이 있는 데,첫번째는 바로 1972년 한국의 10월 유신입니다. 한국 내 민주화 운동의 탄압으로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박대통령의 의지가 북한의 비난과 남북대화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두번째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국의 반정부파 탄압과 북한의 비난이 들끓고 남북 긴장관계가 고조되자 결국 미국내 철수 반대론과 한반도 긴장 재발을 결부시켜 주한미국의 철수 중지가 1973년 결정되게 됩니다.위의 2가지 요인으로 남북회담이 정체를 맞게 되었습니다.2). 한국의 핵개발 프로그램69년 7월 닉슨 독트린 이후 미-소양 진영의 양극체제가 이완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에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론을 역설 하며 무기 국산화를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그 최후 구상은 비밀 핵무기 개발 이었다.70년대 중 반경 한국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으며 미국은 동북아 정세를 고려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것이다.이 글에서는 한국의 핵개발 연구는 어느 수준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를 살펴보고자 한다.(1) 배경70년 6월 무장이나 속도면 에서 월등한 북한 경비정이 한국의 선박을 납북하는 사건 발생하자 이 사건으로 북한 군사력에 위협으로 느꼈고, 그로부터 수주 뒤 박대통령은 자신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닉슨 정부가 한국에서 미 7사단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박대통령은 한국군 단독으로는 무기와 장비의 낙후성 때문에 자주국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몇 달 안으로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박대통령은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 유리한 핵카드를 갖고 싶어했다.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제조용 재처리 공장의 건설이었다. 야심적인 한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미 대사관 앞으로 보내온 전문을 살펴보고자 한다.한국의 경우 전략적 위치를 고려할 때, 그리고 한국이 핵무기 제조능력을 획득하게 되면 이웃나라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과 일본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 및 미국과 관련된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해치는 중대 요소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이나 중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지원해 준다는 약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신뢰가 줄었고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를 낮추려는 박대통령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는 복잡성을 띠고 있다.전문에 담긴 미국의 정책은 한국 정부의 핵개발 노력을 억제하고 핵무기나 핵무기 운반체제의 개발능력을 최대한 저지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럼 미국이 한국의 핵개발을 저지할려는 행동들을 알아보았다.처음에는 핵무기제조에 협력하지 않도록 프랑스 설득하는 간접조치에 무게가 실렸다.미 관리들은 처음에는 한국의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에 대해 모르는 체 하기로 하고 대신 재처리 공장을 수입하겠다는 공개적 계획을 두고 맹공을 가했다.75년 8월 한국을 방문한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박대통령에게 한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은 한-미 양국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또한 그해 가을과 겨울 워싱턴에서는 하비브 주미대사는 프랑스와 계약 취소를 요구 했고, 취소할 경우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작전을 들고 나왔다. 민간 핵 산업이 필요로 할 경우 미국의 후원 아래 재처리공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보장, 그리고 정식과학, 기술협정 아래 대한 우려를 불식하지 않을 경우 미 의회의 협조를 얻어 한국의 야심적인 민간 핵발전소 건설계획의 다음 단계에 대한 미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했다.한국 정부가 핵무기 개발계획을 강행할 경우 양국의 안보관계가 전면 재검토될 것이라는 위협이었다.그로인해 비공개이긴 하지만 그런 강력한 미국의 반대에 나서서 협상을 중단 시켰다.이 사건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정부가 아무리 굳센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3) 진상 < 추측 및 근거 >당시 우리나라가 핵개발을 할 능력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당시 우리의 핵개발 능력은 과대 포장되어 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강창성은 핵무기가 95%로 완성되었다고 말했으며 청와대 비서실장선우련 또한 우리의 기술력은 핵무기를 개발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우리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서 알아보면 아니라는 입장이 지배적이다.당시 실무자의 말에따르면 개발 능력이 없었으며 과학적인 연구만 있었지 무기화할 연구수준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그렇다면 당시 박정희는 왜 이렇게 무기 개발에 매달렸던 것일까 ? 그것은 당시 북한의 무기 개발 수준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북한의 기술력에 박정희는 강력한 핵개발을 시도했던 것일 수 있다. 당시 우리가 원자탄을 만들 수 없을지는 몰라도 시도는 했을 가능성은 크다. 핵무기에 필요한 플라토늄 및 고농축 우라늄을 얻을수 있는 NRX 경수로 도입을 시도한 것이나 정부 고위 관리들이 그러한 발언을 한점에서 이다.당시 우리나라가 핵개발을 할 능력이 있었는지 몇 사람을 통해 진상을 알아보았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강 창성은 핵무기가 95%로 완성되었다고 말했으며 청와대 비서실장 선우련 또한 우리의 기술력은 핵무기를 개발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박정희와 핵개발”편.한국의 핵개발 프로그램 에서, 투코리아 책을 통해 핵개발 사업의 진상을 알아보았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의 핵 연구사업을 둘러싸고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은 어떤 것이었으며, 미국의 인식처럼 당시 남한 핵개발이 남북관계나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인지도 짚어보았다.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군 경비병에 의해 저질러진 미군 장교 살해사건은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간 중대 사태였다. 당시다.
    사회과학| 2003.12.19| 7페이지| 1,000원| 조회(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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