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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을 끼고 나타난 고대의 문명들-서양문화의 역사
    요약과제강을 끼고 나타난 고대의 문명들제1장 초기 문화의 등장선사시대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4만년경 원인(原人)으로부터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가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인류사는 이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구석기 시대 동안 예술을 발명하고 중석기 시대 동안 밀과 보리를 재배했으며, 신석기 시대 동안 문자 언어와 문명을 발전시켰다.메소포타미아: 강들 사이의 땅기원전 8000년을 전후하여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비옥한 유역에서 일련의 혁신이 서서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도예, 직조, 영주가옥(천막이 아닌), 조직적 공동체, 곡물과 물품의 거래, 달력, 수학, 그리고 특히 문자의 등장을 말한다. 정착농업공동체의 성립은 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회적으로 전달되는 행동 양식, 믿음, 제도, 예술, 그밖의 수많은 인간의 창조물들이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뿌리내렸다. 정착을 위해서 영주가옥이 있어야 했고 도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살림도구도 필요했고 땅의 소유를 구분짓기 위해 측량술과 지도, 수학, 문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소유한 땅의 보호를 위해 공동조직이 발전했고 요새와 방어벽이 건설되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홍수를 예측하고 측정하고 기록해야 했고 달력이 개발되었고 천체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댐과 물레방아가 발명되었고 관개 시설이 도입되었다. 여분의 농산물들로 곡물, 가축, 수공품 교환이 성행하면서 상거래로 발전했고 더 나아가 금융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수메르 시대(기원전 3000~2350년)수메르인들은 세계 최초의 기록 언어인 설형 문자(쐐기 문자) 체계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자는 홍수와 관련해서 천체의 운행과 강물의 움직임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수메르인의 신앙 세계에는 태풍, 대홍수, 지진, 그리고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처럼 일상 생활을 위협하는 재난에 대한 불안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는 자연히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다신교를 숭상하였는데 이 신들의 속뜻을 읽어내기 위해 점성술이 등장했고 이것은 나중에 천문학으로 발전했다. 수메르인들은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거대한 인공언덕을 만들어 신전을 지을 장소를 마련했다. 이 지구라트는 기단과 기단이 비스듬한 경사로로 연결된 탑이었다. 수메르인들은 개성있는 예술과 건축을 남겼을 뿐 아니라 문자, 법, 종교의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또 수학, 과학, 공학의 발판을 마련했다. 산수 분야에서는 곱셈과 나눗셈,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창안했다. 그들은 60진법을 사용하고 1분을 60초로, 1시간을 60분으로 처음 정하였고 기하학분야에서도 그들은 60진법을 바탕으로 원을 360도로 표현했다. 이들이 남긴 문학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데 이것은 이름과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세계 최초의 문학이며 죽음의 발견이 처음으로 기록된 글이다.아카드 시대(기원전2350~2150년)아타드인은 군사력에 바탕을 둔 신성 군주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고, 따라서 무엇보다도 자유농민을 보호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수메르의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사유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이런 사유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빚에 쪼들리던 농민은 농노로 전락하는 불평등 사회구조를 고착시켰다. 이 시대의 강력한 통치자는 사르곤 대제였다. 이들은 수메르의 예술과 삶의 질을 더욱 발전시켰지만 수메르인들에게 자신들이 야비한 이민족이 아니라 혈족임을 제대로 인식시키지는 못했고 결국 다시 주권을 그들에게 뺏기고 만다. 아카드의 붕괴를 낳은 중요한 요인은 오랜 가뭄에 뒤따른 화산 폭발이었다.신수메르 시대(기원전 2050~1900년)기원전 2100년쯤 아카드 왕조가 무너지고 나서 라가시라는 도시를 다스리던 구데아가 수메를 통일하여 수메르 문화를 중흥시켰다.구바빌로니아(기원전 1900~1500년)아라비아 사막에서 온 유목민 바빌로니아인은 자신들의 왕도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분열로 가볍게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왕은 함무라비(기원전 약1792~1750)였다.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땅을 소유한 상인과 농민의 수가 많았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재산권과 무역, 그밖의 상행위를 보장하는 구조가 요구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금규정을 제외한 계약 파기, 절도,...,결혼과 이혼, 상속, 노예의 고용등 282개의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실용적인 이 시기의 법이었다. 이 법전의 기본 원칙은 보복률 이었다.아시리아 제국(기원전 1076~612년)이 후 바빌로니아는 훨씬 호전적인 세력인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군국주의 국가 아시리아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제국이 되었다. 아시리아의 예술과 건축은 왕을 위한 것이었다. 군주는 귀신 같은 사냥꾼, 용맹무쌍한 전사로 미화되었는데 그 의도는 아시리아의 막강한 군사력에 저항하는 적들에게 만용을 부리지 못하도록 겁을 주려는데 있었다. 이들은 대량살육과 점령지 주민의 제국전역분산 등으로 완강한 저항을 초래하는 경우가 잦아들다가 결국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 메디아, 팔레스타인의 공조가 효력을 발휘하여 아시리아는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주요도시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칼데아(신바빌로니아)제국(기원전625~539년)정력적이고 지혜로운 장수였던 네부카드네자르2세(기원전605~562)가 즉위하면서 거대한 기념 건축물과 잇따른 군사 원정을 통해 수메르와 아시리아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바빌로니아는 점점 강해졌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기술을 가진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그는 바빌론에다 웅장한 건물을 계속 지었다. 엔테메나키라는 높이90미터의 거대한 지구라트와 메디아 출신의 왕비를 위해 지은 공중 정원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바빌론은 내분과 쇠잔, 타락으로 인해 페르시아 정복군에게 이렇다 할 저항을 할 만한 기력이 없었다.페르시아 제국(기원전539~331년)페르시아는 카스피해의 동쪽으로부터 페르시아만 북부와 동부의 고원지대로 흘러들어와 리디아왕국,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급격히 팽창하여 나중에는 그리스에서 히말라야 산맥까지, 남부 러시아에서 인도양까지 뻗어나갔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역사에 등장했던 어떤 제국보다도 가장 광대한 제국이었다. 페르시아는 인도-이란어를 썼으며 정복된 민족들이 자기들 고유의 관습과 법, 종교를 지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페르시아가 남긴 위대한 업적의 하나는 거미줄처럼 깔린 제국의 도로망이었다. 왕도라고 불렸던 이 길은 페르시아만에서 소아시아까지 2,580킬로미터나 뻗어 제국의 주요도시였던 수사와 사르디스를 이어주었다. 페르시아왕은 아시리아 왕처럼 공포정치를 앞세우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절대 군주였다. 페르시아 문화는 로마 문화처럼 파생적이고 절충적인 성격이 강했고 현세적이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리디아, 팔레스타인, 그리스의 미술과 건축을 모범으로 삼았다.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가장 큰 업적은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킨 것인데 바로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생명을 선과 악, 진리와 오류,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보았고 의식, 사제, 신전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개인 종교였으므로 금욕이나 수도원의 은둔같은 극단적 수행보다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도덕적 생활이 중시되어 정의로운 사회에 기여하였다.제2장 이집트:파라오의 땅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민족국가(한 민족, 한 언어)였던 이집트는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훨씬 더 일관성있고 통일성있게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가 개방적인 지형인 반면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을 가진 비옥한 땅(나일강의 선물)이었다. 나일강 유역에서는 1년에 수확을 두 번 할 수 있었다. 청나일에서 곡식이 자라는데 꼭 필요한 칼륨성분이 풍부한 토양을 실어날랐다. 자연히 이집트인들은 자연의 법칙과 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었던 파라오의 법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여겼으며, 찬란하고 풍요로운 현세의 삶이 내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들은 무덤, 죽음, 미이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기나긴 역사 동안 이집트는 신정국가를 고수했다. 이집트인들은 삶과 종교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었다. 예술은 주로 신성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대하고 장엄했으며 일상생활을 뒷받침한 의식들도 대부분 규모가 컸다. 이집트인들이 품었던 신앙의 본질은 3000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들이 확립한 예술양식과 형식의 원리도 그 오랜 세월동안 달라지지 않았다.고왕국(기원전2686~2181년,3-6왕조)짧지만 인상적이었던 고왕국 피라미드 시대의 웅장한 무덤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제4왕조부터였다. 퇴적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든 몸집은 사자이고 머리는 카프레 왕인 스핑크스는 현존하는 거상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크며 왕권의 거대한 상징물이다. 5.27헥타르의 면적에 들어선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넓이가 231제곱미터, 부피가 자그만치 27,700,000입방미터이다. 세 개의 주요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이 피라미드는 하나의 무게가 2톤이난 되는 돌덩어리 25만 개를 쌓아 만들었다. 피라미드와 신전, 모조 왕궁으로 이루어진 이 피라미드 단지는 장례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었으며 영원한 왕궁이었다. 이집트 미술의 인체배치에서는 신체의 중요한 부위들은 가장 뚜렷하고 쉽게 파악되는 각도에서 묘사되었다. 왕의 위엄을 묘사할 때도 잔잔하고 영속적인 평온함을 인상적으로 묘사하여 왕권이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불멸의 부동성도 두드러지게 강조되었고 인물상은 형상을 마치 네모난 상자안에 서있는 것처럼 사각형으로 묘사하였다.
    인문/어학| 2000.11.06| 4페이지| 1,000원| 조회(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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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관음주의에 대하여(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평가A좋아요
    Ⅰ. 서론1. 영화 수용자 이론에 대해서대중매체이론에서의 전통적인 '수용자 audience' 개념 은 '익명의 상호격리된 대단위 집단'으로서 균질화, 균등화 그리고 수동성과 피동성으로 특징지워진 채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을 묵묵히 수행하는 나약한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대중 mass' 으로서의 수용자는 대중매체가 만들어 내는 대중문화의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수용자란 송신자의 입장에서 늘 표적으로서의 수용자가 되는, 달리 말해서 송신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설득가능하고 조종가능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문화비평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대중문화 수용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의 새로운 매체세력으로 부상하는 대중매체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대중문화 수용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다양한 실증적 연구와 논쟁을 통해서 전통적인 수용자상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현대사회의 수용자는 선택성과 적극성에 입각한 이성적 존재로 이해되었고 이제 매체성 자체도 수용자의 능동성을 전제로 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이렇게 볼 때 탄생된 지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매체에 비해서 영화가 집중적인 관찰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각 개인, 즉 관객에게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이 매체 특유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영향력으로 인해서 영화는 늘 위험한 매체로 백안시되거나, 역으로 그 영향력을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 흔히 '직접효과이론'이라 불리는 이러한 견해 - 즉 영화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수용자로서 관객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 는 계속 지속되었고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영화 텍스트의 수용자로서의 관객의 독특한 역할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1970 및 동일시와 관련된 위의 논의는 초기의 단일한 관객관이 보다 이질적이고 복수적인 것으로 전이하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관객이 어두운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적 이미지의 일방적인 전달이나 수동적인 수용이라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론 대신 관객이 처해 있는 특유의 상황성을 전제로 하는 관객과 영화 이미지와 상호텍스트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능동적 수용자 개념이 기본적으로 고전적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이성적 주체적 존재라는 이념으로부터 도출되었음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2. 주제제기관음증(voyeurism)은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엿보거나 다른 사람이 옷 벗는 것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상이다. 암수가 교배하여 종족을 보존하는 동물 가운데 시각을 가진 것들은 대부분 보는 것을 통해 성적인 느낌을 갖도록 구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벗은 몸이나 성행위 장면을 보면서 성적인 느낌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을 만날 때 먼저 상대의 얼굴과 몸을 주시한다. 육체가 지니는 곡선,균형,빛깔 등이 한 사람에 대한 최초의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외모를 포함하여 그 사람의 총체를 보고자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총체를 보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지만, 단 한가지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어느 정도 보완해 준다.영화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관음적인 욕구에서 출발한다. 어둠 속에 환하게 열려진 프레임 속의 또 다른 세계는 우리와 '닮은' 다른 존재를 보고자 하는 근원적인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그것은 욕망과 충족의 추구로 이어지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호기심과 자극이 없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가장 숭고한 종교적 이상조차도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며, 인간을 적절히 자극하여 그것을 추구하게 하지 못당한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된 그는 다리를 기브스한 채 의자에 앉아 창문너머 맞은 편 아파트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일상이 멈춰지게 되자 다른 사람의 일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제프는 자신이 현재 추구할 수 없게 된 욕망을 그가 바라보는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쉽게 영화의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주인공의 불행과 고통, 기쁨과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느껴 울고 웃고 조바심친 다. 왜 그럴까? 그것은 카메라의 시점조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나의 욕망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주인공과 대치된다. 그리고 주인공을 통해 나의 욕망을 대리 충족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해피엔딩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제프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어느날 제프는 맞은편 창문의 한 남자가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그런 가정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애인을 귀찮아하는 제프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그러나 히치콕는 제프의 가정을 현실화하여 그의 부도덕한 욕망의 실체를 감추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편 제프와 그의 애인 리자의 관계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여인 리자가 그의 곁에, 그가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을 때 그 여자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리자가 제프의 요청에 따라 살인자의 집에 숨어 들어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에 대한 제프의 욕망을 증폭시킨 것이다. 욕망의 대상인 리자의 의미는 그녀가 제프의 소유권안에 존재할 때 사라지며, 멀리 떨어져 상실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극단적으로 증폭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적 욕망에 기인하는 관음증의 실체는 무엇인가?5. 성적 욕망과 관음증의 본질 - "피아노"말을 못하는 여인 아다에 스스로 '간음하는 자'라는 죄의 고백 속에서 오늘날의 성문화 에 대처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을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되 그것이 철저히 상대적인 욕망임을 밝혀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부풀려진 욕망의 허구를 지적하고, 허구를 매개로 유지되는 우상숭배적인 사회체제에 대처하는 것이다.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한쪽으로 치우친 욕망의 출구를 다양하게 열어 전인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여야겠다.8. 여성/육체를 응시하는 남근의 욕망세계에 대한 재현을 담당한 권력주체가 남성임이 확인된 이상 관찰자이자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남성의 시선에 포착되는 여성/육체에 대한 시선 또한 남성성에 의해 각인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육체를 향한 남성 시선이 젠더화된 남근의 성욕망 그리고 원초적인 거세불안과 접합되어 어떻게 여성을 표상하게 되는 지에 대한 설명은 프로이드 그리고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는 여성주의 영화이론가들에 의해서 세련화되었다.멀비의 응시이론은 남성이 관찰의 주체가 되는 객관주의적 글쓰기도 또한 결국은 여성을 배경에 둔채, 보여지는 대상으로 사물화한 채 자신들의 이야기, 남근적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시사를 준다. 이 점에서 언어를 주체를 구성하는 원인으로 설명하는 라깡의 욕망이론은 매우 유효한 해석틀을 제공해 준다. 라깡에게 있어서 언어/기호는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이고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무의식은 이 언어(기표)와 주체 간의 단절과 봉합을 주재하는 공간으로서 주체는 그 안에서 구조화된다.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표들이지만 기표는 다른 기표를 통해서만 자신의 의미를 일시적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결핍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 이 결핍, 기표와 기표간의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연결은 주체의 상상에 의해 메꿔지는데 이 상상은 결핍이 초래한 욕망에 의해 작동된다. 하나의 이미지가 모든 욕망을 담지한 채 등장하는 것이다(Smith,1988,70-75).여성/육체는 그러므로 가부장적이며 근대적인 남근이성중심주의에 의해 타자화/대 수 있다. 반면에 스턴버그의 작품은 물신숭배적인 시각쾌락증의 순수한 실례들을 제공하고 있다.히치콕에서 남성주인공은 관객이 보는 것을 정확하게 본다. 그러나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영화들에서 남주인공은 영화의 주체로서 시각쾌락적 에로티시즘을 통해 이미지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더구나 이런 경우들에서 주인공은 관객에 의해 경험된 모순 기장 들을 묘사한다. 특히 '마니'와 '이창'은 물론 '현기증'에서 본다는 것은 플롯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관음주의와 물신숭배적인 매혹 사이를 오락가락한다.정상적인 보기 과정을 더욱 뒤틀리게 조종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폭로하듯이, 히치콕은 이데올로기의 정당성, 기존의 도덕적 인식과 연결된 동일화 과정을 사용하여 그것의 삐뚤어진 측면을 드러낸다. 히치콕은 영화적이든 비영화적이든 관음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그의 영웅들은 상징적 질서와 법의 표본-경찰관(현기증), 부와 권력을 소유한 남자주인공(마니)- 이다.그러나 그들의 에로틱한 충동들은 그들을 타협적인 상황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을 가학적 의지로 굴복시키거나 관음주의적으로 응시하는 힘은 의지나 응시의 대상인 여성에게 달려 있다. 여성이 지은 죄(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거세를 불러일으키는)와 확실한 법적 정당성은 이 힘을 뒷받침한다. 진짜 도착증은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이라는 가면 아래-남성은 법의 옳은 측면에서, 여성은 그릇된 측면에서- 간신히 감춰진다.히치콕의 능란한 동일화 과정의 사용과 남자주인공의 시점을 따르는 주관적 카메라의 자유로운 구사는 관객들을 남자주인공의 위치로 깊숙이 끌어들이면서 그의 불안한 응시를 고유하도록 만든다. 관객은 영화에서 자신을 패러디하는 스크린 신과 디어제시스의 관음주의적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이창'에 대한 분석에서 두셰는 이 영화를 영화에 대한 은유로 해석한다. 제프리는 관중이고 아파트 반대편 사건들은 스크린에 해당된다.제프리가 지켜 볼 때 에로틱한 영역이 그의 시선에 첨가되고, 중심 이미지가 드라마에 첨가된다. 그의 애인 다.
    사회과학| 2000.11.06| 24페이지| 1,000원| 조회(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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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여성의 재산상속과 그 지위 평가A+최고예요
    朝鮮時代 女性의 財産相續과 그 地位Ⅰ. 序論財産相續 문제는 家計相續·祭祀相續 및 身分相續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相續에는 財産相續·身分相續·祭祀相續이 있다. 본고에서는 財産相續을 中心으로 살펴보았으 나, 財産相續은 祭祀相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身分相續과도 관련을 갖기 때문에 여기에 대 해서도 약간 언급하였다. 相續制度는 被相續人과 相續人의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로서 相續人 의 範圍, 被相續人의 權利·義務, 相續의 時期·內容 등 광범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본 고는 재산상속의 평균분급이 차등분급으로 移行해가는 과정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 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한 연구는 특히 朝鮮王朝 兩班支配體制下의 사회구조와 신분변동을 규명하는데 하나의 핵심적인 과제라 생각된다.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재산상속에 관해서는 先學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며 또한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金斗憲,『韓國家族制度硏究』, 서울대 出版部, 1980, 崔在錫,『韓國家族硏究』,民衆書館, 1977, 「朝鮮時代 相續制에 관한 연구」-分財記의 分析에 依한 接近- 『歷史學報』55·56合輯, 1972, 李光圭, 『韓國家族의 史的硏究』,一志社, 1977, 「朝鮮王朝時代의 財産相續」,『韓國學 報』3輯, 1976 等그러나 均分制를 비롯한 상속형태의 변화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룬 논고는-주고 사회학자들에 의한 것으로- 한 두 편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연구에서도 均分相續制의 내용과 그 변화요인에 대한 歷史的·社會的 배경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따라서 筆者는 각종 分財記 자료를 橫으로 하고 年代記·文集類·法典類 등을 縱으로 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18세기까지의 재산상속에 관하여 平均分給의 내용과 그 변화과정을 주로 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이러한 本 硏究를 진행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종 分財記가 지닌 자료의 한계성이다. 分財記는 時代別로 체계 있게 남아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公하기로 되어 있었다.{) 經國大典 卷6 刑典 私賤條에, 「無子女嫡母奴婢 良妾子女七分之一 承重子則加三分 餘還 本族……無本族則屬公」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다음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嫡母의 노비는 良妾子가 承重子일 때에는 딸에게 6, 承重子인 良妾子에게는 1의 비율로, 賤妾 소생의 承重子일 때에는 딸에게 9, 賤妾承重子에게 1의 비율로 각각 상속되었다. 그러나 嫡母에게 아무리 노비가 많다 하더라도 妾承重子에게 상속되는 노비는 3명을 넘을 수 없도록 법적 조처가 취해지고 있었다. 妾承重子가 재산상속을 받는 이유는 嫡母의 祭祀를 받들기 때문이었다. 太宗實錄 券10 太宗 5年 9月 戊戌條에 의하면, 자식이 없는 夫妻의 노비는 夫妻중 한쪽이 죽으면 살아 있는 배우자가 죽은 배우자의 노비를 함께 부릴 수는 있으나, 만약 살아 있는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再婚하였을 경우는 本族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만약, 四寸親까지의 本族이 없으면, 국가 소유로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우리는 위에서 노비의 상속 경우만을 살펴보았는데, 노비는 재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재산도 노비의 예에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3) 婚姻한 女性의 財産相續과 그 地位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는 부부의 재산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특히 아내가 죽으면서 남편에게 노비를 유산으로 증여할 때에는, 아내의 印信手書만으로는 신빙하기 어려우므로 객관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확실한 증거가 갖추어진 연후에 지급하도록 한 史例{) 太祖實錄 卷13 太祖 6年 7月 甲戌條에, 「無子息夫妻奴婢 雖無文契 亦許己身使用 身後本孫許 給夫與妻成文許給者 從許與傳繼 妻爲夫許與者 但以印信手寸 取信難便 必有證筆的實 然後方許 決給」云云하고 있다.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도적으로도 여성의 재신 관리에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편이 아내에게 노비를 遺贈할 때에는 까다롭지 않으나, 아내의 재산 증여는 신중하게 처리한 것은 당시 남성 위주의 가족제도상 여성의·매매의 행위 역시 소유주인 여자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물론 부부의 재산에 대해 서로 신성불가침의 별개의 재산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체제 내에서 부인의 경우 자신의 재산에 대한 처분이라고 하더라도 남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사료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적어도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에 대해 임의의 처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또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없이 죽은 부인의 재산 역시 媤家의 재산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本族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자녀가 없이 죽은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부부 중 어느 한쪽에 의해 다른 쪽의 재산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당시의 여자들이 財産의 均分相續을 받고 또 남편 혹은 시가로부터 독립된 재산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면에서 그들의 지위가 결코 남자들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宗法의 嫡長子相續主義에 근거한 家父長權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여성의 독립적인 재산권은 수용되기 어려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까지도 이러한 여성재산권이 보호되었다고 하는 것은 재산권이 갖는 독특한 속성 즉 生計에의 밀접성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또한 그것은 여자들이 자신의 재산에 관한 권리를 의식하고 그것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여 재산소송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적극성에 기인하는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조선 초기 실록 기사 가운데 여자들이 재산에 관계된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上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예컨대 세종 9년(1429) 11월부터 다음해(1430) 3월까지 죽은 觀察使 安望之의 아내 許氏와 죽은 判官 박연의 아내 왕씨의 재산 분쟁에 관계된 기사가 여러 차례 나와 있다. 문제는 왕씨의 族人 王振·王 의 妻들이 奴婢·家財·田莊 등을 安望之 父子에게 증여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박연의 아내 왕씨가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였다고 보고 싶다. 우리는 고려 말기에 여성들이 정치적으로는 利權이나 獵官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키고, 사회적으로는 寺刹의 왕래나 野外놀이에서 醜聞을 남긴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새 王朝의 유교적 정치가의 눈에는 퇴폐적인 풍조로 비쳤을 것이며 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유교적인 윤리로써 강경하게 다스리는 도리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에 의한 사회 혼란이나 풍기문란의 요소를 없애기 위하여 강경한 立法을 取하였던 것이다.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券5 刑典 禁制條에, 이에 대한 금지조처와 이를 어긴 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明文化하고, 券3 禮典 諸科條에는 再嫁 또는 失行한 婦女의 자손에게 벼슬길을 봉쇄하는 조처를 취한 것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 초기의 위정자들은 혼탁해진 풍기를 淨化하는 방법은 여성들을 정치·사회·윤리면에서 엄격한 제재를 가하여 집안에서 유교적인 婦德을 쌓게 하는 것으로써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련되는 한 어떠한 강경책도 사양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그러나 가정내의 문제에 있어서는 많은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흔히 가정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도 前代에 비하여 훨씬 뒤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前近代社會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은 東西洋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유도 조선왕조라고 해서 더욱 혹심하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에서 조선왕조에서도 여성의 가정내의 지위에 대해서는 법으로써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경향을 살펴본 바가 있었다.따라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처가 취해졌던 것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여성으로 인한 정치·사회·윤리면의 폐단이 제거되는 이상, 경제적인 지위까지도 格下시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부가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보호하는 몇 가지 史例로 이러한 측면에서 납득될 수 있는게 해서 발생하였을까? 勿論 여기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첫째는 儒敎倫理의 보급과 정착인 것 같다. 元의 간섭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점차 신흥 사대부 사회에 확대되어갔으며, 조선 왕조의 건국 세력은 바로 이러한 新儒學의 훈도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佛敎·權貴 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방법으로써 朱子學을 支配理念으로서만이 아니라 實踐倫理에까지 적용시켰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이 敎育과 朱子家禮의 장려·보급이었다.{) 朱子家禮에 의한 喪祭禮의 실천은 주자학의 수입이래 줄곧 계속되었음이 柳洪烈의 「朝 鮮祠廟發生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5號, 1936 : 『韓國社會思想史論攷』pp.2-28에서 연구된 바 있다. 그러나 麗末까지 祠廟는 일반화된 것이 아니며 극소수의 士大夫家門에 局限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여기에 관한 연구로서 朱雄英, 「14, 15世紀 家 廟設立의 意義」慶北大 大學院 碩士論文, 1981이 있다.麗末 性理學 보급에 크게 기여한 바 있는 鄭夢周는 당시의 풍속이 喪祭를 오로지 佛敎式으로 함에 크게 개탄한 나머지 처음으로 士庶人에게 朱子家禮를 실시하기를 위한 家廟를 세우고 祖先을 奉祀토록 命하였다.{) 『高麗史』卷117, 鄭夢周傳 「時俗 喪祭專尙務門法 夢周始令士庶人 儆朱子家禮 立家廟 奉先祀」라 한 바와 같이 朱子家禮에 입각한 說廟奉祀는 麗末에 와서 겨우 수용되는 실 정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사대부들의 의지는 조선왕조 성립과 함께 더욱 강하게 表出되었다. 즉 국가적 차원에서 儒敎倫理(朱子家禮)의 실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15세기 前半까지는 좀처럼 朱子家禮가 실시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국가의 政策的인 촉구에 의해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士大夫家門들이 대다수 家廟를 설치하게 되었다.{) 家廟의 설치는 성리학적 조상숭배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가묘설치 이후로 개 별 가문 內에서는 嫡長子와 庶子를 구분하게 되었으며, 혈연의식의 확대·강화로 無後者 는 不孝子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養子것이다.
    인문/어학| 2000.11.06| 22페이지| 3,000원| 조회(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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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야요이 문화의 한국적 성격에 대하여
    REPORT일본 야요이 문화의 한국적 성격에 대하여-세형 동검, 구리 거울, 동탁을 중심으로과 목 한국대외관계사교 수 김영미 교수님전 공 사 학 과학 번 9781245제출자 황 보 선 정제출일 2000. 11. 2많은 일본 학자들은 현재의 발견 예를 근거로 해가지고 야요이 시대의 금속 도구로서는 철기를 앞서서 사용한 것으로 입론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그렇지 않았을진대 거기서 그랬을 리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순서에 따라 설명하는 수 밖에 없다.철기가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것임을 부인하는 일본 학자는 없다.공구로서 그들이 드는 것은 대패 날, 자귀 날, 도끼, 칼, 송곳 등이며 쇠로 만든 쐐기를 나무 틈에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철제 농구의 발견 예는 극히 드무나 많이 발견된 여러 가지 목제 농구를 다듬은 자취로 보아서 철제 농구도 사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구마모도 현 사이또 산 유적의 철기는 어떤 공구의 끝이라고 생각되지만 괭이 날 같은 것으로도 보인다고 하며, 북 큐슈의 세 개 유적에서는 괭이 날이겠는지 호미(鋤; 현재 한국 호미와는 달리 긴 자루에 붙여 쓴다. 일본말의 쓰끼) 날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무튼 농구임은 틀림 없는 발견 예도 있다고 한다.다음 청동기로 넘어가자.청동기의 주조도 또한 야요이 시대에 있었던 새로운 생산 기술의 하나다. 처음에는 한국제, 중국제의 제품이 들어왔다. 어느 것이나 실용적 기능을 갖춘 물건이다. 현재 알려진 수입 청동기의 가장 오래된 것은 전기 말의 독 무덤에서 나온 세형 동검(細形銅劍)이며, 그것은 중기 이후를 중심으로 북 큐슈 분묘의 부장품으로서 발견되는 일이 많다. 청동기에 전후하여 이에 앞서서 철기가 알려졌기 때문에 들어오는 제품의 종류는 무척 제한을 받아 검(劍), 모(矛), 과(戈) 등의 무기와 거울을 위주로 해서 소수의 호미 날, 괭이날, 대패 날 등이 알려졌을 뿐이다. 이 경향은 이기(利器)로서 훨씬 우수한 철기의 보급에 따라 더 진전하여 실용 무기도 철기화한다. 얼마 안 가서 일본아들인 일본 열도에서는 거꾸로 철기 사용기 다음에 청동기 사용이 있을 수는 없다. 둘째로 청동기 사용은 일본 열도에서 철기를 사용하고 있을 때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며, 곧 그것은 실용에서 의례용으로 전환되고 말았다는 것도 문제다. 야요이 말기 이후 고분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청동기들이 그러한 의례용의 신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더라도 청동기를 실용으로 사용하던 시기가 그렇게 늦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철기와 병존하면서 흐지부지하게 된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 말이다.이 모든 난점은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세기 이후로 보는 데서, 즉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야요이 시기라는 대륙으로부터의 농경 분화와 금속 문화의 전파를 늦잡아놓은 데서 구겨지게 된 논리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 형편은 잘 모르겠으나 야요이 전기라는 시기에 선행한 몇 세기 전부터 대륙으로부터 농경 문화가 전파될 때에 청동기도 함께 전파되고, 그 후에 철기가 건너갔거나 이 두 금속기는 야요이 초기쯤에 동시에 일본 땅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겠는가?아무튼 청동기를 하나하나 보아 나갈 때에도 그것의 전파와 사용을 일본 학자들이 늦잡는다는 감을 주는 것을 미리 말해 두어야 하겠다.1. 좁은 놋 단검=세형 동검세형 동검은 세형 동모, 세형 동과와 함께 한국에서 제작되어 일본에로 건너간 것이라고 일본 학자들도 찍어서 말하는 것이다.세형 동검은 몸이 날씬한 단검으로 대개 그 두 날의 아래 부분에 이르러 움푹 패인 데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거나 워낙 몸이 가는 동검은 패인 데가 없다고 한다. 출토 예로서 후꾸오까 현 가스야(粕屋) 군 시시부(鹿部)의 고인돌 밑에 있는 독 무덤에 들어 있었던 것이 있다. 동과도 이와 함께 출토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개의 출토 예가 있는데, 날의 길이는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개 30cm 내외다. 자루가 붙어 있는 것으로는 50cm쯤 되는 것도 있다. 어느 유적이나 일본 학자들이 야요이 중기 것으로 잡는 것에서 나왔다.시시부의 예가 그러하지만 세형 동검,한 것인 데 대하여 하까다 만 이동의 것은 오끼노-시마( 島)를 경유한 것을 생각케 한다. 이 항로는 고전에 보이는 해북 도중(海北道中)에 해당하여 세도 내(瀨戶內; 세도 내해)에 연락되고 있다.현재 세형 동검, 동모, 동과는 북 큐슈에 몰려 분포되고 있으며 그것은 두 지역에 집중됨을 본다. 서쪽의 것이 사가 현 북부이며 동쪽 지역이 후꾸오까 현의 서부이다. 인용문의 저자는 북 큐슈의 이 두 지역에 분포된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한국으로부터 일본 열도에 이르는 항로는 보통 우리 남해안에서 쯔시마, 이끼의 두 섬을 거쳐 북 큐슈에 이르는 것이다. 그 중 우리 김해 부근에서 쯔시마, 이끼 두 섬을 거쳐 북 큐슈의 마쯔우라 반도에 이르는 항로가 『삼국지』위서 동이 전 왜인 조에 실려 있으며, 여기서는 한국으로부터의 상륙자는 마쯔우라에서 동쪽으로 좀 더 가서 이도(伊都; 오늘의 島郡)에 나와 앉아 있는 대관(大官)의 검열을 받았다고 한다. 3세기 전반기의 이 항로는 결코 이 때에 처음으로 개척된 것이 아니라 그 이 전 시기부터 우리 이주민들에 의하여 개척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한국의 남단에서 쯔시마, 이끼를 거쳐 마쯔우라 반도에 상륙한 사람들이 남긴 유적들로부터 북 큐슈의 세형 동검, 동과, 동모 유적의 서쪽 집중 지역인 사가 현의 북부 유적들을 인용문의 저자는 첫째로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다른 항로로서의 해북 도중 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남단에서 쯔시마를 거쳐 오끼노-시마(후꾸오까 현)를 지나 후꾸오까 현 본토의 북부 해안에 상륙하는 길이며, 이 길을 따라 상륙한 사람들이 그 현의 서북부에 있는 유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한국으로부터 쯔시마를 거쳐 북 큐슈에 상륙하는 항로를 두 개로 보는 것을 북 큐슈의 유적들이 동서 두 지역에 몰려 있는 데서 추론한 것이지마는, 당시에 우리 나라에서 건너가는 사람들의 형편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 남해안 여러 곳에서 북 큐슈로 향할 때에 이 두 길이 다 이용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낙동강 유역 일대의 가락국째 것은 작은 것들이다. 이 유적들은 모두 일본 학자들이 야요이 중기 내지는 후기로 잡는 것들이다.은 우리 나라에서 이미 8.15 해방 전에 몇 개의 나온 예가 있다. 대동군 반천리(反川里)에서는 세형 동검의 조각과 함게 두 개가 나왔고, 전라남도 소록도(小鹿島)에서도 모제품으로 보이는 세문경이 나왔으며, 그 밖에 출토지 불명의 세문경 3개 예를 일본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이 거울이 한국 것임은 해방 전에 거울의 거푸집이 나온 (평남맹산에서 나왔다고 함)것으로도 알 수 있다.한나라 거울보다 앞서는 이 한국의 거울이 일본 열도에로 전해진 시기를 일본 학자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야요이 중기 이후로 잡으며, 한나라 거울의 전파도 거의 같은 시기로 잡는다.한나라 거울로 가장 오랜 것은 전한(前漢) 것이다. 후꾸오까 현 미구모(三雲) 유적에서 세형 동검 갈래의 동검과 함께 독 무덤에서 전한 거울인 등 35개가 나왔다. 또 같은 현의 수꾸-오까모도(順玖岡本) 유적에서는 30여개의 전한 말의 거울들이 역시 독 무덤에서 나왔다. 이보다 좀 시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후한 거울이라고 하는 들의 거울이 합구식 독 무덤에서 나오므로 이를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 후기의 유적으로 잡는다.구리 거울은 당시 일본에서는 얼굴을 비쳐 보는 화장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청동 제품과 함께 제사품으로서 숭배의 대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볼 근거가 있으나 그렇게만 보는 데는 재고려되어야 할 여지가 없지 않다. 원주민들의 경우에는 이 새로운 박래품이 그렇게 신물로 되었을 수 있으나, 그런 것을 고국에서 화장 도구로 사용하던 사람들까지도 일본 땅에 들어서서는 그것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거울은 야요이 시기 뿐만 아니라 다음의 고분 시대에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의 절대 연대 추정의 주요 자료로 일본 학자들은 삼는다. 중국 계통 거울은 연대에 따라 변천의 자취를 계통적으로 알 수 있고, 야요이 유적이나 고분 유적에서 연대 야요이 중기 이후로 규정한 데서 오는 무리한 추론일 것이다. 일본 야요이 시대 청동기 유물이 부분적인 거울의 예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한국 것이거나 아니면 한국에 원류를 둔 것이었다. 오늘 형편에서 연대 관계를 계통적으로 알 수 있는 중국 거울을 표준으로 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겠으나, 이를 표준으로 한다고 해서 일본 야요이 청동기의 주류를 이루는 것들을 되는 대로 머리를 자르지는 말아야 한다. 거치 세문경, 세형 동검, 공과, 동모 등은 역시 한국으로부터 전파된 철기와 함께 또는 그보다 앞서 일본 땅에 전파되어 사용해 내려오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여기서도 제기되는 것이다.이상에서 열거한 청동기들이 중국 것이 아닌 한국 것이고 중국 것보다 먼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이기 때문에 몹시 배가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전파 연대를 내려 잡는 경향도 그런 표현의 하나로 보이지마는, 그것이 한국 것이라는 사실 자체에도 물을 타서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8.15 해방 전에 원고를 만들어두었다가 일제 패망 후에 도꾜에서 출판한 『조선 고문화 종감(綜鑑)』이라는 요란하게 큰 책 세 권이 있다. 이 호화판 은 두 사람의 일본 학자의 공저로 되어 있다. 여기서 패망 후에도 기를 쓰고 되살아나려는 일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것은 한국의 고문화가 결국 한국 것이 아니라는 그 한결같은 논조인 것이다.우리의 청동기에 대하여,이렇게 보아 오면 이 동제품들은 그 근거한 바가 지나(중국을 말함) 중원의 한족 문물에 연계를 가진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동아(東亞) 고문화 발전의 대세로 보아서도 그 유래하는 바가 저편(중국)에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세부에 대해서 보면 현재의 지견(知見)으로서는 순연한 지나 유물과의 차이를 보임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동검, 동모, 동과도 다 중국에 있으니 중국에 원류가 있고 약간한 차이는 세부늬 차이라는 거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세형 동검이다.
    인문/어학| 2000.11.06| 9페이지| 1,000원| 조회(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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