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1. 증가하는 스포츠수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스포츠는 후기산업사회에서 보편적 사회규범으로 정착하고 있다. 스포츠의 직접 및 간접참여자의 수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영리 및 비영리적 스포츠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사회 곳곳에 들어서고 있고, 스포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학문적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스포츠는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게 되었다.예컨대 의복, 신발, 음료, 식품, 안경, 자동차, 의약품, 남녀의 체형, 헤어스타일, 건축물, 광고 어느 하나 스포츠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이 스포츠 화 되어가고 있다.스포츠가 사회의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경향은 크게 의문이 가지 않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과거를 되돌아보면 이러한 경향은 결코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스포츠의 기원은 엄밀히 말해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에도 오늘날의 유형과 유사한 스포츠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스포츠의 보급 및 확대, 수요증가, 대중화는 현대산업사회의 출현과 맥을 같이한다.예컨대 산업이 고도화되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스포츠는 그 영역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사회현상이었다. 스포츠참여는 특정 사회계층, 연령층, 성 등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포츠참여자의 수는 극히 미미하였으며, 대중의 삶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신분의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스포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스포츠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스포츠는 말 그대로 사회의 대중현상이며, 보편적 사회규범이 된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한국사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80년대부터 고도산업화시대에 접어든 한국사회의 경우 1985년부터 1991년 사이에 주당 1회 이상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전국민의 26 플레스너(Helmut Plessner)는 논문 "산업사회에서 스포츠의 기능 (Die Funktion des Sports in der industriellen Gesellschaft)"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함으로써 이 테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스포츠는 자신이 발원하였고, 그를 위해 일종의 보충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포츠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긍정하면서 스포츠만을 따로 떼어 부정할 수는 없다. 전자에게 해당하는 바는 후자에게도 해당된다. 양자는 함께 짝을 이룬다. 스포츠의 기록에 대한 집착은 바로 사회의 기록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용기와 힘을 갖지않고서는 스포츠를 변화시킬 수 없다.스포츠는 사회와 짝을 이루는 한 쪽이며, 사회는 스포츠와 짝을 이루는 다른 한 쪽이다. 스포츠를 비난하거나 경탄해하는 판단은 동시에 사회를 비난하거나 경탄해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이 견해는 다른 저자들을 통해서도 꾸준히 견지되고 있다. 미국의 인문학자 거트만(Allen Guttmann) 역시 함브르크대학 객원교수시절 스포츠사회학자 하이네만(K.Heinemann)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로 저술한 "근대스포츠의 본질(Wesen des modernen Sports)"에서 근대사회의 특징이 근대스포츠에 그대로 반영되어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 저서에서 구트만이 부각시킨 근대사회의 특징은 베버(M.Weber)가 언급한 "탈주술화"(Entzauberung) 경향이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사회를 중세사회로부터 구분 지워주는 주요 특징가운데 하나는 탈주술화이다.탈주술화는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믿음중심에서 합리적 사고 중심으로 삶의 양식이 전환함을 뜻한다. 따라서 삶의 세속화(S kularisierung)란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베버의 입장에 착안하여 거트만은 자신의 저서에 "제례에서 기록으로"(Vom Ritual zum Rekord)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여기서 제례는 전통사회의 비합리적 주술행위를 상징하며, 기록은 로 作爲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은 인간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겔렌에 따르면 인간은 결핍적 존재이다. 여기서 결핍은 무엇보다도 생물학적 또는 신체적 결핍을 의미하는데, 타고난 신체 조건만으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 함축되어있다.(1962) 란트만(M.Landmann)은 이와 같은 신체적 결함을 "비특수화"(Unspezialisiertheit)로 개념화시키고 있다. "동물은 그들의 전신체구조상 특수화되어 있다. 그들의 기관은 마치 열쇠가 자물통에 딱 들어맞듯이 각기의 종 생활조건과 생활요구에 적합하여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기관은 일면적으로 다만 특정활동을 목표로 지정되어 있지 않고 원시적으로 비특수화되어 있다."(1993, 187) 생물학적 결핍이나 비특수화는 동일한 뜻을 담고 있다. 즉 인간은 신체적 무장에 있어(예컨데 이나 발톱, 민첩한 몸놀림 등과 같은 신체적 무기의 결핍 및 보호적인 체모발의 부족으로 인하여) 다른 동물보다 매우 불리하기 때문에 주어진 그대로의 자연환경 속에서는 생존이 어렵다는 뜻을 함축한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하여 자연환경을 자신의 생명유지에 유리한 형태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을 인위적 조작을 통해서 보충하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소위 문화 또는 문명이 발생하였다.자연환경에 조작과 수정을 가하는 행위는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지만, 전술하였듯이 특히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와 과학 혁명,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의술의 발달에 따른 인구증가 등에 의해 대규모화되고,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산업이 고도화된 사회에서 문화환경에 의한 자연환경의 대체는 미증유의 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산업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들은 숲과 햇볕, 자연풍, 자연적인 기온과 습도, 흙 등의 자연환경을 체험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으며, 인공조명, 냉온난방기구, 콘크리트벽, 아스팔트 등의 인위적 환경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고 있다. 특히 고도로 산업화된 대도시 거주자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보다 심각하다동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육체성에 속해있는 자연적 힘들, 즉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움직인다"(192).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의 생산 뿐 아니라, 자아실현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노동이해는 전통사회에서 행해졌던 전근대적 노동에서나 타당성을 갖는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농부의 노동은 분명하게 관찰될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다양한 근육들의 운동이었고, 신체의 총체적인 활동이었다. 이러한 노동은 노동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관찰되어질 수 있었다. 땀, 근육의 노력, 손과 팔의 숙련된 동작과 힘 등을 통해 노동력이 어떻게 재화생산에 투입되는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노동자의 다양한 노동행위는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조건들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조건까지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성으로 특징지워지는 근대정신의 태동 이후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인간의 노동방식은 점차 합리화되어갔다. 노동방식의 합리화는 특히 산업혁명을 통하여 가속화되었다. 작업의 효율성을 최대 목적으로 하는 노동의 합리화과정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분화, 기계화, 자동화로 이끌어 간다. 그에따라 노동에 요구되는 신체의 움직임은 근육들의 총체적이고, 다양한 운동에서 국부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노동의 과정에서 신체의 쓰임은 점차 특정 부분에만 국한되어 갔으며, 이는 곧 노동과정에서 신체적인 힘과 숙련, 지구력 등이 불필요하게 되어감을 의미한다. 또한 각종 기술적인 설비가 신체의 운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노동의 자동화 및 기계화는 전통적 노동과정에서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신체적인 부담을 크게 감소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에게 보다 많은 심리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신체를 덜 움직이는 대신 세심하게 신경써야하거나, 복잡한 기계를 신경을 곤두세워 조작해야할 필요성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점을 구르페(O.Grupe)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노동의 합리화는 "인간에게 이중적으은 근육대로 적당한 신체활동을 해야 발달되고, 심장은 심장대로 운동을 해야 그 기능이 발달되는 것이다. ...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모든 사회구조가 자동화됨에 따라 우리의 신체활동이 급속히 감소하게 되었다. 자동차, 엘리베이터, 세탁기를 비롯한 모든 기구들이 우리의 신체활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체는 운동부족증을 나타나게 되었다. ... 이로 인해 우리 인체는 무기력해 지고 각종 질환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며, 정서가 불안하고 매사에 의욕이 감소되는 등 건강이 점점 나빠지게 되어, 결국 소위 말하는 현대병인 심장병, 고혈압, 뇌졸증, 당뇨병, 암, 신경통 등의 성인병이 증가하게 되었다."(1994, 19)3) 감성과 이성의 부조화현대사회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탈감성화 경향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감성은 인식론적 측면과 실천철학적 측면 두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식론상으로는 오성과 대립하며, 인식에 없어서는 않되는 능력을 말하며, 실천철학적 의미로는 신체적 감각에 관계한 전 충동에 기인하는 자연적 욕구를 말한다.(1989, 16)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하는 감성의 의미는 후자에 해당한다.감성과 이성은 실천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 기본 카테고리로 사용될 수 있다. 반성(Reflexion)이라는 매개과정을 수반하는 이성적 행위와는 달리, 감성적 행위는 직접성(Unmittelbarkeit)을 통해 특징지워진다. 이와 같은 감성적 행위의 전형은 동물들의 행동이다. 동물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본능적 욕구와 충동에 의해 지배된다. 성욕, 수면욕, 식욕, 보다 궁극적으로 종족과 개체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은 모든 동물들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동물들의 삶에서 자연적 욕구는 외적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한 직접적으로 충족되려는 쪽으로 방향지워진다.인간은 외적 제재가 가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욕구의 직접적 충족을 억제할 줄 아는 능력을 통해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프로이드는 이와같은 능력을 인간문명의 전제로 보았다. 마르쿠제를 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