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지금까지 예술을 전공하고, 접하면서 나름대로는 예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물안 개구리 였던 것 같다. 예술의 범위는 지극히 넓으며, 내가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자료를 찾을때도 나는 내 전공과목에만 집중했을뿐 예술의 모든 범위를 무시했던 것 같다. 회화야말로 예술에서의 기본과목인데, 생각해보면 난 회화쪽에 아는 것이 너무 없다. 그래서 지금 이 과제를 계기로 우선은 중국의 회화부터 공부해 보려고 한다.중국의 미술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전개해왔다.은(殷)·주(周) 시대에는 청동기가 발달하였다. 중장하고 화려한작품으로 가득한 이 시대 조형미술의 전통은 그 이후 고대 중국미술의 지주가 되었다.진(秦)·한(漢) 시대에는 옛 무덤의 벽화와 만리장성이 축조되어 그때의 생활상과 뛰어난 기술을 알 수 있다.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인도로부터 불교 미술이 전래되어 돈황에 석굴 사원이 축조되었고 불교 조각이 성행하였다. 중국 미술에 있어 돈황의 석굴미술은 동서 문화 교류를 고찰하는 실마리를던진다. 돈황의 석굴은 서역을 지나 돈황에 도착한 소조 미술을 중국 본토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색의 농담에 의한 음영법이 서방에서 전래되어 중국 회화계에 영향을 주었다.수(隋)·당(唐) 시대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이며 중국 미술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북종화와 남종화가 등장했으며 전통적인 중국조각의 성격이 정립되었다. 당대(當代) 수묵화는 서방회화의 채색대신 먹을 사용하였고, 단순히 대상을 감각적으로 본뜨는 것이아니라 대상의 생명을 본뜨는 정신을 으뜸으로 여기는 근본정신이 확립되었다.명대에는 유교 사상이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명 왕실은 직업화가들의 주요 지원자요 후원자로서 송대의 문화적·예술적 우수성을 부활하고자 하여 산수·화조·시·서예 등의 황금시대를 열기도 했다. 한편 문인화는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로 쇠퇴했지만 명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는 중기 이후에 소주에서 심주와 문징명 같은 화가들에 위해 다시 번성하였다.그럼 여기서 명대의 미술사에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Ⅱ. 본론중국의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에 폐지된 화원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덕제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 계통의 예단, 하규 계통의 주문정, 후에 절파의 개조가 된 대진 및 이재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 하규의 송나라 원체화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가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이다. 그는 남송화원의 화가 진각을 개조로 하는 원파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마원·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재야 화가 속에서 문인화가 크게 발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화원이 쇠퇴하고 원파의 형식화가 굳어져 가자 이에 대항해서 문인화가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심주와 그 제자인 문징명으로 이들은 원대의 4대가(黃公望·吳鎭·倪讚·王蒙)와 북화의 필법을 조화해서 명대 남화를 부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대의 4대가에 비해 기술·기백에서 매우 뒤졌다. 가정제 이후 17세기 중엽까지 문인화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였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문징명 이후의 문인화가로는 문백인·동기창·예원로 등이 알려졌다.중세까지 길러진 회화적 정신은 명대에 이르러 실제로 발로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심 사상은 동기창, 막시룡에서 시작된 남화, 북화의 2대별이다.남화와 북화는 지역의 풍토나 사람의 기질에서 연유되며 화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북종 화가들의 대부분은 원체화풍을 따라고 남종 화가들은 원체화 외에 몰골이나 수묵 담채를 즐겨 그렸다.소주에서 멀지 않은 강소성의 송강에서는 동기창(1555~1636)을 중심으로 진계유, 막식룡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원대와 명대에 꾸준한 진보를 보인 문인화 이론에 한층 더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송강파 화가의 중심인물은 동기창이었으며, 그가 내세운 남.북종화 이론은 그 이후 중국회화사상 돌이킬 수 없는 문인화 우월사상을 심어 놓았다. 동기창은 명대의 가장 전형적인 사대부 화가로서 예부상서를 포함한 많은 관직을 역임했으며 원대의 조맹부, 그리고 16세기의 문징명, 축윤명 등의 중국 역대 명필과 맞서는 탁월한 서예가였고 문장가.서화감식가였다. 그는 많은 여행을 통하여 중국 고서화를 실제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수준 높은 감식안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의 눈을 거쳐가 많은 그림에 발문(跋文)을 써서 그들에 관한 자기의 의견을 후대에 남겼다.남.북종화란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막시룡이 1610년경에 발표한 이란 짤막한 글에서부터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글이 막시룡의 것이 아니고 동기창이 쓴 글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동기창의 그림들은 역시 자연을 소재로 한 산수화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이론가로서의 입장을 잘 표명하듯 분석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는 황공망의 양식을 기초로 한 것이라 하나, 와 비교할 때 피마준을 사용하여 질감과 음영을 표현했다는 공통점 외에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예찬의 그림을 방(倣)한 역시 기본적인 예찬 구도를 상기시킬 뿐, 20세기 초기의 서구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분석적인 그림이다. 개성을 중요시한 문인화 정신에 입각한 그림은 화가의 특수한 면을 표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기창의 그림이 옛 대가들의 양식을 기초로 하였으나 외양은 닮지 않고 정수만을 이어받은 동기창 고유의 양식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동기창과 같은 길을 걸은 몇 사람의 문인화가들 중 이유방, 정가수, 왕시민, 왕감은 명말 청초의 과도기에서 동기창의 남종화 이론을 청초의 정통파에게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중 이유방은 동기창의 영향을 보이면서도 청대의 안휘파 화가들의 그림과 공통점을 보이며 를 그렸고, 우리나라 남종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동기창의 남.북종화의 가름과 남종화 우월사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엄격하게 당시의 화단을 하나의 주조용 틀에 넣은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가 주장한 문인화에서의 개성과 변화의 중요성은 많은 화가들에게 철저한 자기표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명 말 청초 화단의 다양성은 바로 이와 같은 결과일 것이다.문인화는 장감의 소주 출신의 심주와 문징명의 출현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문인화는 처음에 특정한 양식을 갖지 않았으나 ‘원말 4대가’의 출현으로 산수화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를 남종화(南宗畵) 또는 남화(南畵)라고 하며, 비로소 문인화 특유의 양식이 정착하였다. 한국의 경우, 조선 전기 강희안(姜希顔) 등의 문기(文氣) 넘치는 문인화가가 있었으나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유행하였던 17세기 이후부터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 등의 남종문인화가 나왔고,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金正喜) 같은 대가가 나오기도 하였다.문인화는 중국과 한국에서 함께 발달하였으나 기본적인 이론이나 화법이 거의 다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과 일본은 그 내용을 단지 전해 받은 것이다. 글자 그대로 문인들이 그린그림이 문인화이기는 하나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그려졌기 때문에 내용상 큰 변화가 있어 왔다. 즉 초기에는 문인들이 文氣를 드려내며 특이한 화법을 보여주었으나 점차 형식화되고 양식화되어 후대에는 하나의 화법이나 화풍이 되어 직업화가나 화원화가들도 쉽게 모방하게끔 되었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文人畵風으로 그렸다 하여 양식적으로 구분해 보기도 한다.서양에서는 이와같은 문인계층이 비상업적인 태도로 오랜기간 그린 경우가 없었으므로 동양의 독특한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에서도 중국과 한국에서 유독 성행하였으며, 일본은 매우 후대에나(18세기) 나타나므로 韓·中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인화는 문기가 표출되어야 하며 나아가 상거래나 생활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는 순수성을 유지하여햐 한다. 주제상으로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동물화, 사군자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특히 문인들의 만남이나 어울림(雄集) 그리고 헤어짐을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베네치아 르네상스1. Giorgioe지오르지오네는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로서 색채와 빛의 화가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신비로우면서 불가해한 그림을 남겼다. 사실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을 알려진 것은 단 다섯 점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베네치아 색채화파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임에 분명하다.{{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에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신비로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 할 만하다. 왼편의 목동과 거의 벗은 상태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 불길한 하늘의 분위기와 멀리 보이는 도시, 그리고 폐허의 흔적은 이 작은 작품을 거의 초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아니라 바로 빛에 의해 투명해진 대기와 영롱한 색채인데 이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2. Tiziano티치아노는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그에 의해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이 수립될 수 있었으며, 그 전통은 루벤스를 이어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 의해 계숭되었다.{1515년{1538년인데 현실에 실존했던 사람을 미의 여신인 비너스로 표현한 이 작품은 훗날 마네의 에도 영감을 준 작품으로 유명하다.{1518년북구의 르네상스1. Albrecht D rer{{뒤러는 렘브란트와 더불어 그의 생애에 여러 차례 자화상을 그린 화가다. 연기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편력 시절의 작품으로서 당초에는 양피지에 그려진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화초가 에린지움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이 작품을 보고 감탄한 시인 괴테이다. 당60년{아들과 부인이 죽는다. 인간의 고통을 담음.{1661년*1642년렘브란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일화가 얽힌 그림이다. 시 경비대원의 분주한 순간을 포착한 이 그림은 강한 명암의 대비, 활기에 찬 움직임으로 바로크적 경향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고전적 경향에로의 전환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작품의 완성을 전후해 작가의 애처 사스키아가 죽었으므로, 1642년은 그에게 불행한 시기였으며, 또 생애의 큰 분기점이 된 해였다. 15명의 대원들은 각자 나름의 의젓한 모습과 군인으로의 상을 기대했다 한다. 그러나 그림은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어떤 사건이 갑작스럽게 발생된 듯한 상황에서 허둥지둥 출동하는 대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군인다운 기풍이나 양상이 무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대원들의 모습은 옆의 대원의 팔로 가려지고 또 어깨로 가려져 불만이 많았다 한다.근엄한 자세와 집단 초상화가 아닌 소란스러운 출동에서 보여지는 대원 각자의 성급한 동작과 표정은 어둠 속의 빛을 통해 야경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점이 바로 렘브란트의 창조성이며, 그의 사실성인 것이다.{1655년그림의 주인공은 렘브란트의 두번째 아내 헨드리케 스토펠이라 한다. 그녀의 헌신과 거기에 따른 그의 애정과 신뢰는 렘브란트의 예술을 더욱 건실하게 해 주었다 한다.그늘진 물가에서 햇빛은 생동하는 여체와 그 여체의 물위에 반사된 모습을 드러내어 조용한 자연 속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1662년-마지막 단체 초상, 중후함과 간결해짐, 일렬로 나열 (단순, 위엄성 표현){1631년자기 모친을 모델로 하여 노인의 모습을 자주 즐겨 그렸다. 그 중에도 성경을 읽는 "어머니의 초상"(1631년 작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소장)이 걸작중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로한 모상(母像)을 통해 "빛에 대한 깊은 관심"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가 노인의 모습을 자주 즐겨 그린 것은, "노인의 얼굴을 그릴 수 있으면 제 구실을 하는 화가"라는 신념 때문이었다.{2. F 잘 표현, 배경색과 주제가 선명한 대조로 부각시킴.1863년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여인들의 모습은 앵그르가 82세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앵그르에 의해 원근이 무시되어 있는 구성에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고의성이 담겨져 있다.공간감을 잘 나타냄. 앵그르가 그렸던 여인들 총 망라. 왼쪽의 수건으 둘러쓴 여인에 처음 시선이 간다.2. Francisco Goya스페인의 낭만적인 사실주의 작가, 상실된 인간성, 환상적인 시각, 관찰. 반항적 느낌, 어느부류에도 소속되지 않는, 영웅을 그리기 보다는 죽어가는...1798-1805년-관능적 미 덜 느끼게, 고전미의 이상화된 나체의 미를 찾아볼 수 없다. 관찰그림이라서 관능미 덜 (당시 서민출신의 계층, 멋과 향락을 즐기는 계층)1798-1805년-흰식이 빛을 받아 다양하게변하는 색-보라색 까지 간다. 스페인 그림에 있어서 대담한 포즈,{{{ 1814-1815년총 앞에서 시민의 겁에 질린 표정과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배경의 암시는 상황이 극적으로 다달았음을 의미. 하얀옷 순교를 당하는 그리스도, 불꺼있는교회 그당시 인간성의상실{{고야의 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쟁의 비유 또는 스페인을 위해 나선 무서운 복수의 화신으로 해석된다. 이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이 혼합되어 있다. 거인은 몽유병자처럼 자기가 불러 일으킨 공포에 둔감한 모습이다. 아비규환의 아수라장 속에서 돌부처처럼 꼼짝않고 서 있는 유일한 동물은 당나귀다. 은 채색미가 뛰어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잿빛이 감도는 분홍색의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구름이다. 고야는 청회색 하늘에다 팔레트 나이프로 두껍게 구름을 표현했다.1819-1823년73세때 청력 상실이라는 중병에 걸린 고야는 마드리드의 교외에 구입한 별장 '귀머거리의 집'에서 은폐된 생활을 했다. 그 동안 그린 그림들은 온통 '검은 그림'뿐이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비극적인 요소를 다양한 각도에서 노출시키며 고야의 진면목을 드러낸다{1819-1823년는 하늘의 지배권을 자식들에게 빼앗기게 될 두려움 정지된 듯한 동작은 모노톤 배경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 듯 마치 성서의 한 장면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화롭고 안정된 구도화 갈색 톤의 자연적인 색채 속에서 부드러운 빨강, 파랑, 노랑의 대비는 고전적인 성화를 연상시킨다. 현대로 와서는 빈곤의 의미가 노동으로 바뀜. 오른쪽의 반 일어난 여인이 왼쪽 원경으로 뻗어나가며, 옆의 이삭줍는 여인에게로 구도가 옮겨간다.{1857년이삭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밭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종이 울리는 가운데 부부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은 단순히 노동에서 오는 기쁨만이 아니라 삶의 진실과 기쁨을 전해주고 있어 쉽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먼 지평선에 황혼이 물들어가고 이 빛은 받은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되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이 작품은 처음 1천 프랑에 국외로 팔려갔으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팔려왔을 때는 그 8백배가 되는 80만 프랑으로 올랐다는 데에서도 이 그림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906년 루브르에 기증되었다. 변하지 않는 인류의 영원한 모습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음악적 감정이 흐르고 있다고 함.3. Edouard Manet{사실주의에서 출발, 인상주의로 옮김.1863년구도면에서 삼각형 피라미드 구도, 비난받아서 유명한 그림이다. 여자의 포즈가 외설적이다. 점차적으로 평면화 되어가는 그림. 색채에 의해 평면화된 회화{1863년이상화, 아름다움이 없다. 평면적 느낌-살색과 어두운 색의 대비{1881-1882년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그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쓴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여자의 거울에 반사된 모습, 향락적 술집 분위기가 거울에 표현. 두 계층의 색 대비{;고 완전한 동일 평면이어서 깊이감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1876년{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하고 초라해 보이 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 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 (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서민의 생활의 고뇌에 찬 모습-화면의 구석에 인물배치, 구도를 통해 감정이입, 여인-무표정, 팔 축 늘어뜨림... 지그재그시점. 남성-팔 한쪽 잘림. 시선 모자-삶의 무게더하는듯신 인상주의1. Georges Seurat점묘법, 색채분할법. 순색으로만 작업. 점으로 입체, 원근, 색표현. 꼼꼼한 표현.쇠라는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 있는 풍경이지만 이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점묘화법을 통해 빛나는 것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1883-1884년다 순색으로만 표현, 왼쪽 상단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육지와 강을 나누고 3/1을 물과 수평선으로 나눔.{1884년-1886년인물들이 다소 단순화, 한가로운 모습{1891년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직선적인 요소는 많이 후퇴하고 대신 원과 나선과 타원 등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전보다 윤곽선도 뚜렷해진 것이 특색이다. 쇠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서커스 메드라노에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까지의 정지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