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정신의식과 뇌의 형이상학적 관계의 제거=> "정신은 자연의 일부이다."존 설은 정신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존 설에 의하면 의식은 존재론적으로 주관적인 상태들이나 작용들에 있으며, 뇌 작용에 의해 유발되고, 뇌 속에서 실현된다.(77)이원론과 유물론은 모두 정신과 육체 및 물질과 의식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범주를 가정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그러한 범주를 없애는 것이다.(78)1. 탄소유기체에서 신경계의 진화탄소유기체 중 일부가 신경계로 진화했고, 그 신경계들이 이른바 '정신(mind)'이다.이들은 인간정신과 동물정신으로 진화하였다.정신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주된 특징이 의식이다.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전형적으로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시작해 낮 동안을 거쳐 다시 잠들 때까지 지속되는 자각상태를 의미한다.혼수상태와 졸도는 의식이 끊어진 상태이다.2. 의식의 세 가지 특징: 내적/ 질적/ 주관적 특징의식적 경험은 다양한 상태를 지님=> 장미향기, 포도주의 맛, 추억, 사색, 걱정 분노, 통증, 기억, 시기, 질투 등.이러한 다양한 의식상태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 즉 내적/ 질적/ 주관적 특징을 지님.1) 내적 특성=> 의식 상태와 의식 과정은 두뇌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내적이다.의식은 두뇌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61)또 의식상태들은 의식적인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62) 즉, 나의 정신상태들은 내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사례=> 스키경주에 대한 경험은 그 밖의 다른 경험과 기억들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의 위상 때문에 의식으로 드러난다.2) 질적 특성=> 의식 상태는 각 의식 상태마다 그것을 느끼는 일정한 방식이 있고 그에 대한 일정한 질적 특성이 있다는 뜻에서 질적이다.3) 주관적 특성=> 의식 상태는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 또는 동물 주체에 의해서 경험된다는 뜻에서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의식 상태는 '1인칭 존재론'이라 일컬을만한 것을 갖음. 즉 의식 상태는 사람이든 유기체든 동물이든 자아든 그것을 지닌 존재의 관점에서만 존재한다. 의식 상태의 주관성의 한 가지 귀결은 나의 의식 상태가 당신이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게는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 나의 통증은 나만이 일인칭적으로 접근 가능하다.3. 잘못된 삼단논증흔히 주관성이 의식의 과학적 해명을 막는다고, 의식을 과학적 탐구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전형적으로 이 논변은 에 입각해 있다.(64)1.과학은 정의상('주관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객관적'이다.2.의식은 정의상('객관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주관적'이다.3.그러므로 은 있을 수 없다.이 논변은 주관적과 객관적이란 말을 애매하게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주관성'개념 및 '주관적/객관적' 구분(64)·인식적 객관성=> 진술이 사람들의 감정, 태도, 편견 등과 독립적으로 참 또는 거짓임이 알려질 수 있으면 객관적이다.·인식적 주관성=> 진술의 참이 관찰자의 태도와 감정 등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면 인식론적으로 그것은 주관적이다.* 2종류의 존재양상(65)객관적 존재양상-> 산과 들주관적 존재양상-> 통증, 따끔거림, 가려움, 생각, 감정 등은 주관에 의해서만 경험 가능하다.위의 논변의 오류는 의식상태가 존재론적으로 주관적 존재양상을 가지므로 인식론적으로 객관적인 과학이 탐구할 수 없다고 여긴 데 있다.그러나 의식이 주관적 존재양상을 갖는다는 사실이 의식에 대한 객관적 과학을 갖는 것을 막지 않는다.사례=> "내 발가락이 아프다." -> 존재론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인식론적으로 주관적이지 않다./과학은 누군가의 삼정, 태도, 편견 등에서 독립적인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인식적으로 객관적이다.(66)4. 기성의 두 입장들간의 충돌: 이원론과 유물론(66-68)물질적 입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의식적인 시스템을 포함할 수 있을까?의식은 물질적인 실재와 구분되는 별도의 다른 신비스런 실재나 현상인가?1)의식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이원론과 유물론①이원론적 입장: 의식을 물질적 또는 물리적 실재와 구분되는 어떤 별도의 신비스런 종류의 현상이라고 여길 경우②유물론적 입장: 의식이 환원 불가능하게 주관적인 것으로서 존재함을 부정하는 경우가) 이원론실체 이원론과 속성 이원론이라는 두 가지 사조로 등장.*실체 이원론: 세상에는 물질적 대상과 비물질적 정신이라는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상이한 종류가 있다고 보는 견해. (17세기 데카르트의 논변이 유명)*속성 이원론: 대상들의 속성에는 형이상학적으로 구분되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견해.물리적 속성-> 사례: 3파운드의 무게가 나간다.정신적 속성-> 사례: 통증이 있다.나) 유물론물리 세계의 물리적 특징들 '외에' 의식과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유물론자들은 '의식'이란 단어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66)다)유물론의 상이한 변종들*행동주의: 정신이 행동 및 행동 성향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함.통증=> 통증을 느끼는 행동*물리주의: 정신상태란 두뇌상태일 뿐이라고 주장함.통증=>신경섬유가 자극 받은 것*기능주의: 정신상태가 인과관계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함.통증=> 입력 자극=모종의 말초신경 자극에 의해 유발/ 출력 행동=모종의 행동과 기능 상태를 유발*강한 인공지능론: 정신이란 두뇌 속에서 작동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따름이며 아마도 두뇌는 다른 종류의 컴퓨터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주장.통증=> 통증에 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작동*이들은 모두 의식을 물리적 또는 물질적인 형태로 환원하고 제거하려고 함.이들은 통증이 내적/ 질적/ 주관적 정신현상임을 부정하고 있다.이들은 통증이 행동/ 컴퓨터 계산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 등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5. 두 입장에 대한 존 설의 비판 및 그의 입장(68-76)이원론이나 어떤 형식의 유물론도 옳지 않다.우리가 '심리적/물리적', '정신/육체', 등의 진부한 어휘로 이런 문제들을 계속 제기하고 또 대답하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문제와 대답을 설정하는데 어떤 근본적인 개념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하나의 경고라 해야 한다.1) 비판① 이원론 비판=> 이원론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의식의 지위와 존재를 완전히 미스터리로 만들어 버린다.(의식과 물리세계간에 어떤 종류의 인과적 상호작용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② 유물론 비판=> 유물론은 의식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결국 당초의 문제를 낳게 한 현상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2) 두 입장들의 특징♥ 이원론=>정신은 환원 불가능하다우리는 분명 '정신'과 '육체'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삶은 물리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래서 이원론은 상식과 부합하듯이 보임)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신의 의식적 경험들(=> 내적 사유/ 통증/ 가려움 시각 등)을 가지며 또 우리를 둘러싼 물질세계(=> 의자/ 책상/ 나무/ 산/ 폭포 등)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안다.육신이 소멸되면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무시무시하게 느껴짐.요컨대 이원론은 우리의 경험들에 대한 가장 명백한 해석과도 부합할 뿐 아니라 뿌리깊은 생존 충동도 충족 시켜줌.그 귀결=> 의식은 물리 세계를 벗어나 붕 떠 있으며/ 우리의 일상적, 생물학적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71)서구인들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도 이원론을 보여주고 있다.♥ 유물론=> 의식은 환원 가능하며/ 의식을 제거할 수 있다.세계는 온통 물리적인 입자들과 또는 물리적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다.유물론 역시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 만일 실재하는 의식적 현상 같은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들이 물질적 입자들의 세계와 어떻게 부응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과학적 세계관과 부합하도록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모든 것이 물질적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그 귀결=>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72) 즉 세계가 전적으로 물질적·물리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유물론자들은 '의식'을 재 정의해서 그 말이 내적, 질적, 주관적 정신상태가 아니라, 내적이지도 질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은 어떤 3인칭 현상을 가리키도록 만들어버림.의식은 신체의 행위나 계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뇌의 상태나 물리적 시스템의 정보처리 과정 또는 기능 상태 등으로 환원되어 버림. (이 점에 있어서 대표적 유물론자는 데네트./ 의식은 뇌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일군의 프로그램이다)3) 존 설(John searle)의 견해이원론과 유물론 모두 잘못된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다.⇒의식은 내적, 주관적, 1인칭적, 질적 현상임을 전제해야한다. 의식에 대한 해명에서 이 점을 빠뜨리면 그것은 의식에 대한 해명이 안 된다.
『체 게바라 평전』제1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Che의 집안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와 바스크(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민족임, 체첸과 더불어 용맹과 저항의 대명사)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와 바스크, 이 유난히 고집 세고 개성 강한 두 핏줄이 그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의 아이에게 흐르고 있었다고 하니, 일단 평범한 삶은 힘들었을 것이다.Che를 알기 위해서는 또 알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천식이다. 1930년 5월, 그러니까 채 24개월이 되지 않았던 어린 Che를 데리고 엄마는 근처 강으로 수영을 하러 간다. 물에서 나온 아이는 심하게 몸을 떨고, 어린 Che는 평생을 따라다닌 병, 천식을 얻게 된다. 사실 나는 천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지 알지 못한다. 책 중간 중간에 천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Che의 끔찍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이제 Che는 부에노아이레스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이제 좀 놀아도 될 것이다. 한국이나 아르헨티나나 의대생이라면 아무래도 노동자의 자식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Che는 부르조아의 자식이다. 그런데 Che는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무려 7개월간에 걸친 장기여행을. 남아메리카 전역을 도는. 그의 나이 24살이다. 그의 여행이 끝났을 때, 그의 식구들은, '뭔가 변했다' 말들 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을까?칠레 구리광산을 방문했을 때였다. 굴뚝에서 내려온 그들이 십자가로 뒤덮이다시피 한 공동묘지 앞을 지나게 되었다."도대체 몇 명이나 묻혀 있죠?" Che는 안내인에게 물었다."글쎄요, 확실치는 않지만 .... 대략 만 명 정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안내인은 대답했다.Che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대략이라구요?""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으니까......""그럼, 그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그러자 사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Che가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알베르토는나오는 이 한 구절도 참 감동적이었다.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으로 상처를 주는 일을 Che는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거짓말이었다.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순진함, 이것이야 말로 모든 혁명가들의 조건인가 보다.제2부 : 일다 가데아와 피델 카스트로1부에서는 Che가 거짓말을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젊은이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았다. 훗날 Che의 아버지는 그를 일컬어 '진실에 대한 광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진실은 하나의 종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듯 싶다.제 2부의 제목은, 일다 가데아와 피델 카스트로이다. 둘 다 사람 이름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다들 알다시피 쿠바혁명의 총책임자이자 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그럼 일다 가데아는? 그녀는 바로 Che의 첫 번째 부인이다. Che는 두 번 결혼을 하는데, 첫 번째는 바로 일다 가데아 이고 두 번째는 쿠바진공의 과정에서 만난 알레이다 이다. 이제 Che가 아메리카 혁명의 전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따라가 보자.스물 다섯의 생일을 이틀 앞둔 날, 1953년 7월 Che는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로써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고, 그는 첫 번째 여행과정 속에서 스스로와 약속했던 새로운 인생을 위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바로 아메리카의 병사가 되기 위한.여행에서 Che는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일다 가데아 이다. 그녀는 페루의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당시 페루의 군부독재를 피해 과테말라에서 망명생활 중이었다. Che는 혁명의 신념과 활력을 겸비한 일다 가데아에게 홀딱 빠지게 되었다. 아름다운 결혼식을, 그렇지만 일다는 경찰에게 체포되고, Che는 도피해야만 했다. 이들은 온갖 천신만고 끝에 1955년 8월 18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딸, 일다 베아트리스는 1956년 2월 15일 태어납니다.Che는 1955년 7월 9일 밤, 피델 카스트로와 처음으로 만난다. 물론 둘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의 억압으접하게 될 것이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지.제3부 : 그란마 호에 탄 여든 두 사람2부의 끝에서, 예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자 맹서하는 Che를 만나보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서론에 불과하다. 혁명가가 단련되어지는 과정은 참으로 가슴 벅찬 과정이지만, 또한 뼈가 부스러지는 고통의 순간들이기도 하다. 1956년 11월 25일, 오전 1시 30분 그란마 호가 쿠바로 출발한다.여든 두 명의 혁명가들, 오렌지 수천 개 등의 터무니없이 모자랄 식량, 쿠바의 독재자들을 몰아낼 무기, 무엇보다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치열한 혁명정신, 이 모든 것들이 그란마 호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하자마자, Che는 돌연 이마를 탁 치게 된다. 바로 천식 약을 빠뜨리고 온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자기 생명을 담보할 천식약을, 그것도 스스로가 의사인 사람이 빠뜨리고 오다니, 그의 불타는 가슴속에 스스로의 안위는 항상 제일 뒷순위였던 Che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쿠바에 상륙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쿠바인민들의 환호성이 아니라, 바티스타 군인들의 총알세례였다. 상륙에 성공한 그들, 이제 12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여기서부터 쿠바 혁명의 신화가 시작된다. 참으로 혁명의 교과서적인 과정을 보게 된다. 원래 혁명의 초기에는,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으리라고 예상하지만, 사실 민중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들은 민중의 시각에서 보자면 국외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오의 인민속으로, 가 빛을 발하게 된다. 이제 제 3부에서 몇몇 구절들의 가운데를 툭 잘라서 읽어 보겠다. Che의 진면목과 혁명의 급박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내가 상자를 안고 뛰는 쪽으로 총알들이 날아왔다. 돌연 가슴과 목 부위에 불에 덴 듯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내 곁에서 아르벤토사가 코와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울부짓고 있는 것 같았다. '놈들이 나를 죽였어!.렇지는 않다. 게릴라 대원 스스로가 학생이고 선생인 움직이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쿠바의 미래를 책임질 혁명가를 양성하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Che의 재미있는 일화가 나오기도 한다. 바로 문맹퇴치를 위해서(쿠바는 시가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담배를 Che가 몽땅 보관하고, 담배요청서를 문서로 제출해야만 담배를 나눠주는 방법이다. 효과가 아주 좋았었다고 한다.하지만, 혁명의 과정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과정이다. Che의 옆에서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혁명을 위해서, 혁명을 반대해서,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웠던 Che. 피델 카스트로는 Che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용맹성을 염려하여 이런 편지를 보내기까지 한다."체, 카밀로나 기예모 가르시아의 지원없이 전투가 자네 편에서 마무리된다 해도 자네의 작전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고 비난하진 않겠네. 우리가 여태껏 목표를 달성하리라는 확신이 없으면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 왔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나 각별히 조심하게. 이건 단호한 명령일세. 자네는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말고 대원들을 지휘하는 것으로만 그치게.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네."Che는 게릴라전을 '압제자에 대항하는 전체 민중의 싸움'으로 정의하고 있다. 2001년 한국에서는 이제 압제자는 사라진 것일까. 물론 아직 자본의 추악한 그림자는 황사와 범벅된 모습으로 음침한 그림자를 흘리고 있지만서도, 그 근간에 대한 대안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 부분은 노코멘트.제4부 : 서쪽으로1958년 8월 21일, 그란마호로 쿠바에 상륙한지 20개월이 지난 시점에 전면적인 대공세가 시작된다. Che가 대장으로 승진한지 11개월이 지난 때이기도 하다. 시에라마에스에서 아바나로 가는 800킬로미터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정규군, 그리고 태풍, 빈약한 지원물자, 그 와중에서도 그들에게는 혁명에의 희망만이 가득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이 당시 Che의 일기 한 토막누가 그 첫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죄없는 자 돌로 쳐라 고 외치는 예수를 연상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를 '전사그리스도'라고 까지 부르는 것일까?Che는 아바나에 입성하게 된다. 그들이 입성할 당시에, 쿠바는 축제의 열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민중들의 광범위한 환호성 속에서 그들이 옳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환영인파에 Che는 카밀로에게 이런 농담을 한다.Che가 카밀로에게 말한다."나는 우리가 이긴 뒤 뭘 해야 될지 알 것 같네.""뭔데?" 카밀로가 되묻는다."나는 자네를 우리에 넣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자네를 보여주겠네. 그럼 큰 돈을 벌 수 있을 걸세!"승리하기까지 숱한 고난의 세월이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식상한 이야기기도 하다. 우리는 전설이나, 야담이나 혹은 위인전을 통해서 그런 인고의 세월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도 하다. 그렇게 되어 잘먹고 잘살았다......., 하지만 이제 Che는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든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게 된다.제5부 : 전쟁은 끝나고 - 1/2제4부에서, 승리를 향한 험난한 여정을 살펴보았다. 과연 Che가 승리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까? 우상화된 모습으로, 아니면 승리에 도취된 살찐 돼지의 모습으로, 5부에서 Che의 모습을 찬찬히 찾아가 보자. 여기서 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과연 카스트로 형제와 Che의 아바나 입성은 공산주의 혁명이었나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혁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카스트로 형제나 Che 스스로가 공산주의자임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의 냄새를 풍기지만, 그들의 이후 모습은 꼭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석연찮은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이즈음에 피델 카스트로의 의중이 드러나는 구절 하나를 볼까? 밑의 글은 피델 카스트로가 쓴 글이다."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했다.
Ⅰ.들어가는 말시조란 시절단가음조 의 준말로서 그 단어의 의미가 곧 시절 따라 짧게 불려지는 소리가락이란 풀이가 되며 이와 더불어 흔히 설명 되어온 시절가조 의 준말 역시 시절 따라 불려지는 노랫가락이란 어의가 되어 고시조는 그 명칭에서부터 현대의 문학장르인 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의미의 시와 노래의 두 가지 뜻이 담긴 명칭임을 짐작 할 수 있게 한다.우리 민족시인 시조 문학은 멀리 민요라는 시가와 더불어 출발 기미를 보이면서 신라때의 10구체 향가 형태에서 그 싹이 돋아나려는 징후를 보여주었다. 뒤이어 발생된 별곡체의 형식구조에서 시조는 그 모습을 나타내었고 이같은 흐름의 역사 위에서 고려 중엽에는 확실한 정형시체로 안정되어져 작품을 담는 용기로서 시 창작자를 만나 고유한 시문학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한글에 의한 기록을 남기게 된 문학이다.시조는 한국인의 심성에 어울리는 최적의 문학 장르라는 점과 모든 시 형식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최장수 형식임을 말하는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견해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조문학의 본질은 한국문학의 바탕이며 가장 세련된 쓸모있는 큰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보고서에서는 시조 9수에 대해 그 내용과 더불어 주제적 측면의 입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Ⅱ.시조9수1)님글인 相思夢이 의 넉시 되야 -박효관-秋夜長 깁푼밤에 님의 房에 드럿다가날 닛고 깁히 든 잠을 깨와 볼까 하노라님을 그리워하는 시적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님을 그리워하여 꾸는 상사몽은 님에 대한 열망이 잠을 자면서까지 식지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뚜라미)의 넋이라도 되어 님의 잠든 방에 가고 싶다는 시적 화자의 표현역시 님에 대한 열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2)冬至人딪 기나긴 밤을 한 허리링 버혀내여 -황진이-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초장 : 홀로 지새우는 긴긴 겨울밤*중장 : 임에 대한 정성*종장 : 임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님이 오지 않는 긴 겨울밤과 님과 함께 하는 짧상화시키면서 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절실히 환기시키는 표현의 솜씨가 돋보인다. 아울러 서리서리, 구비구비 등의 말은 그 대구적 표현의 묘미와 함께 님을 기다리면서 이별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활발한 마음과 의지로 이겨내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풍유적인 삶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특이할 만한 점은 서리서리 너헛다가 , 구비구비 펴리라 와 같은 시간의 시각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황진이의 작품세계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로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청산은 내뜻 이라고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시조{) 기녀시조의 일반적 성격은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당층인 사대 부 시조와 비교된다. 즉 황진이의 시적 정서와 사대부의 시적 정서는 판이하다. 기녀 시조는 이별이 제재라는 점에서 여요와 상통한다. 그러나 여요와 차이가 있다면 여요는 이별의 순간 을 노래하는 반면 기녀시조는 이미 벌어진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다. 기녀시조와 여요와의 시 적 화자의 차이는 의식면에서 님과의 관계를 여요가 수직적 관계로 보고 있는 반면 기녀시조 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발화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즉 여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직접적이고 절박한 발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기녀시조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더불어 스스로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녀시조는 이별 상황, 언술 방식, 태도, 갈등의 해결 등은 여요의 전통을 이으면서 그것을 변 용 시킨 셈이다.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문학계층에 전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평민들이 시조를 향유하려 했으나 일부 전문가객만이 시조를 향유하고 전수한 것은 唱에 기인했다. 즉 사대부-황진이-전문가객은 창을 알았지만 평민들은 창을 몰랐다. 따라서 대다수 평민들은 자신들의 향유물인 잡가등과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를 창조(산문화 양상)하여 그들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시조형식의 일부를 계승하여 사설시조라는 파행적 행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설시조의 등장은 형태와 기능의 동시 변화 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후 현대시조는 가까운 가까운 시기의 사설시조의 전통을 떠나 전대의 정형시조를 계승하였으나 그들이 노래한 것은 시인의 개성 등의 것이었다.3)梨花雨 흣 뿌릴 제 울며 짜고 離別�� 님 -이매창-秋風 落葉에 져도 날 생각난가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화사하던 그 배꽃이 봄날 내리는 비처럼 어지러이 날릴 때 서로 손잡고 못내 이별을 아쉬워했던 임이건만 벌써 계절은 바뀌어 낙엽 지는 가을이 되어도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있다. 기녀이기에 겪어야 했던 인고의 나날도 헛되이 무너지는 듯한 가슴 아픔에 외로운 꿈만 임을 좇을 뿐이다.기생이었던 계량은 깊이 사귀었던 유희경{) 유희경 :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병을 모아서 관군을 도왔음. 광해 10년 (1618) 이이첨이 폐 모의 상소를 올리라하자 거절. 절교 후 은거함. 1623년 인조반정 때 절의로써 표상이 서울로 올라간 뒤 소식이 없으므로 위의 시조를 짓고 수절했다 한다.梨花雨 와 秋風落葉 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대비법이며 시적 화자의 쓸쓸한 심정을 더해주고 있는 듯하다. 종장에서 나오는 꿈 은 그리움의 표상으로 적절히 사용되었으며 천리 는 정감의 깊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또한 이 시조의 특징은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을 적절히 잘 표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4)北天이 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임제-산의는 눈이 오고 들에는 챤 비 온다오늘은 챤 비 마자시니 얼어 잘가 하노라들에는데 이 시조는 주는 노래이다. 임제는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법도를 초탈해서 호방하게 지냈으며, 봉건적 권위에 반항했고, 인간으로서의 주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인생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당대의 유교적 윤리관에서 볼때에는 용납되지 않을 인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안 평사의 소임을 받고 부임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시를 지었다가 유가들에게 수난을 겪었다는 일화도 이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시문을 통하여 그의 낭만성을 보여 주었는데 이 노래도 그 중의 하나다. 특히 이 시조에서는 작자의 풍류남아로서의 멋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5) 閣氏네 더위들 사시오 일은 더위 느즌 더위 여러 힝ㅣ포 -신헌조-묵은 더위 五六月 복더우ㅣ에 情의 님 만나이셔 달 발근平床 우희 츤츤 감겨 누엇다가 무음일 하엿던디 ∼대화체를 통해 두 인물간의 탄력있는 관계를 설정하여 우선 사설시조의 전형성을 살리고 있다. 장사가 각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더위를 주제로 하는 장사꾼의 사설이 한 몫을 든다. 정월 대보름날의 더위팔기의 대상인 「더위」는 누구나 싫어하는 더위이다. 판다는 것은 말 뿐이고 실제로는 사기로 뒤집어 씌우거나 어거지로 떠맡기는 것이 더위다. 그 더위를 누구나 사 볼만한 사랑의 더위로 변모시키는 그 재담이 있어 이 시조는 그 음예스러운 장면에도 불구하고 맑은 듯이 즐거운 것이다.「안는 것 → 휘는 것 → 붙는 것 → 거느리는 것」 으로 표현된 부부간의 애정관계의 층하도 재미있는 재담이지만 전 작품에 담긴 비유법이 모두 적절하면서도 조금은 허풍이나 과장이 있는 재담으로 엮어져 있는 것이다.6) 窓다고져窓다고져이다ㅣ가슴에 窓다ㅣ고져들∼ -작자미상-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막힌 방에 비유하여 창을 내고 싶다고 하는 시이다. 일상적인 사고나 착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의 시조이다.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나 근심에서 오는 답답한 심정을 막힌 방으로 표현하고 창을 달아 답답한 심정을 풀고 싶다고 노래한다. 다소 과장적이지만 상황을 극복해 가려는 적극적인 의지도 보이는 재미있고그리지 않고 해학적인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시적 화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해학미 넘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황진이의 시조 동짓날 기나긴 ∼ 춘풍이불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의 부분과 이 시조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두 시조 모두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상황으로 설정했다는 데 있어 공통점이 발견된다.7)靑山은 엇뎨힝야 萬古에 프르르며 {) ☞황진이의 시조와 비교해 볼 때.황진이의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의 시조에서는 시간의 재단의식이 뚜렷하다. 그리고 동짓달 기나긴밤과 어론님 오신날 밤 이 대비되어 있다. 전자가 부정적이라면 후자는 긍 정적인 시간인데 그 근거는 님이 여기에 같이 있느냐의 여부이다. 화자는 님이 부재한 공간을 비극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시적 상상속에서 찾았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결핍된 공간에 대한 인식이 시간적 결핍성으로 드러난 작품은 산은 옛 산이로되 이다. 이 시조는 초장에서 대구의 형식을 통하여 산,물 의 대립과 변하지 않는것 과 변하는 것의 대립을 표상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이들 가운데 물에 관해 부연함으로써 흐른다 는 면에서 동일한 물과 시간의 속성을 상기시키며 변하는 것에 대한 발화의 초점 을 맞춘다. 이런 변화의 속성을 보이는 이 시조와는 달리 사대부의 시조는 靑山은 엇데 하야 萬古에 프르르며∼∼ 는 불변의 세계를 추구한다. 이는 일관된 사대부 시조의 정서 이며 의식이다.-이황-流水는 엇뎨하야 晝夜에 긋디 아니난고우리도 그치디 마라 萬古常靑호리라*초장 : 청산의 영원성*중장 : 흐르는 물의 영원성*종장 : 신념으로 내면화이 시조는 지은이가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때에 지은 12수 중 제 11수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려는 신념을 담아 읊은 작품이다. 자연을 빌려 유교이념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쓰여진 사대부 계층의 전형적인 작품이지만 정서와 교화의 뜻이 조화되어 감흥있게 표현되어 있다. 시구의 뜻만을 이해하려고 하면 단순한 교화적 성격만이 드러나므로 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살면.
Ⅰ. 들어가는 말희랍철학은 서양철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철학은 현대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가치 또한 크다 하겠다. 플라톤 철학의 위대함은 여러 학자들의 말로부터도 잘 알 수 있다.영국의 철학자 A. N. whitehead 는 그의 저서 『과정과 실제』에서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의 역사이다.」라고 하였으며 역시 영국의 철학자 Emerson 은 「플라톤은 철학이고 철학은 플라톤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밖에도 독일의 철학자 Natorp 는 플라톤 철학을 한 건물의 현관 에 비유하였다. 이처럼 플라톤의 철학은 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 보고서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함과 동시에 그 현대적 의의도 찾아보려 한다.Ⅱ. 플라톤의 생애와 저서플라톤은 기원전 427년 Kadmos 왕의 후예인 아버지 아리스톤(Ariston) 과 명문 출신의 어머니 페릭티오네(periktione) 사이에서 태어났다. 20세가 되던 해에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sokrates)를 만났다. 이후 8년간 그의 지도하에 스승의 사상을 익혔다.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이 플라톤의 삶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그가 신에게 드린 다음과 같은 감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나는 신에게 네 가지 감사를 드린다. 첫째는 야만인이 아니고 희랍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둘째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셋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 끝으로 특히 감사 드리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기원전 399년 그는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아테네를 떠나 메가라·이집트·북아프리카·남이탈리아 등지를 12년간 여행하였다. 그 중 이탈리아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수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시칠리아로 건너가서는 디오니시오스 (Dionysios) Ⅰ세를 만나 그의 정치 이상을 실현해보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왕비의 동생인 디온한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Apologia Sokrates)」,「크리톤 (Kriton)」,「향연 (Symposion)」,「파이돈(Phaidon)」,「정치학 (politeia)」「법률(nomoi)」등이 있다.Ⅲ.플라톤의 사상1. 이데아론플라톤하면 이데아론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이데아의 세계란 감각 세계 의 뒷면에 존재하는 참된 형식이다. 이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영원 불변의 이상형, 즉 자연현상 뒤에 있는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데아론은 경험론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자리에 서서 이후의 철학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데아의 근거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것에 근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태지가 부른 「교실이데아」라는 노래를 생각해보 자. 진정한 교실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서로 신뢰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교감을 할 수 있는 그 런 교실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좋은 교실일 것이다. 그러면 그 좋음 자체는 무엇인 가? 바로 그것이 좋음의 이데아 인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 좋음의 이데아 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국가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 리하자면 이데아들의 세계는 하나이며 영원 불멸하고 심안(noesis) 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이며 사물들의 세계는 여럿이며 생성 소멸하고 육안(aisthesis)으로 보이는 세계라는 것이다.위와같은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철학을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언어에 대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저서인 「국가」에서 나오는 비유에 대해 살펴보자.사람들이 약간 기울어진 지하 동굴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출입구 반대쪽으로 향해 앉아있고 목은 돌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손과 발이 다 묶여있다.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동굴 속 뿐이다. 등 뒤에는 커다란 천 같은 것들로 가려져 있고 그 뒤에는 사람과 같은 존재들이 여러 물체를 들고 돌아 나왔을 때에야 (진리 인식의 오름길) 비로소 행복한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저 아래 지하 동굴에 묶여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실천의 내림길) 다시 동굴에 들어온 그는 동굴 사람들에게 동굴 속에서 보이는 그림자는 결코 실재가 아니며 단지 그림자일 뿐이라고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동료들은 도무지 믿지 않으려 한다.여기서 동굴 밖의 세계는 참된 이데아의 세계. 동굴 안의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는 우리가 속한 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철학자에 해당될 것이다.이것이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동굴의 비유(The simile of the cave) 이다. 그리고 위에서 약간 언급되었던 태양과 관련한 '태양의 비유(The simile of the sun)'도 있다. 윤리적인 것(용기. 경건. 올바름), 미적인 것(아름다움), 수학적인 것(사각형. 선분. 점. 둥금) 에도 이데아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최상의 이데아가 있는데 이것을 플라톤은 바로 태양에 비유했던 것이다. 이 최상의 이데아가 바로 '좋음의 이데아'인 것이다. 또 '선분의 비유(The simile of the divided line)'가 있는데 수직으로 세워진 선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A AⅠ B B C Ⅰ : Ta noeta : 지성에 의해 포착되는 세계 (noesis){{{Ⅱ : Ta aistheta (horata): 감각적 지각에 의해 포착C D {되는 세계 (aisthesis){Ⅱ D{epistime A : 이데아들 ----------- 지성에 의한 앎 (noesis)B : 수학적인 것들 ------- 추론적 사고 (dianoia)doxa C : 동식물들. 인공물들 ----믿음. 확신 (pistis)D : 영상. 모상. 그림자 -----상상. 짐작 (ekiasia)↓ ↓대상 인식기능위의 선분의 비유는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성격과도 깊은 연관이생득적) 앎이 있지만 이 망각의 물을 마심으로써 망각하게 되고 다시 선천적 앎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상기설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대화편,Menon」에 나와있는 일화가 잘 나타내주고 있다.한 노예 소년에게 넓이가 1인 정사각형을 그리고 이 두 배 면적의 정사각형을 그려 보라고 하면서 결국 노예 소년에게서 넓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 (루트 2) 의 제곱이 두배 넓이가 된다는 것과 원래는 알고 있던 루트 2에 대해 상기시키게 한다는 것이다.이런 플라톤의 상기설에 대해 대륙의 합리론은 긍정적이지만 영국의 경험론의 입장은 이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3. 이상 국가론한 인간의 육체는 머리·가슴·배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머리는 이성. 가슴은 기개. 배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성은 지혜를 추구하고 기개는 용기를 추구하며 욕망은 절제에 의해서 억제된다. 이렇듯 한 인간이 올바른 육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머리, 가슴, 배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 이런 혼의 3분설을 기초로 하여 그의 국가론도 형성된다. 국가에 있어서도 세 계층인 통치자의 지혜(sophia), 수호자의 용기(andreia), 생산자의 절제(sophrosyne)가 서로 잘 조화되어야만이 올바른(dikaiosyne) 국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국가 철학이다.또한 그는 하나의 나라 (miapolis)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 바깥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인식하고 분열이 없는 나라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zero-sum-game (경쟁의 원리)보다는 non-zero-sum-game (연대의 원리)이 작용하는 나라가 플라톤이 바라는 이상 국가상이다. 그 예로 그가 저술한「국가」에서 가장 많이 가진자는 가장 없는 자의 4배가 넘어서는 안된다 는 내용에서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피치노(Ficino)는 1495년 이런 플라톤의 나라를 세우려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주목해 볼 만한 점은 동양의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와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가 말한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17∼18세 까지는 체육 교육과 시가(詩歌) 교육을 받으며 17,8세∼20세까지는 체육교육과 연관된 군사 교육을 받아야 한다.그리고 20세∼35세에는 예비교육이라 하여 수론·평면기하학·입체기하학·화성학·천문학 등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아야 만이 육안 (asthesis)에 의존하지 않은 심안 (noesis)으로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혼의 정화 (katharsis). 즉, 인식 주관의 순수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35∼50세에는 변증술(dialektike)을 통해 좋음의 이데아 를 인식하게 되며 50∼65세에야 비로소 실천을 행하며 실무에 종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실천을 행하는 50∼65세의 나이는 공자가 말한 50세를 일컫는 지천명(知天命)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플라톤은 이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고 실천을 행할 수 있는 인간상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Ⅳ. 시칠리아 방문소크라테스 사후 메가라에 머물며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던 플라톤이 철학자로의 길을 완전히 굳히는 과정에 있어 시작된 시칠리아 방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의 국가관. 즉 철인 통치의 이상을 실현해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DionysiosⅠ세의 통치 아래 놓여있는 시칠리아로 건너간 플라톤은 DionysiosⅠ세의 처남이자 실권자인 Dion 이라는 자와 깊은 교분을 맺게 되고 DionysiosⅠ세의 아들을 철인 통치자로 교육하려 했으나 왕과의 불화로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첫번째 방문)그 후 철인치자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Dion 의 제안. 즉 Dionysios Ⅱ세를 철인 통치자로 교육시키려는 데 있어서 플라톤의 자문을 구함으로서 플라톤은 60세의 나이로 시칠리아로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DionysiosⅡ세의 태만과 반 디온파의 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다.
보고서『문학과 사회』◈학번:9629002◈학과:독어독문학과◈이름:전경수◈담당교수:김용대 교수님♣오월정신을 기리며...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세대 대부분은 1980년 5월 광주의 아픈 기억을 잊은채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올해로 벌써 20주년을 맞는 5·18 민주화 항쟁은 어느덧 우리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리 세대가 그런 것은 5·18 항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나 소위 말하는 386세대들은 우리 세대 보다는 훨씬 더 80년의 광주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직접 몸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5·18 항쟁이 지난 20년동안 많은것들이 변했다. 아니, 최소한 변한것처럼 보인다. 광주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씌어졌던 '폭도'라는 누명도 벗겨지고 '광주사태'라는 명칭도 '광주 민주화 운동' 또는 '광주 민중항쟁'으로 바뀌었으며 망월동 묘역에는 추모탑이 세워졌으며 얼마전에는 국립묘지로 승격시킨다는 대통령의 약속도 있었다.그리고 5·18은 제주4·3사태, 부마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복권되지 않은 사건들에 밝은 빛을 비추고 이를 통해 인권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80년 이곳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를 갈망하던 수십만 시민들의 투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만할까? 의식없는 사람이라면 역사의 한순간 잠깐 있었던 민주투쟁 정도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가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또한 초석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한편에서는 이젠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정리할때가 되었고 이젠 그만 화해하고 용서하자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이 다 마무리 된것일까? 5·18의 진상은 아직도 선명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며 5·18의 주범들은 진정한 참회와 반성없이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화해와 용서를 들먹이고 있는 목소리는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직도 국민 상당수의 마음속에 5·18은 마치 특정 지역만의 사건인것처럼 무관심과 편견이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라는 지역의 굴레를 넘어 전국민이 오월 정신을 가슴으로 끌어안아야만이 진정한 온 국민의 5·18이 될 것이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반드시 가해자들의 뼈저린 참회가 행해져야만 가능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와 국민 각자가 겸허하게 반성을 하면서 5·18 피해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우리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일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스스로는 또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것이 있다. 학살의 두 주범이 대통령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광주시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긴 세월 동안 한꺼번에 '폭도'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주위의 오해와 편견을 참아내며 지내야 했던 그들의 모욕감과 배신감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느낄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