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를 읽고학과 :학번 :이름 :수업 :교수 :중·고등학교 국어시간 때 시를 배운 기억이 난다. 몇 줄 되지 않는 시지만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유인물이나 참고서에서 시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해야 할까? 여러 학자들이 시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자세해서 시인은 과연 이런 생각들을 다 염두에 두고 시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자신의 시를 분석한 글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어이없음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놀라움과 함께 섬뜩함을 느낄 때도 있다고 한다.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작품을 읽고 난 후 그 애매성 때문에 작가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기 힘들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인데다 내용 또한 모호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이들이 고도 가 무엇인지 나름대로의 해석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베케트가 다시 살아나 여태까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찾아 읽으면 위의 시인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지금 내가 하려는 것도 그런 수많은 해석에 하나를 덧붙이는 일이라 고인이 볼 때는 쓸데없고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글을 쓸 당시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케트 자신조차도 고도의 의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고 이 작품이 이미 우리시대의 고전이 됐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분석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위안을 갖고 시작하려고 한다.작품에서 두 주인공은 고도를 기다린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수동적인 일은 아니다. 이는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를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림의 핵심을 인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기다림은 단순한 부작위가 아니라 인내를 갖고 행하는 적극적인 작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보통 사람들의 꿈·희망·목표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두 주인공의 기다림은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며 매일 복권을 사는 사람의 기다림에 비유할 수도 있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버스 기사 분의 기다림에 비교할 수도 있는 것이다.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고도가 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구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영속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즉 고도가 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영구적으로 해결되리라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나에게도 있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너무나 컸기에 삶의 매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을 찾기보다 목표가 성취되어야 비로소 영원한 만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해결된 문제보다 새로 생겨난 고민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저자는 결과에만 집착하고 순간순간 과정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반전이 있는 영화들을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감독이 만든 장치에 끌려 다니면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완전히 속았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의심을 가지고 봐도 속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 이유는 머리 속에 어떤 전제를 세워놓고 영화를 보게 감독이 의도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연극에서 연출될 것을 전제로 쓰여진 희곡이다. 관객들은 두 주인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도가 정말로 나타나나 혹은 고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관심을 두 주인공의 외부에 돌리게 된다. 하지만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진정한 고도는 마음의 변화라고 본다. 즉, 고도란 외부에서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의 잔잔한 파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관심을 내면에 집중하고 나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 하에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매 순간 순간을 삶의 소중한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고도가 우리에게 주는 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다리는 행동을 한다. 따라서 주된 것은 목표이고, 기다림은 단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부차적인 행동에 그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즉,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인생의 긴 관점에서 보자면 기다림이 주가 되고 목표는 단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다림을 하나의 적극적인 작위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마치 숙명적으로 무거운 돌을 반복해서 산정으로 굴려 올려야 했던 시지프스의 운명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어떤 존재든지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인간 또한 이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한다.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영속성을 가지는 그 무언가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원과 그로 인한 영원히 행복한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물론 믿지도 않거니와 만약 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영원한 삶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있진 않다. 영원히 살 수 있으면 매사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순간뿐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소중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존재에 관한 개념 자체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영속성을 갖지 못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아름답고 멋지게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영속성을 갖는 일은 상상하기 싫은 끔직한 일일 수 있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수 없고 계속 존재를 강요받아야 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기쁨은 때로는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야 그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 고통도 따분함도 없는 세상에서의 기쁨은 기쁨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세상은 없고 사는 동안 자신에게만 그런 구원이 내려질리 만무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세상은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벅차고 힘든 일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그 구원에 대한 기다림인 것이다. 고도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인간은 결코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고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이렇게 보면 기다리는 것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다림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년은 한 막에 한번씩 등장하여 고도의 전갈을 알린다. 이 소년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두 주인공에게 이 소년은 무한한 기다림 속에서의 하나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두 주인공은 이 소년을 통해서 고도를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데, 기다림 자체를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 본다면 이 소년을 고도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단절에 관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서로 단절되어있다. 2막에서 포조는 장님이 되고 럭키는 귀머거리가 된다. 포조가 아무리 말을 해도 럭키는 들을 수 없고, 럭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포조는 보지 못한다. 두 주인공도 서로에게 마늘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외롭고 기다림에 지칠 때 서로 기대지 않는다. 또 소년은 블라드미르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분명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 역시 단절을 나타낸다.이 희곡의 등장인물들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같이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서로를 위한다거나 아끼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책을 읽고 리포트를 준비하면서 가장 나중에 깨달은 점이 주위의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들이 어떤 막연한 희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존재에 대해 확신도 하지 못하는 것에 모든 집중이 팔린 나머지 주위의 소중한 관계를 잊고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세는 대세이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를 읽고-소속 :학번 :이름 :수업 :담당 :에너지 자원으로서 석유는 가장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고, 효율성 또한 높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그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않고는 편리하고 윤택할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자원이 엄청난 속도로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0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갈될 것이 확실하며, 그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많은 나라들은 성장을 멈출 것이다.이라크 전을 보면서 미국의 대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세계적 반전 여론을 무릅쓰고 UN까지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결국 이라크를 침공했다. 수백·수천 명의 목숨은 석유보다 무가치했다. 심지어 멀쩡한 나라를 초토화시키고는 이라크 재건이라는 명분 하에 자국의 기업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반전 여론을 주도하던 프랑스와 독일은 마치 먹이 감을 잡은 사자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어떻게든지 이라크 재건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그 하이에나중의 한 마리임은 부인할 수 없다.이상주의란 말 그대로 이상에 불과하다. 세계는 냉혹한 현실주의가 지배한다.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그 어떤 나라가 관심이나 가졌을까? 그냥 아프리카의 빈곤한 한 국가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핵이 자국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은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북한 핵을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는 동기를 준다. 그리고 북한은 이를 최대한 이용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북한은 냉혹한 현실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이 책은 촘스키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대내·외 경제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다. 이 이념의 구체적 강령은 국가의 개입을 없애고 경제를 시장의 기능에 맞기며, 국제적으로는 자본과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국경을 없애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통해서만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고 결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허구이며 결국 소수특권층을 위한 이익만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며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이르다고 이야기한다.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를 다시 돌리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운동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희망은 희망일 뿐이고 대세는 대세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 내 생각은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 왜 신자유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지 생각해보자.먼저 신자유주의에서 부자와 빈자의 싸움은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다. 이 전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냉혹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기업가에게는 자존심 혹은 기분상의 문제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비정규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아가며 일하고 있었다. 한 30대 초반의 남성은 한 달간 일해도 100만원도 안나오는 현실에 가정을 꾸미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의 1년 반 동안의 투쟁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끝이 나버렸고, 그들이 만든 단체는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 해체되고 말았다. 회사로서는 이런 정책이 법으로 보호되고 있고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쓰면 됐기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또 다른 예로 NAFTA가 실행되면서 많은 기업이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공장이전으로 대응했다. 노동자들은 이런 조치에 어떤 대응책을 마련할 수조차 없었다. 신자유주의는 기업가들에게 조커를 줌으로써 노동자들이 이길 방법을 원천 봉쇄해버린 것이다.다음으로 대중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지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운동을 더욱 힘들게 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대중을 시민에서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접하게 되는 소비자로서의 역할이지 시민의 역할이 아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마찬가지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게 하는 것, 소비야말로 국민이 국가에게 원하는 1순위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대중의 속성에 신자유주의는 너무나 잘 부합한다. 시간이 지나고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삶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할 때에야 행동을 해야 함을 느낄 뿐이다. 이에 반해 기업과 가진 자들은 언론을 통해 미리 여론을 조작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로비를 한다. 즉 미리 준비를 함으로써 대중보다 항상 한발 앞서나간다. 양심적 지식인들의 진심 어린 충고는 미리 언론을 통해 차단된다. 혹 전달이 되더라도 직접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시민의 의무에 관한 충고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또한 국제적 연대가능성 그리고 NGO의 활동 역시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성공한 사례로 다자간 무역협정이 성사되지 않은 사건을 예를 든다. 비밀리에 추진한 미국 정부의 정책은 결국 정보의 유출과 인터넷의 위력으로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 그 후 MAI의 부정적인 측면, 즉 너무나 명백하게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힘없는 자를 더욱 힘없게 만드는 내용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MAI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만약에 어떤 A라는 외환위기를 겪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엄청난 자금 압박으로 다른 나라 혹은 IMF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자금을 지원 받아야 되는 상황이다. 이 때 여러 강대국은 시장을 개방하는 조건, 즉 신자유주의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전제로 자금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 국민들의 신자유주의정책을 반대하는 열렬한 지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NO이다. 앞의 다자간 무역협정의 경우는 선진국 내에서 기업과 노동자의 이익이 극명하게 대립된 경우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선진국 내의 노동자와의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기업들에게만 유리한 정책이다. 자국의 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이라는 정보는 그 국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준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명확하게 자국의 이익을 대변할 때는 국제적 연대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이라크전의 예를 들어보자. 물론 미국 내에서 엄청난 반전운동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은 이 전쟁이 명분 없음을 알면서도 지지를 멈추지 않았다. 즉 국민들 개개인에게 특별한 불이익이 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는 일에는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나의 진정한 관심은 한국 내에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이 책은 주로 미국정부를 겨냥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얼마나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임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런 촘스키의 견해를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촘스키의 의견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견해는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거부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외국 자본이 없이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 경제의 취약함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기보다는 최대한 이를 우리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한다.먼저 한국과 미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미국의 선거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게임이다. 그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각 정당은 많은 돈을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그 결과 집권당은 자신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준 기업 위주로 정책을 바꿔나간다. 미국은 그야말로 첨예한 이익집단들의 투쟁의 장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언론과 발맞추어 여론을 조작하고 결국 가진 자들의 이익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앞서 미국의 기업은 대부분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적 다국적기업이다. 아무리 다국적 기업이라고 해도 그 기반은 미국이라는 자국이고 그들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익과 발을 맞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많은 기업들은 우리의 기업들이 아닌 외국의 기업이다. 그것이 설령 국내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대기업들의 지분이 대부분 외국인 소유라는 점을 볼 때 순수한 우리의 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상황이다. 지금 노무현정부에서 기업이 활동하기 좋은 경제 환경을 만들겠다고 하며 친 기업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미국에서와 같이 기업의 후원 자금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국가 경제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국 기업과 외국 자본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취하는 대응책이다. 노동 시장의 유연성 등 여러 당근을 제시하면서까지 외국 자본을 붙들어야 하는 절박함은 미국의 배부른 상황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이름 :학번 :수업 :담당 :이 영화는 한 학생이 일류 학교에 입학한 이후 겪는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갈등이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됨을 보인다. 제목만 보면 갈등의 중심이 학교 규율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인종에 대한 차별 또한 갈등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갈등 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이 영화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주인공 데이빗 그린은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뛰어난 풋볼 선수인 데이빗은 성공을 위해, 유명 고등학교로 스카웃되는 것에 찬성한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가난에서 출세로 옮겨지는 주인공을 나타내고, 온통 초록빛인 대학 캠퍼스 묘사는 주인공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푼 마음을 잘 표현해준다.기숙사에 짐을 푼 후 친구들과의 대화가 이뤄지는데, 여기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친구들은 유태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주인공 데이빗은 자기가 유태인임을 친구들이 알아차리면 그들과 어울릴 수 없게 됨을 직감한다. 감독은 데이빗이 그의 정체성의 상징인 유태인 목걸이를 빼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는 주인공의 인종에 대한 갈등구조를 미연에 방지하려 하는 소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학교의 규율대 학생들의 반발이라는 갈등구조에 자신을 집어넣음으로써 친구들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한다.그러나 인종에 대한 갈등 구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팀 경기 때문에 중요한 의식을 포기하는 데이빗은 결국 밤에 혼자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교장이 나타나 유태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데이빗도 그 말을 받아치고 밖으로 나간다. 이 장면은 미국인대 유태인이라는 갈등 구조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무도회장에서 주인공은 샐리라는 아이를 만나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친구 찰리의 여자친구인 샐리지만 그녀 또한 데이빗에게 곧 호감을 갖게 되고, 여기부터 사랑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갈등구조는 더욱 복잡해진다.한편 불어 선생님의 강한 규율에 견디지 못한 맥이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는 학교 규율 이상의 갈등 구조를 내포한다. 겉으로 보면 선생의 지나친 요구가 맥을 자살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맥이 진정 견디지 못했던 것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감이었다. 그 부담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속에서 맥은 주저앉고 만다.이런 내적 갈등은 찰리에게도 나타난다. 찰리의 형은 최우수 선수로 뽑히는 등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지만 찰리는 그러지 못한다. 이 부담감은 찰리의 내부에서 양심대 욕망이라는 갈등구조로 발전하고 결국 찰리는 욕망쪽을 택하게 된다. 찰리는 양심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닝을 하게 되고, 교수는 학생 중 한 명이 커닝을 했음을 알아차리고 이 문제를 학생들 스스로 풀 수 있게 기회를 준다. 커닝한 사실을 데이빗에게 걸린 찰리는 데이빗이 유태인임을 부각시키며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모든 갈등 구조 중에서 인종 갈등 구조가 정면에 서자 친구들의 판단력은 흐려진다. 왕따가 되어버린 데이빗을 누구도 옹호해 주지 않고, 사랑했던 샐리조차 그를 떠나고 만다. 결국 친구들은 커닝 사건의 범인을 데이빗이라 단정한다.
학번 :이름 :강좌 :담당 :Ⅰ. 서론축구를 보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세상을 살다보면 서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듯이 축구에도 하나의 목표를 위해 믿음과 신뢰 속에 서로 힘을 합치는 동료들이 있다. 영원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은 축구에서는 90분이라는 시간으로 나타난다. 때에 따라 90분이 될 수도 있고 100분이 될 수도 있지만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는 점도 축구와 인생의 닮은 점이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 있듯이 축구에서도 공을 손으로 만지는 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다. 때때로 법률을 어겨서 징역을 살거나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생기듯이 축구 경기에도 도를 넘어선 행동을 하는 선수는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받게 된다. 축구에서 90분 동안 혈투를 벌인 두 팀이 경기 후 사이좋게 옷을 바꿔 입으며 우정을 다지는 모습은 인생이 비록 처절한 경쟁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튼 축구와 우리의 인생은 닮은 점이 참 많다.정명론에 대해 어떤 주제로 리포트를 쓸까 고민하던 중 축구와 연관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론이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다면 축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의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히딩크 감독의 방식이 정명론과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 주제를 '히딩크의 정명론'으로 잡았다. 공자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각 계층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명실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정명이라고 한다면,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개혁하기 위해서 선수들의 역할을 재고하는 것 또한 정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억지 논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도 많았지만, 정명론이 옛 성현들이 말했던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과 많이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 이 주제를 고수하기로 했다. 현실감을 살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 순수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를 쓴 점에 대해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정명론은 공자가 주장한 것을 기초로 함도 미리 밝힌다.Ⅱ. 히딩크의 정명론⑴ 정명론먼저 정명론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공자는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명의 확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의미는 우리가 실제 사물에 붙이는 이름과 그 내실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하려면 무엇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가를 물으니 공자는 반드시 정명하여야 한다고 답하였다. 또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은 아들 노릇을 해 내어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이름마다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그 사물의 본질이므로 사물들은 마땅히 그러한 이상적 본질들과 일치하여야 한다. 통치자의 본질은 통치자가 이상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도인 것이고 이러한 왕도에 부합하는 정치를 할 때 참으로 명실상부한 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명사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통치자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모든 역할들을 각각의 이름에 부합하게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⑵ 최종 엔트리정명은 간단히 '사회질서를 단정히 함으로 각 계층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게 하여 명실에 부합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정명이라는 사상 속에는 계층이라는 전제가 필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공자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공자가 계급의 세습을 옹호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는 혁명가였다. 공자의 사상이 기존 질서에 권위를 부여한다고 믿는 생각들은 공자 사후에 생긴 현상으로 공자 교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를 뽑을 때 가난하다거나 미천한 출생이라고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멍청이를 가르치는 것은 거절한다고 스스로 말했고, 또 지적인 개발에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만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군자라는 이름에 부합되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정부의 운영과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유무를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누구나 가져야 하며, 그런 능력이 입증된다면 누구에게나 그 참여가 허락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회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었다.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가야하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인재를 뽑는다는 기준은 히딩크 감독의 신념이다. 그는 감독에 부임하면서 기존의 유명한 선수들만 살핀 것이 아니라 여러 무명 선수들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1기부터 11기까지 1년 6개월 동안 여러 선수들을 테스트함으로써 팀 내 경쟁을 유도했고, 그 결과는 최종 엔트리에 객관적으로 반영됐다. 그 과정에서 홍명보·김병지 같은 걸출한 스타들도 대표팀에서 제외될 위기를 맞기도 했고, 실제 이동국과 김용대는 스타 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송종국과 김남일 같은 무명 선수들이 뛰어난 실력 향상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공자의 정명 사상에는 계층이라는 전제가 있는데 그 계층은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히딩크 감독의 선수 선발 기준과 일맥상통한다.⑶ 멀티 플레이어히딩크 감독은 어떤 선수를 선호할까? 답은 멀티 플레이어, 즉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를 선호한다. 히딩크 감독 부임 후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되는 송종국과 뛰어난 수비능력으로 중원과 전방을 오가며 성장을 거듭한 끝에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킨 박지성, 그리고 멀티플레이어의 원조인 유상철 모두 히딩크가 아끼는 선수들이다.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든 23명의 태극전사들은 힘과 패기, 스피드를 골고루 갖춘 동시에 퇴장이나 부상 등에 대비하고 상대 전술에 따라 다양하게 대응하기 위해 2개 이상의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대거 발탁된 것이 특징이다. 홍명보와 최진철·김태영·이민성 등 일부 수비 전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다른 포지션의 동료가 결장해도 얼마든지 투입돼 응급처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포지션에 능하다.어떻게 보면 히딩크의 멀티 플레이어 선수 선호는 공자의 정명사상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정명의 핵심은 각 계층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게 하는 것인데, 멀티 플레이어 개념은 그것과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멀티 플레이어는 정명사상과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축구에서 11명의 선수들 사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노란 띠를 팔에 두른 주장이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더 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11명의 선수들은 모두 평등하다. 즉 공격수라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수비수라고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선수라는 동일한 위치에서 경기를 이기기 위한 유기적인 협력을 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야 한다. 즉 공격수라고 상대편이 공격을 나올 때 멍하니 자리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격수도 수비에 가담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 히딩크 감독의 생각이다. 공격수가 조금 힘들더라도 수비에 가담해 상대편이 가지고 있는 볼을 빼앗는 데 일조 할 수 있어야 공격수도 자기의 몫을 다 하는 것이다. 수비수도 마찬가지다. 공격을 할 때 공격수들과 발을 맞춰 함께 전진을 하거나 날카로운 패스를 해줄 수 있어야 공격수들이 더 쉽게 공격을 할 수 있다. 때로는 수비수들도 슈팅을 날려 골을 넣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팀 전력이 향상되었을 때 수비수들도 자신의 몫을 다 하는 것이다.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는 명목에 불과하다. 모두 다 대한민국의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고 승리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 한국 축구 국가대표라는 명실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다.맞벌이 부부가 있는 가정에서 남편이 가사 일이나 아이를 돌보는 일이 남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모두 배우자에게 넘기는 모습은 정명사상을 잘못된 관점에서 해석한 일이다. 가사 일과 아이를 돌보는 일은 부부의 공동 책임이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히딩크가 원하는 선수는 극단적으로 공격수다운 공격수나 수비수다운 수비수가 아니다. 그는 공격과 수비 능력을 고루 갖춘 선수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멀티플레이어야 말로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명사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라고 생각한다.⑷세트 플레이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을 대비해서 정교한 세트 플레이를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비밀 훈련을 했다.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을 상대로 이기는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세트 플레이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 나라 모두 객관적인 전력 상 한국 대표팀보다 강한 팀이기 때문에 보통의 공격으로는 골을 넣기가 힘들다. 따라서 코너킥과 프리킥 같은 기회가 왔을 때 상대방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세트 플레이로 골을 성공시키는 것이 한국팀의 큰 과제다.
[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학번 :소속 :이름 :수업 :담당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우리는 여태까지 증오의 대상인 병을 고치는 데만 신경을 썼지 막상 우리가 왜 병에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이 소개하는 다윈 의학은 병을 인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즉 병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수긍이 가면서도 이 내용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많았다. 근거 없이 너무 추론에만 의존해 설명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치 점쟁이를 찾아온 손님에게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를 점쟁이 나름대로 설명해 주는 식으로 말이다.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썼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생물학자이신 최재천 교수님께서 번역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큰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에 비판을 한다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큰 권위에도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진화론이 기정 사실화되고 다윈 의학이 세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해서 그 권위에 복종하는 일은 어리석고 수동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갈릴레오가 그 시대의 가장 큰 권위인 천동설에 대항해서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큰 인정을 받던 학설들이 지금 와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는 모습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쓰는 내용이 비록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꿋꿋하게 써 내려갈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를 진리에 더욱 가깝게 해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먼저 저자는 진화라는 것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에 따른 서툰 만지작거림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신체의 설계가 아주 정교하지만 동시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설픈 이유라고 밝힌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진화란 점진적 과정, 즉 큰 도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이득이 되는 작은 변화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선택의 대부분은 어떤 큰 변혁을 일으키기보다 주로 진화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한다.이런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진화론의 기반 자체를 허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에서는 원생동물과 같은 단순한 존재가 엄청난 시간동안 진화를 거듭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즉 급진적인 진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다윈 의학은 진화란 큰 도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이득이 되는 작은 변화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오히려 창조론에 가깝다. 창조론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 인간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지금의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여러 환경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형질은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그 구조 자체는 근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다윈 의학의 위와 같은 주장은 진화론을 전제로 하는 다윈 의학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발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흔히 통증이나 공포를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어떻게든 치료를 통해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윈 의학에서는 이런 통증이나 공포가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그것들은 문제점 자체가 아니라 문제점에 대한 방어 반응이라는 주장이다. 모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모기에 물리면 가려움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 가려움을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가려움이 없어 물어뜯는 일이 발각되지 않았을 때 모기가 얼마나 성공적일지 상상해 본다면, 모기에 물린 상처의 가려움은 단지 곤충의 간악함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30세를 못 넘기고 죽는다고 한다. 위험한 것에 대한 공포가 없고 고통이 없다면 우리들은 심각한 장애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통과 공포는 유용하다는 것이 다윈 의학의 주장이다.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우리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이나 수렵 채취 활동을 했고 농경을 시작한 기간은 불과 몇 만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몸은 수렵 채취 활동을 하던 시기에 맞게 적응되어 있다. 진화 의학에서는 우리의 몸이 최근의 생활 양식인 기름기가 많은 음식물, 자동차나 마약, 또는 인공조명, 중앙난방 등과 같은 것들에 적응되도록 설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여러 병을 발생시킨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읽는 법을 배우는 일과 교실에 갇혀 있는 일로 시력이 손상되면서 발생하는 근시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과학이 발달하면서 태아를 감별하는 일이 가능해지자 남자아이를 선호하는 문화 때문에 남초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고, 일부 국가에서는 이 현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이 현상에 대해 과도하게 많아진 남성들간의 경쟁이 날로 심화될 것이며, 상대적으로 희귀해진 여성들은 빠른 속도로 사회적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인류의 남초 현상에 대한 작가의 견해는 문제를 너무 단순화 시켜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비 조작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많아지고 여성의 수가 적어진다고 해서 여성이 빠른 속도로 사회적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인간의 문화와 권력구조를 헤아리지 못한 단견이라고 생각된다. 여성의 수가 적어지면 이미 권력을 손에 쥔 남성들이 여성을 소유물로 인식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또한 결혼을 하지 못한 남성들이 많아지면서 성욕을 제대로 분출할 곳을 찾는 남성들의 수요는 더욱 더 커질 것이고, 이는 인신매매, 강간, 매춘의 확대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남초 현상이 여성에게 반드시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저자는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개체에게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선택되는 이유를, 그 유전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암을 발생시키는 유전자도 우리에게 뭔가 주는 이익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다는 뜻이다.이 의견에 대해 일부 유전자에 대해서는 맞는 가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 주장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옳다면 세계의 수많은 생명공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유전자 치료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왜냐하면 병을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를 사전에 제거하는 치료를 받은 사람은, 오히려 이익을 줄 수 있는 유전자를 버리는 손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에 비해 적다. 만약 그 유전자가 종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유전자라면 왜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늙어서 병을 생기게 하는 유전자도 많이 있지만, 어린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생기게 하는 유전자도 많이 있다. 이런 유전자에 대해서는 종의 이익을 위해 선택된다는 가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는 자손을 낳기 전에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에 이득을 주기 때문에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선택된다는 주장은 일반화할 수 없는 가설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저자는 자연선택이 개체보다는 종에게, 종보다는 유전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예로 개체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전파하는 무법자 유전자를 든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개체에 이득을 주는 유전자는 정말 없는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어떤 주장을 내세울 때 그 주장에 일치되는 근거를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근거를 찾는 과정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가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내 생각으로는 종보다 개체에 이득을 주는 유전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여러 가지 이유로 여성들이 임신하는 것을 꺼리고 있고, 이로 인해 피임약의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여성들의 몸이 소수의 아이를 갖는데 적당한 구조로 바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많은 후손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과 유전자에게는 불리하지만 좀 더 부담이 줄어든 여성들, 즉 개체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