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서방세계의 갈등의 역사와 이슬람 부흥운동목차1.머리말2.이슬람이란?3.이슬람과 서방세계와의 갈등4.이슬람부흥운동5.맺음말1.머리말"이슬람"하면 함께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테러, 광신도, 무슬림형제단... 오늘도 헐리웃의 영화들은 테러와 잔인한 폭력을 일삼는 모슬렘들을 대량 생산해내고 매일 접하다시피 하는 서방의 매스컴들은 그들 모슬렘들의 비인간적인 테러장면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비춰준다. 이러한 광신적인 이슬람 교도라는 서구의 이미지에는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오해의 층이 겹겹이 싸여 있다. 여기에 맞서 서구인이 갖는 편협한 이미지와 욕심에 대해 이슬람 교도들은 무차별적인 테러나 석유와 같은 무기로 대항해 온 것이 사실이다.오늘의 "도전하는 이슬람"은 비단 이슬람 세계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를 제외한 발전도상의 제3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큰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문제란 급속히 전세계적인 생활양식이 되어가고 있는 서구적 생활양식과 전통적인 지역 생활양식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이슬람과 서구세계의 뿌리깊은 갈등의 역사를 현 상황에 비추어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껴 이 글을 쓴다.먼저, 이슬람을 이념적, 종교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난 후 서구와의 뿌리깊은 갈등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겠다. 그리고 이슬람세계의 "이슬람 부흥 운동"에 대해 알아본 후 앞으로의 이슬람과 서방세계의 행보에 대해 진단한다.2.이슬람이란 무엇인가?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곡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생활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인간이 완전하게 사는 방법이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세상만사에 걸친 즉, 개인생활에서부터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문제에 이르는 안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이슬람은 종교. 세속 쌍방에 걸쳐 전적으로 합일된 생활방식이며 신앙의 자세임과 동시에 예배의 방법이고 거대하며 완전한 법체계이며 문화,그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지하드에 대해 알아보자.전투적 이슬람의 대표자는 이슬람의 뛰어난 점을 찬양하는 것에 너무도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이슬람은 칼과 지하드에 의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 이슬람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야만적인 형벌을 정해놓고 있다. 고리의 금리를 기초로 하는 이슬람 경제는 비현실적이다. 이슬람은 중혼을 인정하고 여성을 차별한다."이런 모든 일은 사실 코란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정부 방침이기도 하다.지하드라는 말 그 자체는 "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다. 초기의 혁신적 일파인 "하리지"파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5가지 기둥에 곁들인 6번째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 지하드였던 것이고 지금도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유태교, 그리스도교 등 다른 일신교 신자를 "계전의 백성"이하 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초기의 세력확장시기에도 이슬람 국가는 세금을 내기만 하면 그들의 사회를 보호했다. 서구에 이슬람이 침입하자 서구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슬람은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게 되었다. 그년에 와서 가장 새로운 지하드로는 1914년에 최후의 칼리프였던 터키의 스루탄이 동맹국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아주 최근에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가 고창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3.이슬람과 서방세계와의 갈등만일 이슬람의 발상지가 인도네시아이고 그 신앙의 주요지역이 동남아시아였다고 한다면 이슬람의 역사는 불교와 비슷한 조용한 역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지가 3대륙의 교차지점이었기 때문에 정력적이고 또한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이슬람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를 방위해야 하는 처지에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유럽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이슬람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슬람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과학과 군사기술, 그리고 유럽의 정치, 경제 제도 및 복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구적 요소를 이슬람 체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식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극복하려는 지적고뇌의 표현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슬람 개혁론자들의 노력은 화려한 옛 이슬람 부흥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각 지역별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잠재된 욕구로 무슬림들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다.이러한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근년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력 강화와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주의 부진, 부정부패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일방적인 두둔, 보스니아와 캐시미르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무슬림 대량박해에 대한 서방의 방관자적 태도 등에 의해 젊은 층과 소외계층의 공감을 얻으면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국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진행, 발전되고 있다.우선 이슬람세계는 "Islamic Fundamentalism"의 우리말 번역인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없다.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이슬람원리주의는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 운동에 서방세계가 가져다 붙인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사용하는 이슬람원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반 서구 노선을 표방하거나 세속정부에 저항하는 일련의 모든 이슬람 운동을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용어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슬람 부흥운동에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 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 '신정민주주의(theo-democracy)'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인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 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 국가 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이슬람 부흥운동은 몇 가지 전제에서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첫째,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즉, 코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 공동체(Ummah)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개혁적 성향을 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론에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두 번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 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위를 증명해 보였다. 그들은 서구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주된 내용인 여성의 지위, 노예제도,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 계시와 이성간의 상충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료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세 번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는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고집한다는 면에서 앞선 율법학자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발.
아랍의 문화와 이슬람교이번 학기에 아랍 문화사를 배우면서 지난 2년여 동안 배워온 아랍의 문화와 이슬람교에 대해 더욱 깊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이슬람교와 아랍문화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보기로 한다. 먼저 아랍 문화라고 하면 지리, 역사, 제도, 관습, 행동양식, 그리고 정치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럼 먼저 아랍 문화의 특성에 관해 포괄적으로 생각해 보자.아랍 문화를 이른바 사라센 문화라고 한다. 사라센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아랍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시리아 근처의 아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중세 이후에는 무슬림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아랍, 이슬람 제국이 중 근동에 번영하는 기간에 일반적으로 사라센 문화는 아랍인이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가져온 기성품도 아니고, 정복을 완수한 후 개종한 여러 인종, 즉 아랍 족, 페르시아 족, 이집트 족, 시리아 족 등의 순수한 무슬림의 문화만도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기독교도, 유대교도 및 배화교도 등도 이 문화를 창조하는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랍문화는 아랍어로 표현 되어있고 이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장식되었다. 이 문화의 알맹이는 곧 언어와 신앙의 두 가지였다. 이 둘은 아랍인이 그들의 영역 내에서 발전시킨 새롭고 창조적인 문화의 요소들이다.아랍인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인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아랍 화, 이슬람 화한데 있다. 11세기까지 아랍어는 페르시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페르시아 어, 콥트어, 아랍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 등과 같은 절대적인 문화언어의 위치를 흔들어놓고 문화를 대표로 하는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다.아랍어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정복자로서의 아랍인과 아랍화 된 피정복자의 구별은 점차 그 중요성이 시들어지고 아랍어로 말하고 이슬람을 믿는 자는 모두 하나의 공동체, 즉 움마에 속하는 동료로 느꼈다. 그리하여 아랍이라는 단어 자체가 본래의 유목민의 뜻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아랍 문화의 이해 p.15 문화와 언어1996 대한교과서예언자 무함마드를 시발점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성하여 중 근동 지역으로 발전한 이슬람은 단순한 믿음과 의식체계이상이다. 또한 그것은 국가 사회 법률 사상 및 예술의 체계이기도 하다. 즉 종교가 모든 것을 집결시키는 핵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문화이다. 예언자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함에 따라 이슬람은 곧 신에 대한 절대 순종은 물론 구체적으로는 메디나와 예언자의 종주권을, 후에는 제국과 칼리파에 대한 종주권을 뜻하였다.이슬람은 초기에는 아랍인의 신앙이었으나 후에는 제국의 일등 국민의 신앙과 동일시되었다. 이슬람의 율법을 샤리아라고 하며 이것은 꾸란과 무함마드의 전승에서 법학자들이 발전시킨 율법인 것이다. 샤리아는 사회 공동체의 표준이 되는 법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가 다같이 추구해야하는 이상이며 또 행위의 표본이 되었다. 법은 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으므로 이슬람은 인간 누구에게도 이 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법, 민법 및 통치자의 의지 등은 법학자들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인정한다. 신이 주었다는 샤리아는 믿음과 의식뿐만이 아니고 헌법과 국제법 등의 공법과 형법과 민법 등의 사법에서 인간생활의 모든 면을 통괄한다. 그렇지만 샤리아의 이상은 헌법적인 측면에서 그 특색이 더욱 분명하다.아랍 문화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시간상으로 보면 현재와는 천 년 이상의 간격이 있으며 지리적으로 보아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역이고 또 문화적 교류도 많지 않은 지역이어서 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아랍인은 누구인가? 아랍인이란 말은 이슬람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사막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기원전 854년의 앗수르 기록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낙타들과 관련지어 등장하는데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낙타를 기르는 사막의 베드윈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28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아랍인이 사막과 관련지어 생각되었다. 기원전 600년쯤 예레미아 3 : 2 에 나오는 '사막의 아랍인처럼' 이란 구절은 이것을 잘 설명해준다.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사막 외과지역으로 점령의 세력을 키워가면서 이 때부터 아랍이라는 말은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아랍인이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에 그들의 조상의 언어를 버리고 대신 아랍어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동시에 새로운 영토에서 아랍인 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부족적 특징을 잃고 살았다. 그들이 도시 거주자가 되고 정착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에서 아랍어의 운명은 지역마다 각기 달랐다. 그러나 여러 국가에서 아랍인 정복자와 그 지역 주민간에 있던 초기의 차이는 점차 사라지고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북아프리카와 서남 아시아에서 유일한 지배적인 인구가 되었다.이슬람의 아랍성은 이슬람 이전 시기의 아라비아의 유목화 또는 베두윈화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아라비아에는 메디나와 같은 몇몇의 오래된 도시들이 있었으나 그 도시들은 대체로 그들을 포위한 베두윈족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베두윈족은 그들을 정복하여 지도자를 쫓아낼 정도의 힘은 없었으나 그들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조공을 요구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아라비아의 지리적 기후적 조건으로 인하여 베두윈족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이동하면서 살아야했고 이러한 조건 하에서 베두윈족은 그들끼리 집결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베두윈족의 자연스런 연합은 실제적이건 허구적이건 혈연관계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회 정치적 조직 -부족 제도- 내에서는 단지 가장 작은 단위와 그 다음으로 큰 집단인 씨족과 그것의 가지가 연대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형태의 부족조직은 베두윈족에서만이 아니라 약간의 차이점을 지니고는 있지만 아랍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아라비아의 베두윈 족 p.36카스켈 워너 1954 문화와 역사메카는 아라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메카가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거대한 무역로의 교차점에 이 도시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메카는 백인의 아시아와 흑인의 아프리카에서 맨 끝에 위치하는 유리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와 시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예맨 분지, 인도양, 홍해로 이어지는 교차점에 가까운 사라트 연결망의 후미 근처에 위치해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메카-이슬람의 성지 p.368J.H.Kramers 1953아라비아 반도의 대상 무역은 6세기경 동방 사산조(이란 지역) 쪽으로 무역로가 변경되자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무역로의 변화는 수 세기동안 지속해왔던 경제적 균형 관계를 파괴하였다. 이제 대상 무역으로부터 수입을 얻을 수 없었던 유목민들은 정착을 하여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그러자 토지의 수요가 늘게 되고 나아가 부족 사이의 충돌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곧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부족 신앙들이 통합되고 유일신 알라에 대한 숭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부 아랍인들은 단일한 신을 믿는 하니피 종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제반 환경들이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사회적 필요에 부응한 그의 설교는 유대인, 기독교인, 하니피인들이 믿었던 종교 교리와 비교해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의 골자는 알라만을 숭배할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그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을 의미한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그것이 바로 신의 증거이다. 또한 천사와 지혜가 부여된 사람들이 정의 편에 있음을 확신한다. 지혜 권능을 가진 찬미를 받는 그 이외에는 어떠한 신도 없다. 신 앞에 종교는 이슬람교 뿐이다." (3장 16~17절) 처음 무함마드의 설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특히 무함마드 자신이 태어난 쿠라이쉬족에게는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다. 상인 귀족들은 옛 아랍 부족신들에 대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종교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아랍의 중심지가 되러있는 메카를 평가절하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헤지라 (이주)가 622년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 시점을 무슬림들은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잡고 있다.오아시스 농업지역인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설교하기에는 메카보다 훨씬 나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메디나 사람들은 메카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고 특히 메카 귀족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는데 기꺼이 나서주었다. 그는 메디나의 여러 토착 부족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유대 공동체까지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630년 많은 지지자들을 모으면서 그가 메카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메카의 쿠라이쉬 지도자들은 새로운 종교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과거와는 달랐다. 이제 그러한 선택이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익을 주는 일이 된 것이다. 새로운 가르침을 선택한 아랍 부족들이 차례로 통합됨에 따라 민족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메카의 중요성은 점점 더해만 갔다. 본래 무슬림 운동에 적대적이었던 쿠라이쉬 부족들은 이제 여기에 참여할 때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이끌어 갈 때에도 보다 큰 이익이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중 동 전 쟁머리말서남 아시아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지방, 성서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대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지(聖地)라고도 불리며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등에서 모두 이 팔레스타인을 신성시했다. 이 지역은 B.C 15세기경 이집트가 정복하였고, 그 뒤 가나안 인이 이 곳을 차지하였다. B.C 1200년경에는 모세가 이끄는 헤브라이인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 곳에 도착하였으며 B.C 64년 폼페이우스가 정복하였다. 이 후 아랍, 십자군의 점령을 거쳐 16 ~ 20세기초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1917년 영국이 점령, 23년에 위임 통치령이 되었고, 48년에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운 이래 여러 차례의 중동 전쟁이 벌어졌다. 그럼 이제부터 중동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제 1 차 중 동 전 쟁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 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 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UN안전 보장 이사회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 협정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얻었고 팔레스타인 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 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제 2 차 중 동 전 쟁그 후 1956년 10월 이른바 수에즈 전쟁으로 불리는 제 2차 중동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이집트의 낫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중동 지역은 원래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 국가운하의 국영화 선언으로 응수한다.이 운하의 공동 소유주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 조치에 격분하여 군대 파병을 결정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집트에 고물 무기를 팔아먹으려다 퇴짜를 맞은 데다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이집트가 지원해온 데 부아가 치밀었던 프랑스의 분노는 더 했다. 이집트의 중무장에 불안해하던 이스라엘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항상 무기 구입에 애를 먹어온 그들에게 프랑스는 '홧김에' 당시로서는 최신인 프랑스 제-13경 전차 100대와 프랑스 제 FL100 75mm포로 개장한 [수퍼 셔먼] 전차 등 대량의 무기를 마구 공급을 해준다. 갑자기 늘어난 무기와 장비로 좁은 구토가 넘쳐 날 지경이 되어 심지어는 영화사의 스튜디오까지 탄약고로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중동에 또 한 차례 피 바람이 일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하여간 이렇게 이스라엘과 프랑스 영국은 이집트를 깨버려야 한다는 공통과제를 안게 되었다. 1956년 10월29일 오후 3시30분, 16대위 C-47 다코다 수송기가 텔아비브 공항을 날아올랐다. 유명한 애꾸눈 장군 모세 댜얀 참모장의 야심찬 작품 - 카레쉬 작전 - 의 서곡이며 다얀 자신에 의해 구상되고 훈련되어진 '자할의 꽃' 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화려한 데뷔전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 조종사까지 끼여있는 이 수송기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시나이 반도의 요충 ''미츨라' 언덕에 공수병들을 강하시킨다. 줄곧 요르단을 공격할 것처럼 허위 정보를 흘리면서 예비군 동원령을 개전 하였고, 이틀 전에야 내릴 만큼 기밀 유지에 신경을 썼던 이스라엘의 기습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고 당장이라도 쳐들어 갈 것처럼 기세를 올리던 이집트는 뒤통수를 맞았다.이렇게 전쟁의 시작은 정말 예상 밖의 결과로 시작이 되었다. 쿤틸라, 카마드, 나미브등 이집트의 주요 방어 거점들이 제대로 된 저항 한번 없이 허무하게 주저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이 당시 이집트 군을 요절낸다, 라는 의도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불 연합군이 전투를 떠 맞기로 때는 이미 시나이 반도를 종단하여 병사들은 수에즈 운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이 전차를 주축으로 한 쾌속돌파 전술을 이 시기에 완성되어 이후로도 성공적으로 반복된다.한편 10월31일로 예정되었던 영,불 연합군의 공격이 연기되었다는 통보는 더욱 일을 꼬이게 만든다. 그들을 믿고 일을 저질러 놓은 이스라엘은 내친김에 더욱 강하게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육상 전투는 그렇다 치고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이 당시 이집트 공군은 이스라엘과 비교할 때 훨씬 우세한 장비와 기종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전과가 없다는 접이다. 개전 전 이스라엘 측이 가장 경계하던 것도 이 이집트의 공군인데, 정작 이들은 한 번도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 이 원인을 다얀 장군은 한마디로 말하는데, "비행기는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조종사들의 엄청난 수준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개전 당일 이집트군의 전화선을 절단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격한 두 대의 P51 무스탕 기는 기체에 매단 갈고리를 전화선에 걸려고 시도하다가 갈고리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당황한 그들은 수 차례의 초 저공 곡예비행 끝에 날개로 전화선을 절단해내고야 만다. 프로펠러가 전선에 감기거나 지면에 충돌하는 위험을 무릅쓴 이들의 높은 책임감과 절묘한 조종술에 비해 이집트의 공군은 이스라엘의 기지를 폭격하라는 임무를 받고 날아간 IL-28 일류 신 폭격기는 이스라엘군의 대공화기가 기다리는 기지 근처에도 오지 않고 텅 빈 황무지 야산에 폭탄을 쏟아내고 돌아가 버렸다. (아마 그들은 지휘부에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보고했을 것이다.)2차 중동 전을 통 털어 양측 모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가자지구의 전략적 요충지인 라파 이다. 이 무렵 전황은 이미 초읽기에 몰입 되어 있었다. 영,불의 개입과 국제적 여론에 떠밀려 휴전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 왔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그 전에 이곳을 점문을 배치해두고 튼튼히 구축된 영구 진지와 무수한 지뢰밭, 폭넓은 철조망 지대로 보강된 철저한 방어진을 피고 있었다. 이런 곳에는 이스라엘군의 주특기인 기습 공격은 자살 행위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워낙 좁은 지역에 양측의 병력이 밀집해 있었으므로 오폭의 위험성으로 인해 공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11월 1일, 새벽 3시 정각 이스라엘 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보병 부대는 어둠을 틈 타 소리 없이 이집트군의 전초 진지를 향해 기어갔다. 이집트 군의 기관총 좌가 불을 뿜기 시작했지만 항상 훈련이 덜된 군대가 가장 취약한 것이 바로 야간 전투다.지뢰를 하나하나 캐 던지며 포복으로 철조망을 밀어붙이는 보병들에게 이 총탄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마침내 진지 앞에 도달한 이스라엘 군은 참호 속으로 뛰어들어 폭약과 수류탄, 기관총을 난사하며 거점 하나 하나를 상쇄해 나가기 시작한다. 야딘 장군이 인간 불도저라 표현했던 보병의 이런 근접 전투방식 도한 아랍 군이 가장 서툰 것 중 하나 이다. 문제는 이 한밤중의 육탄전에서 하나같이 비슷하게 위장된 진지 중에서 각 중대가 명확한 자신의 공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1보병여단 1대대 A중대장 요나단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점령 목표인 25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인접한 진지를 할당받은 중대원들이 이집트군의 지세 사이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마침 운 좋게도 26진지와 이어진 좁다란 교통호를 발견한 그들은 이것을 따라 숨돌릴 틈도 없이 쇄도해 들어갔다. 대 혼란 속에 빠져있기는 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옆 진지가 함락된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교통호를 통해 달려오는 병사들이 적군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앞쪽의 캄캄한 어둠 속을 향해 무턱대고 총탄을 퍼붓고 있었다. 26진지는 간단히 함락되었다. 27. 29진지를 할당받은 대대도 마찬가지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 끝도 없이 펼쳐진 철조망 저편 어디에 29진지가 있단 말인가. 대대장은 지원차기동에서 널리 깔린 대전차지뢰들로 두어 대의 전차와 반트랙 장갑차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밝게 타오르는 불꽃은 공격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어 더 좋은 조준 목표가 된다. 정확한 대전차포의 조준사격을 받은 전차들이 연이어 나뒹굴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4시를 넘기고 있었고 곧 날이 밝아 공격군의 위치가 노출되면 그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위기에 빠질 것이다. 선두의 지휘관들은 전차를 안전 지대에 철수시키고 참호를 파서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단호히 거부당했다. 평소 최 일선 지휘관들의 폭 넓은 지휘권을 보장해주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지부지만 이번만큼은 완강했다.전투 공병대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탄 속에 손 곡괭이만으로 지뢰밭에 뛰어들어갔다. 그 다음부터 완전히 일방적인 살육이 되었다. 보병은 우지 기관단총을 휘둘러 대고, 전차 캐터 필러로 인간의 몸을 짓밟았다. 떠오르는 태양이 이 살육의 현장을 비추었을 때 눈앞에 전개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사자의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는 모래바닥을 적시고 불타버린 전차는 아직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난공불락의 라파 방어선은 마침내 이스라엘 군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급히 달려온 다얀 총 참모장은 그 외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절반쯤 넋이 나가 버린 제 1 보병여단장을 힘껏 끌어안았다.11월 5일 새벽, 예정보다 6일이나 늦게 영,불 연합군의 2개 공수대대가 수에즈 운하 주변도시 포오트 사이트에 강하하여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첫째는 예상치 못했던 국제 여론의 비난 - 덩치 큰놈들이 조그만 이권하나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스라엘을 꼬드겨 침략의 선봉에 세웠다 - 는 여론 때문이었다.둘째는 이스라엘이 예상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이집트 군을 때려부수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나서서 만신창이가 된 이집트 군을 몇 대 쥐어박아 주고, 이스라엘을 점잖게 타일러 돌려보낸다면 자기들의 손에 피 한 방울도 안 묻히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