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8
검색어 입력폼
  • 지중해인의 Personality에 관한 고찰
    지중해인의 Personality에 관한 고찰: 남부유럽인과 중서부유럽인의 비교를 중심으로-- 목 차 --1. 서론2. 지중해 연안의 지리적 환경: 중서부유럽의 지리적 환경과의 비교3. 남부유럽인과 중서부유럽인의 인종적 차이: 지리적 환경의 영향4. 문화적 현상에 따른 Personality차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비교5. 결론1. 서론흔히 우리는 유럽문화를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그럴 때 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같은 유럽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영국, 북부프랑스의 문화와 이탈리아, 남부프랑스, 스페인의 문화가 서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같은 유럽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화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대체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로마에서부터 비롯된 라틴족중심의 남부유럽인과 중앙아시아의 훈족에게 쫓겨 서유럽으로 이동했던 게르만족중심의 중서부유럽인의 Personality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즉 같은 유럽인임에도 그 성격이나 기질 등이 서로 차이를 보이면서 각각의 문화에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유럽인이라고 하면 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러한 생각이 바로 그릇된 판단이라 할 수 있다.그러면 왜 같은 유럽인임에도 이러한 Personality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데에는 대체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인데, 필자는 여기서 특별히 남부유럽인과 중서부유럽인 사이의 생활공간이 다른 점 즉, 지리적 환경의 차이를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지적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지리적 환경의 자극에 대응 내지 적응하고, 지역의 자연이 주는 생활 자료를 생존을 위해 활용하는 데서부터 인종간의 Personality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문화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서, 이 글에서 지리적 환경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중해연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즉 지중해 연안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유무에 따라 라틴족중심의 남부유럽과 게르만족중심의 중서부유럽간의 Per 인해 이 지역의 모든 산맥은 해안선에 평행하게 달리는데, 해안에는 좁은 해안 평야가 형성되어 있고, 산지사이로 산간분지가 분포한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단일 경작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토지이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관개농업과 건조농업, 그리고 축산업이 지역의 환경조건에 적합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한편 지중해 연안의 기후를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지리학자들은 지중해 연안지역을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지역으로 구분해왔다. 지중해성 기후는 대륙의 서안(西岸)에 발달한 온대기후의 일종으로 기호는 Cs로 표시한다. 지중해성기후ㆍ온대동우기후라고도 하며, 겨울에는 중위도편서풍 기후 아래 놓여, 온대저기압이나 전선(前線)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난한 우기(雨期)를 맞이한다. 또 여름에는 아열대고기압의 지배하에 들기 때문에, 비교적 고온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건기(乾期)가 된다. 겨울철 평균기온은 -3∼18℃이고,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달의 강수량은 여름철의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달의 3배 이상 된다. 따라서 여름은 건조하며 겨울은 온난 다우한 특징을 가지는 이 기후는 여름철에는 건조한 기후에 잘 견디는 올리브 나무를 비롯한 코르크떡갈나무ㆍ오렌지ㆍ레몬ㆍ포도ㆍ무화과나무 등의 수목(樹木)농업이 성행하고, 겨울철에는 밀ㆍ보리를 중심으로 하는 곡물농업을 짓는다. 산악지방에서는 여름에 비가 오는데, 기온이 높지 않고 목초의 생육이 가능하기 때문에 낙농이 행해지고 있다. 이 지역은 대체로 50~100km 이내의 해안지역과 섬에 해당한다.이러한 지중해의 지형과 기후에 의해 남부유럽의 자연환경의 특징을 살펴보면, 주로 유럽 대륙에서 지중해에 돌출한 이베리아ㆍ이탈리아ㆍ발칸 등 세 반도 안의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날씨가 맑고 햇볕이 따가운 지중해식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이 이 지역의 공통점이다. 여름에는 약간의 비가 내릴 뿐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므로, 밭농사보다는 과수농업과 원예업이 성행한다. 지형적으로는 알프스 산지를 비롯하여 험준한 산를 살펴보면, 이 지역은 서안 해양성 기후(Cfb)에 속하여, 최난월 평균 기온이 22℃이하이거나 10℃이상인 달이 적어도 4개월 이상인 기후이며, 편서풍과 해류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 상에서 대륙 동안보다 겨울이 온난한 편이다. 따라서 기온의 연교차는 작고 강수량의 계절적 분포는 고른 편이어서 혼합농업을 주로 한다. 대체로 편서풍을 막는 큰 산지가 없는 알프스 산지 북쪽의 중서부유럽에 나타나며 영국, 북부프랑스, 독일이 이에 속한다. 여름이 그다지 덥지 않고 선선하며 겨울이 온난하다. 런던과 파리의 7월 평균 기온이 16.8℃와 18.2℃로 지중해 연안에 비해 여름 기온에 비해 훨씬 선선하다. 그리고 1월 평균 기온이 같은 위도의 다른 지점에 비해 훨씬 높다.3. 남부유럽인과 중서부유럽인의 인종적 차이: 지리적 환경의 영향지리적 환경의 차이에 따른 남부유럽인의 라틴인종과 중서부유럽인의 대부분인 게르만인종을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먼저 라틴족은 전형적인 지중해 인종이며, 멜라닌 색소를 많이 지님으로써 피부가 검게 나타난다. 또한 머리털이 검고, 눈과 피부는 갈색이지만, 햇빛으로 인해 흑갈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기후, 특히 일조량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중해 연안의 강렬한 햇볕에 적응하기 위하여, 라틴족들은 멜라닌 색소를 많이 갖게 되고, 이는 후천적인 형질로 세대를 거쳐 유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신장이나 머리모양은 길고 홀쭉하며, 코는 폭이 좁고, 콧날은 반듯하거나 약간 매부리코이며, 성년남자의 평균 신장은 164cm 내외로 작다. 이러한 작은 신체는 또한 일조량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뜨거운 햇볕에 대해 몸의 표면적을 줄여 열을 적게 받기 위함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에 분포하나, 일부는 내륙에도 나타난다.이와는 반대로 게르만족은 북유럽인종에 속하며, 머리카락은 금발이고, 눈은 푸른색이다. 피부는 멜라닌 색소가 적어 창백할 정도로 희고, 모세혈관이 붉은 빛으로 드러나 보인다. 햇볕에 피부가 잘 타지 않지만, ty를 비교하기 위해 라틴족의 대표적인 나라인 이탈리아를 살펴보자. 이탈리아는 대표적인 지중해성 기후의 국가이며, 온화한 기후로써 우리나라와 같이 사계절이 있고, 여름은 고온건조한 편이며, 겨울은 온난 습윤한 편이다. 지중해성 기후를 보면, 여름철 햇살은 따갑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땀이 별로 흐르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선글라스가 발달한 이유는 눈부시게 밝은 햇빛 때문인데 선글라스 없이는 생활이 불편해서 생활필수품이다. 또한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철 또한 그리 춥지 않아서 이탈리아는 가죽옷정도면 추위를 막을 수 있으며, 이는 가죽옷이 가을, 겨울옷으로 많이 발달되도록 한 요인이다. 또한 여름철 옷은 소매 없는 티, 짧은치마, 반바지, 티셔츠 등 여름의류 등이 발달한 이유도 기후의 특성이 크다. 또한 추운 곳일수록 어두운 칼라의 옷을 입고 밝고 따뜻한 곳일수록 원색을 선호하는데, 이 또한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이 햇빛을 직접 쬐이면 덥지만 그늘만 들어가면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주택의 특성이 지붕이 높고, 통풍이 잘되게 함으로써 여름철에 에어컨이 없이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또한 지중해성 연안 국가들의 건물색깔은 하얀색을 선호하는데 사시사철 햇볕이 내리쬐고 더운 날씨 때문에 시원함을 주기위해 선택한 색채라고 생각이 되어 진다. 이러한 지중해성 기후는 항상 밝은 햇볕이 내려쬠에 따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다주었고, 열정적인 사고방식과 감정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축구인데 축구경기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다혈질이고 감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식당에서의 경우 조용히 밥 먹기보다는 많은 대화들이 오고가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등의 분주하면서도 활기찬 식사분위기를 보인다. 한편 사시사철의 날씨의 다양함은 남부유럽인들에게 예술적 소양이 많고 감성적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 거리나 광장에 나가면 아마추어 화가들이 굉장히 많이 보이고, 오페라와 같은 많은 가곡들 받고 기름진 땅과 거기서 나는 풍성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건축, 음악, 조각, 미술 등등 빛나는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주로 농사를 지어 살아가던 민족이었으므로 농사를 지을 일꾼, 즉 많은 자식을 낳아주는, 그리고 키워주는 어머니가 한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모든 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어머니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와 반면, 중서부유럽인을 대표하는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면, 대체로 남부 유럽보다 겨울이 춥고 길며 여름은 짧고 서늘하여, 이러한 쌀쌀한 기후는 의복에 있어서 스웨터와 모피가 발달하도록 기인하였다. 또한 날씨가 좋으나, 중서부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의 연강수량이 500~1,500mm의 연중 고른 강수량으로 인하여 흐린 날씨가 많은 즉, 일조량이 남부유럽에 비하여 짧다.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은 산맥 바로 서쪽 지역으로 연강수량이 2,000mm를 넘는데 영국 서부와 노르웨이 서부가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비가 자주오고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하는 기후는 바깥출입보다는 집안에서 생활하는 문화를 생성시켜서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과의 사교적인 모임이나 활동보다는 보다는 개인적인 활동을 많이 함에 따라 타인에게 체면을 유지하려하거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격보다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과 행동만을 하게 되는 문화적 경향이 생겨났다. 이는 친구들과의 식사모임과 같은 곳에서도 자신의 식사비는 자신이 내는 모습과 같은 예를 보여주며, 사람들과의 겉치레나 허례허식이 없어서, 한 번 말을 꺼내면 반드시 지킬 수 있는 말만 하고, 타인과의 약속을 꼭 지키며, 철저한 시간관념을 가지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흐린 날씨는 차분하고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Personality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는 음식문화와 의복문화에 잘 나타난다. 즉, 화려하고 다양한 음식보다는 맥주와 소시지 등의 단촐하지만 실용적인 음식이 발달하였고, 의복문화의 경우 남부유럽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용적인 옷들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사상사적으이다.
    인문/어학| 2015.02.22| 7페이지| 1,500원| 조회(109)
    미리보기
  • 삼개대표
    三?代表思想-- 목 차 --Ⅰ. 머리말Ⅱ. 삼개대표사상의 출현배경 및 과정1. 출현배경2. 출현과정Ⅲ. 삼개대표의 주요내용1. 당은 중국의 선진적인 사회생산력의 발전요구를 대표해야 한다.2. 당은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해야 한다.3. 당은 중국 인민대중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Ⅳ. 삼개대표사상의 의의Ⅴ. 맺음말Ⅰ. 머리말중국은 11기 3중전회를 통해서 등소평이 정권을 잡고 이후 지속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이 사망 후, 중국 내외에서는 중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예견이 난무하였다. 특별히 일부 자본주의국가들은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방향전환을 기대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향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의 방향수정을 예견하거나, 반대로 이를 우려하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서로 상이한 의도에서 중국의 장래를 예측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제3세대 지도집단의 핵심인 강택민은 이 상황에 대처하여 등소평의 이론적 기치를 확립하고 이후 자신의 대표적 사상 삼개대표를 통해서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대처해갔으며 자신의 정권까지 확고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삼개대표사상은 강택민이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이론과 함께 공산당 당장(黨章)에 오른 사상으로 21세기를 맞이할 중국의 이데올로기로서 현재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는데 이러한 삼개대표사상이 어떻게 출현하였고, 어떠한 사상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Ⅱ. 삼개대표사상의 출현배경 및 과정1. 출현배경등소평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2세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계승하며, 개혁개방을 통해 생산력향상이라는 현대화건설에 적합한 공산당건설을 추진하였고, 이렇게 추진한 개혁개방은 20여 년간 중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 중국은 개혁개방 직전의 시기에 비해 생산력발전이 비약적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중국은 대내외적인 정세변화와 함께 앞으로의 발전방향의 선택과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문제는 세 가지로 요약에 빈부격차의 증가,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간부부패문제 등 정치적으로 일당독재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고,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사상혼란 등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시장화에 따른 각종 부작용들로 인하여 중국공산당은 집권능력의 회복과 더불어 새롭게 사상통일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중국식 현대화 건설의 지속화 및 사회 각 영역의 체제개혁과 관련하여 어떠한 통치방식과 집권방식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사상통일을 순조롭게 이루어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였다.둘째는 90년대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미국이라는 슈퍼패권국이 등장하고 그 아래 국가간 다원적 정치질서가 자리 잡는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가 형성되었는데 미국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여겨 중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특히 세계경제를 미국중심으로 묶으면서 경제의 세계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경제세계화로 인하여 각국의 경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고, 한편으로 선진국이 경제세계화를 주도함으로써 선진국과 개도국과의 경제격차가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데 중국이 어떻게 세계화에 발맞추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셋째는 중국공산당의 정체성과 세대교체와 관련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문혁 이전에 성장한 간부들을 퇴진시키고, 개혁개방과 중국식 현대화 건설 시기 이후에 배출된 간부들을 정치의 핵심으로 등장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현재의 중국은 혁명의 시대를 건너 이미 개혁의 시대로 진입했으며, 중국공산당의 정체성문제와 간부의 신구교체는 중국의 발전방향에 있어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즉 이상의 문제는 어떠한 당을 만들고 또 어떻게 그러한 당을 건설할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의 해답이 바로 삼개대표사상이었다. 결국 삼개대표는 이러한 역사적, 국내외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2. 출현과정강택민은 2000년 2월 광동(廣東)시찰 중 영도간부회의에서 최초로 삼개대표사상을 제기하였다. 이후 삼개대표사상은 동년 5월 강소(江蘇다. 이는 일반적으로 ‘7ㆍ1강화’라고 불리는데, 삼개대표사상에 대한 시대적 의의와 중국공산당의 정체성문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선진성과 집권지위의 유지와 공고화 문제에 대해 역설했으며 삼개대표사상에 대한 학습을 공식천명했다. 그 후 2002년 5월 31일 중앙당교 졸업식에서 실천으로써의 삼개대표를 주장하면서 중앙방송과 인민일보 등 관영매체를 통해 대중에 대한 선전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동년 11월 8일 개최된 16차 당대표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이론 다음에 ‘삼개대표중요사상’으로 당장(黨章)에 추가됨으로써 삼개대표사상은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에 대한 사상투쟁 역시 일단락되었다.Ⅲ. 삼개대표의 주요내용삼개대표는 중국공산당의 통치이념이며, 21세기 중국공산당이 시대조류에 적응하고 중국인민을 이끌며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확립하는 실천적 기능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해방사상과 실사구시와 더불어 새롭게 중국공산당의 사상노선으로 자리 잡은 여시구진(與時俱進)의 정신으로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전진하는 자세를 강조하며 중국사회 각 영역에서 개혁과 건설의 지속화를 이루려고 하고 있다. 이 여시구진의 사상적 기초를 토대로 해서 삼개대표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1. 당은 중국의 선진적인 사회생산력의 발전요구를 대표해야 한다.강택민은 공산당 8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를 시종 대표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당의 이론, 노선, 강령, 방침, 정책과 각 업무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생산력의 발전규율에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사회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의 추진을 실현해야 한다. 특별히 선진생산력의 발전추진을 실현하고 생산력 발전을 통해 인민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 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선진적 사회생산력 즉 사회생산력의 고도화는 높은 기술수준을 갖춘 노동자와 노동요소의 결합이 합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산력향상의 주체는 우수한 질적한다. 이것이 삼개대표에서 주장하는 선진생산력발전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생산력과 상층구조를 선진생산력에 적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하는 생산관계와 사회주의 상층구조를 갖추고 있어야만 선진생산력발전의 요구에 적합한 구조가 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선진사회생산력의 생산관계에 대한 요구는 먼저 소유제구조의 사회화를 요구해야 하며 소수가 독점한 생산관계의 상태를 바꾸어 사회가 공통으로 점유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경제제도와 체제가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생산자의 경제활동의 자주성과 이익분배의 형평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며, 저수입자의 기본생활보장과 함께 생산력을 발전시켜 그들의 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선진사회생산력의 상층구조에 대한 요구는 정치제도와 정치체제의 과학화, 민주화, 법제화를 통해 생산력의 발전에 적합한 제도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식형태의 과학화와 문명화를 통해 경제발전의 정신적 원동력과 정치사상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오늘날 공산당이 선진적인지 후진적인지, 혁명적인지 반동적인지는 종국적으로 사회생산력발전의 촉진여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제도의 발전과 사회주의 정권의 공고화는 전적으로 사회생산력에 의지해야하며 따라서 공산당이 선도하여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생산력해방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삼개대표에서 주장하는 공산당이 선진생산력발전요구를 대표한다는 것이다.2. 당은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해야 한다.삼개대표에서 선진문화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문화발전으로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이에 적합한 정치, 경제, 사회의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현대정보화사회의 도래로 인해 새로운 의식능력을 요구하며 각종 사상들이 서로 융합되는 과정에서 가치관의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혼란의 핵심은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문화의 단일화와 다적 임무는 사회변화에 따라 그 시대에 적합한 공산주의 인간형을 배양해야 한다. 셋째로 선진문화는 ‘쌍백(雙白)정책의 유지이다. 넷째로 선진문화는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의 본질을 계승ㆍ발전시켜야 한다. 다섯째로 선진문화는 문화의 개방정책을 통해 외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하고 이를 전통문화, 마르크스주의, 시대성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개대표에서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문화를 발전시켜 선진생산력발전에 적합한 사회주의 문명을 건설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3. 당은 중국 인민대중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강택민의 삼개대표에 따르면 “인민대중의 전체이익은 각 방면의 구체적 이익으로 구성되었으며, 중국이 실시하는 정책은 모두가 각종 이익관계의 타협에 따른 처리와 각기 다른 계층과 대중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하였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 인민대중의 개념 확대로서 새로운 사회계층의 출현과 계층의 분화로 인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민의 근본이익이 “최대다수인(人)”의 근본을 의미함으로서 내부계층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삼개대표는 새로운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서 대다수 인민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경제적 이익을 빌미로 정치의 다양화와 개인소유의 재산권을 요구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경제체제개혁과 구조조정은 자원배치의 효율화와 중복건설을 감소시켜 인민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통해 인민의 물질수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 결국 전체인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또한 현재 선부론(先富論)에 따른 지역간ㆍ계층간의 경제격차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효율과 분배의 조정 특히 분배정책을 강조하여 최종목표는 인민대중이 모두 부유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공산당은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서 공산당의 대중 의존방식이 과거와 같이다.
    인문/어학| 2015.02.22| 6페이지| 1,000원| 조회(257)
    미리보기
  • 미국헌법의 경제적 해석
    미국헌법의 경제적 해석-- 목 차 --1. 서론2. 미국의 역사해석3. 1787년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개관4. 헌법제정운동5. 대표자선출의 재산자격6. 제헌회의 대표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7. 경제적 문서로서의 헌법8. 제헌회의 구성원들의 정치적 신조9. 비준과정10. 헌법에 대한 일반투표11. 헌법에 대한 투표성향에 관한 경제적 분석12. 당시대인의 눈에 비친 비준의 경제적 갈등13. 결론1. 서론기존의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미국의 헌법에 대해서 미국을 건국한 선조들이 각종의 이익을 배제하고 ‘정의’또는 ‘공공의 복지증진’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을 주된 지도목표로 하여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헌법의 경제적 해석』은 이러한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미국의 헌법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이 제정되면 이익을 볼 수 있는 집단과 소농가ㆍ채무자 등과 같은 재산이 거의 없으며 헌법 제정시 이익보다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집단 사이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헌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그러면 미국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함에 있어 제헌회의 대표선출에서의 경제적 이익에 관련된 문제와 제헌회의 대표자들의 경제적 이익과 그들이 소유하던 동산 등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어떤 이익을 보게 되고 경제적 문서로서의 헌법과 비준회의 대표자들의 경제적 실리 등을 살펴보면서 이에 미국의 헌법이 성립됨에 있어 경제적 이해관계에 관하여 분석해보도록 하겠다.2. 미국의 역사해석미국의 역사연구와 일반론은 대체로 3개 학파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그 첫 번째가 밴크로프트(G.Bancroft)라는 학파다. 미국의 발달과정 속에서 인간의 의지가 아닌 초월적인 의지에 의해 이룩된 성과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밴크로프트의 말을 빌리면 헌법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 속에는 “우주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사건들 사이의 질서와 연관성을 규정하는 신성한 힘의 작용‘이 보인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역사해석학파는 튜턴적(게르만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어사 수 있는데 선거권이 없는 사람과 재산소유자들이 그것이다.그럼 먼저 선거권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면, 1787년의 미국 사회구조에 대한 조사에서 경제적 지위에 따라 명시적인 법적 명칭을 지닌 네 개의 집단과 만나게 되는데 노예, 연기계약(年期契約)노동자, 주 헌법과 법률이 정한 재산자격 심사에서 투표권이 박탈된 많은 대중들, 여자들로서 이들은 선거권이 박탈된 채 관습법의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투표권이 대표권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헌법을 제정한 제헌회의에 이들을 대표할 대표자는 없었던 것이다.다음으로 재산소유자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재산소유자들은 몇 개의 뚜렷한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크게 동산과 부동산 이익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부동산 소유자들은 대체로 세 개의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해안지방에 들어온 소농민들, 허드슨강둑을 따라 발견되는 장원영주들, 그리고 남부의 노예소유 농장주들이다. 먼저 소농민은 매우 동질적인 계층으로 자주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 빚을 지는 이외에, 자원(토지)개발을 위한 자본의 대부분을 도시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대규모 채무자 층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집단은 허드슨강 유역의 장원영주들로서 특별히 귀족사회를 이루고 뉴욕 정치계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헌법의 제정은 주에서 사용할 세 부담이 토지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헌법에 반대했다. 세 번째 집단은 남부의 노예소유주들로서 강력한 연방정부가 가져다줄 이익이 그 손해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편 동산이익집단에는 현금동산, 공채동산, 제조업과 해운업에 투자된 동산, 그리고 서부지역 토지에 투자된 자본이 포함된다. 먼저 현금자본의 경우 ‘연합헌장’ 아래에서는 두 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다. 첫째, 제조업을 위한 보호조항을 결여하고 있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둘째는 미국 해운업이 외국인들로부터 미국 안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적절한 해결책을 구하지 못하자 연방데, 이에 따라 경제적 집단들은 새로운 국가정부를 구원과 이익의 원천으로서 기대하고 있었다. 1787년의 제헌의회가 진행되었고 이에 앞서, 1781년 1월에서 공채를 대규모로 소지하고 있던 슐러는 이 제헌회의를 통해 통합연맹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해 2월 연합의회는 과세권을 중앙의회에 부여해 달라고 요청했고 1785년 보드윈 주지사는 연방의 강화를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보스턴에서는 보조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1786년 녹스장군도 모든 채무를 무효화하고 농업보호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매디슨은 펜들턴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공화주의적 정부의 절망적인 상태가 현행제도에 낙담하고 있고 군주정의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고도 하였다. 며칠 후 암스트롱은 하나의 일반정부를 갖추는 일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서신왕래를 통하여, 자산가, 영향력 있는 사람, 교육받은 자들의 대다수 등 결속력 있는 단으로 이익집단들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 집단은 ‘이익에 대한 의식적인 단결의 힘을 알고 있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의회에서 개정되고 주 의회의 비준을 얻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한 체제개편이 불가능해지자, 지도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제 여기서 몇 가지 임시적인 결론이 나타난다.규모가 큰 중요한 경제 이익집단들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공채소유자, 선박업과 제조업 및 금융업자 등으로서 토지이익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자본이익을 들 수 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통로를 통해 연합헌장의 개정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했고 특히 공채소유자들이 적극적이었으나 목표달성이 실현되지 않자 연합헌장의 ‘개정’을 위한 제헌회의 소집을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확보했다.5. 대표자선출의 재산자격새 헌법제정을 추진하는 운동지도자들은 상황이 요구하고 있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작업을 각 주 의회에서 벌이기 시작했다. 제헌회의 소집을 위한 연합헌장의회의 결정은 대표자들이 “각 주에서 임명되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계자가 된 결과 토지소유권을 상속받게 되었다. 상속받은 재산과 개업 변호사로서 축적한 재산을 통해 주의 부자들 대열에 끼게 되었다. 델라위어의 베드퍼드는 지주의 아들로서 지역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몇 년 동안 그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옛 공채국 장부에 의하면 1779년 5월 발행한 400달러짜리 증서를 구입한 것으로 되어있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블레어는 가문이나 재산에 있어서 가장 명망 있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법원 판사로써 해박한 지식과 분별력과 탁월한 가치 기준들 가진 그는 새 헌법이 형성됨으로써 제공된 기회를 잘 이용하여 공채의 평가 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라운트는 거대한 부동산을 남겨 놓고 사망한 J. 블라운트의 아들이었고 새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토지에 대규모로 투자했다. 뉴저지의 브릴리는 1.60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뉴저지주 공채국의 초기 불완전한 기록을 통해서는 그의 친척들의 이름이 주 공채국 장부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라웨어의 브룸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금은 부동산등을 소유한 알부자였고 다양한 자금줄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버틀러는 자신이 귀족성분임 몹시 자랑한 재산 있는 신사였다. 또 얼마간 공채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 은행의 주식 소유자로서 은행장이었건 것을 확인되고 있다.이상 몇 명의 제헌회의 대표자들의 재산소유를 보았을 때, 이들에게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었다.’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들이 세우려는 새 정부가 이룩할 정확한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안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바탕, 즉 기본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새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7. 경제적 문서로서의 헌법미국 헌법 내면의 진실은 당시의 방대한 편지글들, 신문이나 팜플렛, 필라델피아제헌회의 석상에서의 논쟁기록 및 각 주 제헌회의에서의 논쟁기록, 『연방주의론』이라는 책자 등에적 불화로 인해 야기될 잠재적 요인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굳건한 연방으로 결합되지 않을 경우 각 주 사이에는 알력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연방헌법이 자신들의 이익이 가장 위태로웠던 사람들에 의한 고도의 수법이 구사된 경제적 기록이었으며, 대체적으로 나라 안에서 견해가 서로 일치하는 이익 단체들에게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8. 제헌회의 구성원들의 정치적 신조18세기 영국사회는 ‘계급적 특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당시 지도급 정치가나 정치철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사상의 명료성은 무산자에 대한 투표권 박탈로 촉진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눈치를 보며 ‘공공정책’이라는 외양을 뒤집어 씌워 중요한 집단이익들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제헌회의 구성원들이 대체적으로 헌법의 정치학에 관해 실제적으로 동일한 의견을 지니고 있었는지 몇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볼드윈(A. Baldwin)은 연방 상원이 재산권을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재산을 바탕으로 새 정부의 상원을 세우기를 원했다. 베드퍼드(G. Bedford)는 행정부의 관리와 몇 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개정평의회를 두자는 제안에 반대한 것으로 보아 민주적인 형태를 선호했던 것 같다. 브룸(J. Broom)은 제한적이고 잘 ‘균형 잡힌’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일반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안에 반대했고, 대통령에게 하자가 없을 경우 종신의 임기를 주자고 했다. 버틀러(P. Butler)는 대표권 배분에 있어 재산을 한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롤(D. Carroll)은 일반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출에 찬성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 의회에서의 3/4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제안을 지지했다. 클라이머(G. Clymer)는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대표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고유권한을 부여하는 헌법조항을 삽입하자는 제안에 반대하였다. 윌슨(J. Wilson)은 연방 하원의원이 매년 국민에 의해 선거로 뽑힐 것을 선었다.
    경영/경제| 2015.02.22| 11페이지| 2,000원| 조회(130)
    미리보기
  • 고려의 종교생활
    고려의 종교생활-- 목 차 --1. 불교2. 도교3. 기타 신앙(1)풍수지리설(2)산신신앙(3)성황신앙1. 불교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왕실과 국가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삼국시대의 사람들은 자연계를 지배한다고 믿어지는 제신들을 섬기는 원시종교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부족이나 왕족의 시조를 제사하는 종족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기원후 3~4세기경에 불교가 들어 올 무렵에 즈음하여 삼국은 모두 부족연맹적인 정치체제를 벗어나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다분히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 따라 종래의 종족주의적인 전통을 초월하여 하나의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윤리관을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처음부터 왕권과 밀착되어 상부상조적인 관계에서 성장해 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고려왕조에 와서도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강화되게 되었다. 고려왕조에서의 불교는 특히 호국적이고 현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지양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무신란을 기점으로 그 특성을 대별할 수 있다. 무신란 이전은 교종이, 무신정권 수립과 더불어서는 선종이 세력을 얻어 성리학이 수용되는 시기까지 고려 말의 사상계를 풍미하였다. 고려후기의 대표적 불교종파인 조계종(曹溪宗)은 교선일치(敎禪一致)의 합일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고려 중기 천태종(天台宗)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지만, 천태종이 교종을 중심으로 통합을 지향한 것과는 달리, 조계종은 선종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불교는 고려후기로 가면서 점차 사회구조적 모순과 더불어 종파간의 갈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아 일시적으로 신앙결사와 같은 혁신운동을 펼치지만 원의 간섭기와 더불어 정치에 직ㆍ간접적 연루, 비대해진 사원경제로 인한 국가의 전제(田制)문란, 지나친 불사(佛事)의 성행 등 회복할 수 없는 모순을 통해 새로이 등장하는 성리학에 배척되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억압을 받게 된다.2. 도교도교는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고려시대에는 도교가 유행하면서 신선사상이 널리 유포되고, 장생술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공식적으로 유입된 것은 고구려 영류왕 7년(624)과 보장왕 2년(643)이었다. 이는 『고려도경』에도 나와 있는데,당은 흥기하여 노자를 받들어 모셨는데 무덕(武德) 연간(618~626)에 고구려에서는 사신을 보내 요청하기를,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을 강독시켜 심오한 뜻을 깨우쳐 달라고 하였다. 당고조는 그 요청을 기특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도교를 숭상하였는데 불교를 뛰어넘을 정도였다.위 기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도교는 고려시대에 매우 성행하였는데 이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 “우리 조정의 종묘ㆍ사직의 제사는 아직도 법식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도교의 초제(醮祭)는 번잡함이 도를 넘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교제사인 초제가 고려 초부터 성행하고 있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규보가 지은 『상원청사』, 『하원초청사』등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정기적으로 초례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도교의례의 주관자인 국왕은 초제를 통해 기원함으로써 국왕 자신이 천명을 받은 통치자임을 표명하여 그 권위를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교신앙이 널리 유포되면서 도교사원인 도관(道觀)의 건립이 추진되어 복원궁(福源宮)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복원궁에 대한 기사 또한 『고려도경』에 등장하는데,예종은 신앙이 독실하여 북송의 정화(정화)연간에 복원관(복원관)을 처음으로 건립하고 덕이 높고 참된 도사 10여 명을 받들었다. 그들은 낮에는 복원관에 있다가 밤이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언관들이 문제를 삼자 법금(법금)을 더욱 엄격하게 가하였다.위 기사가 그것이다. 이렇게 고려 사회에 유행하던 도교는 이후 조선의 건국과 함께 크게 위축되고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3. 기타 신앙(1)풍수지리설우리나라에서 대자연은 사람의 정복대상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이고 사람은 하늘의 양과 땅의 음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존재하는데 이러한 자연현상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자연에 변화를 일으키고 특히 대자연 중에서도 사람이 발을 디디고 서있는 땅이 음양의 기운이 흘러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지리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는 군웅이 할거한 후삼국시대였다. 지방에서 성장해 세력을 떨친 호족 내지 장군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신령한 지역으로 만들고 싶었다. 여기에 적합한 사상이 풍수였으니 그들은 다투어 그것을 끌어들여 이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보다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지역사회에서 유행하였는데 선종승려들은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전라도 영암 출신의 도선이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은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왕건이 죽기 직전에 내린 ‘훈요십조’의 두 번째에 등장하며 강조된다. 또한 전국의 수많은 사찰들이 풍수지리에 따라 건축되는 등 고려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문/어학| 2015.02.22| 3페이지| 1,000원| 조회(153)
    미리보기
  • [사학]과학과 종교의 관계 평가A좋아요
    과학과 종교의 관계- 목 차 -1. 머리말4. 현대의 환경윤리2. 중세 및 근대 초의 과학과 종교5. 맺음말3. 종교와 과학을 둘러싼 여러 쟁점1. 머리말20세기는 이른바 과학의 세기였다고 한다. 갈릴레이와 뉴턴시대 이래로 엄청난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과학에서 통신, 유전공학, 로봇, 의학 분야의 발전은 인류 문화를 기존과 다른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의 발전은 중세까지 유지되던 종교적 영향력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근대 과학은 16~17세기의 과학 혁명을 통해서 탄생했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과학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이후 산업 혁명기를 거치면서 기술이 과학에 접목되었고 그 결과 과학은 20세기의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주었다. 이렇게 과학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과학과 종교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학 연구가 심화 될수록 그 한계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현대 과학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즉 형이하학적인 것은 설명할 수 있지만 반대로 형이상학적인 것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즉, 과학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전체를 설명하지 못해준다는 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데 불완전한 도구이다. 이것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 종교라 할 수 있는데, 종교적 예속성이 과학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여기서는 과학과 종교가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알아보기로 한다.2. 중세 및 근대 초의 과학과 종교근대 과학이 탄생한 것은 과학혁명(科學革命)이라는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과학혁명이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그것도 16~17세기에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답함으로써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상과 문학적인 변화에 따라서 나눈다면 르네상스가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이다. 그런데 르네상스것일까?중세의 과학을 설명하는데 이어서 기독교를 빼 놓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인 자연관이 아니라 성서적 자연관을 가진 것이 중세 과학의 입장인 것이다. 즉 신의 전능성을 주장하며 신이 자연 세계에 까지 직접 개입하여 무엇이나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재해나 번개, 천둥 같은 기상 현상도 모두 신의 노여움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능한 신은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일은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그리스 과학지식 중 플라톤의 자연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에서 절정을 이루는 교부들의 노력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흡수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적어도 중세까지는 과학이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근대 초까지만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변화는 흔히 생각하기에 기독교와 과학이 결별하게 되는 시기라 여겨진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여전이 그 기초를 기독교에 두고 있었다. 다만 그 영향력이 중세에 비해 약해지고 기독교가 이제는 하나의 지배 이념이라기 보다 종교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시기가 바로 근대인 것이다. 그래서 과학에서 중요한 과제인 자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중세까지는 자연이 신의 섭리가 내재된 것이라 여겨 이것을 연구하거나 분석하려는 시도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는 신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행위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로 넘어 오면서 자연에 대한 기계적인 견해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 요소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뉴턴은 자연을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비인격적인 덩어리나 힘으로 보았다. 세계는 단지 움직이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앞서 말한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다른 창조물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목적은 자연 정복이 된다 이용했다. 첫째 계절을 변하게 하는 행성의 운동에는 일의 순서를 유지하는 움직임을 받지 않는 동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운동이라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성질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며 이런 성질을 드러내는 데에는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최초로 운동시키는 것, 정지상태에서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제 1동력의 근원을 아퀴나스는 신으로 이해했다. 둘째 세상에 물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변화 하려면 처음부터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제1원인이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셋째 가능성과 필연성이 전제된 것이다. 자연에 이는 모든 사물들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과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신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주장과 관련있다.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흄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신의 존재에 반대하는 논증 가운데 신이 관찰되기 전에는 사실과 양립할 수 없다거나 신의 개념에 대해 일관성이 없고 애매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특히 그는 기적에 반대하는 논증으로 유명하다. 흄은 기적이라는 존재 자체를 공격함으로써 기적을 인정하는 종교를 공격했다. 이외에도 그의 ‘악과 설계 증명’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신의 부재를 증명한다. 첫째 신이 악을 방지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신이 악을 방지할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못하다. 셋째 신이 악을 방지할 의도가 있고 그렇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을 통해서 그는 신이 전지전능하고 모두를 사랑하며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결국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자연 현상을 바라볼 때 어떠한 시각을 통해서 그것을 보느냐에 대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② 진화론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입장은 크게 개념에 대한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자연선택=적자생존’ 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적자’라는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될 여지가 있었다.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자연 선택의 과정을 신이 설계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런 주장은 과학을 신앙과 조화시키려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신학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했던 근본 이유는 그것이 창조론과 어긋난다거나 인간과 원숭이의 기원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신론(有神論)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 전반에 과학이 종교를 압도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많은 신학자들이 과학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성경이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은 성경을 쓴 사람의 희망적 사고이며 거기에 나오는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를 모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신화인 이상 과학과 부합할 필요가 없다. 특히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이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성은 타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물적 속성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 하였다. 일단 하나님이 창조할 때 진화 할 수 있는 잠재성을 주었다고 했다. 일단 하나님이 창조한 다음 자연에 맡겼다는 것이다.이러한 진화론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우리는 19세기의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그 둘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기존의 과학은 신학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다윈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은 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 결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원인들로만 자연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이라는 영역이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실증 과학을 무기로 한 전문과학자들은 교육계를 지배하면서 종교를 도덕적, 사회적 가치 기준으로 삼았던 모습 파악에서 시작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의 배치를 알기 위해 지구와 별과의 거리 측정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토대로 은하의 크기와 모양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상대성 이론을 근거로 하여 우주 팽창 현상을 밝혀냈다. 그 결과 은하의 후퇴 속도는 지구와 거리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이를 허블의 법칙이라 한다. 이것은 우주는 그 옛날 언젠가 작고 밀도가 큰 하나의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부터 빅뱅 가설이 적용된다. 이에 반대해서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가진 측에서는 과학연구의 범위를 문제 삼는다. 즉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한 학문인데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기원론까지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규명하려는 것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에서 다뤄야 할 문제이지 과학에서 다뤄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기존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빅뱅과 이후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부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개념을 수용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합의점을 모색했다. 사실 우주가 어떤 종류의 설계, 수학적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우주 속에 있는 수학적 체계나 자연적으로 정해진 값 즉 빛의 속도,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조금만 달라졌다면 우주에서 생명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창조의 순간에 신이 정교하게 조정해 놓았다는 주장을 창조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우주에 있는 수학적 법칙이나 원리를 나름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의 의지, 즉 창조라는 개념을 과학적 사실 위에 덧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우주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보충해주는 견해인 것이다.4. 현대의 환경윤리오늘날의 환경문제는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했다. 원래 그 목적
    사회과학| 2007.01.10| 5페이지| 1,000원| 조회(660)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3
13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4
  • B괜찮아요
    6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2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0:29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