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논의Ⅰ. 서 론Ⅱ. 본 론1. 신행정수도의 논의 원인1) 수도권 과밀화 현상2) 수도권 집중의 원인3) 지방의 절박한 요구2.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논의1) 신행정수도 이전의 반대입장2) 신행정수도 이전의 찬성입장3. 신행정수도의 지역개발 효과1) 정치적 효과2) 행정적 효과3) 사회적 효과4) 경제적 효과4. 신행정수도 이전의 실질적 대안1) 신행정수도 이전의 모형2) 신행적수도 이전의 실질적 대안Ⅲ. 결론Ⅰ. 서 론지난 대선 노무현 후보의 선거공약의 일환으로 등장한 충청권 수도권 이전 문제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결국 수도권의 과밀화를 염려하는 표심과 충청권 이전을 찬성하는 충청도의 표심에 의해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일조했다.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뜨거운 찬반토론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는 신행정수도 이전을 계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 상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상 왕조가 바뀔 경우에만 상상할 수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국민적 최종합의를 거치지 않고 각계각층에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분분한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신행정수도 충청권이전’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고 현재 추진하고 있지만 수도이전은 이미 새로운 공약이 아니다.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대전)은 71년 대선 때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주장한 이후 여러 차례 등장한 선거공약이다. 그 때마다 수도권 인구분산 및 국토의 균형적 발전에서부터 안보상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도 이전에 대한 여러 당위성과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정수도 이전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수도 이전의 한계와 현실적인 어려움이 계속적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수도 이전에 관한 논의는 한국의 현실에 있어 다뤄질 가치가 있다. 여기서는 국민간의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찬반의 논란 속에서, 뜨거운 핵심으로 등장한 행정수도 이전의 당위성과 이전이 갖는 지역개발 효과 및 궁극적인 대안에 대해 살펴볼 수도권 집중의 문제는 바로 서울 집중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서울 집중의 근본적 원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수도 서울에 소재한 중앙집권적 정치행정 권력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 집중의 원인은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역할과 힘이 점점 확대되고 커졌다는 사실과 그 중앙정부의 지리적 위치, 즉 우리나라의 수도가 바로 서울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는 산업화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중앙집권형 정부가 재정, 금융, 인허가 등에서 강력한 개입을 수행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을 통한 특혜가 독점자본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혜를 바라는 기업들 역시 서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중앙집권형 구조가 지방분권형 구조로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아직 우리나라 정부 기능 중에 중앙정부 사무가 약 80%를 차지하고 지방사무는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명목적인 지방자치 제도하에서 국가 권력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위치한 수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수도에 집중된 정치 행정 권력은 대기업이나 언론사와 같은 민간 권력의 집중을 유발하였다. 재벌 체계로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대기업 구조는 중앙집권형 정부구조와 유사한 중앙집권형 기업 지배통치 구조, 즉 일인 오너 중심 체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기업 지배 구조 하에서, 기업의 관리통제 기능은 서울에 위치한 기업 본사에, 핵심 연구개발 기능은 수도권에, 그리고 지방에는 단순 직접 생산시설이 분산되는 이른바 공간적 분업 (spatial division of labor) 구조가 형성되었다.이와 같은 서울에 집중된 국가 및 민간 권력의 집중은 곧 정보와 기회의 집중을 가져왔고, 연이어 투자의 집중, 공공 및 민간 서비스의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산업과 인구가 자체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시장 수요를 형성하면서, 누적적인 집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수간 부문의 분산화를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민간 부문에 대해서는 분산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공공기관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지방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처럼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수도권 집중 해소와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서 중앙정부 기능의 지방 이양, 즉 지방분권과 함께 수도권 기능의 지방 분산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대체로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분산과 더불어 분권이 강조되는 이유는 경제력의 분산(기업, 소득)만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간의 지배-종속성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고, 분권만 해서는 현재 이미 구조화된 지역 격차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므로 결코 지역간 격차가 해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지난 역대 정권도 이러한 분권과 분산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다양한 정책들을 취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은 그리 줄지 않았고, 수도권에 대한 집중은 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있다.따라서 중앙집권-서울집중 체제를 개혁하고 획기적인 지방분권, 분산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 또한 각 지역의 지방정부, 시민단체, 학계 등을 중심으로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종합 해 볼 때 수도권의 과밀화 현상과 그 부작용 또한 상대적인 비수도권 지역의 낙후 등으로 단순한 정책의 변화가 아닌 특단의 조치, 즉 신행정수도의 건설이 필요한 것이다.2. 신행정수도 이전의 대한 논의(1) 신행정수도 이전의 반대입장행정수도의 이전을 반대하는 이들은 현재 서울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현실적인 비용 마련 문제와 이전 정책의 지속성 의문제기, 효율적인 집행,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 및 국민의 의견 불치 등을 이유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첫째, 지정학적으로 서울은 더 이상 남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한민족은 원래 몽골대륙과 만주, 한반도를 오가던 북방계 민족임을 내세운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후 북쪽에 있었던 도읍을 점차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울 및 수도권의 집중화, 과밀화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여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막대하다. 수도권의 인구집중 및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수준이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주택난, 교통난, 난개발, 환경문제 등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미래에 수도권 집중형에서 지방 분산형으로 재편함으로써 지방의 종합적 발전도 유념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수도권 집중을 필히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둘째, 찬성하는 이들은 이전비용을 반대하는 이들보다 훨씬 적게 추정한다. 이전에 필요한 재원은 현재의 정부청사를 매각하면 대부분 충당할 수 있고, 이전으로 행정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고 한다.현재의 정부청사는 서울(세종로), 과천, 대전으로 삼원화가 돼 있어 그로 인해 비효율성과 보이지 않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셋째, 행정수도를 국토의 중심부로 이전하면 현 서울에서 부산 또는 여수까지의 3백 50km권이 1백 50km 반경권 내에 들어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총소요시간은 현재의 6시간에서 3시간 정도로 단축된다. 단축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산업에 활용하면 더 큰 소득 증대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분권적 국가구조가 이루어지고 지방경제가 활성화되며 수도권의 인구를 분산시켜 균형적인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행정수도에 대한 접근 비용을 축소시키며 국가물류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여긴다.넷째, 역설적으로 그 동안의 수도권 규제정책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는데서 시작된다. 서울 및 수도권은 해가 거듭할수록 인구집중과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에 국토의 불균형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지난 30여 년간 정부는 수도권 집중 억제와 인구분산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인구집중을 막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제적인 수도이전이나 개편을 주장하는 것이다.다섯째, 향후 남북통일을 염두 해두면 수도권은 물론 전국토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특정지역(수도권)의 과도한 집중을 미리부터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의 산업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지역 간살펴보았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이러한 수도 이전에 대한 논의는 이론을 위한 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론적 접근 역시 현실을 반영한 실현 가능성 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문제는 국가의 대사이므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 하에서 치밀하게 논의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수도 이전의 논의는 그 현실적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신행정수도 이전의 문제에 가장 모범이 될만한 3가지 모형을 제시하고자 한다.(1) 신행정수도 이전의 모형일극 집중형은 쉽게 말해 제2의 서울을 만드는 방안이다. 청와대와 중앙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주요 기관을 모두 새 행정수도에 옮기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기관간 업무 연계가 수월하고, 대상 기관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외국의 사례로는 미국의 워싱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터키의 앙카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극형은 행정수도 이전의 효과가 새 행정수도와 주변 지역에 집중돼 지역 균형 발전을 꾀하기 힘들다. 또 새로운 집중과 과밀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다.다극 분산형은 청와대가 위치할 행정수도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 그 산하기관까지 특성에 따라 수도권 이외의 지역으로 나누는 배치하는 방안이다. 이를테면 해양수산부는 부산, 농림수산부는 광주, 과학기술부는 대전 등으로 분산 이전하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지역 균형 발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새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수도권 바깥 지역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직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다만 행정, 입법, 사법부를 각 도시에 분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네덜란드의 경우가 가까운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 기관들이 서로 떨어져 있어 행정의 연계성이 낮고, 이에 따른 비용이 꾸준히 들어 효율성이 높지 않다.일극형과 분산형의 장단점을 고려한 절충형은문이다.
우익독재와 이념갈등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접근하는 것이 옳다.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은 각기 상이한 이념체제를 근거로 분단을 고착해 왔으며 이때부터 ‘반공’ 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권유지를 위한 방편이자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는 정치권이 정치적 도구로 이를 악용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은 보이지 않는 미국의 반공노선에 동조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반공을 부르짖어 왔다.순수한 사회비판의 목소리마저도 반공이란 기치아래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사회를 이끌어 온 우익독재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것이다.남한사회를 포괄적으로 이끌어 온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이며, 북한사회를 이끌어 온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남한은 우익적 요소를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이며, 북한은 좌익적인 요소를 가진 공산주의였다.민주주의의 개념의 과학적으로 사용하기에 자의적인 면이 많아 각 정권은 정도의 차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당성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갔던 것이 사실이다.그래서 이 저자는 민주주의란 개념대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우익과 좌익의 개념구분이 유용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좌익과 우익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다양성과 다원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좌익과 우익을 가르는 뚜렷한 기준은 무엇인가?또한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개념이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유동적이지 않은가라는 문제이다. 우리 정치권은 흔히들 ‘중도우파’니 ‘중도좌파’ 하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둘의 차이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알아내기란 쉽지가 않다.하지만 우리 정치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익과 좌익의 구분은 오늘날 보단 분명해 보인다.우리의 정치 역사를 보면 해방 후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틀린 보기가 되는 것이다. 분명 시대적 조류였고, 우익과 좌익이 난무하던 시절 자신들의 가치관을 주장한 운동이며, 투쟁이었을 뿐인데, 아직도 수험서 한쪽엔 공산당의 폭동공세로 소개되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어쩌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내 머리 어딘가엔 반공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북한은 함께가야 할 민족이 아닌 적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본다.헌법개정과 장기집권헌법제정 이후 우리헌법은 집권연장과 정치적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9차례에 걸친 개정을 거쳤다. 통치구조의 정당성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존재해야 할 헌법이 기득권의 정치 경제적 질서를 보호하며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한국의 법문화는 조선시대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적 법 관념과 일본의 식민주의적 유산이 합쳐져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 법문화는 미군정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으며 분단 이후 반공이라는 통치수단으로 인해 법은 집권세력에 저항하는 모든 불법을 정당화 시켜주는 만능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국민의 자발적 동의와 충성이 있어야 할 법이 오히려 경멸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9차에 걸친 헌법개정의 대부분이 신중한 입법작업이 선행되지 않은 채 날치기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 조작되었으며 특히 유신헌법(7차개정)은 헌법파괴의 절정이었다. 또한 헌법개정 내용에 있어서도 집권연장과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수단들을 수정하고 신설하는데 급급했다. 결국 이러한 헌법개정은 독재자들의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안겨주었고, 헌정질서는 흐트러져 가는 양상을 보였다해방 이후 노태우 정권 이전까지 역대 정권들의 헌법개정을 지켜보면, 부끄러운 자화상들이다. 날치기로 헌법을 개정하는가 하면 있지도 않은 수학의 논리를 가지고와서 헌법을 개정하는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유신헌법은 행정부에 과도한 힘을 실어줌으로써, 의회와 사법부는 허울일 뿐 재기능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개정이었다는가 하면, 실질적으로 국민의 정치적 의지에 기초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기능의 회복 및 강화를 골자로 했던 9차개헌을 헌법제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또 언제 헌법개정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헌법은 헌법 다워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헌법은 통치구조와 국민의 기본권을 정의한 최고법이다. 국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모두가 수긍하며 따르는 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다시 구태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헌법을 파괴하는 행위일 것이다.정치가들은 당리당략보다는 무엇이 국민의 기본권을 가장 잘 보장해줄 수 있는지 충분한 입법과정을 걸쳐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 역시 또다시 정치적 후퇴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헌법은 최고법이다. 그래서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매번 바뀌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신중한 과정을 거쳐 논의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대의 민주주의와 한국의 선거과정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란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투입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며, 선거는 시대가 안고 있는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민주정치의 기본원칙은 국민의 의사에 의해 정치를 행하는 것이며 거기에 선거가 있는 것이다.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의 선거와 다수결 원리는 모든 것을 타당한 근거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역대선거는 선거의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을 더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선거때마다 빠지지 않는 금권선거. 관권선거. 지역주의 라는 단어들이다.역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으며 70년대 이후에는 지역주의를 조장해 선거에 이용해 왔다. 최근들어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및 공천반대운동등으로 부정부패가 줄어들고는 있으나 아직 우리의 선거문화가 정치 선진국에 비해 낙후함은 두말할 나위 없는 현실이다.대의제 민주주의는 동일성 직접민주주의를 현대사까지의 선거의 역사였던 것이다. 호남에선 당연히 민주당이 영남에선 당연히 한나라당이 당선되는게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의 현주소였다.얼마전 인터넷의 기사에서 정치인을 기저귀에 비유하는 글을 보고 동감한 적이 있었다.내용은 정치인은 기저귀라는 것이다. 기저귀에 오줌을 싸고 물이 흐르고 더러워 졌는데도 우리국민은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살이 썪어 들어가고 고칠수 없게까지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기저귀는 한번 젖으면 바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거를 통해 계속 국민의 힘을 보여주면 비로소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것이며, 정치부패가 사라진다는 것이다.더러워진 기저귀를 다음 총선에서 바꾸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어 버린 것이다.작년에 있었던 대선에서 지역주의는 그대로 반복되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특이한 현상은 바로 세대간의 차이였다. 한편으론 세대간의 골이 깊어져 젊은세대와 늙은세대의 이질적인 가치관을 걱정하지만, 그래도 진보와 보수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도 또 한편으로 든다. 어느 사회나 진보와 보수는 존재하며, 또 서로 경쟁하면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대의민주주의의 정착과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로 국민이 원하는 국민이 바라는 정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경제정책의 전개과정 : 해방에서 유신까지해방이후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국가주도하에서 이루어졌다.먼저 미군정 기간은 절대적 빈곤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한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경제원조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군사,정치적 목적의 원조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미군정의 실정은 남한경제 파탄을 불러오고 정치적 이념분쟁만 조장했다.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 또한 원조경제로 일관된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것은 한국의 시장을 미국이 좌지우지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점령지 구호정책의 일환이었던 원조경제는 일시적인 배고픔과 빈곤을 해결했을지 모르나 원조물자의 범람으로 국내산업과 농업파탄에 큰 타격을 주었고 원조물자의 배정 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한국정치 또한 경제적 문제를 빼고선 논의가 되지 않는다. 역대 정권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적 논리를 피력했고, 또 경제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계략을 써 왔기 때문이다. 특히 살펴보고 싶은 것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다.군부독재라는 오명을 벗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박정권의 선택은 경제성장이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도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경제성장에 전력을 기울렸다. 어쩌면 그것이 정권재창출을 위한 유일한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다.국가주도적 경제성장을 하면서 박정권은 노동집약적이고 수출주도적인 산업구조를 만들었다. 자본과 자원이 없는 빈곤한 국가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의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경제시스템은 분명 한계가 있는 매커니즘이다.굴욕적 한일회담과 월남파병등으로 마련한 자본을 바탕으로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노동집약적 생산물을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방식은 많은 경제구조의 기본적인 조건이 필요한 매커니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국의 자본유입이 원활해야 하며, 계속해서 저임금 노동력을 유지해야하고, 세계경제는 호황을 누려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합되지 않으면 금새 경제는 무너지고 마는 의존적 경제시스템이 된 것이다. 비록 1960년대 후반 이러한 상황이 모두 부합되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룩해냈지만, 이것은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위에 지은 집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스템의 모순을 확인한 박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무언가를 또 찾으면 안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박정권의 비참한 종말은 정권유지를 위해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사회전반을 너무 통제하여 맞이한 필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운동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은 노동자 계급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때문에 가능했다.노동자 계급의 착취구조는 국가와 자본가 계급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분노는 지배.
신라천년의 역사 경주를 다녀오고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경주는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길 닿는 곳곳마다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적으로 선정된 석굴암을 비롯하여 불국사, 첨성대, 성덕대왕신종 등 그 이름만 들어도 탄성을 자아내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수치상으로도 경주는 국보 27점, 보물 56점, 사적지 67곳, 사적 및 명승 2곳, 중요민속자료 15점등이 있다. 이 정도 되면 누가 경주를 찾지 않을 수 있을까?내가 경주를 찾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고미술 수업을 위해 박물관이나 문화유적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얼마 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나의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학교 핑계로 서로 여행다운 여행도 없었고, 무언가 특별한 의미의 여행을 위해서였다. 조상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 앞에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신을 간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 경주라는 판단에서였다.나 역시 경주라는 도시에 오래 전부터 흠뻑 취해있었다. 작년쯤 삼국유사 풀어 읽기 란 교양과목을 듣게 됐는데 그때 경주의 남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산등성이 곳곳마다 베여있는 신라인의 정신, 남산이야말로 신라문화에 압축판이자 신라인의 정신을 대변하는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신라의 매력에 나 역시 경주가 다시 오고 싶었던 것이다.경주로 가는 길피서철이 되면 너나없이 약속이나 한 듯이 비슷한 시기에 산으로 바다로 떠난다. 즐거움을 찾아, 휴식을 찾아 떠나는 그들은 휴식과 즐거움보다는 짜증과 횡포에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지나면 즐거움이라 했던가? 또다시 그들은 내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그러한 일들을 반복할 것이다.굳이 피서철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여행의 법칙은 살아있는 듯 하다. 경주로 떠나는 날은 곤혹의 연속이었다.11월 15일 아침 전날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유난히도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그런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경주로 향했다.9시에 없었고, 그로인해 첫날은 아무곳도 찾지 못한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겨우 연락이 된 친구는 밤이 다 돼서야 경주에 도착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예약했던 콘도가 영문도 모르게 취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금요일이라 대부분의 콘도는 이미 만원이었고, 경주보문단지를 두시간이나 해매며, 겨우 잠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발품을 팔았던 탓인지 일찍 잠들었고 다음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아침햇살이 창가에 찾아오면서 또 다른 경주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보문단지내에 호수에서 분수가 올라오고 해맑은 물에 반사되어 빛나는 호수전체의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우리는 성덕대왕신종이 있는 경주국립박물관과 불국사 그리고 석굴암을 보기로 결정하고 길을 나섰다.{성덕대왕신종보문단지에서 10분 남짓 가니 경주국립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은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본관과 별관으로 나눠져 박물관이 있었다.먼저 입구를 지나 거대한 종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저것이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생각에 모든 관심이 거기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저 큰종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운반은 어떻게 했으며 도대체 누가 저토록 크고 웅장한 종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평소 우리문화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다고 자부한 내가 초라해지는 시간이었다.성덕대왕신종의 내용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신라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이 좋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부을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왔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는 구름을 타고 연화자(蓮華坐)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 약 1만8천9백Kg이다.특히 매시 정각에 그 전 녹음했던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그 소릴 듣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과 함께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고,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였을까? 종의 소리는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비바람에 깍이고 녹도 있을법한 저 종이 아직도 진리의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거룩한 생각.... 어쩔수 없이 우리는 조상의 지혜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한가지 아쉬움 점이 있었다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고 그 녹음으로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맑고 아름다운 종의 소리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현재 타종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후세에 중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종이 오늘날 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종은 늘 울려야 더 좋은 소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하루빨리 아름답고 은은한, 그러면서도 심오한 진리가 있는 종소리가 귓가에 들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또한 박물관의 고고관에서는 고대 경주와 주변 일대에서 발굴된 각종 유적과 천마총의 금관, 금관모등 많은 유물을 볼 수 있었다.뒤편에 위치한 미술관 역시 신라 시대 만들어진 각종 조각과 공예품들이 전시, 복원되어 있었다. 특히 황룡사를 복원한 모형은 크고 웅장한 황룡사에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당시 신라의 우수한 목조건축기술을 나타냈다.이밖에도 신라인들의 생활용품과 장신구등 많은 문화재가 박물관에 있었다. 또 바깥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조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불국사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불국사경주국립박 의외로 적을 것이다.불국사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통일신라 예술이 최고의 전성기때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건축하는데 무려 39년의 시간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뿐이다. 불국사...부처의 나라.. 불국사는 정말 부처의 나라이다.적어도 그곳은 중생들의 땅이 아니라 부처의 나라였던 것이다.{그런{의미에서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의 사찰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재라는 것이 훨씬 맞는 말이다. 그럼 왜 국가는 불국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이 필요했을까? 그때 시대를 보면 지배계층의 불화가 상당히 심했는데 이러한 국가적 상황 속에서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는 바램으로 불국사가 이루어졌을거라 생각이 든다.먼저 불국사의 배치도를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강한 축선에 의한 규범적이고 기하학적인 배치구성과 각 부분들이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불국사는 현재 크게 4부분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의 영역이 이것인데 이 영역들은 계단으로 둘러쳐져 모두 저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다시말해 4개의 작은 사찰들이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 영역은 저마다 고유의 원칙에 의해 각자의 경전을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적인 영역들은 보다 큰 차원의 불교 교리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각각의 영역들은 서로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각 영역의 높이와 크기, 그리고 위치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불국사의 본 영역 안에서는 자연 보다는 인위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구성된 가람배치는 종교적 느낌과 함께 왠지모를 긴장감을 연출한다. 이곳은 오직 부처의 나라이다. 주위을 돌려봐도 다보탑 우측의 송립을 제외하면 마치 하늘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다. 자연과 미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이렇듯 철저하게 인위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 자연 안에 독자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듯 하다. 불국사는 위치에서 부터 철저하게 인공이 느껴진다.각 영역들을 살펴보면 먼저 . 또한 다보탑의 모습 역시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대로 화려하고 복잡한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자하문 앞의 청운교·백운교는 비록 계단이지만 부처님의 나라(불국)와 사바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의미로 이름에 "교"자가 붙었다 한다.대웅전 일곽의 서쪽에는 극락전 일곽이 조성되어 있다. 극락전 일곽은 두 번째로 큰 규모인데 서방정토 사상, 즉 사바세계의 서쪽에 극락이 있다는 "동 사바 - 서 극락"의 교리대로 대웅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 일곽에는 석가탑이나 다보탑과 같은 탑 대신 석등이 하나 있는데 이는 화엄경에 나와있는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 즉 일승 아미타불이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리를 비치하는 탑이 있을 수 없다는 교리적 해석 때문이다. 극락전의 진입방법은 대웅전의 그것과 동일한데 청운·백운교와 자하문 대신 연화·칠보교와 안양문을 통해 영역에 진입하게 된다. 이곳은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연화·칠보교의 디딤돌에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흔적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극락전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매우 어색함이 보였다. 그 이유를 나중에 책자를 통해 알아보니 중앙칸에 끼어 있는 샛기둥 때문이라고 했다. 법식에 맞지 않게 세워진 기둥은 최근에 끼워 넣은 것이 분명하다. 불국사를 복원하면서 가장 문제시 되었던 것이 바로 복원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창때인 8세기의 것으로 하느냐, 아니면 중창때인 17세기로 하느냐의 논란이었다. 8세기의 건축은 현재 유구가 없는 관계로 고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선 중기인 17세기의 모습으로 복원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목조건축에서는 하부의 초석과 상부의 구조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구조체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8세기의 건축과 17세기의 건축은 구조적으로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다시말해 신라시대는 중앙칸이 좌우 협칸보다 2배 정도 넓었다. 이러한 구조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초석위에 조.
Ⅰ. 서 론하루가 다르게 급변화는 지금 시대에, 자유 민주주의 이념 아래 살고있는 우리에게 계급관계를 논한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이후 반상제도가 없는데 무슨 계급이냐고 하겠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적어도 대학생 눈에 비치는 우리사회는 계급이 존재해 보인다. 물론 개인의 노력으로 인해 충분히 자아발전 할 수 있는 길은 있지만 왠지 너무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글은 우리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 추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 전개된 국가와 여러 계급들간의 세력관계의 특징과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 론먼저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관련하여 논의할 수 있는 계급의 골격을 알아보자.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기본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다. 흔히 구중간계급 이라 일컫는 쁘띠부르주아지와 최근에 또다른 관심의 대상이 된 신중간계급 이 있지만 이 글에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에 초점을 맞춰 전개하고자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특징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세력관계와 특징, 변화를 알아보고자 한다.1.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적 불평등 즉 계급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제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제기되고, 또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산업별 취업자 분포 변화 추이에 대한 검토를 통한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의 양상과 특징을 알아보자.{연 도농림·어업광 공 업서비스업합 계전 체농림업전 체제조업1965년58.555.910.39.431.2100.01970년50.449.414.313.235.3100.01975년45.743.119.118.635.2100.01980년34.032.422.521.643.5100.01985년24.923.724.523.450.6100.01990년17.917.127.627.254.5100.01995년12.411.823.623.564.0100.02000년10.910.520.220.268.9100.0·자료 : 통계청 (재구성함)표1에서 보듯 농림업의 급속한 비중감소는 산업구조 및 산업인력의 탈농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광공업 종사자도 1990년까지는 증가하지만 그 이후로 하강하고 있으며, 기타 서비스부문 종사자의 비중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다 지금은 마침내 70%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결국 이 지표는 농업인구의 급속한 감소와 산업인력의 급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구조적 변화 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또 취업자들의 종사상 지위별 분포의 변화 추이에서도 우리사회의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연 도자영업주무급가족종사자임금근로자합 계1965년36.831.032.2100.01970년34.226.938.9100.01975년34.325.140.6100.01980년34.018.847.2100.01985년31.314.654.1100.01990년28.011.460.6100.01995년27.99.662.5100.02000년28.59.162.4100.0·자료 : 통계청 (재구성함)표2의 종사상 지위별 취업자 분포의 변화추이는 무급가족종사자의 급격한 감소, 자영업주의 점진적 감소, 그리고 이들 영역에서 이탈해온 인력을 흡수한 임금근로자층의 급증으로 요약된다. 이는 곧 자영자의 일정한 온존 위에서 소수의 고용주와 다수의 임금근로자로 재편되는 자본주의 사회적 특성의 강화 경향을 보여준다.2. 한국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특징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은 다른 국가들, 특히 서구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특징들을 보여 왔다. 그 주된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기간 을 기준 삼아 비교해보았을 때 압축적 산업화 를 특징으로 한다. 한국의 산업화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 이후로 본격 추진됨으로써 불과 40여 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둘째, 한국의 산업화는 산업화의 주체 라는 측면에서 국가주도형 산업화 라는 특징을 갖는다. 한국에서는 선성장 후분배 의 이념 아래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지향하는 강력한 국가주도에 의해 산업화가 추진된 것이다.셋째, 한국의 산업화는 시장 의 측면에서 보면 수출지향형 산업화 였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미국, 일본으로부터 주로 차관형태로 도입한 대규모의 외자와 국내의 저렴한 노동력을 결합하여 해외시장을 겨냥한 수출지향형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 온 것이다. 이같은 수출주도형 산업화는 무엇보다도 자본과 시장의 해외의존도 심화에 따른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이라는 구조적 맹점을 만들기도 했다.넷째, 한국의 산업화는 추진방법 의 측면에서 대기업 중심의 총량적 경제성장 을 지향했다. 그로 인해 한국의 산업화는 낙후된 농촌,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간의 불균형, 지역간 불균등 발전, 열악한 복지수준, 공룡화된 재벌의 등장 등과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게 되었다.결국 한국산업화는 국가주도 아래 대기업 중심의 수출지향형 산업화에 의한 총량적 경제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하고자 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특징은 또한 우리사회의 계급형성과 그 세력관계의 전개과정 속에서 좀더 분명하게 표현되어왔다.3. 계급 세력관계의 특징과 변화1) 한국사회 계급구조의 변화 추이한국사회 계급구조 변호를 살펴보기 위해 통상적인 맑스주의적 계급범주에 따른 시계열별 구조변화를 살펴보자.{1960년1970년1980년1990년자본가 계급4.84.76.26.2구중간계급73.456.250.434.3신중간계급경영인층7.70.515.51.221.41.632.02.7감독인층1.73.65.37.6전문노동가층5.510.714.521.7노동자계급14.123.622.027.5합 계100.0100.0100.0100.0·자료 : 조돈문(1994)표3을 중심으로 지난 30년간 한국사회의 계급구조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변화들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구중간계급의 비율이 급격하게 감소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업구조의 변화로 구중간계급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농업부문이 위축된데서 비롯된 것이다.둘째, 신중간계급의 상대적 비중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셋째, 노동자 계급의 상대적 비중도 커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업구조의 변화, 다시 말해 제조업을 비롯한 비농업부문의 확대에 따른 것이다.넷째, 자본가 계급의 비중이 다소 증가했다는 점이다.이와 같은 계급구조의 변화 추이는 우리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이를 바탕으로 각 시기별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국가와 계급 상호간의 세력관계를 알아보자.2) 1960년대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자본주의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로 한국의 권위주의정권들은 선성장 후분배 사회안정 반공 등의 이데올로기와 강력한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요구를 철저히 억눌러 왔다. 국가와 자본가계급은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 전략에서 노동자계급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등을 국제경쟁력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간헐적으로 사회적 이목을 끄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조직적이고 대대적으로 표출하지 못했다.노동자계급과는 대조적으로 자본가계급은 국가의 비호아래 성장을 거듭했다. 국가의 친자본가적 산업화 정책과 자본가계급의 다각적인 계급실천이 빚어낸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시기의 계급관계의 초점은 국가와 자본가계급의 공조 아래 강행되어온 억압적 노동자계급의 우여곡절의 시간이라 하겠다.3) 1987년 ∼ 1997년 IMF 위기 이전이 시기는 국가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치열한 공방의 시기라 하겠다.
나의 부모님이 치매에 걸린다면...{2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불의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에 사람들은 특정한 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 가족의 일원이 병에 걸리게 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 전체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치매의 경우 그 고통은 다른 병의 그것보다 훨씬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래서 어쩌면 자포자기하게 되는 경우도 쉽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나의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소설 노트북 에서 노아는 자신의 육체 또한 충분히 감당하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한평생 사랑해 온, 치매가 걸려 기억조차 상실한 엘리를 아무런 불평없이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핀다. 이러한 모습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노아와 같이 지극한 사랑으로 나의 아내를 돌볼 수 있을까? 노아와 같이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확신이 가지 않는게 지금의 내 모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 나이에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는 것이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이다.치매란 병은 정확한 치료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환자 자신뿐 아니라 주위의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부담감을 가져다준다. 또한 환자에게 한시도 눈을 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쩌면 불행한 병이다. 그렇다고 모든걸 포기한채 자포자기 한다면 그것 역시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지금부터는 나의 부모님이 치매가 걸렸다는 가정하에 글을 쓰고자 한다.지난달 나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한 통을 받았다.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라 겨우 정신이 든 나에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말이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왜 내게 이런 비극이 생기는 걸까 하늘을 원망했지만 그것은 나 자신을 더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아직 아버지와 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지금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마냥 상태가 더 악화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뾰족한 방법 역시 없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기적만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그전과는 다르게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고 그저 방황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에게 친구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단지 편찮으시다고 했지 치매란 말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어머니가 치매가 걸렸다는 수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아직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어서이다.답답하기만 하다. 아버지도 전보다 많이 얼굴이 상하셨다. 낮에는 직장에 가시고 밤에는 병원에서 주무신다. 이러다 아버지마저 몸이 상할까 염려가 된다. 그래서 다음학기는 휴학을 하고 우선 어머니를 돌볼 생각이다.어제는 아버지와 오랜 시간 전화통화를 했다. 아버지도 답답하셨는지 나에게 어쩌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치매환자만을 전문적으로 받는 요양원이 있는데 거기에 우선 보내는게 어떠냐고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나를 낳아주시고 이때까지 내 뒷바라지를 하시던 어머니인데 그런 곳에 보내자니 선뜻 그럴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또 앞으로 좋아질수도 있는데 그런 곳에 있으시면서 오히려 증세가 악화될까 걱정도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내 생각에 동감하시는지 그럼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