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5. 30. 서양사 사료강독페미니즘 사상, 341-368발표자 : 역사교육과 3학년 T31960068 김정환{포스트모던 페미니즘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사상에 끼친 몇가지 주요한 영향들A.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과 실존적 페미니즘B.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과 해체주의1)자크 라캉2)자크 데리다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세가지 관점A. 엘렌 씩수스B. 루스 이리가레이C. 줄리아 크리스테바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비판결론포스트모던 페미니즘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진리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가설들은 거부한다. 그들의 글에서 스타일 상으로 남성 인 절대적인 말을 질서정연하게 둘러싸고 있다고 여겨지는 남근중심적 사고의 구체적 예는 그 어느 것이라도 모두 피하고자 했다.비록 하나의 변명이론 구축에 대한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거부입장이 페미니즘 운동의 통일성에 위협을 주고, 또한 여성억압을 모두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공하기를 희망하는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론적 문제점을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거부는 복수성, 다원성, 차이라는 페미니즘의 불길을 더욱 더 부추긴다.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사상에 끼친 몇 가지 주요한 영향들최근까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불란서 페미니즘 으로 일컬어졌다. 이란 용어는, 미국 독자들이 씩수스,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와 같은 작가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이 그들의 불란서 성 이기 보다는 그들의 철학적 관점이고, 그 관점을 자크 데리다와 자크 라캉과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공유한다는 점을 인식했을 때,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라캉과 마찬가지로, 씩수스, 이리가레이, 그리고 크리스테바는 전통적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과 실천을 재해석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어떤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이론을 전개시키고자 글을 쓴다. 그리고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여성들이 실제 세계에서의 그들의 존재방식과 행동 방식을 변화하도록 유도하고자 글을 쓴다.A.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과 실존적 페미니즘많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뿌리가 시여, 라캉은 이 일련의 것들을 상징적 질서 라고 명명했다. 어린아이가 사회 속에서 적절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 아이는 언어를 통해서 그 상징적 질서를 내면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사회의 언어규칙에 더 많이 순종하면 할수록, 그러한 규칙들은 그 아이의 무의식 속에 더 많이 새겨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징적 질서는 개인의 통제를 통하여 사회를 통제한다.라캉이 상징적 질서의 무의식적 수용과 내면화를 강조한 것을 볼 때, 라캉이 상징적 질서는 우리보다 앞선 것이어서 우리가 적응해야만 하는 그러한 관계체계인 사회라고 믿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라캉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해석하여, 무의식은 언어-특히 상징적 질서의 언어-와 같은 구조를 지닌다고 언명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질서 속에 적응하려면 우리는 아버지의 법칙 에 서서히 순종하게 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라캉은 말했다.소년들은 어머니와의 분리과정을 소녀들과는 다르게 경험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통하여 주체의식과 개별성에 진입할 뿐만 아니라 가치가 가득 부여된 사회의 역할들, 즉 지배질서를 내면화한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아이는 다시 태어나는데 이번에는 언어로 태어난다.소녀들은 해부적 구조 때문에 성심리학적 드라마에서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화할 수가 없다. 그 결과 소녀들은 상징적 질서를 충분히 수용하고 내면화할 수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한 두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우선 여성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배제당하고, 그 질서의 주변부로 제한되며, 냉대를 당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여성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법칙 을 내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법은 외부에서 부과되어야만 한다. 여성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단어들이 남성적 단어들이기 때문에, 여성성은 진압되고, 침묵되며, 구속당한다. 여성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는 자신들이 느끼는 바를 그 어느 식으로도 결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의 상실은 막대하다.라캉은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공통점이 있다면 타자성을 찬양하는 것과 언어, 지식과 같은 지배적인 총체화 구조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유사하게 지배질서, 특히 그것의 가부장적인 양상들을 비판하고, 여성적인 것, 여성, 타자의 가치를 향상하고자 한다. 다시말해서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것이 다원적이고 복수적이며, 서로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서, 사실상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입장을 확인하거나 아니면 표준적인 진리 주장을 선포하게 된 위험성이 있다. 바로 이러한 위험으로 인해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이즘"으로 끝나는 모든 칭호를 거부하게 된다. 그들은 칭호가 항상 우리의 개념적인 우주를 안정시키고 조직하고 합리화하고자 하는 남근말씀중심적인 추진력 을 수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부인하긴 해도, 페미니스트 라는 칭호에 대해 별로 거리낌이 업는 이리가레이는 물론 씩수스와 크리스테바를 페미니스트 로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사람 모두의 글은 가장 근본적인 해방을 여성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페미니즘적이다.A. 엘렌 씩수스엘렌 씩수스는 본래 문체를 실험하는 소설가이다. 그녀는 데리다의 의 개념을 글쓰기에 적용하면서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대비시켰다. 다양한 사회문화적 이유로 남성적 글쓰기는 여성적 글쓰기 위에 완전히 군림했다.씩수스는 남성적 글쓰기와 남성적 사고가 이원적 대립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반대했다. 남성은 개념들과 용어들을 양극의 대립물로 둘씩 결합시키고, 항상 그 중 하나에 다른 하나보다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불필요하게 실재를 분할했다.씩수스의 견해로는, 이 모든 이분법은 근본적으로 이분적인 한쌍, 즉 남성/여성에게 영감을 찾는데, 그때 남성은 능동적이고, 문화적이고, 밝고, 높고,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모든 것과 연관되고, 여성은 수동적이고, 자연적이고, 어둡고, 낮고, 부정적인 모든 것과 연관된다. 남성은 자아이고 여성은 그의 타자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의 세계 속에 그가 만든 조건으로 존재한두리에서의 찌꺼기 또는 잉여물 이외의 것으로 자신을 경험할 수 있게 하려는 목표를 위해 세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 여성들은 언어의 특질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리가레이는 여자들이 추상적인 인간다움 속에서 해방을 발견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나도 너도, 또한 우리도 과학의 언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라는 점을 지적했다.이리가레이가 옹호한 두 번째의 해방전략은 여성의 성활동과 관계되어 있다. 씩수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여성의 생식기관이 암시하는 다양성에 상당히 매혹되어 있었다. 이리가레이는 단순히 여성들의 복수적이고, 순환적이며, 목적없는 질의/음핵의 리비도적인 유기적 조직을 단일화하고,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남자들의 남근의 리비도적인 우기적 조직과 대비시키지 않았다. 이리가레이는 또한 이러한 리비도적인 유기적 조직과 대비시키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이러한 리비도적인 유기적 조직들의 표현이 성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간표현으로 확장된다고 주장했다.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여성이 이용할 수 있는 세 번째 전략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부과한 것을 실제로 흉내내는 것이라고 이리가레이는 말했다. 만일 여자들이 남자의 눈에 영상으로만 존재한다면, 여자들은 그러한 영상들을 취하여 그 영상들을 확대하여 다시 남자들에게 반사시켜 주어야 한다. 이리가레이의 오묘한 거울의 움직임은 여성에게 부과된 흉내를 흉내내면서 남근중심적인 담론의 효과를 단순히 과장함으로서 오히려 취소시키고자 의도한다.이리가레이는 심지어 자신의 이론에 의해서도 구속당하기를 거부하면서 지배적인 남근중심주의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차이점들을 궁극적으로 지루한 동일성 속에 억지로 옭아맬 남근중심적인 개념들에 의해 결코 총체적으로 냉동화되거나 화석화될 수 없을 다원적인 의미를 지닌 삶에 대해서 뭔가 말한다.C. 줄리아 크리스테바크리스테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씩수스나 이리가레이와 다르다. 씩수스와 이리가레이가 여성적인 것 을 생물학적인 여자, 그리고 남성적인 것 , 그것은 현대의 페미니즘 사상에 가장 흥미로운 발전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씩수스,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가 독특하게 서로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해도 그들은 무, 부재, 변두리, 주변부, 억압당한 자에 잠복하고 있는 가능성을 식별해내는 것과 같은 어떤 경향을 공유한다. 더구나 그들은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권한을 부여받기 이전에 존재했을 그러한 종류의 비이원적인 비대립적인 사고들을 생각해내려는 욕망, 사물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려는 공통된 욕망을 소유한다.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침묵을 깨트리고 말과 글을 이용하여 여성들이 이원적 대립, 남근중심주의, 그리고 말씀중심주의를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는 통합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에서, 소위 말하는 비정상적인, 상궤를 벗어나는 변두리 사람들을 배제하였고 추방하였으며 고립시켰다. 다양한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과 합세하여 다원성을 찬양한다면 비록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여럿은 될 수 있다.부록포스트모더니즘이 운동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해체(Deconstruction) 혹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코, J.라캉,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는 어떻게 말하기가 다.
중국의 서양인식과 세계관의 변화Ⅰ. 머리말Ⅱ. 서양문화의 전래와 그 인식Ⅲ. 서양이해의 노력과 師夷의 제기Ⅳ. 시국인식과 대응Ⅴ. 中華思想의 굴절Ⅵ. 맺음말Ⅰ. 머리말17세기 말∼18세기 초에 중국은 비로소 중국 이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나 그 세계의 장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중요한 가교 역할을 맡았던 것이 선교사였다. 이들의 손에 의하여 중국의 사정이 서양에, 서양을 문화가 중국에 전해져 서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선교 활동이 금지되면서 서양의 사정은 더 이상 중국에 소개될 수 없었고, 중국 스스로도 서양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이시기 중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학술·문화적으로 발전하여 天朝意識과 華夷觀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18세기의 경우 서양은 급변하는 시기였다. 경제와 사회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축되었며 대외 시장을 개척하고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급속하게 일어나는 서양의 변화를 중국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그러므로 중국은 서양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양의 충격 아래 19세기를 맞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의 충격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중화의식과 天朝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던 중국은 결국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서양의 長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동안 서양의 것을 奇技淫巧로 보아 무시하였던 중국이 그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양무운동의 중심사상은 비록 서양을 배운다는 것이었으나 中體西用이란 준칙 아래 철저한 것이 되지 못하였고 이른바 師夷도 制夷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지 富國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결과는 성과를 크게 거둘 수 없었으나 중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서양의 충격을 받고 서양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19세기 중국이 서양에 대응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그 전제로 서양문화의 중국전래와 서양에 대한 이동은 서양의 문화를 중국에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교황청에 보고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하는 중요한 교량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선교사의 수가 늘어나면서 교황청 안에서 '禮儀之爭'이 일어났다. 이는 유럽사람들에게 중국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나,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사대부의 태도가 반교로 돌아섰으며 선교사의 활동이 제한되어 중국과 서양의 교류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또한 청은 입관이래 해금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해외 진출은 불가능하여 서양의 사정을 알 수도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후 해금정책은 풀렸으나 중국인들의 해외 진출은 활발하지 못하였으며, 반면에 서양상인들의 진출은 갈수록 증가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한다든지 서양의 사정을 중국에 전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과 서양의 장벽은 갈수록 두터워졌고, 급변하는 유럽세계가 전해지지 못한 채 중국중심의 세계관으로 일과되었다.한편,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직접 활동할 수 없게되자 말라카·마카오·싱가폴 등지를 중심으로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이들은 선교에 필요한 책들을 포함하여 중문으로 잡지를 발행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서양의 역사와 지리, 과학기술에 관련된 내용들이 포함되어 서양의 사정이 중국에 소개될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학교를 세워 서학을 전파하고 선교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선교사의 이러한 활동과 노력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를 이해시킬 수 있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국측은 서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서학전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서양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인식은 아편전쟁 직전에 비로소 제기되었다.2) 이인(夷人)에서 양인(洋人)으로의 인식변화1739년 중국과 외교교섭을 벌리기 위해 방문한 영국의 매카트니를 중국에서는 한갓 朝貢사신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중국과 제를 가하여도 갈수록 늘어났는데 청조는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은혜로운 하사 정도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오랑캐와 중국의 관계를 엄하게 차별하고 중화의식만 고취시켰으며, 이러한 관념은 서양에 대한 그릇된 인식만을 부풀려 놓았다.서양인으로 처음 夷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인 린제이였다. 그는 대영제국은 결코 이국이 아니라 外國 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중국 측에서는 이는 나쁜말이 아니라 하나의 호칭일 뿐 이라고 하며 該夷 대신에 該商이라는 용어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서양을 夷로 보는 입장은 아편전쟁 때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860년 이전까지도 중국의 고급관리나 사대부들은 서양 각국을 이로 보았다. 夷자 사용 문제는 2차 아편전쟁 당시 북경이 위협당하고 있을 때 영국측이 다시 제기하여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무력에 굴복한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夷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못박았고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도 삼궤구고의 예를 올리지 않도록 하였다.이러한 천진 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중국은 법률적으로 전통적 천조체제가 정식으로 와해되어 중국은 이 때부터 더 이상 천조 상국이라는 틀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다른 나라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공친왕 혁흔이나 문상과 같이 서양을 보는 인식에 큰 진전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일반관리나 사대부들의 세계관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관리나 신사층이 2차 아편전쟁이 끝난 다음에 문서나 편지에서 夷자의 사용을 버리게 되었고 외국을 중국과 평등한 입장에서 보았다. 때문에 외국과 관련된 사정을 이야기할 때에도 종전에 사용하던 夷務란 용어 대신에 洋務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Ⅲ. 서양이해의 노력과 師夷의 제기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서양을 소개한 중국인들의 저서가 보이나 이는 연구라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서양을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고 연구나 이해를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세의 학문을 제창한 당시로서는 개명된 관리였다. 1839년 그가 아편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자 스스로 서양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반드시 당시 서양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 허실을 알아야 통제할 수 있다 고 여겼다. 그는 광주로 부임하게 되자 아편무역에 관한 서적과 서양 각국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는 서적을 수집하였고 외교 업무에 능한 현지인을 역원으로 선발하였다. 또한 신문과 잡지를 구입하여 필요한 자료를 뽑아 비밀리에 역원들에게 번역시켰다. 따라서 임칙서는 근대 중국에 있어 지방의 최고위 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사람 가운데 첫 번째로 서양사정을 이해하려 하였고 세계지식을 구비한 인물이 된 셈이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보수파에 의해 공격받고 반대에 부딪쳤고, 천조 고급관리 의 체면을 잃게 하였다고 비난받았다. 결국 임칙서는 아편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불행하게도 전쟁의 책임문제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는 그가 수집한 자료를 위원에게 넘겨주어 위원은 훗날 이들 자료를 정리하여 를 편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아편전쟁의 패전은 임칙서나 위원 이외에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서양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 되고 이에 관련된 저서들을 남기게 했다. 임칙서나 위원은 비록 서양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였고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서양을 夷로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를 배우지 않으면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이의 장기를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위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서문에서 분명하게 이 의 장기를 배워 이를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Ⅳ. 시국인식과 대응1) 채서학과 중체서용론의 등장태평천국과 2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은 당시 지식인들로 하여금 變局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제 2차 아편전쟁의 참패와 湘軍·淮軍이 태평천국을 진압하면서 서양의 군사력과 접촉한 경험은 많은 사대부들에게 서양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양무파이거나, 더 진보적인 변법파이거나, 그 반대다시 말하면 정치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익으로 보았고, 침략으로 손해를 본 것을 큰 해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861년에 풍계분은 중체서용론의 단서를 제공한 를 세상에 내놓았다. 풍계분의 책은 증국번을 비롯한 실권을 장악한 고급관리들에게 양무쪽으로 기울도록 영향을 미쳤다.중체서용에서 중학이란 중국의 전통의식 형태와 정치·경제제도를 가르키고 있다. 한편 서학이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견선이포(견고한 군함을 만들고 대포의 장점) 기예를 배우는 것이었고, 서양의 자연과학과 상공업제도를 배우는 것이고, 19세기 말에는 과학기술과 정치제도와 인문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중체와 서체의 관계는 서용을 이용하여 중체의 體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이 점은 바로 중국 근대화 운동에서 하나의 한계를 가져온 점이기도 하다.양무운동은 바로 대변국에 처한 중국이 구국의 방안이었는데 그 방안이라는 것이 군기의 제조와 운용의 학습을 통하여 이를 갖고 서양인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는 적절치 못한 방안이었고 또한 그것조차 불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그 원인은 제안자의 서양문화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정치제도와 시대정신이 자강운동을 전개하는 지도자들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체서용론은 19세기 말의 마지막 개혁의 기회였던 무술변법 시기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유신운동의 한계를 가져온 장본인이기도 하다.Ⅴ. 서학사상의 굴절 : 서학중원 설西學中源이란 본래 서학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즉 서양 문화는 중국의 고대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서학이 중국으로 동점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서학중원 설이다. 이 설을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은 黃宗羲로 그는 중학은 전해오지 않고 서양인들에게 빼앗겼다 고 하였으며, 심지어 강희제도 에서 古人의 曆法이 西士로 전파되어 그들이 이를 배우고 더 발전시켰다 고 하여 서학은 중국의 법에서 나온 것이라 확정하였다. 사실다.
머리말중세 유럽에서 11-13세기는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팽창, 즉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와 발전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유럽의 팽창 혹은 12세기의 개화 라는 표현으로 많은 중세 관련 서적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프리드리히 헤르는 그의 저서 중세의 세계 (제5장 12세기의 개화)에서 12세기는 서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지성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새로운 다채로움, 세계의 방대함, 세계의 위험,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있었다. 라는 말로써 12세기를 설명하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에 십자군(전쟁·원정 등 여러 가지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논외로 하고, 교제인 서양 중세사 의 표현에 따라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이 미친 영향 혹은 팽창과 개화의 시기가 십자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라는 커다란 물음을 제기하고, 이제까지 이어져 오던 배경·원인·경과·결과 식의 시각을 개론적 시각을 조금 탈피해서 농촌사회, 상업과 상인, 여성,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 용어들과 십자군 원정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농촌 사회와 십자군농업 생산력과 농촌사회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11-13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장원 구조의 변화가 십자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아니면 십자군 원정이 농촌사회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여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은 농업혁명 으로 까지 불리는 이 시기의 농업 생산력 증가와 인구의 증가(어떤 것이 먼저 인지는 알 수 없지만)가 내적 팽창과 안정을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외적 팽창인 십자군 원정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정도였다.그렇다면 이 시기 농민들의 십자군 참여와 특히 빈농들의 참여는 어떠한 계기로 이루어 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러했듯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열정이었을 것이고 그 이면을 살펴보면 땅을 찾아서 혹은 십자군에 참전한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비잔틴 제국 내 여러 곳에 사법적 특권이 부여된 식민지를 건설하여 아시아와의 수송을 사실상 독점했다. 피사 인들은 11세기에 티레니아 해와 시칠리아 섬 주변 해역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었다.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군대와 군수품 수송을 독점했고, 레반트와 예루살렘 지역에 상업거점을 확보하여 교역했다. 그리하여 11세기 이후 전 지중해로부터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물러나고 서부 유럽 상인들이 지중해에서 동방과 유럽 사이의 무역을 장악했다.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십자군 원정이 상업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상인과 십자군 전쟁10세기에 봉건제가 정비되고 12세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서유럽의 봉건 사회는 안정을 구가하고 힘을 축적하게 된다. 서유럽은 이를 기반으로 11세기말부터 대외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이러한 대외 팽창은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에서 절정에 달했다.십자군 전쟁이전에도 성지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매우 컸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대부분 종교적 열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성지를 회복하고자 열망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여러 번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전쟁의 추진력은 처음과는 다른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특정 집단이 차지하게 될 이익을 기반으로 했다.교회와 귀족, 기사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이익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도시들은 지중해를 이용한 동방교역로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지역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의 향료, 모포, 약제, 카페트 등을 서유럽으로 반입하며 중계무역의 이익을 누리는 데는보다 넓은 인식의 기회를 제공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성직자, 기사들과 농노들 그리고 성장해 가던 상이 계층을 확산시킴으로써 서유럽을 기나긴 봉건적인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역로 확대는 폐쇄된 농업경제에 강한 충격을 가했고, 높은 수준의 이슬람 문화는 도그마에 찌든 로마 카톨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상업과 화폐이시기 사람들은 어떠한 화폐를 사용했으며, 각 나라마다 화폐의 가치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무역이 가능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되었다. 수업을 할 당시에는 그에 대한 조사가 미흡하여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수업을 마친 후 책을 찾아보았다.상업의 불활 이면에는 화폐제도에 있어서 비상한 발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폐주조 활동이 향상되었고, 소액은화인 데나르(denar)가 원거리 교역의 화폐로 사용된 후 보다 가치있는 화폐가 창출되었으며 마침내는 금화의 주조와 신규발행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경제 활동의 진보성이 환전업자들의 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상파뉴 견본시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은 새로운 보조수단으로서 환거래를 탄생시켰다. 비단이나 향료를 구입하기 위하여 거주하는 도시에서 각기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의 통화로 화폐를 창ㅇ한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프로뱅이나 트르와예에서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고 난 후에 그곳의 통화로 그들이 지불을 위하여 사용하길 원했던 대차계정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지역만큼 다양한 통화의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졌던 어음증서로 나타났다.중세 여성이제까지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던 중세 여성 특히 십자군 원정과 여성의 지위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주제는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에 대한 참고자료를 찾기가 힘이 들고 특히 십자군 원정과 관련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찾아내는 재미 또한 있을 것이다.중세 여성의 지위는 규정하기 어렵고 계급에 따라 다르고 장소와 시간에세기에 일부 왕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들이 사망하거나 통치할 수 없었던 여러 경우에 처하면 국가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예를 들면 헨리 2세의 아내 엘레노어는 아들인 리처드 1세가 1190년에서 1194년까지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이미 17세를 넘기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프랑스의 블랑쉬는 아들인 루이 9세가 십자군에 참전한 동안에 프랑스를 매우 훌륭하게 다스렸다.위와 같은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정조대의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많은 여성들은 남편들이 십자군에 나가 있는 동안 오히려 더 억압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정조대가 나오게 된 것은 이미 많은 귀족 여성들이 남편이 십자군에 나가있는 동안에 바람은 피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 여성들이 장인으로부터 받은 봉토와 관련된 경제적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다.귀족 여성들과는 달리 일반적인 여성들, 즉 경제력을 가지지 못했던 많은 여성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지위는 향상되었을까? 아마도 경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현대의 많은 여성들도 그러하지만 중세 여성들에게서도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매춘일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많은 여성들은 이 시기에 오히려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 위치가 하락된 것으로 보인다.이 시기 법률은 남성의 법률이었고, 남성은 가정과 사화와 국가에서 유일한 권위자였다. 종종 영웅의 칭호를 받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봉건제도도 기독교도 여성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을 가정 안으로 가두었으며,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여성들을 몰아냈다. 오히려 다른 신앙집단과 이단 집단은 여성에게 훨씬 많은 자유와 넓은 활동무대를 제공했다. 교회는 언제나 이단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영적으로 불안한 여성들을 계속 불신했다. 많은 여성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철저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용하고,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의 경건왕 루이도 유대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새로운 유대인 회당 건립을 허용했다. 아울러 유대 상인들의 보호를 위한 특허장을 발행하고, 유대 안식일을 휴무일로 정했다.반면에 538년 오를레앙 공의회에서는 유대인의 포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이 공의회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통혼을 비난하고, 기독교도가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했으며, 기독교도에게 유대의 안식일을 거행하지 말 것과 일요일에 일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성주간(聖週間)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일련의 공의회에서 이러한 규제들이 거듭 확인된 것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유대교로 개종시킬지 모른다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우려를 말해준다.9세기말 프랑크 왕국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목적을 지닌 법령들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령들에는 유대인 회당 신축 금지, 기독교도를 관장하는 고위직에서의 유대인 축출, 유대인의 기독교도 노예 소유 금지, 유대교 포교활동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거나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기독교도에게는 처벌이 내려졌고, 유대인과의 통혼이 금지되었다. 실제로 유대인과의 통혼은 간통으로 간주되었다.서고트족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을 척결하기 위한 매우 잔인한 법들이 제정되었는데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도교도의 증호감 에서 비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유럽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에서 유대인은 상인이며, 의사며 외교관이며 군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게르만 왕들은 유대인을 자신들의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 중에서 자신들의 법률을 받는 한 종족으로 대우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중세 초부터 자신들의 법의 지배하에 살면서 점차 번성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유대인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11세기에 일어났다. 유대인의 사주를 받아 사라센들이 성묘를 파헤치고 예루살렘 대주교를 참수했다는 소문이 1010년 무렵 서유럽에 떠돌기 시작했다. 이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