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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에 대하여 평가A좋아요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에 대하여◎목차◎1. 들어가며...(시대상황)2. 샤를르 보들레르1) 보들레르의 생애2) 시대와 작품·시대적 사조(상징주의·작품3. 앙드레 지드1) 앙드레 지드의 생애2) 시대와 작품·지드의 작품을 통해 본 시대적 상황·작품분류3) 『좁은문』4. 장 폴 사르트르1) 사르트르의 생애2) 시대와 작품·시대적 사조(실존주의)와 사르트르·작품3) 사르트르 비판5. 나가며...6. 참고문헌1. 들어가며...(시대상황)2. 샤를르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1821-1867)1) 보들레르의 생애보들레르는 1821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6살 되던해 사망했다. 의붓아버지와의 관계는 부드럽지 못했다. 중등학교에서 징계를 받은 것은 의붓아버지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살 때 보들레르는 처녀시집을 쓰고 파리의 방랑 예술인들과 자주 어울린다. 그를 이런 나쁜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부모는 그를 여행시킨다. 그는 모리스 섬에 체재하다 다시 돌아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탕진하고, 마약을 복용하고, 자살까지 기도한다. 빚더미에 올라앉자 부득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당시에 "미술비평"이라는 제목으로 미술전시회의 서평을 쓰는데, 이 작품은 걸작 비평서의 하나로 인정받는다. 그는 또한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했다. 1857년에는 세상의 빈축을 사면서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판했다. 그 후 알바트로스, 교감, 우수, 취하세요, 여행으로의 초대, 음악, 이방인, 가을의 노래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2) 시대와 작품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가장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보들레르가 주축이 된 상징주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의 작품들이 어째서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자·시대적 사조(상징주의)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의 예술운동과 그 경향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답파 등의 외면적 러한 생각은 보들레르와 예이츠 등에게 많은 보들레르초상, 쿠르베, 1848년경 영향을 끼쳤다.·작품보들레르는 낭만주의 이래로 발전되어온 각각의 경향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시적 완결성을 기하면서도 도덕적 규범에 매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한(기괴한)것이나 퇴폐적인 감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상징주의는 정제된 표현을 지향하는 아폴로적 경향과 그로테스크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악마주의 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 양분되었다. 즉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했던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아폴로적인 경향이라면 시인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랭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회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 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은 더할 나위없이 더러운 현실을 초월하는 예술의 정묘하고 완벽한 형식미를 보여주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 서문에서 '악에서 미를 추출'하고 싶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과연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는 이러한 이중명제들이 통합하여 대립하고 있다. 보들레르는 이 이중명제 때문에 모든 인간은 신(神)과 무(無)사이에서 찢기우고 있다고 생 『패덕자』를 발표한 1902년까지이다. 모든 구속에서 탈출하여 완전한 자유를 찾아 헤맨다. 자아의 해방을 가져다준 아프리카 여행의 송가 『지상의 양식』을 발표했다.·불안한 장년기 : 『좁은 문』(1909), 인간에게 순수한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아 의식이 단절되는 순간에 비롯되는 무동기의 행위라는 『교황청의 지하도』(1914), 『전원 교향악』(1919), 『사전꾼들』(1926). 모험과 절제, 쾌락과 희생의 두 극단 사이를 방황한다. 벨기에 처녀 엘리자베드 리셀베르그와의 사이에 카트린이라는 딸이 생기자 아내와의 불화가 폭발한다. 『코리동』에서는 자신의 성생활 방식과 취미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진정된 노년기 : 1939년 이후 모든 창작 활동을 끝맺는다. 『여인의 학교』, 『로베르』, 『쥰비에브』 3부작을 발표한다. 1951년에 임종하여, 퀴베르빌의 묘지에 아내와 나란히 묻힌다.2) 시대와 작품·지드의 작품을 통해 본 시대적 상황전후문학(戰後文學)은 아프레게르(apr s-guerre)라고 불리워 진다. 이것은 전후(戰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아방게르(avant-guerre, 전쟁 전)의 반대어로서, 전후파, 전후세대 등으로 번역된다. 원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모든 가치체계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한 시대 사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은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등의 전위적(前衛的)인 예술로 나타났는데, 앙드레 지드 등도 이러한 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한편 2차 대전 후에는 두 대전을 모두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2차 대전 후만을 의미하게 되었다.앙드레 지드는 『콩고 기행』에서 마르크 알레그레와 콩고 여행 중 가혹한 프랑스 식민 정책에 희생되고 있는 불쌍한 토착민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이를 고발했다. 이후부터 그는 허위, 부정에 대한 증오, 피압박자에 대한 사랑, 진실 추구의 욕구 등의 정서적 태도를 간직했다. 이로써 지드는 "현대의 양심"이라 불렸다.앙드 있다.완만하면서도 예리한 감정 분석을 도입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심리 소설의 계열에 속한다. 본래는 중세 소극(笑劇)의 형식이었던 소티는 지드에 와서는 경쾌하고 익살맞으며 의식적으로 희극적인 레시의 자의적인 형식으로 변모하였다. 이 형식을 빌어 인간과 인생에 대한 견해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팔뤼드』,『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가 대표작이다.『교황청의 지하도』에서는 여러 형식을 혼합하여 그 속에 익살과 풍자와 모험의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로써 『사전꾼』에서는 소설의 총화라고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등 여러 가지 기법상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인생의 다양성과 당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던 사상들을 취급했다.지드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인간성의 자유를 찾아 방황한, 그 순례의 길 위에 세워진 도표이다. 시대와 함께 괴로워하고 시대와 함께 성장하는 무한의 미완성으로, 따라서 고정된, 발전 없는 완성의 적이다. 194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선정 이유도 "지드 씨는 광범위한, 그리고예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그 저작에 있어서 인간성의 제문제와 제상태를 두려움을 모르는 진리애와 심리학적 통찰력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었다.3) 『좁은문』4년만에 완성된 이 작품은 종교의 순수한 정신 아래서 깃드는 고귀한 사랑의 형태를 후세 젊은이들의 초점에 맞추고 있어서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지드 자신의 에피소드와 전작들에서 쓰여진 구도나 전개과정들이 상당부분 들어있다. 일례로 제1장의 뷔꼴랭 숙모 얘기는 마들렌느(지드의 사촌. 항상 지드의 소설에서 이상향과 같은 여인으로 등장했고, 후에 지드와 결혼한다.)의 친모를 교묘하게 소설화한 것입니다. 마들렌느는 지드의 두 살 연상인 사촌이다. 유년시절을 같이 보내다 사춘기(15세)때 재회하면서 지드의 일생에, 그리고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 작품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묘사가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저녁이 회색의 밀물처럼 가득히 와ouville)의 모델이 된 도시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그의 유학기간이었다. 독일의 베를린 대학과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파리에 있는 꽁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39년 그는 전쟁에 동원되지만 1940년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 이듬해 풀려나자 그는 메를로-뽕티와 함께 지식인 저항그룹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1945년에는「Combat」와「Le Figaro」의 특파원으로 두 번에 걸쳐 미국을 여행하면서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특히 그 해에 그는 '레종 도뇌르'(La Legion d'Honneur) 훈장의 수여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1945년은 그가 창간한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가 처음 출판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부터 그는 정치문제를 비롯한 현실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탄원서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64년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여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74년 꽁도르세 고등학교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철학교수로서 대학 강단에는 더 이상 섰던 적이 없다.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직접 토로하는 것 이외에는 평생을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사르트르가 출판한 최초의 저서는 1936년에 자아에 관한 문제를 다룬 『상상력』이라는 책이었다. 1938년에는 그의 유명한 소설 『구토』가 출판되었으며, 『정서이론의 스케치』와 소설집 『벽』이 그 이듬해 나왔다. 1940년 그는 독창적인 이마쥬론인 『상상력 : 상상력의 현상학적 심리학』을 출판했다. 그가 사병생활 시절 병영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철학저서 『존재와 무』는 1943년에 출판됐다. 그 해에는 그의 희곡 『파리떼들』이 Theatre de la Cite에서 공연되었다. 1945년에는 두 권으로 자다.
    인문/어학| 2002.05.15| 14페이지| 1,000원| 조회(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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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속에 나타난 경제현상 평가B괜찮아요
    1. 들어가며...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영화『해피투게더(부에노스아이레스, 춘광사설)』는 1997년 칸 영화제 감독상, 1997년 금마장 촬영상, 1998년 금장상 남우주연상 등 매우 많은 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는 동성애 영화라고 해서 수입이 보류됐다가 뒤늦게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개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칸에서 상을 받은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는 면에서는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이 영화는 동성간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이 특이할 뿐, 둘 사이에 오고가는 감정의 질감은 이성간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홍콩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갑니다. 아휘와 보영은 갈등 끝에 헤어지지만 얼마 뒤 보영은 아휘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의심 많은 보영을 아휘는 견디지 못합니다. 이 영화는 감독의 독특한 화면구성이 두 사람의 쓸쓸하고도 대안 없는 사랑을 시각화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감독 왕가위는 현재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의 신세대 감독이 그렇듯이 우울하고 암울한 영상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영상들은 아버지세대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벌써 중국 영화계에서 커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 아버지세대에서 충분히 해내지 못한 경제적 성장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2.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이 영화에서 많은 경제적 현상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보여지는 영상만으로 왜곡된 해석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건 영화는 보며, 해석하는 사람의 것이니까... 노력 끝에 네 가지 정도의 경제적 현상과 관련된 부분을 찾았습니다.첫째,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라는 대사입니다.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도 그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바로 이 대사에서 경제적 문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대사는 앞에서 얘기한 왕가위 감독의 배경과도 많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왕가위 감독은 상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같이 홍콩으로 건너갔는데 그때 때마침 문화혁명이 일어나서 중국 본토에 남아있던 누나와 형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대사가 나타내는 경제적 문제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 시대에 일어났던 이런 경제·문화적인 상황들을 모두 되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두 번째로는 보영이 다쳐서 아휘에게 찾아간 후 아휘의 집에서 일어난 장면입니다. 보영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아휘가 쳐다봅니다. jump-shot이 되고 아휘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영이 쳐다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경제적 현상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환경제의 불균형상태'입니다. 아휘와 보영 둘은 분명히 마음속으로는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함을 실현시키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서로를 외면하면서 서로에 대한 끌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재화가 있는 교환경제 하에서 각각의 수요자가 서로 다른 점에서 배분을 하게 되는 불균형상태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분명히 아휘도 자신이 원한 적절한 배분점이 있고, 보영도 자신이 원한 배분점이 있습니다. 이 둘의 배분점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둘은 서로 만나지 않는 다른 점에서 배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세 번째로는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 '동성애'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들은 흔히 '이반'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속여야만 올바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성향을 밝힌다면(마치 홍석천처럼...) 거의 암매장을 당하는 정도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서구의 일부 사회를 제외하고는 어느 사회·문화에서든지 거의 비슷합니다. 홍콩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영과 아휘는 자신들의 고향인 홍콩을 버리고 아르헨티나의 황량한 도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경제적 현상을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이반'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수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대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반'은 극소수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경제에서도 이런 소수의 수요자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요자가 아무리 그들의 효용의 추구를 요구하더라도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윤극대화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런 상품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생산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이제 국가의 개입이 요구됩니다. 바로 공공재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약간은 다른 측면일 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좀더 빠른 출·퇴근을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욕구에 부응하는 시설을 만들기에는 초기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고 또 유지비 또한 개별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철도·고속도로의 건설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경제성이 획득되고 난 후 서서히 개별기업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영과 아휘의 '이반'적인 사랑에서 이런 공공재의 필요성과 연관시켰습니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이 소수의 수요자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의 욕구를 채우고 싶어도 일반적으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쉽게 효용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국가에서 동성애를 찬성하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즉, 공급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이런 소수의 수요자도 아무런 제약 없이 경제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네 번째로는 얼마 전에 배운 '파레토 최적'의 개념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이런 '파레토 최적'에 대해서 많은 경제입문서를 보았지만 너무도 설명이 다양해서 대충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아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휘가 '이반'적인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을 때, 그는 그가 좋아하는 고향인 홍콩에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르헨티나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막판에 가서 그가 조금은 '일반'적인 모습-여기서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그가 이성적인 사랑으로 사랑관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영과 너무도 만나고 싶지만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 상황입니다-으로 변모해 감에 따라 그가 그렇게 그리던 홍콩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배운 '파레토 최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효용을 감소하지 않고는 다른 한 사람의 효용을 높일 수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휘가 보이는 파레토적 상황은 그가 '이반'이라는 최대의 효용을 누리게 되면 홍콩이라는 다른 효용을 포기해야하고, 그가 홍콩이라는 효용을 누리게 되면 '이반'이라는 다른 효용을 포기해야 하기 상황입니다. 이런 '이반'과 '일반'의 상황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홍콩'이라는 재화가 모두 파레토적 상황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어 가는 도중에 아휘는 이런 '파레토적 최적'상태를 찾기 위해 끊임없는 '파레토 개선'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 가서는 조금은 '일반'적인 모습에 다가가면서 '홍콩'이라는 재화를 가지는 파레토적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3. 대안들...지금까지 영화『해피투게더』에서 나름대로 발견한 경제적 현상들에 대해서 서술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발견한 경제적 문제들은 그 해결책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왕가위 감독의 아버지세대에 대한 비판점을 시사한 부분에서는 문제로 삼은 것이 문화·경제적 정체의 문제였습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가 1997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중국의 경제도 지금 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도입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면서 옛날의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모습도 다시금 찾아가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면 중국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감독들의 아버지세대에 대한 비판은 서서히 수그러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영/경제| 2002.05.15| 4페이지| 1,000원| 조회(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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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38선에 관한 여러 생각들... 평가A+최고예요
    /들어가며...1945년 8월에 한반도에 진주한 미·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분담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에 설정한 임시분사 분계선이다. 38선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다시 휴전과 분단 고착화의 산파역을 맡게 되었고, 종전 후 열강들의 실리추구(實利追求)를 위한 지도선상 위의 전략선이었다. 당시 국내 정치 및 건준(建準)세력들 또한 분단의 책임을 회피할 순 없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승전국인 미. 소 또는 일본-가장 구체적 분단의 이유를 제공했던 세력들이라는 점에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44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연합국들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연합국의 수뇌들이 모여 종전 후 일본(또는 독일)의 점령지 처리에 대하여 상의하고 있었다. 이중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에 대한 첫 언급이 있었으나, 소련의 참전 직전에 있었던 "얄타 회담"이후 조선에 대한 처리 문제는 공식적인 문서 한 장 없이 '신탁통치'정도로의 구두 합의로 회의를 마쳤고 일본의 패망과 함께 38선은 확정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38선의 성립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38선이 성립된 건 일본의 전쟁패망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커다란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나라가 나뉘게 되는 것은 그 나라가 직접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을 경우에 많이 일어나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35년간이나 일본의 식민상태에 있었는데 어째서 우리 나라에 38선이 그어지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38선이 아마도 우리가 역사책에서 당연하게 배우는 위와 같은 논리만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롭게 역사를 돌아보고자 했다./국제상황...5월 7일-독일 항복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던 제 2차 세계 대전의 전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럽 전선의 소련군은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였고, 미국군과 영국군은 북아프리카 쪽에서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무솔리니 정권을 무너뜨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역전의 마침내, 히틀러가 자살하였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1945년 6월 21일 오키나와-함락되는 오키나와1945년 4월부터 시작되어 3개월간을 끌었던 태평양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오키나와 전투가 막을 내렸다. 나미츠 제독은 오키나와 방어군이 45년 6월 21일 현재로서 30,000명이 희생되며 사실상 해체됐음을 선언하였다. 전쟁기간동안 오키나와의 도민 90000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마지막 3일 동안은 무려 9000명의 일본군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본토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오키나와가 이제 일본본토를 공격하는 미공군의 B-29폭격기들의 기지로 사용되게 되었다. 미공군은 왕복 4,800km 거리의 마리나스섬이 아닌 이 오키나와에서 출격하게 되어 상당한 시간과 연료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7월 26일 영국, 미국, 소련의 정상들은 포츠담에서 모여 전쟁후 일본의 처리 방침과 의논하였고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하였고, 그로 인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1945년 2월 23일 이오지마-이오지마(유황도)에 휘날리는 성조기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미국이 주도권을 잡게된다. 1944년 11월이래, 미군 폭격기 B-29는 쉴새없이 일본 본토를 공습했고,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 동안, 미군은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여 1945년 2월에는 마닐라를 탈환했다. 마닐라를 탈환한 미 해병대는 4일간의 격전을 끝에 이오지마섬의 남쪽끝 수라바치산 정상에 승리의 성조기를 꽂았다. 도쿄에서 1,2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 조그만 섬을 공격하던 미군에게 수라바치산 정상에 견고하게 구축된 진지를 격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결국, 그 임무는 미 5 해병 28 연대에 의해 완수되었고,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는 장면을 해변에서 올려다 보고있던 미 해군 장관은 스미스 미 해병 소장에게 "수라바치산 정상에 성조기가 올라가오늘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국민들은 반드시 들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곧이어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항복 문서를 읽어 내려갔고, 서울 시민들은 흰옷을 입고 거리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고 온 나라에서 열광과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시골구석 깊숙이 처박혀 있던 풍물패가 나와 밤이면 밤마다 마을들을 휘젓고 다녔고 온 국민은 흥분으로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며칠전 한반도의 북쪽에는 이미 소련군이 와있었고 미군들이 남쪽에 올 것이라는 소식도 있다. 일본으로부터 지배를 받고있는 동안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많은 운동을 했다. 특히, 김구를 비롯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만주에서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과의 합동작전으로 본토상륙작전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로 전쟁이 일찍 종결됨에 따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레지스탕스들이 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공격하여 전쟁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한국의 경우 대일 선전포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한편, 일본이 한국을 악랄하게 지배해 왔던 조선총독은 그들이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하기전, 민족주의자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게 된다. 그것은 치안권을 넘겨 줄테니 일본인들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총독은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었던 여운형에게 같은 제안을 한다. 여운형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치안권을 넘겨받은뒤, 8월 15일 광복 선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이 치안권을 바탕으로 건국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이후, 9월 8일, 소련이 북한에 준비한지 약 1달 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1945년 9월 8일 인천-미국의 남한 진주소련 군대가 북한에 진상륙하였는데 이러한 미군의 모습이 남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상륙후, 미군은 조선총독부로 가서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았고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총독부에 걸려있던 일장기가 내려갔고 이어서 미국의 성조기가 올려졌다. 이것은 한국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결국 다른 강대국인 미국 군부의 지배를 받게 됨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를 '미군정기'라고 하며 '미군정기'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수립이전까지 3년 동안 계속되었다. 항복 문서를 받은 미국은 38도선에서 소련군과 만났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동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들은 출신부터 달랐다. 미국은 세계자본주의의 모범적인 국가로 세계에서 아무도 갖지 못한 원자 폭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련도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미국과 쌍벽을 이룰 만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은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이었다. 이 두 거인들은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손을 잡았었고 결국 그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제 그 적이 없어지고 두 거인만이 남은 것이다./이런저런 생각들...38선 성립배경에는 포츠담 밀약설, 군사적 편의설, 일본 유도설 등을 들수 있다. 그럼 이런 여러 가지 성립설에 관한 것들을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자① 포츠담 밀약설1945년 7월 17일 미·영·소의 수뇌들이 독일의 항복에 따른 유럽 처리 문제와 대일전의 조속한 종결을 위한 논의를 갖기 위해 포츠담에 모였다. 이 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선언된 것 중 조선에 관한 것은 카이로 회담의 재확인뿐이었고, 참모 회담 등의 비공식 석상에서 한반도에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이 논의되었다. 포츠담 밀약설은 "당시 열린 미·소 참모총장 회담 도중 미육군 참모총장인 마샬대장이 작전 국장 헐에게 내린 지시-미국의 한반도 진공에 관한 준비-에 따라 헐과 그의 참모들이 38선 부근을 미·소 양군의 군사 활동 경계선으로 결정했다"는 미육군성 공식 책자에 나타난 자료에 근거한다. 즉, 지상 경계선에 대한 연구 지시 직전에 소련군의 밀약 설이라고 할 수 있다.②-1 일본 유도설일본 유도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구체적 사료이기 보단 당시 일본 대미작전에 관한 우연(?) 또는 항복 시기에 대한 절묘한 선택에서 출발한다. 1945년 5월 30일에 일본군 대본영은 대미전략상 전술강화란 구실로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갈라 북쪽은 관동군이, 남쪽은 대본영이 직접 지휘하는 식으로 재편성을 하게 된다. 본래 일본의 관동군은 만주를 비롯한 중국 전역과 한반도지역을, 대본영은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를 작전 지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 측의 남방 지역에서의 공세와 중국에서의 작전 한계로 인하여 전선은 점점 위축돼 가고 있었고, 특히 미국의 유황도점령과 일본함대의 궤멸, 동경이 미국의 폭격권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본토 결사 항전을 준비케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에서도 패망을 의식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38선을 중심으로 한 작전권 재편성은 항복 이후 일본의 미래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일본은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 얄타 회담(1945.2.10)과 독일 항복(1945.5.8)이후 급속히 연합군과 가까워지는 소련을 보고 일본은 일단의 위기의식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재정 러시아를 상대로 빼앗은 북해도 지역과 조선을 두고 벌였던 러·일전쟁 때문에 소련은 독일을 제압한 이후 다음 목표는 일본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소련의 진입을 조선의 38선 이북에서 막아 보자는 의도에서라는 것이 일본 유도설이라고 생각한다.②-2 일본 유도설또다른 설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9일 밤 어전 회의에서 포츠담 선언(1945.7.26)에서 제시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이러한 일본의 항복 결정 시점이 가지는 의의는 한반도에 있어서 미국의 단독 점령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결사 항전을 고수했다면 미국은 본토 진공이 곤란에 놓이고 이 사이를 틈타 소련은 한반도를 너머 일본 북해도 이상을 점령, 그리하여 미·다.
    인문/어학| 2002.05.15| 5페이지| 1,000원| 조회(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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