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代의 黨爭- 舊法黨과------------------------------------------------------------------------------------------新法黨의 對立을 中心으로 -Ⅰ. 序論Ⅱ. 宋代 黨爭史------------------------------------------------------------------------------------------東洋近世史 舊法黨과 新法黨의 對立─────────────────────────────────────────────1. 黨爭의 發生背景2. 黨爭의 전개과정Ⅲ. 王安石의 新法1. 王安石의 新法의 시대적 배경2. 王安石의 改革思想과 改革政策3. 王安石의 新法의 結果와 評價Ⅳ. 結論Ⅰ. 序論中國社會에서 階層間의 對立과 政爭은 어느 時代에서나 存在하였다. 漢代의 宦官과 儒生의 싸움에서 나타난 黨固의 禁이나 唐代의 進士출신자와 非진사출신자의 牛·李의 당쟁, 그리고 明代의 東林派와 非東林派의 싸움 등은 정책을 놓고 싸움을 하였다기보다는 계층간의 정권쟁탈전의 성격이 짙다.그러나 神宗代의 新法黨과 舊法黨의 黨爭은 政策을 놓고 改革과 保守의 치열한 政策對決을 벌였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의 黨爭과 그 성격이 다르다. 또한 이러한 宋代의 黨爭은 神宗時代에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太宗 때에 華北출신관료와 江南출신관료의 對立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北宋代의 黨爭은 王朝 中期부터 末期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관료사회 전체가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中期 이후의 많은 인물들이 세력의 흥망에 따라 中央과 地方을 전전하였고, 그 와중에서 執權勢力이 바뀔 때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대한 宋王朝의 정책도 수시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宋代史를 이해하기 위해서 黨爭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宋代 이전 唐代에도 당쟁은 심각했지만, 宋代의 黨爭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 이전 시대와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우선, 이전의 黨爭과 差遣이 皇帝權 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기존 官僚勢力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관계 중심부에 등용됨에 따라, 그들 사이에는 반목과 대립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皇帝權은 官僚間의 분쟁까지 효과적으로 다스릴만한 제재수단은 갖추지 못했다는 限界性도 지니고 있어서 이러한 분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한편 위와 같은 황제권의 강화와 대조적으로, 文治主義政策로 인해 士大夫官僚의 身分이 保障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權限이 확보되었다. 宋太祖가 讀書人을 宰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大臣·諫官을 살해하지 말라는 遺訓을 남기면서, 宋代 士大夫官僚는 완전히 官界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정치상의 過失에 있어도 다만 遠方에 좌천될 뿐 사형을 당하진 않았다. 또한 宋代는 國政에 대한 言論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國政은 처음부터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上下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후에 최종적으로 皇帝가 決定하는 討論을 거치기 때문에 國政에 대한 批判을 자유로이 가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 改革案은 다른 시대보다 더 격렬한 贊·反 여론을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다.마지막으로 宋代에는 朋黨에 대한 기존의 否定的 認識의 變化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朋黨이라는 말은 원래 친근한 벗을 뜻하는 同類·同志의 뜻인 朋과, 이해 때문에 모인 小人의 집단을 뜻하는 黨이라는 상반된 뜻을 지닌 두 글자의 합성어인데, 이미 《戰國策》이나 《史記》에서부터 "明主塞朋黨之門"과 "禁朋黨 以勵百姓"에서 보듯이 否定的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後漢末과 唐代에 黨爭으로 인한 禍가 일어나면서 朋黨이라는 용어는 정치상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國史編纂委員會, 「朝鮮中期의 政治와 經濟」, 『韓國史』30, 1998하지만 宋代에 와서 歐陽脩의 '朋黨論'에 의해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歐陽脩는 그의 유명한 '朋黨論'에서 利를 좇는 小人은 일시적인 私黨(僞朋)을 이룰 뿐이지만 은 財政의 어려움을 天子를 비롯한 모든 官僚가 勤儉, 節約하여 타개해야 한다는 현실체제 내에서의 개선책을 주장하고, 新法黨의 王安石은 기존 현실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보고 理財에 뛰어난 자를 채용하여 根本的인 原因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예를 들어 司馬光은 財政의 어려움을 天子를 비롯한 모든 官僚가 勤儉, 節約하여 타개해야 한다는 現實體制 내에서의 改善策을 주장하고, 國家는 부당한 간섭으로 經濟力을 强化시킬 수 없으며, 法制의 시행으로 사회의 風俗을 개선시킬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王安石은 전체구조의 현실을 재정비해야 어려움이 해결된다고 보고, 理財에 뛰어난 자를 採用하고, 근본적인 原因을 제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急進的 改革主義者인 王安石은 中小農民과 商工業者를 保護하고 國家財政을 바로잡기 위한 新法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新法은 相對的으로 地主, 大商, 官僚集團의 利益에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王安石이 新法을 통한 政治改革을 단행함으로서 司馬光, 呂海, 范純仁 등 舊法을) 舊法은 王安石이 내세운 新法에 대칭되는 말로서 宋初이래의 기존법, 즉 祖宗之法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守護하려는 官僚와의 사이에 치열한 黨爭이 展開되기 시작한다. 더욱이 이들 뿐만이 아니라 韓琦, 富弼, 歐陽脩를 비롯한 慶曆年間에 范仲淹과 함께 改革을 주장하였던 大臣들 마저도 反新法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新法이 神宗의 강한 지지하에 실행단계에 접어들자 黨爭은 점점 더 激烈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舊法官僚의 新法에 대한 비난은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특히 祖宗의 법도를 바꾸어 小民과 利를 다투고 있다는 점과 新法의 골자인 富國强兵策이 法家的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된 공격목표였다. 이러한 舊法黨의 계속적인 반대에 熙寧 3年 5月 神宗은 制置三司條例司) 天子에 직속하여 新法에 관계된 모든 사항을 직접 논의, 결정하는 기구를 해체하였지만 靑苗法이 편하다는 지방의 의론을 전해들은 神宗은 王安石의 新를 宰相으로 하여 신법·구법정치를 절충함으로써 黨爭의 폐단을 없애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徽宗은 新法政治에 뜻을 두고있어 親政을 회복하자 蔡京을 宰相으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정치를 담당하게 되면서 구법관료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양종국, 「北宋代 黨爭의 전개과정과 성격고찰」, 『中國學論叢』4 , 1988蔡京은 元祐의 구법관료에 대하여는 중앙관계에서 몰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司馬光을 우두머리로 하는 120인 姦黨의 碑를 세우고, 다시 宗室이 이들의 자손과 婚姻하는 것을 禁하는 조칙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徽宗 崇寧年間에 이르면 黨爭은 본인은 물론 그 禍가 자손에게까지 미칠 정도로 과격해 진다. 물론 新法黨 내에서도 蔡京의 이러한 과격한 조치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마저도 蔡京에게 정치적 보복을 당하게 되고 결국 北宋의 滅亡 직전까지 新法黨은 정계에서 우의를 점할 수 있었다.다만 徽宗末年에 蔡京 등이 燕雲 16州의 회복을 위해 일으킨 "燕山의 役"이 오히려 金軍의 침공을 유발시켜 北宋社會가 위태로워지면서부터는 구법관료의 중앙정계진출이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欽宗은 즉위 초부터 舊法政治의 부활에 뜻을 두어 舊法黨 관료의 진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지만 이때에는 舊法官僚 대두의 시기였지, 新法·舊法 양 세력의 교체가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哲宗 元祐年間 以後의 黨爭 역시 新法과 舊法政治의 대립이라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이미 정치이념 문제는 뒤로 밀려났고 黨爭이 政權獲得을 목적으로 한 勢力다툼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신법과 구법관료간에 누적되어온 사사로운 대립감정이 표면에 등장함으로써 黨爭은 점점 더 激烈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仁宗·神宗代와 달리 이 때에는 黨爭의 폐해로 인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동Ⅲ. 王安石의 新法1. 王安石의 新法의 시대적 배경王安石은 北宋의 神宗이 즉위한 후 宰相으로 발탁되어 6년 간 정권을 잡고 혁신적인 新法을 실시, 이에 정면으로 대립한 북방 출신 보수파 사이의 충돌은 주로 정치이념의 차이가 그 원인이 되었다. 舊法黨이라 일컬어지는 보수파가 《春秋》에 입각하여 관료들의 도덕적 지도력이 국가의 기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존의 정치제도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하며 부분적인 개선만 주장한 반면, 新法黨이라 일컬어지는 개혁파인 王安石은 宋朝의 當面課題인 富國强兵을 달성하기 위해 《周禮》에 담겨 있는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사회 실현을 위해서는 民을 규제하는 제도를 중시해야 하고, 따라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또한 舊法黨이 正名을 강조하는 반면 王安石은 경륜을 중시하였다. 경륜이란 도덕적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국정 전반에 걸친 현실적인 성과를 이루는 眼目을 말하고, 正名이란 자신의 身分과 지위에 충실한 행위를 의미한다.이를 바탕으로 王安石의 政治的·經濟的 思想을 살펴보면, 그는 우선 政治思想의 哲學的 기초인 人性論을 통하여 性은 善이나 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精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또한 王安石은 人間 本性의 향상과 感情의 교화가 風俗에 달려있다고 보았는데, 이때 風俗이란 도덕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통제기능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王安石은 도덕적 가르침과 영향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도덕만을 강조한 보수파와는 달리 王安石은 국가가 法度, 形, 政 등을 통하여 사회를 다스리고 유지하는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王安石은 보수파에 비해 法을 특히 중시하였다.또 그는 고대 聖人은 도덕적 행동만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결과 역시 중시한다고 하였다. 즉, 사회에 유용한 공을 세우기 위해 '覇道'를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반면에 도덕적인 '王道'라고 해서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王道란 도덕적인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功利主義的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孟子가 周나라의 이상적인 제도에 근거하여 당시의 제도를 改革하려 했으며, 百姓의 經濟的 안정을 었다.
⊙경 의 선⊙- 민족 대동맥의 연결 -{⊙목 차⊙Ⅰ. 머 리 말Ⅱ. 경의선의 역사Ⅲ. 경의선 복구 현황Ⅳ. 경의선 연결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Ⅴ. 경의선 연결에 따른 전망 및 과제Ⅵ. 맺 음 말{경의선 - 민족 대동맥의 연결 -------------------------------------------------------------------------------------------{Ⅰ. 머 리 말하나의 교통수단은 단순한 수송의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주변 환경은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며, 그에 따른 파급효과도 크다고 하겠다. 경의선은 우리 민족의 동맥이다.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신의주에 이르는 우리나라 관서지방을 관통하는 총 499km 의 철도로 1906년 건설된 이후 1950년 마지막 철마가 떠나기까지 수난의 민족사를 헤치면서 남과 북의 민중을 실어 나르던 주철이었다.이러한 경의선이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다시금 복원하기로 본격 논의되었다.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첫 번째 사업으로 경의선 복원이 떠오른 것이다.지금부터 경의선의 복구 현황을 비롯하여, 경의선 연결에 따른 한반도, 동북아, 세계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앞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경의선의 역사경의선은 일제침략기에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일본은 군인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급속도로 진행시켰는데, 1904년 3월부터 착공하여, 10월에는 용산∼임진강 사이에 철도건설을 위한 임시열차가 운행되었다. 1905년 4월 28일에는 청천강, 대령간의 두 철교를 제외한 전체노선이 준공되어 이날부터 용산∼신의주간에 연락운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1906년 3월 25일 가장 난공사지역인 청천강철교가 준공됨으로써 전선에 걸쳐 열차가 운행되었다.경의선 건설에는 총 733일이 소요되었으며, 하루 평균 730m의 선로를 부 또는 신축공사를 하게 된다.문산∼임진강 다리까지 8㎞ 구간은 철도노반이 크게 훼손되지 않아 문산터널 보강과 임진강 다리 보수 등 일부 작업만 거치면 늦어도 2001년 5월부터 침목과 레일을 깔고 전력 통신 신호설비 등 각종 시설을 설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7월말께는 임진각 역사가 지어지고 8월께 시험운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임진강다리∼군사분계선 4㎞ 구간 중 3㎞는 철도노반을 군에서 작전도로로 사용 중이어서 새로 토목공사를 하고 옹벽과 수로도 만들어야 한다. 또 군 작전도로를 대체할 도로를 미리 건설하고 지뢰나 각종 폭발물도 제거해야 한다. 건설교통부는 이 구간의 토목·구조물 공사 및 대체도로 건설을 군에서 맡을 경우 약 38억 원이 절감되고 기간도 7개월 단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통일대교∼장단역 간 6㎞구간의 왕복 4차선을 건설하는 도로사업의 경우 내년 9월초까지 완공하되 기존의 자유로와 같이 도로 중앙부분에 4차선 규모의 부지를 시공하지 않고 남겨둔 뒤 향후 8차선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도로연결공사는 북한측이 아직 노선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여서 구체적인 실무협의가 필요하다. 철도와 도로 공사를 벌이기 위해 국방부와 군 주도로 건설에 필요한 24만평 부지의 지뢰제거 작업과 노반 공사를 병행하게 된다. 지뢰제거는 훈련기간 등을 고려할 때 약 6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Ⅳ. 경의선 연결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교통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경의선 복원 역시 한반도를 넘어서 전지구적으로 많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그림 2] 경의선과 대륙횡단열차와의 연결(1) 물류비·수송시간의 대폭 절감경의선 단절구간 연결이 가져올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현재의 해운수송에 비하여 수송비와 수송시간이 약 1/5 정도 절감된 것으로 전망된다.[표 1] 철도와 해운 비교(인천 ~ 남포간){수송수단수송시간요금($/TEU)해 운13∼14일1,000∼1,100철 도1∼3일200∼250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교부 기대액(2005년 기준){물 동 량총 계남한수입북한수입총계24,8509,97014,880-남북간.컨테이너.일 반6,2183,1093,1092,2341,1171,1173,9841,9921,992-한국∼중국간환적화물(천진, 대련)7,3963,7003,696-한·일∼유럽간11,2364,0367,200(단위 : 만불) * 산정방법 : 철도수입증가액=물동량ⅹ거리ⅹ단가, 환율은 1$=1,100적용이처럼 경의선 복원에 따른 경제적 수입의 증가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도 생전에 북한 철도가 중국, 러시아, 한국, 일본 간의 중계수송에 이용되면 연간 15억 달러의 운임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힐 정도로 통과운임 수입에 대한 상당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었다고 한다.또한 경의선의 연결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게 되어 국제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경의선이 연결되면 연간 수천만 달러의 물류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교통개발연구원은 철도를 이용한 남북간 화물수송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2005년부터는 연간 2억 5000만 달러의 철도 운송수입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함께 북한의 풍부하고 질 좋은 노동력을 활용하면 수출상품의 생산에서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3) 산업구조의 재편장기적으로는 경의선의 연결에 따라 남북한 산업구조 재편도 예상된다. 현재 남한은 북한 철도가 단절돼 있기 때문에 수출입 물동량의 대부분을 전적으로 해상운송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내륙지역과의 교역에 있어 해상으로 우회하는 노선을 이용하다 보니 과다한 물류비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북한을 관통, 시베리아 철도(TRS)와 연결하면 유럽지역으로 물건을 수송하는 기간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해상로의 3분의 1일 약 1주일이면 가능하다. 남북한간 철도망이 연결된다면 임금이 저렴한 북한지역에서의 가공무역이 활성화될 것이며 장기적으로 북한은 노동집약적인 산업 위주로, 남한은 자본·기술 집약적 따라서 유럽의 공동운송정책(common transport policy)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다.복합운송이란 적시운송, 안정성, 저렴성을 확보하기 위해 두 가지 이상의 운송수단을 결합하여 문전에서 문전까지(door-to-door) 단절 없이 화물을 운송하는 방법이다. 이는 적절한 비용으로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자 지향적인 운송 서비스이다. 따라서 복합운송은 운송시스템의 통합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EU의 공동운송 정책에 명시되어 있듯이, 복합운송의 목적은 상이한 운송수단간에 적정한 통합을 이룰 수 있는 틀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프라, 운영 및 서비스, 규제 등 3가지 측면에서 개별 운송수단간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합운송의 질(quality)과 효율성은 전체 운송망의 가장 취약하고 비효율적인 연결고리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용자에게 최상의 품질과 가장 광범위한 복합운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지역내 각 운송수단의 기반시설이 통합운송시스템의 기본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향상되어야 한다.따라서 복합운송의 발전을 저해하는 물리적·법적·제도적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지역 내 각국 간의 조정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아울러 복합운송 관련 책임 규칙의 지역적 통일을 도모하고 복합운송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지역적 노력도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한다..동북아 통합 철도운송시스템과 TSR의 역할*** 동북아 통합 철도운송시스템 ***1940년대 일본은 소위 대동아 공영권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5개의 해저터널을 통해 일본 본토와 사할린, 극동 러시아, 만주, 한반도 등을 연결하는 순환철도망을 계획하였다. 1990년대 들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역내 경제협력의 증대는 새로운 시각에서 동북아 통합 철도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과거의 구상에 더하여 현재 중국은 Bohai만을 관통하는 철도노선을 계획하고 있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도망이 구축된다면 이는 유럽에서의 Trans-Europeernational Goods Transport by Rail)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한국과 일본이 이 기구에 가입한다면 새로운 지역협력기구의 창설 없이도 지역 내 철도시스템의 조화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하겠다.*** 국제 복합운송 경로로서의 TSR ***시베리아 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way: TSR)는 동북아시아와 유럽(또는 중동지역)간에 문전에서 문전으로의 운송서비스를 수행하기 위해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하는 전형적인 해륙복합운송시스템이다. TSR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간의 주요한 교역 및 통신로였으나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실크로드를 재현한 것이다. TSR는 운송거리를 단축시켜 운송일수도 다른 경로를 이용한 서비스보다 단축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운임도 유럽운임동맹보다 약간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유럽내륙지역에의 양호한 접근성(microbridge 서비스의 경우), 중동항로의 대체경로, 운송서비스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부족한 중동항만의 회피 가능성 등의 장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TSR 서비스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국제복합운송의 주동맥으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동북아와 유럽·중동을 잇는 국제 복합운송서비스는 운송경로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택이 가능하다..Trans-Siberian Railway (TSR)가장 일반적인 운송방법으로 해상운송에 의해 Vostochny항까지 해상운송이 이루어진 후 여기서 행선지별 컨테이너 전용열차(block train)로 시베리아대륙을 횡단하여 유럽 또는 중동지역으로 운송하게 된다..Trans-Chinese Railway (TCR)최근 중국대륙횡단철도서비스로서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운송경로이다. 중국 Lianyungang항에서 중국 서북단의 국경역인 Alataw Shankou(Dzungarian Gate)까지 철도 운송하여 환적한 후, 여기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을 통과하여 러시아의 Novosibirsk에서 TSR에 접속하여 유럽 또는 중동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