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비잔틴 건축(Byzantine Architecture)멀티미디어비잔틴 건축(Byzantine Architecture)5세기에서 9세기까지 서 유럽 건축은 서고트족에 함락되어 혼란상태에 빠져 대규모의 건축을 찾아볼 수 없는 정체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 건축의 공백은 동방과의 통상을 통해 번영을 맞이한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에 의해 메워진다. 로마건축의 논리적 귀착은 초기 교회건축이며 그 연속성은 대륙의 요소와 결합하면서 카롤링 왕조와 로마네스크를 거쳐 고딕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순수한 로마건축의 발전은 로마의 구조공학 기술과 동방 즉, 그리스 예술과 결합하여 지속된 비잔틴건축일 것이다.1. 산 비탈레(San Vitale, Ravenna, 526-547)테오도릭왕 이후의 라벤나는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의 주요 거점이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지속적인 영향하에서 지어진 산 비탈레는 이탈리아에 정착하는 비잔틴의 과도기적 유형을 보여준다. 이 교회는 후일 샤를르마뉴(Charlemagne; Karl)의 아아헨(Aachen)에 있는 팔라틴 예배당(Palatine Chapel)에 영향을 줌으로써 고대건축과 중세건축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중심부의 돔이나 8각형 평면은 로마의 산타 코스탄차의 영향을 상기시키나 라벤나의 문화 교류나 동방에서 유행했던 돔 형태를 볼 때 산 비탈레는 비잔틴의 돔형 교회건축의 중간 발전단계로 본다. 동시대에 건조된 산 아뽈리나레 인 클라쎄와 비교해 보아도 산 비탈레의 이질적인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돔으로 인해 가능한 창을 통한 풍부한 빛의 유입과 내부공간의 풍부함, 신랑(身廊)의 반원형 벽감 형태가 측랑(側廊)의 내부와 교차함으로써 형성되는 복잡한 공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동방교회 의식과 일치하는 점 등에서 산 비탈레는 동방교회의 전형적인 형을 형성하는 과도기 건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아일 이층에는 여자들을 위한 갤러리가 있는데, 이는 후일 미술관의 시초가 된다.2. 산타 소피아(Santa Sophia, Istambul, 532-537)초기 바질리카 교회건축의 종축형 평면이 채용되었으나, 네이브 중심의 돔과 그 전후의 반원으로 인해 네이브의 평면은 커다란 타원형이다. 즉, 산타 소피아의 평면은 바질리카와 집중형 평면의 결합이다. 또한 산 비탈레와 비슷한 네이브와 아일간을 연결하는 개방된 벽감형태의 아케이드(arcade)를 갖고 있다. 따라서 산타 소피아의 돔은 중앙 집중식 평면의 교회를 둘로 나눈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돔이 얹힌 4개의 아치는 돔의 무게를 정사각형 구간의 4모퉁이에 있는 기둥(pier)으로 전하기 때문에 아치 밑의 벽은 전혀 떠받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스퀸치 아치(squinch arch)에서 발전된펜덴티브(pendentive)라고 불리는 구면(球面) 삼각형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조를 펜덴티브돔이라 한다. 원형이나 다각형 기면 위에 돔을 놓았던 판테온, 산타 코스탄차 또는 산 비탈레 보다 훨씬 높고, 밝으며 경제적인 돔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펜덴티브 돔의 창안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산타 소피아에서 처음으로 기념비적인 규모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돔은 비잔틴 건축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으며, 후일 서방 건축에서도 채용되었다. 따라서 산타 소피아는 동방과 서방, 과거와 미래를 종합한 건축물로 인정받는다. 4개의 소첨탑(minaret)은 후일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을 때, 모스크(mosque)로 사용되었는데 그 부속물로써 첨가된 것이다.이후 비잔틴의 교회건축은 규모가 아담하고 제국적이라기 보다 수도원(修道院)적인 성향으로 변화된다. 평면은 그리스 십자형(Greek Cross)을 주체로 해서 그 양단(兩端)에 각각 나르텍스와 앱스를 덧붙인 형식을 갖는다. 특징으로는 정사각형 기면 위의 돔으로써 대개 돔은 원통형 고형부(tambour, drum)에 얹혀지기 때문에 그리스의 오시오스 루카스 수도원(Monastery of Osios Loukas, Stiris, 11c)의 교회처럼 건축의 다른 부분 위에 높이 올려진다. 그리고 외관이 초기의 간소함과는 달리 화려해지며 중앙의 돔으로 인해 내부의 수직성이 한층 강조된다.4. 산 마르코(San Marco, Venezia, 1042-1071)산 마르코는 현존하는 후기 비잔틴 교회 중에서 가장 크고 사치스럽게 장식된 교회이다. 비잔틴형인 그릭 크로스의 평면과 중앙부에 돔을 올렸으나 4 양단에 각각의 돔을 올려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로마네스 양식의 쌩 프롱 성당(St. Front, Periguex, 12-13c)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돔은 원통형 고형부 대신에 도금동판을 덮은 구근(球根) 모양의 목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정탑(頂塔, lantern)을 올려 지표(landmark)의 역할을 했다.5. 성 바실리 브라젠니(St. Vasili Blazhenny, Moscova, 1554-1560)러시아는 15세기 비잔틴제국의 멸망이후 그리스 정교의 본거지가 되어 많은 비잔틴 건축을 건설한다. 돔은 목재를 이용한 토착건축과 기후조건(多雪)에 따라 변용 되어 러시아 특유의 건축형태를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성 바실리 브라젠니이다. 이반 4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수많은 돔은 환상적인 탑 모양의 구조로 바뀌고 그 상부는 선명한 무늬의 마치 동화의 나라의 것처럼 변화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은 러시아의 소박한 농민의 신(神)에 대한 상상력과 일치한다.
08 초기 그리스도 교회(Early Christian Architecture)멀티미디어초기 그리스도 교회(Early Christian Architecture)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함께 32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의 이동을 공표 함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속에서 성장, 발전한다. 서로마 제국의 정교분리(政敎分離)와는 달리 동로마 제국은 정교일치를 통해 신성왕위(神聖王位)의 유산을 유지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교회는 제국(帝國)이나 어떤국가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의 성격을 반영하는 국제적인 조직이 된 반면, 동로마 제국의 교회는 국가권력에 의존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이중의 충성을 강요함에 따라 정치권력과 그 성쇠(盛衰)를 같이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나 근동(近東)의 낡은 체제를 유지하였다. 로마제국 하에서의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양식이기보다도 정교회와 분리되기 이전인 기원전에서 5세기 동안의 그리스도 교인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를 가리키며 비잔틴 교회건축은 동로마 제국의 것을 의미하며 건축양식의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자는 단절적, 분절의 형태이며 후자는 연속적 지속적 형태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과 비잔틴 교회건축을 엄밀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서 유럽은 켈트인과 게르만 인이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을 일부분으로 포함한 고대 말기의 문명을 유산으로 계승하여 그것을 중세건축으로 변형시켰다. 반면에 동방은 그와 같은 단절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로마의 유산을 밀어내고 그리스, 동방적인 요소가 점점 우세해져 가고 있긴 했으나 여전히 고대 말기가 계속되고 있어 비잔틴 건축은 완전히 중세적인 것으로는 되지 않았다.1. 두라 에우로포스 교회(Eglise Dura Europos, 231)콘스탄티누스황제 이전의 건축으로 프리에네에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주거배치와 비슷하다.세례실과 견진 성사실은 화려하게 채색 장식된 반면 집회실은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어 초기교회의 역할이 의식공간 보다도 작업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이 특이하다. 즉, 주택이나 상점같이 형태상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공인을 통해 과거 부유한 신도들의 집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열리고 있던 `교회'는 이제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 새로 공인된 신앙을 위한 장엄한 건물이 단시일 내에 건설되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건물이 바질리카였는데, 1) 그리스도교의 의식에 필요한 광대한 실내, 2) 국교(國敎)로서의 그리스도교의 특권적 지위를 표명하는 제정(帝政) 양식의 위용 그리고 3) 신성한 신(神)의 집 곧, 고대의 신전을 그리스도교가 계승한 형태를 바질리카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두라 에우로포스 카타콤 내부2. 산 피에트로(San Pietro, Roma, 330)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건설(콘스탄티누스의 바질리카는 볼트로 되어 있다)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에트루리아나 로마의 포디움(podium), 그리스의 프로필라에아(propylaea)형 입구, 로마의 광장이나 주택의아트리움(atrium)형의 중정, 콘스탄티누스 바질리카의 측면에 있는 베스티뷸(vestibule)형의 나르텍스(nartex), 교차 신랑(nave)을 위한 익랑(transept)을 볼 때 초기 교회의 형태가 당시의 교회의식의 필요성을 위해 각 건축형태의 필요한 부분 즉, 바질리카(집회), 신전과 주택을 조합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비교적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했던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San Paolo Fuori Le Mura, Roma, 368, d.1823)에서 이러한 형식을 추정할 수가 있다.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 산 파올로 푸오리 레무라 대성당 내부3. 산타 코스탄차(Santa Costanza, Roma, 345)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그리스도교 건축의 전통에 첨가된 또 하나의 구조 양식의 특징은 돔(dome)을 상부에 놓은 원형 또는 다각형의 건축이다. 원래 이러한 형은 황제의 기념적인 묘소(墓所)인 능(陵, mausoleum)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교회에 채택된 이유는 교회에서의 예배의식과는 다른 형태가 요구되는 신성한 의식인 세례(洗禮)의식과 장례의식이었다. 능의 형태인 중앙 집중식 평면이 바로 이러한 요구에 적합했기 때문에 원형 집중식 평면의 형태가 적용되었던 것이며, 그 대표적인 초기의 예가 콘스탄티누스의 딸 콘스탄티아의 능인 산타 코스탄차이다. 판테온의 거대함과는 달리 인간적 스케일과 배럴볼트로 이루어진 회랑(ambulatory)에 의해 부드러운 동적 공간을 제공한다.4. 산타 사비나 성당(Santa Sabina, Roma, 422-432)바질리카 율피아(바질리카 트라얀)와 비교할 때, 산타 사비나는 2가지의 크리스도교 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 내부공간을 휴먼 스케일로 변경하였고 둘째, 출입구를 위해 두 개의 앱스 중에 하나를 제거하여 정적인 공간에서 목적 지향형의 공간으로 변경, 예식(禮式)에 적합한 공간을 결합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또한 바질리카의 앱스는 주교(主敎)의 자리인 카테드라(cathedra)와 그 좌우에 사제(司祭)들의 자리로만들었으며 전면에 제대(祭臺)를 놓았다. 후일 주교좌가 있는 곳을 성당(cathedral), 일반 사제들만이 있는곳을 교회(eglise)라 불렀다.5. 산 아뽈리나레 인 끌라쎄(San Appollinare in Classe, Ravenna, 533-549)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특징은 외부의 소박함과 내부의 화려함이다. 이것은 겉으로는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내부에는 타오르는 정열과 아름다운 영혼을 감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물질세계보다 정신세계의지향을 강조한다. 산 아뽈리나레 인 끌라쎄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벽돌로 지어진 외부의 소박함과는 대조로 내부는 값비싼 대리석 표면과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하느님 나라인 영적 세계를 의미한다. 이 당시 라벤나는 비잔틴예술의 열렬한 신봉자인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수도였다. 따라서 라벤나는 비잔틴의 문화가 서구로 유입되는 문호(門戶)의 역할을 하여 바질리카 교회에서도 이러한 영향이 나타나는데, 내부의 모자이크나 주두 등에서 비잔틴 건축의 수법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역시 동시대의 테오도릭왕의 명에 의해 지어진 산 아뽈리나레 누오보(San Appollinare Nuovo, Ravenna, 504)이다.산 아뽈리나레 인 클라쎄산 아뽈리나레 누오보6. 산 클레멘테(San Clemente, Roma, 523, r.1184)일반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 이후에 나타나는 성가대의 네이브 공간 분할이 이루어져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고 했을만큼 주기적인 범람과 나일강이 매년 침전시켜 주는 보드라운 충적토는 토양을 새롭게 해주고, 더구나 용이한 교통로이기도했다. 사람들은 강물이 흘러내리는 대로 따라내려갈수있었던 것은 물론, 바람이 연중 대부분 물을 거슬러 남쪽으로 불어왔기 때문에 물을 거슬러 쉽게 항해해 올라갈수있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지형상 북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서로는 광활한 사하라사막이 뻗쳐있고, 남으로는 나일강을 따른 급류와 비좁은 강폭이 있어 서쪽의 연안이나 동북연안의 접근을 쉽게 차단시킬수 있었기 때문에 대외 침략자로 부터 보호를 받을수있었다. 델타지대는 下이집트(Lower Egypt)라고 불리고, 그 남단의 땅을 上이집트(Upper Egypt)라 부른다.이집트 문화는 하안 문화(Riparian Culture)였다. 최초로 정치적인 동맹이 이루어졌을때 나일강 어귀의 삼각주 지역에 북왕국이 생겼고 멤피스와 나일강의 첫 번째 폭포 사이에 남왕국이 생겼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는 이 초기의 두 왕국의 연합과 함께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기원적 2900년경 제 1대 왕조의 메네스왕의 통치중에 일어났다.이집트 역사는 대개 왕조중심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대 특히 제일초기 시대의 것들은 너무 부적확하여 수백년이 틀릴수도있다.(이론서 마다 이집트 역사가 각기 틀리게 표기되어있슴)여기에서 사용한 신왕국까지의 연대와 분류는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의 것을 따르기로 하겠다.구왕국(기원전 2900~2270년)은 제 1왕조로부터 제 6왕조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문화가 싹틀 전조의 시기이고 문화의 기초적 형태인 종교와 문자와 예술의 특색이 그 성격을 갖추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제의 피라미드를 건립한 사람들과 체옵스의 체프렌과 이게리누스 같은 위대한 왕들이 시대인데 그들은 모두 제 4왕조에 속한다.제 1과도기(기원전 2270~2100년)는 구왕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봉건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며 배의 양식으로 바꾸려 시도했고 그 이유에서 자신을 이크나톤 - '아톤(태양신)이 만족한사람' - 이라 불렀다. 그는 사막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텔-엘-아마르나라고 불렀는다. 그것은 테베스의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는 내란들 속에서 와해되었고 왕의 사후까지 지속하지 못했다. 아메노피스의 사위인 투탄카멘의 통치하에서 왕궁은 다시 테베스로 옮겼다.그렇지만 이집트는 제 19왕조의 왕들 밑에서 그 정치적인 권력이 절정에 달했었다. 후에 람세스 대왕이라 불리는 람세스 2세는 66년의 통치기간 동안 아부심벨, 카르나크, 룩소, 아비도스 그리고 멤피스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과 라메세움이라 불리는 테베스에 있는 보시 사원에 자신의 무한한 힘을 그대로 나타냈다. 람세스 사후 무질서가 뒤따랐으나 람세스 3세의 21년 동안 계속된 통치기간엔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점점 강력해지는 태양신 아멘(아문또는 아몬)의 성직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세번째 과도기(기원전 1090~712년)는 소요와 권력의 변동이 심한시기였다. 제 21왕조에서 제 24왕조에 이르는 왕들 중에서 세숑크 1세가 솔로몬의 사원에 뛰어들었던 예루살렘의 정복자로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제 24대의 왕조 밑에서 이집트는 잠깐동안 이디오피아의 지배를 받았다.후기(기원전 712~525년)에는 제 25왕조의 에사라돈왕 치하에서 앗시리아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당한 일이있었다. 제 26왕조는 이디오피아를 잃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나라를 통일할수있었다. 그리스와의 동맹은 무역과 교륙에 활기를 띠게 하였다. 제 26왕조의 마지막 왕인 프삼틱(프삼테크) 3세는 펠루시움의 전투에서 페르샤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페르샤의 영토가 되었다.기원전 525년에 이미 이집트의 진정한 문화적 역사적 원동력은 다소진되었다.이집트에 대한 페르샤의 지배(기원전 525~332년)는 캄비세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를 거쳐 다리우스 2세 하에서 붕괴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의 문 나일 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으나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이곳도 처음부터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범람으로 비옥해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곤개 기술을 개발해 내고 도시를 건설하고 또 신화를 창조해 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지금부터 6,000년전 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종교,뮨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되었으니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가 그것이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둘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긔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초기왕조 시대(기원전 3000 혹은 3100년경 ~ 2780 혹은 2686년경- 상고로 갈 수록 편년이 부정확)1,0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 이집트의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애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 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출토퇸 '나르마레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호루스 밑에 꿇어 앉아 있는 하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사건후 2,700년 쯤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신관 마네토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라오들의 계복에 다라 모두 31개의 왕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의 서술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한 상,하이집트의 통일로 시작해서 이집트 출신 마지막 파라오인 넥타네보2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현재에도 사용되는 제몇왕조라는 명칭은 그의 서술 체계를 활용한 것이다.통일후, 이집트는 강.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로 추앙 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룽ㅆ는데, 그의 후계자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우게 된다. 평균2,300kg 자리 돌2백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건축 기술,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라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 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멘카우라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틑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와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때로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때로는 호루스 신과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태양신 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호루스 신과 같이 매의 얼굴을 한 사람이 머리에 태양은 얹고 있는 형상이며, 태양은 뱀이 둥글 게 몸을 튼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5왕조 군주들이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때 완전히 약회되고, 이후 이집트 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등 이집트 번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 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산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따. 세소스트리스 2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네메트 4세와 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의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항 이집트 문화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하였다.여러 가지 원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은 힉소스(이민 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물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공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 부른다.신왕국 시대(기원전 1575혹은 1550년-1085혹은 1069)와 제3중간기 (기원전 1085혹은 1069-664혹은 747)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문 신의 아내'라는 칭호는 가진 친누니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는데 이러한 친오누이 간의 결혼은 신과 여신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러소 중왕국 시대부터 상실되기 시작한 왕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아흐모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다.
목 차제3장 객실판매 회계원의 업무제 1절 Front Cashier시재조사Credit Card 및 City Ledger조사시재입금제2절 고객의 영업회계활동계정발생(Account Creation)1) 개인별 원장(Folio Cards) : Guest Folio2) 비고객 원장 (Non-guest Folio)3) 직원용 관리대장4) 통제원장2. 외상거래 입력(Account Entry)3. 전기기능(Account Posting)4. 감사기능(Account Update)5. 계정확립(Account Settlement)제 3절 환전업무환전상의 개념1) 환전상의 업무수칙2) 환전자금(Fund)3) 환전상의 분류4) 환전상의 설치목적2. 환전상의 업무(1) 외국환 매입1) 원화 대가매입2) 일부 환전매입3) 교환 매입(2) 재환전(Re-Exchange, or Reconversion)재환전의 제한 목적3. 환전절차 및 유의사항환전절차 및 유의사항(1)환전증명서 사용요령(2) Money Detect Marker4. 환율(Exchange Rate)환차손익의 결정5. 환전상의 결산업무제 4절 귀중품 보관업무귀중품 보관의의귀중품 보관방법1)귀중품 자루를 사용하는 방법2)안전금고(Safety Deposit Box)를 사용하는 방법제 4장 요금지불고객계정이 개설되기 전 시점에서징수하는 요금방법1. 선수금(Advanced Money)예치금(Deposit)제 2절 High Balance Check(중간지불의요금징수방법)를 통해중간지불제도의 목적2. 운영방법1) 고객형태에 의한 방법2) 기간에 의한 방법3) 금액에 의한 방법3. 처리방법High Balance 처리방법제 3절 Check –Out시 요금징수방법현금(Cash)결제1) 외국통화 수납2) 여행자수표(Traveler’s Check) 수납3) 자기앞수표4) 가계수표2. 신용카드 (Credit Card) 결제(1)Card의 종류 및 취급절차1) 종류2) 취급절차3. 신용카드(Credit Card)의 서비스 기대효과(1) 사회적 측면(2)기초자료로 이용되며 영업회계용 모듈은 고객관리에 필요한 개인별 원장(Individual Folio), 마스터 폴리오(Master Folio), 비고객 폴리오(Nonguest Folio), 종업원 폴리오(Employee Folio), 통제 폴리오(Control Folios)가 있다.개인별 원장(Folio Cards) : Guest Folio개인별 원장은 고객이 호텔과의 재무거래 사항들을 도표로 만들기 위해서 호텔내 고객들에게 할당된다. Master Folio 는 대개 고객 한 사람 또는 한 객실 이상에 적용되며 개인 Folio에 분개되어 있지 않은 거래사항의 기록도 보유한다. 예를 들어 여행사 손님의 경우 객실요금과 식사요금을 여행사에게 지급한다고 했을 경우 객실요금과 식사요금은 Group의 Master Folio에 분개한다. 체크아웃시 고객은 그들이 책임진 외상구매액만 적힌 Folio를 받는다. 여행사에서는 객실요금과 식사요금이 포함된 Master Folio 의 결산내용만 책임진다.비고객 원장 (Non-guest Folio)호텔내에서 외상구매권을 갖고 있지만 호텔에 고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개인들을 위해서 작성한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헬스클럽회원, 단골회사고객, 특별클럽회원, 정치지도자, 지역유지들이 포함된다. 비고객원장에 거래사항들을 분개시키는 절차는 고객원장에 거래사항을 온라인 분개처리할 때 요구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여섯 자리 계정번호는 비고객계정을 나타내주는 반면에 네 자리 숫자는 호텔등록고객계정을 나타낸다. 비고객회계와 호텔등록고객 거래들 사이에 차이는 계정결산부분에 있다. 고객원장은 Check-Out에 결산되지만 비고객 계정의 결산기한은 항상 그 계정들이 발생되는 시점에서 결정된다. 이 결산은 수납현금을 분개하거나 시중은행 또는 신용카드에 Folio 잔액을 입력시키든가 하여 실제원장에 미수잔액이 없도록 처리한다.3) 직원용 관리대장일상적으로 직원의 매장이용을 파악하여 할인가와 투입원가를 계산하고 비용재정활동을 통제하여 개인적인 지출과 회 매출금의 즉각적인 온라인 분개작업은 실수를 구실로 이루어진 부과요금들과 사후부과 요금들(Late Charges)에 대한 고객과 호텔간의 오해를 쉽게 해결해 준다. 사후부과요금은 고객이 자기의 계정을 결산한 후에 폴리오에 분개되는 고객에 의해 이루어진 구매사항들에 부과된 액수이다. 전산 폴리오들은 결산시에 마감된다.고객회계모듈은 다른 영업부분의 모듈과는 연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종사원들의 사이에 의사소통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게 하고 경영층이 광범위한 리포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한다.제 3절 환전업무환전상의 개념외국통화의 매매 및 외국에서 발행한 여행자 수표(T/C)의 매입을 환전이라 하며, 외국환 은행이 아닌 법인 또는 개인도 외국환관리법령에서 정하는 일정한 요건과 절차를 갖추면 환전상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데 이를 환전상이라 한다. 환전상은 거주자 또는 비거주자로부터 지정영수 통화로 표시된 외국화폐 또는 여행자수표를 제시받으면 원화를 지급하여 이를 매입하고 매입한 외국화폐 또는 여행자 수표를 원칙적으로 다음날 까지 외국환은행에 매각하여야 한다.환전상의 업무수칙환전상은 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소지하고 있는 외국통화 또는 여행자 수표(T/C)를 원화로 교환하기 위한 시설로서, 환전업무를 담당하는 자는 외국환 관리법상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인가•허가를 받은 업체에 한할 것적정한 환율을 적용할 것거래에 있어 국내인 및 외국인을 불문하고 외국환 관리법상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고객에 대해서만 행할 것위조 또는 변조의 의문이 있을 경우에는 외환은행 또는 관할 세관에 조회할 것2) 환전자금(Fund)환전자금을 경리과로부터 General Cashier가 차용하여 각 Shift환전원은 필요액을 제너럴 케셔로부터 가불형식으로 차입 환전 마감시 외환과 잔금(한화)을 합하여 차입액과 같이하여 제너럴 케셔에게 입금시킨다. 이때 소액현금은 별도의Fund로 처리한다.3) 환전상의 분류외국환 은행: 외국환 업무중계 점포(재정경제부 장관 인가)금융기관 환전상: 환전업 비치하고 환전원은 Shift 가 끝나면 화폐종류별 금액, 건수 및 매입금액 등을 산출하여 외국통화 교환 집계표를 작성하여 외환매각 신청서 및 외환을 정확히 General Cashier에게 입금시킨다. 이 외국환 매각 신청서는 한국은행에서 일련번호로 관리통제하기 때문에 결번이 발생하면 사후책임 추궁을 당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주의하여야 한다.제 4절 귀중품 보관업무귀중품 보관의의호텔을 찾는 고객중에는 소지한 물품중에 귀중품이 있기 마련이며 이 귀중품을 맡길때에는 Front Cashier로 맡겨진다. 귀중품을 보관할 때에는 반드시 확인하고 보관증을 발행하여야 한다. 만일 고객이 귀중품을 맡기지 않고 호텔내에서 분실하였을 때에는 책임지지 않는다. 따라서 고객이 작성하는 등록카드와 객실내에는 귀중품 보관 및 주의의 공고를 하고있다.귀중품 보관방법1)귀중품 자루를 사용하는 방법소규모 호텔에서 주로 이용되는 방법으로서 귀중품 자루에 고객의 물건을 넣고 그것을 Front Cashier의 금고에 맡기면 담당자는 귀중품 자루에 끼워 있는 표지(Tag)를 고객에게 건네준다. 해당 고객이 돌아와 물건을 돌려받을 때에는 고객이 가지고 있는 표지와 대조하여 인계하면 된다.2)안전금고(Safety Deposit Box)를 사용하는 방법이 경우는 안전금고를 준비하여 놓은 호텔에서 이용하는 방법이다.금고의 사용은 우선 금고기록서에서 성명, 주소, 객실번호, 날짜, 서명을 고객이 가입하도록 하고 동시에 금고 기록서용 봉투의 서명란에 취급 담당자는 금고열쇠의 번호기입과 서명을 하고 나서 열쇠를 고객에게 전해준다. 금고사용이 끝나고 반환할 때는 반환한 것을 확실히 하기위하여 해당 고객의 서명을 받아둔다.제 4장 요금지불최초로 고객과 호텔의 거래가 발생되는 시점은 Check –In을 하는 시점에서 고객원장이 개설되고 개설된 원장에 Check-Out을 하기 전까지 호텔에서 이용하는 각종 부과요금이 전표를 통해서 고객계정에 부과되고 Check-Out이 되면서 정산된 부과금을 회수하는 과정을 일반적수표 앞면에 이서한 서명과 그 자리에서 이서한 고객의 서명이 동일한가를 대조하여 수납받는다.3) 자기앞수표일명 보증수표라고 하며 전은행(외국은행 포함) 및 기타 금융기관(우체국,농•수•축협)에서 발행한다. 이 수표는 발행은행으로부터 수표금액(액면가)에 상당하는 현금을 예치 후 발행되는 유가증권으로서 상거래상 분실,도난 등 불법소지인의 악용을 제재코자 신원확인 및 배서의 의무를 갖는다. 이 자기앞 수표는 은행이 발행인과 지급인을 겸해서 현금대신 유통시키는 유가증권이다.•투숙객이 아닌 경우의 단순한 수표교환은 허가하지 않는다.•고객수표는 은행조회를 하여 이상이 없을 경우에만 접수한다.(고액 수표가 아닐 경우에도 발행 후 10일이 지난 수표는 조회를 해 보아야 한다. )•수표 뒷면에는 Stamp를 찍어서 소지자의 성명, 주소, 전화번호,주민등록번호 및 담당 회계원의 성명을 기재하여야 한다.•액면가와 발행은행을 확인하고 서울이나 주변 위성도시 및 대전,청주까지는추심료를 받지않으나 기타 지방 소재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수표는 고객으로부터추심료를 받아야 한다.4) 가계수표가계수표는 은행에서 지급을 보증하고 발행하는 수표로서 자기앞 수표와는 달리 액면가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도난, 분실의 우려가 있어 다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회계원은 다음의 주의를 요하여야 한다.발행가는 일반적으로 수표1장당 발행한도액이 1백만원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다만 사업자 등록증이 있는 자는 사전계약에 의하여 1백만원, 3백만원,5백만원을 한도로 발행할 수 있다.가계수표 앞란에 발행 액면가, 성명, 주민등록번호, 도장이 날인되어 있는지를반드시 확인하여야 한다.수표 뒷면에 수표 보증카드 번호와 주소, 전화번호 등 기타 필요한 사항을배서 받아야 한다.본인 이외의 가게수표는 일체 취급하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대금결제를위한 액면가만 받고 현금을 교환해 주지 말아야 한다.보증카드 또는 주민등록증 제시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수취 거절 하여야 한다.2. 신용카드 (Credit Card) 결제신용카드는 카드발행자(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