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通儀』● 장학성과 그의 저작장학성(章學誠, 1738∼1801)은 자가 실재(實齎)로 절강 회계(會稽)사람으로 건륭 3년에 태어나 가경 6년에 나이 64세로 사망했다. 장학성의 부친은 어렵게 건륭 16년에 호북(湖北) 응성지현(應城知縣)이 되었는데 건륭 21년 옥사를 잘못 처리하여 면관이 되었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 귀향할 수 없어서 그대로 호북의 천문(天門), 응성 서원에서 글을 가르치며 지냈다. 장학성은 부친을 따라서 수학하게 된다. 그는 15세 이후 문사(文史)를 좋아하였고, 춘추와 내·외전을 읽고 스스로 기표지전(紀表志傳)100여권을 편하였다. 25세 때 북경 순천 향시에 응시하고 26세에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주균(朱筠)에게서 고문을 배우면서 당시 저명한 학자들과 교유했다. 그리고 이후 국자감지(國子監志)편찬에 참여했으며 36세 때에 화주지(和州志)를 편찬하였다. 건륭 42년(1777년) 41세가 되어서 진사에 급제하였다. 이후 영청현지(永淸縣志), 호북통지(湖北通志), 박주지( 州志), 상덕부지(常德府志), 형주부지(荊州府志)등의 지방지를 편찬하였으며 필원(畢沅)이 주편한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교수통의(校 通義), 사적고(史籍考)와 그의 사학을 상징하는 대표적 저서인 문사통의를 저술하였다.그러나 그의 저술과 사학이론은 당시에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따라 그의 문사통의와 교수통의는 그가 사망한 이후 30여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간행될 수 있었으며 121년이 지난 근대사회로 진입한 시기인 민국14년 즉 1922년에 저술 전체가 장씨유서(章氏遺書) 50권으로 편집되어 그의 뛰어난 학문이 인식되게 되었다.● 문사통의의 구성과 판본문사통의는 장학성이 30세 이전부터 구상하였는데 문사(文史)이론을 연구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한 체제를 갖고 쓰여진 것이 아니며, 경사와 시문에 관한 주장을 쓴 종합 논문집이라 볼 수 있는데 결론을 내지 못해서 탈고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목차의 순서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위에서 전언했듯이 문사통의 장학성이 사망한지 30여년이 지나서야 판본이 나왔다. 이후 1921년에 또 다른 판본이 나왔는데, 이 두 가지 판본은 서로 배열순서, 권의 구분, 총 편수에 차이가 있었다.제일 먼저 나온 판본은 장학성의 차자 장화발(章華 )이 도광 12년(1832) 개봉에서 간행한 '대량본(大梁本)'으로 내편 5권과 외편 3권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판은 1921년 오흥에서 간행한 '장씨유서(章氏遺書)본'인데 이것은 장학성이 임종하기 몇 개월 전에 자신의 원고를 모두 소산(蕭山) 왕종염(王宗炎)에게 교정을 부탁하기 위해 맡겼는데 이렇게 해서 왕종염이 편집한 목록에 근거하여 보충하고 정정하여 후세에 호흥 유씨의 가업당(嘉業堂) 간각본, 즉 장씨유서 50권으로 편성한 것이 그것이다. 그 중에 문사통의 부분은 내편이 6권, 외편이 3권, 보유 8편으로 구성되었다.두 가지 판본 중에 외편이 모두 3권으로 구분되었을지라도 내용은 같지 않았다. '대량본'에 수록 된 것은 지방지를 논술한 것이고 '가업당본' 즉 '장씨유서본'에 수록된 것은 논박, 서(序), 발(跋)의 책에 관한 논설이다.● 문사통의의 의의역사이론 전문가로서는 유지기(劉知幾)와 장학성이 대표적 인물인데 사통(史通)과 문사통의는 둘 다 중국 사평(史評)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통이 논의한 문제는 역사서적의 각종 체재(體裁) 즉, 기전(紀傳)과 편년(編年)등의 이해득실 및 역사방법론 등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사통의는 사학 자체 및 사학과 관련된 각 방면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역사철학 전저(專著)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사서편찬의 체재라는 태두리를 넘어 설 수 없었지만, 후자는 중국의 학술사 전체를 관통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장학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사학에 천분이 있으나 凡例(범례)를 창안하여 후세를 위해 배양한 점이 많다고 자신한다. 사람들은 나를 유지기에비하지만 이는 유지기가 史의 체재(史法)를 말했고 나는 사의 의미(史義)를 말하고 있으며, 유지기가 사관의 편찬을 논의했고 나는 일가(一家)의 저술을 논의하여, 양자는 두 갈래로 서로 상관이 없음을 모르는 것(章氏遺書 9권, 家書二, 商務印書館排印本, 1936)그리고 문사통의 저작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鄭樵는 史의 식견(史識)이 있으나 사의 학력(史學)이 없고 曾鞏(증공)은 사의 학력을 지녔으나 사의 체제(史法)가 없으며,유지기는 사의 체제를 얻었으나 사의 의미(史識)가 없다. 이것이 나의 문사통의가 저작된 이유이다.(章氏遺書 外便 권 16, 和州志)장학성은 청대 건·가시대 사람으로 당시 학술계의 분위기는 송명이학을 전통으로 받들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또 다른 학풍으로 한학(漢學)이 발달하였다. 한학은 송대의 성리학이 아니고, 운운 , 훈고, 고증기주로 중국 고전의 진의를 올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학풍을 말한다. 그런데 한학은 경서의 고서를 정리하는데 적지 않은 업적을 만들어냈지만 오로지 훈고·고증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장학성은 송명이학이나 한학에 대해 모두 불만을 표출했는데 그는 이 두 학풍을 비판하고 바로잡기위해서 문사통의 저술하였다.● 장학성의 사학사상 특징장학성의 사학상 주요 업적은 이론상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점인데 그의 사학이론은 역사연구, 뜻, 태도와 역사편찬 체제등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으로 여러방면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첫째, '六經皆史說'을 제기하였다. 당시에 '경'의 존중은 변험없는 진리로 여겼었다. 동진 이후 중국의 도서는 줄곧 경·사·자·집의 차서에 따라 분류하여 사학은 경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학성은 '경은 곧 모든 역사' 라 제기하면서 당시 학술상으로 사학의 위치를 바꾸었다. 문사통의 천체의 서두에서 첫구절로 '육경개사설'을 표명함으로 사학의 중요성을 재고한 것이다. 육경개사란 말은 명대에 양명학이 견습록에서 '오경(五經)조 역시 사(史)'라고 말한바 있었다. 그러나 장학서이 당시의 폐단에 초점을 두고 육경개사라는 명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경세치용의 사학'이어야 한다고 계통적인 설명을 한데 비해 양명학은 그렇지 못했다.육경개사이론의 사학사상 의의1) 역사 연구와 사료의 수집범위를 확대2) 당시의 폐단에 초점을 두고 의리 공담을 하는 송학(宋學)과 고증만을 하는 한학(漢學)을 비판둘째, 사의(史意)를 제창하여 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루었다. 장학성은 사의를 사학 이론과 관점이라 하여 사의(史義)라고도 하였다. 그는 사학의 세 요소를 義, 事, 文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義라고 주장했다.셋째, 사덕(私德)을 강조하였다. 이는 유지기의 才, 學, 識인 史學三長을 강조하면서 사덕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보아야 하고 포폄 선악의 공정을 다하는 학술풍조를 장려했던 것이다.넷째, 찬술(撰述)과 기주(忌酒)를 구분하여 역사 편찬에 대하여 체제의 개혁을 제안하였다. 찬술이란 저작된 역사서이고 독자적 판단의 학문으로 일가(一家)의 말을 이룰 수 있는 역사가의 저작이며 일종의 학문이다. 기주란 편집한 역사서이고 배열한 책으로 단지 옛 사실을 정리하고 사료를 모아 엮은 것이다. 그는 역사 체제도 사학의 발전에 따라 고쳐야 하며 옛사서의 편찬 체제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전의 역사가보다 찬술과 기주의 구분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차 례들어가며고인돌이란 무엇인가?고인돌의 분류탁자식 고인돌. 트기. 덮개돌바둑판식 고인돌. 덮개돌의 크기. 받침돌. 무덤방개석식 고인돌. 고인돌의 분포. 무덤방. 특징고인돌의 사회적 배경나가며§참고문헌§들어가며고고학에 관한 자유로운 주제를 가지고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았다. 선뜻 생각나는 것이 고인돌이었다. 우리나라에 고인돌의 분포는 많은 편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고인돌에 대해서 조사해보기로 했다.■ 고인돌이란 무엇인가?고인돌은 일본에서는 지석묘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또는 대석개묘, 기타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 이라고 한다. 고인돌과 지석묘가 같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석묘라는 용어는 그 한자의 뜻에서 추론되는 바와 같이 고인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의미이다.거석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 또는 거석을 숭배하는 것을 만물숭배신앙(Animism)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선돌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요소이며 조상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인돌의 분류북방식은 넓적한 판석으로 이루어진 탁자 또는 책상 모양의 탁자식이다. 남방식은 덮개돌 아래에 조그만 덩어리 받침돌들이 받치고 있는 바둑판 또는 상석 모양의 바둑판식과 아예 받침돌이 없이 돌이나 흙을 무더기로 쌓 아놓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이 놓여져 있거나, 땅 위에 덮개 돌만 놓여져 있는 개석식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이러한 북방식과 남방식의 구분은 한동안 유효하였지만 그 후 북방식이 한반도 남부인 전라북도 장수(長水)와 고창(高敞)에서까 지 발견되고, 북한과 요동반도에서 수많은 개석식 고인돌이 보고 되면서, 북방식과 남방식의 2구분에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無支 石式)이 더해져 3구분으로 하거나, 아예 크게 구별되는 외관에 따 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의 3구분을 하게 되었다.탁자식(卓子式) 고인돌(支石墓)일명 '북방식(北方式)'으로 알려진 '탁자식' 고인돌은 탁자(卓子) 또는 탁상(卓床) 모양의 고인돌로서,꼴(長方形), 네모꼴(方形) 등으로 다양하다.탁자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황북(黃北) 연탄(燕灘) 오덕리(五德里, 城梅里)고인돌떼에서는 '가'자 또는 '가'자 평면의 재사용(再使用) 할 수 없는 폐쇄(閉鎖)된 무덤방과 '가'자 또는 '가'자 평면의 재사용할 수 있는 개방(開放)된 무덤방을 보여주는데,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탁자식 고인돌 모두 이같은 짜임새를 보여준다. 즉 초기에는 개별무덤(個人墓)으로서 앞마구리돌로 막아 놓았지만, 점차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어울무덤(合葬墓)으로 바뀌면서 앞마구리돌을 앞으로 재껴놓거나, 입구의 반을 가로막아 한쪽으로 드나들 수 있게끔 하였으며, 또는 아예 낮은 높이의 판석을 박아 문지방(門地枋)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강화도(江華島) 부근리(富近里)와 고창(高敞) 도산리(道山里)의 고인 돌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자연적(自然的)으로 또는 인위적(人爲 的) 으로 파괴되고 도굴(盜掘)되면서, 이러한 양쪽 마구리돌 이 둘다 없어져 '二'자 평면을 보이고 있다. 무덤방 내부의 평면은 보통 사다리꼴(梯形)과 긴네모꼴(長方形)이 대부분이 며, 말기(末期)에는 바른네모꼴(正方形)도 등장한다.한반도 중부지방에서는 옆으로 기울어진 탁자식 고인돌 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기울어진 무덤방에서 눕혀진 넙적한 판석 굄돌(板石型 支石)들이 변하여 둥 그런 덩어리 받침돌(塊石型 支石)이 되었으며, 이와 동시 에 그 위에 올려진 덮개돌 판석이 두꺼워지면서 점차 바 둑판식(碁盤式)고인돌로 바뀌게 된다. 또한 제주도에서는 각면에 2장씩의 굄돌들이 세워지면서 모두 7개의 굄돌로 둥글게 벽을 이룬 위석식(圍石式) 고인돌이 되었다. 유럽에서도 이처럼 7개의 굄돌들을 세로로 이어세운 원형무덤방의 위석식 고인돌이 있으며, 여기에 덮개돌을 없애버린 원형무덤방(圓形墓, Cella), 또는 여기에 길다란 통로를 덧붙여 놓은 통로무덤(通路墓, Passage-grave), 또는 아예 길다란 굄돌들을 세로로 높게 이어세운 키다리 고인돌인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표석(表石)으 로서 지상에 만든 석조물(石造物)이다. 보통 평지나 언 덕 경사면에 둥글거나(卵形) 위가 뽀죽한(圓錐形) 덩 어리 모양의 받침돌(塊石型 支石) 서너개가 놓여있고, 그 위에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올려져 있는 것으로, 공중에 들려있는 돌덩어리(浮石)를 말하는데, 일반적으 로 그 모양이 두툼한 바둑판(碁盤)과 비슷하여 바둑판 식(碁盤式)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 바둑판식 고인돌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무덤방이 따로 없이 여러 무덤이 모여있는 묘역의 중심에 묘표(墓標)로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한반도 전통의 뫼(封土墳) 앞에 설치하는 제단(祭壇)인 상석(床石)이 그 잔존(殘存) 형태이다. 주로 한반도의 남한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형식이 유럽과 중남미, 미국에서도 발견되지만, 대부분 고인돌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알려진 숫자는 실제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덮개돌의 크기60∼80톤이 넘는 집채만한 초대형에서 자그마한 소형까지 다양하다. 크기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대형은 사람 키를 넘어서는 1.8m 이상의 것이고, 중형은 1.8m ~ 90cm 사이의 것이다. 그리고 소형은 90cm 이하의 것이다.덮개돌은 주로 두툼한 두께의 육면체(六面體) 반석(盤石)으로서, 가로로 평평하게 수평을 이루며 놓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방패(防牌)처럼 세로로 세워져 벽을 만든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위아래가 약간 찌그러진 넙적한 난형(卵形)과 동그란 구형(球形)도 있지만 매우 드문 편이다. 그리고 남한의 내륙지방에서는 탁자식과의 혼합형(混合形)인 길죽한 판석형 덮개돌 아래에 둥글거나 뽀족한 받침돌이 고여있는 모습도 발견되는데, 남해안에서는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거북등(龜甲)처럼 윗면이 둥글고 아랫면은 반반하게 다듬은 거북모양(龜形)들이 많이 발견되며, 제주도에서는 아랫면조차 깍아내어 덮개돌이 둥글게 돔(dome)을 이룬 경우도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덮개돌이 불규칙한 형태의 덩어리 수 있다. 즉 초기에는 탁자식 고인돌의 '가'자 평면의 무덤방 짜임새와 같은 5개의 받침돌이었다가 점차 그 개수가 줄어들었으며, 나중에는 경사면(傾斜面)을 이용하거나 봉분(封墳)을 쌓고 덮개돌의 뒷턱을 걸쳐놓고 그 앞 부분에는 1 ~ 2개의 받침돌을 고인 경우가 많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받침돌 사이를 아예 잔돌과 흙으로 메꾼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고창(高敞)을 비롯한 서해안에서는 끝이 뽀족한 고깔꼴(圓錐形) 또는 그와 비슷한 기둥꼴(柱形)의 받침돌들이 발견된다. 보통 받침돌은 덮개돌에 비하여 매우 작은데, 선산(善山) 도리사(桃李寺)와 인도(印度)에서는 받침돌이 그 위의 덮개돌만큼 커져 마치 덮개돌 5개를 쌓아 만든 4사자석탑(四獅子石塔)처럼 보이고 있으며, 중부지방에서는 덮개돌 아래에 고여진 받침돌들이 그 위에 올려져있는 덮개돌 만큼 커져 덮개돌이 이층(二層)으로 겹쳐진 고인돌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고인돌은 탑처럼 만들었다 하여 탑파식(塔婆式) 고인돌로 따로 분류한다.. 무덤방지상과 지하로 구분된다. 바둑판식 고인돌의 초기에는 탁자식 고인돌처럼 4∼5개의 두꺼운 굄돌이나 받침돌로 둘러싸인 지상 공간에 주검이나 유골을 두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가 점차 개석식 무덤방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 주변에 잔돌이 둘러지거나, 또는 지상에 받침돌만 남아있고, 무덤방은 지하에 따로 만들어지게 된다. 무덤방에는 판석(板石)을 세운 돌널(石棺)과 조그만 덩어리돌이나 깬돌로 4면의 벽을 쌓은 돌덧널(石槨)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평면은 돌널무덤과 마찬가지로 긴네모꼴(長方形) 또는 사다리꼴(梯形)을 보여준다. 창녕(昌寧) 유리(幽里)의 고인돌 유구(遺構)에서는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면서 판석조각을 여러 겹 겹쳐놓아 돌널(石棺)과 돌덧널(石槨)의 중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덤방 윗 부분에는 뚜껑돌이 올려질 수 있는 턱을 만들어 이단무덤방(二段墓室)을 만들었는데,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 같은 이단구조의 무덤방들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유주변에 흙이나 돌을 쌓아 나즈막하게 봉분(封墳)을 만들고, 그 봉분 꼭대기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지상(地上) 또는 반지하(半地下) 구조도 있어, 돌널무덤(石棺墓, 石箱墳)과 비슷한 점이 많다. 돌널무덤과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얇은 뚜껑돌이 아니라, 두껍고 커다란 덮개돌이 지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굄돌이나 받침돌이 없기 때문에 고인돌(支石墓) 대신에 큰돌무덤(大石蓋墓)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반쯤 땅속에 파묻혀있어 자연석(自然石)으로 오인(誤認)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덮개돌 아래에는 판석이나 돌덩어리를 쌓거나 구덩이만 파서만든 무덤방이 들어있으며, 그 안에서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돌단검(磨製石劍)과 청동기(靑銅器)가 발견되어 모두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이라는 알 수 있었다. 이 개석식 고인돌은 덮개돌의 가공상태(加工狀態)와 주변상황(周邊狀況), 그리고 입지조건(立地條件)이 여느 자연석과는 다르기에 고인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개석식 고인돌의 분포돌널무덤(石棺墓, 石箱墳)과 거의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특히 중국(中國)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과 요녕성(遼寧省) 지역, 그리고 한반도(韓半島)를 거쳐 일본(日本) 규슈(九州)의 북부지방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江華島)를 비롯한 남한(南韓) 전역(全域)과 제주도(濟州道), 일본(日本)의 규슈(九州)에서는 굄돌이 없이 덮개돌만 지상에 드러나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요동반도(遼東半島)에서부터 북한(北韓), 그리고 남한의 양평(楊平), 춘천(春川) 등의 한반도 내륙지방에서는 돌무지(積石)와 탁자식 고인돌이 결합한 듯한 형식이 발견되는데, 마치 소형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 돌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개석식 고인돌과 함께 돌무지(積石)와 뫼(封土墳)가 한 군데에 함께 모여있는 경우가 있으며, 봉긋한 뫼의 한쪽 편에 덮개돌이 기대어져 있는 고인돌들도 상당수 발견된다.이 중에는 바둑판식 고인돌이거나 탁자식 고인돌의 구조를 갖춘 것도 상.
들어가는 말세계는 이념적 대립이 사라진 지 오래다. 때문에 그 대립의 주축이었던 미국과 구 소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 판 대결은 이제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초강대국이 사라진 지금은 이전의 이념적 갈등보다는 다른 성격의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정확하게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강대국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고, 반면에 약소국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위치를 방어해 간다. 그 방식이란 때론 폭력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강대국이라 불려진 선진국은 어떻게 강대국이라 불리울 수 있었는가? 선진국 대열에 섰다고 하는 우리나라와 이미 선진국에 들어섰던 일본, 지금 세계의 정세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우리의 주변국인 일본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이 진정 강대국이라 설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우선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근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일본만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어서이다. 이에 명치유신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따른 일본의 국가 전반적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일본을 살펴보겠다. 그리하여 제국주의가 일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고 또한 당시 제국주의에 맞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방향과 그 의의에 대해서 생각함으로서 현대의 일본이 어떠한 과정에서 강대국이라 불리우게 되었는지 결론을 지어 보겠다.메이지 유신의 의의. 메이지 정부의 수립메이지 시대는 일반적으로 1868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1912년 7월까지 약 44년 동안을 메이지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무가정부인 에도막부체제의 정치형태가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본의 정치 형태는 무사가 출현하고 이후의 700년 간 지속되어 왔던 무가정치였다. 천황은 지속적으로 왕정복고의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에 이르러서 무가정부를 타파하고 천황의 친정을 이루었고 더불어 그간의 봉건적 제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 개혁의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메이지 유신의 내용우선 구세력의 타파를 볼 수 있다. 구세력이 되어 버린 막부 측은 신 정부에 반발하였다. 이로써 1868년 무진 년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이 전쟁을 무진전쟁이라 한다. 무진 전쟁에서 신 정부는 구미 각 국에 천황이 일본국의 원수임을 선언하면서 구미 세력의 중립을 약속 받았다. 이는 신 정부의 대외 정치적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신 정부는 1년 5개월에 걸친 내전을 승리로 종결했다. 막부 정부가 멸망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발생한 대항세력등은 무력으로 제압한 신 정부는 국내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 무진 정쟁을 통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으로 세력을 강화한다.둘째, 봉건적 제도를 타파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각 번(藩)의 영주로부터 토지와 인민을 봉환 받아야 했다. 1869년(명치2년) 6월 씨스마·조슈·도사·히젠한의 네 영주가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의 상고문을 제출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번(藩)이 동조했다. 그러나 구영주는 그대로 번정을 맡아 이름이 바뀐 지번사(知藩士)로서 존립했다. 따라서 봉건적 체제는 형식적으로 소멸되었지만 번의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의 확고한 자리 매김을 위해서 토지와 인민을 직접 통치해야 하는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871년 7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감행하여 전국의 261개의 번을 모두 폐지하고 이어서 이전의 번구획에 관계없이 전국을 부·현으로 나누어 3부(府) 302현(縣)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정부는 통일 국가 건설의 확실한 기틀을 마련하였다.셋째, 사회제도를 개혁하였다. 판적봉환에 의해서 번주(藩主)와 번사(藩士)의 신분관계가 없어졌다. 따라서 정부는 번주를 상층의 공가(公家)와 함께 화족(華族)으로, 번사를 구 막부의 신료와 함께 사족(士族)으로 편입하여 봉건적 주종 관계를 해소시켰다. 또한 농·공·상을 평민으로 하고 1871년에는 차별인 이었던 비인(非人)등을 평민으로 해방하였다. 평민도 성(姓)을 허용하고 화족·사족과의 결혼과 직업의 선택, 이주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4민 평등이 이루어지고 통일적인 호적을 편성함으로써 새로운 신분제도가 성립하였다.넷째, 근대적 군제를 창설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보다 강력한 체제 유지를 위해서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근대적인 군제의 창설을 시도했다. 1876년(명치6년) 징병령) 만 20세 이상의 남자는 신분의 구별 없이 징병의 대상이 되어 3년 간의 병역을 복무해야 한다고 규정을 발포하여 4민 징병의 군대를 만들었다. 또한 군제 정비에도 착수하여 병무성을 육군성과 행군성으로 분리하였고 1878년에는 참모본부 신설, 1981년에는 헌병제도를 확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찰제도도 정비하여 1874년 도쿄에 경시청을 설치하였다.다섯째, 근대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근대적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우선 군사 공업화를 추진했다. 구 막부의 시설을 이용하여 관영 공장 형식으로 운영하여 병기를 생산하는데 이 부분에서 외국의 신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생산의 증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철도 산업을 적극 육성하여 철도를 개설하여 개항장과 대도시를 연결, 교통 뿐만 아니라 통신 우편 제도를 시작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이루어 갔다. 이와 더불어 화폐제도 개혁과 금융 제도 정비도 주지하여 국립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도 발행하였다.여섯째, 문명의 개화를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이 전개됨에 따라 자국 내에선 문화와 국민 생활 전반에 서양의 근대사 상과 문명, 생활양식이 유입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풍조를 문명 개화라 불렀다. 대표적으로 양복이 예복 화된 것, 전통 두발에서 단말머리로의 변화 및 유행, 서양식 건축, 서양 요리집등 특히, 가스등·인력차·철도마차등이 있다. 그리고 국가 전반적인 근대화 현상이 교육제도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1871년 문부성을 신설하고 이후 국민 모두에게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부여하였다. 이후 전문교육 기관으로 대학을 설립하고 많은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여 학술의 발달도 도모하였다.마지막으로 대외관계의 양상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는 일찍부터 서양 열강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전 구 막부가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1858년 막부는 미국과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5개국 조약을 안세이(安政) 5개국 통상 조약이라고 한다. 각 조약은 본문과 무역 장정으로 되어 있는데,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 자주권을 가지지 못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들은 칙허를 얻지 않고 막부가 조인했기 때문에 안세이 임시 조약이라고도 한다.의 개정을 위해서 유럽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일본측의 유럽 상황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메이지 정부로 하여금 근대화 정책의 필요성을 실감케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주변국과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정한론) 에도 시대 말기·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조선 침략론으로 에도 시대 말기에 일본이 구미 열강의 압박을 받게 되자 그 보상으로 조선·만주를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정책을 위시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과거의 서양 열강이 일본에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청국과는 1571년 일청수호조규를 맺어 기존의 중화사상으로 중국의 종주개념을 양국의 대등한 국가로서의 개념으로 변화시킨다.. 메이지 유신의 의의이로써 메이지 유신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일본은 이렇게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 정부 아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국가 모든 분야에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입헌적 정치 체제의 실현을 서양 열강과 대등하기 위한 중요 사항을 인식하였다. 근대화 정책과 맞물린 문명 개화는 정부 및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국회 개설 운동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의회를 개설하고 1889년 2월 대 일본 제국 헌법을 공포한다. 이것은 여러 차례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이르렀던 계기라 할 수 있다.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구미 선진국과 대등한 지위를 확립하고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조선과 중국, 러시아를 세력권에 넣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메이지 유신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정책과는 다르게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국가의 정부 주도 하에 달성한 근대화 개혁 정책이라는 의의로 함축된다. 따라서 서구 열강과 대등한 강대국 건설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화의 동아시아 침략 확대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제국주의로서의 길을 걷는 일본메이지 우신의 목표인 서구 열강의 대등한 위치 획득은 그들의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의 성공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약소국과 강압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자국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상황이었다. 일본도 열강의 대열에서 주변국에 침략을 강행했고 막대한 경제적 이들을 취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의 팽창은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영국·러시아·프랑스의 3국협상 국가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 국가의 대립적인 양상을 보이는데 곧 1914년 7월 제 1차세계대전이 반발하게 되고 이것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다. 일본은 이때 영국 측에 가담하여 승전국으로서의 막대한 이익을 받는다. 이 세계대전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사회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무역 시장의 변화와 확대, 산업 구조의 변화, 금융 독점자본의 형성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독점자본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누리며 급속한 발전을 했던 일본은 전쟁의 종결 이후 점차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유럽 제국의 생산력이 회복되면서 일본의 해외시장은 축소하게 되고, 주가 폭락과 관동 대지진의 발생 등으로 경제계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즘의 정의아나키즘(anarchism)은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두 마디의 그리스어가 어원인 아나키(anarchy)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아나키는 그리스어 av(의미: 없음[an으로 발음])과 apxn(의미: 권력 집단이나 정부["arkhe"로 발음됨])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아나키즘의 사전적으로 여전히 정부가 없다는 의미로 정의한다. 현대 사전이 아나키즘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의 저작과 행동에 기초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실천적 이론을 뜻한다고 한다. 아나키즘 역사가와 일반적 사전과 백과 사전에서도 역시 그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같은 외부와 일반적인 대중사람들은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자주 오용하며, 그래서 오해를 낳는다.아나키즘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인 바쿠닌(Mikhail Bakunin:1814-1876)과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1842-1921)이 나옴으로서 정형화된 이론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바쿠닌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아나키즘을 소개했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에게서 영감을 받은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에 대한 많은 책을 썼으며, 아나키즘 이론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책으로는 농장과 공장에서의 상호 원조(Muitual Aid,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가 있다. 크로포트킨은 1910년에 Encyclopedia Britannica 의 11판에 포함된 처음으로 사전에 수록된 아나키즘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작성했다. 그는 아나키즘이란 단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지배 체제가 없는 사회에서의 생활과 행동에 관한 이론의 주요 원칙에 주어진 이름, 문명화된 존재의 무한히 다양한 필요와 소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법의 준수나 어떤 권위에 대한 복종에 의해서가 아닌 다양한 그룹, 지방, 직업간의] 출생으로 1889년 진사(進士)가 되어 한림원(翰林院) 길서사(吉庶士)가 되었으나, 무술정변(戊戌政變)(1898)을 계기로 관계를 떠나 신교육에 의한 중국 혁신에 뜻을 두고, 1902년 중국 교육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급진적인 혁명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항일 혁명운동에도 종사하였다. 1907년 독일에 유학, 철학 ·윤리학을 공부하고 귀국 후, 장빙린[章炳麟]이 주재하는 《소보(蘇報)》 발간에 참여하여 혁명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청조(淸朝)의 탄압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 쑨원[孫文] ·황싱[黃興] 등 혁명지사들과 교유하였다. 중화민국 성립 후(1912), 초대 교육총장이 되어 근대 중국 학제의 기초를 세우고, 1916년 베이징대학[北京大學] 학장에 취임하여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등 신예교수를 등용, 새롭고 자유로운 사상의 기운을 일으킴으로써 5·4운동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중 ·일전쟁 중 홍콩에서 병사하였는데, 국학과 근대철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고, 저우쭤런[周作人]이 평한 대로 그의 생애는 '유리주의(唯理主義)’로 일관하였다. 저서에 《중국 윤리학사(倫理學史)》(1927) 등이 있다.도 ≪아사경문≫에서 소설을 발표하여 아나키즘의 이상사회를 제시하였다.중국의 허무주의는 러시아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혁명적 허무주의는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과는 달리 청 왕조의 전복이라는 정치적혁명을 추구했다. 이 후 중국인에게 아나키즘의 수용은 이론적으로 볼 때 혁명이론의 전진을 의미했는데, 종족주의에 기초해 만주족 정권인 청 왕조를 타도하는 정치혁명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해 전제왕조라는 군주제를 전복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나아간 것이다.. 중국식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출발시기는 1907년,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강습회'라는 단체의 설립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사'라는 단체의 설립으로 보고 있다. 위 두 단체는 각각《천의》와 《신세기》라는 아나키즘 잡지를 발행했는데 보통 두 단체는 잡지의 이름을 따서 두어 자유권과 독립권보다 평등권이 우선이라는 논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천의》에서 국수주의와 아나키즘을 결합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였는데, 중국 고대 사상가인 노자를 중국 아나키즘의 창시자로 보았다. 국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응용하여 독자적인 아나키즘 이론을 풀이하였다. 그의 사상의 특징은 국학과 혁명이 결합한 것으로 전통적 평균사상과 근대적 평등사상을 섞은 절대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그의 아나키즘을 '중국식 아나키즘'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또 다른 아나키스트 조직인 신세기파는 리스쩡의 주도로 파리에서 조직되었는데, 당시 프랑스는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였고, 이것은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세기파의 이론가인 리스쩡은 아나키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기존 질서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고, 이에 따라 군국주의·조국주의·가정주의·사산(私産)주의·종교주의를 구체적인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종교·전통·가족·방종·엘리트·통치·군벌·국가에 반대할 것을 주장했고, 자유·과학·인도·혁명·공산·국제 등에 찬성했다. 따라서 신세기파의 아나키즘은 정부나 국가에 대한 혁명 외에도 가족, 종교, 전통에 대항하는 문화혁명을 강조했다. 그는 아나키즘 혁명은 사회혁명이라고 구분했고, 배황혁명을 주장했다. 테러와 폭동 또는 총파업과 같은 행동주의를 취하기도 하지만, 아나키즘에 대한 선전과 교육의 통한 장기적인 혁명을 더 선호하여 "아나키즘 혁명은 교육으로 혁명을 이루는 것"이란 구호로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을 핵심으로 하였다. 종교에 대해서는 일종의 미신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했으며 전통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인의 가장 큰 결함은 전통문화에 대한 과대망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나키즘 사회를 대동(大同)사회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동사회와는 전혀 다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를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주의를 근대 중국에 소개하기도 한 것이다 의지에서 성씨를 폐지하기도 했다.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전복된 후 새로 건립된 공화정부를 어느 정도 신임했던 아나키스트들은 주력 활동으로 폭력행위를 자제하고 개인 도덕의 수양을 통해 새로운 사회 도덕을 창출하려 노력했는데 이에 따라 진덕회, 육불회등과 같은 도덕 수양 단체를 조직한다. 1912년 7월 스푸도 '심사(心社)'를 조직해 도덕 계몽 운동에 동참한다. 회명학사와 심사는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알려준다. 두 단체는 활동범위와 임무가 달랐는데 회명학사가 대외 활동에 비중을 두어 공산주의와 군국주의의 반대, 공단(노동조합)주의와 종교주의 반대, 가족주의의 반대, 채식주의, 언어통일, 만국대동이라는 8대 강령을 내세웠고, 심사는 개인의 도덕 수양을 강조하여 육식, 음주, 흡연의 금지와 용역, 가마, 인력거 사용금지, 결혼금지, 족성사용금지, 관리, 의원, 군인이 되지 않음, 정당가입금지, 종교를 믿지 않는다라는 12가지 규약을 정했다. 이 심사의 규약은 당시의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과 윤리를 타파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회명학사와 심사를 만들고 1년후 《신세기》에 연재된 글들을 모아 출판하여 무료로 배포하여 사회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그가 1세대 아나키스트인 신세기파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나키즘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해 공화정부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권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직 순수한 사회혁명만을 추구했다. 또한 스푸의 민성사(1913년 8월 회명록이란 제목으로 발행한 잡지)는 위안스카이 정부의 탄압에도 살아남아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분야에서 일정하게 사회주의 운동세력을 유지했다. 그가 죽은 후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은 잠시 침체되었으나 신문화운동 시기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스푸의 사상은 청말 아나키즘과 신문화운동 시기의 아나키즘을 연결해주는 다리역활을 한 것은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스푸의 학생들과 신문화운동1915년 《신청년》의 창간으로 시작된 신문화운동 시기에 옛 신세기파 했고 어떻게 일어었는가에 대한 답변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라가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것을 수호하려 했던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 §조세현, 『동아사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책세상, 2001조광수, 『중국의 아나키즘』신지서원, 1998(두산세계백과엔싸이버) http://search.encyber.com/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무정부주의(두산세계백과엔싸이버) http://search.encyber.com/wsearch.php?gs=ws&gd=&cd=&k=&d=&p=1&gs=ws&q=허무주의####참고사항####아나키즘을 정의하기아나키즘(anarchism)은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두 마디의 그리스어가 어원인 아나키(anarchy)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아나키는 그리스어 av(의미: 없음[an으로 발음])과 apxn(의미: 권력 집단이나 정부["arkhe"로 발음됨])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아나키즘의 사전적 정의는 여전히 정부가 없다는 의미이다. 현대 사전이 아나키즘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아나키스트들의 저작과 행동에 기초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실천적 이론을 뜻한다고 이해한다. 아나키즘 역사가와 괜찮은 사전과 백과 사전에서도 역시 그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같은 외부에서는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자주 오용하며, 그래서 오해를 낳는다.주요한 현대 사전인 Webster's Third International Dictionary는 짧지만 정확하게 아나키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모든 형태의 정부와 유사한 형태의 속박에 반대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자발적 협동과 자유로운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적 이론." 다른 사전들도 비슷한 의미로 아나키즘을 설명한다. Britannica-Webster 사전은 아나키즘을 "모든 정부 권력이 불필요하며 바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