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의 영성)5.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공간의 의미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공간(space)은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서 핵심적이다. 아바 펠릭스와 동료 구도자들은 번잡한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진리를 만나러 갔다. 그들이 거기에 간 목적은 내적소음이 없는, 마음과 정신의 내적 공간을 열기 위해서였다. 사막의 빈 공간에서 영혼은 진리에 안착할 수 있으며,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약의 끈들이 다시 묶일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기를 원한다.공간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의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또한 혼잡과 공간에 대한 여러 체험은 교육에서도 발견된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교사에게서는 배움을 위한 공간의 부족을 경험하게 되지만 들어주고, 대답을 줄 뿐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우리의 통찰을 환영하는 교사, 탐구의 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으로서 정보와 이론을 제공해 주는 교사, 학생들에게 서로 도우며 배울 것을 격려하는 교사, 그런 교사와 함께 공부할 때 우리는 배움의 공간이 갖는 힘을 알게 된다.개방성, 경계 그리고 환대배움의 공간에는 세 가지 주된 특징, 세 가지 본질적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개방성, 경계 그리고 환대의 분위기다.개방성(openness)이란 공간의 상식적 의미를 말함에 다름 아니다. 공간을 창조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와 내면에 있는, 배움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 진리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을 수 있는 장벽을 치우는 것이다.앎을 위한 공간을 열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과, 배움의 공간을 메워버리려는 불안한 태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무지는 진리를 향해 가는 첫 단계라는 것, 무지가 일으키는 불안에는 즉각적인 대답이 아니라 미지로의 모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진리를 찾으려 애쓸 뿐만 아니라 또한 진리가 우리를 찾으려 애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공간의 개방성은 그 경계(boundaries)들의 견고함에 의해 만들어진다. 배움의 공간이 무한히 개방될 수는 없다. 열린 배움의 공간을 창조하기 원하는 교사는 그 경계를 신중하게 정해서 지켜야 한다. 경계는 공간의 개방성을 지켜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그 공간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사막의 교사들은 물러서지 않도록, 배움이 공간의 경계 내에 머묾으로써 진리에 의해 발견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켰다. 이러한 훈련의 상징물은 이 교사들이 거주했던 ‘암자’(cell, 종종 오두막이나 동굴)였다.그들이 금욕주의에서 암자는 중요했다. “그대의 암자에 앉아 있으라. 그러면 그것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리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는 만일 하나님을 여기서, 이 장소 곧 그의 암자에서 만날 수 없다면, 그는 다른 어떤 곳에 간다 해도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좋은 교사들은 진리가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때는 흔히 그 표지로서 불안과 고통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교사들은 학생들이나 그들 자신이 ‘암자’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경계를 굳게 지키며, 우리 모두를 그 경계 안에 붙들어 둠으로써 진리가 일할 수 있도록 한다.이렇게 배움의 공간은 고통스런 장소일 수 있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또 다른 특징인 환대(hospitality)가 있어야 한다. 환대란 우리가 서로를, 서로의 갈등을, 서로의 새로운 생각을 개방적이고 주의깊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환대란 언약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 변화시키는 진리가 가져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환대가 있는 교실, 즉 서로 시합을 벌이듯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지 않는 교실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서로와 언약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진리와 만날 수 있다.물리적, 개념적, 극적 공간개방성, 경계, 환대. 이러한 특질들을 갖춘 배움의 공간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 교실의 물리적 배치를 들 수 있다. 의자가 강단을 향해 줄지어 배치되어 있을 때, 배움의 공간은 각 학생과 교사 사이에 시선과 주의가 오고 가는 좁다란 길로 한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함으로써 우리 사이에 열린 공간을 만들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면, 무언가 다른 메시지가 전달된다.또한 교사는 말로써 공간-이를 ‘개념적 공간’이라 부르자-을 창조할 수도 있다.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독서 과제를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강의를 통해서다.우리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많은 분량의 텍스트를 주지만 수도사들은 한 쪽이나 한 구절, 혹은 한 줄에 대해 여러 시간, 여러 날을 들여 깊이 숙고한다. 그들은 그런 독서를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거룩한 독서’라고 부르며, 관상 기도를 하듯 책을 읽는다. 이 방법을 통해 독서는 배움의 공간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열어 준다.배경 지식이나 전체적인 조망을 얻기 위해서 좀더 많은 분량의 독서 과제를 부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적은 분량의 텍스트는 집중 탐구를 위한 장(場)이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열쇠는 학생들을 텍스트의 경계 내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즉 그들이 근거없는 견해나 희망 사항에 불과한 환상이나 아무 관련 없는 사실들 속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교사는 또한 강의를 활용하여 배움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교사는 비판적 정보와 해석학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경계들을 설정할 수 있다. 많은 교사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로써 공간을 메워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가르침이 의존하고 있는 극적 공간(dramatic space)이란 진리가 우리 삶에 가해 오는 요구들로 창조되는 공간이다. 우리는 모두 극적 긴장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강의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학생들에게 우리가 가끔씩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말해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우리는 학생들에게 우리 모두를 다스리는 진리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아바 조셉의 명령을 무효화시키는 금식 규칙, 역사 교사의 그릇된 주장을 무효화시키는 역사적 타당성과 상식이라는 규칙이 그런 것이다. 그 규칙과 우리의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극적 공간을 만들어 내며, 학생들은 그리로 끌려 들어가 분별하는 법과 상호간에 진리를 말하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침묵과 말교실의 배치, 공동 독서, 강의 외에도 교사들이 진리를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는 말의 종류 그리고 참된 말을 낳는 침묵이다.말(speech)은 귀중한 선물이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지만, 우리의 말은 너무나 자주 진리를 회피하는 수단이자, 실재를 사욕대로 재구성하는 것을 도와주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보았듯이, 침묵은 사막 교부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가 허물어지고, 우리가 우리를 찾아오는 진리를 향해 열리게 되는 자리는 논쟁보다는 침묵이다. 우리의 말이 좀더 참되려면, 그것은 그것의 원천인 침묵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또 침묵을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때때로 침묵이 얼마나 새로운 명료함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아야 한다.침묵이 효과적인 교수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훈련을 통해 점진적으로 재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침묵의 사용이 어떤 그룹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일단 우리가 침묵이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나면(침묵이 우리를 퇴보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이전의 진보가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침묵은 효과적인 배움의 공간이 된다. 필자는 침묵을 통해서, 대답보다 질문을 하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침묵이 우리에게 질문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침묵이 질문 자체이기 때문이다.'명료화 모임'(clearness committee)이라 불리는 퀘이커교도의 관습에서, 질문을 통한 교육의 모델을 발견한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커플이나 개인과 대여섯명의 의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대화에서는 한 가지 확고한 규칙이 있다. 의원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그들 자신의 대답이나 해결책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질문만 할 수 있다.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모임이 진행될수록 질문과 대답 모두 깊이가 더해 간다. 필자는 명료화 모임을 교실에서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학생들을 소그룹으로 나누어 조직한 뒤, 소그룹에서 한 사람은 문제를 제시하는 자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은 질문하는 자의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료화 모임의 간단한 규칙을 사용하면, 상당한 양의 상호 교수와 학습이 진행될 것이며, 이것을 통해 학생들과 주제는 상호 언약의 공동체로 인도될 것이라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