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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와 조식] 조식과 김구 평가A좋아요
    R e p o r t-남명 조식-학 과 : 한 국 사 학 과학 번 : 9 5 1 7 0 0 3이 름 : 김 문 영교수명 : 권 내 현선생님R e p o r t-백범 김 구-학 과 : 한 국 사 학 과학 번 : 9 5 1 7 0 0 3이 름 : 김 문 영교수명 : 권 내 현선생님1. 생애조식은 본관 창녕이고 자는 건중이고 호는 남명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조식은 조선조 연산군 7년(1501) 6월 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토동에서, 아버지 언형 어머니 인천이씨(순위 국의 딸) 사이의 삼남 오녀중 이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조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 함이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한다. 소학기에 들어서서는 이윤경, 이준경형제, 이항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단천군수로 외임에 나아가자 잠시 거기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의기는 18세 때 서울로 돌아와 성수침과 성운 종형제를 만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선생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유서외에 노장과 불서를 섭렵하기도 하였다.20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일, 이등으로 급제했다. 조식은 좌류문을 좋아하고 고문에 능하여 시문이 아닌 고문으로 시권을 써서 시관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하기 까지 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언경가가 멸문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조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25세때 산사에 가서 성리대전을 읽다가 허노재가 말한 "이윤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의 학을 학으로 하여,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야에 처증하였다.2. 사상조식의 학문은 그 형성과정에 있어서 사도의 큰 전환이 있었으므로 조선조 일반성리학자들처럼 협애하고 크게 배타적이지 않다. 선생은 소년기에는 일반사대부의 자제들처럼 소학을 익히고 육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아울러 좌유문을 좋아하고 천문, 지리, 의수, 병진등 여러 면의 지식과 기예를 익히고 닦아 그 자신이 말하듯 자부심이 대단하여 일반을 부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조식의 학문은 청년기에 이미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고, 실제 천리와 행세를 표방했기 때문에 관념적이기보다 행동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기를 앞세우는 학문이 빠지기 쉬운 현실과의 타협주의가 전혀 없고 일반이 지닌 명리와 속기를 탈진하여 청고한 지취와 기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장을 연구하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식의 청년기의 학문경향을 평하여 당시 성리학 그것도 정주학만을 학문으로 인정하고 그 외 모든 것은 이단으로 내치는 학풍에 빠져 있던 학자들은 남명학을 불순하다고 하기까지 하였는데 선생도 자기 청년기의 학문이 박대하여 일시 그런면이 없지 않았다고 시인하나, 그것은 자기학문 형성과정의 일단만 본 사람의 이야기고, 25세 때 산사에서 성리대전을 읽고 성현의 학과 지를 일생의 지표로 세워 정진한 이후의 일대전변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해명하기도 하였다. 사실 선생의 학문은 앞서 말한 사도의 전변이 말해 주듯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리하여 그의 학문은 당시 일반사대부들, 특히 과거공부에 얽매어 전전긍긍하던 학자나 정주학을 신봉하여 장구나 외운 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박대한 것이었고, 특히 25세 이후 성리학과 원시유학, 이를테면 안연의 고풍과 맹자의 의리지변, 대장부론, 호연지기를 체득하고 지행한 뒤 정심함은 관념적 이론만을 파고들던 학자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강건독실한 것이었다. 이러한 남명학의 특징을 가장 잘 형용한 이는 문목공 정구의 제문이다'천지의 순강한 덕을 받고, 하악의 청숙한 정을 한 몸에 모아, 재식은 일세를 눌렀고, 기개는 천고해야 할 직분을 의식하게 하므로써 사존관비의 풍조를 불어 일으켰다는 것, 세째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 주경과의의 학문을 가르치어 고매한 인격수양과 함께 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 행동하는 정신수양을 시킴으로써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을 당했을 때 포의의 선비들이 의연히 일어나 살신성인하여 국난극복의 실효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향과 기여는 전후상관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를 다시 한 마디로 줄인다면 '조선조 선비정신의 확립'이라 하겠다.먼저 처사상의 확립에 대해서 살펴보자. 여기서 처사라 함은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있는 선비의 통칭이다. 흔히 유교에서는 《논어》 자장편의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 함을 내세워 학문과 사환을 불가분의 관계로 여기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필연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현의 정치가 없어지고 권력자에 의해 정치가 농단되면서부터 유자들은 오히려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인륜도의를 지키고 도를 밝히고 전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조선조에 있어서도 유자가 재야의 비판세력으로 자리를 잡아 벼슬하지 않고 도를 닦고 지키고 전하는 것을 출사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남명선생에 의해 확립되고, 그는 늘 그러한 처사의 본보기로 많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조식은 일생 동안 처사라는 명실을 기하기 위해 몸을 갈고 닦았고 목숨을 내걸고 비정을 비판했으며, 그러한 처사의 명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후생을 가르쳤다. 그는 임종에서까지도 자기는 처사로 불러달라고 당부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처사로서 수도행세함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자위한 것이며, 뒷날 이율곡도 [근대에 이른바 처사로서 끝까지 그 지절을 온전히 하고 벽립천인의 기상을 세운 분은 선생뿐이다] 하였고, 정한강은 [증자가 말한 可以托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선생뿐이니 어찌 동방에서 다시 날 수 있는 호걸이겠는가?] 하였으며, 송우암은 [사람마다 義를 귀하게세웠으며, 일제시대 때 일본정부는 선생을 한국 의병의 아버지라하여 남명사상과 정신은 일인들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그의 발양에도 많은 저해를 받았다.3.저서남명의 저서로는 남명집, 남명학기류편, 파한 잡기 등이 있고 작품으로는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남명집은 갑진본, 기유본, 인술본, 갑신본, 갑오본등이있다. 갑진본(1604, 선조37년 간행)은 조식이 죽은 후 32년만에 이루어진 간본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수고를 수집, 주관하여 해인사에서 간행하였으나 장각에 불이나 널리 인쇄되지 못하였다. 문집내용이 미흡하다는 특징이있다. 기유본(1609, 광해2년)은 정인홍의 문인 문경처가 주간하여 갑진본을 근거로 간행한 것이다. 인술본(1622, 광해14년)은 영남대 도남문고에 소장된 것으로 기유본의 목판을 사용하여 간행하였다. 정인홍이 개고의 주동이다. 남명의 학문,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망라되어 비로소 문집다운 문집이 출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갑신본(1640, 인조14)은 1636년에 완성된 것을 1764년(영조40)에 별집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것으로 본집5권, 속집1권, 학기류편 5권, 학기도 1권, 부록 1권, 총 13책 6권으로 되어있다. 형태는 목판본29.5×19.2이다. 무심당 박인이 주동이 되어 별집으로 산해사우 연원록 9권 3책을 세계와 연보, 언행록, 사우록으로 편찬하여 만들고 재각본에서 정인홍이 쓴 서와행장을 빼고 편집한 것. 학기류편 권3-4에 실린 치지, 존양, 치도치법등 10여편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이다. 갑오본(1894, 고종3)은 향사 이도추와 후손 조연이 필요하지 않은 글자나 글귀를 지우고 고쳐 정정하며 다른 문집에 보이는 남명의 시문을 수집하여 속집을 낸 것이다. 대폭 수정된 문집이라 본 면목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의도적 산정을 가하고 있다. 학계에 널리 보급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균관 대동 문화연구원-간 이조초 엽명현집에 선입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이 문집을 보고 남명을 연구하니 오해가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2. 사상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성과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 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 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나라와 겨레의 크기만큼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범의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모두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저놈(왜경찰-인용자)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일지』이러한 지극하고 지순한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이 어찌 그를 '큰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인물로서의 백범은 또한 매우 '정의감' 이 높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단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변 사회 생활 문제에까지 '정의' 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다. 이있다.
    인문/어학| 2002.06.19| 12페이지| 1,000원| 조회(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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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리에 관해서
    1. 序 論高麗時代의 대표적인 지방세력으로서 鄕吏集團을 말한다. 그리고 鄕吏勢力은 지방에서 일정한 혈연성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鄕役 즉 지방실무를 담당한 支配身分的 中間層으로 파악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그들의 신분 내지 사회세력으로서의 流動性을 제도적인 일면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향리집단의 실체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첫째 麗末鮮初 호족세력의 중앙관인과 지방세력으로서의 분화현상, 둘째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중앙정권과 지방세력의 상호보완적 필요에 따라 편제된 법제적보장 속에서의 위치, 셋째 중앙정부의 존재를 前提하고 사회변동에 따라 변모하는 지방세력 내부의 분화 등에 나타나는 이들의 존재실태와 성격전환 등이 우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2. 鄕吏身分의 流動性麗末鮮初의 주요 사회세력으로 존재한 豪族에 기원을 두고 있는 鄕吏勢力은 지방세력으로 중앙정부라는 대상에 견주어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향리세력은 중앙관인과 그들 자신의 身分的·社會經濟的 기반의 始原이 동일하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시간의 先後를 갖지만 이들은 언제든지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서도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중앙의 권력이 점차 독점화 되면서 중앙으로의 진출은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 일정한 제약을 갖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방대한 지방세력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그들을 다원화하여 상층부에 대해서는 중앙진출의 문을 열어두고 하부층은 자체세력에서 점차 진출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방세력들은 법제적 보장과 함께 사회변화의 내외적인 여건으로 작용한 전쟁·쿠데타·반란·자연재해 등의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상층부는 우월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중앙 官人化되어 갔고, 하부층은 열등한 세력기반으로 점차 하급신분으로 전락해 갔다.3. 中央官人과 鄕吏勢力의 同一始原性고려 초 중앙관인과 지방세력의 구분은 왕권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의 분화현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호족의 일부는 고려의 성립과 체제 정비과정에서 중앙으로 진출하여 국의 쟁패과정에서 많은 호족세력들이 태조에게 來降하였는데, 자신은 지방에 잔류하고 자제들은 중앙에 진출시켜 중앙관인층에 편입시켰다. 이와 같이 호족의 2대부터 중앙관인층과 지방토착세력으로의 분화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고려 전 시기에 지방세력이 중앙에 진출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同一身分性의 보장은 고려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科擧制가 실시되면서 지방세력으로 있던 이들이 중앙으로 등장하는 기회가 되었고, 향리의 科擧應試資格規定은 향리층의 과거에 의한 중앙진출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이는 중앙관인과 지방세력의 사회경제적 신분의 同一始原性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또한 光宗의 군사체제 개혁 중에 侍衛軍에 지방에 풍채있는자를 선발하였는데 이 역시 지방세력의 중앙진출 기회가 되었다. 한편 고려초의 제도가 일단 정비된 成宗 대에 諸州郡縣의 자제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는데 이 역시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을 보장하는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4. 鄕吏勢力의 中央進出 制約중앙관인과 지방세력간의 사회경제적 신분의 同一始原性을 인정하더라도 실제 현상에 있어서 지방세력이 중앙에 진출하는 데에는 일정한 제약이 따랐다. 이러한 제약은 왕권이 강화되고 통치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官階와 그후 도입된 중국식 文散階·武散階 그리고 鄕職으로의 성격전환 되면서 중앙진출에 대한 제약이 나타난다. 고려는 초기에 중앙과 지방, 관인과 토호의 분화구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文散階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분화구별은 武散階가 시행되고 官階가 폐지되어 鄕職化됨으로써 완전한 구별이 나타났다. 또 事審官制度처럼 지방에 대한 간접통치 형태에 따른 中層的 구조는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에 대한 한 단계를 기존 진출세력이 운용하게 되었던 것으로써 직접적인 중앙과 지방의 분화 통제 현상을 자아냈다. 그리고 成宗 2년에 鄕吏職의 개정은 기존의 지방세력의 독자성을 봉쇄하고 국가통치체제에 편제된 신분계층으로의 고정을 꾀한 것이라 할 수 있官僚職能的인 통제는 점차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어갔다. 顯宗년간에는 諸壇史의 職制가 확대되고 향리의 정원제와 公服制度가 실시되었고, 지방관 직무로서의 鄕吏監察과 戶長擧望權 확보 등이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의 기능적 성격은 이미 독자세력으로서의 고유성은 상실되었고 지방관의 통제하에 그의 직무를 보좌하는 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아가 文宗 때에 이르러 향리에 대한 昇進規定이 정해짐으로써 중앙정부에 의한 향리세력에 대한 통제 운용의 관료체제적 제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대다수의 지방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여 이러한 지방에서는 향리에 의해서 자치가 이루어졌고 顯宗 이 후에 대두되는 貴族官人 가운데 호장층의 자손이 많은 것을 볼 때 제도적 장치에 의한 신분적 제약이 진행되었다해도 실제적으로는 중앙관인과 지방세력의 同一始原性에 바탕을 두고 꾸준한 중앙진출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5. 中央官人의 鄕吏에 대한 排他性과 差別意識기존 관인 내지는 士族의 향리가계에 대한 배타성과 차별의식은 중앙관인과 향리세력 사이에 계층간의 단절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肅宗 전후에 활동한 李永의 경우를 볼 때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胥吏로 나아가고자 할 때 政曹主事와 갈등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鄕吏家系出身이 중앙 胥吏職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의 胥吏職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서리와의 현실적인 단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高宗朝에 등제한 鄭可臣의 경우를 보면 향리출신에 대한 사족의 뚜렷한 배타성을 볼 수 있다. 羅州人인 鄭可臣은 그와 결혼을 약속한 太府少卿 安弘祐가 뒤에 뉘우쳐 말하길 "내가 비록 가난하여도 士族인데 어찌 가히 鄕貢의 자식을 들이리요"라고 한데서 당시 사족들이 갖고 있는 배타적 의식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鄭襲明의 경우를 보면 그의 선조인 鄭克儒는 戶長家系의 후손으로 이미 監務를 역임하여 관인으로 진출하였는데 그의 후손인 襲明은 다시 鄕貢進士로 文科에 급제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단 관인으로 진출하였어도 顯達치못하면 다시 향리층으로 전락할의 음서와 비슷하게 累世家風이 있는 가계의 자식들에게는 入職의 특혜를 주고 있다. 따라서 향리집단 가운데도 크게 두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戶長에 이르는 과정은 상층의 지위를 가진 향리세력 가운데 영향력이 큰 집단에 의해 세습적으로 배출되었고, 제단의 계열로 시작하는 향리들은 그들의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高宗 代에 몽고군의 溫水郡 침입시 群吏 玄呂 등은 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君戶長이 되는데 이는 鄕吏와 戶長과의 사이에 일정한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리가 일반적으로 軍功을 통해 중앙관직을 받았던 점을 볼 때 戶長으로의 임명은 현실적으로 鄕吏階層內에 郡吏系와 戶長系의 계층적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文宗 2년 10월에 향리의 과거 응시자격을 정하고 있는데 호장 이상의 孫과 부호장 이상의 子에게 製述·明經科의 응시자격을 주었다. 이를 통해서도 副戶正과 副兵·倉正 사이에 일정한 단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文宗31년의 其人選上規定을 보면 향리 가운데 제3위직인 兵·倉正에서 제6위직인 副兵·倉正 사이의 職을 담당한 자를 기인으로 選上하고 있다. 기인이 중견 향리라 볼 때 6단과 7단 사이에도 일정한 단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향리층은 중앙의 적극적인 통제에 의해서 그들 사이에도 계층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7. 武人政權 이후 鄕吏勢力의 變化무인정권의 성립 이후 고려는 정권주체 權臣의 교체가 자주 일어났고 몽고의 침략으로 원의 간섭기를 겪으면서 개혁정치의 추진과 좌절이 반복되었고 恭愍王 이후 反元改革政治와 왕조의 교체를 맞이하는 등 시대가 급속도로 변화하였다. 또한 농장의 발달로 대토지소유의 현상이 나타나 토지소유 및 수취체제의 모순이 노정되었고, 유민의 발생 및 각종 민란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그 모순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사회적 중심세력의 교체 성장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향리세력은 중앙진출을 활발하였고 잔존세력은 그들의 향역이 상대적으로 苦役化되었다.관인층이 등장하게 되었고, 무신정권에 의해서 실시된 科擧에서 지방향리층의 자제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또한 崔氏정권기에는 신진문인의 양성과 등용이 더욱 활발하여졌는데 이 역시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武臣亂을 계기로 기성관인과 문인들의 낙향생활에 따른 지방교육의 육성과 전시과 체제의 붕괴로 인한 私田의 확대 및 농장의 발달에 따라 地主佃戶制가 성행하는 등의 사회경제적 변화, 신유학의 수용 등은 이를 더욱 촉진시켰다.또한 후기의 무인정권과의 연계 및 軍功에 의한 중앙진출을 들 수 있다. 고려후기 지방에서는 농민·천민의 반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지방의 이러한 혼란은 중앙귀족과 지방세력의 이해관계를 같게 해 주었고 이 과정에서 향리층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무인정권과 향리세력과의 연계는 외관임용에 文武交替制가 시행되면서 더욱 원만하게 되었다. 따라서 무반으로의 진출이 문반으로의 진출보다 용이한 성향을 가졌던 지방 향리세력의 중앙진출을 위한 여건이 일면 성숙되었고 무신정권 성립 이후 趙位寵의 亂, 對蒙抗爭, 三別抄의 抗爭, 日本征伐, 哈丹賊의 侵入, 紅巾賊·倭寇의 侵入, 지방민란 등이 이어진 고려후기 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는 중심세력으로 鄕吏層이 활약하였고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서 이들은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향리는 원과 고려의 특수외교관계에 편승하여 그들의 신분상승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2. 殘留鄕吏役의 苦役化고려는 몽고의 침략으로 극도로 피폐해지고 촌락은 황폐하여 많은 流亡民이 생겼다. 따라서 이런 지방의 몰락은 향촌질서의 파괴를 야기했고 향리역은 그 자체가 苦役化 되었다. 지방의 조세를 담당했던 향리들은 농장이 생겨 이들이 조세를 내지 않자 대신 충당하다가 해결하지 못하고 倒産流亡하는 예가 속출하였다. 또한 其人役도 초기의 대우와는 달리 상당히 고역으로 변모하였다. 에를 들어 高宗 43년에 閑地耕作에 其人이 동원되었다거나, 忠宣王 때에 宮室의 修營과 관부의 使令役을 맡아보는 것, 忠肅王
    인문/어학| 2002.06.19| 5페이지| 1,000원| 조회(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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