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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에 대한 소고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평가A+최고예요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에 대한 소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중심으로-1. 들어가기2. 니체 텍스트의 표현방식과 독해의 방향제시3. 초인과 전통문화3.1. 가상과 미래의 시간 그리고 초인3.2. 미래로부터 등장하는 현재에의 새로움4. 영원회귀와 전통문화4.1. 영원회귀에 놓인 니힐리즘적 상황4.2. 니힐리즘를 넘어서 현재의 삶을 긍정하기5. 나가며1. 들어가기이 글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등장하는 초인(Ubermensch)과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를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두 개념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와 함께 니체의 사유에서 핵심적이라 알려져 있다. 즉 두 개념은 니체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 글 역시 니체를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두 개념의 의미를 추적하려는 것이다.그러나 이 글에서 초인과 영원회귀에 대한 어떤 이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어떤 철학자의 저서와 말들을 이론화 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우리는 많은 개설서에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부터 지금의 현대철학자들의 사유까지 체계화되고 이론화된 정리들을 접한다. 마찬가지로 니체에 대한 이론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론화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이해하는 한 방식임에 틀림없으나, 그 한계도 명확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사유는 이론화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마주하는 문제와의 대결로부터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화된 정리는 철학자들의 대결과정에서 드러나는 본래 의도에까지 다다르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니체는 그러한 이론화를 통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이 글의 본문은 먼저 이론화되지 못하는 니체 텍스트의 특성을 간략하게 살필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목적하는 초인과 영원회귀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지침을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이론화·체계화에 앞서, 니체 텍스트를 그가 펼치는 대결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후 본문은 그에 따라 초인과 영원회이때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세계를 이해하는 한 규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비판하는 형이상학은 세계를 규정하는 ‘영원불변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즉 이 형이상학은 우리의 삶에서 도출된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삶을 규정하고 결정하는 근본적 토대로 이해된다. 니체는 이러한 불변의 원리가 당대의 문화를 지배한다고 지적한다.여기서 그 지배가 비판 받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다가올 시대상황에 대한 니체의 진단과 밀접하다. 니체는 니힐리즘이 도래할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도래할 니힐리즘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의 사유와 삶은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영원불변을 주장하는 형이상학의 지배 아래 새로운 것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통 형이상학이 이성적·논리적으로 체계화되고 이론화하여 자신을 불변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니체는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이성적 사유를 넘어서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다음은 그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신체가 나이고 영혼이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중략)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다.니체는 ‘나’를 신체로 보며, 그것이 더 큰 이성이라 언급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이성이라 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사유에 대한 반성이며, 전통 형이상학의 토대인 이성적 체계화와 이론화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당대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중세 그리스도교와 결합한 결과로, 정신 혹은 비-신체적인 것을 추구해왔다. 그렇기에 신체는 그 동안 간과되고 무시해도 좋은 부분이었다. 위 구절은 그것을 체계화·이론화될 수 없는, 달리 말해서 작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는 지금 작은 이성의 전통 문화가 자기극복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저서 전체의 내용을 이룬다. 여기서는 이 자기극복을 통해서 니체가 의도하는 바를 간략하게 살펴보자.3.1. 가상과 미래의 시간 그리고 초인: 자유정신과의 비교로부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 우리는 이미 초인과 엇비슷한 자유정신(freie Geister)을 확인한다. 자유정신은 무엇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가는 정신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도래할 정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의 초인 역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자이자 도래할 자로서, 자유정신의 해방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정신이 해방에 초점을 둔 반면, 초인은 자기극복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이는 자유정신을 넘어서는 진척으로 이해할 수 있다.둘의 차이는 당대 전통문화와의 대결방식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해방에 초점을 둔 자유정신의 대결방식은 무엇보다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과 파괴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문화는 자유정신이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서 있기에, 더욱이 그것이 영원불변의 권리를 주장하며 형이상학적 원리로 버티고 있기에, 니체는 이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 파괴를 위해서 니체는 심리학과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때의 심리학이 무엇인지 그가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뇌과학으로 귀결되는 현대적 심리학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니체가 말하는 심리학은 이미 주어진 사태나 가치의 판단에 놓인 심리적 과정을 추적해보는 것에 가깝다. 그가 주목하는 역사 또한 결과물로서의 역사적 사건을 탐구하는 역사학과는 다르다. 니체는 ‘역사적 사건’의 취합이 아니라 ‘역사적 탐구’를 진행하는데, 이는 당대의 문화와 가치를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로 보고 그 과정을 추적하여 본래의 의도를 유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심리학과 역사를 사유에 끌어들임으로써 전통 문화에 놓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를 통해 전통문화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것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 담긴 니라, 현재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되었다. 즉 니체는 지금 여기에 없는, 그러나 삶을 교양시킬 계기로서 형상과 유령을 언급하는 것이다.물론 이 계기들이 어떠한 이상향인지, 아니면 가상적 대결자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형상과 유령은 아직 오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 혹은 가상의 것에 대한 선취가 초인이 행하는 극복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만은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자유정신에 대한 언급에서는 주목되지 않던 방식이다.3.2. 미래로부터 등장하는 현재에의 새로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행복한 섬’에서 니체는 신을 억측(Muthmaassung)이라 말하며, 그를 초인과 비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니체는 신만을 억측으로 두고 초인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초인 역시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일종의 이상향이 아니던가? 그리스도교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처럼 차라투스트라 역시 초인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잠시 신과 초인의 차이를 살펴보자. 이 글은 그 차이를 크게 세 가지로 본다.첫째, 신은 불멸·불변하지만 초인은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서만 이해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불변·불멸한다. 그러나 초인은 ‘현재의 인간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철저히 시간의 흐름 안에서만 파악된다. 그것은 불변이 아닌 높이로의 ‘변화’를 요구하며, 새로운 사유와 가치의 생성에 대한 추구이다. 만일 초인 역시 하나의 불변·불멸의 무엇으로 이해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변화와 새로워짐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둘째, 인간은 결코 신일 수 없지만 초인은 인간 자신의 극복과 변화를 전제로 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도 신은 인간과 함께 한다. 예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은 인간의 삶 안에 역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을 분유 받아 신을 가까이 할 수 있을 뿐, 결코 신과 같거나 그에 도달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대한 목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최고의 가치의 무가치화를 말하는 니힐리즘의 상황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두 번째는 영원회귀의 결과인 니힐리즘에서 삶의 긍정을 읽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영원회귀와 니힐리즘이 허무를 넘어서 삶에의 긍정을 향하고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4.1. 영원회귀에 놓인 니힐리즘적 상황다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절박한 부르짓음’의 구절이다.모든 것은 한결같다. 아무 소용없다. 세계는 무의미하다.이미 ‘예언자’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에서 반복된 점쟁이(Wahrsager/예언자)의 말이다. 점쟁이는 모든 것이 공허(leer)하며 한결같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음울한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포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차라투스트라가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든 것에 동일한 반복이 정해졌다면, 새로움의 추구는 묘연해지기 때문이다. 즉 점쟁이의 이 말은, 전통과 대결하며 새로움을 등장시키려는 차라투스트라의 행보를 수포로 돌리는 것이다.그러나 이토록 두려운 것임에도 차라투스트라는 점쟁이의 말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역시 같은 것의 반복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에 대한 언급이다.그대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시다.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나 새로운 생명이나 좀 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슷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의 영원한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위 글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가르침에 속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인용문에 따르면, 그가 가르치는 영원회귀는 비슷한 것의 돌아옴이나 새로운 것의 반복적 나타남이 아니다. 그는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의 돌아옴을 말한다. 즉 차라투스트라가 설파하는 영원회귀는 점쟁이의 말처럼
    인문/어학| 2015.12.27| 9페이지| 2,000원| 조회(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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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거운 학문>에 나타난 니체의 철학 : 삶에 기초한 새로운 사유에의 요구
    즐거운 학문 에 나타난 니체의 철학- 삶에 기초한 새로운 사유에의 요구-1. 들어가기2. 종족보존3. 현존재에서 시작하는 사유 : 가상과 오류에서의 진리3.1. 가상에 기초한 현존재3.2. 오류를 포함한 현존재의 진리4. 해석으로서의 철학5. 나가며 : 요약과 한국사회의 현실 지적1. 들어가기이 글은 즐거운 학문 에 담겨진 니체의 사유를 좀 더 분명히 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 즐거운 학문 의 방대한 내용을 담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몇몇 핵심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그를 이해해보려 한다. 이 글이 선택한 주제는 종족보존과 삶에서의 사유 그리고 해석으로서의 철학이다. 각각의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종족보존은 니체의 이전 텍스트에서 등장하지 않은, 즐거운 학문 의 독특한 개념이다. 니체는 사유의 발전사가 비교적 뚜렷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 에 나타난 예술에 대한 경향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 새롭게 바뀌어 가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렇기에 즐거운 학문 에서도 이전까지의 저서에서 없었던 새로움에 대한 발견이 기대된다 하겠다. 종족보존은 이를 염두에 두고 즐거운 학문 의 전체 경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다룬다.다음 장은 현존재 혹은 삶에서 시작하는 니체의 사유를 다룬다. 이는 두 가지 소주제로 나뉘는데, 하나는 가상과 연관하고 다른 하나는 오류에서의 진리와 연관한다. 사실 가상과 오류, 그리고 진리에 대한 니체의 언급은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가 가장 현실적인 삶을 가상으로 분류하고 진리에 오류를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그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 글은 그 이유를 삶에서 철학하는 니체의 태도로부터 추적한다.본문의 마지막에서는 해석으로서의 철학을 다룬다. 니체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자이며, 초기 저작부터 즐거운 학문 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가올 시대 준비해왔다. 그렇기에 즐거운 학문 에 이르러 그가 발견한 미래의 철학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것은서정연한 사회의 잠들어있는 정열을 깨우는 자로서, 전통에 비교·모순·새로움·모험·대립을 가져오고, 새로운 종교와 도덕을 요구한다.이 글은 4절의 언급이 1절과 밀접하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좀 더 상세한 해명이 필요하다. 1절은 종족보존의 상대적인 자유만을, 4절은 종족보존의 악의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확실치 않다. 해명은 4절의 ‘악의’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다음은 그에 해당하는 구절이다.정복하고, 낡은 경계석을 무너뜨리고, 낡은 신성함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어떤 경우이건 악한 것이다. 낡은 것만이 선하다. 어떤 시대에나 선한 사람들은 낡은 사상을 깊이 파내려가 열매를 수확하는 정신의 경작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땅은 결국 이용되면서 수명을 다하게 되고, 악의 쟁기가 언제나 새로이 도래한다.선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낡은 것 혹은 기존의 것에서만 주어진다. 낡은 사상의 결실을 수확하는 자만이 선하다. 이는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기존의 정복자, 즉 전통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에 위배되는가의 여부가 어떤 행위나 사람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악한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전통의 신성함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복을 꿈꾸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기존이 아닌 새로움을 이야기하는 자들이기에, 기존의 정복자가 구축한 체계와 문화에 예속되지 않는다. 결국 전통적 가치에 대한 비-예속성이 ‘강한 정신의 소유자’를 악의로 묘사하는 근거다.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선악구분에 대한 그의 독특한 사유를 전제로 한다. 새로운 것이 악의로 묘사된다는 것, 그리고 선악의 기준이 전통의 가치에 있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악의 구분이란 특정 관점에 따라서 주어진다. 이는 서양의 전통에서 다소 과감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서양의 전통은 선·악 혹은 정의에 대한 규정을 무엇보다 형이상학적인 원리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에 맞서 ‘정의 그 자체’를 거론하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례와 ‘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악의라 평가받으면서도, 새로운 종교와 도덕을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와 도덕, 즉 새로운 선악의 구분이다. 그리고 이는 선악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 즉 종족보존의 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한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선악의 구분이란 새로운 관점의 구축으로부터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4절의 강한 정신은 1절의 넓은 안목을 전제한다. 즉 ‘넓은 안목’ 아래 전통을 넘어서 새로운 관점을 구축하는 자, 그의 정신이 4절의 강한 정신을 지시한다.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분명 종족보존이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떠올리면, 그에서 불변하는 하나의 가치를 추론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분명 니체는 종족보존이란 하나의 과제를 제시하였지만, 이는 더 많은 관점의 수용과 새로움의 등장을 준비한다. 종족보존이란 개념을 통해서 니체는 우리를 더 넓은 안목으로,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더 많은 관점과 가치로 이끈다. 결국 종족보존이란 과제는 하나의 가치만을 위한 주장이 아니라, 더 많은 가치의 가능성을 위한 주장이다. 니체는 전통을 원리가 아닌 하나의 관점으로 돌리고, 또 다른 새로운 관점과 가치를 구축하기 위한 장치로서 종족보존이란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3. 현존재에서 시작하는 사유 : 가상과 오류에서의 진리3.1. 가상에 기초한 현존재앞선 장에서 다룬 종족보존에서 우리는 집단으로서의 인간종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다소 개별자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종족보존이 언제나 개별적인 층위에서만 진행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자연스러운 접근방식이다. 인간종족이라는 표현은 분명 집단을 지시하지만, 이때의 집단은 보편을 지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족은 개별인간을 떠나서 사유될 수 없는 집단에 대한 표현이며, 따라서 그것의 보존과 번식은 언제나 개별인간의 층위를 함께 지시한다. 반면 보편은 개별자 모두에 대한 적용가능성을 때문에 가능하다. 칸트의 도식에 따라 ‘미지의 X’나 가상이란 표현을 따르고 있지만, 니체는 그 의미내용을 삶의 영역에서 재평가한다. 인식론적 논리 안에서는 가상으로 치부되지만, 우리가 현실적인 삶에서 만나는 것은 현상 이외의 것이 아니다. 물자체가 논리적으로 요청되더라도,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 만나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가상 혹은 현상이다. 결국 니체 자신의 사유가 사유가 삶에 기반하기에, 그는 물자체에 대한 가상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이다.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실재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다음은 실재론자들(Realisten)을 비판하는 57절의 구절이다.저기 저 산! 저 구름! 거기에서 무엇이 실재란 말인가? 거기에서 환상과 인간적인 첨가물을 제외해보라, 그대들 냉철한 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대들이 그대들의 유래와 과거, 이전 단계들, 모든 인간성과 동물성을 잊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실재”란 없다. 그것은 그대들에게도 없다.57절에서 니체는 실재론자들을 냉정한(nuchtern)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를 정열과 환상에서 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재론자들은 자신들이 환상을 넘어서 세계와 사물의 실재에 마주한다고 믿는다. 이는 근대의 합리성에 따라 사유하는 자들을 의미할 것인데, 앞선 54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가상을 멀리하고 실재에 주목하는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Wirklichkeit/현실)란 무엇인가? 환상이란 베일을 벗은 ‘그대로의 세계’를 목도한다는 실재론자들이 만나는 실재는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 니체는 현실적인 삶을 주목하며 실재론자들의 불분명한 표현에 이의를 제기한다.인간인 이상,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현실적인 삶에 근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것은 ‘저 산’과 ‘저 구름’이지, 그 이외의 무엇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들을 특정한 한계 안에서만 접한다.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접근에 언 곳곳에서 니체는 오류에 대한 긍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때 오류는 ‘참되지 않음(비-진리)’ 의미한다. 즉 오류는 비-오류인 참(진리)을 설정했을 때에만 그 규정을 획득한다. 오류가 그것의 반대인 참의 확정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주목하는 오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대항인 진리를 한정해야만 할 것이다.하지만 진리(truth)에 대한 이해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서 진리를 말하는 방식도 있으며, 명제들의 정합에서 진리를 말하는 방식도 있다. 또한 의사소통에서의 합의를 바탕으로 진리를 이야기하는 하버마스나, 존재의 드러남을 근원적 진리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여기서 진리를 전통적인 소박한 일치설에 한정하고자 한다. 소박한 일치설은 서양철학 전통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일 뿐만 아니라, 니체 당대의 문화인 근대인식론의 토대를 이루는 대표적인 진리설이기 때문이다.소박한 일치설 혹은 소박실재론은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서 진리여부를 판단한다. 그런데 이 경우, 참·거짓의 기준은 사물자체에 속한다. 대상 사물에 귀속되어 있는 사실에 따라서 그에 대한 지성 혹은 판단의 참·거짓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문장의 진리여부는 사과자체에 빨간색이 귀속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일면 타당해 보이는 이 진리설에 니체는 이의를 제기하는데, 이는 대상사물의 유동성과 인간지성의 한계에 근거를 둔다. 그에게 있어서 인식이 대상은 삶의 맥락에서 떨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이미 하나의 가상이며 환상이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점을 확정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사물과 지성의 일치는 언제나 불명확하게 남는다. 그렇기에 니체는 진리를 언제나 하나의 과도함이자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입장을 ‘진리의 폐기’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는 회의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일치설에 충실히 답변하고 있다. 대상과 지성의 일치에서 참이 다.
    인문/어학| 2015.12.27| 10페이지| 2,000원| 조회(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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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재자와 본질> 제4장과 '현실적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
    존재자와 본질 제4장과 ‘현실적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1. 들어가며2. 제4장의 본질과 존재 구별3. 합성실체의 본질에 대한 명칭3.1. 본질을 전체로서 드려내는 명칭들3.2. 보편적·개체적 본질에 대한 명칭들4. 현실적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4.1. 합성실체의 본질에 대한 명칭과 존재의 관계4.2. 현실적인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관계5. 나가며1. 들어가며철학을 세계에 대한 물음과 해명으로 이해한다면, 존재자(Seiende)는 철학의 핵심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개별자들의 총합으로 이해하든, 어떤 개념적 범위로 이해하든, 인간사유의 특정 관점이나 영역으로 이해하든, 세계를 사유하며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함께 거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해명은 철학의 핵심적인 작업에 해당한다.그런데 과연 존재자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사실 그것의 ‘무엇임(quiddity)’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기에 그것에 대한 물음은 ‘존재(Sein)’에 대한 물음 역시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존재자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무엇임과 더불어 존재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그러나 존재와 무엇임이 언제나 존재자의 그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은 그 대상을 보다 명확히 해야만 한다. 존재자라는 명칭은 다양한 대상에게 쓰이며, 이때 그 대상에 따라 다양한 무엇임과 존재의 층위가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재자는 눈앞에 있는 개별사물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유니콘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물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 두 존재자의 구별은 각각 다른 층위의 무엇임과 존재를 말하게끔 한다. 전자에서는 현실적인 존재와 그것의 무엇임이, 후자에서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존재와 무엇임이 말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자가 신이나 천사와 같은 또 다른 대상을 향해 지칭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층위의 존재와 무엇임에 대한 탐구를 진행할 수도 있다.이 글은 관심을 갖는 탐구의 범위는 우선 ‘눈앞에터 그것에 오는 것이며 본질과 합성을 이룬다. 이러한 부분들 없이 어떠한 본질도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모든 본질이나 무엇임은 그것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인식 없이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인간이나 불사조가 실재에(in reality/in the real world/in rerum natura) 존재하는지를 모르더러도,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이것으로부터 다음이 분명하다. 존재는 본질이나 무엇임과 다른 것이다. 비록 그것의 존재와 본질이 같은 그러한 실재가 있을지라도.토마스는 여기서 본질(essentia)과 존재(esse)를 구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본질은 존재자의 ‘무엇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은 그 실재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이해가능하다. 불사조에 대한 그의 예는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불사조는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불사조의 실재에 대해서 확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새’라는 그것의 무엇임을 이해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존재가 사물의 본질과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이 본질 외부에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 논리 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같은 것일 수 없다.이러한 토마스의 언급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말해지고 있는 존재의 함의다. 유럽어족의 존재(Sein/being/esse)라는 단어는 실재·계사·동치·발생·머무름 등 다양한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말 ‘있음’과 ‘~임’으로 넓게 구분하였을 때, 존재가 지니는 함의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위의 언급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존재가 지니는 함의를 정당하게 한정해야 할 것이다.불사조의 예에서 등장하는 존재의 함의는 무엇보다 우리말 ‘있음’에, 더 구체적으로는 ‘실재함’에 해당한다. 만약 위의 언급에서 존재를 ‘~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놓을 경우, 불사조의 ‘무엇임’은 그것의 존재와 쉽게 구별되기 어려울 것이다. 불사조의 ‘무엇임’은 일종의 ‘~임’을, 즉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자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가상의 존재자다. 물론 ‘불사조’는 ‘새’·‘죽음’·‘지속’이란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 얻은 개념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직접적 개념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이해된다. ‘새’·‘죽음’·‘지속’ 등 불사조를 구성하는 개념들은 경험에 대해서 일차적이지만, 불사조라는 존재자는 그것들의 이차적 추상 혹은 이차적 개념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사조에서 말할 수 있는 존재와 본질의 관계를 이 글의 물음에 바로 적용시키기 이전에, 우리는 우선 현실적 존재자에 알맞은 개념을 찾아야만 한다.그런데 토마스의 존재를 실재함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현실적 개별자와 불사조에 같은 의미의 존재를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재함’ 역시 그것이 실재하는 영역에 따라서 달리 말해질 수는 있다. 예를 들어 현상(Erscheinung)과 같이 ‘인간의 지성 안에 있음’이나 이데아와 같이 ‘세계와 분리되어 어딘가에 있음’ 역시 일종의 실재함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토마스가 언급한 실재함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계로서의 자연(natura) 안에 있음을 의미하므로, 그 의미를 한정할 수 있으며 그를 현실적 존재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여기서 추리해야 할 것은 우선 현실적 존재자의 본질이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자는, 존재자와 본질 의 용어에 따르자면, 무엇보다 복합실체(substaniae compositae)에 해당할 것이다. 복합실체란 형상과 질료로 합성된 실체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개별자들 대부분이 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토마스가 언급하는 복합실체의 본질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3.1. 본질을 전체로서 드려내는 명칭들토마스가 말하는 합성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합성된 실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그것의 본질은 형상만으로도 질료만으로도 지칭될 수 없다. 또한 그 본질은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의미하지도, 형상과 질료에 첨가되는은 각각 전체 인간의 어떤 부분들만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마스에 따르면 종차와 유는 각각 형상과 질료에 해당할 수 있는 한 층위를 부각시키지만, 다른 층위를 배제하지 않고 전체로서 종을 표현한다. 인간의 예를 계속 따라가며 차례로 살펴보자.‘동물’이란 인간의 최근류는 분명 인간의 질료격인 한 측면을 지정한다. 그러나 유로서의 ‘동물’이 인간의 형상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형상에 대한 특별한 규정 없이 다만 질료적인 측면을 지정하고 있을 뿐이다. 토마스는 이를 3차원의 물체란 단어가 특정 사물을 그것의 형상에 대한 규정 없이 전체로서 지시하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물체란 단어는 사물의 형상을 지정하지 않지만, 사물의 형상을 배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이성적’이란 인간의 종차는 분명 인간의 형상적인 측면을 지정한다. 그러나 종차로서의 ‘이성적’ 역시 인간의 질료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질료에 대한 특정한 규정 없이 다만 인간의 형상적인 면을 지정하고 있을 뿐이다. 토마스는 이를 ‘혼이 있음(animated/has a soul)’이란 언급이 물체(body)나 그 밖의 것의 지정 없이도 가능하다는 예로부터 설명한다. ‘혼이 있음’이라는 단어가 사물의 질료를 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물의 질료에 대한 배제를 의미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토마스는 정의와 함께 본질을 가리키는 명칭들, 종·유·종차가 어떻게 합성실체의 전체를 지시하게 되는지 설명하였다. 각각의 명칭들은 1)처음부터 합성실체의 전체를 말하고 있거나(종과 정의의 경우), 2)합성실체의 특정한 부분을 지정하고 다른 부분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유와 종차의 경우), 합성실체의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들이다.3.2. 보편적·개체적 본질에 대한 명칭들토마스에게 있어서, 합성실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명칭들이 합성실체의 전체를 지시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토마스가 다루는 명칭들은 종·유·종차와 같이 종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가 아니고, ‘이 살(hoc os)’과 ‘이 뼈(haec caro)’와 같은, ‘지정된 질료(materia signata)’만이 개별화의 원리임을 밝힘으로써 정의가 어떻게 합성실체의 본질을 보편적으로 언술하는지 설명해간다.여기서 우리는 본질에 대한 보편적인 명칭들이 어떻게 개별자에서도 말해질 수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토마스가 언급하는 있는 종·유·종차나 정의는 분명 보편적 명칭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화의 원리인 지정된 질료를 통해서 보편적 언술인 ‘인간에 대한 정의’가 소크라테스에 해당할 수 있듯이, 종·유·종차 역시 그것의 지정을 통해서 개별자를 지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종으로서의 ‘인간’, 유로서의 ‘동물’, 종차로서의 ‘이성적’은 -각각 그것의 지정됨에 따라 개별자인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언급하는 명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4. 현실적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본래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글은 존재자와 본질 의 제4장 언급이 과연 현실적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에도 해당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려 한다. 그 책의 제4장에서 토마스는 존재를 실재함으로 다루고 있었으며, 본질 바깥의 것으로 이해하여 본질과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실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온 규정으로, 과연 이것이 현실적 존재자에 해당하는 본질과 존재의 관계에도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이 글은 이에 대한 해명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려 한다. 첫째, 합성실체의 본질에 대한 명칭과 그것의 존재는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를 살필 것이다. 둘째, 현실적인 존재자에서 본질과 존재가 어떠한 관계에 놓이는지를 살필 것이다.4.1. 합성실체의 본질에 대한 명칭과 존재의 관계이 글의 앞선 부분에서 우리는 현실적 개별자가 속하는 합성실체의 본질을 토마스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폈다. 토마스는 합성실체의 본질이 그것의 정의에 따라 나타내지며, 그것은 종·유·종차와 같은 명칭들로 개념화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따라 이 글의 주어진 물음을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펴보자.
    인문/어학| 2015.12.27| 9페이지| 2,000원| 조회(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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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의 자유정신에 대한 소고 : 니힐리즘을 중심으로
    니체의 자유정신에 대한 소고-니힐리즘을 중심으로-1. 들어가며이 글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 담긴 니체의 사상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서문에서 니체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자유정신들(freie Geister)을 위해 쓰였다. 따라서 자유정신에 대한 이해는 이 책을 독해하는 데에 결정적일 것이며, 이 글의 주제 역시 자유정신으로 좁혀진다.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을 통해서 자유정신의 사상을 정리하는 작업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정리의 어려움은 우선 니체의 글쓰기 방식에서 기인한다. 니체의 중기작품에 해당하는 이 저서는 잠언형식을 띠고 있어서, 보통의 철학저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체계적 논증구조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이 저서에서 니체의 사유를 일관되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더욱이 이 책은 자유정신에 대해서 다양한 비유와 상징의 방식으로 다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정신에 대한 직접적인 규정은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따라서 자유정신의 사상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직접적 분석으로부터만 파악하는 작업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겠다.이에 이 글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구절 하나하나를 분석하기보다는, 니체 철학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자유정신의 의도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니체의 사상에서 핵심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개념은 초인·영원회귀·힘에의 의지·니힐리즘 등이다. 물론 이 핵심개념들은 그의 사상 전체를 함께 구성하고 있기에 그 중 하나의 개념만을 활용하여 자유정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짧은 분량을 염두에 둔다면, 자유정신을 설명하는 데에 비교적 적합해 보이는 하나의 개념에 집중하는 것도 더 알맞은 선택일 수 있다.이 글이 선택한 핵심개념은 니힐리즘(Nihilismus)이다. 이 선택의 이유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지닌 자유정신에 대한 설명방식 때문이다. 이 책은 형이상학·그리스도교·도덕 등의 전통적 그동안 보증되던 행위의 이유, 행위의 “무엇 때문에”를 결여하게 된다. 니체가 주목하는 허무는 그와 같이 ‘최고의 가치’가 사라지고, 그에 따라 행위의 이유가 사라지는 사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니체는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을 니힐리즘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니힐리즘을 규정할 경우, 니힐리즘이 역사적·시간적인 고찰로부터만 이해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치의 상실’은 그것이 상실되기 이전과 상실된 현재라는 역사적 과정을 고찰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던 ‘종래의 시대’, 그리고 더 이상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없어 그것을 상실하게 된 ‘현재의 시대’, 이 양자에 대한 이해로부터만 니체가 언급한 니힐리즘은 접근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니힐리즘 언급이 니체가 살았던 당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더 이상 종래의 최고의 가치가 설명할 수 없는 현재의 시대, 그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니체가 니힐리즘을 언급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이 글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자유정신이 니체가 당대에 내리는 시대진단이라고 본다. 이미 서문에서 니체는 도래할 시대를 자유정신이 요구되는 시대로 언급하고 있으며, 자신의 책은 그를 준비하기 위해서 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해된 자유정신이 니힐리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서 그가 행한 비판들의 이유를 살피면서 더욱 명확해진다.제1편에서 등장하는 주된 비판대상은 형이상학·도덕·그리스도교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의미와 평가기준을 제공하는 최고의 가치에 해당한다. 즉,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최종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최고의 존재자를 언급함으로써 각각 최고의 가치를 주장한다. 물론 도덕은 그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니체는 도덕의 선과 악이란 구분이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를 내재화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 분석하면서, 도덕을 그것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혹은 도래할 시대를 자유정신으로 해석함으로써, 니체는 형이상학·도덕·그리스도교라는 ‘전승된 최고의 가치’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니힐리즘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자유정신을 통해서 니힐리즘의 사상을 예고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3. 자유정신에 있어서 니힐리즘의 근원성: 자유정신과 속박된 정신의 비교 &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부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전승된 최고의 가치를 비판하는 이유, 그리고 그 전체가 니힐리즘의 구도 안에서 읽힐 수 있었던 이유는, 니체가 당대와 도래할 시대를 자유정신의 시대로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시대를 그와 같이 진단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니체가 행한 시대진단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이다. 만일 그와 다른 시대진단을 제시할 경우, 우리는 아마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 비판과정 전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니체가 시대를 자유정신으로 진단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자유정신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규정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5장은 자유정신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담고 있다.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우리는 자유정신이라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다. (중략)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살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그가 관습적인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 본질에 속한다.속박된 정신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유정신을 언급하고 있다. 속박된 정신은 상례(常例)로서 기존의 가치를 내재화한 정신이고, 자유정신은 기존의 가치에서 사유하지 않는 예외의 정신이다. 니체는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관습에서 해방되어 있는 정신을 자유정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유정신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다.이러한 규정은 니힐리즘의 구도와 함께 생각했을 때 트의 코페르니쿠스 전환과 쇼펜하우어의 개별화의 원리(prinicpii individuationis)를 통한 비유를 더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지시하는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세계는 칸트가 언급한 물자체와 비유될 수 있다. 마치 인식작용에 의해서 구성된 개별화된 현상이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듯이, 근원적인 세계도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외에의 방식에서는 직접적으로 만나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이해방식인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 진술을 따라감으로써 니체가 생각하는 세계의 근원적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세계의 근원적 모습은 어떠한가? 뒤에 나온 구절은 그에 대한 설명과 결과에 해당한다. -니체는 현명했던 그리스인들이 비극과 신화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존재를 공포와 끔찍함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비극의 탄생 곳곳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도취·환각·공포·불안 등과 결부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이 언급은, 니체가 본래적인 세계를 공포와 불안을 유발시키는 고통스러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이렇게 니체의 사유는 삶의 무가치함을 이야기하는 염세주의(Pessimismus)에 이른다. 삶의 근원인 세계가 본래적으로 고통과 불안이기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즉, 세계는 근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추하고 두려운 대상이며, 그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역시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폴론적 가상이나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에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근원적 고통을 가리는 베일일 뿐이다. 베일로 가린다고 해도 그 본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상과 낙천주의는 다만 세계의 본체를 숨기는 기능을 할 뿐이다.이 글은 니체가 다가올 시대를 니힐리즘으로 진단하는 이유를 바로 이러한 ‘고통으로서의 세계이해’와 염러운 것으로 말해질 것이다. 이 경우 니힐리즘의 긍정은 그 안에 내재한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긍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정신이 니힐리즘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세계와 삶 역시 긍정할 것을 요구함과 다르지 않다. 즉, 자유정신의 시대는 삶의 근원적인 고통·불안·추함을 감내하면서 목도하기를 요구한다.이 같은 무가치·무목적성과 고통의 세계를 목도하라는 자유정신의 요구는 인간에게 매우 큰 짐이다. 니체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많은 경우 인간이 니힐리즘에서 도피하여 다시금 ‘최고의 가치’에 안주하거나 삶을 퇴락으로 몰아간다고 지적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권력에의 의지 제27절의 언급이다.불완전한 니힐리즘, 그 여러 형식. 우리는 그 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의 가치를 가치 전환하는 일 없이, 니힐리즘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험이야말로, 그 반대의 것을 산출하고, 문제를 첨예화한다.니힐리즘의 불완전한 형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니힐리즘으로부터의 도피로서, 니힐리즘이 산출해야 할 것의 반대를 산출한다. 니힐리즘이 본래 ‘전승된 최고 가치’의 무가치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최고의 가치’가 다시금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은 전통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를 철저하게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켜서 유지하려고 한다. 니체는 그러한 시도들을 불완전한 니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경우 니힐리즘이 해체하려는 전승된 ‘최고의 가치’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극복해야 할 문제 역시 더욱 첨예화하게 될 것이다.니체는 의지박약·약함·부절제 등을 이러한 불완전한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보다 강한 힘에서부터 나오는 니힐리즘을 언급한다. 그가 자유정신에서 요구하는 바는 불완전하고 약한 니힐리즘이 아니라 후자의 니힐리즘이다. 아래 인용한 권력에의 의지 제22절은 그 두 가지 니힐리즘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니힐리즘 그것은 이의적이다.A. 정신의 상승한 권력[힘]의 징후로서의 니힐리즘, 즉 능동적 니힐리즘.B.
    인문/어학| 2015.12.27| 10페이지| 2,000원| 조회(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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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가 말하는 진리의 성격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중심으로
    니체가 말하는 진리의 성격에 대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을 중심으로1. 들어가기2. 니체의 진리이해가 지닌 두 가지 층위3. 니체의 진리이해가 지닌 특징3.1.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진리3.2. 세계(자연)의 위상의 근원성3.3. 삶을 긍정하는 진리4. 마무리1. 들어가기이 글은 니체가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피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많은 저서가 그러하듯이, 니체는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명시적으로 풀이하는 데에 인색하다.더욱이 우리는 진리에 대한 통일된 관념을 지니지도 목하고 있다. 진리란 말 그대로 참(truth)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경험한다. 전통적으로 사물과 지성의 일치를 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 정합성을 진리의 요건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또한 하버마스는 진리를 합의에 의해서 구해진다고 보고,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는 근원적 진리로서 ‘존재 드러남’을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일상에서 우리는 옳은 것이나 어떤 효용성을 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그런데 진리가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진리이해의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 사상가의 진리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진리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그 사상가의 저서를 면밀히 살피고 추적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그 사상가의 저술 의도, 그가 씨름하고 있는 대상, 그 사상이 놓여있는 계보학적 위치 등을 함께 생각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이를 고려하여 이 글은 본문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을 중심으로 니체의 진리이해를 살핀다. 니체의 중기 저서로 평가 받고 있는 인간적인 에서 우리는 그가 학문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대상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존 전통과의 대결이다. 이 글은 그 대결을 부분적으로 따라감으로써, 그로부터 말할 수 있는 니체의 진리이해를 추적하고자 한다.이에 따른 본문의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①은 자유정신을 속박된 정신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말해지고 있는 속박과 자유는 전통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혈통·환경·신분·지위’는 전통적인 형식과 관습을 의미하며,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는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사유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행위가 이 주어진 전통에서 예상할 수 있다면, 즉 상례에 해당하는 자라면 그는 속박된 정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통에서 벗어난 행위와 사유를 하는 사람, 즉 전통에서의 예외에 위치하는 자가 자유정신에 해당한다. 이렇게 니체가 구상하는 자유정신은 우선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그 성격으로 갖는다.그러나 ‘전통으로부터의 해방’만으로 자유정신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자유정신이 단순히 전통에서의 예외라면, 전통을 벗어난 사람 모두가 자유정신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관습이나 법에서 벗어난 사람, 즉 범죄자나 악한 모두를 자유정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당대의 전통을 벗어난 과거의 사람들 역시 자유정신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자유정신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서문의 언급은 무의미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자유정신의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 단순히 전통과의 단절이나 전통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니체가 요구하는 해방은 무엇인가?②에서 니체는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다시 강조하면서, 동시에 속박된 정신과 자유정신의 차이를 그들의 ‘요구하는 바’에 따라 좀 더 섬세하게 구별하고 있다. 속박된 정신은 신앙,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한다. 여기서 속박된 정신에 해당하는 신앙은 기존의 질서에서 말해지는, 즉 습관화된 믿음을 지칭한다. 이렇게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이 습관에서 받아드리는 신앙인에 속한다. 반면, 자유정신은 신앙이 아닌 근거를 요구한다. 자유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요구하는 ‘근거’를 결과다. 즉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그것의 본래 상태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사물에서 찾아지는 수의 법칙은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사물을 다르게 있으며 우리의 이해에 속한다.니체는 ④에서 칸트를 인용하며 이를 보다 명확히 한다. 자연에 대한 개념은 자연 그 자체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오성에 의해서 주어진다. 개념은 일종의 이해로서 자연이 아닌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유에 속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이해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자주 ‘태양을 둥글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태양을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태양자체에서 원의 개념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원이라는 특정한 우리의 이해로부터 우리가 태양을 원형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둥근 태양은 단적으로 자연에서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에 속하여 취해진다고 하겠다.물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인간의 이해와 사물 자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성격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제는 주어진 개념을 자연과 결합하는 데에서 온다. 위의 문단에서 니체는 이를 ‘자연=표상’이라고 도식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말한 바와 같이, 태양 자체는 원형이 아니다. 다만 태양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이 원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전통형이상학의 오류는 여기에 위치한다. 특정한 방식을 기반으로 한, 세계에 대한 특정하고 한정적인 이해를 마치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④의 끝에서 말하고 있듯이, 니체는 수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표상되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언급한다.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인간이해를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인정을 뜻할 것이다.전통형이상학은 이를 보지 못하고, 표상된 세계 또는 추상화된 세계를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한 형이상학에 매몰되어 “무의식중에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영원한 진리이며,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변하는 존재, 사물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중략)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②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그는 역사를 보며 정신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항상 새롭게 변화해가는 사람이었고 형이상학자들과 반대로 ‘단 하나의 불멸하는 영혼’이 아니라 죽어야 할 많은 영혼들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니체는 전통형이상학자 혹은 전통철학자의 이해가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이해임을 지적한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사실과 그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는 절대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역사적 성격을 보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오류다.사실 여기에는 인간 사유와 진리에 대한 니체의 두 가지 역사 이해가 속한다. 그 중 하나는 인간의 사유가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유전적 결함을 넘어서 철학을 역사의 포로가 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이 말은 물론 지나온 역사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결한 환경에서 더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더러운 물로도 몸을 씻어야 한다.” 그는 주어진 시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자각하고 그 시대 안에서 사유해야 함을 강조한다. 역사적인 사유, 역사적인 철학은 당대의 모습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유와 진리를 모색해가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이와 더불어 주목할 점은 여기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는 변화하지 않는 하나의 ‘있었던 사실’로 기능하겠지만, 니체는 역사로부터 정신과 마음이 변화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것은 정신과 마음이 변화와 시간 안에서 주어진다는 그것의 역사적 성격에 주목한 결과다. 즉 니체는 사실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정신과 사유의 역사적 성격에 대권위와 위력을 지닌다.인륜(Sittlichkeit)은 헤겔에게 있어서 정신의 최고단계, 혹은 그 최고단계의 구현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즉자적인 의지의 무한성이 타자와의 대자적인 반성을 통해서 정립되는 보편적인 단계다. 위 인용글에서 헤겔은 이 인륜적 실체를 개별주체에 대해 최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인륜은 자연의 존재에 비하여 그 권위와 위력이 절대적이며 무한하다. 자연의 존재는 최상의 단계인 인륜에 이르러 중대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의 보편성을 최상의 의미로 둔다는 헤겔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이러한 헤겔에게 있어서 진리는 이성 스스로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서 자연의 존재를 넘어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즉 헤겔에게 있어서 진리의 근원은 변증법적 자기반성을 통해서 인륜을 구성하는 이성에 있다.반면 니체는 초기저작인 비극의 탄생 부터 지속적으로 세계의 근원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극은 아폴론적인 외면을 갖지만, 그 외면은 언제나 디오니소스적인 내면을 향해있으며 그 내면은 끊임없이 비극에 함께 놓여 있다. 오페라나 소크라테스의 언술과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감추고 제거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비판하며, 니체는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 세계와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자리 시키고 있는 것이다.다음의 인간적인 제2권에서도 역시 그와 같은 지적을 볼 수 있다.② 우리는 언어와 개념으로 사물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근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언어와 개념을 통해 사물을 실제 있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사고하고, 서로 분리된, 더 나눌 수 없는 그리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유혹받는다.위의 글에서 니체는 세계를 합리적인 부분에서만 이야기하는, 혹은 합리성으로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전통형이상학·종교·도덕을 비판하고 있다. 니체는 전통의 사유들을 로고스(말/이성)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로 본다. 분명 우리일까?
    인문/어학| 2015.12.27| 10페이지| 2,000원| 조회(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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