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Doha Development Agenda: 도하 개발 아젠다) 협상은 2002년 초부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자간 무역협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모두 8차례 있었는데, 시장개방을 확대하고 자유로운 무역을 위한 규범을 확립함으로써 국제무역과 세계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진행되었던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킴으로써 세계경제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WTO회원국들은 UR협상을 타결하면서 농산물과 서비스분야의 시장개방 내용이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2000년부터 추가적인 자유화 협상을 시작하기로 약속하였다.그러나 많은 회원국들은 공산품분야에서도 아직 상당한 무역장벽이 남아 있고, 또 UR협상에서의 합의결과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세계화의 진전에 따른 무역환경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새로운 무역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분야에서도 추가적인 협상을 시작할 것을 희망하였다. 이에 따라 WTO회원국들은 1998년 5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2차 각료회의에서 폭넓은 분야에서의 무역자유화를 위한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을 준비하기로 합의하였으며, 3년 반의 논의를 거쳐 2001년 11월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개최된 제4차 각료회의에서 DDA협상의 출범을 선언하는 각료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농업분야는 UR협상 이전에는 국제무역협상의 논의대상이 아니었으나, UR협상에서 처음으로 예외 없는 시장개방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2000년 초부터는 UR협상 타결시의 합의에 따라 WTO에서 농업에 대한 후속 협상이 개시되었는데, 2001년 11월 도하각료회의에서 DDA협상이 출범하면서 농업협상도 DDA협상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농업협상에서는 관세와 같은 보호 장벽의 실질적 감축, 농업분야에 대한 국내보조의 실질적 감축, 그리고 수출보조의 단계적 철폐를 위한 방안을 주로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그동안 우리나라와 EU, 일본 등이 주장한 식량안보, 환경, 농촌개발 등 농업의 비교역적 고려사항(NTC: Non-Trade Concerns)을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원래 WTO 다자간 무역협상은 무역장벽을 줄여나감으로써 세계무역을 증대하는 목적 하에 추진되는 것이다. 또 세계 농산물시장이 심각한 수급불균형 현상을 보임에 따라 세계적 차원의 농업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아울러, 세계적으로 관세나 보조금은 줄여나가는 추세이다. 또 농산물이 주요 생산품인 개도국들도 농산품에 대한 무역장벽을 대폭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고 있어 협상여건은 농산물 수입국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이런 맥락에서 지난 6월 미국은 모든 농산물 수입관세의 상한을 25%로 하고 스위스 공식에 따라 5년 동안 급진적으로 관세를 감축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였다. 미국은 국내 보조에 있어서도 전체 농업생산액의 5%수준을 상한으로 설정하여 그 이하로 감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호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구성원으로 하는 농산물 수출국 그룹인 케언즈그룹도 이와 유사한 취지의 제안을 제출하였으며, 많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도 선진국들의 시장을 대폭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우리나라를 비롯한 EU, 일본 등 농산물 수입국들은 이와 같은 급진적 개혁 제안을 반대하면서 각국의 현실과 NTC를 반영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제안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제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서를 2차례에 걸쳐 제출하고 국내보조에 있어서 NTC를 반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제출하였다. 일본, 노르웨이 등도 수입국으로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취지의 제안을 제출하였다. WTO 회원국들은 이러한 제안을 종합하여 관세와 보조금의 감축 등 시장개방의 폭과 속도에 대한 세부원칙(“modalities”)을 수립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과 케언즈그룹과 우리나라, EU, 일본 등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합의가 이루어질 지에 대해서는 전망하기 어려운 형편이다.DDA농업협상 결과 예상되는 개방의 폭과 속도를 완화하는 데 있어서는 개도국 유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동 지위 유지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고도화된 경제구조, 첨단제품의 공격적인 수출 등을 이유로 우리의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진 결과 개도국지위 유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은 형편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개도국 우대조치가 대폭 강화될 것으로 전망되자, 선진국들은 수혜개도국의 범위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객관적 기준에 의한 개도국 분류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물론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고 있지만, 선진국들은 협상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도국지위는 양허협상 단계에서 주로 우리나라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 결정되므로 사전에 주요 이해관계국을 직접 방문하여 우리나라 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주요 협상대국별로 관심사황과 관심지에 있어 관건이 되는 향후 양자협상 준비에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개도국지위 유지를 위한 논리를 보완?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선진국들의 개도국 세분화 시도에 대해서는 계속 저지해 나갈 것이다.진행 중인 농업협상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시기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는 현안이 쌀 문제이다. 2005년 이후 관세화 유예여부는 2004년 중에 협상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은 WTO농업협정의 기본원칙인 관세화 원칙을 수용하거나, 일정기간 추가적으로 관세화유예를 연장하는 방안이 있다. 쌀 재협상은 새로운 규범을 제정하는 DDA협상과는 외형상 별개의 사안이나 내용상으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세부원칙 협상에서 결정될 관세감축과 TRQ 증량원칙, 그리고 우리의 개도국 지위유지 여부는 쌀 협상의 중요한 기초가 될 전망이다. 정부는 일단 관세화 유예를 전제로 협상을 준비하고 있으며, 세부원칙협상 동향을 감안하여 대안별 유불리에 대한 정밀한 분석도 진행할 계획이다.
1. 안락사의 정의'안락사euthanasia'라는 말은 '행복'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u'와 죽음을 의미하는 'thanatos'의 결합에서 유래된 것으로 ‘행복한 죽음, 편안한 죽음’ 등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락사는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위 또는 무위에 의해 그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행위가 안락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반드시 죽음을 당하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 죽음이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죽음이 예견되는 결과에 대해서는 의도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이중효과의 원리에 입각하여 안락사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이렇게 정의된 안락사 행위에는 최소한 두 사람이 관여되어 있다. 한 명은 안락사를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락사를 당하는 사람이다. 안락사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전반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바로 의료전문가인 의사들이다. 그러나 안락사를 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 안락사의 유형안락사 논의에 있어 일반적으로 ‘안락사’라는 하나의 명칭을 사용하지만, 실질적 안락사는 다양한 형태도 나타난다. 상이한 안락사 형태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 명칭을 사용한다면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상호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고, 합리적인 담론의 장이 형성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먼저 안락사의 개념을 간결하게 구분?정의 하도록 하겠다. 안락사는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의사 표명에 의해 자의적/비자의적 안락사로,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의 양상에 의해 적극적/소극적 안락사로 통상 구분이 가능하다2-1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구분A. 자의적 안락사 (Voluntary Euthanasia)자의적 안락사는 환자 자신을 위하여 환자 스스로의 분명한 요구에 의해서 시행되는 안재는 사고와 질병, 노령으로 인해 의사결정 능력을 영구히 상실한 성인에게 시행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미리 안락사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한지 않은 성인들로 간주 된다.C. 반자의적 안락사 (Involuntary euthanasia)반자의적 안락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사결정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계속 살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하여 시행되는 안락사이다. 반자의적 안락사가 실제로 시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반자의적 안락사는 한 유형으로서 구분되지만 이것은 용어의 대구적 구분법에 의한 것이며 실제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할 능력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안락사가 수행된 경우는 살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여도 별 무리가 없다. 따라서 반자의적 안락사는 안락사의 의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으므로 정당성에 대한 검증은 필요없을 것으로 보인다.2-2 시행자의 행위에 따른 구분A. 적극적 안락사 (Active Euthanasia)적극적 안락사는 의사가 치명적인 극약을 먹이거나 주사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안락사를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안락사는 행위자가 환자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의도하고 환자를 직접적으로 죽이는(killing) 것이다. 적극적 안락사는 달리 ‘작위적 안락사’라고 부른다.B. 소극적 안락사 (Passive Active Euthanasia)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에게 어떤 필요한 의학적 조치나 기대되는 의학적 조치를 하지 않는 환자가 자연의 경과에 따라 죽음에 이르도록 환자를 방치하는 것(letting die)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를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죽음의 지연을 철회하여 죽음을 자연적 과정에 맡기는 것이다. 적극적 안락사와 다른점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끝내는 것이다.이렇게 구분된 안락사는 통상적으로 자의적 적극적, 자의적 소극적 , 비자의적 적극적, 비자의적 소극적 안락사로 조합된다.3. 안락사와 관련된 쟁점3-1. 자의적 안락사의 내라는 압력을 넣을 수 있다. 비단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환자 개인이 그러한 압력을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자의 경우 순간적인 정신착란을 일으킬 경우도 배제할 수 없고 혹은 자의적 안락사를 가장한 살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자의적 안락사의 근저에 있는 윤리 원칙들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 자의적 안락사를 법제화하는데 따른 기술적 어려움을 제기하는 것이다.그리고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의사의 실수도 종종 지적된다. 자의적 안락사가 법적으로 인정된다면 의사가 환자들에게 살 가능성이 있지만 극히 희박하다는 진단을 했을 때 자의적 안락사를 선택한 많은 환자들이 죽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중 몇몇은 살아남아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몇몇은 의사의 실수로 생명을 잃게 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자의적 안락사에 대한 이러한 부작용들이 자의적 안락사를 거부할 경정적인 논변들이 될 수는 없다. 안락사가 법제화됨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몇몇 경우의 죽음들에 대비하여 안락사가 법제화되지 않아 죽을 때까지 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겪을 엄청난 고통의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의적 안락사의 경우 도덕적 정당화는 충분히 가능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하지만 자의적 안락사의 법제화의 경우 그에 따른 부작용을 고려하여 이루어질 때 그 합리적 토대가 더 탄탄해질 수 있을 것이다.3-2 .비자의적 안락사의 정당화 문제A. 장애를 가진 유아에 대한 비자의적 안락사여기서 장애를 가진 유아라고 한정하고 있지만 사실 유아 이외 좀 더 큰 아이들의 경우나 심지어 어른의 경우라도 이성적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한 정신연령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즉 크게 보면 신성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무와 고통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목표 사이의 갈등이 문제의 초점이다. 단지 자의적 안락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율에 따른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자율성 존중적인 이유, 즉 부모의 감정 같은 것도 없다면 비자의적 안락사가 대안이 되는데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장애가 아이의 삶을 정상적인 아이보다는 덜 행복하게 하겠지만, 살 가치가 없을 정도로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비자의적 안락사에 대한 평가가 애매해진다. 예를 들어 혈우병에 걸린 유아의 경우 피 속에 자신의 피를 응고시키는 요소를 갖지 못해 가벼운 상처에도 위험에 처한다. 의료기술이 많이 발달되어 계속 수혈을 해야 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혈우병 환자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신생아가 혈우병 판단을 받았는데 부모가 아이의 안락사를 원한다고 했을 때 이 안락사는 옹호될 수 있을까? 부모로써는 이 아이의 죽음으로 다시 가질 새 아이의 더 행복한 삶을 주장할 수 있다. 부모로써 혈우병이 걸린 아이를 기르게 되면 다른 아이를 가질 형편이 안 되는데 만약 혈우병 걸린 아이를 안락사 시키고 새 아이를 가진다면 새 아이가 느낄 행복 총량이 혈우병이 걸린 아이의 것보다 클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복 역시 더 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그러나 혈우병이 걸린 아이는 앞으로 단지 개인적으로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가능성이 큰 존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좀 고통스럽겠지만 척추 이분증에 걸린 아이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 경우 비자의적 안락사의 결정은 아이를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에게는 행복의 정도 차이겠지만 그 아이에게는 생명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후자가 중요함은 당연한 것이라 판단된다.B. 의사능력을 상실한 성인에 대한 경우사고나 노령으로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영원히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그런 능력 상실하게 이전에 이미 이 같은 상황에서도 계속 살기를 희망했는지의 여부를 결정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막상 이 같은 상황에서의 마음은 그 이전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의 비자의부자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안락사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하지만 얼마전 뉴스에서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라도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반응도 가능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영국에서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의학 기술의 발전은 안락사 논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3-3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윤리적 차이에 대한 평가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구분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모든 종류의 안락사를 허용할 수는 없으며, 시술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용한계선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등장하였다. 즉 살인에 해당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에 해당하나 소극적 안락사는 허용해야 한다는 이들이 내세우는 안락사의 구분이다.적극적인 안락사를 거부하는 입장의 이론은 다음 세 가지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첫째, )작위와 부작위의 문제. 둘째, 의도한 것과 단순히 예견된 것의 차이. 셋째, 의무적 치료와 선택적 치료를 행하지 않는 것 등의 도덕적 대립과 차이가 그것이다.죽이는 행위(killing)와 죽게 내버려 두는 행위(letting die)사이에 분명한 윤리적 차이가 있고, 죽이는 행위가 죽게 내버려 두는 행위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과연 도덕적 차이가 있을까? 예를 들어 의료진이 급식 튜브를 제거함으로써 환자를 안락사 시키는 경우 여기에는 의심할 것 없이 적극적인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극적 안락사로 간주된다. 그러나 급식튜브를 그대로 놓아두되, 튜브를 통한 음식물 공급을 중지한다면 그것은 소극적 안락사로 간주된다. 이 경우, 적극적인 행위의 개입 없이 생명유지에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이 야기되었다.위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죽이는 행위와 죽게 내버려 두는 행위의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위와 같이 적어도 죽이는 행위가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와 도덕적으로 동등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의 죽이는 것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없다.
버드수정법(Byrd Amendment)미국 의회는 2000년 10월 세계 주요 교역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드수정법(Byrd Amendment)'을 가결하였다. 버드수정법은 덤핑 또는 보조금을 지급받은 제품의 수입으로 피해를 입은 자국 제조업체에게 반덤핑과 상계관세 수입을 배분하는 프로그램으로 실질적인 보조금 지급 규정이다. 이는 미국의 교역국들이 WTO에 제소할 정도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미 의회, 행정부 및 업계에서도 찬반양론이 분분했다.버드수정법의 입법 과정교역국의 덤핑과 보조금 지급으로 피해를 입은 미국 업체들에게 반덤핑 및 상계관세 수입을 배분한다는 개념은 오랫동안 미 의회 의원들, 특히 철강 주 출신 의원들의 구미를 당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법안이 지속적으로 의회에 상정되었지만 자유무역주의와 국제무역규범 준수를 지향하는 의원들 때문에 쉽게 입법화 되지 못했다. 더구나 공화 또는 민주당 행정부 역시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또는 지지의사를 표하지 않았다.그러던 중 2000년 10월 다수의 공화, 민주 상원 의원들이 상원 의장인 공화당의 로트 의원에게 반덤핑과 상계관세 보상 법안이 적어도 2000년 말까지는 입법화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들도 철강 수입이 급증하면서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 법안의 입법화 작업은 미 철강산업 보호주의자로 유명한 민주당 로버트 버드 의원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버드 의원은 상원 세출위원회가 농업세출법안 심의시 버드수정법안을 삽입하도록 하기 위해 세출위원회 의원들에게 동 법안이 농업계에게도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우며 설득해 나갔다. 동 법안은 공식적으로는 ‘외국의 지속적 덤핑 및 보조금 상계법(Continued Dumping and Subsidy Offset Act of 2000)’이라는 명칭으로 상원의 최종안에 포함되었으며 양원 조정위원회에서 최종 법안 확정을 위한 협상이 개시되었고 결국 하원의 표결에서 한 표 차이로 동 법안이 포함된 농업세출법안이 승인되었다. 아직 농업세출법안의 상하 양원 본회의 최종 상정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미 농업세출법안에 포함된 광범위한 프로그램 및 재원들이 양당 의원들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버드 의원은 성공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적용할 수 있는 동 법안을 의회에서 가결시킬 수 있었다. 한편 이 법안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철강 제조업체 및 철강 노동자들에게 큰 수혜를 줄 것으로 기대되면서 의회 철강연맹 소속 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결국 버드수정법안이 상하 양원 본회의에서 가결되자 공화당 지도층 의원들은 버드수정법을 배제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농업세출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이에 클린턴 대통령은 버드수정법안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결국 농업세출법안 입법에 서명했다.버드수정법 이후 교역국들의 입장미 교역국들은 버드수정법이 WTO 협정과 불합치 한다며 즉각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미 교역국들은 외국기업에 벌금을 부과한 뒤 이를 미국 내 경쟁기업에 기술개발비나 의료비, 연금 등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은 이중처벌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반덤핑제소의 남발을 유도할 우려가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철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WTO 회원국들의 버드수정법 철회 요청이 실패로 돌아가자 WTO 11개 회원국들은 WTO 분쟁해결기구에 버드수정법을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버드수정법 입법 후 2년이 경과한 즈음 WTO 분쟁해결 패널은 버드수정법에 의한 반덤핑과 상계관세 수입 배분이 WTO 협정에 위배되는 행위라며 미국에 철회를 권고하였고 미국은 WTO 패널의 결정에 항소했다. 그러나 WTO 항소기구는 2003년 1월 16일, 미국의 버드수정법 철회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버드수정법의 WTO 협정 불일치를 밝힌 패널 보고서를 재확인했다.미국과 버드수정법을 WTO에 제소한 국가들은 미국에게 2003년 12월 27일까지 패널의 결정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는 미국이 버드 수정법 철폐를 불이행함에 따라 대미 무역국들은 무역보복조치를 요청하였고 이를 승인했다. 결국 WTO 중재패널은 한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브라질, 칠레, 인도, 캐나다, 멕시코 등 8개국이 요구한 양허정치 조치를 허용한다고 판정했다. 한국 등 8개국은 WTO분쟁조정위원회의 추인이 이뤄지면 실제 조치를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날 발표된 WTO중재패널은 한국을 포함한 8개국에 매년 최근연도 피해액의 72%에 해당하는 보복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2002년 기준으로 EU와 일본의 피해액은 각각 3억3천만달러와 1억달러 정도다. 한국의 경우, 공식 집계가 나온 2002년의 피해액이 2천900만달러 정도였다고 한다.이 판정은 WT0 사상 최대 규모의 통상분쟁이 사실상 제소국 측의 승리로 일단락된 셈이다. 미국은 WTO로부터 버드 수정안이 WTO 협정에 위배되며 이를 철폐하라는 최종판정이 나왔음에도 시한을 지키지 않았으며 WTO측에 조치 발동을 저지하기 위해 중재절차를 요청하였다.버드수정법의 폐기2005년 12월 미국은 일본 유럽 한국 등으로부터 대표적인 불공정 무역법으로 비판받아온 '버드수정법'이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상원은 21일 회의를 열고 재정적자 감축계획의 일환으로 버드수정법을 폐기키로 의결했다. 다만 폐기 유효일은 오는 2007년 10월1일부터로 정했다. 이로써 지난 2000년 발표돼 경쟁국가들의 지탄을 받아온 버드수정법은 7년여 만에 사라지게 됐다.
후설은 인간성의 위기가 데카르트의 학문적 이념과 방법론에 있어 주객이 전도된 과학적-객관주의적 태도로부터 발생되었다고 본다. 그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하고도 근대 객관주의에로 태도 때문에 사유하는 자아의 정체를 선험적으로 해명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세계와 자아를 분리함으로써 세계구성의 주체인 자아의 선험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후설은 경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거부하고 현상 자체의 주관적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경험적으로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추정된 세계가 선험적 자아에 의해서 구성된 생활세계임을 주장한다. 그는 생활세계에 대한 객관적 태도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그 근원에로 환원함으로써 선험적 자아의 발견한다. 여기에 사용된 방법이 "선험 현상학적 방법", 즉 선험적 "판단중지와 환원"이다. 그는 선험적 판단중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생활세계에 대한 "지향적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사유하는 자아의 선험적 정체성을 밝혀내었다.객관적 기준으로써 자연적 현상을 기술하려는 자연과학에서 시작된 학문적 태도는 우선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자연만을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다음에는 세계와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세계를 객관화하고, 결국에는 인간마저 경험적 대상으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객관주의는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오랜 선입관에서 일어났다고 파악한 후설은 인간의 객체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 그러한 선입관의 해체를 수행한다. 이를 통해서 사태를 그 자체에서 성찰할 수 없게 만든 과학의 객관주의적 태도가 판단중지 되고, 객관적 태도에 의해서 왜곡되었던 생활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난다.현상학적 방법은 판단중지의 단계와 환원의 단계를 통해서 완수될 수 있다. 판단중지의 단계는 다시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우선 일차적으로 객관적 학문들의 관점으로써 사태를 고찰하는 태도와 객관적 학문 자체의 근원, 즉 주객 분리의 이원론적 태도를 중지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생활세계가 근원적 사태로서 우리 앞에 드러난다. 다음은 생활세계의 근원에로 환원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도 예비적인 단계와 본격적인 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먼저 생활세계에 대한 지향적 분석이 필요하다. 생활세계는 선험적 자아에 의해서 구성된 의미세계이고, 의미들의 통일성이 선험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우리 자신이 생활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 즉 경험적 자아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주어진 생활세계에 대한 지향적 분석을 통해서 의미연관의 구조가 먼저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의미세계를 구성하는, 즉 의미연관의 구조체계가 구성하는 선험적 자아에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후설은 데카르트적 방법적 회의를 현상학적 방법의 모범으로 파악한다. 그는 방법적 회의가 "주어진 모든 것"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순수한 사유 존재로서 자각하게 했지만, 그 때문에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에 따라서 그는 현상학적 방법은 자아에 근원적으로 주어진 의미현상에 대한 편견적 선입관을 배제하고, 생활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으로 주장한다. 철학사적 연구를 통해서 주지되어 있듯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수행과정에 부정한 것을 최종적 단계에서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객관적 기준이고, 이 객관적 기준에 대한 그의 해명이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후설은 주장했다. 그가 자신의 "선험성"이 근원이 되는 칸트의 선험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칸트는 물자체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결과 그는 선험적 주관성을 자각하고도 경험적 주관성의 실재성에 대비하여 이념으로 파악하게 된다.주관과 객관의 분리 방식이 해소될 때 경험의 근원적 출발점인 현상과 사태의 주관성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현상학적 방법은 의미경험의 주관성이 선험적 소박성에의해서 은폐되었던 보편적 주관성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 자아에 주어진 생활세계 이외에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 밝혀진 생활세계는 바로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자각한 사유하는 자아에 경험된 세계이다. 후설은 단지 생활세계를 신체적 감관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외부 물체적 세계로 간주하는 선험적 소박성을 벗겨내었던 것이다.데카르트가 보편적 정신, 즉 ‘신’과 ‘사유하는 자아’를 보편과 개별의 관계로 해명하고, 정신의 사유내용이 신에 근거함을 논증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데카르트의 ‘정신’을 신체 내적인 정신으로 해석하였던 근대 인식론적 철학의 노선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후설과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차이는 현상학적 방법이 ‘신 존재 증명’이란 형이상학적 요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형상학적 방법에 의해서 드러난 생활세계는 인간이 자기의 존재 의미를 근원적으로 규정한 의미체계이다. 이 규정된 체계는 달리 말하면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근대정신을 대변한다면, 후설의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자아"는 현대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유하는 자아"가 중세의 계급사회에 대해서 "자유로운 인간"을 표방하듯이, "선험적 자아"는 객관적 기준에 종속된 과학사회에 대해서 인간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자연산물이 객관적 기준으로써 재단될 수 있듯이 절대적 주체성도 과학적,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 비교 평가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과학적, 객관주의적 태도로써 파악된 객관적 인간성은 그 태도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과거의 인간성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인간성을 근거로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인간성을 규정하는 것은 주체적 절대성을 경험된 기준에 맞게 자의적으로 규격화하는 것으로써 파괴하는 행위이다. 과학적 객관주의가 신봉하는 기준은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관찰 주체에 의해서 가설된 준칙이다. 의사소통적 유용성을 위해서 약정된 자의적인 기준이 오히려 인간을 재단하는 기준으로서 절대화된 현실을 그 본래의 자리에로 되돌려놓은 철학적 성찰은 과학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며, 나아가서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경험으로 파악된 주관적 경험을 절대화하는 또 다른 병폐를 발생시키는 활동도 아니다. 철학적 성찰은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주관의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 절대성을 그 자체로부터 드러내는 반성이다.그렇다면 후설이 선험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 자각한 생활세계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경험세계에 대비해볼 수 있다. 만약 현상학적 반성의 결과로 드러난 생활 세계를 일상적인 경험세계와 구분하여 "현상학적 생활세계"로 명명한다면 후설이 세계를 세 종류의 세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상의 경험세계, 현상학적 생활세계 그리고 객관적 세계의 삼중적 상관관계가 후설이 해결해야 할 난제로 간주된다. 만일 세계가 세 종류의 세계로 분화된다면, 세 차원의 세계는 단선적인 연관 속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고 상호 얽혀 있는 연관 속에 마치 뒤엉킨 실타래처럼 연관성을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그는 세 차원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 즉 생활세계를 관찰하는 객관적 태도로, 일상의 소박성에서 확립되는 두 차원과 현상학적 태도로 직시하는 한 차원으로 구분한다. 전자의 두 차원은 선험적 소박성에 빠져있다. 일상의 자연적 태도나 학문의 객관적 태도는 선험적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소박한 태도일 뿐이다. 따라서 세 차원의 연관구조는 인간의 근원적 태도를 통해서 명료하게 해명될 수 있다. 연관구조는 수평적 순환적 관계가 아니라, 관점의 질적 전환에 의해서 해소되는 관계이다.자연적 태도에서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 자체, 즉 자연 자체는 원리적으로 경험될 수 없는 영역이고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부분적이고 주관적 경험표상으로 이루진 자연적-주관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자연적 세계의 진리성은 실재하는 자연 자체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사물과 그에 대한 경험의 일치 또는 대응가능성을 통해서 확증될 수 있다. 자연적 세계는 자연 자체의 부분적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구도 주관적 경험의 절대적 진리성을 논증할 수 없다. 일상의 자연적 태도에 확인되는 주관적 경험세계를 객관적 기준으로써 기술함으로써 객관적 세계가 형성된다. 이 세계는 세계 자체, 즉 객관적 세계 자체가 아니다. 객관적 세계 자체를 해명하는 것이 과학의 이념이고, 그러한 이념의 실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언제가 가능할 것으로 주장된다.객관적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일상의 주관적 경험세계를 이념화함으로써 형성되는 이차적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니라 항상 주관적 경험세계의 객관화를 통해서 구성된 공통의 세계이지만 또한 변형된 주관적 세계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객관적 세계 자체는 이념일 뿐, 자연적 세계가 그 원천에서 본다면 객관적 세계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객관적 세계는 일상의 생활세계를 전제로 하며, 일상적 생활세계 없이는 무의미한 환상이 된다. 하지만 일상의 생활세계는 자연적 세계를 토대로 형성된 이차적 세계이다. 우리는 자연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혼동함으로써 객관적 세계의 실재성을 주장하게 될 뿐이다.이제 남은 문제는 자연적 세계와 현상학적 생할세계의 관계이다. 자연적 세계가 객관적 세계의 토대가 된다면, 생활세계는 객관적 세계의 절대화하는 관점을 해체함으로써 조망되는 자연적 세계가 된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 세계의 토대로 전제되었던 자연적 세계 이외에 다른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 드러나는 생활세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생활세계는 자연적 세계에 대한 소박함을 일깨우는 개념이다. 자연적 태도는 자아를 세계의 내부적 존재자로 파악하고, 세계 구성의 주체를 경험하는 자아 이외의 것에서 찾기 때문에, 세계구성의 주체는 세계 속에 은폐된 주관성으로서 경험적 자아에 대해서 초월적 존재자가 된다.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 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의 논의는 여기서 시작한다. 선의지의 선함은 어떤 맥락이나 목적이나 욕구 등과의 관련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지 않는다. 즉 이런 의미에서 선의지는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하다. 그는 '선의지'라는 개념을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정의한다.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선하지 않으며 감정적 욕구나 경향성의 영향을 받는데,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선의지가 나타나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장애물이 없다면 인간의 선의지가 필연적으로 드러날 선한 행위들은 인간에게 의무로, 즉 이런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행해야만 하는 행위들로 나타난다. 인간이라는 조건하에서의 선의지는 의무에서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한 선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욕구를 훈련시켜 더 이상 극복할 장애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의지는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써 선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의지는 우리의 욕망과 본성적 경향성에 의해 퇴색되어 갈 수 있는 것으로 혼동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이처럼 선의지의 개념을 강조하는 이유는 공리주의 입장에서처럼 결과에 좋고 나쁨에 있어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칸트는 실천적 원칙에 따라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적 존재의 선험적 성격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감성적으로 선천적인 것은 인간을 감각에 제한된 자연존재로 만들지만 순수실천이성은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을 실천하는 창조적 인간으로 만든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이성이 이론적 인식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인식의 요소를 결여하지 않고 오히려 인식(도덕적 인식, 도덕적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칸트가 실천이성을 우위로 주장하는 것은 이론이성의 관심이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인간의 모든 관심은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즉 삶의 가치 서열에 있어서 실천적인 것이 앎의 행위보다 높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위의 측면에 있어서 이성이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적 존재만이 법칙의 개념에 따라서 행위하는 능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는 이점에서 법칙에 따라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의 법칙의 개념에 따라 행위 할 수 없는 자연의 사물과 이성적 존재를 대비 시켜 실천이성의 존재를 부각한다. 이성적 존재는 자율적 존재이며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자유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성적 존재는 도덕법칙의 명령이 자신의 욕망과 배치될지라도 도덕법칙의 보편성을 원한다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다.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자연적 욕망과 마찰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 실천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경험적 욕망에 따르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고 한다. 이러한 초월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따라서 실천이성은 경험적 욕망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보편적 원칙을 제공한다. 개별적 욕망을 보편적 원리에 종속시키는 실천이성이야말로 이론이성보다 우위를 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실천이성은 준칙을 법칙으로 이끌어간다.즉 준칙은 나의 실천이성, 즉 행위를 규정하는 이성의 소행이다. 그러나 모든 준칙이 다 도덕적 타당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타당한 준칙이 있고, 또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못한 준칙이 있다. 칸트에 의하면 명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언적인 명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언적 명법이다. 가언명법은 “만약 ~라면 어떤 행위를 하라”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명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언명법은 조건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마라"는 도덕적 명령이 "타인에게 신용을 얻으려면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자체를 위해 명령되는 것이지 어떤 보다 큰 (자기 이익적인)목적을 위해서 명령되는 것은 아니다. 정언명법인 도덕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며, 그 대가는 행복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성적 인간임을 확인해준다는 것뿐이다.칸트는 이러한 정언명법의 도덕법칙들은 무제약적 실천법칙들을 근거해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제약적 실천 법칙으로는 첫째로 "너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이다. 이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도덕법칙의 예외로 만드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이 정식은 무엇이 행위를 옳게 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행위가 그른가를 알아내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항상 동시에 인간성을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이다. 인격은 이성적 존재의 자기 목적성을 의미하며, 인간성은 이성적 의지를 가진 특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인데, 여기서의 목적은 의지의 자기 규정적 객관적 근거이며,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동등하게 타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는 인격이라는 자신의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가치로 인하여 단지 결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바로 "너의 준칙을 통하여 너 자신이 항상 보편적 목적의 왕국의 법칙을 세우는 구성원처럼 행위하라."이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정언 명법의 본질은 엄밀히 같은 논리를 담고 있다고 판단 가능하다. 목적 자체로서의 각 이성적 존재는 모든 법칙에 관해서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를 목적 자체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을 행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꾸로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을 목적 자체로 간주해야 가능하다. 목적왕국에 있어서 인간이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숭고함이 없지만 인간이 도덕법칙에 복종함과 동시에 도덕법칙의 입법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숭고성이 있으며 존엄의 가치가 있다. 이처럼 칸트의 윤리는 인격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격존중의 윤리이다. 이에 따른 정언명법의 도덕법칙들의 예로 “자살하지 마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자아개발에 힘써라.” 등을 제시한다.도덕법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선의지 이외에 자유의 개념이 필요하다. 초월적 이념으로서의 자유는 아직 있지 않은, 있어야할 것을 지향하는 의지, 곧 실천이성의 행위에서 이상을 제시한다. 이론이성은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현상계 내의 인간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현상계를 벗어나 인식대상을 구할 수 없다. 단지 순수이성의 인식대상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철저히 지배되지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연의 인과 법칙에 그대로 지배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법칙, 자연의 인과법칙과 자유법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성적 존재로서 현상계에 속하는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이성적 존재로서 물자체에 속하며, 따라서 스스로 도덕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적 의지 즉 자유의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은 그 원인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으므로 자발적이며 가장 근원적이다. 따라서 이성은 의지, 특히 순수의지이며 이것은 자기 원인에 의해 나타남으로 자유가 전제되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와 무제약적 실천법칙, 즉 도덕법칙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하고 있다." 즉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도덕법칙이 있어야 하고, 도덕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선 자유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자유는 확실히 도덕법칙의 존재근거요,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임을 지적하려 한다."라고 함으로써, 도덕법칙과 자유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설명하고 있고, 순환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칸트는 자유와 도덕법칙 간의 선후관계에 있어 도덕법칙이 자유보다 먼저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무조건적으로 실천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즉 그것은 자유에서인가, 실천법칙에서인가?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실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자유에서 출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유에 대한 최초의 개념은 소극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 즉 자유의 장반대인 기계적 자연만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에 경험으로 우리가 자유를 추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의 준칙을 생각해 내자마자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도덕법칙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성이 도덕법칙을 어떠한 감성적 제약에 의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아니 그러한 제약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규정근거라고 명시함으로써 도덕법칙에서 자유의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사실로서의 도덕법칙이 우리에게 주어지자마자 우리에겐 자유가 요청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