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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유랑예인집단
    1. 글을 시작하며...... 슬근슬근 툭 타놓으니 박 속에서 수백명 사당걸사(寺黨乞士)들이 뭉게뭉게 나오면서 작은 북을 두드리고 저희끼리 야단스레 놀아나며 소리를 하는데,"오동추야(梧桐秋夜) 달밝은 밤에 님생각이 새로워라. 님도 응당 나를 생각하리라. 나니나 산이로다."또 어떤 사당은 방아타령을 한다."천천히 걸어가서 박석재를 넘어가니 객사청청 유색신(客舍靑靑 柳色新)은 나귀 매던 버 들이요. 위성조우 읍경진(渭城朝雨 輕唇)은 나 마시던 청파(靑坡)로다. 광한루(廣寒樓)야 잘 있었더냐? 오작교야 무사하냐?"또 한놈이 달거리를 하는데,"정월이라 십오야에 망월(望月)하는 소년들아, 망월도 하려니와 부모봉양 늦어간다. 신체발부(身體髮膚) 사대절(四大折)을 부모님께 타고 나서, 호천망극(昊天罔極) 중한 은혜야 어이하야 다 갚으리? 이월이라 한식일(寒食日)에 천추절(千秋節)이 적막하니, 개자추(介子推)의 넋이로다. 원산에 봄이 드니 불탄 풀이 난다더니."어떤 사당(寺黨)은 노래하고, 어떤 사당은 단가(短歌)하고, 어떤 사당은 권주가(勸酒歌)하며, 갖가지로 뛰놀 적에 걸사(乞士)놈 거동이 가관이라. 누렁이에 패랭이를 눌러쓰고, 길짐은 벗어놓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사당을 어르더니 번개소고(小鼓)를 풍우같이 두드리며 판염불고 긴영산으로 흔들거리며 한바탕을 놀아나더니......) 장덕순 감수(1994). 『흥부전 외』(명문당), pp.65-66.위의 내용은 우리의 고전소설 『흥부전』의 일부이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난 박을 타고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놀부가 자신도 보물을 얻기 위해서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난 뒤 얻은 박씨를 심어 난 박을 타니 여러 사당걸사(寺黨乞士)가 나타나 놀부의 재산을 털어간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사당걸사(寺黨乞士)란 사람들이 흥미롭다. 뭐하는 사람들인데 난데없이 나타나 남의 집 마당에서 신나게 놀다 돈을 털어가나? 사실 사당이란 이름은 그리 낯선 이름은 아니다. 만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드물게 쓰이기도 하는 기록들일뿐 이들을 가지고 이 집단들의 기원이나 발전 역사 등을 더듬어 보기는 힘들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민중놀이집단이므로 기록을 남기는 권력층과 거리가 멀었으며 더군다나 이들 권력층은 이 집단들을 혹세무민하는 패속폐륜집단으로 보고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 집단이었기 때문에 농경 정착사회였던 고대사회에서 그 지위가 천민만도 못한 천대를 받았다는 것을 남아있는 몇몇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아있는 기록들도 그 내용에 있어 상당히 부실한 면이 없지 않으며 각 집단들에 대한 정확한 분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패거리들에 대한 정의나 분류는 그 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당시의 기록자에 의해 관찰된 바가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연구자들에 따라 그 정의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는 면이 있기도 하다. 이 점을 유념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그럼 이 유랑집단들이 각각 어떤 성격을 띈 어떤 집단들이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3. 대표적인 유랑집단들(1) 걸립패우선 걸립(乞粒)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걸립이란 어떤 집단에 특별히 경비를 쓸 일이 있을 때 풍물을 치고 집집마다 다니며 축원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을 일컫는 말로서 걸궁(乞窮) 또는 걸량(乞糧)이라고도 했으며, 이러한 무리들을 걸립패 또는 걸궁패라고 했다. 걸립이란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 12년 12월조에 직업적인 걸립패의 걸립을 '걸량'이라 하여 간단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걸립의 형태는 마을에서 농악대가 하는 것과 절에서 하는 것, 무당들이 하는 것 등이 있다. 이 중 절에서 하는 것과 무당들이 하는 것은 각각 절의 중들과 무당들이 마을을 돌며 행했던 것으로 걸립패가 연관되어 있던 걸립은 첫 번째의 마을에서 하는 걸립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서 하는 걸립은 주로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들은 사당이라 일컬어지는 여성들이 주 구성원으로 맨 위에는 모갑(某甲)이란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居士)란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춘다. 표면상으로 볼 때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조직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이었다. 사당들은 표면적으로는 노름꾼이나 하층계급 남자들의 주석에서 가무를 하여 흥을 돋구는 일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하였다. 이들은 거사들과 부분관계를 맺고 의복·화장품·기타 일체를 지급받는 대신 표객( 客:사당상대의 손님)에게 받는 화대는 거사의 차지가 되었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절을 집결지로 삼았는데 이로 미루어 절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불교도였던 그들이 조선 건국 후 억불정책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게다가 임진왜란 후 처지가 더욱 곤궁해지자 생활의 한 방편으로 윤락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나 의 "안성청룡으로 사당질 가세"라는 구절에서 그들과 불교와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3) 남사당패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사당패로서 조선 후기에 사당패에서부터 분리되어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분명한 놀이 전승을 남기지 않은 위의 패거리들과 달리 남사당놀이라는 그들의 놀이를 온전한 형태로 남겼기 때문에 현재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은 꼭두쇠라 불리는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음)등 여섯 놀이(예전에는 '소리판', '요술'등도 있었음)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없이 숙식과 다소의 노자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 그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이들은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조직을 이루고, 때로는 계간(鷄姦)도 팔며 정처과정을 거쳐 독립된 패거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들의 행했던 놀이를 간단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풍물(남사당의 풍물과 유사하나 특히 무동 등 곡예에 가까운 체기가 돋보임), 땅재주, 얼른(妖術), 줄다리기(남사당패나 사당패의 줄타기나 재담보다 곡예위주), 병신굿(부자와 머슴이 엮는 무언극으로서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면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병신이란 내용의 해학극), 솟대타기(높은 장대에 오늘날의 평행봉 넓이의 두 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 서기, 두 손 걷기, 한 손 걷기, 떡고물 묻히기 따위의 묘기를 함). 이상의 6가지 놀이가 솟대쟁이패의 놀이로서 경남 진양과 밀양을 중심으로 전승되다가 인멸되고 현재는 그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4. 남사당패에 대해여러 문헌들을 살펴볼 때 많은 유랑 집단들 중 그 규모나 또 놀이의 내용 면에서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가장 분명하게 전해지는 집단은 남사당패이다. 이들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우리 곁에 남아있던 유랑 집단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진 중매구와 걸립패와의 습합과정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 솟대쟁이패와의 교류도 갖으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이 남사당패는 그야말로 우리 유랑집단들의 종합 발전 선물세트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사당패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이와 섞이고 교류해온 다른 집단들의 모습도 같이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 이 남사당패의 구성과 규율, 그리고 그들의 놀이인 남사당놀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이들은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정점으로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의 4∼50명으로 한패를 이루었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중의에 의해서 선출되었는데 꼭두쇠가 노쇠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거나, 잘못이 있어 식구들의 신임을 잃게 되면 바뀔 수 있었다. 그 자격은 뜬쇠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추대를 받은 사람으로, 선출 방법은 협의를 통한 자가 항상 전체의 반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패거리사이에서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예쁜 삐리를 많이 확보해야 패거리의 인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남사당패의 규율은 명확히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패거리에서나 도망자에 관해서는 엄격했다. 그 외에 패거리내에서 서로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과 패거리 내의 이야기를 밖에 하지 말 것 등은 꼭 지켜야 하는 규율이었다. 규율을 어겼을 때의 처벌 방법은 대부분 볼기를 치는 것이었는데, 때로는 끼니를 굶기기도 했다.놀이를 벌이는데는 일정하게 정해진 보수가 없었고, 대개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논 후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얼마간의 노자가 수입의 전부였다. 이밖에도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허우채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작전(作錢)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사철 중 겨울은 남사당패에 있어 최악의 계절이었다. 이때는 대개 전국에 몇 군데 있었던 그들의 은거지, 경기도 진위, 충청도 당진, 회덕, 전라도 강진, 구례, 경상도 진양, 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 은율 등지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이동안 개인기가 없는 가열과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연희 대상 지역이 농어촌의 마을과, 성곽 밖의 서민층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 활동 시기는 모심는 계절부터 추수가 끝나는 늦은 가을까지를 전성기로 볼 수 있다. 농군들이 일하는 동안은 풍물을 놀다가 일이 끝나게 되면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풍물놀이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놀이를 솜방망이불이나 관솔불을 피워놓고 밤새워 같이 놀았다. 남사당패들은 주로 더울 때에는 북쪽, 추울 때는 남쪽, 팔도를 섭렵했으며 심지어는 만주 북간도에까지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남사당놀이가 지방성이나 행사성에 매임없이 범지역적 민중놀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유랑생활에서도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한겨울은 일년 중 가장 어려운 시기로서 이 동안은 한철에 모아 놓다.
    인문/어학| 2003.05.24| 9페이지| 1,000원| 조회(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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