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서 론△본 론1.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찰1)인간의 존엄을 어디로부터 오는가?2)철학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3)헌법적인 관점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2.생명복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전1)인간의 가치적 측면a)정체성의 혼란 유발b)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2)인간복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a)기존 사회의 틀 와해b)생태학적 위기 초래3)인간복제가 나아 갈 방향△결 론△참고문헌△서 론우리의 절대적 지표들은 우리를 이롭게 하는 문명의 발달이라는 가치관과 충돌을 겪게 된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만을 염두 한다면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은 문제되지 않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인간의 자아는 계속해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이것 또한 인간의 기본적 성향이기 때문에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줘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인간의 정체성이냐?’, ‘인류의 발전이냐?’라는 문제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 어느 한 쪽을 택하는 순간 다른 한 쪽은 포기되어진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의 팽팽한 긴장으로 볼 수 있다.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자율성을 지닌 도덕적 존재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그것이 지니는 도덕성에 대해 고찰 할 필요가 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이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에 대해 기술하고, 사회적 현상인 인간복제를 도덕적 기준으로 다루고자 한다.△본 론1.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찰1) 인간의 존엄을 어디로부터 오는가?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이 결합하여 사람이라는 하나의 유기체를 완성한다. ‘정신’이라는 것은 ‘이성’이라는 초현실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만들며 ‘육체’라는 것은 물질로 만들어진 세상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만든다. 주자는 이것을 이와 기로써 기술하였다. ‘이’는 만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로써 바뀌지 않는 것이고, ‘기’는 우리가 속해 있는 감각적인 세계에게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우리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아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회라는 것은 개인과 개인이 모여 이룬 집단인 만큼 서로 자기 자신의 중요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되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욕구’ 혹은 ‘욕망’이라는 것은 이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고 다른 무엇과는 구분되길 바라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남들의 그것보다 위에 있어야 비로 서 사람들은 안심을 하게 된다. 인간이 소유한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다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그것을 바탕을 서로의 욕구에 대한 이기심을 조절하는 장치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발함으로써 욕구충족에 만족하기보다는 욕구를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존엄'이라는 것은 ‘이성’을 통해 각 개인의 존재자체를 인정하며,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을 인정해주는 것을 뜻한다. 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면 ‘높고 엄숙함’, ‘높아서 범할 수 없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우리는 동물들에게 ‘존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반면 동물은 감성적 욕구에 의해 행동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동물보다 고등하며 우월한 존재로 표현되곤 한다.하지만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우월함을 증명해 보이고자 다른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기고 남용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자연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특권을 받았다. 따라서 신체적으로 다른 육식동물에 비해 약하지만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권을 문명의 이기로 발전시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상호공존하 칸트가 금지하고자 한 것은 결코 우리의 동료들을 우리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있어 목적인 동시에 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안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단지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 동시에 목적으로는 대하지 않는 경우를 칸트는 비판한 것이다.)인간존엄성은 일반적으로 어떤 업적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류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획득되는 것으로 인간이면 누구에게든 주어지는 개별적 존엄성을 의미한다.인간존엄성에 관한 논의에서 우선 문제시되는 것은, 인간존엄성이라는 개념이 헌법상의 공허한 형식상의 문구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그 개념에 역사 정치적 기능을 넘어서 특수하고 구체적인 다른 개념들로 충족될 수 있는 내용이 주어질 수 없는지의 여부이다.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언어와 문화에 의존하여 그 의미를 획득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엄성이라는 개념은 보편적 효력을 갖는다.)존엄성 개념은 흔히 사람을 도와서 어려운 처지에서 헤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의 행동요구로 이해 할 수 있다. 존엄성이라는 개념은 가능한 최대로 확장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을 시체나 인간의 배아에게까지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시체를 인간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많은 뇌사비판자들은 뇌사의 문제성은 뇌사자의 존엄서의 손상에 관한 것이라는 인상을 불어넣어 준다. 여기서 손상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기껏해야 아주 추상적인 의미의 존엄성일 뿐이다.생식의학의 문제성과 관련해 고찰해 볼 때, 인간존엄성 개념은 한정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인간존엄성이라는 규범은 독자적이 아니라 다양한 규범의 묶음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어쩌면 인간존엄성에 대한 논란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 할 수 있다.)3)헌법적인 관점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우리는 보통 헌법은 세계관에 있어서는 중립이나,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고 이야기 한다. 이렇게 헌법을 가치의 표현으로 볼 때,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그 최정점에 위치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과 없는 한계를 형성한다. 곧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국가에 의해서든, 다른 개인에 의해서든 또는 공동체에 의해서든 침해될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기본권제한의 한계가 되며, 더 나아가서는 헌법개정의 한계가 된다. 그러한 한에서 헌법의 최고 구성 원리 또는 헌법에 실정 화 된 근본규범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개인인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가생활의 질서를 형성할 것을 요청하며, 그와는 반대되는 모든 경향, 추세, 노력, 시도들을 저지하는 기속적 성격을 가진다.)2.생명복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전인간복제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로서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우선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러한 큰 발견이 이루어진 이상 인간 복제의 문제는 현실적으론 도덕적으로밖에 따져질 수 없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따지다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에 대해 벗어나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인간복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윤리관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복제에 대해 고찰해보고 발생할 문제점들에 대한 대비의 필요성을 알아보고자 한다.1)인간의 가치적 측면동물 복제의 경우도 성공률이 1~2%로 매우 낮으며 이 과정에서 유산이나 기형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산모나 아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복제는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인간의 가치를 생물학적 특질에 두고 보도록 만들어 인격체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상품화와 같은 생명 경시 풍조를 불러올 재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종교계에서는 특히 이에 대해 크게 반대하는 경향이 많다.a)정체성의 혼란 유발한 인격의 성품형성은 DNA의 생물학적 요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인 요인(교육과 문화, 사회 공동체, 인간관계, 시대와 공간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환경)에 겐도 박사는 자신의 죽은 아내 유이를 복제한 수 십명의 레이(Rei)를 만들어 시험관에서 사육하였다. 레이가 전투에서 사망하더라도 또 다른 복제 레이를 깨워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비록 개체로서 각각의 레이 자신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박사에게 레이는 언제까지라도 살아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 구성원들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인간의 존재가치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어느 정도로 성장한 인간으로부터 뒤늦게 복제된 클론(Clon)은, 앞선 쌍둥이가 살았던 삶에 의해 미래가 이미 설정된다고 믿는 섣부른 유전자 결정론자들에 의해 오용될 우려가 있다. 복제인간을 노예화하거나 세뇌를 통하여 범죄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처럼 비인간적으로 사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더 나아가 인간복제는 정부나 다른 집단에 의해 비도덕적으로 착취당할 수도 있다. 창조될 사람들을 고르고 통제하는 기준은 창조되는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과 그들을 창조하는데 드는 비용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번식과 양육도 결국엔 힘을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복지와 건강에 이용한다는 명분으로 전 국민이 DNA 등록을 강압적으로 실시한다. 범죄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활동이 감시당하고 신분노출이 두려워 개인은 극도로 위축되는 사회가 된다. 유전자 기능과 역할에 정통한 게놈연구진, 매수당한 다국적 제약업체가 독재자와 손잡고 마침내 우생학을 실시한다. 민족의 순수혈통을 복원하고 건강한 후세를 낳는다는 명분으로 `열등한 유전자`를 도태시킨다. 인간복제를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클론을 오직 타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착취하는 것이며, 클론이 완전한 도덕적 개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평등한 도덕적 가치와 존귀함을 무시하는 것이다.2)인간복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a)기존 사회의 틀 와해인간은 남녀 두 사람의 상호의존, 즉 인격적인 교제와 상호간의 책임과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의 수고가 가능한 상호의존관계를 기초로 하는 성교에 의하여 출산된다어렵다.
1.17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문제 제기 : ?4분 33초?는 예술 작품인가? 이게 곡인가? 케이지는 ?4분 33초?가 청중에게 연주 회장의 이런저런 소음들을‘듣는 경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으로 위의 의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달라지는가? 그리고 케이지 작품의 최근 콘서트에서 ?4분 33초?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몸이 아파 연주를 못하게 되었고, 당황한 무대 매니저가 고민 끝에 자신이 직접 그 작품을 연주했다고 치자. 이것도 케이지 작품의 연주가 되는가? 그것을 음악 연주라고 할 수 있을까?우리가 ?4분 33초?라는 이 작품이 예술 작품인지 아닌지 음악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아닐지를 논하기 이전에 존 케이지라는 음악가와 그의 기본적인 음악세계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존 케이지는 동양의 심신일원론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닮아 작곡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음악에 우연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유럽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에는 우연과 불확실성이라는 자연적 요소를 포함한 다원주의와 불협화음이 중심이며 이는 통일된 세계상의 결핍, 인간과 자연의 조화 상실, 인간의 내적 부조화를 증거 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전위음악, 행동음악의 표상인 동시에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이란 그릇에 닮긴 퍼포먼스이기도 한 것이다.?4분 33초?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작곡가나 연주자보다는 청중이 주체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 소리가 없더라도 그 동안에 들려오는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 기침 소리, 숨소리, 하품 소리 등은바로 청중들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 즉 연주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듣기 위한 공연이 아닌 청중들에 의해 창조되는 공연이므로 충분한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늘 접하는 것과 같은 피동적인 감상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예술의 창조와 재발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느끼게 되는 것과,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접하는 신선함은 분명 감성에 대한 색다른 자극임과 동시에 예술이라는 것의 범위를 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위적이고 행위적인 예술의 미묘한 매력이 아니겠는가.틀에 갇힌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자극과 감성을 부어 넣을 수 있어야 살아있는 예술이고,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의 범위와 영역은 계속 넓혀져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의 작품 ?4분 33초?는 몹시 경이로운 예술 작품으로서 대우받아 마땅하며, 이를 이해하고 하지 않고는 그야말로 각 개개인 감상자의 자유이다. 예술에 있어서 창조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의 의도가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구속은 없으며 그런 자유로움으로 인해 예술이 예술다울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4분 33초?에 닮긴 존 케이지의 의도는 분명 잘 전달되었다고 본다. 청중들 중에는 그 소음들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흔한 소리이며, 굳이 시간을 할애하여 공연장까지 가서 들을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르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또 다른 답에 다다를 수 있다. 아무도 그러한 ‘듣는 경험’이 공연장에서 행해지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존 케이지는 그런 소음조차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공연장은 그것을 알리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며, ‘공연장에서는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술인지 아닌지, 음악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이것은 비단 존 케이지의 작품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은 아니다. 이것은 일부 미술 작품이나 조각 작품, 또는 시, 소설 등과 같은 문학 작품, 내지는 무용이나 춤 같은 예술 활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예를 들자면,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는 이유로 백지 위에 점 하나만 찍어 놓은 것을 작품이라고 부르며 시가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대개 그런 작품들의 제목은 ?무제?인 경우가 많다 - 여기서 몇몇 일반인들은 그림도 성의 없는데 제목조차 성의 없다고 비꼬기도 한다.)일반인들에게 그 그림은 결코 특별하지도 않으며, 대단한 노력이 들어가거나 엄청난 사상과 세계가 담겨 있지도 않은 것 같다. 또한 누구라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그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을 껄끄러워 할 것이다. 도저히 알아보기 어려워서 화가가 이것을 멀쩡한 정신으로 그렸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추상화나 초현실주의적 그림들은 또 어떠한가. 그런 작품들은 주로 일부 애호가들에 의해서만 인정받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처음 본 문제가 제기 된 ?예술이 궁금하다?에 실린 다른 문제 중에서 이와 같은 시선을 보이는 문제들도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1.1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와 아이스박스’, ‘1.7 뒤샹의 ’, ‘1.18 움직임이 없는 춤의 경우’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함께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보통 사람들은 예술가라는 신분을 지닌 사람이 창조한 것이기에 그것을 예술이라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의 각도를 달리하고 예술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시선을 넓힌다면 그러한 난해하고 별난 예술 작품들도 누구나 음미할 수 있는 ‘보통’의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 될 수 있다.그렇다면 왜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예술 작품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까? 어째서 이것을 예술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논란 속에 빠져야 하는 것인가?그것은 의외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술 작품이 아름답고 특별하고 멋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괴하고 낯설고 유별난 것은 ‘아름답다’라고 여겨지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해놓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과 ‘미(美)’에 대한 평범한 본능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과 낯설음을 유발하고 이것은 곧 감상의 시야를 좁히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두기에 못마땅하다고 여겨지면 이것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보다는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기 때문에 논란은 더욱 커진다.존 케이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이러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처음 ?4분 33초?라는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이러한 반응들을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는 음악이 무조건적으로 ‘아름답다’든지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그보다는 ‘진실’해야 하기 때문에 추(醜)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음악’과 ‘음악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한 태도가 변해서 예전의 가치관과 음악관과는 비교할 수 없고 또 그 잣대로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생각해 보건데 ‘진실성’을 추구하다보면 추함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생긴다는 것 자체도 고정관념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름다움’과 ‘추함’모두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과 견해이며, 이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전부 똑같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언제든지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존 케이지 자신은 이미 이러한 관념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며 고정관념을 벗어나 자유롭고 실험적인 새로운 음악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므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만의 예술관에 묶인 채 다른 쪽으로는 시야를 돌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기 위한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여기서 제기되었던 또 다른 문제 -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원래 연주하기로 한 피아니스트가 아닌 무대감독이 공연하여도 과연 이것이 존 케이지의 작품을 공연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이것을 두고 음악 공연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존 케이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의 음악에서 음의 기교나 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감성, 음악적 능력 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연주자는 그의 음악을 표현하는 사람을 의미하므로 그의 의도만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한다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무대감독이든 조명감독이든 그의 곡을 이해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을 공연한 것이 된다. 사실상 ?4분 33초?나 그의 또 다른 작품인 ?Imaginary Landscape No.4?와 같은 작품들은 음악가가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곧 공연자가 될 수 있고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경험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그저 바라만 보고 듣기만 하는 것에 싫증이 나는 사람들에겐 더 없이 즐거운 예술 세계로의 입문이 아니겠는가.
그의 심판은 조국을 위한 것인가1.시작하는 글암울했던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우리의 민족적 기운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도록 힘을 불어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을 남겼던, 그리고 조국을 대신하여 이토를 심판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도마 안중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 그리고 ‘동양평화’라는 거대한 목적을 가지고 이국으로 건거나 무장 독립투쟁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을 대신하여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심판하였다. 우리는 당연시 도마 안중근의 업적과 희생을 높이 평가해 오고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각도에서 도마 안중근을 바라보고자 한다. 과연 그가 할 일은 그 당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만 미쳤을까?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불어닥친 부적정인 영향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2.안중근 그는 누구인가?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의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에 대패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3.이토 히로부미는 누구인가?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이등박문)… 그는 안중근의 심판을 받은 조선의 원수였다. 일본지폐 ‘천엔’의 주인공이기한 그가 일본에서 얼마나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젊어서 테러조직에 가담해 영국공사관을 습격 방화하고 심지어 노선이 다른 학자의 아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은 서구문명의 충격 앞에서 진로모색에 한창이었다. 기득권 유지세력이 있는가 하면 근대화 혁명을 모의하는 세력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곳곳에서 일종의 학파들이 형성돼 미래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문하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장차 혁명동지들을 대거 만났다. 짧지만 영국유학도 갈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때 그는 공신(功臣)이 됐다. 그 후 그의 신분적 한계는 더 이상 그의 출세가도를 가로막지 못했다. 구미 여러 나라를 돌며 근대국가의 기초를 공부했고 돌아와서 ‘일본국’의 설계자로 떠오른다.그는 나라의 방향을 기획했고, 그 같은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헌법설계를 위해 그는 유럽의 석학들을 두루 만나고 배웠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프랑스와 독일 헌법을 바탕으로 일본 헌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44세 때 그는 백작(伯爵)의 작위를 받았다. 45세 때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이어 50세 때는 초대 귀족원의장에 오른다. 근대일본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패권주의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서 대한제국도 희생된다. 1905년 65세 때 한국을 방문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통감에 오른다. 조선 식민화의 선봉이었다. 이 같은 공이 인정돼 67세 때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1909년 6월14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그의 일본법정에서의 최후진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 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한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한국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한국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생략~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5.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우리에게 돌아오는 부정적인 영향들1)개 괄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합병당할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적인 합병이 늦춰진 이유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대한매일신보 등에 을사보호조약이 무효라는 기사를 낸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는 을사의병들이 일어나 활약한다. 각 지역별로 일어난 의병들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1905~1908), 이준열 의사의 헤이그특사 사건이 터지게 된다. 고종의 밀명으로 이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펼쳐지는 국제 회의에 일본 몰래 참여해 일본의 침략을속화 되었다. 또한, 조선에 대한 불신으로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기반으로 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하게 되는데 일조하였다.2)식민지 무단통치의 강화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후 1910년 5월 일본의 육군대신 테라우찌가 3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테라우찌는 일본헌병을 증원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고 민족지를 폐간시켜 국권을 탈취할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매국내각의 총리 이완용과 함께 소위 한일병탄 조약을 만들어 일본헌병의 경계망 속에 내각의 의결을 거치게 하고, 이완용과 데라우찌가 이를 조인하여 1910년 8월 29일에 발표하였다. 소위 한일병탄은 고종과 모든 국민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다. 일제의 치밀한 합방계획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강요된 병합과 아울러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식민지 최고 통치기구로 삼는 한편 조선사회를 급속히 식민지적 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의 한국지배 방식은 무단통치로써 헌병경찰과 군대를 그 물리적 기반으로 하였다. 의병전쟁과 같은 한국인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식민지로 만든 결과 일제는 헌병과 경찰의 이원적 체제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헌병사령관과 각 헌병대장이 정무총장과 각도의 경무부장을 겸임하도록 하여 헌병이 경찰을 일원적으로 지휘 감독하도록 만들었다. 헌병경찰은 치안유지가 본래의 임무이나 의병의 토벌, 민족지도자의 색출과 검거, 첩보 수집 등은 물론 범죄측결처분권, 민사쟁송조정권 등의 권한도 지녔고, 일본어의 보급, 농사개량, 징세, 산림, 위생 감독 등의 행정 업무에도 광범위하게 관여하였고 지방에서는 민중의 생살여탈권까지 행사하는 등 공포적인 무단통치 조직을 구축하였다.일제는 조선에 근대 문물제도를 수립한다는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보안법 ? 신문지법? 출판법을 등을 강화 반포하여, 언을 꾀하였다. 이를 위하여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일본어 ? 일본역사 ? 일본지리 과목과 초보적인 실업교육이 강조되었다. 나아가서 1918년 〈 서당규칙 〉을 제정 ? 반포하고 서당의 개설은 도지사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사용 교과서조차 총독부에서 편찬한 것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민족 교육기관인 서당교육은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1908년 2 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1919년에는 740개로 급격히 줄었다.또한 일제는 민족문화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다. 일제의 민족문화유산의 파괴는 고분의 발굴과 파괴, 고도서의 분서(焚書) 등으로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파괴는 의병의 철저한 소탕과 계몽운동가의 대량검거 등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05인 사건이다.6. 안중근은 테러범, 하지만 구분되어야 한다(911테러비교)1)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안중근은 세계의 시선을 주목시켰으며 민족의 에너지를 이끌어 내는데 커다란 이바지 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는 독립투쟁가였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테러리스트’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는 마지막 일본법정에서 조선 독립전쟁의 의병 중장자격으로 이토를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격으로 이토를 죽였다면 그것은 엄연히‘테러’와 구분된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일본이나 국제적인 입장에서 놓고 보면 ‘테러’가 되어버린다.우리는 ‘테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테러리즘이란 주권국가 혹은 특정 단체가 정치, 사회, 종교, 민족주의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의 사용 혹은 협박으로 광범위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특정 개인, 단체, 공동체 사회, 그리고 정부의 인식변화와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는 상징적, 심리적 폭력행위의 총칭이다.오늘날 다음 네 가지 요건을 갖춘 폭력행위를 ‘테러’로 간주한다.1. 미리 계획된 고의적인 폭력행위2. 정치적 동기에서 유발된 폭력행위3.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다.
4.27 포르노그래피의 덕목* 문제 제기 : 허구성이 강한 문학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독자로 하여금 그 허구의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점이며, 이것이 TV나 영화와 크게 다른 부분이라는 주장에 대해 고려해 보자.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부사항들을 메우게 만들고,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제시된 재료를 자유로이 활용토록 만들며, 이는 단순히 거기에 빠져드는 것과는 다르다고 흔히 얘기된다. 만약 사실이 그러하다면, 포르노 문학은 특별히 환영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또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추상화하고, 얼굴은 드러내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둠으로써 포르노 문학가는 세부 사항들은 독자로 하여금 개인적인 경험에 입각하여 채우도록 만든다. 그럼으로써 모든 문학이 갖는 목적의 하나, 즉 독자를 동업자로 만든다는 목적을 달성시키고 있다는 고어 비달의 주장은 정당한가? 포르노그래피는 미적인 근거에 의해 환영받아야 하는가?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포르노그래피란 무엇인지, 어떤 점에서 일반적인 것과 구별해 낼 수 있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한 ‘ 포르노그래피‘ 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는 작품들에게 항상 던져지는 질문 - ’이것은 예술인가 외설인가‘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근거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포르노의 의미는 국어사전에서는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나 내용을 노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성욕을 자극하는 소설·영화·사진·그림 따위를 총칭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porne와 graphos에서 파생되고, 를 의미한다. porne는 , 특히 오직 최하층의 매춘부를 의미한다. 그들 여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매음굴의 매춘부였다. porne는(문자 그대로) 가장 싸고, 가장 고려되지 못하고, 노예를 포함하여 여자 중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들 여자는 완전히 명백한 성적인 노예였다. graphos는 를 의미한다.라는 말은 , , , , 혹은 이외의 완곡 표현을 의미않는다.전통적 호색문학(好色文學)에 대하여 근·현대적 또는 서양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고대 그리스에서 문인·화가들에게 사랑받던 학문·예술에 뛰어난 고급 창부들을 대상으로 묘사된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포르노그래피의 기원이 된다.포르노그래피는 그 정의에 대해 시대나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포르노의 정의는 '성행위나 성기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글이나 그림, 영상물의 총칭'으로 내려진다. 우리나라에서 의미하는 포르노는 보통 `야한 영화', `야한 테이프', `빨간 딱지가 붙은 제목 없는 비디오'로 불려진다. `포르노'라는 것이 처음 한국에 유입될 때 "비디오영화"라는 매체형식을 띠고 들어왔기 때문에 `포르노'는 거의 영화매체와 동일하게 인식된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포르노가 일반적으로 비디오매체로 한정하여 이해되고 있다. 포르노는 또한 몸과 성에 대한 표현의 노골성과 결부되고 있다. 포르노의 시각성은 섹스나 성기, 여성과 남성의 몸 등을 직접적이면서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덜 노골적인 에로물은 대다수의 연구와 논의에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로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포르노와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그렇다면 일반 문학과 달리 포르노그래피라고 규정짓게 되는 기준에는 무엇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① 어느 정도 상세하고 노골적인 묘사를 하는가?② 관련 문서의 구성에 있어 음란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인가?③ 묘사 방법에 있어서 비유적, 상징적인가 혹은 즉물적, 직접적인가?④ 관련 묘사 부분이 중추적인 부분을 차지하는가?위의 기준에 적합한 문서 및 간행물을 주로 음란 문서로 취급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되는 ‘음란성’이라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짚어본다면, 우선 음란성이란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하게 하여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고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고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개념이다. 음란성의 판단 대상은 문제되는 문서, 도화, 물건, 행위의 전체여야 한다. 즉, 일정 부분에는 음란한 표현이 있도 전체를 고찰할 때 음란하다고 볼 수 없으면 음란의 딱지가 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음란성은 평균적 성인의 도덕적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즉, 도덕적으로 너무 자유분방한 자라든가 너무 도덕적인 자의 입장에서 판단될 것이 아니라 일반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되는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음란성 여부는 시대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고 아울러 당해 대상이 어떤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가에 따라서도 달리 판단될 수 있다.이제 우리가 포르노그래피가 문학적 측면에서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하나의 예술적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고 미적인 근거를 두어 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먼저 이러한 종류의 문학들의 고질적인 문제, 즉 모호한 경계선 상 위에서 늘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게 되는 ‘예술인가 외설인가’의 문제가 왜 빠지지 않고 불거질 수밖에 없을까.학문이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것임에 반하여 예술은 구체적이고 직관적이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미는 절대정신의 직관적인 표현이며 따라서 아름다운 대상, 즉 뛰어난 예술작품에는 절대자가 자기 현시되어 있다. 학문적 인식은 원래 일반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개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예술은 개성이 그 본질적 요소를 이룸으로써 극히 개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표현을 실행한 것이 뛰어난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술가는 자연스럽게 개성적인 예술의 창작을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것은 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꺼려하고 금기시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란의 생기는 것이다. 이는 대중의 관조 활동에 있어서 그 이해가 심적 정화작용이라는 궁극적 목표까지 미치지 못하고 단순한 성적 쾌감에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특히 성에 대해 민감하며 자칫하면 왜곡된 성의식이 자리 잡을 수청소년들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성적 판단보다는 자극적인 이미지만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청소년들에게 이것은 악(惡)의적 감성의 무차별 폭격이 되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모든 예술작품의 감상은 필연적으로 극 감상자의 마음에 어떤 깊은 감동 또는 충족감을 준다. 그것은 다른 일상적인 열광이나 도취, 이를테면 노름이나 연애 따위와 같이 현실적인 관심과 결부되어 이것이 충족되기 위한 쾌감이 아니라 단지 작품형상을 통하여 현실적으로는 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적 이념과의 융합의 정취이고, 그 때문에 '무관심의 만족'이라고 불린다. 그 심리적 과정은 또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몰입의 감동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감동하는 자아의 내면을 가지는데, 이 점에서 인간의 일종의 자기발견 또는 자아와의 교통으로서의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의식은 그 외견상의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현상, 시간적 공간적 사건의 통일인데, 이점에서 보면 모든 개개인의 의식 활동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이다. 작가는 이미 암묵 속에서 감상자를 예상하고 감상자의 향수도 또한 '추창작' 이라고 말하듯이, 작품을 통한 작가의 미적 체험의 확인, 그 미적 이념과의 '공감'이 예술인 것이다. 예술의 기능을 사회성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하겠지만, 작가의 고유한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강하게 작품에 반영되고, 감상자가 그에 동화되는 일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예술에 의한 인간의 '사회발견' 또는 사회와의 교통의 기능을 말해준다. 그리고 작가의 창작체험, 감상자의 향수체험의 핵심을 이루는 깊은 감동은 일상적 현실에서 인습이나 타성으로 인해 우리들의 눈이 보지 못하는 인생과 세계의 존재의 진실에 덮인 생명의 고양감 바로 그것이다. 예술은 인간, 사회, 자연, 세계의 여러 현상에서 모든 부수적, 비본질적인 것을 잘라 버리고 그 존재의 본질, 삶의 순수한 진실을 빛나게 한다. 이것이, 예술이 진리 파악의 통로라든가 실존개시의 작용을 가진다고 말하는 까닭이고, 그 기능재발견'또는 진리와의 교통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예술이 인간에게 행하는 심리적, 사회적, 존재적 기능이며 이것이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는 기준점을 제시 해 준다.그렇다면 예술인지 외설인지 아직까지 거친 논란 속에 휩싸여 있는 대표적인 포르노 문학으로 불리는 헨리 밀러의 을 한 예로 들어서 문제 해결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이 소설은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떠나서 ‘소설이냐 아니냐’라는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던 작품으로 놀랍도록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성 묘사 때문에 영미권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오랫동안 판매금지를 면치 못했다. 이 처음으로 독자에게 안겨주는 것은 아마도 일종의 불가해하고 혼란스러우며 파악하기 어려운 총체라는 인상일 것이다. 여기서는 일상적인 현실의 묘사가 갑자기 꿈이나 환상으로 전환되고, 성교의 서술이 대뜸 철학적인 명상으로 비약한다. 또한 격정과 침잠, 절망과 평화, 감상과 냉혹, 감성과 지성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이것이 소설인가, 하고 말한 비평가가 있지만, 확실히 이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자서전인지, 판타지 이야기인지 약간 분간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현실의 체험이 중요시되고 있고, 아주 소설적인 서술이 나오는가 하면, 작가 자신의 생경한 감상이나 사상이 거리낌 없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미는 식이며, 문학의 장르에 관한 고전적 약속 같은 것이 실로 무관심하게 깨뜨려지고 있다. 헨리 밀러에게 있어 글을 쓰는 일은 자기의 근원적인 욕구로부터 나온 행위이기에, 창작행위는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기존의 형식 내지는 관습의 타파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형식을 타파하는 일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형식이 된 것이다. 그는 사회와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했고 그것을 성 묘사의 대담성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헨리 밀러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며,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때문이 아닐까 .
성매매여성의 인권현실과 해결방안△서 론1.문제제기2.접근방식△본 론1.개념-성매매란 무엇인가?-2.성매매의 현 실태1)성매매의 유형과 현황2)성매매의 발생요인3)성매매와 성매매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4)본질적인 성매매의 문제점5)성매매여성들의 열악한 인권 현황※성매매여성의 열악한 인권 사례6)성매매여성이 성매매 업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7)성매매에 대한 국가정책△결 론1.기존의 성에 대한 의식 변화2.현실을 고려한 제도적인 지원(외국사례 검토)3.맺음말△부 록 (설문조사)△서 론1.문제제기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간의 성 행위를 분석해보면 물리 법칙이나 심리법칙에 이끌리는 기계적 현상이 많이 중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성을 단순히 자신의 욕구 충족이나 고통 해소의 도구로 전락시킴으로써 성을 상품화하고 인간을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러한 금전을 매개로 한 성매매는 당사들 사이의 인격적 교류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권태로움을 벗어나고자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변태적인 행위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즉, 인권유린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여성의 존엄성을 상실시키게 된다. 또한, 성매매 남성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병폐를 초래한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 정보화 물결과 함께 발달된 인터넷의 문명은 이러한 성의 상품화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이는 분명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인권보호, 남녀평등, 사회질서와는 다소 거리가 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여성과 관련된 정책은 물론 성매매로 인해 야기되는 전반적인 사회문제를 되짚어 보고, 성의 본연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2.접근방식성매매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 중에서 특히, 사회적 약자라고 판단될 수 있는 성매매 여성의 인권을 되짚어 본다. 일단, 성매매에 대한 현 실태가 어떠한지 알아본 후 , 그것과 관은 대도시 지역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미성년자나 가출청소년들이 주로 성매매 공급의 대상이 된다. 보도방을 통한 성매매는 필요에 따라 매춘여성을 일시 충당하고자 하는 업주, 업주의 직접적 억압이나 매상에 대한 부담을 받지 않고 언제나 탈 성매매가 가능하며 성매매여성이라는 스스로의 죄의식을 갖지 않다는 점에서 유인되는 성매매여성, 단속에 걸릴 확률도 적고 적은 투자비용으로 중간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보도방 업주의 이익이 맞물려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도방을 통한 성매매가 장기화되면 여성들이 전통적 형태의 성매매로 유입될 가능성이 많다.또한 호스트들 역시 매춘 여성 못지않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호스트”는 자신의 성을 불특정 다수 여자들에게 팔겠다는 남자들이다. 이들은 금품과 함께 쾌락을 대가로 요구한다. 성적 표현이 좀 더 자유로운 서구에서 여성의 성 매수 는 훨씬 공개적이다. 우리나라 역시 최근 들어 호스트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사이버 성매매는 통신을 통해 성을 팔거나 사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함과 아울러 사이버 공간 밖에서 실제적인 성매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이버 성매매는 통신이나 인터넷에 성매매를 알선하는 사이트를 개설하거나 혹은 개인 간에 매춘의 의사를 담은 메시지를 띄워 성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특히 최근 들어 화상채팅이 가능해짐에 따라 사이버 성매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사이버 성매매가 가져온 결과 중 대표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 원조교재 즉 청소년 성매매이다. 원조교제의 사전적 의미는 “Lollita Syndrome”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가지는 현상으로 `롤리타'는 본래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제목으로, 12살 소녀 롤리타와 중년남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롤리타 신드롬은 뚜렷한 세기말 현상 중 하나로, 일본의 어린 여학생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대가로 중년남성과 사귄다는 `원조(援助)교제'도 일종의 롤다수의 남성들이 성매매는 사랑이 없는 관계이며 단지 스트레스나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 사업상의 접대를 위한 것이니 만큼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 성매매의 일차적인 책임을 성을 구매한 남성 자신보다는 부모나 교사, 업주, 중간착취자, 성매매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는 비공식적 인간관계에서조차 늘 서열을 의식해야 하는 위계적 권위주의문화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남성들에게 성이 권력을 실현하는 회로이자 좌절이나 억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출구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다수의 남성들이 싫든 좋든 많은 남성 직장인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곁들인 (또는 원한다면 성적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는) 술자리를 직장생활의 자연스런 일부로 인식하고 있고, 이러한 술자리문화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끈끈한 인간관계는 주로 ‘술과 여자’를 매개로 형성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5)본질적인 성매매의 문제점성매매는 자본과 물건으로 취급되는 신체가 직접적으로 교환되고, 일정 시간 동안 한 인간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인 사용권이 매매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는 양립 불가능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흔히 성매매는 성적 쾌락과 화폐가 교환되는 행위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성을 구매한 남성은 성적 쾌락만을 위해 여성을 사지 않는다. 성매매남성은 성매매를 통해 여성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강간신화를 기반으로 한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 속에서 남성들은 성적 쾌락뿐만 아니라 지배욕과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성매매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성매매는 화대의 지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성매매남성과 성매매여성은 지배와 종속의 위계화 된 권력 관계에 놓이게 된다. 성매매남성은 여성의 선택에서부터 체위, 콘돔사용의 여부 등 매매춘 행위 전반에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성매매여성은 성행위의 조건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따라서 성매매는 인간이 자본을 매개 오히려 남자경찰들의 모욕과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⑥ 사회적 낙인 : 성매매여성들은 공공의 성적 대상으로 낙인찍히는데,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오직 성적 대상으로, 그것도 공공의 성적 대상으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매매여성에 대한 잦은 희롱과 강간, 살인과 폭력, 매매가 발생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또한 성매매여성들은 ‘정상적인 결혼’ 혹은 ‘결혼생활’로부터 배제되어야 마땅한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성매매여성의 대부분이 탈 성매매를 원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성매매여성으로 하여금 내적?외적으로 성매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억압의 조건이 된다. 한편으로 이러한 조건은 성매매여성들로 하여금 남성과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도록 만듦으로써 성 산업에 가담하고 있는 남성과의 불안정한 동거와 별거가 반복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들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탈 성매매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과거 자신의 전력이 탄로날까 두려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며 이는 ‘정상적인 결혼 생할’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성매매여성의 열악한 인권 사례ㆍ성산업에 유입된 여성들을 옭아매는 선불금자료집에 따르면 많은 경우 성매매 피해여성들은 어려운 가정형편이나 빚을 갚기 위해, 혹은 잘못된 보증으로 인한 빚 독촉 때문에 성매매 산업에 유입된다. 그러나 성매매 산업현장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 성매매 산업의 거대한 조직력과 폭력성, 자본력 때문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선불금 이다. 선불금은 성매매에 투입된 여성에게 최초로 지급되는 준비금이란 명목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여성들이 갚을 수 있는 돈이라기보다 그 여성들을 옭아매는 덫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여성들은 지각비 1시간당 만원, 결근비 20만원, 성구매자의 요구를 들어헛돼서는 안됩니다"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분향소를 찾은 한 유족은 "숨진 12명을 이 방에 죽 늘어나 봐. 가득차고도 남지. 이게 보통 일이야"라며 단순 화재사고로 묻혀지는 현실을 개탄했다.지난 29일 전북 군산시 개복동 윤락가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당시 정부 개각 등 일련의 정치적 행사와 국내외의 다른 굵직한 사건에 밀려 지금까지도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윤락가의 지도, 점검 등 관리와 감독업무를 맡고 있는 군산시와 경찰, 소방서는 지난 99년 5명이 숨진 대명동 참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관행을 되풀이하다 똑같은 화재사고가 재발하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데 급급한 행태다.그러나 이 사건은 유족들에게 몇푼의 보상비를 던져주는 식으로 마무리돼서는 안 된다. 이번 화재 참사는 전국 곳곳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수백, 수천개의 윤락업소에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윤락여성들에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닥칠 수 있는 재앙이다. 몇 년전 `신창원'이라는 탈옥수 1명을 잡기 위해 경찰청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연인원 수 십만명을 동원, 막대한 경비를 쏟아 부었던데 반해 15명의 사상자를 낸 이번 사건은 겨우 해당지역 경찰서 수사본부만으로 감당하고 있다.정부도 국가 대사에 바쁜 장관들을 현장으로 보내 유가족을 어루만지는 `사후약방문'으로 끝내지 말고 이 기회에 전국에 산재한 윤락가를 일제히 재정비하는 과감하고 혁신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윤락녀이고 가족들도 이를 부끄럽게 여겨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못한다 해서 덮어둘 일이 아니다. 가난하고 무지한 탓에 꽃다운 나이에도 사회적인 멸시와 포주의 횡포에 시달리며 살다가 죽어서도 천대받는 이 불쌍한 여인들의 억울한 눈물을 나라와 국민이 나서 닦아줘야 하지 않겠는가.---------------------------------------------------------------------------------7)성매매여성이 성매매 업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