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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가부키
    가부키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연극.에도시대[江戶時代] 서민의 예능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약 4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부키라는 말은 원래 가부쿠[傾く:放縱하다, 바람나다, 好色하다 등의 뜻]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이다. 근세 초기 고료에[御靈會]라는 종교행사와 함께 후류오도리[風流踊]라고 부르는 예능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라는 여자가 교토[京都]에서 가무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이 ‘여자 가부키’는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나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는 1629년 풍기상의 이유를 들어 여자의 출연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동(美童)·미남자 등이 주로 춤과 곡예 등을 보이는 가부키가 등장하였다.그러나 이들도 남색(男色)을 파는 일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52년 미동의 출연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에도에 있던 극단들은 바쿠후[幕府] 당국에 진정을 계속하여 결국 미동의 상징인 앞머리를 자르고, 가무(歌舞)는 하지 않고 연극만 하는 조건으로 다시 허가를 받았다.이렇게 하여 본격적인 대사(臺詞)와 함께 여장(女裝)한 남자가 깊이있는 연극을 보여주게 되었고, 가부키는 여러 형태로 변모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노[能]·교겐[狂言]이 600년 전 완성된 일본 귀족과 무사계급의 예능이었다면, 가부키는 대중 속에서 대중의 지지 아래 뿌리를 내린 대중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자(배우)는 대중들의 절대적 인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 직업은 세전(世傳) 또는 가전(家傳)으로 이어지는 권위있는 직업이 되었다.가부키의 유래{1598년 8월, 일본의 제1대 통치자인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었다. 히데요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즐겼으며, 키타노다이오차카이(北野大茶?), 다이고(醍?)의 꽃구경 등 공연을 즐겼다. 다음해 히데요시의 신령을 모시는 도요쿠니다이묘우진(豊?大明神)이 완성되었다. 이 신사의 건립에는 도쿠가와이에야스(?川家康)의 세력을 견제하는 히데요시의 구신들의 정치적 음모가 있어,葉)」가 힘을 갖기 시작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 시대다. 그 중에 교토의 닌교죠르리(人形?瑠璃), 오오사카의 쿄오카쿠쿄오겐(?客狂言)에 대항하는 형태로 발전된 것이, 에도의 가부키였다. 에도의 가부키는 인기가 날로 높아져 무대를 옥외에서 상설 옥내극장으로 옮겼다.● 가부키에 나오는 여자들현재 가부키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온나가타(女形 · 여자역할)로 연기하고 있다. 진짜 여성보다 여성스럽게, 여성의「타입(タイプ)」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스러움이 어느 정도 강조되고 있다. 가부키의 관객은 이런 강조를 온나가타 극치의 예술(芸)로서 감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부키에 여성이 출연하지 않는 것은 전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가부키에서 여성이 사라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반대로, 가부키의 시작 당시는 여성 중심의 연극이었다.초창기의 가부키의 하나인 '이즈모노오쿠니가부키' 는, 여성이 외국풍의 남장이라는 관능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가부키는 본래, 외국의 풍속과 남장의 여성이라는 도착성과 분장의 매력을 즐기는 연극이었다. 그런 뜻에서 '가부키는 가장 일본스러운 연극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고쳐야 한다.가부키의 시작은 가장 외국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에도시대에는 가부키에 여성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매매춘이 너무나 성행했기 때문에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 막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일찍이 1629년에는 「단죠우치마지리노킨(男女打ち混じりの禁)」이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이것은 남녀의 경연을 금한 것이다.서양에서 돌아온 지식인과 위정자는 서양에서 연극이 국가 문화의 상징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연극으로서 가부키를 내세웠다. 카부키가 현재와 같이 예술로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지식인들은 서양에서 보고 온 웅장한 극장이 일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테이코쿠극장(帝?劇場)」을 세우게 된다. 또한 일본에도 화려한 여배우가 필요하다고 변하게 되면서, 신분이 낮은 사람을 등장시키는 극도 행해지게 되었다. 친숙한 사람을 제재로 하였기에, 배우의 화장도 보다 사실적으로 바뀌었다.● 가부키를 즐기는 법현대의 관객인 우리들은 가부키를 보러 가도 배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그러면, 에도시대 사람들은 알았을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에도시대 사람들도 배우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줄거리조차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즐긴 것일까? 대사를 알 수 없는 극에 에도시대 관객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을까?가부키는 줄거리를 즐기는 연극이 아니라, 배우의 기예(技芸)를 즐기는 연극이었다. 이른 아침 개막시간에는 관객이 드물고, 점심시간이 지나 극적 감정이 고조되어 배우가 특정연기를 보여 주는 시간대에는 관객이 붐빈다. 그것은 현재의 음악감상과 비슷하다. 현재의 콘서트 등에서 관객이 가수가 부르는 가사는 거의 신경쓰지 않고, 리듬이나 멜로디를 즐긴다. 그와 같이 에도시대의 가부키의 관객도 배우의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일본어의 리듬을 즐겼던 것이다.가부키의 용어 설명{● かぶき 【歌舞伎?歌舞妓】 [ kabuki ]에도시대에 대성한 일본의 대표적인 연극. 오쿠니가부키(阿?歌舞伎)에서 시작하여, 와카슈가부키(若衆歌舞伎)를 거쳐, 극적 요소를 위주로 하는 연극으로 발전했다.● おくにかぶき 【阿?歌舞伎】 [ okunikabuki ]에도 초기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 신사이름)의 미코(무녀)라고 불리는 오쿠니가 교토에서 당시 유행한 넴부쯔오도리(念?踊り · 염불춤)와 쿄겐(狂言)을 비속화하여 연기한 가극. 가부키의 시작이라고 함.● わかしゅかぶき 【若衆歌舞伎】 [ wakashukabuki ]에도 초기 앞머리가 있는 소년(와카슈)에 의해 연기된 가부키. 온나가부키(女歌舞伎) 금지 후 성행했으나, 풍습이 문란해진다고 하여 1652년에 금지됨.● いずものおくに 【出雲阿?】 [ izumonookuni ]오쿠니가부키(阿?歌舞伎)의 창시자로 가부키의 시조로 불리) - 고대나 중세의 귀족이나 무사들이 주인공이 되는 역사극▣ 스케로쿠 - 무사 스케로쿠와 그의 애인인 기녀 아게마키와의 사랑과, 아게마키를 탐내는 교활한 늙은 무사 이큐와의 사건을 그린 작품□ 세와모노(世話物) - 근세 서민들의 실생활 가운데 일어난 사건을 다룬 작품□ 무용(舞踊)□ 신가부키(新歌舞伎) - 메이지 시대 외부의 극작가의 작품을 이용한 가부키**전체설명에도시대[江戶時代] 서민의 예능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약 4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부키라는 말은 원래 가부쿠[傾く:放縱하다, 바람나다, 好色하다 등의 뜻]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이다. 근세 초기 고료에[御靈會]라는 종교행사와 함께 후류오도리[風流踊]라고 부르는 예능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라는 여자가 교토[京都]에서 가무를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이 ‘여자 가부키’는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으나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는 1629년 풍기상의 이유를 들어 여자의 출연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동(美童)·미남자 등이 주로 춤과 곡예 등을 보이는 가부키가 등장하였다.그러나 이들도 남색(男色)을 파는 일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52년 미동의 출연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에도에 있던 극단들은 바쿠후[幕府] 당국에 진정을 계속하여 결국 미동의 상징인 앞머리를 자르고, 가무(歌舞)는 하지 않고 연극만 하는 조건으로 다시 허가를 받았다.이렇게 하여 본격적인 대사(臺詞)와 함께 여장(女裝)한 남자가 깊이있는 연극을 보여주게 되었고, 가부키는 여러 형태로 변모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노[能]·교겐[狂言]이 600년 전 완성된 일본 귀족과 무사계급의 예능이었다면, 가부키는 대중 속에서 대중의 지지 아래 뿌리를 내린 대중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자(배우)는 대중들의 절대적 인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 직업은 세전(世傳) 또는 가전(家傳)으로 이어지는 권위있는 직업이 되었다.**부연설명歌부키는 일본의 연희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일막일막의 극한적 장면을 비연속으로 집합·통일 시킨 희극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3. 연기가부키의 연기는 한마디로 주연배우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남녀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이 악역이나 적을 속시원하게 물리치는 연기를 통하여 관객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부키라고 할 수 있다.주역들이 구마토리를 하고 2미터가 넘는 긴칼을 찬다든지, 여러 가지 무대장치를 하는 것은 모두 주역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가부키 고유의 연출이다.4. 가부키 배우가부키 배우는 에도시대에는 야쿠샤(役者)라고 일컬었다.야쿠샤란 원래 고대에는 신불에 관련한일을 맡는자를 뜻했다.그것이 점차 연희를 통해 신에 봉사하는자를 가르키게 되었다.노오야쿠샤,가부키야쿠샤라고 칭했는데 에도시대에는 특히 가부키 배우를칭하는 경우가 많았다.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야쿠샤대신에 배우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그러나 옛날부터 배우의 사회적지위는 낮았고, 사농공상의 계층에도 들지못하는천민으로 자리가 정해져 천민이라고 멸시를 당했다.주거도 일반사회에서 격리되고 외출시에는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여야만 했다.가부키 배우는 발생당시의 여자 가부키, 미소년가부키시대에는 매춘을 하고있었다고 한다.그리고 이시대는 용색본위의 시대였으므로 연희의 기예에 뛰어난 배우는 나오지않았다.배우의 이름값을 하는자의 출현은 성인가부키이후 연기가 중시된 시기부터이며,참된 배우로부터의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겐로쿠(元祿)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1830년에서 1844년에 걸친 정치개혁의 당시, 관가의 호출을 받은 배우들은‘한마리’‘두마리’라고 불리며,가축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그러나 실제로는 타인의 명의로 별장을 짓기도 했는데, 인기배우는 년간 이천오륙백냥이나 받으면서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심지어는 년간 500냥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정부의 통보가 나왔을 정도라고한다.배우의 이런 사회적지위는 메이지시대가 되어 계급사회에서 풀려나면서 향상되었다.한편 배우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연기양식을 형었다.
    인문/어학| 2003.11.02| 11페이지| 1,000원| 조회(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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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문화] 상하이
    가보고 싶은 도시 중국 상하이중국 양쯔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중국 최대도시.면적은 6,200㎢, 인구는 1674만 명(2000)이다. 중국 제1의 대도시이며 행정적으로는 성(省)과 동격인 중앙정부 직할시(直轄市)이다. 시역은 시가지부의 10구(區), 교외부의 10현(縣)으로 나뉜다.시가지는 양쯔강 어귀의 남안(南岸), 황푸강[黃浦江]이 양쯔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시가지 주변의 넓은 땅과 양쯔강 어귀의 하중도(河中島)인 충밍섬[崇明島]을 시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가지를 흐르는 또 하나의 주요 하천인 우쑹강[吳淞江:蘇州河]이 황푸강에 합류하는 지점을 옛날에 후독[嫉瀆]이라 불렀다.상하이의 별칭‘후[嫉]’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근은 장난[江南] 삼각주 지대로 토지가 비옥하고, 위의 하천 외에 크고 작은 여러 수로가 시역에 종횡으로 뻗어 있다. 기후는 온난하여 연평균기온 15~16℃를 보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mm이다.상하이는 송말(宋末)의 1267년에 이미 무역항이 되어, 무역감독관청으로서의 시박사(市舶司)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1842년에 아편전쟁(阿片戰爭)의 결과 맺어진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구미제국과의 무역을 위한 개항장(開港場)이 되자, 상공업도시로서 급속히 발전하여 중국 제1의 도시로 성장하였다.그러나 상하이의 실권은 외국인의 해관세무사(海關稅務士)가 장악하고, 치외법권(治外法權)이 인정되는 외국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1949년까지 혁명과 반혁명 세력의 격렬한 대결이 되풀이되기도 하였다.한편 상하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에서 1919년 4월 17일에 조직되어 1932년 5월에 일본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杭州]로 옮기기까지 활약했던 곳이다. 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이곳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부상케 한 곳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 유적지와 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되어 있다.상하이는 중국 굴지의 공업도시로, 방직·기계·조선·전기기기·화학·비료·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영위되고, 또 기술적으로도 전국을 리드하고 있다. 본래 경공업, 특히 방직공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으나, 근래 중화학공업이 크게 신장하고 있다. 시가지 교외의 각 현(縣)에서는 쌀 외에 채소·목화·과일 재배 및 양돈·양금(養禽)·담수어양식 등이 활발하다.1968년 10월 난징[南京]의 창장대교[長江大橋] 완성에 의해 베이징[北京]에 직결되는 징후[京] 철도가 열리고, 또 후항철도[杭鐵道:상하이~항저우] 외에 많은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 국제공항은 국내 각지와 국내선을 통하는 외에 국제항로가 열려 있고, 황푸강의 상하이항은 근래 내외 선박의 출입이 급증하여 수만톤급 외항선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세계적인 무역항이다.상하이는 중국의 주요 학술·문화 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하여 푸단[復旦]대학·통지[同濟]대학·화둥[華東]사범대학 등 여러 대학과 다수의 연구기관 및 50만 권의 장서가 있는 상하이도서관과 상하이박물관 등이 있다. 인민공원·중산[中山]공원·훙커우공원·푸싱[復興] 공원 등이 있고, 명소·고적으로는 징안사[靜安寺]·룽화사[龍華寺] 및 루쉰[魯迅]의 묘(墓:훙커우공원), 서광계(徐光啓)의 묘 등이 있다.지금도 중국 강소성(강소성) 쑤저우(소주)나 항저우(항주) 주민은 상하이 사람을 은근히 촌놈 취급 한다. 상하이가 작은 시골 어촌 시절에 쑤저우나 항저우는 귀족의 도시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중국인에게 ‘상하이에 거주한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부러워한다. 일자리도 많고 임금 수준도 높기 때문. 상하이의 옛 이름은 후. 고기잡는 통발이라는 뜻이다.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상하이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미국,프랑스가 상하이 와이탄(외탄)지역을 조차(조차)하면서 국제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와이탄은 손 중산 선생을 기념해서 이름을 지었고 북쪽의 와이바이뚜치아오(外白渡橋)부터 남쪽의 진링동루(金陵東路)까지 전체 길이가 약1.5Km이다. 동쪽은 황푸(黃浦)강이 서쪽은 52개의 각기 다른 양식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이 건물들은 서방열강 시대에 상하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고, 와이탄은 상하이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밤의 야경은 상하이의 대표적인 볼거리라 할 수 있고,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며 연인들이 많다상하이 인구는 현재 1천3백만명으로 중칭(중경·3천만명)에 이어 전국 2위이며, 면적은 서울특별시의 10배인 6340㎢. 신 개발지구인 푸동(522㎢) 지역의 넓이만 하더라도 여의도의 60배에 달한다.상하이 경제를 설명할 때는 최고, 최대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상하이가 생산해 내는 GDP(국내총생산) 규모는 4백87억달러(99년 기준). 1인당 GDP는 3천7백2달러로 중국 평균인 7백87달러의 5배가 넘는다. 황포강 동쪽 신개발지역인 푸동은 지난 1990년부터 개발이 시작됐다.푸동 건설의 상징인 동방명주탑은 높이가 4백68m로 TV 송신탑 겸 관광 타워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98년에는 88층짜리 진마오 빌딩(금무대하·480m)이 완공됐다. 중국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외국기업들이 상하이에 투자한 금액은 99년 말 현재 3백억달러(36조원)에 달한다. 미국 경제잡지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1백대 기업 가운데 57개 기업이 상하이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를 두고 있다.상하이 항은 세계 6대 항구로 꼽힌다. 지난해 상하이 항이 처리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은 4백21만TEU. 올해는 5백25만TEU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상하이 시 정부는 만족하지 못한다. ‘세계 최고·최대가 아니면 안 된다’. 2002년까지 노트르담, 싱가포르에 이어 상하이를 세계 3대 항구로 키우겠다고 정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강행하고 있다.상하이의 푸둥(포동)과 훙차오(홍교) 공항. 여객·화물 수송 능력은 중국 1위를 넘었다. 현재 진행중인 푸둥 공항 확장 공사가 모두 끝나면 아시아 공항 1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상하이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난징로는 동쪽 와이탄부터 26개 도로를 가로질러 서쪽 징안쓰(靜安寺), 옌안시루(延安西路)와 만난다. 총 길이 5.5Km로 상하이 중심부를 관통하며 시장루(西藏路)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뉜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이 곳은 도로 양쪽에 6백여 상점들이 있고, 하루 평균 1백70만명 이상의 사람들에 의해 거래되며 다년간 전국 소매상업 3대상점이 모두 이곳에 있다. 1999년 전면 도로 공사가 끝나면서 차량통행이 제한된 난징로 보행거리가 개통되었다. 이 곳은 상업거리뿐 아니라 손꼽히는 상하이의 관광명소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은 상하이를 중국의 밖으로 뻗어가는 출구이자,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입을 모은다. 민경동 상하이 산업은행 대표는 “중국에 진출하려면 상하이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라고 말했다.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상하이 데일리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 아시아·중국 본사를 상하이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코카콜라, 프랑스의 세계적 통신회사인 알카텔, 다국적 기업인 필립스, 미국 GM(제네럴 모터스), 일본 NEC, 모토로라에 이르기까지 87개 다국적기업들이 상하이를 아시아·중국 지역 교두보로 선택했다. 상하이의 매력은 거대한 소비시장과 생산기지를 한꺼번에 끼고 있는 도시라는 점. 그래서 상하이는 세계 일류 제품의 각축장이 된지 오래다.상하이 훙차오 지역은 대형 할인점이 밀집한 대표적인 상가지역이다. 프랑스 계열 대형 할인 매장인 까르푸에서 가전제품 코너에 나온 29인치 컬러 TV 가격은 불과 2천위안(약 26만원). 상표는 내셔널, 도시바, 소니, LG, 삼성 등 세계적인 브랜드들이지만 모두 ‘메이드 인 차이나’이다. 대형TV에 이어 요즘은 DVD 가격 할인 전쟁이 한창이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가전제품의 할인 경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상하이 주재원들의 귀국 보따리에는 이미 중국산 가전제품이 필수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상하이 LG 전자 VCR·DVD 공장 노광석 법인장은 “중국 가전산업의 추격은 이제 피할수 없는 현실”이라며 “품질에서도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LG는 물론 삼성도 이미 TV·냉장고·세탁기 등 가전제품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겼다.중국 제품이 한국 제품을 세계 시장에서 밀어내는 부메랑 효과(회반효응)는 벌써 시작됐다. 중국이 수출하는 섬유, 문구, 완구는 이미 일본 동남아·미국시장에서 한국 상품을 밀어낸 지 오래다. 이제는 우리 주력 제품인 자동차, 반도체, 철강분야까지 넘보고 있다.
    인문/어학| 2003.11.02| 6페이지| 1,000원| 조회(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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