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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이황의 사상연구 평가A좋아요
    退溪 李滉의 思想 硏究- 目 次 -Ⅰ. 머리말Ⅱ. 思想形成背景1. 生涯2. 社會的思想的 背景Ⅲ. 哲學思想1. 性理說2. 修養論Ⅳ. 政治社會思想1. 社會思想2. 政治思想Ⅴ. 思想의 歷史的 位置Ⅵ. 맺음말Ⅰ. 머리말韓國思想의 전통속에서 朝鮮時代의 道學은 기본 줄기에 해당되고, 朝鮮時代 道學의 哲學 영역인 性理學의 정립에서 退溪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宋代 道學이 朝鮮 창업과 더불어 국가의 정통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 도학이 철학적으로 한국화한 것은 200년 후 퇴계에 의해서이다. 朝鮮時代 道學은 퇴계에 이르러 비로소 독자적인 하나의 學派를 형성하게 되었고, 자신의 哲學的 爭點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여 심화할 수 있었으며 광범하게 확산시키고 새로운 수준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退溪를 가리켜 湖岩 文一平은佛敎 思想에 원효가 대표자라며 儒敎 思想에 退溪가 대표자일 것은 거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말하자면 退溪 이전까지는 儒敎가 오히려 정치나 詞章의 餘習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退溪의 출현을 기다려 완전한 철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며, 예론의 발달도 또한 退溪 이후에 있었은 즉 退溪로써 반도 유종을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 하였으며, 日本 學者인 藪孤山도 退溪를 程朱에 이어 儒學의 정통을 잇는 한국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유학이 이러한 退溪에의해 발달하였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외 많은 학자들도 퇴계와 그의 학문이 韓國 儒學, 특히 性理學을 대표하는 것이라 믿어왔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韓國 性理學을 대표한 그의 思想을 살펴봄으로써 현재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韓國 性理學을 조명해 본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그의 倫理的 思想에 기초한 그의 道德觀과 人間觀은 인간경시풍조와 인간교육이 부재한 이 시대에서 하나의 훌륭한 교범으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따라서 본고에서는 그의 思想이 형성될 수 있었던 個人的 氣質과 社會思想的 背景을 살펴보고 退溪 思想의 핵심인 철학사상을 살펴본 뒤 철학사상을 사해 오던 세력이었다.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송대 신유학 가운데서도 성리학(性理學)에서 구하였다.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커졌다. 성종 초에 김종직 등 영남출신 사류(士類)를 등용하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훈신(勳臣)들의 장기 집권에 따른 비리로 인해 동요하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제도를 부활하여 《주례(周禮)》의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고자 하였다.그러나 이들의 기반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향소가 권력가의 지방에 대한 수탈의 하부조직으로 악용되었다. 이에 지방에서는 사마소(司馬所)라는 독립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는 한편, 중앙에서는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 ·문필 기관의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훈신·척신(戚臣) 계열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훈신·척신의 보복으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제거되었지만, 중종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고, 지방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훈신·척신의 강한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書院)과 향약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그후에는 척신정치의 척결문제를 둘러싸고 선배 관인과 후배 관인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대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붕당(朋黨)으로의 분기가 거듭되고 일부 세력의 도태를 겪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17세기 후반까지 학연을 기반으로 한 서인), 理氣의 우주론적 문제와 이에 근거한 心性情의 心性論的 문제를 기본과제로 삼고 있다. 朱子의 主理哲學을 性理學의 정통으로 확립함으로써, 한국 유학사의 기본성격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四端七情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계발함으로써, 理氣論의 이론을 心性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정밀하게 적용시켰던 사실은 바로 心性論(人性論)에 집중하는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다.(1) 太極論退溪는天은 理요, 理는 太極이다.라하여 天理太極을 일치시켜 제시하였다. 유교적 궁극존재를 주재적 존재로 인실할 때天이라 하고, 본체로서의 원리를理라하며, 통체로서 포괄자를太極이라 일컽고 있지만, 그 실체는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는 다른 명칭일 뿐이라는 인식은 朱子의 기본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琴章秦,『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출판부, 1998.『周易』에서易에 太極이 있으니 이것은 陰陽을 낳는다라 하고, 周濂溪의『太極圖說』에서太極이 動하여 陽을 낳고, 靜하여 陰을 낳는다.라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하여 퇴계는 太極과 陰陽의 관계를 能生者와 所生者로서 구별하였다. 그것은 太極을 陰陽이라고 보는 혼합의 관점을 거부하고 양자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분별의 관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理氣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로서오묘하게 결합하여 응결함로써 인간과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았다. 퇴계는『非理氣爲物辯證』을 지어 花潭 徐敬德의 기일원론과 羅欽順의 이기일원설을 비판함으로써 太極-陰陽 내지 理-氣를 일체로 혼합시켜 보기를 거부하는 분별의 관점을 확립하고 있다.퇴계는 太極을 動靜의 주체로서 動하고 靜하는 작용의 본체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太極의 존재를 단순히 動靜하는 작용의 전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動靜을 발휘하는 주체이며 모든 작용을 주체하는 최고의 능동적 주체로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퇴계는 理의 지위를 天에까지 끌어올려 높이고 있다. 모든 인간은 動과 靜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太極을 본받아 靜을 주장으로 삼는 것이 聖人이며, 動에 빠져 근본槪念이 서로 뒤섞일 수 없음을 주장하는데 근거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天理에 근원하는 善을 人欲에 근원하는 惡으로부터 명확히 분별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天理를 간직하고 인욕을 억제하려는 요구에 근거하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을 주창했던 것이다.또한 퇴계의 二元論은 主理的 主氣二元論이다. 여기서主理란사실적으로 理가 主이다는 당위적 의미의 主理이다. 퇴계의 理氣論은 사실과 당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는 항상 사실과의 대응성보다는 당위적 요청의 차원에서 그의 체계를 정립해 나갔다. 윤리적 관점에서의 理氣의 엄격한 구별은 자칫 존재자체에 있어서의 분리까지도 인정하는 것 같아 문제가 되며, 이러한 가치상의 구별과 존재적 구별의 혼동은 율곡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당위적 규정들을 사실적 기술로 이해한다면 많은 모순들이 야기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사상은 주자나 율곡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며 여기에 퇴계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퇴계는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哲學的 立場을 지니고 있었으며, 朱子說이라 하더라고 자기의 입장에서 취사선택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퇴계는 주자의 말이나 性理學的인 槪念 등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취사선택하여 결국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3) 心性論(人性論)理氣論은 인간과 사물의 존재를 그 구조와 근원에서 설명하는 이론들과 확립되어 왔으며 특히 인간의 心性論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즉 퇴계는 인간의 心性 문제를 숙고하는 가운데에서 그의 心性說을 전개하고 있다.퇴계는性卽理의 입장에서 心의 理가 곧 性이라고 본다 『退溪全書』권29,「答金而精」: 蓋性非有物 只是心中所具之理. 心의 理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本然之性을 말한다. 퇴계는 氣質을 섞지 않고 말하면 本然之性이 되고, 기질을 나아가 말하면 氣質之性이 된다. 『退溪全書』卷35,「答李宏仲」 : 只是不雜乎氣質而言 則爲本然之性 就氣質而言 則爲氣質之性따라서 본연지성은 기질을 제외한 순수한 理이므로 순수를 세운 것은 퇴계 성리학의 위대한 공헌이다.2. 修養論퇴계는 理氣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발판으로 심성의 인간 내면의 존재양상을 해명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理氣心性의 性理說을 토대로 心性의 실체를 보존하고 배양하는 存心養性의 修養論을 통한 인격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퇴계는 마음이 주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天理와 人欲, 中節과 不中節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人欲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하여금 주재를 잘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存養省察을 말하는 것으로서,고요할 때는 天理의 本然을 涵養하고 움직일 때는 人欲을 幾徵에서 끊는 것이다.修養論은 마음을 배양하는 실천 방법과 성장 단계에 관한 인식으로서 道學的 人格論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퇴계의 수양론은 경을 강조하면서 심성의 보존과 배양을 통하여 인격의 향상을 추구하는 실천방법을 계발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敬은 마음을 주재하여 안으로 도덕적 심성을 배양하며(存養), 밖으로 행동 속에서 악의 발현 가능성을 반성하고 억제하는(省察) 修養論的 원리이다. 敬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심성이 天命의 준칙을 지키고 天命을 실현하여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지향은 道學의 출발점이며 목적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중시되어 왔다. 퇴계는 心性論의 분석적 인식과 경의 실천적 요구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道學으로서 인간의 인식방법이며 실현방법으로 통일되는 것이다.퇴계는 敬을 지키는 수양방법을 해명하면서, 修養의 두 구성 요소로서 심과 리를 제시하고, 수양의 두 실천 요소로서 戒懼와 省察을 제시하였으며 특히 실천기반으로 求放心이 중시되고 敬을 통한 성품의 涵養이 강조되고 있다. 계오의 방법은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는 상태인 고요할 때 하는 공부이며 성찰의 방법은 이미 발동한 다음으로 활동할 때의 공부로서 대비되는 것으로 敬은 고요할 때나 활동할 때를 관통하여 중단됨이 없는 것이다. 求放心은 마음과 수양을 위해 안에서 다스리는 방법
    인문/어학| 2003.10.08| 13페이지| 2,000원| 조회(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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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치사상] 남명조식의 사상과 그 생애 평가A좋아요
    남명 조식의 사상과 그 성격-남명의 경세사상을 중심으로-目 次Ⅰ. 머리말 Ⅳ. 남명의 경세사상Ⅱ.16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남명의 생애 1. 정치론1. 16세기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2. 사회·경세론2. 남명의 생애 3. 광해군대의 남명학파의 정치운영Ⅲ. 남명의 학문경향 Ⅴ. 남명사상의 역사적 재조명Ⅵ. 맺음말Ⅰ. 머리말조선 중기는 사상면에서 흔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의해서 한국적 성리학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 데에는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세력이 조선의 국권침탈 시기까지 권력을 장기적으로 장악하게되면서 학문에 있어서도 그들이 숭상하였던 이기론 중심의 철학만을 학문의 정통으로 교조화시켰고, 이러한 결과가 오늘날까지 지속된 데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한국사상사는 조선에 이르러 관념론적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이기론 중심의 성리학 위주로만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상들의 삶을 너무나도 모른 채 역사적인 안목이 결여되어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오면서 고정화된 관념일 뿐이다. 본 과제에서는 앞서 제기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하여 한국적 성리학이 완성되는 시기인 16세기에,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상을 발전시켜나간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명 조식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이러한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하여 본 과제에서는 남명의 사상이 형성되는 토대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생애를 먼저 살펴보고, 이후 그의 실천적 학문경향과 이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분야라 생각되는 그의 경세사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이를 통해서 남명사상이 역사적으로 왜곡된 원인을 정리해보고자 하며, 나아가 그의 사상의 역사적 의의를 고찰해보도록 하겠다.Ⅱ. 16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남명의 생애1. 16세기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한국사에 있어서 고려를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던 조선의 통치체제는 15세기에 들어 경국대전의 편찬과 더에 대한 국가지배의 약화를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되면서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고, 직전법) 조선 전기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收租地)를 분급한 토지제도, 관수관급제와 같은 제도를 시행하여 과전법 시행상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타개하려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16세기에 와서는 결국 과전법 자체가 폐지되고 말았다. 과전법이 폐지된 결과 사대부계층에 의한 토지겸병은 더욱 확대되어 갔고 이와 같은 현상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층 더 발전하여 대토지소유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초기의 토지제도인 과전법이 폐지된 것이 16세기라는 점에서 중세적 질서의 해체가 시작된 시기는 16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이를 통한 유통경제 활성화가 촉진되어 시장의 발달, 상공업의 발달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태진, 〈15·16세기 한국 사회경제의 새로운 경향〉《동방학지》64, 연세대, 1989, 이는 양란 이후의 급격한 사회변동의 근원적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사회적으로는 이러한 정치·경제적 변화의 영향으로 점차 경국대전적 신분질서가 와해되어 갔는데, 이러한 현상은 점진적으로 전개되었고, 양란을 거치면서 사농공상의 고정적 신분질서가 본격적으로 해체되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의 사회변화의 근원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살펴 본 16세기의 제반 여건들을 정리하여 보면, 16세기는 조선전기의 지배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로서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적 특징들이 서서히 나타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17세기 이후의 사회변화가 양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근대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다만 양란을 거치면서 그 변화가 더 촉진되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즉, 16세기의 제반 모습들은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역사애를 통해서 본 남명의 위인〉《대동문화연구》17, 1983① -25세 : 선진시대의 고문에 심취함② 25-30세 : 과거실패, 학문적 변환기. 성리철학에 접근 시도③ -50세 : 성리철학을 독자적으로 수용하여 실천적인 경의사상) 남명은 형이상학적인 고원한 것만 추구하는-이기론적 학문-당시의 학풍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쉽고 가까운 데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는 실천적이고 설득력있는 학문을 내세웠는데,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로 '下學人事 上達天理'를 누누이 강조하였다. 이 문장은 남명의 실천적 학문경향을 대표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아래로 인사를 배워 위로 천리에 도달하는 것이 또한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이다.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말하는 것은 곧 입으로만 말하는 이치이며, 자기 자신에게 돌이켜 보지 않고 많이 들어 아는 것은 귀로만 듣는 학문이다."을 완성함. 후학교육에 힘씀④ -72세 : 사림의 학문적 영수로써 이황과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침지금까지 남명 조식의 생애를 당시 사림의 학문경향과 더불어 객관적으로 살펴보았다. 조선중기 무렵인 16세기는 지방의 사림세력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계진출은 순탄하지만은 않아서 많은 희생을 겪은 후 선조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 사림세력들은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성리학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러한 사림세력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워나갔던 이황, 이이로 대표되는 학자들과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고자 하였던 남명 조식으로 대표되는 학자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사상들은 16세기 조선의 학문의 분위기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성리학 위주의 폐쇄적 분위기가 아니라 노장사상과 같은 분야에 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는 데서 알수 있듯이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16세기 조선의 학술계는 남명으로이라고 파악한 데 있었다. 그러나 南冥과 李滉의 이러한 학문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現實認識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李滉은 스스로 벼슬보다는 은둔을 원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오랜 관직생활을 통하여 문인들도 정계에 많이 들여놓아 정치의 기득권을 획득하여, 현실상황을 안정적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현실세계의 보편적인 理를 인간내면의 심성세계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전개한 반면, 南冥은 당시의 사회현실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편적인 理를 철학적으로 심화시키기를 거부하고 현실의 모순극복에 주력하여 下學人事의 실천을 중시하는 敬義학문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南冥의 학문에 있어서 老莊學的 성향이 있다는 것은 당대의 학자나 후세의 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지적되어 왔는데, 특히 退溪가 南冥의 〈辭丹聖賢監疏〉를 평하면서,"南冥은 비록 理學으로 자부하고 있지만, 그는 다만 하나의 기이한 선비로 그의 이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자에 힘쓰니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하여 南冥의 식견이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고 하여 南冥을 비판하면서 南冥이 老莊思想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 편역, 《退溪集》, 1990이러한 평가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시하는 풍토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南冥이 老莊思想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그의 학문의 開放性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敬義之學이 南冥의 학문적 기반이라면, 老莊이나 佛敎, 陽明學)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등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욱 확대시키고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그 장점들을 취하는 형식으로 수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에만 집착하지 아니하고, 장점이 있다면 異端이라 배척하는 것도 유연하게 수정치에 다가가서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당시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는"민중은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터 있던 말이다. 민중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 편역, 앞의 책하여 政治權力의 근본이 민중에게 있음을 주장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政治思想에는 민본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이는 물론 당시 尹元衡세력에 의한 外戚政治가 극도로 부패 문란하여 민중의 생활이 피폐된 시대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즉 남명은 현실의 왜곡된 정치상황을 비판하고 근본적인 유교의 民本思想에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수차례에 걸친 상소를 통하여 군주에게 군주의 자질과 민생현안의 개혁방안에 대하여 직언하였고, 文武兼全을 주장하여 문치주의에 치우쳐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온 당시의 정세를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자들에게 儒學과 더불어 兵書를 가르치고 武學을 연마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만규,《조선교육사》, 거름, 1988南冥은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實行과 體驗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實踐躬行人을 교육적 인간상으로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초학자에게 심성에 관한 문장을 가르치는 退溪의 교육방법을 반대하고 《小學》,《大學》,《論語》와 같은 실천적인 經典을 먼저 가르치면서 自解自得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敎育觀을 바탕으로 해서 길러진 인재들은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엽에 이르는 격동기에 정치, 학술, 군사면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다.그의 이러한 經世論은 후에 壬辰倭亂 시에 慶尙右道에서 그의 문하생들인 鄭仁弘, 郭再祐, 崔永慶 등이 대거 義兵을 일으켜 倭軍의 전라도 지역으로의 육상에서의 진출을 막아내어 궁극적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점과 선조와 광해군대에 그의 학통을 이은 北人계열의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정치를 통해서 실천되어 진다.2. 社會經世論貢物은 民이 그 지방의 토산물 및 수공업품을 중앙의 조정에 상납하는 것을다.
    인문/어학| 2003.06.18| 12페이지| 2,000원| 조회(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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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사상] 민족주의
    서 론민족주의는 과거 수 백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적 이념이었다. 모든 현대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는 다른 사상체계도 지배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일률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민족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개념과 민족-국가에 대한 상관관계의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민족의 개념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사회적인 것이며 민족이라는 용어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이는 언어, 거주하는 지리적 범위, 경제생활과 문화, 또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집단이다. 서로 혈족관계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용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은 비록 특정한 국가 내에 포함되지 않거나 특이한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을 지라도 존재할 수 있다. 한 민족이 그 인종구성에 의하여 명백히 동일시 될 때에도 그 민족의 사람들은 여러 나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같은 정부 체제의 국가가 없이도 존재가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게르만인과 유대인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민족은 여러 지역에 분포될 수 있으며 그 존재가 어떤 특정지역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국가는 일정한 영토 내에서 주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정부하의 국민들은 의미하는 정치적 용어이다. 국가라는 용어는 민족의 개념과 달리 확실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 통상적으로 국가라는 표현은 국민, 주로 특정 공간에 한정된 지리적 공간인 영토, 또 일정한 영토 내에서의 궁극적인 법적 권위인 주권, 그리고 정부의 4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모든 국가에는 영토의 경계가 있다. 다음으로 국가와 민족의 유일한 공통된 특징은 국민이다. 그러나 민족이 그들 자신의 국가를 창설하고자 할 때, 그 결과로 인한 정치적 존재인 민족-국가는 매우 중요하다. 민족이라는 용어는 어떤 국민의 사회적 통일체를 상징하고 있으며 국가라는 용어는 그러한 연합을 정치화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민족-국가로 조직되었다고 정의주의는 좌우익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좌익은 그것이 인민에 대한 군주의 압제를 완화시킬 수 있는 도구로 생각되었다. 벤담과 마치니와 같은 자유주의적 철학자들은 사회에서 국민의 물질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민족주의를 주창하였다. 우파정치가와 사상가들은 민족주의를 보다 강력하고 보다 훈련된 정치적 결합으로 연마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식민주의의 전개로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20세기 초, 제 1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우파민족주의에 의해 조장된 유럽열강의 제국주의적 경쟁에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의 종식은 우파민족주의의 일반적인 각성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지도로 세계는 좌파민족주의로 또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윌슨 대통령의 14개조는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는 서약이며, 국제연맹을 창설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이들 각 원칙은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되었다. 1920년대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로마제국의 부활을 강력하게 외쳤다. 다음 20년간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 스페인과 몇몇 동유럽국가에서 파시즘의 출현을 볼 수 있었다. 이들 국가 지도자들의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켰고 우파민족주의의 2번째 전반적인 좌절을 가져왔다. 사실상 민족주의는 광범위한 정치적 흐름을 발전시켰다. 프랑스 혁명이래 민족주의는 전래가 없는 규모로 채택되었으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사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민족주의는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비밀결사단체(KKK), 인도네시아의 분쟁, 유고코소보 사태, 아프리카 쿠르드족 분쟁, 독일의 네오나치즘 등 다양한 사건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는 ‘신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현대 사회도 그 기초 지단이 민족 국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 제1기제 1기의 본질적인 특성은 국가를 통치하는 특정한 인물과 민족국가 그 자체를 동일시 했 다는 점이다.제 1기는 중세의 제국과 져다주었으므로 장려될 수밖에 없었다. 부는 권력의 원천이었으며, 특히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중상주의 제도의 유명하고도 철저한 주창자였던 콜베르(Colbert)가 말했듯이 ‘무역은 국가 재정의 원천이며, 그 재정은 전쟁을 할 수 있는 중추신경이다’ 이시기에 있어서 국내적으로 중상주의는 경제 질서의 단조로움을 기반으로 한 지방 중심의 시장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역적 시장 활동과 경제적인 법규 즉 경제적인 배타주의를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국가를 경제적인 단일체로 만들고 그 영역 내에서 생산되는 산업과 제조에 대하여 국가 권위의 절대적인 지배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국외적으로는 자국의 부의 증진을 통해서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가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 각 국가 간의 부의 측정은 금이라는 가장 단수한 형태에 의존했으며 이것은 수출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널리 알려지고 있었던 사회의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수출시장은 대체로 그 규모가 무한대가 아닌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무역전쟁을 일으켜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은 오직 중상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임과 동시에 하나의 정책적인 도구도 되었던 것이다. 중상주의는 국가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고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중상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대비시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유인즉 양쪽 모두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굳이 이들 양자 간의 차이점을 표현하자면 국가 개념에 대한 차이 정도에 불과하다. 중상주의는 국가의 이익과 지배하는 통치자의 이익을 동일하다고 간주한 시대의 경제정책이었다. 중상주의는 목적은 중상주의가 권이 있는 역사가에 의해서 정리되었듯이 국가를 위한 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국가의 구성 요소인 대다수의 국민들은 제외되었으며, 특정자인 오직 통치자들만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었다.3.또 [베르사이유]체제하에서 그것에 승인할 수 밖에 없었던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였던 내셔널리스트들과 일반국민들도 차츰 ‘나치스’에 동조하였다.‘나치스’당은 1930년 9월의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 2당으로 진출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였고, 그들이 건설하고자 한다는 신분국가에서의 중산계급의 보존을 약속하여 환심을 사고 유태인 비판을 외쳐 중산계급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민족감정을 이용하였던 것이며, 더불어 경제적으로도 [베르사이유]조약에 원인이 있다고 선전하면서 역대 내각을 비판하고 이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여 동 조약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반국민과 군부의 관심을 샀다. 거듭되는 총선거에서 ‘나치스’가 크게 진출한 것은 이러한 것에 힘입은 바 큰 것이었다.1932년 5월 부뤼닝내각이 혼미를 거듭하던 끝에 무너지고 나서는 폰파렌내각, 슐라이헤어내각이 뒤를 이었다.폰파렌내각은 1932 7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프로이센]지방정부를 쿠데타에 의하여 타도함으로써 국수주의화에 박차를 가하였다.1932년 7월의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제 1당이 되었고 동년 11월의 총선거에서도 제 1당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수상이 된 것은 대자본가와의 협력이 성립된 후인 이듬해 1월이었다. 히틀러의 집권 직접원인은 내셔널리스트인 폰파렌과 퇴역장성인 슐라이헤어의 반목이었으며 ‘나치스’는 자본가 세력과 제휴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1933년 1월 집권당시 ‘나치스’는 절대다수당은 아니어서 국가인민당과의 연립 정권으로 출범하였다.제2항 나치스 독재의 확립과 독재정치‘나치스’는 정권을 쥐자 공산당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나치스’가 집권한 수일 후 친위대와 돌격대에게 여러 특권이 주어져, 이들의 폭력에 의하여 공산당들은 세력이 무력화되고 있었다.좌익정당보다 3월 5일 총선거에서 ‘나치스’당은 절대다수에 못 미치게 되었지만 3월중에 공산당을 해체시키고 그 재산을 압수하였다.히틀러는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에 의한 통치에도 만족하지 않고 근본적이고 절대동반수요를 염두에 둔 과도한 투자-대부분이 생산설비의 수입-는 수입초과를 불러왔으나 일본이 기대한 대규모의 수요는 발생하지 않았고, 20년 일본의 경제는 최악의 공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또한, 1923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하여 관동지역을 폐허로 만들고 1백억원이 넘는 재산손실을 가져왔다.군부는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민간정부의 무능으로 간단히 매도함으로써 우익의 힘을 결집할 수 있었고, 관동대지진에 가서는 관동대학살이라는 연극을 벌이며, 국가내부의 문제점과 모순들을 국가외적인 희생양에게 향하게 하는 군국주의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의 나치가 유태인에게 행했던 것 만큼이나 잔혹한 학살극이 일본 내의 외국인-특히, 조선인-들에게 향해졌던 것이었다. 이러한 내적 긴장의 외적공격적 표출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위기감이 팽배했던 시기에는 국외로의 군사적 침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일본에 대한 견제: 이러한 일본의 변모는 아시아에서의 자국의 국가이익을 증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위협요인으로 점차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워싱턴 군축회의, 군사동맹관계의 단절과 같은 군사적 견제책과 경제 블럭화와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변화 등을 통한 경제적 견제책들을 통해 일본에 대한 정치경제적 압박을 실시해왔다.일본에 의한 경제잠식이 극대화되었던 중국은 이 시기에 들어서면 북벌(北伐)을 완료(1927)하고 국민당을 중심으로 통합된 군사력과 민족주의 반일감정을 일본의 군사경제적 침략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대전을 통하여 형성한 일본의 자본이 대거 투자되어있던 만주지역 등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점차 거세어지자 일본의 자본가 계층과 대기업들도 군국주의의 고양과 체제변화를 통한 일본의 이익에 대한 강력한 보호와 안정적인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확보를 위한 대외침략과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또한 제1차 대전의 와중에 공산혁명을 성공시키고 였다
    인문/어학| 2003.06.03| 21페이지| 2,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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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평화와 전쟁
    REPORT평화와 전쟁과 목:국 제 관 계 이 론담 당 교 수:강 성 학 교수님제 출 일 자:2003년 05월 29일대 학:정 경 대 학학 과:정 치 외 교학 번:9 8 8 3 1 1 7성 명:이 성 희들어가기이 책은 '어째서 전쟁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추리형식을 빌어 하나 하나 그 원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다. 즉,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알려진 여러 쟁점들이나 주장들에 대해 저자의 나름대로의 소개와 함께 비판을 가함으로써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전쟁의 원인으로 다가가고 있다.전쟁의 원인에 대한 탐구는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 '어째서 평화가 지속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은 '어떻게 하면 평화가 지속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에 대한 탐구는 역설적으로 평화의 지속을 위한 방법과 도구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전쟁의 시시각각의 상황에 대한 소설적 구성방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칫 딱딱한 텍스트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흥미로운 역동적 시간으로 바꾸어 놓아 독자의 궁금함을 계속해서 이끌어 내고 있는 것 같다.내용요약제 1부 평화의 미스터리평화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저자의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1장첫째로 드는 전쟁비행론에 대한 비판, 즉 따분하고 한가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젊은 녀석들과 국가가 다르지 않다는 전쟁의 이론에 대해 저자는 1848년의 역사적 사실들을 들며 전쟁비행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둘째로 19세기 평화에 대한 원인으로 나오는 강력한 지도자의 리더십 영향에 대해 저자는 지도자의 영향력과 리더십이라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의존하기 쉽고 또 국내적 국외적 상황에 대한 시대별로 다른 환경이므로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일반론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듯 하다.셋째로 어떤 이는 19세기 평화가 위대한 사상의 영향력 하에 존속해 왔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위대한 문명이 평, 상호 이해관계 도모 등은 상대국간의 편견과 오해를 씻어낼 수 있어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견해로 전쟁의 발발론에 대해 상당히 우연적이고 극히 미온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러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까 가정하면서 새로운 정신의 보급이 전쟁의 억제보다는 오히려 촉진시킬 개연성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 자유주의자들이 굳게 믿고 있는 국가 문명의 정신에 대한 깊은 신뢰감에서 나오는 전쟁억제론에 대해 저자는 맨체스터 신조가 너무나 낙관적인 생각만으로 묶여 있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낙관주의적 견해로 인해 오히려 전쟁의 초기발발에서부터 진화되어야 할 수많았던 전쟁들이 오래 지속되었고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의 길고 처절한 싸움의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요약하건대 맨체스터 신조는 평화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이 될 수 없고 맨체스터 신조가 강조하는 영향력들이 실제로 전쟁보다 평화를 더 촉진했는지의 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제 2부 전쟁의 구조제 3장 : 남가일몽전쟁에 대한 국가 지도자들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전쟁의 발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고 항상 자신의 국가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로 인해 전쟁은 일어나게 되고 항상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들고 있는 수많은 전쟁 사례들은 각 국가들이 자의건 타의건 전쟁에 임하게 되면서 모두가 자신의 국가가 이 전쟁에서 유리하게 승리할 수 있다거나 적어도 참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건대 국가간에 서로 모순적인긴 낙관주의를 야기하는 것은 모두 전쟁 자체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p.88)제 4장 : 어부지리전쟁을 계획하거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가들에 있어서 제 3국의 개입가능성은 전쟁의 종결 여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전쟁을 수행중인 국시켜 전쟁을 일으켰다기 보다 다른 원인들에 더 큰 비중이 있었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들로 증명하며 반박하고 있다. 또한 국내적으로 정치적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외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반문을 하고 있다. 즉 페이의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 어전회의의 구성원들의 내부문제를 대외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유인으로서보다는 대외전쟁을 자제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몇가지 더 반박으로 희생양이론은 공개적인 내란을 겪고 있는 나라보다 가벼운 긴장상태에 처한 국가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 실제 1815년부터 1939년까지 일어난 전쟁들이 대부분 내분으로 찢어진 국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그러나 저자도 희생양이론이 시민적 소요와 국제전쟁이 빈번하게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p.123)제 6장 : 전쟁의 경제학: 전쟁자금과 경제적 충동전쟁 사례를 살펴보면 한가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쟁의 발발 국가가 극심한 재정적 궁핍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군사적 준비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국가들인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인가?알렉 로렌스 맥피는 경제적 회복상태가 한창일 때 즉 상승곡선을 타고 올라가 번영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국가간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주장했다.(p.136) 그의 견해에 대해 저자는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맥피의 논거가 희생양이론을 반박하는데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내분으로 찢겨진 국가는 거의 전쟁을 치룰 수 없는 경제상태하에 있을 것이기에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다.제 7장 : 전쟁의 기상학: 계절과 전쟁여기에서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생각을 가져 보고 있다. 과연 전쟁은 어느 계절에 제일 많이 발발할까? 결론적으로 겨울보다는 봄여름가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저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자국의 의지를 다른 국가에 강요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며 군사력 균형에 대한 대안이라면 힘의 우위를 들 수 있겠는데 그것은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p.163)"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형식이건 국가간의 군사력이 전쟁의 억제효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세력균형 또는 분포가 아니라 힘의 분포에 관해서 국가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p.169) 이에 대한 서로 간의 착오가 판단 실수가 전쟁의 발발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전쟁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쟁적인 두 국가나 동맹체의 상대적인 힘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정확한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는 갈등관계에서 벗어나 실제로 싸워봄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술회하고 있다.(p.173) 결국 국가들간의 경쟁적 갈등관계가 상대국가에 대한 군사력 판단 착오와 지나친 낙관주의적 견해에 의해 전쟁은 발발하고 있는 것이다.제 3부 보이지 않는 전쟁의 도발자들...제 9장 : 우발적인 전쟁전쟁 사례들에 보여지는 서글픈 사실중의 하나는 많은 수의 전쟁들이 의도되었다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실들에서 비롯된 확대된 전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에 와서 더 중요시 되는데 다름아닌 핵무기에 대한 우연적 전쟁의 발발 가능성 때문이다. 현재 국가간에 이루어 지고 있는 군비경쟁은 우연적 전쟁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높은 예감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즉, 군비경쟁의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들간에는 전쟁에 대한 긴장감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모든 전쟁의 직전에는 적어도 어느 한 국가가 자국의 협상지위를 오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라면 전쟁은 오해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단정할 수 있다. 결국 결론에서 저자는 우발적인 전쟁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제 10장 : 목적과 무기전쟁이 단순히 목적들의 충돌들에 의해서 야기된다는 생각은 전쟁에 대한 본질적인 만족감을 제공한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목적정적 반응으로 전쟁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논리를 펴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은 있다. 저자가 드는 예로 일본의 진주만 습격은 어떤 면에서 볼 때 미국에게 황당한 일이 될 수 있다. 즉, 아무런 일본에 대한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일본이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끝맺음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전쟁과 평화의 직전에 어떤 행동이 정상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때까지는 어느 국가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려는 모든 시도는 적절하지 않거나 도달하기 어려운 기준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p.248) "제 4부 여러 가지 형태의 전쟁들제 12장 : 흑해의 오월동주1678년에서 1878년의 2세기 동안 러시아와 터키가 벌인 10여차례의 전쟁사를 분석하면서 왜 그리도 오래도록 전쟁이 이루어져야 했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이 되풀이 되는 근거중의 하나로 한국가가 다른 국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가? 여기에 대한 한가지 가능한 답변은 지리적인 간격때문이라 한다.제 13장 장기전전쟁이 오래될수록 군사들의 사기는 저하되기 마련이다. 뿐만아니라 경제적 지원책에 대한 고려도 심각하게 논의됨으로서 국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란 점증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부분적으로 재정적 부담으로 인한 전술의 간소화로 인해 전쟁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한 해전의 예처럼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경우 어느쪽도 성급히 전쟁을 종결지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지상전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무기와 전술에 영향을 받아 지지부진한 전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한편 많은 국가들이 참가하는 대전이 장기전이 되는 이유에 대해① 다수 국가의 참가는 군력이 균등한 경우 ② 여러 전선에서 전투가 이루어져 어느 한 전선에서의 승리만으로 전체 전쟁을 승리할 수 없으며 ③ 다수 국가의 전쟁동맹체제는 전쟁을 효율적으.
    인문/어학| 2003.06.03| 8페이지| 2,000원| 조회(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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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외교사] 남경조약과 중국의 근대화
    남경조약과 중국의 근대화-제1차 아편전쟁을 중심으로-Ⅰ. 머리말중국사의 시대구분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대립되는 가운데 그 근대사가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는 중국사 연구자에 의해 거의 이론 없이 지지를 받고 있다. 근대사의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는 1 아편전쟁의 패배와 그 후 서방 자본주의의 진출을 계기로 하여 중국의 이 때까지의 경제체제가 점차 해체되어 가고 자본주의적 발전이 완만하지만 진행되었다는 점. 2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 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여태까지와 같은 자기 완결적 세계로서 초연하게 존립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이의 없이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일환으로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위의 두가지 설명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패전을 계기로 봉건경제 의 해체가 촉진되었 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후의 중국사회에서 봉건 적 요소가 장기간에 걸쳐 잔존하여 그 완강 한 저항에 의해 근대화가 대폭 지연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광주, 상해 등 5개항의 개항과 공행제도의 폐지 등을 약속하였다. 여기부터 중화세계는 한걸음 한걸음 해체의 길을 밟기 시작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이 촉진됨과 더불어 그것과 표리의 관계에서 열강에 의한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는 것이다.여기서는 아편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인 남경조약과 전쟁 후 남겨진 문제에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Ⅱ. 아편전쟁1. 아편전쟁의 배경아편전쟁은 결국 서양열강들이 중국의 개방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불평등한 점을 개선하고자 불가항력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볼 수 있겠다.(1) 광동체제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해체시키고자 한 것이 광동체제이다. 남경조약 체결 이전에는 중국과 여러 외국과의 관계란 외교도 무역도 아니고 대체로는 조공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중화사상 혹은 천하적 세계관으로 중국은 청조부터 아편전쟁의 약 200년간, 약간의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해금정책을 취해왔다. 외국과의 상거래는 광동으로 한정되고, 관세의 징수 등을 원활히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공행은 이 업무에 따라 외국상인의 신원을 보증하고 관세수속, 출입항 사무, 상품매매에서부터 식료품·식수·연료의 구입에 이르기까지 자기 손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외국상인의 행동은 모든 면에서 엄중한 제한{) 예를 들면 夷館에 갈 때 부인을 대동하거나 중국인 용역을 고용하거나 가마를 타는 것등은 금 지되었고, 중국관료에 대해 직접 서장을 제출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모두 공행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겨울철에 광동에 체류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 어서 거래가 끝나면 마카오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 통례였다.을 받았다. 즉, 외국상인은 간접적으로는 중앙에서 파견된 월해관 감독{) 서양인은 월해관 감독의 일을 Hoppoo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戶部 를 일컸는말이다., 직접적으로는 공행의 엄중한 감시하에 행동해야 할 의무가 지워졌던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는 상호평등한 조건{) 서양에서는 이미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사이의 분쟁과 전쟁 속에서, 자연법에 입각하여 대 소 주권국가들 상호간에 질서를 부여하려 시도한 국제법이 성립되었다, 또한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법』(1625)에서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정의와 윤리를 제시하여 이미 주권평등에 관해 익숙해져있었다. 이처럼 수평적 국가관에 익숙해져있던 서양열강들에게 공행 무역이라는 조공형식의 무역은 이질적 세계관으로 충돌이 예견되어있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이 아니고 대청황제의 은혜에 의해서만이 존속될 수 있는 것, 바로 조공무역에 지나지 않았다.(2) 中·英관계의 문제점조공무역이라는 불평등한 상·하 관계말고도 영국의 문제점은 또 있었다. 영국은 인도를 경유한 영국-인도-중국의 삼각무역에 중점을 두었다.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부터 차·생사·면포 등을 수입하였지만 중국에 필적할 수출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 등의 차수요의 급증으로 영국은 극심한 편무역으로 고통을 당하였다.이같은 상황하에서 행해하에 있었다 는 것 때문에 정규적인 거래품목에 관한 한 영국측은 대폭 적자였으며 그 차액은 최 종적으로 은으로 결제해야했다는 것.2 산업혁명을 치루고 있었던 영국으로 볼 때 중국이라는 광재한 시장에의 진출은 커 다란 매력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동체제의 폐쇄성을 타파할 필요가 있었 다는 점.3 차무역에서 배제당한 지방무역상인 및 중국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본국 산업자본가 는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독점권 폐지를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 영국은 여러차례 대 표를 보내어 개선을 요구했으나, 청국은 현행 무역 의 형태, 즉 광동체제의 변경의 필 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섭 그 자체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영국은 편무역에서 오는 무역의 차액을 아편밀수로 대처하게 된다.(3) 아편밀수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의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 특히, 그들이 전매제도 아래에서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하여 모험적인 민간상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 아편의 수입량은 1800년대 초기 20년간은 연평균 4천상자가 밀수되었다. 그러나 1830년대에는 2만상자, 1838년에는 3만5천상자로 급증하였고 다시 1842∼1854년에는 53,500상자, 1855∼1859 년에는 48,500상자로 늘고 있다. 1850년대 중반의 경우 아편값은 연간 4∼5백만파운드에서 6∼7백만파운드의 금액에 해당된다. 이는 영국 공산품 수출액이 1∼2백만 파운드에 불과한 것 과 비교할 때 정상무역의 4배에 해당되는 액수이다. 때문에 영국은 아편무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국은 은의 유출로 은의 등가현상현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모두 아편에 중독 되어 그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 1830년대가 되자 종전까지의 入超에서 중국측의 은이 出超로 바뀌게 되어, 중국의 은가가 騰貴하기 시작하였다. 本位화폐인 은화의 등귀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관청, 특히 군대 안의 아편 중독환자의 격증은 전제왕조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황제(道光帝)는 유명무실하게 된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실행하기 위하여, 강경한 아편금지론자로 알려진 林則徐를 흠차(欽差:全權)대신으로서 광저우에 파견하여 밀수를 근절하고자 하였다.임칙서가 무력의 위협을 포함한 강경수단으로써 영국상인으로부터 아편을 몰수한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정부가 내외의 격렬한 비난을 무릅쓰고 굳이 아편문제로 개전(開戰)하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아편의 전매수입이 인도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듯이 아편무역이 영국의 당시의 인도 지배에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 한걸음 더 나아가 아편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얻어진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 ·호주 ·중국 ·인도를 연결하여 시행된 세계 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것 등이다. 즉, 아편무역 자체를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825년의 첫번째 공황 이래로 절실히 요구된 중국시장의 개방, 즉 연안 諸港의 개항과 무역에 대한 중국측의 여러 제한의 철폐, 유리한 무역 제(諸)조건과 무역상 ·군사상의 근거지 획득 등의 요구를 일괄하여 실현할 것을 목표로 했다.2. 아편전쟁의 경과1840년 여름 함선 48척과 병력 4,000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북상하여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다구(大沽) ·천진을 위협하자,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인 임칙서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면직시키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화평을 위한 초안이 쌍방에게 불만이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해 증원부대 1만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남경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하여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입장이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규군의 군규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그 직전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남경조약을 체결하였다(1842.8). 그러나 그 동안 광저우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격분한 농민 수만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이 자발적으로 침략 반대투쟁에 봉기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광동에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영국인의 입성을 거부하려는 배외투쟁이 계속되었다.Ⅲ. 남경조약과 중국의 근대1. 남경조약과 그 영향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號)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와 영국 전권대사 H.포틴저(1789~1856)가 조인하였다. 13조로 되어 있고, 1843년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2 광저우[廣州] ·샤먼[廈門:Amoy]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 항(港)을 개항한다.3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4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 러를 영국에 지불한다.5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6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7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등이었다.영국은 이 조약을 더욱 구체화하여 1843년 7월, 5항 통상장정을, 10월에 호문채 추가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및 개항장에 있어서의 조계설치 ·최혜국대우·조관(條款) 등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이들의 조약을 기본으로 하여 1844년에는 미국이 청나라와 망하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도 청나라와 황포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똑같은 여러 특권을 획득하였다. 남경조약을 비롯하여 이에 이어지는 그 뒤의 여러 조약은 근대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부담하게 된 불평등조약의 단서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정치 ·문화 ·영토면에서의 중국 침략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유럽 및 일본 등 자본
    인문/어학| 2002.12.17| 5페이지| 2,000원| 조회(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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