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산탈춤 유래봉산탈춤은 황해도에 분포된 가면극 중의 하나이다. 황해도 가면극의 분포를 보면, 사리원과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지대인 안악·재령·신천·장연·송화·은율 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지대인 기린·신원·서흥·평산·신막 등지의 탈춤과, 해안지대로는 해주·강령·옹진·송림·추화·금산·연백 등지의 탈춤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하여 1년은 한 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포로 보아 해서탈춤은 거의 황해도 전역에서 놀던 탈춤이다. 그 중에서 봉산탈춤이 대표격이 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조선의 민속놀이》에서는 "황해도 탈놀이는 지방적 전승이 오래이며 내용에 있어서 계급성, 인민성이 풍부한 것으로 특이하다. 그리하여 황해도 탈놀이는 우리나라 탈놀이의 전통과 그 인민적 풍모를 찾는데 있어서 귀중한 유산으로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 황해도의 가면극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봉산탈춤의 전승지는 황해도의 봉산 구읍으로서, 행정구역으로는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 해당한다.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진 후로는 경암산 아래에서 놀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봉산군 가창동에는 음악을 세업(世業)으로 삼아 온 우수한 잡이 일단이 대를 이어 살아왔는데, 1960년대까지 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은 와 유사성을 지닌 점으로 보아, 산대놀이의 한 분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산대놀이가 비교적 직업화된 놀이로서 관청의 행사와 많이 관련된 것에 비하면, 은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다. 그러나 역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고 한다. 다른 군과의 연희 경연에는 5월 6~8일에 해주감영에 나가서 놀았고,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은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옷날 밤 모닥불을 피계와 일반 미풍의 퇴폐됨을 예방하려고 이 탈놀이를 안출한 것이다. - 오청 채록본, 의 중흥자로는 약 200년전의 봉산의 이속(吏屬) 안초목을 일러온다. 그가 전남의 어느 섬에 유배되었다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는데,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이 놀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에는 없고 에는 들어있는 사자춤 과장도 약 90여년전에 새로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은 18세기 중엽 이후에 현재와 같은 모습의 향토성 짙은 가면극으로 성립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조선민속탈놀이연구》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래로 이 황해도 가면극의 최고봉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이성구·이장산 부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성구는 봉산 관아에서 '집사'라는 하급 관속을 지낸 사람인데, 일찌기 탈놀이에 종사하여 첫목춤의 명인으로 알려졌으며, 전체 연기를 감독 연출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봉산에는 이성구보다 나이가 30~40년 선배로서 취발이춤으로 유명한 배한량, 노승춤으로 유명한 이춘강 등 뛰어난 탈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후 사리원에 남은 의 전승자들은 대부분 이성구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의 아들 이장산은 해방 후 당의 배려아래 이동벽·박성찬 등과 더불어 '봉산탈 연구소'를 조직하여 옛모습 그래로 을 공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54년 황해도 예술단이 을 공연하고, 1955년에는 김일성의 교시에 의하여 을 기록영화로 찍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지에서의 은 점차 전승이 단절된 듯 싶다. 남한에서는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하여 이 복원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되었다.2. 특 징황해도 탈춤은 그 탈, 의상, 춤, 대사 등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서흥·봉산·황주·재령·신천 및 안악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옹진·강령· 및 해주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해주 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연출 형식도 양주 별산대놀이와까치걸음, 팔목중의 뭇동춤 등의 사위 명칭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의상은 김진옥이 어렸을 때는 자주 무당의 옷을 징발하여 썼다고 하며, 그러한 연유에선지 목중의 원색 더거리(더그레)같은 것은 몹시 화려하다. 팔목중은 원래 장삼 위에 더거리를 입으며, 더거리는 붉은 원동에 초록색 소매를 달고, 소매 끝에 각기 청황남색 등의 끝동을 달았으며, 긴 한삼을 손목에 달고 그것을 휘드르면서 춤을 추어, 고구려 무복 유고(儒袴)의 전통을 생각케 한다. 그리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이에 비해 해주 탈춤은 주로 회색 칠베장삼을 공통으로 입으며, 그 소매 홍태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봉산 탈춤의 내용은 양주별산대놀이와 비슷하며,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과장은 사상좌춤, 제2과장은 팔목중춤(제1경 목중춤, 제2경 법고놀이),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이다. 이중에서 팔목중·사당춤·사자춤 과장이 양주 별산대놀이와 다르나, 김진옥의 증언에 의하면 양주 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제2팔목중춤 과장에 '법고놀이'가 있었고, 제6양반춤 과장에 포도부장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하니 동일한 산대도감 계통의 탈춤에서의 분파임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그것도 그 지방 이속들이었으므로 사회적으로 그리 천시되지 않았고, 그 연기가 세습되어 왔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 기생조합이 생긴 후로 남자 대신 기생들이 상좌와 소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사리원으로 옮겨오기 전에 봉산 탈춤을 놀았던 경수대는 앞산 밑 강변의 평평한 터로 석벽 밑에 겨우 무릎이 닿을 높이의 돌축대를 쌓은 것이며, 그 나지막한 축대 위에서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놀았다. 반면 사리원의 가설무대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의 다락을 세우고, 그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이 28개 다락 중 탈판 오른쪽 제3의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가면은 종이탈이며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상좌(4), 목중(8), 거사(6, 목중탈을 겸용), 사당(소무탈 겸용), 노장, 소무,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맏양반(샌님), 둘째양반(서방님), 셋째양반(종가집 도련님) 말뚝이, 영감, 미얄, 덜머리집, 남강노인, 무당(소무탈 겸용), 사자로 모두 34역이나 겸용이 많아 가면은 26개가 사용된다.3. 봉산탈춤 연희내용1) 사상좌춤 제1과장탈 / 흰 바탕에 흑색으로 눈썹과 눈의 선을 그렸고 흑색 탈보를 달았다.의상 / 노란 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고 흰 장삼을 입는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머리에는 흰 고깔을 쓴다. 한삼은 하지 않는다.상좌 넷이 등장하여 염불도드리, 느린 타령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춤사위는 느린 사위에서 빠른 사위로 옮아가며 춤춘다. 상좌들은 취발이의 하수인으로서, 노장을 파계시키기 위한 취발이의 술책에 이용된다. 이 과장은 사방신(四方神)에 대한 배례의 의식무적 성격으로 보고있다. 즉 신(神)의 내림을 인도하고 탈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이 고루 나누어지게 비는 것이며 또한 연희자들의 탈들이 사람들에 쓰인 탈(병)을 벗겨주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라고도 한다.2) 팔먹중춤 제2과장탈 / 종이탈이며 바탕은 모두 붉은 색이고 볼록진 혹에는 노란색 금종이를 오려 붙이고, 눈자위는 흰색에 흑색 테두리를 두른다. 검은 탈보를 달았으며 탈위에는 머리처럼 오색의 색종이로 장식 한다.의상 / 소매끝 부분이 색동으로 된 붉은색, 녹색 더거리에 흰광목 바지를 입고, 다리에는 행전을 매 고 짚신을 신는다. 허리에는 보색으로 된 넓은 띠를 매고 팔에는 한삼을 단다.본시 한량인 먹중들이 술에 취한 채 풍악소리에 못이겨 춤을 추는 장면이다. 첫째먹중은 등에 녹음을 꽂았다. 두팔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 들어와 엎드린다. 느린타령곡으로 서서히 움직이다 양옆을 살피는 형식으로 춤을 춘다. 대사는 없고 노장이 속세에 내려와 풍악소리가 들리자 먹중에게 나가서 누가 있는지 살펴보라하여 수풀속에 숨어서 살펴보는 춤 집단무(群舞)양상을 볼 수 있다.사당춤이 놀이 전체에서 특별하게 한 과장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나타난다. 또한 다른 탈춤에는 없는 이 사당춤이 들어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사당패가 탈춤패와는 다른 조직형태로서 독립적으로 유랑하는 집단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 이 과장은 조선후기에 사당패가 몰락해가는 시기에 별도로 삽입된 과장이 아닌가 추측하게 한다.1930년 당시는 황해도 기생조합에서 여러명의 여기(女妓)들이 나와서 노래를 했다고 한다. 결국 이 과장은 막간에 흥을 돋우기도 하고 구성상의 새로운 변화를 주어 볼거리가 되는 과장으로 여겨진다.4) 노장춤 제4과장탈 / 노장 : 흑색바탕에 흰색 눈썹과 눈 주위와 턱 주위에는 흰색 점들을 찍는다.소무 : 각시탈로 흰색 바탕에 연지곤지를 찍는다.취발이 : 얼굴이 길고 크며 붉은색 바탕이다. 미간에는 긴 혹이 일곱개씩 양쪽으로 나 있고 혹마다 금종이를 붙인다. 이마에는 소꼬리를 늘어뜨려 총각 행세를 한다.의상 / 노장 : 송낙을 머리에 쓰고 먹장삼을 입는다. 붉은 가사를 메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었으며 긴 육환장에 안에는 주머니를 차고 오른손엔 흰 부채를 들었다.소무 : 큰 비녀와 원삼쪽두리를 쓰고 붉은 치마에 긴 한삼을 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다.취발이 : 먹중의상에 왕방울을 무릎에 달고 긴 천으로 허리와 무릎을 연결해서 묶는다. 한삼 은 팔에 둘둘 말아 끼고 양손에 녹음을 들었으며 엽전을 허리에 찼다.이 과장은 먹중들이 오랫동안 깊은 산속에서 수도하여 불도를 닦던 스승인 노장을 놀리는 과장과 노장이 젊고 아름다운 소무의 유혹에 의해 파계하는 무언극으로 구성되어 있다.장구장단이 시작되면 하려한 복장의 소무가 네명의 거사와 청사초롱을 받쳐든 두명의 거사들에게 호의를 받으려 가마를 타고 등장한다. 장내를 돈뒤에 중앙에 안치하면 소무는 내려서고 거사들은 가마를 들고 퇴장한다. 소무는 서서히 도드리곡에 맞추어 춤춘다. 이때 노장이 네명의 먹중에 의하여 긴 육환장을 어깨에 메고 등장한다. 느린타령곡에 맞추어 먹중들은 길꼬나기 타
국어국문 9921145 권은경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 rung)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변증법'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또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실제로 '변증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면, 무언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태에 대해 곧잘 '변증법적으로' 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보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할 것을 더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 rung)이란 책을 읽어 보면 '변증법'이라는 단어의 개념이나 설명이 아닌 이론적 변화가 뚜렷하게 제시된 작품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진보」와「발전」,「이성」과 「실천」- 이 용어들은 근대 이후 인간의 삶과 사유에 필수적 전제를 이루어왔던 개념들이다. 이 책의 이론에 의하면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붕괴하려 한다고 하였다. 학문과 전쟁과 무역에 있어서 변화를 초래 하였고, 그러므로 인간의 우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식」에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책에는 개념이라든지 공식이라든지 또 힘이라든가 자본, 사실등 인간의 본질과 연결하는 사유들이 설명되어 온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인간의 또 모든 물질은 이것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있다거나 그 안에는 은페된 자질이 있다는 환상이 없이 지배되어야만 한다고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간섭이 없었다면 계몽은 끊임없이 발전하였고, 인간권리에 대한 관념도 보편개념과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계몽이 「신화」속에서조차 자기 자신을 재안하는데 있다. 계몽에 대한 저항이 어떤 신화에 의지하든 그 신화가 저항을 위해서는 자신의 논거를 주장하려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해제적인 합리성이라고 계몽을 비난하는 신화는 자신도 동일한 원리를 지니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계몽이란게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모두 의심스런 것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은 야만상태로 회귀하게 되며 진보가 퇴보로 전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는 테크놀로지를 신격화함으로써 모든 자연적인 것을 오만한 인간 밑에 굴복시켜 맹목적 객관성의 지배아래 두었다.나아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계몽은 사회에 대한 전체주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했다. 이 책은 오늘날 이성과 계몽 그 자체에서 인류의 세기말적 위기를 찾고자하는 다양한 형태의 위기이론들에 그 원형을 제공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러하듯 오늘날 퇴보 현상의 뿌리를 이성에서 찾는한 이성에 대한 단죄는 불가피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비합리.비이성에 의한 야만과 무지가 지배하는 인류에 이성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전근대적 광폭과탐욕을 부추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이성의 자율에 대한 의심은 마침내 호르크하이머로 하여금 지배와 복종의 관점으로 인류사를 보게 했으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전개되었던 철학적 논구는 인간과 자연을 테마로 삼는 것으로 확대되었다.그런 이유로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계몽의 범형을 보인 것으로 전제되었던 오딧세이의 신화로 부터 칸트, 헤겔에 이르기 까지, 더 나아가 반계몽적 철학을 주장했던 니이체까지를 포함한 전 서양철학사의 의미를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원초적 인간모습' 내지는 '계몽적 교만'을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맹목적 자기보존의 퇴행'으로 격하시켰다. 다시 말하자면, 호르크하이머의 초기 사상에 있어 '이성을 세계에 실현할 수 있다'라는 낙관적 믿음을 기쳬揀 급진적이고 치열한 이론작업은 이 시기에 들어서 '계몽의 자기파괴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에 있어서 `인간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는 무력함의 관조로만 나타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초월적 명상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이 책에서 호르크하이머는 루소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올 위험한 시대 원리"라고 이미 두세기 전에 적절하게 경고했던 계몽주의에 대해 "그 자기파괴적 본성"을 비판하고, 계몽과 이성이 왜 "인간을 필연적으로 신화적인 야만에로 퇴행시키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알고 있듯이, 계몽이 결국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계몽의 선봉'에 서서 '하지만 계몽은 이 시대의 지배원리이며, 이 시대의 인간지식의 최선의 양식'이라고 '계몽의 전매업자'를 자처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왜 인간이 진정한 인간적 상황에 놓여 있지 아니하고, 새로운 야만적 상황으로 빠져드는가를 해명하고자 『계몽의 변증법』을 출발한다. 이 과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라, 기존의 비판이론의 연속이다. 호르크하이머의 '전통적'이라는 말은 '그리이스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비판이론은 불변의 사물의 불변하는 본질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행위의 변화하는 영역에 관심을 갖는다. 『계몽의 변증법』은 특히 과학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과학의 자율성은 틀린 것이기 때문이란다. 과학의 자율성은 왜 틀린 것인가? 왜냐하면 인과율을 의미하는 과학은 이미 그자체의 논리적 구조에 따라 기술적으로 가치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의 계몽비판은 전통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고전작가론 199921145 국어국문 권은경三恨의 불행한 女人- 許蘭雪軒1. 들어가며조선조의 여성들은 오백년동안 유교적 봉건체제와 男女七歲不同席(남녀칠세부동석) 이라는 제도 아래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휘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男尊女卑思想) 남성의 권리나 지위 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어 존중하고 여성을 천시하는 사상 및 태도.(남존여비사상)은 女必從夫)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여필종부)라든가 三從之道) 여자는 시집가기 전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야 하고,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의 의사와 처리에 순종해야 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뜻.(삼종지도)라는 엄격한 사회규범을 제도화하게끔 만들었고, 오로지 여성은 집안일에 대하여만 논의하도록 만들었다. 여자의 존재는 남자의 생활을 위해서만 필요하였고, 따라서 여자들에겐 글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으며, 글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시를 함부로 창작할 수도 없었으며, 발표는 물론 불가능 하였다. 선비집안에서 태어난 난설헌 역시 소위 肩外見學(견외견학)이라고 하여 어깨 너머로 보고 듣고하여 얻은 지식 뿐이었다. 난설헌이 창작생활을 했던 당시의 상황은 현대여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암흑이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시대에 살면서 떳떳하게 이름(楚姬)과 자(景樊), 그리고 호(蘭雪軒)까지 지니고 살았던 여자가 바로 허초희이다.그녀는 이 땅 위에서 겨우 스물 일곱해를 살다 갔지만 그 짧은 세월 속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여자로서, 그리고 시인이로서의 삶을 살다가 갔다. 지금부터는 그녀의 삶의 모습과 문학작품을 통해 그녀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다.2. 가족관계 및 생애난설헌(1563∼1589)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발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조선 중기로서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四大士禍(4대사화)와 勳舊(훈구)·士林(사림)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성)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荷谷(하곡) (봉)과 蛟山(교산) 筠(균)의 2남 1녀를 두었다. 큰 오라버니 岳麓(악록) 筬(성)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낸데다, 작은 오라버니 荷谷(하곡) (봉)은 홍문관의 전한을 지냈는데 학문과 권력으로 조정을 지배하던 이율곡을 탄핵하다가 귀향 갈 정도로 강직한 지사였다. 예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까지 올랐던 蛟山(교산) 筠 (균)은《홍길동전》을 비롯, 많은 소설과 시·논설을 발표한 당시의 풍운아였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4남매와 부친 허엽까지 아울러 양천 五文章家(오문장가)라고 칭송한다.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筠(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에서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난설헌은 특히 太平廣記) 중국 송(宋)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 신선, 도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옴.(태평광기) 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廣寒殿白玉樓上樑文)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月(달)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는 이 글을 읽고 "이 문장을 읽으니 흡사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절찬하기도 했다.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西堂(서당) 金誠立(김성립)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文理(문리)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 즉,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具樹勳(구수훈)의《二旬錄(이순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夢遊記 (몽유기)를 지었 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다비)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3. 난설헌 시의 영향난설헌의 시들을 살펴보면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곡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오빠인 동시에 글과 삶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 李達(이달)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난설헌이 글을 배우는 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오빠 하곡과 스승 蓀谷( 손곡)이라 할 수 있다. 난설헌은 손곡에게서 시를 배우는 동안 그의 사람됨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난설헌은 곱게 ,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오직 정을 붙이고 살던 자식들 마저 일찍 죽어 버리게 된다. 친정에서 자라던 시절과는 달리 너무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그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남편이라는 김성립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난설헌이 품은 세가지 恨(한)이었다.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왜 朝鮮(조선)에 태어났을까?"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세째, "수많은 남자 중에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첫째와 둘째의 불만은 난설헌의 선천적인 재능에서 오는 필연적인 불만이다. 유교사상에 찌든 사회, 男尊女卑(남존여비)를 숭상하여 아무리 글재주가 뛰어났더라도 여자이고 보면 사회진출이 막히고 홀로 시들어 버려야 하는 사회, 七去之惡) ① 不順舅姑(불순구고) : 시아버지(舅)와 시어머니(姑)에게 순종하지 않음. ② 無子(무자) : 자 식(아들)이 없음. ③ 淫行(음행) : 음란한 행동. ④ 嫉妬(질투) : 남을 시기함. ⑤ 惡疾(악질) : 극심한 병이 있음. ⑥ 口舌(구설) : 말이 많음. ⑦ 盜竊(도절) : 도둑질함.(칠거지악)이란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이 남자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느낀 것이었다. 이러한 난설헌의 세가지 恨(한)은 그녀의 시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지금부터는 그녀의 시를 살펴보도록 한다.5. 난설헌의 시 세계첫번째 恨(한)에서 보여진 바와 마찬가지로 朝鮮人(조선인)이라는 것을 그녀는 사회제도의 비판의식과 맞물려 시에서 표현하게 된다. 조선조의 철저한 신분제도의 불합리 속에서 피지배계급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 표현하며, 아울러 제도적 특혜 속에 안주하면서 피지배계급의 희생 위세서 군립하고 있는 지배계층을 질타하기도 하였다.난설헌의 대표적인 詩(시)인 을 보면 당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던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한 시인의 정서가 깃든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豈 乏容色(기 핍용색)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리오.工鍼復工織(공침설정했음은 집안에서 베틀이나 만지면서 담 밖에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를 모르고 사는 조선조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난설헌은 가난하게 자란적이 없었으면서도 가난한 처녀의 노래를 지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없심여김 받듯이, 난설헌의 경우에는 才勝薄德) 재주는 있으나 덕이없음.(재승박덕), 美人薄明) 미인은 흔히 불행하거나 병약하여 요절하는 일이 많다는 말.(미인박명)이란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행해야만 했다. 그녀가 16세기 조선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너무나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문장가로 이름난 집안에서 자랐기에 봉건사회와는 적응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녀는 이런 불행한 조선조 여인의 모습을 나타낸 시들을 그리게 된다.두번째 여자로서의 恨(한)은 그녀의 작품 중 여인으로서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살고자하는 포부와 여인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고통등을 을은 것이 이에 속한다 하겠다. 난설헌은 행복한 여인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그녀의 고독과 외로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그녀의 피눈물 나는 슬픔은 라는 시 속에 고여있다. 곧 여자로 태어난 난설헌의 두번째 恨(한)이 묻어있는 것이다.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강릉의 땅이여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불고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솔숲에선 두깨비불 반짝이는데,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노라.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생전처럼 밤마다 즐겁게 놀고 있겠지.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靑丘永言150∼300수 중 '술'이 나타내는 의미분석1) 들어가며김천택에 의해 (1728)이 편찬된 이래, 지속적으로 많은 가집) 정병욱은 전래 시조집의 전승 체계를 → 계열→→ 계열로 이어졌다는 결론을 도출 하였다.들이 편찬되었고, 이것은 조선 후기 문학사의 중요한 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은 현전 최고의 가집으로서, 그것의 체제나 성격 그리고 가집의 유통 등 제반 측면에서 조선 후기 시조문학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 시조의 시대에 따른 흐름을 살펴보자면 조선 전기에는 약간의 당쟁사화는 있었으나 그래도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가 전개되어 시조에 있어서도 안정과 화평을 노래하는 시인이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필두도 계속되는 혼란과 난정으로 극도로 어수선한 사회상을 맞이하여, 시조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 하였다. 전란에 시달리고 난정에 환멸을 느낀 시인들은 저마다 세태를 어둡게 그려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시조는 대부분 은거하는 시인정신을 노래하거나 아니면 정사에 초연한 전원 생활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두운 사회상을 겪으면서 시인들은 초야에 묻혀 인생을 고고하게 살아가려는 신비정신을 일깨우고 있었고, 작품에 있어서도 이러한 심리 표출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황국산 편저, 「고시조 해설 감상」, 태을출판사, 2000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조문학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 했는데 이 때에 가장 큰 특징은 상류 양반 위주의 시조문학에서 중인 중심의 시조문학으로 전환되기 시작 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에 수록된 작품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수록된 일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18세기 전반 시조문학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측면이 고려 되었다.지금 부터는 이 시조들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다. 여기서는 술에서 나타나는 풍류의식, 앞서 설명한 것처럼 어두운 사회를 잊기 위해 나타나는 술의 모습, 또 벗과의 우정이 보이는 술의 3가지 모습을 통해 '술부분도 모두 풍류객들이었다. 이런 풍류의식이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작품을 이해해 보도록 한다.①원문 : 술힝야 니러안자 거믄고를 戱弄힝니) 戱弄(희롱)힝니 ∼ 장난삼아 놀리니. 뜯으니. 튕기니窓 밧긔 셧다鶴이 즐겨셔녕 다다다아 아희야 나믄 술 부어라 興이다시 오노밑라) 興(학)이 다시 오노밑라 ∼ 흥이 다시 온다. 흥이 절로 난다.【청진 , 逸老堂) 金盛最(1645∼1713) 李朝때 文臣으로 그는 1666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를 비롯하여 내외직을 고루 역임하였다. 죽을 때까지 관직을 역임했지만, 끊임없는 사직소를 올려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관직을 버리고 은거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자 했던 그의 태도를 시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207】해석 : 취한 술에 깨어서 일어나 거문고를 장난 삼아 이리 튀기고 저리 튀기고 놀고있노라니 밖에 서있던 학이 즐거워하며 움직이는 구나. 아이야 먹다 남은술을 잔에 가득 부어라. 흥이 또 다시 절로 나는 구나.에 김성최의 작품은 모두 3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풍류를 즐겼던 그의 기질을 반영하듯 도도한 흥취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김용찬, 「18세기의 시조문학과 예술사적 위상」, 월인, 1999거문고와 술이 곁들어진 자리에서 도도한 흥취를 맘껏 발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술과 음악이 마련된 자리에서 풍유를 즐기며 '興'을 느끼는 화자의 모습에서 호기로움까지 읽을 수 있다. 鶴은 거문고를 연주할 때 가장 이상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대상으로 흔히 등장한다. 거문고를 연주하자 鶴이 찾아와 '넘노는' 풍경은 풍류의 이상적인 양상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몸담고 잇는 현실세계와의 갈등이나 고민등이 읽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 나타난 분위기는 그와 함께 풍류를 즐겼던 동무들과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②원문 : 生前에 富貴키는)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됨음.一杯酒 만한 것 업고 死後) 死後(사후) 風流(풍류) ∼ 죽은 뒤의 운치스러움. 멋있는 무덤의하고 있다. 거의 평생을 여항에서 가객으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로 에서 자신의 시조를 "閭巷六人"이라는 항목에 넣은것을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그당시 팽배해 있던 實學의 영향을 받아 시조집 찬집에 선각자적인 역활을 하여 최초의 시조집 진본 을 편찬하였다. 작품의 내용은 산수자연을 읊은 것이 가장 많고, 교훈적인것, 체념과 歎世的인 것이 많아서 사대부 시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다., 266】해석 : 사람이 살아 생전에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됨은 한잔의 술 만한 것이 못되고 죽어 진 뒤에 운치가 있는 무덤의 치장은 밭둑 위에 피어 있는 한떨기 꽃일 뿐이로다. 아마도 먹고 노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인가 하노라.김천택의 작품세계에서는 다른 여하의 작가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세계에 일찍 체념하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것에 비해, 끊임없이 현실세계의 문제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김천택이 나름대로의 현실적 대안으로 찾은 것이 '술'이었다.) '여항육인'의 다른 작가와는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술'을 주제로 하고 있는 작품이 30수 중 무 려 7수나 차지하고 있다.이 시에서 화자는 돈과 명예는 한잔의 술만도 못하다 하였다. 사회적으로 한미한 처지였던 김천택과 같은 여항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돈과 명예라는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얘기 같았을 것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인 것을 욕심은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여기서도 역시 어떠한 대처방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지금 처한 처지를 술로 풀어가려는 풍류의 모습이 보여진다고 할 수 있겠다.③원문 : 金樽) 金樽(금준) ∼ 금술통. 화려한 술통. 좋은 술통에 까득한 술을 슬커장) 실컷의 옛말.거후로고 醉한 後 긴 노래에 즐거오미그지업다 아희야 夕陽이 진타 마라 딪이 도다 오노매) 돋아 오는 구나의 옛말.【청진, 東冥) 鄭斗卿(1597∼1673) 李朝때 文臣이며 學者이다. 孝宗 1年에 敎理에 있으면서 諷刺詩 20편을 撰進하여 虎皮를 하사 받았고, 돋아 오르니여기서도 화자의 풍류의식이 짙게 나타나고 있는데,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노래를 부른다기 보다 현재 자신이 처한 그 상황만 바라보고 위의 모습처럼 어떠한 근심이나 걱정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것들이 풍류객의 본 모습이긴 하겠지만 너무나 태평한 화자의 모습에서 본 모습에 의심이 가기도 한다. 대취한 후 노래를 부르니 그 즐거움을 누가 따라 갈소냐? 풍유객 에게 내일의 걱정이란 없다. 오늘 해가 진다고 해도 그들에겐 똑같이 다가 올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3) 우정과 함께 나타나는 술의 모습인생을 살아가면 누구에게나 근심 걱정거리가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런 근심 걱정거리를 함께 풀어갈 따뜻한 벗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벗과 함께 술 한잔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옛 선조들의 모습도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 따뜻하게 벗을 맞아주는 모습은 너무나 정답기만 하다. 아래의 시조에서는 그러한 선조들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술과 함께 얘기되는 우정의 모습을 살펴 보도록 하자.①원문 : 거문고 줄 힝자 노코 호졌) 호졌이 ∼ 흩어져서. 아무렇게나 누워서.이 낫짜 든졔 柴扉犬吠聲) 柴扉犬吠聲(시비견폐성) ∼ 사립문에서 나는 개짓는 소리에 반가운벗 오도괴야 아힝야 點心도 힝려니와 자 濁酒 내여라 【청진, 石郊) 金昌業(1658∼1721) 李朝때의 畵家. 시문과 그림에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領議政이던 金壽恒의 제 四子였으나 벼슬을 싫어하여 田園生活을 즐기었다.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어 퉁소·거문고를 즐기였다고 한다. 西湖에 은거하면서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렸던 金聖器가 그와 어울려 한바탕 흥취를 즐겼던 사실은 당대의 가창인들에게 비쳐줬던 풍유인으로서의 모습을 설명 해 준다. 父親의 燕京使行을 따라갔다 와서 燕京錄을 지었으며 그밖에 時調 3首가 傳하고 있다., 209】해석 : 거문고에 줄을 꽂아 놓고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낮잠을 자는데 사립문에서 나는개 짓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서 나가 보니 반가운 벗이 오는 구나. 아이평소 생활이 풍류와 밀접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나, 또 어찌본다면 갑자기 찾아온 반가운 벗을 맞아 점심과 탁주를 차려 맞이한다는 것은 그의 넉넉한 됨됨이와 풍요로움까지 느낄 수 있는 시조라 하겠다. 이 시조의 전반적 성격은 풍류의 모습을 띄고 있기는 하나 내적인 의미는 풍류보다는 반가운 벗을 따뜻이 맞이하는 그의 성품을 가름케 하는 시조가 아닌가 싶다. '아이야'라는 표현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따뜻함이 느껴진다.②원문 : 좌내 집의 술 닉거든 부듸 날 부르시소 내집의 곳 픗여든) 곳 픗여든 ∼ 꽃이 피거든의 옛말나도좌내링 請힝옴서 百年힝 시링 니즐 일을 議論코져 힝노라 【청진, 潛谷) 金堉(1580∼1685) 李朝 中期때의 문신으로 실학적 성향을 지니고 제도 개혁을 추진한 정치가 이다. 인조반정이 실현되기까지 10년 동안 그는 홀로 학문을 닦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상 할 만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 농간과 행패를 막을려고 貢物法을 페지하고, 大同法을 실행 하였다., 208】해석 : 자네 집에 담근 술이 익거든 부디 나를 부르시게. 우리집 초당에 꽃피거든 나도 자네를 초대하겠네.(=그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세)우리 백년 동안 근심없이 살아갈 일을 서로 의논하세 그려.초야에 몸을 묻고 번거러운 바깥 세상을 잊고 살되 뜻을 같이하는 친구 혹은 이웃이 함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여생을 즐길 수 있는 행복한 삶일 것이다. 이 시조는 친구와 혹은 이웃의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시조이다. 우정도 이웃도 오래 되면 오래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잘익은 술과 같다. 여기서 시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당시 병자호란 이라는 조선의 어두웠던 상황을 얘기 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김육은 冬至使로 중국에 가있던 중 고국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三田渡에서 굴욕정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침식을 잊고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義人이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이 시를 지
국어국문 9921145 권은경이광수의 소설 "무정"1. 작품의 줄거리경성학교 영어 교사인 형식은 김 장로의 부탁을 받고 그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선형은 정신 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는 지식인 여성이다. 선형을 처음 대한 형식은 그 고운 자태에 호감을 느낀다. 그날 형식의 하숙집에서는 박영채라는 기생이 형식을 찾아 온다. 영채는 형식을 길러준 은인의 딸이다. 부친과 두 오라비가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 뒤 외가에 가서 갖은 고생 끝에 자기 아버지를 구하고자 기생이 되고 말았다. 그런 고생을 겪으며 그는 형식이를 마음 한 가운데 두고 정절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형식의 앞에서 자기가 기생이 되었노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되돌아 간다. 형식은 한편으로 영채의 순결을 의심하며 불괘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달콤한 그리움을 느낀다.그러던 중 형식은 경성 학교 학감 배명식의 추문을 듣는다. 평양에서 온 기생 계월향의 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거였다. 그는 영채가 계월향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가 다시 영채를 만나려고 찾아갔을 때 영채는 배학감과 김현수에게 이끌려 다른 곳에 가고 없었다. 형식은 신문기자인 신우선의 도움을 받아 이들의 행방을 찾아냈으나 영채는 순결을 잃은 뒤였다. 영채는 형식을 위해 지켜온 자신의 정절을 빼앗긴 것이 수치스러워 죽으려고 평양으로 향하고,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형식은 영채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영채를 찾지 못하고,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되돌아온다. 한편 영채는 병욱이라는 처녀를 만나 인생을 새롭게 살기로 결심하고, 병욱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병욱의 오빠에게 연정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한다. 서울로 돌아온 형식은 선형 집안의 청혼을 받게 되고 마음 한편으로 영채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형식과 선형이 미국 유학을 위해 경성역에서 기차에 오르던 날, 영채와 병욱 역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같은 기차를 타게 된다. 그들은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나게 된다. 지난 날들을 돌이키며 이들 사이에는 부끄러움과 미움, 질투와 원망이 오고간다. 그러던 중 폭우를 만나 기차가 멈춘 틈에 수해를 당한 농민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면서 이들은 조선의 민중을 구하기 위해 배우고 또 교육에 몸바치기로 작정한다.2. 무정의 인물과 시대상에 대해서무정을 읽으며 우리 인물 속에 크게 자리잡는 인물은 크게 세 명이다.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이형식과 영채, 그리고 선형이다. 이 셋은 이 소설의 줄거리를 엮어나가며 그 시대의 의미를 읽게 해 주는 인물들이다. 이중 첫째인물인 이형식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변덕 무쌍한 사람이다. 영채와 선형에 대한 감정도 그러하고, 여성에 대한 생각도 그러하다.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두 여자 사이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굴리고, 이랬다 저랬다 할 때의 형식은 줏대없는 남자 같지만 선형과 결혼하여 선형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할 때는 여성주의자 같기도 하다. 또 형식은 훌륭한 교육자로 민족의 장래에 큰 몫을 할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교사이기도 하며, 민족의 장래를 깊이 걱정하는 선각자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형식의 모습에서 바로 그 시대상을 바라본다. 형식은 이전의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얽혀 있는,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그 시대상 바로 그것이었다. 형식은 고스란히 그것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또 두 여주인공 영채와 선형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채가 가진 사고방식 역시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기생이 된 것이며, 아버지의 '너는 형식의 색시 되어라'는 한 마디에 형식을 마음 한 가운데 두고 절개를 지켜간다. 영채는 바로 '과거의 여인'인 것이다. '과거'라 할 수 있는 영채에 비해 '새로운 시대의 여성'이라할 선형의 모습은 생동감이 없다. 신식 교육을 받았으나 그는 진취적인 사고나 행동은 없다. 자기 배우자에 대해 막연한 꿈을 꾸고, 부모가 권하는 대로 결혼을 결정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3. 결말을 지으며..무정은 두 가지 문제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사랑의 모습'이며 또다른 하나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 구원'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다 어설프지만 과거의 사랑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사랑의 얘기부터 살펴 보자면 영채와 선영 사이에서 인간적인 모든 약점을 보이며 줏대없이 굴었던 형식의 모습은 작가가 의도했던 아니던 그 시대 지식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형식의 모습에서 우리는 긍정적,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바라보게 된다. 영채에 대해 무정한 그의 모습에서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영채의 순결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의 모습에서 인습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본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지워버려야할 과거의 유산과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작품을 되새기다 보면 우리는 영채야말로 이 작품의 줄기를 이루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몸을 팔아서까지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 부모님의 한 마디를 기억하며 절개를 지키는 행동, 순결을 잃었으니 죽어야 한다는 생각 등 과거에 여인들을 옭아매던 인습 속에서 희생 당한 여성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상은 여성에게 정말 '무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번쯤 누구라도 이 책을 읽어본 자라면 '나같으면 영채를 용서하고 사랑할 것이다'라고 불쌍한 격조로 말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