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an【개 요】온두라스 서쪽 해발고도 약 600m의 산악지에 있다. 그 중심은 아크로폴리스와 이에 인접한 5개의 플라자(광장)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크로폴리스는 피라미드와 단(壇) ·신전의 총칭이다. 장엄하고 화려한 부속건물 속에는 1,500∼2,000개의 상형문자를 새긴 ‘상형문자의 계단’ 같은 것이 있고 그 성장인물(盛裝人物)의 좌상(坐像)의 조각은 마야 전지역 중 제1의 것으로 꼽힌다. 그 밖의 비석에 새겨진 상형문자의 해독(解讀)과 돋을새김[浮彫] 인물상의 감상으로 코판이 마야제국의 과학도시였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천문학 분야에 있어서의 발달은 놀라운 것으로서 태양년(太陽年)의 길이와 일식 ·월식의 기간 산출은 마야제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 가장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각예술이 마야미술 중에서 가장 우수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두산 Encyber 백과사전기원전 15세기부터 중남미지역, 구체적으로 말해 지금의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등지에 걸쳐 약 2500년간 존속했던 마야문명은 밀림을 그 터전으로 삼았다. 밀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엔 비가 많이 내리지만 땅바닥이 모래더미라 오래 머물지 못해 물은 늘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비의 신, 태양의 신 등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 풍습이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유지됐다.◀ 코판 왕 16명의 모습을 개성을 살려 네 면에 서 세워놓은 제단석 8세기 때의 야스 팍왕이 그 주인공이다.마야의 도시들이 하나같이 비의 신, 태양의 신에게 바칠 제물을 선발하기 위해 설치했던 그들 특유의 공놀이 경기장과, 또 그들을 제물로 바칠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제단을 두었던 것으로 이는 증명되고도 남는데, 멕시코의 치첸이차, 우스말, 팔렌케, 과테말라의 티칼, 온두라스의 코판 유적은 그 좋은 예다.그 중에서도 코판(Copan)은 이외에도 많은 인물석상을 간직하고 있어 여느 마야도시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입구격인 대광장에 서 있는 9개의 인물 석비,타나기 시작해 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야스 팍(Yax Pac)왕을 주인공으로 그려놓고 그 아래에 ‘763년 7월 7일’, 곧 그의 등극일을 새겨놓은 제단석 Q는 그 대표적 물증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의존했던 신을 저버리게 됨으로써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01/03/13/*************9.html역사여행가 권삼윤◆ Tikal【개 요】과테말라 페텐 주 북서부에 있는 마야 유적지이다. BC 600년경부터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BC 300~AD 300년에 주요 신전과 피라미드가 건설되면서 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심부는 약 16㎢에 이른다. 1956~1970년 약 60㎢에 걸쳐 행해진 조사에서 주거지에 사용된 수많은 외곽지대의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중심부의 소택지에는 2.5㎢에 걸쳐 신전과 궁전들이 늘어서 있다. 최전성기인 700년경에는 핵심부에 약 1만여 명, 외곽지대에 약 5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석조물의 연대는 292년이며 가장 최근의 석조물의 연대는 889년이다. 이후 약 100여 년간 소집단들이 살았으나, 10세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두산 Encyber 백과사전오늘날 세계의 매력있는 고대문명 중 빼놓을 수 없는 마야문명. 이는 우리와 같은 몽골반점을 가진 인디오들이 중앙 아메리카의 무더운 지역에서 이룩해낸 문명이다. 마야문명의 옛 문화권은 지금의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주(州)와 유카탄 반도, 중미국가인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티칼은 고전기 마야문명 최대의 유적지이다. 티칼 국립공원 안에는 5개의 대신전을 비롯해 크고작은 피라미드, 궁전, 돌비석 등이 발굴 및 복원되어 있다. 높이가 38m나 되는 거대한 신전과 북 아크로폴리스, 그랜 플라자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열대우림으로 잠긴 열악한 환경에서 이러한 건축물을 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이라니 그 당시의 규모가 놀랍기만 하다. 큰 신전은 5개가 있다. 높이가 38m에서 65m까지 된다. 모두 인디오들이 거대한 돌을 날라다 다듬어 정성껏 쌓은 건축물들이다. '재규어의 신전'으로 알려진 제1호 신전은 높이가 51m나 된다. 계단이 가팔라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건축시기는 AD 700년경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가면의 신전'이라는 제2호 신전은 높이가 38m로 다른 신전에 비해 낮지만 균형미가 우아한 전형적인 티칼 예술의 걸작품이다. 여러 개의 사다리를 타고서야 간신히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제4호 신전은 높이가 65m로 가장 높다. 이곳의 정상에서 보이는 열대림에 잠긴 티칼 유적지의 모습은 확실히 장관이다. 티칼 국립공원 출구 부근에 있는 박물관에는 마야족의 토기·가면·인골(人骨) 등이 전시되어 있어 마야문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찬란한 마야문명을 지상에 꽃피운 마야족은 AD 9세기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그들은 상당수가 문자도 잊어버린 채 정글과 대도시 변두리 등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http://101.encyber.com/w220_3.html‘열대에 피어난 마야문화의 꽃송이’ - 허용선◆ Chichen Itza【개 요】멕시코 유카탄반도 북서부의 도시 메리다의 동쪽 약 110 km 지점에 있는 마야 문명의 대유적지. 건조한 석회암 지대에 있고, 유적은 석회암, 회반죽한 흙·목재 등으로 되어 있다. 이트사족(族)에 의한 최초의 취락 건설은 530년 이전의 일이라 하며, 7세기에 일단 포기되었다가 10세기에 재건되었고, 11세기 이후는 마야 신제국(新帝國)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에 이트사족은 아스테크-톨테카족의 연합군에 패하였으나, 이후 가장 번영시대를 맞아 많은 건물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5세기 무렵에 갑자기 폐허가 되었다. 유적은 8 km2의 넓은 지대에 걸쳐 있고, 카스티요(높이 25 m의 피라미드)와 그 동쪽의 ‘전사(戰士)의 신전(神殿)’, 도로 건너편의 ‘천문대’년)의 중심지가 됐다. 선대(先代)의 정신적.물질적 가치들이 보다 정제(精製)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캐슬 피라미드치첸이차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피라미드는 「캐슬 피라미드」이다. 이름 그대로 웅장한 성채(城砦)를 닮은 피라미드이다. 길이 55.3m의 정사각형으로, 전체 높이가 23m나 되는 「캐슬 피라미드」는 모두 9 개 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방 벽면에 4개의 계단 구조를 갖추고 있다. 피라미드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각각 91칸인 계단수를 합치면 모두 364단(段)이다. 여기다 꼭대기의 제단(祭壇)을 더하면 꼭 태양력의 1년 날수와 같은 365단이 된다. 또 9개 층 계단을 의도적 으로 양분해 놓아 당시의 달수(月數)인 18이라는 숫자를 나타냈다. 그러고 보면 「캐슬 피라미드」는 마야인들의 예술적 건축기술과 천문학 지식수준이 한데 맞물린 문명의 집적체(集積體)그것인 것이다. 피라미드 북쪽 계단은 또다른 신비를 간직한다. 피라미드 밑에서 꼭대기에 이르는 돌 난간이 해마다 춘분과 추분날 하오 4시만 되면 환영(幻影)을 연출 한다는 것이다. 태양의 빛과 그림자가 오묘한 조화를 이뤄 마치 커다란 뱀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캐슬 피라미드」동쪽으로 흰색 돌기둥 무리가 있다. 촘촘히 서 있는 돌기둥은 그 수가 족히 1천개가 넘는다고 한다. 돌기둥 무리 뒤에는「전사(戰士)의 피라미드」가 있다. 「캐슬 피라미드」서쪽에 위치한 「후에고 데 펠로타」는 길이 146m,폭 36 m로 중앙 아메리카 최대 규모로 밝혀졌다. 그 형태가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는 양쪽 벽면에는 전형적인 마야의 깃털장식과 동물가면을 쓴 군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용맹스런 군인을 상징하는 「재규어의 신전」이 벽 위에 우뚝한채 공놀이 장을 내려다 보고있는 모습 또한 인상적일 것이다. 치첸이차 유적지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이 북쪽에 있는 「세노테」(Cenote)다. 지름이 50∼60m는 족히 넘고 깊이가 40여m에 이르는 대규모. 「캐슬 피라미드」남쪽 300m 지점에 천문대로 사용했을 「소라의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이다.오늘날의 우주관측소에서 볼 수 있는 돔(Dome)형 지붕이 뚜렷하고,내부에는 천체관측에 사용된 이중 구조 물이 남아있다. 마야인들은 돔탑을 둘러가며 나있는 창문에 비친 태양의 각도를 재어 춘하 추분을 정확히 알아맞추었다.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치첸이차에는 이들 유적 말고도 전쟁포 로의 목을 길게 꿰어 벽면에 걸어놓았던 「솜팡틀리」와 「금성(金星)의 피 라미드」등 여러 건축물이 남아있다.제사를 앞둔 제사장이나 사냥에 나설 사 냥꾼들이 몸을 씻거나 출산전후의 임산부가 목욕을 하던 증기목욕탕 시설까지 갖춘 완벽한 도시가 바로 치첸이차이다. http://dragon.taejon.ac.kr/%7Etu41505/se-26.html◆ Palenque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남부, 멕시코만(灣)에 흐르는 우수마신타강(江)의 중부 유역에 있는 마야문화의 신전유구군(神殿遺構群)이다. 마야의 도시 가운데 티칼로 대표되는 초기의 유적과는 달리, 상류에 있는 야스칠란·피에드라스 네그라스 등의 유적과 함께 7∼8세기경 번영을 누렸다. 500×300 m로 이루어지는 중심부 주위의 동서로 10km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학연구소에서 조사와 복구작업을 진행하여왔다.◀ 무덤 벽면의 돋을새김이 유적지의 이름이 빛나게 된 것은 1952년 ‘비명(碑名)의 신전(神殿)’으로 불리던, 20 m를 넘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솟은 건조물의 지하 기저부(基底部)에서 왕의 무덤이 발견되어 그 위용이 드러난 후부터이다. 그 널방은 너비 4 m, 길이 9 m, 높이 7 m의 규모이며, 벽면은 무덤을 지키는 성장(盛裝)한 아홉 신관(神官)의 돋을새김[浮彫]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널은 2중의 뚜껑으로 덮여 있으며, 그 위 뚜껑에는 명계(冥界)에 있는 왕의 그림이야기가 역시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후장(厚葬)된 50세 정도의 남자가 입에 경옥(硬玉)을 물고 있으며, 반지·목걸이 등
목 차서문본문1. 중동 지역 개관가. 중동 지역의 올바른 이해나. 인종구성다. 언어분포2. 이질성으로 야기되는 갈등과 대립가. 유대인-아랍인의 갈등 : 팔레스타인 분쟁나. 레바논 내전다. 이란-이라크 전쟁라. 터키내 쿠르즈족 분리 운동마. 이스라엘-시리아 분쟁바. 이스라에-요르단 분쟁사. 이란 내전아. 예멘 내전자. 이라크 내분차. 이란-UAE 영유권 분쟁카. 이란-쿠웨이트 국경 분쟁타. 이란-아프가니스탄 분쟁파. 미국, 영국-이라크 (걸프 분쟁)3. 협력 관계가. 아랍연맹나. 석유수출기구다. 아랍경제통합위원회라. 아랍석유수출기구마. 걸프협력위원회바. 아랍협력위원회사. 아랍마그레브연맹아. 경제협력기구자. 비아랍 국가간 경제협력 : D-8맺는 글서문어떤 특정한 지역의 국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속한 국가들의 언어,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및 국가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현대 중동 국가들에 대한 보고서를 기획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중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키워드 중에 과연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까 하는 것이었다. 먼저 중동을 생각하면 흔히들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이슬람과 아랍 문화이지만 이는 너무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이어서 제외시켰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정치와 경제인데 각각의 나라가 처한 정치, 경제적 현실의 열거보다는 각각의 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종교와 사회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가 맞물리고 또 어긋나기도 하며 여기에 중동외 지역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까지가 얽혀 다양하게 펼쳐지는 현 중동 국가들간의 관계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중동 지역의 국가들간의 관계를 각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이질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갈등과 국익에 우선하는 경제협력에 중심을 두어 분석하였다.본문1. 중동지역 개관중동지역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해 종족구성, 인종, 언어면에서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이질성이 이 지역 국가간의 갈등을 야기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이라는 동질성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이질성을 인종과 아람어는 중동지역의 넓은 지역에 걸쳐 쓰이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아랍국가들이 발전시킨 광범위한 교역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람어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이라크의 모술 부근 일부 마을에 잔존해 있고, 이 두 국가의 많은 기독교 분파의 신성한 언어로 잔존해 있다. 재생되고 단순화된 헤브라이어는 이스라엘 국가의 공식어로 채택되었다.아랍어는 본래 메디나와 메카 지역의 무역상인들과 주민들, 사막 유목민들의 언어로서 무함마드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사용했으며, 서기 7세기이슬람의 발흥과 함께 급속하게 리비아, 이집트, 레반트, 이라크 지역의 당시 현존했던 언어들을 대체하였다. 이슬람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아라비아반도에서 통용되던 지역방언에 불과했던 아랍어는 이슬람의 세계 정복과 동시에 그 사용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또한 아랍어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란의 언어로서 이슬람세계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지닌 언어이기도 하다. 아랍어는 현재 아랍국가들에서 국어로 사용될 뿐 아니라, 약 12억의 전세계 무슬림들이 꾸란 독송과 예배시 종교언어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역에서는 제2의 모국어로 간주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아랍어를 통한 언어적 동질감은 아랍인들 간에 형제의식을 느끼게 하지만, 중동에서 아랍어의 지배력이 결코 완전하지는 않다.이란은 자체의 특이한 언어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파홀레비어로 일컫는 고대 토착언어로서 이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으로 많이 수정되었으며 아랍어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란어와 아랍어 간의 어휘와 의미에서의 광범위한 상호교환에서는 아랍어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했지만 이란어 고유의 형태를 몰아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이란은 많은 소수언어들 특히 자그로스 지역에 사는 부족들이 구사하는 터키계어, 아랍어, 발루치어, 쿠르드어 같은 소수언어들을 갖고 있다.넓게 보아 중동은 단일 언어지역과 복합 언어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곧 아랍어 지역으로 다른 언어들을 배제한 채 압도적으로 아랍어가 사용된다. 반면 후자에는 라엘 전투를 전개하였고, 특히, 67년 6월 3차 중동전에서는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강점당하였다. 90년대에 시리아-이스라엘간의 협상 분위기 조성되었다. 92년 7월 이스라엘에 라빈정권이 출범과 함께 평화협상 계기 마련되었다. 미국과 이집트가 양국간의 평화협상을 위한 외교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94년 6월 이스라엘-시리아 평화협상이 시작된 이래 몇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4년 만에 평화협상을 재개하여 라빈총리가 합의한 골란고원 반환 원칙에 동의하여 2000년 1월 미국에서 이스라엘-시리아간의 평화협상을 개최하였으나, 같은 해 2월 이스라엘이 대규모 대레바논 포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시리아간의 평화협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5월 이스라엘이 전격적으로 남부 레바논에서 철군함으로 양국 평화협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2001년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상은 재개되지 못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은 지속되는 상황이다. 레바논내의 헤즈볼라 세력은 현재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다.한국 국방 연구원 http://www.kida.re.kr/woww/update/me-conf-main.htm바. 이스라엘-요르단 분쟁이스라엘과 요르단은 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이래 줄곧 극단적 대결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 양국간의 적대관계는 67년의 중동전쟁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의 서안지대(웨스트뱅크)를 점령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게릴라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요르단을 빈번하게 침공하여, 요르단 정규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미국의 중재로 여러 차례 비밀협상을 가진 결과 94년 7월 워싱턴에서 적대관계 청산 및 관계개선 조치를 담은 선언을 발표하여 분쟁의 해결 가능성이 커졌다. 양국은 마침내 94년 10월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상의 걸림돌이 되어왔던 수자원 및 국경문제에 합의하고,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역사적 적대관계를 청산하였다에 따라 이라크군이 73년 4월 철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는 정치,경제적 목적과 지역적 야망을 위해 90년 8월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유엔결의 아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였고, 이라크가 2월 28일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써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라크는 쿠웨이트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국경부근에 병력을 증강,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2001년에는 이라크군이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을 수차례 월경하여 양측간의 교전이 발생하는 등, 이라크의 호전적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한국 국방 연구원 http://www.kida.re.kr/woww/update/me-conf-main.htm타. 이란-아프가니스탄 분쟁이란-아프가니스탄 분쟁은 잠재적으로 종교적 대립이 있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이 이란 공관 외교관들을 감금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친구소련 정권 붕괴후 96년부터 순니파 탈레반세력이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이란은 종교적 뿌리가 같은 그 나라 쉬아파 이슬람세력을 지원, 탈레반세력과 대립하여 왔다. 탈레반세력은 98년 8월초 반군세력의 거점을 공격하면서 이란 공관을 점령, 외교관 11명을 인질로 감금하고 그 중 9명을 사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이로인해 양국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란은 국경에 병력을 증강 배치하였고 전쟁 불사 방침을 천명하였다. 지속된 대치 상황은 98년 10월 탈레반이 이란 포로를 석방함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기 시작하여 99년 2월 최초 대화를 시작하여 11월 양국간의 국경이 재 개방되었고 2000년 1월 무역도 재개되었다. 이후 양측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아프간으로부터 이란으로 공급되는 마약으로 인해 이란과 아프간 마약조직간에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다. 이란은 2000년 한해만 총 156회 작전을 수행하여 마약 조직원 125명을 사살한 바 있다. 이러한 갈등은 2001격의 기구로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와 그밖의 경제 분야에서 모든 종류의 합병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세계 주요 석유수출국들은 원유의 공시가격 유지 회복을 목적으로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석유수출국기구)를 결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OAPEC는 석유뿐 아니라 공통의 경제적 기반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 때 아랍 산유국들이 취한 석유금수조치가 실패한 것이 OAPEC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6일전쟁 때 미국 영국 독일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에 반발해 이들 나라에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강경조치를 취하였으나 이란 베네수엘라 등 비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증산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결국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정책 및 그와 관련한 경제 분야에서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OAPEC을 결성하여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자원의 자주관리를 다짐하였다. 1970년 이후 공동사업을 추진하여 바레인에 25만t급 탱커 수리용 독을 만들었고, 석유화학 합병사업, 파이프라인의 공동 소유 등의 사업을 완수하였다. 국가간에 긴밀하게 연대하고, 석유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며, 회원국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2000년 현재 가맹국은 리비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이라크, 이집트, 카타르, 쿠웨이트, 튀니지의 11개국이다. 본부는 쿠웨이트에 있다.두산 세계대백과마. 걸프협력위원회(GCC : Gulf Cooperation Council)1970년대말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같은 걸프만에서의 정치적 변화는 걸프만 아랍국가들의 안보 위협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특히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 지역 국가들의 공동안보협력 문제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1981년 이슬람회의기구 (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 정상회담에서 걸프만 아랍국가들의 협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