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독일)브람스는 스스로에게 대단히 비평적인 작곡가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놓고 그는 거의 상처가 될 만큼 아픈 말들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늘 선배 자곡가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데 본인은 케루비니 정도의 그저 고전 옹호자로 옹호자로 음악사에 조그맣게 기록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고 한다. 브람스가 열다섯 살의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연주를 시작했고 나름대로 작곡을 시작할 무렵, 음악사적으로는 낭만 시대의 정점에 와 있었지만 브람스는 자제의 길을 택했다.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환경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브람스의 인생은 결코 고요하지 못했지만 인내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으며, 음악 속에서도 거의 강제적으로 절제와 고요함을 배치시키고 있다.이러한 그의 고집은 브람스의 가계와 무관하지 않다. 브람스의 아버지 야곱 브람스는 가계에서 유별나게 음악을 업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이전 조상들은 대부분 농부, 수리공 아니면 작은 사업가들이었다. 함부르크로 이주한 아버지는 음악가가 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나 경력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일찍 여위게 되는 개인적 좌절감과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심적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남으로서의 가정에 생계에 책임을 져야 했던 점 등이 그의 음악관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이처럼 브람스의 험난한 삶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세기적 대작곡가가 되었다는 점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저변에 타고난 재능과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는 슈만과의 해후라는 엄청난 행운이 아니었다면, 브람스는 재주 많은 반주자, 아니면 시골 소그룹 합창 지도자로 생을 마감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일례로 그는 열여섯에 자신의 작품을 악보로 출판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소심하다기보다는 자기 성찰이 강했다고 미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가 과연 슈만의 격려와 후원 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그의 나이 20살 때 인생에서 큰 전환기를 겪게 된다. 1853년 9월 30일 브람스는 친구 요아함의 권유로 슈만을 찾아가게 된다. 그 다음 날인 10월 1일자 슈만의 가계부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메모가 적혀져 있다. “브람스의 방문, 그는 천재.” 슈만은 즉시 브람스의 아버지에게 아들의 재능을 예찬하는 편지를 띄우고 음악신보에 기고했다. 그는 이어 당시 최고의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하르텔’ 에 소개했고 마침내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출판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슈만의 이와 같은 호의는 클라라 슈만과의 운명적 만남과 연모로 이어졌다.설이 구구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어느 시점에서도 떼어 놓고 논할 수 없는 여인이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이는 벽을 넘지 못했다. 1880년 클라라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렇게 오래되고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브람스는 그의 속내를 한 번도 나에게 말해 준 적이 없다. 그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어떤 때는 솔직히 말해 25년 전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6년 클라라가 세사을 떠난 후, 그러니까 그로부터 브람스가 죽기까지 1년은 적어도 브람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세월이 되었다. ‘독일 진혼곡’ 이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애끓는 헌사라면 ‘네 개의 엄숙한 노래’ 는 클라라와 브람스 자신을 향한 체념의 조가인 것이다.그의 가장 중요한 거처는 빈이었다. 이곳에 39살에 찾아와 1897년 64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을 살았으니, 비록 셋방일지라도 그의 마음의 고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여름철은 발 닿는 곳에서 지냈다. 경치나 사람들 탓에 그는 몇 번이고 같은 휴양지를 찾았고 가는 곳마다 걸맞는 작품들이 그럴싸한 에피소드와 함께 탄생되었다.1877년부터의 여름을 브람스는 오스트리아 남부 푀르차크라는 소도시에서 보냈는데 이것도 예정된 일은 아니엇다 당시 그는 이곳에서 클라라에게 편지를 띄웠다고 한다. “빈을 향해 가다 말고 여기 호숫가 푀르차크에 잠깐 내렸고. 하루쯤 머물려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이틀이 되었고 그래도 도저히 떠날 수 없어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고.” 라고 적혀져 있다. 브람스는 그로부터 3년의 여름을 이곳에서 보냈다. 브람스는 처음에는 레온슈타인 궁(호텔) 건너편 가스트하우스에서 손님으로 머물다가 레온슈타인 궁(호텔)으로 거처를 옮겨 3년째에는 아래층 전체를 세내었다. 여기에서 브람스는 날마다 새멱 네 시에서 다섯 시에 규칙적으로 그가 손수 차린 아침 식사를 먹었고 그리고 난 뒤에는 산책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브람스가 한슬릭에게 보낸 편지에 이 곳에서의 풍경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이곳은 마치 처녀와 같은 호숫가 마을입니다. 걷는 곳, 닿는 곳마다 끝없는 선율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산책을 할 때도 그것들을 짓밟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되는, 지금 나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바로 이러한 악상들을 모아 놓은 곡이 그의 교향곡 제2번이며 푀르차크의 하늘, 바람, 그리고 여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또 하나의 대작이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이다.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는 그에게 늘 짐이었고 불만의 원천이었다. 나이 차이로 별거에까지 이른 부모의 상황이 그러했고 악단의 대접 또한 그를 무시하는 처사의 연속이었다. 사실 그는 함부르크 필하모니를 무척 지휘하고 싶었다. 그러나 번번이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이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할 즈음 빈에서 초청장이 온다. 징 아카데미 합창단의 지휘자로 오기를 요청하는 전갈이었다. 이를 계기로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빈을 거처로 삼고 빈의 시민이 되었다. 물론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빈 악단 또한 그를 괴롭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빈을 사랑했고 빈에 묻혔다고 한다.브람스는 작곡가이자 연주가였다. 1872년에서 1875년까지의 그의 연주 프로그램을 보면 3분의 2가 바흐헨델베토벤 등으로 꾸며지고 있다. 그만큼 그는 선대 작품의 진가를 늘 경외하였던 것 같다. 빈의 작곡가들 가운데에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브루크너도 볼프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브람스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었고 설령 있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브루크너의 악보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감정을 여간 자제하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브루크너뿐 아니라 그는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악보도 모으길 좋아했다고 한다. 브람스의 당대 작곡가 친분이 결국 요한 슈트라우스, 그리고 드보르자크 정도로 그치고 있는 점을 보아 그의 외고집, 외길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만 하다.1895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의미 깊은 해이었다. 이 해에는 빈에서 브람스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브람스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896년 5월 초 브람스는 약해진 건강으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달 20일 클라라 슈만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클라라를 덮은 관을 배웅하고 빈으로 돌아온 그는 간암이라는 의사의 최종 진단을 받은 뒤 몸이 날로 수척해 져 갔다고 한다. 클라라가 죽고 난 뒤 유일한 작품이자 브람스의 마지막 작품인 코랄 전주곡 Op.122. 코랄의 가사 또한 공교롭게도 “오 세상이여 나는 너를 떠나야 한다.” 로 끝나고 있다. 1897년 3월 7일 빈 필이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며 대표작인 4번 E단조를 연주하는데 참석한 것을 끝으로 브람스의 공식적인 외출은 끝을 맺었다. 이어 그는 4월 3일 6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브람스 자신이 밝힌 스스로의 신조인 ‘frei aber einsam’(자유롭지만 외로운)이야말로 그의 인생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음악에서 그는 가장 자유로운 음악가였지만, 인생에서 그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참고 싸이트-http://user.chollian.net/~seansky/-http://my.netian.com/~angea/-http://www.gaeks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