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식 리메이크(Remake)의 조건과 그것의 리메이크 작인 2004년 작 당신의 사랑하는 동안에(Wicker Park)>를 택한 이유다.2. 제목이 가지는 의미본격적으로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두 영화 의 경우 제목의 의미는 Apartment, 즉 서로 떨어져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영화 안에서 서로 소통과 만남을 원하지만 끝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네 남녀의 관계성과도 관련 있다. 이것은 이 영화가 갖는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리메이크 작인 에는 그러한 원작의 주제의식이 거세되어 있다. 다시 말해, Wicker Park는 영화 안에서 등장하는 공원의 이름으로 주인공 두 남녀의 사랑을 대변하므로, 원작의 소통 불능이라는 주제 의식과는 하등 상관없는 제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숨어있는 할리우드 식 리메이크의 방법론을 당신은 발견했는가? 원작의 다소 어둡지만 확실했던 주제의식을 할리우드 식 리메이크에선 낭만적인 가장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 과한 비약이 될까?3. 구체적인 장면 비교(1) 감정의 중시 VS 사건 중시과 의 가장 큰 차이점은, 두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는 것에 더 비중 있게 다루는가에 있다. 물론 두 영화의 커다란 틀은 거의 같다. 심지어 몇몇의 가감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나 플롯의 구조조차 흡사하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그 ‘무엇’은 대체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감정’과 ‘사건’의 비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프랑스 영화인 은 영화의 큰 틀 안에서 주인공들의 내면과 감정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에 중시한다면, 는 감정을 가급적 배제하고 사건이 갖는 스릴러 적이거나 혹은 미스터리적인 전개에 더 초점을 맞춘다. 다음에 볼 두 영화의 장면들에서 그 차이가 여실히 들어난다.#1 반지 고르는 장면#2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반하는 장면먼저 #1은 이 영화의 각각 처음에 나오는 장면으로, 사실 이 영화의 큰 맥락과 깊은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과 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태도의 차이이다. 같은 이야기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은 두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여 표정을 여유롭게 보여주는 반면, 에선 화면분할과 함께 빠르게 이 장면이 지나간다. 그저 사건만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 장면을 다루는 두 영화의 차이는 영화 전체의 태도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얼굴 표정이나 행위 등으로 들어나는 인간 내면의 감정을 중시한다면, 는 사건의 흐름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2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반하는 장면은, 이러한 차이를 더 여실히 보여준다. 의 경우, 초반 회상 장면에서 비디오에 찍힌 여주인공의 얼굴을 보고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되는데, 이때의 비디오 속 그녀의 얼굴은 클로즈업 되어있고, 그 클로즈업된 얼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의 경우는 초반 회상 부분엔 아예 등장하지 않고, 뒤이어 잠시 사건의 개연성을 부가하는 정도로 등장하게 된다.(2) 스릴러적 분위기의 극대화의 경우 역시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전체적으로 속도감 있는 편집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전반적으로 디졸브의 방법이 주로 쓰인다. 그러나 의 경우, 긴박하고 빠른 편집과 잦은 화면 분할 등이 원작과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근래에 들어 스릴러 무비의 클리세라고 할 만큼, 흔히 쓰이는 것으로, 할리우드 판에선 이 스릴러적 특성을 극대화 하여 영화적 재미를 배가하기 위해 이러한 편집 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 리자의 집을 처음으로 찾아가는 장면 비교 이다.#3 여주인공 리자의 집을 남주인공이 처음 찾아가는 장면확실히 에 비해 가 훨씬 속도감 있고 긴박한 편집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화장 그리기 VS 화장 지우기#4 화장 그리기, 화장 지우기에서 유의미한 장면 중 하나는, 극중 주인공 막스를 좋아해서 이 모든 사건을 벌이는 인물 알리스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그리는 장면일 것이다. 극중에서 알리스는 자신의 본 모습을 속인 채, 가면을 쓰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을 속이는 위선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위선은 그녀로서는 그녀 자신도 원치 않는 비극적인 위선이다. 거울을 뚫어져라 보며 화장을 그리는 장면은, 그녀의 비극적 위선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된 자기 자신이다. 이때 카메라는 고전적 기법에서 벗어난,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기법을 택한다. 거울을 보듯 카메라를 보며 슬픈 가장을 하는 알리사에게 관객은 압도적인 몰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 이 장면은, 에 와서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된다. 의 화장 그리기는, 에서 화장 지우기가 된다. 이때의 화장 지우기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적 행위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단지 스릴러 형식의 구조상, 극적 개연성을 부가하기 위한 설정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즉,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알렉스가( 알리스가 여기선 알렉스다) 화장을 지우는 장면은, 아 그 연극배우가 알고 보니 알렉스였다, 정도의 구조상의 역할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 에 비해 이야기를 더 중시한다는 점을 반증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과 냄비근성1.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 냄비근성2. 냄비근성은 어디서부터 오는가?2.1. 언론이 만드는 아젠다(Agenda) - 언론과 권력2.2.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인가? - 민주주의 혹은 관료주의2.3. 한국의 관료주의는 어디서 오는가? -일제 잔재로서의 한국 관료주의3. 맺음말한국인의 냄비근성에 대한 고찰1.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 냄비근성한국인의 국민성을 두고 속칭 ‘냄비근성’이라는 말이 쓰인다. 냄비근성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냄비가 빨리 끓고 빨리 식듯이 어떤 일이 있으면 흥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성질. 나설 때는 과감히 나서고, 털어 버릴 때는 깨끗이 털어버린다. 어떤 일에 대하여 쉽게 잊어버린다.)이 사전적 정의만 두고 보면, 과감히 나서고 또 깨끗이 털어버린다는 점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한국인의 냄비근성과 관련하여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한 예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애도의 물결은 전 국민적으로 퍼져나갔고 단지 애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평가 받았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재조명이 사회적 이슈(issue)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현 이명박 정부가 갖고 있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기도 했다.그런데 문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재조명이 다소 감정적이고 비약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된 국민들의 반응 중 대다수는 감정이 뒤섞인 논리적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을 하기 위한 것이지 노무현 정권 자체를 두고 진지한 정책적 평가를 내리는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러한 주로 반응은 인터넷 상에서 나타나는데, 다음은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글 중 하나이다.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웠고이명박은 초중고와 싸운다.노무현은 국회의원들이 탄핵 요청했고이명박은 국민들이 탄핵 요청한다.노무현은 국민들의 비틈을 파고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의 인식에 둥지를 틀 수 있는 또 다른 이슈와 그에 따른 아젠다(Agenda)가 생겨나면 사람들의 인식은 그 쪽으로 몰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갖고 있던 인식은 새로운 인식으로 대체된다.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에 국민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이러한 모습은 쉽게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광우병 사태와 관련한 국민들의 관심의 양상을 살펴보자. 광우병 사태가 터졌을 당시, 전 국민적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머지않아 광우병에 대한 관심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급속하게 멀어졌다. 그 이유는 광우병 사태가 터지고 머지않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이나 용산 참사 등 굵직한 이슈들이 터졌고 일부는 아젠다화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쏠리면서 점차 광우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인식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이와 같은 일련의 이슈들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두고 우리는 흔히 ‘냄비근성’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점은, 이른바 냄비근성이 한국인의 타고난 기질인가, 라는 것이다. 이 의문을 시작으로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어떤 한 이슈가 터지고 아젠다화(化) 되고 또 나중에 다른 이슈가 터지고 아젠다화 된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국인의 냄비근성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아젠다를 확실히 매듭짓지 못한 채 또다시 다른 이슈가 터지고 아젠다화 되는 현상 자체가 냄비근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아젠다를 만드는 주체는 누구인가?나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가설을 설정했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란 것은 애초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진 것이고 또 현재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것. 즉, 이슈를 확대 재생산하는 어떤 주체들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국민들을 호도(糊塗)하는 것이고 애초에 이슈를 만든 주체들이 국민들이 쉽게 휩쓸리는 것을 두고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한국의 정부 권력과 언론은 어떤 상관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이러한 생각을 더 확장시켜, 그렇다면 언론과 결탁하는 정부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러한 정부 권력 및 체계가 왜 발생했는지 그 근원적 뿌리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2.1. 언론이 만드는 아젠다(Agenda) - 언론과 권력오늘날 이른 바 ‘언론플레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사용된다. ‘언론플레이’란 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으로, 이를 더 확대해보자면 이슈를 만들고 이슈를 아젠다화 하는 데에 언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이처럼, 언론플레이라는 말이 흔히 사용될 정도로 한국에서 언론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몇 가지 주요 일간지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이들의 대중에 대한 입김이 상당하며 정치권과도 어느 정도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주요 언론사와 정치권과의 결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이와 관련하여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이상형을 제시한 헬드(Held, 1987)의 민주주의 모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델에서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조건들 중 하나는 ‘모든 공공의 사안에 있어서 유식한 결정을 확보하기 위한 정보의 공개적 이용가능성’과 시민사회의 핵심 특징의 하나로 제시된 정보원의 다양성이다. 정보의 공개는 국민의 알 권리를 뜻하고 정보의 다양성은 언로를 뜻한다.) 이는 정부통제하의 언론자유뿐만 아니라 공공적 사안에 대해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 각계각층의 다양한 견해와 가치관을 매개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언론자유를 뜻한다.이러한 언론자유가 민주주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정보원이 아닌 소수의 정보원, 즉 소수의 주요 언론사가 공개된 정보가 아닌 제한된 정보를 통해 정치권과 결탁하여 이른바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조건에 위배되는 양인의 타고난 근성이 아니라, 애초에 언론이 국민의 언로 역할이 아닌 집중적인 권한을 갖고 아젠다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국민은 그 아젠다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올바른 민주주의의 조건에서 위배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란 말인가? 한국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권력 집중적인 언론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알아보기 위해 정부와 언론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을 해보자.한국의 상황에서는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라는 다원주의적 명제를 수용하는 데에 무리가 따른다. 사회조직들 간의 관계가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국가에 의해 조정되고 있으며, 언론도 그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양상은 과거 1970년대 한국과 1980년대 권위주의적 한국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1970년대 권위주의적인 정부는 국내의 여타 자본은 물론 언론자본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권위가 막강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언론에 대한 정부 통제는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다. 1980년대 이르러도 그러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억압적인 언론 통제가 이루어졌다. 1987년에 이후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미디어 시장이 개방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정부는 미디어를 비롯한 언론 영역에만은 여전히 견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제한되었고 정보원은 정부가 견제할 수 있는 소수 언론으로 그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언론은 언로의 역할이 아닌 정부의 하수인이 되어 정부가 원하는 데로 이슈와 아젠다를 만들어냈다.1990년대에 들어오며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개방화의 흐름을 탄 우리나라의 언론은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취재, 제작을 할 수 있었지만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모습을 달리하여 계속되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정권아있는 듯하다. 특히 이명박 정권이후 이러한 구시대적인 권위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정부가 갖고 있는 권위적인 모습의 근원은 뿌리 깊은 관료주의적 정치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권위적인 관료문화를 갖고 있는 정부일수록 언론과의 결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생리를 갖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가 아닐까한다. 나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관료주의’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군부 독재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정치에 뿌리 깊게 남아오고 있으며, 이러한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야 말로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이유라고 생각한다.2.2.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인가? - 민주주의 혹은 관료주의한국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의 모습은 앞서의 논의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전통적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관존민비나 위민행정이란 표현이 시사하듯이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 왔으며, 산업화의 시기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상 한국 관료들은 최고 집권층의 의지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였던 반면 일반국민들의 견해는 무시하거나 배제하여온 경향이 있다.)더욱이 관료제 위주의 국가발전도 관료 위주의 정부가 권력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최고집권자인 박정희의 주도로 경제 개발을 주도하였고 그것이 민간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국민생활을 간섭하는 정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정부가 강한 권력을 지닐 수 있도록 일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관료들이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것을 전담하였기 때문에 관에 대한 민의 의존성을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른바 행정만능주의 풍토를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록 민주화 과정을 거쳐 과거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뿌리 깊은 권위주의, 관료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더욱이 한국의 민주화는
최수철 1. 사유의 자유, 글 자체의 자유, 그로 인한 사람의 자유이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소설의 종국에 일말의 당황함을 느끼게 된다. 대체 이 소설의 줄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설이 어떤 시간적 순서나 논리적인 연속성을 가지지 않은 구성을 띈 소설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박창도’라는 인물의 편집증적인 메모에 대한 일화들이나 군대에서의 일화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기존의 문법대로 쓰여 진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적인 측면이다.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각난 듯 배열된 이야기의 재구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가? 나는 그보단 이 구성이 지니는 의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이 소설을 이해하는 편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은 채, 일종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비논리적으로 전개된 이유에 대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쓰인 부분을 인용해 설명한다면, 이 소설의 구성 자체가 바로 사유의 자유와, 글 자체의 자유, 그리고 그로 인한 사람의 자유를 말하고자한 구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소설 안에서 박창도가 말하고 있는 이 자유의 대한 내용이 이 소설 자체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말이며, 소설 자체가 사유의 자유를 바탕으로 쓰여 졌고 그러함이 이 소설 자체의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자유에까지 연결된다. 이와 같은 자유의 문제, 이것이야 말로 작가가 말하려 했던 궁극적인 메시지는 아니었을까.2. 메모가 지니는 의미이 소설의 작중 인물 ‘박창도’는 끊임없이 메모를 하는 편집증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 메모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필요에 의한 기록이 아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회상조의 기록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때그때의 현장성’만이 존재하는 메모이다. 그 메모의 문제점이란 그것들이 지나치게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 이후에 그 단절된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순전히 읽은 이들의 몫으로 돌아간다그림자가 슬며시 거두어질 때쯤이 되서야, 그들은 겨우 그 상흔을 조심스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아픔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은 덤덤하게 말이다.최윤의 은 바로 그렇게 80년대를 견뎌온 어떤 사람의 덤덤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었고, 그래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그러던 삶의 어느 순간 상처를 묵묵히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조심스레 펜으로 적어 내려간 글인 것만 같다. 이제 비로소 그 시절은 회색빛의 기억이 되어 흑백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곳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도, 끝없이 침전하는 슬픔도 없다. 단지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갔던 나와 네가 있을 뿐이다.그런 정서의 증거이기라도 하듯, 소설 속의 감정과 언어는 절제되어 있다. 소설 속 주인공 강하연은 곤궁한 처지이며 비참하고 외롭다. 그것은 시대의 산물이고 그녀는 시대의 사생아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언어도 절제되어 있다. 소설의 감정은 마치 잔잔하고 투명한 호수 안으로 보이는 거대한 도시의 폐허처럼 가라앉아 있다.또한 그녀는 격동의 80년대 한 가운데에 있으나, 어느 쪽으로도 휩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고, 외롭다. 그것은 그녀의 외로움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외로움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는 외롭다고 절규하지 않는다. 단지 외로워 보일 뿐이다.이러한 절제된 감정은 독자로 하여금 강하연의 아픔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과거의 아픔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성숙한 화자의 시선은 오히려 화자가 과거 얼마나 아팠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겪고 난 화자의 모습에서 어떤 경외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나는 80년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준 아픔의 크기를, 이 소설을 통해나마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느끼는 이 소설의 위치는 높다.박상륭 -관념성과 소설적 가치의 문제지난 학기 소설 텍스트 읽기 수업 중, 김경수는 사람만 이해하라는 작가의 자존심과 자의식의 벽은 너무 높았고, 그런 연유로 나로선 이 소설이 그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주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이상의 소통을 불가능하다고 여긴 채 책을 덮었던 것이다.다시금 읽게 된 는 ㅡ 비록 전체 소설의 일부분이기에 ‘읽었다’, 라고 학엔 부끄럽긴 하지만, 여전히 소통 불가능한 고도의 관념성과 철학성으로 인해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소설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 비단 철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식도 아울러야 한다는 점은 독자로 하여금 무기력함을 느끼게 한다. 죽음에 대한 문제는 정말 그 관념의 무게만큼이나 쉽지 않은 화두이긴 하지만, 그 쉽지 않은 문제를 꼭 이렇게 쉽지 않게 전달해야만 했을까? 혹 이 소설이 더 많이 공부하고 소양을 기른 뒤에 읽어야 할 소설이라면 나는 차라리 훗날 내가 이 소설을 이해하는 그 날을 위해 소설 읽기를 미루어야 할지도 모른다. 를 연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만 같다.김승옥 -대자적 개인으로의 발전무진(霧津)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자못 분명하다. 이렇다 할 특징조차 없는 이 도시의 명물은 바로 다름 아닌, ‘안개’다.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눈앞에 존재함은 물론이요, 시야의 모든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는 안개의 이미지가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 이미지란 ‘갇힘’ 혹은 유폐다.그 답답하고 유폐된 무진으로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맥을 이룬다. 주인공 나는 과거 어두운 기억 속의 무진으로 떠나게 된다. 무진으로 가는 여행은, 겉으로 보기엔 휴식 차 떠나는 여행이지만, 속내는 현실의 압박으로 인한 도피이며, 그 도피조차 반강제적이다. 그리고 그 도피는 결코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이 아니라 어두운 골방으로 숨어들어가는 또 다른 ‘갇힘’이다. ‘갇힘’을 피해 다른 ‘갇힘’으로 들어가는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번민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 속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세속과 성스러움 등의 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은 그를 바라보는 작가의 여러 가지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조세희의 와 이동하의 도 예외는 아니다. 전자가 도시 노동자의 억압과 착취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후자는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한 하층민의 소외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두 소설이 도시인의 삶의 징후를 다루는 데 있어, 이처럼 시각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두 소설 모두 비슷한 시기에 잃어난 징후들을 다뤘다는 점은 그 시대 도시인들의 삶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징후들이 문학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났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조세희의 는 도시 노동자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작중 화자를 은강 그룹 회사 아들, 즉 고용주로 설정해 독특한 소설적 성취를 이끌어낸다. 고용주인 화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도시 노동자들은 돈 주고 일까지 시켜주는데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고용주를 해한, 인간 이하의 인간들이다. 이렇게 작중 화자의 도시 노동자들에 대한 시각은 소설 전반에 걸쳐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이입하는 대상은 작중 화자가 아닌, 그가 바라보는 도시 노동자들이다. 그것은 소설의 작중 화자 설정이 그를 대변하기 위함이 아니라 작중화자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는 장치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로는 오히려 그와 반대편에 서있는 도시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절실하게 보여주는 아이러니로 작용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자본가임에 불구하고 도시 하층민들을 대변하는 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조세희가 도시화 과정 속에서 억압당하는 도시 노동자의 삶을 다뤘다면, 이동하의 에선 나름의 사정으로 인해 도시로 이주한 빈민층의 애환을 다룬다. 이 소설의 특징은 작중 화자가 어린아이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과, 소설 전반에 도시 이주 전의 삶을 보여주고 후반부에 도시에서의 새로운 시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극명한 대비 효과를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인 작용은 매우 탁월하다. 연약한 어린아 떠나기 전 남긴 메시지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부분에 주목하면 더욱 자명해진다. 이 문제적 구절이 보여주는 바는 어쩌면 최기표야말로 폭력에 희생당한 ‘희생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폭력에 의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던 쪽은 담임이나 반 아이들이 아닌 바로 최기표라는 것이다.물론 최기표가 반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에서 최기표는 분명 ‘악’이었다. 그리고 그를 선도하기 위해 나선 담임과 임형우의 방법은 ‘선’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한 방법이 최기표로 하여금 무시무시한 폭력, 즉 한 개인의 모든 걸 무력화시키는 폭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기표는 무서움을 느끼며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담임 선생님과 임형우의 방법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최기표에 대한 폭력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닌 오히려 ‘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 그에 대한 자명한 해답이 있진 않다. 그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일 뿐이다.2. 보이지 않는 권력이 소설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점 중의 하나는 바로 담임교사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담임교사의 권력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소설에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담임교사가 최기표와 임형우, 그리고 서술자인 이유대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 그가 임형우가 최기표를 ‘도와주기’ 위해 행했던 커닝 사건에 깊이 개입해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임형우의 배후에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이 바로 담임교사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최기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그의 전략적 폭력이었음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다. 이 부분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권력과 그로 인한 폭력 대한 것이다. 어쩌면 더 무시무시한 권력이란, 또 그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이란, 비단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아니다.
1. 탄생기- ‘海建’이라는 이름어느 날, 그녀는 꿈에서 커다란 고목(古木) 한 그루를 봤다. 예사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 주변엔 거름으로 쓰이리라 짐작되는, 똥밭이 있었다. 무시무시하리만치 거대한 똥밭이었다. 그녀는 똥밭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그 나무 가까이로 다가갔다. 다가가니, 나무 가지마다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가지에서 꽃 한 송이를 꺾었다. 나비모양의 분홍 꽃잎 테두리엔 금박 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그녀는 꽃을 한 손에 들고 생각했다. ‘꽃 참 예쁘네.’이상한 꿈이었다. 어른들은 그녀에게 그 꿈이 태몽이라 했다. 남편과 동거를 시작한 지 3년만의 희소식이었다. 애가 없는 팔자는 아니로구나, 라고 생각한 그녀는 얼른 근처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여의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임신을 축하했고,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로부터 몇 개월 후, 3.8kg의 건강한 아기가 머리를 내밀었다. 아들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 밤, 그녀의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환호성을 지르며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고 그러다 잘못 넘어져, 얼굴에 손바닥만큼 큰 상처를 얻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겐 상처의 아픔을 돌보는 일보다, 아기의 탄생이 더 중요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고심하여 마침내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돌림자인 바다 해(海)에, 세울 건(建)자를 붙여줬다. 뭐가 됐든, 크게 세우라는 의미에서.2. 성장기- 취향의 문제나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 반에서는 늘 1등을 했고, 전교 1등도 가끔 꿰찼다. 하지만 숫자의 불과한 등수가 나의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공부 잘하는 착한 모범생으로 ‘낙인’ 찍힐수록 내 안에 있는 일탈의 욕구와 남다른 감수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중학교 시절 그런 나의 욕구와 감수성을 채워줬던 두 가지는, 소설과 음악. 이문열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시작된 소설과의 인연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TV에서 본 Nirvana라는 밴드의 ‘Smell likes teen spirit′ 뮤직비디오. Nirvana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커트 코베인은 무엇이 괴로운 지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드럼 세트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나는 커트 코베인을 보며 안도했다. 나만 괴로운 것은 아니구나 하고.중학교 시절 키워온 나의 취향은 그 무렵 더욱 날카로워져갔다. 남들이 잘 안 듣는 괴상한 음악만 골라들었고, 괴상한 소설을 읽었다. 여기에 영화에 대한 관심도 더해졌다. 아이들이 그 주에 개봉했다는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할 때, 나는 코웃음을 치며 홍상수나 레오 까락스의 영화가 진짜 영화라고 떠들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남다른 취향, ‘나는 너희들과는 다른 독특한 세계가 있다’, 라는 것. 하지만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저 나만의 세계였다. 그래서 나는 고독했고, 나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결국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의 긴 터널을 지나며, 남들과 구별되는 고독한 ’취향‘이라는 것을 얻었다.3. 청년기- 소통을 위하여나만의 세계가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세계이기를 거부했으므로, 나는 대학 이후 적극적인 소통의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 처음의 시도는 바로 교내 밴드 활동이었다. 기타를 치고 싶었던 나는 무작정 학과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지원했다. 그때부터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기타를 배웠고 반년쯤 지나자 직접 작은 규모의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직접 연주하고 또 청중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경험은 실로 짜릿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구성원과의 ‘조화’였다. 내 의견을 말하는 만큼 타인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어야했다. 그래야 만족할만한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내가 밴드를 하며 배운 것은,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었다.두 번째로 했던 활동은 영화 동아리 활동이었다. 교내 영화 동아리인 ‘영화공동체’는 같이 영화를 보며 영화 속의 상징이나 카메라 기법 등을 분석하는 활동을 주로 하는 학술적인 동아리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공유할 수 있을뿐더러, 영화 전반에 대한 깊은 지식들을 다른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다는 점이 영화공동체의 장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와 취향이 맞는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영화예술에 전반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영화 동아리 활동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학년 때 인근 4개 대학 합동 영화제인 ‘SUFF′를 개최한 경험이다. 이 행사에서 나는 단체 티셔츠 로고 디자인과 홈페이지 관리 등의 작업을 맡았는데 처음으로 참여한, 큰 규모의 행사였다. 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무언가를 같이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마지막으로 대학 3학년 시절. 대학 연합 광고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때부터 방송 관련 매체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고 동아리에는 활달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지속적인 팀 활동을 하며 광고에 관련된 여러 활동들을 할 수 있었다. 반년 쯤 지난 무렵에는 카피부 차장이라는 직함도 얻게 되어 직접 세미나를 주
1. 커뮤니케이션 리더, 연합뉴스인터넷 및 통신미디어 등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 세계의 뉴스를 간편하고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뉴스의 변화’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바꾸어 놓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주었습니다.연합뉴스가 국내 및 해외에서 영향력 있는 뉴스 매체로서 거듭난 이유는, ‘뉴스의 변화를 주도하는 커뮤니케이션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등의 매체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전 세계와 국내 각지의 뉴스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취재하여 보도하는 커뮤니케이션 중심부에 늘 연합뉴스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제가 연합뉴스의 일원이 되고 싶은 까닭도 연합뉴스가 뉴스의 변화를 선도하는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뉴스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취재, 보도함으로써 여론을 주도하는 연합뉴스야말로 커뮤니케이션 리더가 되어 다양한 뉴스들을 접하고 취재 및 보도를 하고 싶은 제 포부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2. 타인을 이해하는 자세대학 이후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학원 강사, 일용 노무직, 물류 창고 아르바이트 등의 일을 하면서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 내에서는 교내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공연을 해보기도 하고, 영화동아리를 하며 영화제를 열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협업을 통해 공동체로서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 방법,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여러 가지 경험들은 제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자세야말로 취재 기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의 소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3. 통합 및 분석 능력제가 갖고 있는 취재 기자로서의 능력은 바로 통합하는 능력과 분석하는 능력입니다.첫째는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하여 그것을 ‘통합’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전공 관련 논문을 쓰고 발표를 하는데 필요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저는 어떤 것이 필요한 자료인가 분류하고 그 내용을 어떻게 요약하여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배웠습니다. 둘째는, 하나의 단일한 매체를 ‘분석’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를 하면서 배운 능력입니다. 동아리에서 저는 영화의 컷과 컷, 장면과 장면을 어떻게 분석하고 그 개별 단위에서 어떤 상징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연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