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의 작품에 나타난염세적 에로티시즘연구발표자 : 심 재 홍 (2004701313)--------------------------------------------------------------------Ⅰ.서론 Ⅲ. 결론연구의의와 한계점Ⅱ.본론 참고문헌1. 쉴레의 작가로서의 형성과정2. 쉴레의 작품에 나타난 염세적 에로티ㅣ즘3. 영향을 준 화가들--------------------------------------------------------------------Ⅰ. 서론르네상스를 거쳐 인간으로서의 자아발견은 미술에 있어서도 의식의 각성을 깨우쳤으나 표현주의 작가들이야 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아표출에 가장 두드러졌던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19세기 말, 유럽에서 미술이 각 분야에 걸쳐 뚜렷하게 보였던 새로운 표현은 20세기 미술의 분명한 예시로써 자아의 확립과 개성의 감정에 기초하여 회화의 자율성,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었다.근대사회에서의 급격한 격동과 그에 따르는 인간 의식의 변모는 문화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인간의식의 과학적 탐구에서 시작된 근대 심리학은 인간에 있어서의 성의 중요함을 전문화적 측면에서 깨우쳐 주었다. 특히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과 더불어 에로티시즘의 의미가 중요성을 지니고 대두된다.사실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있어서 주제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적 자비심과 도덕적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것, 즉 종교적 요소, 죽음, 그리고 성적 요소가 거의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에곤 쉴레는 이러한 표현주의의 특질 속에서 그 자신의 경험에서 여과된 상징주의적 테마를 가지고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을 만들어 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나타난 의식과 무의식에서 스며나온 염세주의적 에로티시즘에 대해 연구해 보았다.연구의 의의와 한계점본 연구에서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 쉴레의 작품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에 관한 연구와 작가로서의 형성과정, 그리고 그의 그림에 큰 영향을 준 뭉크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하면서 1년 전부터 그에게 개인지도를 해온, 클로스터 노이부르크의 화가이면서 교사인 루트비히 카를 슈트라우흐와 화가 막스 카러, 미술사가이면서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참사원인 볼프강 파우커 박사 등의 조언이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드디어 에곤쉴레는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미술 학도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당시 미술아카데미는 보수적인 화가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이 교수로 있었으며 이 교수는 학생들에게 고전의 모사, 실물 데생 등 전통적 방식의 교수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리펜케를은 쉴레의 미술반 담임이었으며 그리펜케를의 보수적인 교수방법은, 창조적인 열정으로 작업을 하고자 하는 쉴레와는 시시각각 부팆쳤다. 아카데미의 보수주의와 쉴레의 반항적인 열정은 점점 더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리펜케를 교수는 쉴레에게 “사탄이 너를 내 수업에 들여보냈구나.” “어디가서 내가 너의 선생이라 말하지 말거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태로까지 악화되게 되었다. 미술 아카데미 학생시절 학교의 보수적인 수업방식에 염증을 느끼던 쉴레는 이미 빈의 주도적 전시단체인 분리파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것은 쉴레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학교의 반항적 학생들 모두의 주 관심사였다. 는 당시 가장 현대적인 미술을 대표하는 전시단체로 미술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에게 열망과 꿈의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이 열망과 꿈을 만들고 주도하는 중심에 구스타프 클림트라는 걸출한 화가가 있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빈 미술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쉴레는 두가지 커다란 사건을 경험한다. 십대 후반인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예술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클림트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카데미 학생으로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학교에 대한 항의, 더는 희망이 없다는 포기 어린 결단, 퇴학, 그리고 뜻을 함께 하는 학생들과의 새로운 예술가 그룹결성이다.1907년 미술학도였던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쉴레와의 불화로 치아체크가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자 재정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고, 때때로 심각한 궁핍에 시달려야만 했다.1912년 4월 쉴레는 어린 소녀를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붉은 머리의 발리와 어린소녀들의 잦은 작업실의 출입은 크루마우와 마찬가지로 노일렝바흐 주민들에게도 결코 반갑지 않은 사람으로서 쉴레를 주지시켰다. 어린소녀들의 옷을 벗겨 그림을 크리고, 심지어 문란한 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은 주민들을 흥분시켰다. 곧 주민들은 쉴레를 고소했고 경찰은 쉴레의 작업실을 수색하였다. 거기서 발견되 많은 선정적 그림들이 외설적이라 하여 쉴레는 구금되고 만다. 21일간의 구금과 3일간의 징역형을 합쳐 24일간의 구금동안 어린 소녀를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고소는 무죄로 밝혀졌으나, 쉴레의 작업실에 걸려 있는 에로틱한 작품들이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포르노물이라는 이유로 판사에게 3일간의 징역형을 받게 된 것이다.1912년 그는 어느때 보다도 활발하게 전시회에 출품했고, 그 반응은 미지근한 정도에 그쳤을지라도, 비엔나 하겐바운드에서 개최될 예정인 봄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게 됨으로 인해 그는 처음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1913~1915년에 거려 쉴레는 청년기의 여러 갈등을 해결하고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에 의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투옥경험이 쉴레에게 미친 영향중 하나는 선정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에 있어 즉시 사회와 타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더 이상 아이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여자의 그림도 덜 선정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톤을 낮추었다기 보다는 아마도 잠재의식적으로 감정적 충격보다 구성상의 독특한 각과 포즈를 더 강조하는 미적의 요소를 도입했기 때문일 것이다.1915년 쉴레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4년동안 그의 모델이었던 웰리와의 이별뒤에, 그해 철도 기계공의 딸 에디트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쉴레는나타났다.에로틱한 예술연구의 선구자인 푸흐(Edward Fuch)가 그의 논문에서 “예술은 거의 전세대에 걸쳐 에로틱한 주제를 다루어왔다. 왜냐하면 에로티시즘은 모든 인간의 생활의 근원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했듯이, 인간 의식의 새로운 조형적 전개를 모색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성을 자기 작품의 소재로 삼아 왔다. 그것의 결과는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작품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본능을 직시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생과 사의 지향까지를 의미하는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났다.회화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특히 근대이후 자아의식의 확립과 함께 적극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19세기의 성적 규범의 실체를 꿰뚫어 보려한 인물 중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선정적인 주제에 대한 열정은 근대미술 사상 보기 드물게 관능적인 누드와 화려하게 채색된 풍부한 장식적 문양을 결합하는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圖1)(圖2)그 자신의 광적이고 때로는 병적이다시피한 관능주의와 정열적인 예술은 젊은 화가 에곤 쉴레와의 교류를 통하여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클림트가 1904년에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 (圖3)를 묘사한데서 예술적 아이디어를 얻은 쉴레는 1910년 관람자가 여자의 성기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포즈를 달리 해서 그렸다.(圖4)당시만 해도 누드는 화가들의 보편적 주제였지만 모델의 성기를 직접 볼 수 없게 몸을 옆으로 틀게 한다든가, 손으로 가리게 하는 등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피했다. 쉴레는 이런 금기를 깨고 과감하게 관람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자신의 성기가 드러난 누드를 주제로 여러 점 그리기도 했던 그는 1911년에는 자위행위 하는 모습마저 폭로하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圖5)(圖6) 쿠르베와 로댕도 여자의 성기를 관람자를 향해 그린 적이 있지만 쉴레의 그림은 두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성의 사슬을 완전히 끊는 것이었다. 1911년 이후 그의 누드는 더욱 그들은 쾌락 뒤에 곧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죽음과 몰락에 대한 쉴레의 집착 역시 자극적이다. 그는 가을을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 여겼는데 그 이유는 이때가 되면 사물의 덧없음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이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들의 피부에는 병듦과 질병의 흔적이 있다.(圖9) 성행위를 암시하거나 묘사할 때조차 생명력으로 충만하기 보다는 죽음의 은유로 묘사하였다. 쉴레는 적어도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까지 인물 드로잉이나 상징적인 구성, 그리고 풍경화를 통하여 육체적인 몰락과 정신적인 파탄을 절박하게 표현하였다.(圖10) 이러한 표현방식은 쉴레가 그러한 정신적인 공황을 매혹적인 것으로 느꼈음을 암시한다.3. 영향을 준 화가들1)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클림트는 쉴레에게 다각도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쉴레의 미술로의 여정이, 클림트에 의해 영향 받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쉴레의 미술 자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쉴레가 클림트를 만난 1907년부터 크루마우로 떠나기 직전인 1909년까지, 2년여동안 쉴레의 그림 속에는 많은 클림트적 요소가 발견되고 있다.1909년에 쉴레와 여동생 게르티를 그린 두 점의 초상화가 있다.(圖11) 게르티의 옷에 그려진 장식적인 문양은 클림트의 그림들에서 사용된 클림트의 문양들임을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 들이다. 이 클림트의 문양은 쉴레가 클림트의 영향을 벗어나는 1910년에도 잠시 나타난다. , , 그리고 (圖12)에서이다. 세로의 길이가 가로의 길이보다 두배이상 긴 특이한 캔버스의 사용은 클림트의 유명한 를 더욱 더 연상시킨다.1912년 쉴레가 그린(圖13)와 클림트의 (圖14)도 눈여겨 볼일이다. 추기경과 수녀의 은밀한 관계는 보는 사람에게는 묘한 흥분감을 주는 터부시되어 온 소재이다. 추기경과 수녀도 불안했는지 포옹 속에서도 두 눈은 보는 사람다.
눈의 역사 눈의 미학(낭만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2004701313 심 재 홍Ⅰ. 서론Ⅱ. 본론1.눈을 통해 본 낭만주의 전사(前史)2. 낭만주의3. 리얼리즘4. 모더니즘5. 포스트모더니즘Ⅶ. 결론Ⅰ. 서 론책의 저자는 본다는 것이 갖는 역사적·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시각의 지위에 따라 서구 문화는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문학, 미술, 신학, 철학, 종교 등을 종횡하며 이야기한다.이 책에서 저자는‘눈’이라는 모티프 하나로 서구문학과 예술의 기본원리를 다시 쓰고 있다. 그 역사는 “낭만주의가 눈에 대한 부정이라면 리얼리즘은 눈에 대한 긍정, 모더니즘이 눈에 대한 회의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눈에 대한 절망”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시각은 서구의 사유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감각인 것이다.“히브리인들은 이해를 청각을 통해 얻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청각’이 ‘진리’에 대한 지배적 비유로 등장한 히브리적 전통과 달리 서구 철학에서는 ‘시각’이 지배적인 비유로 등장한다는 주장은 서구 철학이 그리스의 시각중심적인 전통을 계승함을 말해준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 내에서 그것의 시각중심적인 사유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는 20세기에 특히 일군의 프랑스 철학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각중심적인 사유에 대한 거부와 도전의 움직임은 서구 철학의 시각중심주의에 던져진 최초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좀 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시각중심의 서구 사유에 대해 처음으로, 그것도 대대적인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했던 것은 낭만주의다.따라서 시각과 관련하여 서구 문학사나 예술사를 고찰해보고자 할 때, 낭만주의는 그것이 가진 전환점으로서의 가치를 통해 가장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낭만주의가 왜 전환점으로서 가치를 가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낭만주의에 이르는 과정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글에서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시작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까지 알아봄으로써 시각의 지위에 따라 서구 - 인간의 눈, 그것의 궁극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 여준 작품인 동시에 본다는 것이 인식과 지식은 근원 또 는 지식 자체임을 보여준 작품이다.?플라톤 - ①인간의 눈은 욕망의 근원인 동시에 대존재, 즉 절대 진리인 이데아를 ‘바 라보는’ 지식의 근원이다.②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제반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아리스토텔레스 - 최고의 자리에 시각이 있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그 뒤를 잇 는다.?헤라클레이토스 - 눈은 귀보다 더 정확한 증인이다.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본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므로, 그들은 모든 감각 가운데 시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시각을 토대로 했던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사유와 문화가 그 후 서구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때, 그들이 남긴 최고의 유산은 이성적 사유와 담론이 될 것이다.로마는 가히 그리스의 적자라 할 만하다. 우선 종교적인 면에서 그들은 그리스의 다신교를 거의 그대로 전승했는데, 이는 구상예술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로마가 시각중심적인 문화를 이룬 것이 그리스의 다신교적 종교와 조각, 건축, 회화 등의 다양한 구상예술의 영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철학자들이 시각을 최고의 감각으로 규정한 것도 그리스적 사우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신전을 비롯하여 바실리카, 웅장한 건축건물, 검투사들의 피가 난무하던 원형극장 등은 로마 제국이 ‘스펙터클 문화’의 표상, 시각중심적인 문화의 전형임을 보여준다.중세에는 청각이 시각보다 더 중요한 감각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페브르는 당시의 지각세계를 청각의 세계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한 증거로 근대 음악의 대두를 언급했다. 사실 중세 기독교 문화는 눈과 시각에 대해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가 예수의 ‘육화’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온 신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이로부대표하는 원근화법을 흔히 사실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실주의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이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사실 원근화법은 시각경험을 그대로 반영한 수단이 아니라, 공간을 수학화하고 도식화한 개념적인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외면화’한 것”이다.17세기 초의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 그 뒤를 이은 굴절망원경의 발명과 그것의 개량, 신기술을 이용한 안경의 개량과 일반화, 인쇄활판의 발명, 정교한 인쇄기구의 발명 등 이 모든 현상을 통해 우리는 17세기가 분명 푸코가 표현한 대로 “거의 배타적으로 시각에 특권을 부여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레오나르도 다빈치- 눈은 천문학의 교사다. 그갓은 우주지리학을 만들며, 인간의 모든 예술에 대해 충고를 던지고 그것을 바로잡는다. 눈은 사람들을 세계 의 여러 곳으로 이끌며, 수학의 왕자다. 눈은 건축, 원근화법과 성화 를 창조했으며 항해술을 발견했다.?데카르트- 눈은 감각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가장 포괄적인 감각이다.르네상스 이후의 이러한 시각중심적 사유는 16세기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커다란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종교개혁가들은 이성의 능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들에게 신은 이성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의 표상인 시각에 대한 그들의 강한 회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성상숭배를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눈의 매체인 교회에 있는 모든 형태를 가진 대상, 심지어 석유램프까지 ‘우상’으로 간주하고, 이를 제거하는 이른바 ‘파괴 의식’을 자행한 이 ‘실제의 전쟁’은 다름 아닌 이성적 능력의 표상인 눈에 대한 전쟁이었다.성상숭배 금지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자세는 개혁을 통해 무엇보다도 신의 ‘말씀’을 충실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전하고자 했던 그들의 목적에서 기인한다. 그들에게 교회를 가득 메운 성상들과 성화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시각 재현물은 예배의 순수성을 방해하는 우상들의 난무에 지나지 않았다. 칼뱅과 릴레이의 우주론, 1703년에 출간된 뉴턴의 『광학』, 그리고 여러 사상가의 글에 등장하는 빛 이미지들의 사용 빈도가 입증하듯이, 빛은 18세기 인식론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즉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오며, 모든 감각 가운데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라는 신념이 18세기 인식론의 배경을 이루었던 것이다.2. 낭만주의낭만주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종교개혁의 경우를 통해 미리 시각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히 말해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각중심적인 전통에 대한 총체적인 반대 움직임을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의 시각에 대한 반대는 총체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었다.?워즈워스- “눈은 우리의 감각들 가운데 가장 폭군적인 감각이다.”?밀턴- 『실낙원』에서 눈의 부정적인 속성을 강조 하면서, ‘음욕의 눈’, ‘관능적 욕망의 눈’을 사탄의 눈과 동일시 함.밀턴은 ‘언제나 바깥을 향한 육체의 눈은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내면을 향한 눈이며, 이러한 눈을 가진 것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가 내면의 눈을 강조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인 시각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시각의 허구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눈은 블레이크에게는 ‘상상력의 눈’이 된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이 내면화된 비전을 통해 눈의 독단적이고 폭군적인 힘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상상력은 곧 이미지를 창조하는 능력이며, 이는 상상력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낭만주의의 특징은 상상력을 여러 정신능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정신의 본질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정신은 단순히 현실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조화한다는 칸트의 전언이 자리하고 있었다.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인간정신의 본질로 간주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진리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며, 상상력은 이러한 창조의 역할을 담말로 리얼리즘이 재현한 대상들이다. 이 표면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인간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표면들을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기본전제다. 리얼리즘적인 전통에서 ‘보는 것’이 중시되었던 것은 보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과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낭만주의에서 서정시가 대표적 장르였다면, 리얼리즘에서는 소설이 ‘주요한 매체’다. 리얼리즘의 주요한 매체인 19세기 소설은 부르주아 계급의 구체적인 삶과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들의 모순과 한계 등을 관찰하고 재현한 문학 장르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한 리얼리즘 소설이 겉으로 드러난 여러 형태의 ‘표면’을 철저히 관찰하고 ‘표면’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근본원리로 했던 것은 일면 당연할 것이다.19세기 초에 등장한 사진은 리얼리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화가 20세기의 리얼리즘적인 재현양식을 대표한 시각장치였다면, 사진은 19세기의 리얼리즘적인 재현양식을 대표한 시각장치였다. 사진은 현실의 한순간을 일어난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의 정신을 대변한다. 하지만 후에 플로베르는 사진이 상상력이나 예술가의 창조적인 재능이 배제된 단순한 ‘복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의 한계를 지적했다. 은판사진이 발명되자 경탄을 금치 못했던 러스킨조차 자연이 아니라 사진의 표면을 모방하려는 화가들의 기계적 사실주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표면을 꿰뚫는 상상력’이야말로 문학과 미술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표면에 드러난 진실 이상의 본질적인 진실”에 이르게 하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러스킨과 마찬가지로 시각을 가장 지적인 감각으로 보고, 시각적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던 소설가 하이디의 입장이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복사하고 기록하는 수준의 리얼리즘은 예술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리얼리즘 작가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인간의 눈을 대신한 사진기의 기계적 눈이 재현한 ‘현실’이라는 것이 과연 정확한 현실인가에 대한 그들의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