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생애 통해 실내악 양식 표현 확립한 브람스1850년대부터 시작되는 브람스의 창작 제1기는 주로 실내악 창작을 비롯, 1854년부터 1894년까지 40여년 간에 걸쳐 24곡의 작품 을 완성하였다.그 속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현악기 또는 현악기와 피아노의 조합을 위한 갖가지 4중주곡 및 5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실내음악 양식은 많은 낭만파 작곡가들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독주 피아노 곡이나 리트가 갖는 개인적 표현의 결핍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관현악 음악의 다채로운 색채와 압도적인 음향을 갖지도 못한 데 기인하기도 한다.그러므로 골수 낭만주의자들이었던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바그너가 실내음악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19세기 이 매체에 의한 최선의 작품들이 고전적 전통에 가장 가까웠던 작곡가들 즉,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를 조명해 볼 때 전 생애를 통해 실내악 표현양식에 열심히 도전한 브람스는 교향곡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19세기 실내악 작곡가 중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1860∼1870년은 브람스의 합창곡 시대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몇몇 합창곡 중에서 유명한 「독일 레퀴엠」, 「혼성 4중창」, 그리고 「네 손 피아노를 위한 '사랑의 노래'」, 「왈츠집」이 작곡되었다.2백60여곡의 가곡은 그의 실내악과 같이 40여년간에 걸쳐 작곡된 것인데 전반적으로 슈베르트를 모범으로 하고 있으면서 피아노 성부의 역할을 부차적으로 한정시킨 점은 슈베르트나 슈만의 가곡과는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슈베르트와 슈만의 피아노 반주와 비교해 볼 때 브람스의 반주는 덜 회화적이고 묘사적이다.슈만의 가곡에서와 같은 긴 전주 , 후주등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또한 브람스의 가곡은 슈만의 가곡처럼 열렬히 끓어오르며 충동적인 성격보다는 과묵하고 고전적 깊이를 보이며 내성적이고 체념한 듯한 우수를 나타낸다.오히려 브람스의 낭만주의적 특성은 연애의 주제와 감상적인 분위기에 찬 가사의 선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그가 즐겨 선택한 시의 주제는 '죽음에 관한 명상'으로 「광야의 고독」, 「나는 점점 더 고요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가네」, 「교회의 마당에서」, 「죽음, 그 차디찬 밤 작품 121」(1896)등과 성경 가사에다 노래를 붙인 「네 개의 엄숙한 노래」등은 예술 가곡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준다.말년의 브람스가 지닌 창조력의 대부분은 관현악 어법에 주입되었다. 유명한 작품으로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비극적 서곡」, 「대학 축전 서곡」이 있다. 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기교적인 이중 협주곡」과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교향곡들은 가곡, 실내악, 합창곡등을 통하여 상당히 인정을 받로 난 후의 말년에 쓰여진 곡들로 「교향곡 제1번 다단조」는 그의 나이 43세(1876)때의 작품이며, 최후의 「교향곡 제4번 마단조」는 그의 나이 52세(1885 )때 작곡한 것이다.바그너와 리스트의 낭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이 교향곡들은 베토벤의 형식을 게승한 것으로, 19세기 후반의 고전 복구 운동이 압축되어 있다.고전적 형식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전종적인 4악장 형식에 고전적 기교인 대위법과 동기적 발전이 있다. 또한 특정한 표제가 없다. 이것은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절대음악이라는 말이다.그러나, 동시에 이 교향곡들은 그 화성적 어법, 충실하고 다채로운 관현악 음향, 기타 그 음악어법의 일반적인 특징에서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의 함정들, 즉 거짓된 웅변, 허황한 기교의 과시 그리고, 작곡가의 머리 속에서 아무런 맥락없이 연결된 생각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음악의 무형식성들을 피하였다.오직 작곡가의 영감은 어떤 착상이라도 진지하게 사색된 후 최종적인 완성의 형태를 갖추어야만 했다.형식, 균형,節度를 고수한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브람스가 균형과 절도라는 고전주의자적 원리의 부활에 깊은 관심을 보내고 있음은 그의 창작 활동에서 볼 수 있다.바그너와 리스트를 대표하는 표제음악 원리라든가 한 악극은 브람스의 창조적 입장이나 기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브람스는 고전주의의 원리를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부분 음악에는 명백히 낭만주의적 색조가 우세하다.브람스에 있어서 고전성과 낭만성의 대립이라는 이원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브람스의 양식은 베토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기악 작품에서 브람스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광대한 음 공간에서 펼쳐지는 보편적 기분이나 정서를 즐겨 표현했다.브람스의 대규모 형식에서 보여지는 명확한 클라이맥스와 긴장의 해결은 베토벤 의 다이내믹한 전개 원리와 매우 공통적으로 보여진다.낭만주의적 기질은 단조의 사용이라든가, 그의 「교향곡 3번 바장조」첫 머리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옥타브에 걸친 폭넓은 멜로디, 저음악기를 강조하는 관현악법에서 생기는 어두운 색조 등에서 인지할 수 있다.브람스는 고전주의자로서 형식과 균형과 절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나, 리스트의 「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은,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기분의 요동과 괴상하고 색다른 표현은 브람스 작품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그 대신 절도있는 운동과 힘, 전체적인 평정성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된다.그 밖의 고전주의적 특징은 소나타 형식의 사용인데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 구성이 고전적인 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1. 독일 민족들의 역사독일에는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독일 민족이 살고 있다. 북유럽이 본고장이었던 게르만 민족은 기후가 나은 현재의 독일 땅으로 이동하여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로마 제국에까지 삶의 터전을 넓히게 되었다. 로마는 300년경 수많은 게르만 족을 로마의 용병으로 채용하게 되었다. 375년경 게르만 족이 훈족을 피해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오게 되는 소위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일어난다. 이후 이들은 서유럽에 골고루 퍼지게 되고 세력이 차츰 커져 로마군대를 위협했으며 로마의 군대가 점차 게르만의 용병으로 채워지자, 로마 제국의 세력은 사실상 게르만의 손으로 넘어가, 결국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커에 의해 멸망된다.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의 땅에 세워진 여러 개의 게르만 나라들 중 라인 강 유역의 프랑크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 가장 강한 세력을 확보하고 다른 게르만 족의 나라들을 모두 합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유럽의 주인이 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약 400년간 이 프랑크 왕국이 유럽을 지배하였으나 814년 카알 대제가 죽은 후 프랑크왕국의 상속권을 두고 여러차례의 내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베르뎅 조약(843년)과 메르센 조약(870년)이 체결되어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독일지역), 서프랑크(프랑스지역), 이탈리아 북부로 나누어졌다. 이때부터 독일의 역사와 프랑스의 역사가 구분되며, 원래 프랑크 왕국의 동부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를 의미했던 독일이라는 용어가 지역적 의미와 함께 정치적인 나라를 뜻하게 되었다.2. 신성로마제국 - 제 1제국오늘의 독일 땅인 동프랑크 왕국은 어엿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지방마다 큰 세력을 지닌 호족들이 군사와 재산을 갖고 있었으므로 동프랑크왕국은 사실상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동프랑크는 911년 왕위를 물려받을 왕족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함으로써 왕을 선거로 선출하게 된다.(선립군주국) 이렇게 선출된 독일왕들은 선거권이 있는 제후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으므로 큰들에게 봉토로 수여했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병역의 의무를 수행했으나 그들의 영토안에서는 비교적 자주적이었다. 제후들은 토지를 하급귀족들에게 수여했으며 이들은 다시 농부들에게 토지를 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상호의존적인 제도인 봉건제도가 발생했다.모든 봉건질서에서 개개 권력집단은 완전한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독일의 제후와 이탈리아의 도시들 그리고 교황이 황제에 대항했다. 따라서 중세의 관념에 따라 전 기독교를 포괄해야 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이 3중의 적과 몇백년을 두고 싸우는 동안 약화되었다. 대신 점차로 오늘날의 중부 유럽의 국가들과 바이에른, 헤센, 바덴 -뷔르템베르크 등 독일의 주를 연상케하는 지방들이 형성되어 갔다.중세에 교회와 세속의 세력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이 되어 신성로마제국은 내적으로 해체되었고 교회는 황제와의 긴 싸움을 통해서 그리고 부와 권력에 의해 세속화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은 속세에 완전히 등을 돌려 신비주의에서처럼 신에게 이르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길을 추구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세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신의 은총에는 무관심했다. 전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나아가고, 후자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로 이어짐으로써 중세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4. 중세말에서 근세로로마교회의 교황권과 프랑켄 국왕들간의 끊임없는 정권다툼으로 인한 분쟁과 불안, 세습이 아닌 선거로 국왕을 뽑는 선제후제도로 인한 잦은 왕권 교체, 이 시기를 이용해서 강력해지는 봉건제후국들, 상업도시와 자치도시들의 성립은 중세기와 그 이후 독일 역사의 특징이다.13-14세기에는 황제권이 약화될수록 제후국이나 자유 상업 도시의 세력이 강해졌으며 이 세력의 영향에 의해서 그들의 국토나 거주지의 역사를 결정했다.14세기에 이르러 작은 지방의 제후와 기사들이 점차 쇠퇴해간 반면에 부를 축적한 도시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획득해갔다. 도시동맹의 결성은 도시들의 힘을 강화시켰는데 이들 동맹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자 동맹으로 14세기 발트해 이름만 남아 있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었다.그러나 중세 말기의 정치적인 허약성은 대대적인 문화의 부흥기를 가져다 준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독일은 표현력이 풍부한 문학적인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철학과 시, 건축 및 음악이 이 시기에 전례없는 전성기를 누렸다.7. 17세기 후반 18세기 - 절대주의 시대거의 독자적인 주권을 지닌 영방국가들은 프랑스의 정부형태인 절대주의를 받아들였다. 유럽의 제후들과 제왕들은 절대군주가 되었다. 당시 중부유럽에서도 독립한 소국가들이 발생했는데 나중에 프로이센, 작센, 헤센,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등과 같은 독일의 주가 이들로부터 생겨났다. 오늘날에도 독일에서 이러한 주들은 여전히 자기들 고유의 의회와 정부, 문화적 생활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절대주의 시대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많은 제후들은 그들의 거주지역을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제후들은 '개화된 절대주의'의 대표자들로서 일정한 범위내에서 학문과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중상주의 경제정책은 절대적으로 통치되는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래서 바이에른, 브란덴부르크 (후일의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와 같은 영방들은 독자적인 세력 중심지가 되었다.특히 30년 전쟁 이후 독일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은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호엔쫄레른가의 프로이센으로 압축된다. 30년 전쟁중에 독일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즉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많이 이탈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독일내에서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1683년 터어키의 침략을 막아내고 헝가리와 터어키의 발칸지역을 획득하여 거대세력임을 과시했다.한편 프로이센은 17세기 중엽부터 그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어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18세기에 최상의 군사력을 지닌 경쟁국으로 부상했다. 황제선출권이 있는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군주(1640-1688)의 통치하에서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에서 가으며, 그 핵심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였다.1814/15년의 비인 회의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등 옛 군주국들이 대부분 복구됨으로써 유럽은 반동복고적인 질서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독일인들의 소망인 자유롭고 통일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비인회의의 결정에 따라 1815년 독일에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등 39개 국가로 구성된 '독일동맹'이 창설되었다. 옛 제국을 대신한 '독일동맹'은 주권은 지닌 개별국가들의 느슨한 연결체였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과거의 제후들은 대부분 이전의 봉건체제로 돌아갔다. 이전과 다른 점은 개별 영방의 수가 300여 개에서 39개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조직은 연방의회인데, 회원국끼리 적대행위를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회원국 전체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이 연방의회는 선출에 의한 의회가 아니라 39개국에서 파견된 대표자들의 회의체였다.동맹의 양대세력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였으나 특히 오스트리아는 연방회의를 통해서 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수십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독일동맹은 통일과 자유를 향한 온갖 노력을 억압했다. 언론과 출판은 엄격한 검열을 받았고 대학들은 감시받았으며 정치적 활동은 규제되었다.그러나 메테르니하의 보수반동체제는 독일동맹과 러시아에서만 제대로 작동하였고 다른 나라에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래서 1830년대부터 유럽 각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에서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때와는 달리 즉시 반향이 일어났다. 3월에는 모든 연방주들에서 자유주의 민족국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비인의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는 실각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왕은 언론의 자유와 헌법제정을 약속했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입헌운동과 통일운동이 일어났다.18라들을 차례로 침략하여 거대한 식민지로 만들었다.통일 후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성취한 것을 지키고 독일의 위치를 국제적으로 확고히 정립하기 위해 유럽 열강과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독일과 적대관계에 있는 프랑스를 가장 경계했다. 프랑스에 대한 무마책으로 북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우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 나라들과 여러가지 동맹을 맺었다. 특히 프랑스의 보복에 대한 방어망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이 동맹은 발칸지역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지중해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는 수단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나아가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중 어느 하나가 강대국에 의해 공격받을 경우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함으로써 유럽의 외교권을 주도하였다.그러나 1890년 황제 빌헬름 2세가 통치하고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빌헬름 2세의 통치는 개인의 의사에 크게 좌우되어 독일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했다.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갱신하지 않자, 러시아는 불안을 느낀 나머지 1894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공격에 대비했다. 독일은 해군력 증강정책으로 영국과의 해군력 경쟁이 본격화되었으며, 이에 영국은 독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프랑스와 1904년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프랑스, 영국, 러시아는 1907년 3국 협상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유럽에는 '3국 협상국가'와 '3국 동맹국가'라는 양 진영이 출현하였다. 이들 양대 진영은 1905년부터 1914년까지 10여년간 예민하게 반응함으로써 대전을 예고하였다.유럽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지역은 발칸반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당시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슬라브 민족을 통치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자가 세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학생의 총에 맞아 죽은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다. 이에 오스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