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화법 시간에 교수님께서 자유로운 주제로 글을 써오라고 하셨을 때 어떤 주제를 해야 될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여러 주제를 찾아보고 생각 해보았는데 내가 잘 알고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중국어를 전공하는 친척 형과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드라마 때문에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되었고 커서 나의 진로도 중국에 가서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말을 먼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국어 국문을 전공으로 하고 있고 2학기에는 중어 중문을 복수 전공할 생각이다. 내가 중국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어렸을 때 많이 보았던 무협영화나 액션 영화인데 애뜻한 사랑이야기나 멜로물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첨밀밀이라는 영화가 처음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도 속편으로 나왔을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명절이나 여러 휴일에 텔레비전에서 많이 방영되었기 때문에 중국사람이나 우리나라사람들 누구에게나 생소하지 않고 한번쯤은 이 영화를 접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로 많겠지만 그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첨밀밀은 홍콩개봉 후 7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96년 흥행 수익1위를 차지한 영화이다. 그 동안 줄곧 흥행 수위를 차지하던 액션영화를 제치고 멜로 영화가 1위를 차지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홍콩 영화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나는 첨밀밀에 나오는 배우인 여명과 장만옥도 물론 좋았지만 영화내용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천진에서 온 소군(여명 분)과 상해에서 온 이교(장만옥 분)는 우연히 상해의 기차역에서 만나게 된다. 이 두 젊은이는 각자가 자신의 희망과 꿈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홍콩으로의 여정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이 둘은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홍콩에서 다시 우연하게 만나게 되면서 낯선 도시에서 서로에게 첫 번째이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된다. 소군(여명)의 희망은 홍콩에서 발붙일 곳과 약간의 돈을 벌어 중국에 남아있는 자신의 약혼녀 보보를 데리고 와 한 가정을 이루는 아주 소박한 것이었으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이교(장만옥) 의 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취를 이루는 것이었다. 홍콩이라는 객지에서 서로의 삶을 힘겹게 꾸려나가는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로에게 이성의 감정을 가지게 되자, 소군의 약혼녀에게 미안한 생각을 가진 이교는 자신은 사랑을 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이별을 선언한다. 1990년, 보보는 홍콩으로 와 소군과 결혼준비를 하고 있고, 이교 역시 돈많은 갱단 두목 아표를 만난 상태였다. 우연하게 또 다시 만나게 된 소군과 이교는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맺어주지 않았다. 갱단간의 암투에서 밀려난 아표는 홀로 남게 되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었던 아표를 떠날 수 없었던 이교는 아표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피의 길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둘은 다시 헤어지게 된다. 1995년, 뉴욕, 아표는 세상을 떠나고, 이교는 홀로 뉴욕에 남았다. 소군 역시 보보와 헤어진후 이교를 찾아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뉴욕에 산다더라는 소문 한마디에 의지해서 이교를 찾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등려군의 노래 "月亮大表我的心" 이 배경으로 깔리고 어느 상점의 텔레비전에서 등려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나오는데 이 상점 앞에서 같은 시선을 두고 있는 이교와 소군은 환한 미소를 띄우며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마치 원래부터 운명적인 사랑이였음을 암시하듯 처음 두 사람이 만난 모습을 보여준다.첨밀밀은 중국본토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두 젊은 남녀의 1985, 87, 90, 93, 95년, 10년간의 안타까운 사랑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진가신 감독은 거듭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안타까움, 잊혀짐의 서러움,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 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이 영화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첨밀밀에서 기존의 고전적인 멜로 영화를 뛰어넘는 고도의 상징과 탄탄한 시나리오 구성으로 작품 곳곳에 가슴 아픈 사랑의 분신들을 심어놓고 있다. 황혼 녘 소군(여명분)이 이교(장 만옥분)를 태우고 다니던 삐걱거리는 자전거가 그중 하나이다. 어느날 소군의 아내는 그에게 왜 이제 자전거를 타지 않느냐고 말한다. 소군은 이교와 헤어지고 난 후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생각한다.지나간 사랑의 아픈 기억 때문에 그의 자전거는 집 뒤 한 쪽 구석에서 그들의 사랑이 잊혀지듯이 그렇게 쓸쓸하게 잊혀져 가는 것이 된다. 이 영화는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에게 지금 내게 다가온 사랑이 바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80년대의 시대가 개방과 개혁을 높이 치켜들고 중국대륙에 불어닥친 자본주의 물결이 이처럼 대륙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의 탈출을 하게 만들게 되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그들은 가까운 대만이나 홍콩, 그리고 자본주의의 거대한 상징인 미국까지 흘러 들어갔고 이때부터 새로운 이민사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어졌다. 진가신 감독은 아직까지 한번도 다룬 적 없었던 더 나은 경제적인 생활을 위해 대륙을 떠난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80년대 그 아스라한 추억의 아픔들을 이 영화에 담아낸 것이다. 또 감독의 특유의 부드러운 감성과 독특한 세상보기의 눈으로 말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 옛것에 대한 추억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레임을 동시에 우리에게 느끼게 하고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또 이 영화에서는 영화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 또한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우리 나라에서 우리말로 작사한 똑같은 노래가 드라마 주제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는 영화 음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첨밀밀이란 제목은 대만의 국민가수 '등려군'의 첫 번째 히트곡에서 따왔다. 영화에서 영화 음악이라는 성격 외에도 등려군의 상징성은 대단히 크다. 53년 대만에서 태어나 16세에 데뷔, 일본과 대만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고,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대륙에 소개되면서 대만, 홍콩, 중국의 젊은이들에겐 그녀에 대한 추억이 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시발점인 85년은 시대적 배경에서도 잘 맞고, 여소군과 이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등려군 이라는 배경을 이해하면 영화를 해석하는 재미가 더할 것이다.
국민문학과 민요시파Ⅰ. 서론1920년대는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이다. 1919년 거족적 항일 운동인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폭력을 앞세운 무단정치에서 유화와 회유의 방법을 동원하는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강압적인 민족말살정책이 시작되기 이전 단계여서 오랜 식민지 상황 속에서도 비교적 문화 활동이 가능한 시기였다. 따라서 1920년대는 작가들의 작품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비교적 다양한 사상과 문학이론들이 나올 수 있었다.문학사에서 1920년대를 설명할 사건 가운데 하나가 카프(KAPF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결성이다. 이로 인해 계급 문학론이 대두되고 카프와 마찰을 일으키며 ‘국민문학’이 등장하였으며 프로문학과 국민문학은 서로 노선을 달리하며 활발한 논쟁을 벌였다. 그간 프로문학에 대한 연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진 데에 반해 국민문학에 대한 연구는 대개 부분적으로 행해져 단평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국민문학의 범위가 넓으며 그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여기에서는 프로문학에 대한 대타의식으로서의 국민문학을 살펴보고 이것이 우리 나라의 특수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민족주의 문학으로써의 국민문학책을 읽다보면 국민문학, 민족주의 문학, 민족문학이란 말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정확히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세 가지 용어는 그동안 뚜렷한 구별없이 사용되어 왔을 만큼 서로의 경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모호하다. 먼저 민족주의 문학과 민족문학을 정의해 보고자 한다. 민족문학이 민족성 내지 민족 전통에 기초하여 한 민족의 생활을 그리는 자연발생적 작품인데 반해 민족주의 문학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에 충실한 문학으로 목적의식을 갖고 생겨난 문학이다. 그렇다면 국민문학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국민문학은 민족문학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문학적 특색을 집약시켜 보여도 체계화된 이념의 의식적 표현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도 국민문학은 민족주의 문학의 성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물론 민족주의 문학과 민족문학 사이에는 공통된 의미도 있다. 두 경향이 모두 본질적으로 민족애에 근원을 둔 집단의식의 표현이라는 점, 따라서 민족적 동질성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통성 때문에 용어의 쓰임에 있어 혼란을 일으켰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어 여기에서는 국민문학을 민족주의 문학의 한 계열로 파악하고자 한다.Ⅲ. 카프와 국민문학의 대립1. 국민문학의 출현 배경과 형성과정국민문학이 대두된 192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식민지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질적인 문화권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이러한 시기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투쟁과 민족 내부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1920년대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제?반봉건으로 집약된다.식민지라는 상황에서 모든 문화 운동은 민족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을 무산계급의 문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른바 프로문학이 대두되었다. 이는 염군사(焰群社)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22년 9월 김홍파?김영팔?송영 등이 조직한 최초의 프로문화단체인 염군사는 잡지 『焰群』을 2호까지 편집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했다. 뒤를 이어, 1923년 박영희?안석영?김형원?이익상?김기진 등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하였다. 이 두 단체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1925년 8월 카프에 통합되었다. 이 밖에 카프에는 이상화?조명희?이기영?박팔양 등이 가세하여 문단상 이전에 없었던 거대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 카프가 이론적인 면을 강화하여 계급 문학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이에 대한 거부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이 거부 반응의 핵심에 서 있었던 것이 국민문학파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흔히 국민문학을 프로문학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에 반대하여 생겨난 움직임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프로문학 문학적 반영, 퇴폐적 허무주의에 대한 이념 극복의 노력 및 문화적 주체의식의 확립이라는 원인이 프로문학이라는 촉매에 의해 하나의 문학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국민문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주요한의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와 1925년 1월에《朝鮮日報》에 발표된 이은상의 문학시감「國民文學의 成立」에서 비롯되어 최남선에 의해 비교적 체계 있는 논리로 국민문학의 당위성이 수립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국민문학으로 일컬어지는 20年代 민족주의 문학운동은 1924?5년경에 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3?1운동의 결과, 국내에 팽배해진 민족주의의 열기가 문학에서도 이미 뜨거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 주요 논쟁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이 최초로 견해차를 드러내 보인 것은 1926년 2월 『개벽(開闢)』지의 특집 「계급문학시비론」을 통해서이다. 여기에 참여했던 문인들 중에서 계급문학을 부정했거나 문학은 이를 초월해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던 이광수?김동인?염상섭?나도향?박종화?김석송 등이 후에 국민문학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프로문학 진영에서는 김기진과 박영희가 나섰다.프로문학 논자의 글로는 김기진의 「피투성이가 된 프로혼의 표백」과 박영희의 「문학상의 공리적 가치 여하」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이 글을 통해 프로문학의 본질과 대두 배경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들과는 상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민족주의 계열의 논자들은 프로문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동인과 이광수이다. 김동인은 문학을 프롤레타리아니 부르주아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구별하는 것 자체를 부인했다. 그리고 이광수는 김동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계급문학을 부인했다. 김동인이 유미론적 입장에서 프로문학을 부인한 것과는 달리 이광수는 효용론적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술은 어느 특정한 계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지론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프로문학을 거부했다.계급문학과 민족경향의 내용에 걸맞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창조해내지 못한 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염상섭의 논리적인 공박에 그 치밀성을 인정하면서도 염상섭의 주장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 여겼다. 염상섭의 논의는 예술과 환경의 관계 및 계급 대립과 정서의 대치 문제 등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나왔다는 것의 박영희의 주장이었다. 염상섭은 예술과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산계급의 예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영희는 염상섭과의 논쟁에 대해 “이 논전이 누구의 승리로 돌아갔느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논전의 승리는 시대의 사조가 결정하였던 것이 고 개인의 식견에 있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똑바른 말일 것 같다.”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Ⅳ. 국민문학의 성격국민문학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특징지어진다.첫째, 국민문학은 민족주의 이념의 구현에 기초하여 모국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선보였다. 국민문학파는 모두 모국어에 대한 사랑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이었다. ‘국민문학’ 또는 ‘조선문학’의 정의에 있어서도 ‘조선말’로 쓰여질 것을 첫째 조건으로 들었다.둘째, 국민문학은 문화적 부활 운동을 벌였다. 1920년대 문화 부흥 운동은 국민문학파와 그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던 문화 학술 종사자들의 활동으로 대변된다. 이들은 민요?민담의 채집, 역사 연구를 통한 작품 창작, 고전문학의 발굴 및 그 전통의 계승, 우리말 연구와 보급운동 등을 들 수 있다.셋째, 국민문학은 민족적 개성과 향토성을 옹호하였다. 여기서 향토성은 지방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민족 공영체, 다시 말해 타민족에 대하여 자민족으로서의 근본적인 본연성을 의미한다.넷째, 국민문학은 민족예술형식의 계승과 창조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시조와 민요시가 그 대표적 예이다. 국민문학파가 주장한 시조와 민요시의 창작은 고문화 재발견, 전통의 계승, 민족 문화 주체성의 확립, 향토성 지향, 모국어에 대한 사랑 등 그들이 고집했던 문을 보였다. 홍사용이 ‘민요’라는 용어 대신 ‘메나리’를 사용하여 이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흠이 있지만 민요에 대한 신뢰를 갖고 이를 되살려야겠다는 주장을 편 것에 의미가 있다.한편, 김억은 《동아일보》에 를 실어 민요의 정형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이 글에서 김억은 그동안 써온 자유시는 어느 정도까지 ‘진정한 의미로의 내재율’을 가지는지 의심스럽다 말하고, 너무 산만해 시답지 않게 된 폐단에서 벗어나 민요에서 ‘격조시’ 즉 ‘정형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홍사용의 민요론은 민요의 흥취를 잘 체득하고 있으나 객관화된 분석을 하지 못했으며, 민요가 당대에 어떤 변모를 보였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주의 깊게 살피려 하지 않았다. 김억은 누구보다도 치밀한 탐구를 하여 민요 율격론을 제시하였지만 민요의 묘미와 발랄한 율격 자체를 잘못 짚고, 자기류의 정형시를 만드는 구실로 이용하려 했다. 이처럼 민요시 부흥 운동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휘한 계기에서 일어났지만 각기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민요를 잘못 이해해 그 허상만을 쫓으려 하는 이도 있었으며 민요시라고 내세우는 작품이 정작 민요를 더 왜곡했다는 극단적 평가가 내려지기까지 했다.실제 작품을 살피는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까지를 민요시라고 보아야 할 지 판가름하기 어렵다. 작자가 스스로 민요시라고 일컫은 것도 민요시다운 특징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민요시라는 평을 얻은 작품도 전부 민요시라 할 수는 없겠다. 민요시를 민요를 충실하게 받아들여 개작한 것으로 한정한다면 이에 가장 적합한 시인이 김동환과 홍사용이다. 김동환은 1929년에 이광수, 주요한과 함께 을 내고, ‘소곡(小曲)’?‘민요’?‘속요(俗謠)’라고 한 것들을 여러 편 실었다. 그는 세 가지 용어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짧은 노래로써 민요나 속요를 받아들여 다양한 작품 활동을 시도했는데 작품으로 「아리랑고개」「경복궁타령」등이 있다.홍사용은 김동환과는 다르게 기존 민요를 본뜨지 않고, 힘들여 창작하면서 민요의 다.
《도이장가》에 대한 연구【목차】1. 시작하는 말2. 본론1) 도이장가의 배경설화2) 내용3) 형식4) 고려가요로서 보는 견해5) 향가로서 보는 견해3. 맺음말1. 시작하는 말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균여전에 11수, 삼국유사에 14수에 수록되어 있다.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노래이자 이두문자인 향찰로 표기된 문학 작품을 향가라고 하는데 그러면 신라시대에 , 신라인들의 정서를, 향찰로 옮겨적은 작품만을 향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끌어 오기 위해서 도이장가를 선택해 보았다.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15) 왕이 서경(西京:平壤)에 행차하여 팔관회(八關會)가 열렸을 때, 그 자리에 개국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참석하게 한 것을 보고, 왕이 그들의 공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이다. 향가의 주제는 군신, 남녀, 붕우, 축사 등 그 성격이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도이장가는 추모의 성격을 띈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김락과 신숭겸은 고려시대의 군신으로 태조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포위되자 왕을 구하고 전사했는데 이들의 공을 높이 사서 이 노래를 지었다. 형식적인 면을 살펴보면 이두식(吏讀式) 표기로 되어있고 8구체 형태을 갖추고 있어 향가(鄕歌) 형식의 노래라고 말은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작품을 향가라는 범주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향가 형식을 한 고려가요라고 분류하고 있으므로 그 소속에 대한 논의가 팽배하게 대립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도이장가의 내용과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향가인가 고려가요인가 라는 질문을 바탕에 깔고 이 작품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2. 본론2-1. 《도이장가》의 배경 설화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에 그 제작 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 경위에 관해서는 그 밖에도 고려사, 명신행적(名臣行蹟),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간략하게나마 보인다.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했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乎 임을(돌아가실 고비에서) 완전하게 하신心聞際天乙及昆 (정성스러운)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魂是去賜矣中 넋은 가셨으되三烏賜敎識麻又欲 (임께서 삼으심(내려주신) 벼슬은 또한 대단하구나.望彌阿里刺 (지금 팔관회에서의 두 장군의 가면극을) 바라보며 알겠구나及彼可二功臣良 그 때(역전 고투할 때) 두 공신이여久乃直隱 오랜 옛날의 일이나 곧은 자취(충성심)는跡烏隱現乎賜丁 (오늘까지도) 나타나는구나.①1행의 님은 태조 왕건이면서 동시에 국가를 가리킨다. 두 공신의 죽음으로 왕건의 목숨이 유지되며 고려의 건국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두 공신의 위군 충절에 대한 찬양이다. 이신 대사의 애정이 하늘 끝까지 미친다는 것은 실지도 그렇겠지만 예종 자신의 교화적인 주장과 바램이다. 그리고 두 공신의 상을 보고 눈물이 넘쳐흐른 것은 노래의 동기를 말해준다.②두 공신에 대한 왕의 보답이다. 충신의 자취는 아득하지만 이신대사한 충신에 대한 합당한 보답이 주어진다는 사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충성심을 분발케 하는 것이다.③현재의 가상희를 통하여 역사적 교훈을 얻기 바라는 군주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고 팔관회에서 가상희를 보면 두 공신의 충의는 천고에 빛나고 죽음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역사는 과거인 것으로 남지 않고 지금도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④두 공신의 이신대사는 왕기를 보전하는 초석이 되어 예종대까지 국기가 잘 보존되어 왔음을 말해주고 또 기대가 충족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신하들 속에서 다시 살아남을 것을 노래하고 있다.2-3. 《도이장가》의 형식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遺事)에 보면 ?... 잉사어제사운일절(仍賜御製四韻一絶) 단가이장(短歌二章, 친히 사운의 시 한수와 단가 이 장을 지었다.)?즉 시와 노래 둘 다에 능했던 예종이 두 공신의 사연을 들은 후 두 장수를 애도하는 뜻을 담아 한 수의 시와 두 수의 노래를 지었다는데 우리말로 지어 불렀기 때문에 향찰체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단가이막 노래 둘을 만들었던 것 같다.?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넋은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직분 맡으려고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취를 나타내신저.정병헌- 단가이장은 전대의 비분련체 사뇌가와 구별지으려는 인식때문이라 보고 전후 4행 으로 구분하여 해석함.김동욱- 원전을 비판하여 한수의 시로 8구체 향가형의 단형시가(短形時歌)로 규정함.원래 8구체의 단형시가였는데 조선조에 와서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平山申 氏高麗太師壯節公遺事)를 저술하면서 향찰을 알지 못해서 우(又)자에 착안하여 두 수의 노래로 적게 되었음.2-3. 《도이장가》의 소속에 대한 이견2-3-1. 도이장가를 고려가요로 보는 견해이 작품에 대한 주요 쟁점은 장르적 성격과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장르에 관한 문제는 이 작품을 향가로 볼 것인가 고려 가요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려가요로 보는 근거는 창작 연대가 신라의 향가와는 너무 떨어져 있고, 형식을 향가의 8구체와 동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으며, 향가는 3음절 중심임에 비하여 이 작품은 2음절 중심이라는 데 두고 있다. 김기동(1960)은 가 신라 향가와 창작 연대가 너무 떨어질 뿐 아니라 팔구체로 되어 있지만, 향가의 팔구체와 동질적인 표기 형식을 취한 작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향가 갈래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김상선(1968)은 향가의 형식이 주로 육문절 글귀임에 비해 이 작품은 육문절 글귀에 모자라고, 또 향가가 3음절 중심인데 비하여 이 작품은 2음절 중심이라는데서 향가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김기탁(1982)은 “시형식보다 표기문제만을 가지고도 장르귀속에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이것만으로 향가의 장르에 귀속하기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도이장가의 제작연대(1120)를 중심으로 볼 때 균여대사의 왕생가 11수 창작(967) 이후 약 140여년간 향가와 같은 류의 현존시가 없었을 현종 12년(1021)보다 100년 이후 예종 15년(1120)때가로 보는 견해이 작품에 대한 주요 쟁점은 장르적 성격과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장르에 관한 문제는 이 작품을 향가로 볼 것인가 고려 가요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향가로 보는 근거는 표기법이 향찰식이라는 점과, 형식이 향가의 8구체와 같다는 데 있다. 우리어문학회는 도이장가가 1구가 짧지만 광의의 향가의 하나인 와 같은 8구로 된 노래라고 하여 향가로보았다. 이 작품은 표기상 외래문화의 강렬한 세력에 의한 순이두식 표기의 자연도태의 형태로 와 같은 한문식 표기와 뒤섞인 이두혼합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향가가 주로 신라의 시가라는 점에서 향가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한 면도 있으나, 그 표기법을 중시하여 향가의 잔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는 전대의 향가와 여요적 성격을 띤 가요를 연결시키는 디딤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즉 그 표기법이 정통적 향가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면서도, 또한 향가에서 볼 수 없는 분장의 형식이 여타의 여요와 동격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는 이두식 표기에 주목하여 향가의 장르에 귀속 시켜야 한다. 또 김완진이란 한 학자는 신라의 향가를 까지 포함하여 26수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또 는 표기문자가 향찰인 점이나 신라의 향가음악이 모두 전하여 오지 않음이나, 내용이 신라 향가의 신악의 성격인 추모와 기원이 점 등으로 보아 향가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장르적 성격 판단의 기준으로 겉으로 드러난 형태에 둔 점이다. 종래에 2연시로 보아 왔던 이 작품이 앞의 해독에 따르면 단연시로 파악된다. 뒷부분의 "좋다. 두 공신이여"는 사뇌가(詞腦歌)에서 차사(嗟辭)로 시작되는 이른바 후구에 해당한다. 이러한 구조적 유형에 따라 이 작품은 사뇌가에 맥락에 닿으므로 향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10구체 향가의 전통을 잇는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에 비해 는 향찰의 표기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이 작품은 과 함께 신라 향가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두 공신의 가면을 쓰고 허수아비 춤을 추는 놀이를 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을 그런 것으로 추모하는 것은 신라 때 이래로 오랜 유래가 있었는데, 두 공신의 일을 연유로 해서 팔관회의 절차가 편입되어 예종 때에도 되풀이되고 그것을 예종이 보고 도이장가를 불렀다. 불교의식 중 팔관회는 팔계를 받는 법회로써 종교적인 등불을 밝히고 음악과 가무백희로 대축연을 베풀어 국가 왕실의 태안을 기원하는 제전이다. 이같이 서경의 팔관회에서 두 공신의 우상이 악정에 배치함을 상례로 삼았는데 마침 예종 15년 가을에 왕이 서도를 둘러보았다. 그때 팔관회도 배설하였는데 가상이 둘이 있으니 그 모양이 비녀를 끼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홀을 잡고 금으로 얽어 있었는데 말을 타고 용약하며 뜰을 두루 돌아다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좌우에 물으니 이 곧 신승겸, 김낙이라고 말하며 그 본말을 여쭈니, 왕이 듣고 감탄하여 두 공신에 대한 어제사운과 단가이장을 내렸다. 행장에 있는 바와 같이 팔관회에서 신승겸, 김낙의 두 초상을 왕태조가 반열에 앉혔다고 하면 이는 바로 신라통일 전기의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한 제전으로서의 팔관회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이는 전반부는 불교적인 재이고, 후반부에 있어서의 민속적인 제전으로서의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도 그 의식의 하나로서 있었을 것이다. 이는 초상이나 가상은 바로 소위 추도가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상, 우상은 곧 가면무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본래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자로 표현하는 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때 두공신의 가면은 영혼가면으로서 영혼신앙 심리에서 만들어진 초상이라 하겠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춤을 추면서 노래도 지어서 불렀던 신라 때의 전레를 찾는다면 〈황창무〉라고 하는 검무가 있다. 이것으로써 신승겸과 김낙의 신상의 기무는 바로 가면 무희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정리하면 고려시대부터 연등회, 팔관회에서는 항상 불사의 제전으로 토속신에 대한 가무백희로본다.
차례머리말본론1. 춘향전의 시대반영본론2. 춘향전의 주제에 따른 견해2.1 긍정적 견해2.2 부정적 견해2.3 여러 학자들이 주제를 보는 시각본론3. 춘향전의 주제맺음말머리말춘향전은 판소리 12마당의 하나이다. 조선 영조?정조 전후의 작품으로 추측될 뿐, 작자?연대는 미상이다. 《춘향전》은 처음 판소리로 생성되어 나중에 소설로 정착되었고, 다시 원각사(圓覺社) 이후에 창극(唱劇)이 되었으며, 그 뒤에 희곡?영화?시나리오?뮤지컬 플레이?오페라의 대본 등, 다양한 장르를 거쳐왔다. 《춘향전》은 판소리이기 때문에 민중과 함께 광대(廣大)에 의하여 불리었다. 따라서 판소리가 되기 전에 이미 민간 설화로 유전한 여러 설화가 집성되어 《춘향전》이 이루어진 것이다.숙종(肅宗) 이전의 연대를 가진 야담(野談)에 《춘향전》의 일부와 내용을 같이하는 것으로 암행어사설화(暗行御史說話)?염정설화(艶情說話) 등이 20여 종이나 된다. 또 이 작품의 이본(異本)은 외국어로 번역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70~80여 종이나 되는데, 이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754년(영조 30)경에 만화재(晩華齋) 유진한(柳振漢)에 의하여 이루어진 한시본(漢詩本, 200句)이 있고, 목판본으로 경판본(16장?30장)?안성체본(22장)?완판본(45장?95장), 사본으로서 고대본(高大本)이 가장 오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사본(一本) 2종, 신재효본(申在孝本), 춘향가 남창?동창 2본 등이 있다.본론1. 춘향전의 시대반영남원부사(南原府使)의 아들 이몽룡과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외동딸 춘향이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 이도령의 아버지가 서울로 옮기게 되어 두 사람은 이별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 때 새로 부임한 남원부사 변학도(卞學道)는 수청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춘향을 옥에 가두고 고초를 받게 하여 사경(死境)에 빠뜨린다. 서울로 간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온다. 부사의 생일 잔칫날 각 읍의 수령들이 모인 자리에서 통쾌하게 어사 출또를 하여 부사를 파직시키고 춘향을 구해내어 백년을 이것은 《춘향전》이 판소리로, 판소리라는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전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춘향의 신분도 애초에는 기생으로부터, 성참판(成參判)이나 성천총(成千摠)의 서녀(庶女)로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춘향전》이 양반들의 구미에 맞게 변질된 과정이기도 하다. 판소리 생성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춘향전》이 민중의 갈채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문학적 중량감은 《구운몽(九雲夢)》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춘향과 몽룡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 특권계급의 전횡(專橫)을 대표하는 변학도와 이에 대한 평민들의 저항, 특히 변학도에 항거하여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은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상승을 희구하는 조선 후기 민중의 자화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도령이 극적으로 내려와 변학도를 응징하는 모습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은 바로 민중의 꿈을 표현한 것이다.이 자아의 신장과 꿈의 형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갈구되는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기 때문에 열렬히 환영받았고, 춘향의 수절이 당시의 봉건윤리에도 합치되었기 때문에 양반이나 하층민 누구에게나 영합되는 국민문학적 폭을 지니고 있어 민중 최고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본론2. 춘향전의 주제에 따른 견해지금까지 의 주제를 논하거나 관련된 문제를 다룬 논문은 수십 편이 있는데 그 내용을 거론해 보면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긍정적 시각에서 주제를 파악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시각에서 주제를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대다수의 논자들은 전자에 속하는데 반해 김우종, 윤오영, 한승헌 등의 견해는 후자에 속한다.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을 보고 있으나 부정적 시각에서 주제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2.1 긍정적 견해긍정적 시각에는 의 주제를 파악한 입장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주제를 하나로 집약해서 보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으로 보려는 입장이다. 전자에도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고, ,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크게 '춘향의 정절', '이도령과 춘향 사이의 애정', '불의한 사관에 대한 서민의 항거'등 세가지로 나뉘어 진다. 이들 세 가지 견해들은 작품의 중심인물인 춘향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차이이다.첫째, 의 주제를 춘향의 정절로 본 것은 자체의 생성과 전승과정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어 온 전통적 견해이다. 에서는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하고 신관사또에게 저항한 것을 정절의 표본으로 파악하고 있다.둘째, 의 주제를 '신분이 다른 남여 간의 애정'으로 본 견해는, 기존의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공감을 받아왔다. 춘향과 이도령 사이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에 소개한 견해와 상통하지만, 그 사랑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차이를 보인다. 이도령에 대한 춘향의 정절로 강조할때, 춘향의 행위는 애정적이고 굴종적 성격을 띠게 된다.이에 반해 춘향과 이도령 사이의 사랑을 강조할 때, 춘향의 행위는 전자와 다르게 이해된다.춘향전은 춘향의 이야기일뿐 아니라 이도령의 이야기이기도 하며,이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춘향의 행위에 비중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도령의 존재와 행위를 소흘하게 다룰 수는 없다. 이것은 작품의 내면 구조에 비중을 두고 작품을 해석한 결과 얻어진 결론이다.셋째, 의 주제를 서민적 저항이라고 본 견해는 국문학연구의 초창기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이래 현재까지도 많은 호응을 받아 오고 있다. 춘향이 수절을 강요하는 신관사또의 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데 이 작품의 중심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여기서는 춘향과 신관사또가 각각 피지배자와 지배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고, 양자의 대립적 관계에 비중을 두어 작품을 해석한다.연구자의 이같은 결과론적 해석방식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해석으로 보기는 힘들다. 또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작품의 특정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두기도 한다.따라서 위의 세 속에서 파악할 때 주제는 '애정'이 되며,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연관지을 때 ?저항?이 된다. 또한 시각차에서 ?정절?로 불 수도 있는 것이며 ?저항?으로도 비추어 질 수 있다.다원적 주제론 의 주제에 관한 다원적 주장은 몇 가지 견해를 서로 결합하거나 절충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표현된다.2.2 부정적 견해윤오영은 이 일관된 줄거리나 논리를 갖지 못한 저급한 이야기일 뿐이며, 따라서 을 문학으로서 논할 가치도 없고, 더구나 그것을 고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주장한다. 이에 반해 김우종은 의 주제를 춘향의 서민적 항거라고 본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우선 춘향이 기생의 신분으로서 이도령에게 순종한 것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선책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자주성이나 주체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상전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굴종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애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비판한다.따라서 춘향전의 주제를 제대로 갖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으며, 특히 춘향의 정절이나 항거를 주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는 입장이다.한승헌은 의 전반적 성격을 검토하면서, 이 작품이 저항과 적응의 양면성을 가진 작품임을 지적하고 저항하기보다는 적응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춘향이 원래 요구한 것이 대등한 혼인관계가 아니라, ?첩살이라도 좋으니 버리지만 말아달라?는 호소였다고 보면 신분의 벽을 넘어선 혼인은 피차 예상치 않았다는 것이다.따라서 ?춘향이 한 사람의 해피 엔딩을 가지고 계급타파나 사회개혁의 가능성을 연역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며 따라서의 주제를 저항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견해는 대체로 고전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고, 작품의 본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것이어서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작품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물들어 있지 않는 것으로 작품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는 앞으로의 연구에 충분히 고려되분하고, 춘향의 이중적 신분을 분석함으로써 주제파악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춘향은 현실적으로는 기생의 신분에 속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생이기를 거부한다. 이 생성, 전승되던 사회에서는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같은 갈등이 작품의 주제와 연관을 가진다. 에서 내세우는 유교적 정절은 춘향의 행위에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표면적 주제를 이룬다.이와 반면에 신분상승을 통해 인간해방을 실현하고자하는 욕구는 춘향의 내면적 세계를 표출하는 것으로서 이면적 주제를 이룬다 하였다.설성경도 다원적 주제를 설정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보편적 주제'와 '개별적 주제'로 구분한다. 의 모든 이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랑', '신분상승 욕구'등을 보편적 주제로 보고, 그와 반면에 각각의 이본들이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주제를 개별적 주제라고 보았다. 보편적 주제는 모든 이본에 공통되며 의 전승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개별적 주제는 이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주제의 층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대주제', '중주제', '소주제'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대주제는 작품의 전체내용을 대변하는 주제이고, 중주제는 작품의 전반부나 후반부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대변하는 주제이며, 소주제는 작품의 구성요소들이 소설에 수용되기 이전의 설화적 상태로 있을 때의 주제라고 말한다.황패강은 의 주제를 '사람'으로 보면서도, 민중의식이나 항거, 현실 비판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주제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의 의미를'표층적 의미'와 '심층적 의미'로 구분하고, 이 두 가지는 다같이 중요하지만 작품의 핵심 의미는 심층적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밖에도 천두현(춘향전 주제에 대하여 -Pamela와의 비교를 통해서, 어문교육2,3 합병호,1980), 나병철(춘향전의 주제연구, 연세대, 연세어문학 18, 1985), 김복희(춘향전의 다층적 주제, 이화어문논집 7, 1984)등의 연구.
처음 수업 시간에 좋아하는 시인에 대해서 보고서를 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시인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사실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시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접하고 즐겨 읽었기 때문에 시나 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많이 알지는 못했다. 물론 중?고등 학교 때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긴 했지만 우리 나라 교육 현실 상 수능을 대비해서 공부를 주로 했다. 그나마 2학기 때 시론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시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우리가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시험에 대비한 시의 분석만이 시가 아니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하다 보니 내 뇌리를 스치고 가는 시인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이육사 선생님이시다. 이육사라 하면 우리 나라에서 이름 석자만 말해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유명하고 여러 대 걸작의 시를 남기신 사람이라고 거의 생각할 것이다. 나도 이육사 선생의 시는 학교에서도 물론 접해 보았고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접해 보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문학기행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이육사의 생가를 찾아 가 본적이 있고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문경이라는 고장과 이육사의 생가가 있는 안동이 근접해 있으며 가족여행이나 학교에서 많이 갔던 고장이라서 다른 고장보다는 친근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육사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고 물론 이육사 라는 민족시인의 시도 너무 좋아한다.우선 이육사의 호는 육사이고 본명은 원록이다. 경북 안동 출생이고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6.10만세 사건 후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고 공부하던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1933년 귀국하여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하고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였으며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으며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안타깝게도 그토록 염원하던 민족의 해방을 불과 1년 남기고,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 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이 간행되기도 했다.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했는데 이육사 선생은 이름뿐만 아니라 후대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 후세에 그를 잊지 않고 시비까지 세워주고 유고시집이 나온 것만 보더라고 부럽고 나도 이육사 선생의 정도는 되지 못하더라도 후대에 누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 나라와 같이 문학인에게 조금은 박대하는 나라에서 이육사의 기념관을 건립예정이라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하고 본받을만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일제을 주고 있는데 그 교훈들은 아래와 같다. 우선 그의 1942년 무렵에 쓴 [광야]라는 시에서도 그런 교훈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라고 노래하였다. 광야가 발표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의 와중으로, 소위 '병참기지화' 정책 하에 일본은 가장 극악한 식민통치가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고 화가 나는 강제 징집과 정신대 모집도 이때에 이루어졌다. 광야의 한 대목인 '지금 눈 내린다'는 표현은 아마도 일제치하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육사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고 외쳤다. 일본의 무자비한 무력통치 하에서 나약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민족해방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면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고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는 천년의 세월 뒤에라도 가난한 노래의 씨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평도 안되는 감옥 속에서 이육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10년, 100년도 아니고 천년이 갈지라도, 해방의 그날을 준비하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이육사의 시 세계는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일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이 또한 당시의 처참한 조국의 현실을 뛰어넘은 '준비된 기다림의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청포도에서, '바라는 손님이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은 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준비해 놓은 것도 마찬가지라 하겠다.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육사 처럼 미래를 준비하는 아름다움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살아가는 뜻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미래는 희망적이고, 이로 인해 우리의 다음 세대는 그 소중한 결실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꿈과 희망 나아가 국민, 민족이 바라고 원하는 이상 든 준비하고 기다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결국에는 염원이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이육사의 시에서 말해주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다.선생의 활동상황을 떠올려보면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의 시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있듯이 갈등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조국이 해방될 것이라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신념과 의지로 똘똘 뭉친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행동 면에서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망명의 길을 택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저항의 강도를 낮춘 일도 없는,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포기란 단어는 없이 초인적인 적극성에 그저 모든 사람이 놀랄 뿐 이였다.인간 이육사의 참모습을 요약하자면 타고난 인품이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고 대대로 이어진 가문의 내력이 의를 숭상하며 죽음을 택할지언정 정도를 걷는다는 유교집안의 출신이라는 유전 및 환경적 조건이 성격 형성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리고 관동대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사회체험이 한일 지향적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사만이 가질 수 있는 초인적인 면모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역시 그의 시다. 선생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시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있다.이육사 선생은 비록 안타깝게 가시고 없지만 그의 훌륭한 모습과 정신의 하나 하나는 그의 시작품에 남아 우리 가슴에 항상 기억되는 시인인 것 같다.이육사는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 어떤 누구보다 노력하고 투쟁해온 진정한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그래서 그 당시의 어떤 시인보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의 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본의 식민통치아래라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표현한 점인 것 같다. 그런 그의 강직하고 끈질긴 정신과 민족과 나라를 내 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 같다.요즘에 우리는 일제 통치라는 시련이 없어서 그런지 옛날보다 사람들이 자신만 알고 지키고 이득는 애국심은 별로 볼 수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부터도 나라의 사정이나 미래를 걱정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닥친 현실에 국한되어 있는 것 같고 아무래도 국가보다는 내가 우선 시 되는 것 같다.아주 가끔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이육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볼 수 있는 애국심을 가지는 것 같다. 그 예로는 작년 6월에 한반도를 들끓게 했던 월드컵이란 것인 것 같다. 그 당시는 모두 자신의 직분과 책임을 조금은 뒤로 미뤄두고 한마음으로 응원을 하고 세계에서도 놀랄 정도의 애국심을 보여 준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그때만 불같이 일어나서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생활로 모두 돌아와 있다.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은 일제 시대에 억압을 당하고 있는 여전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물론 과장이 좀 많이 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세계의 강대국 즉 미국이라는 존재에 억압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사건이 있는데 우리는 그때도 격분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며 모두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소파개정이라는 데모도 하고 미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육사와 같은 끈질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은 강직한 정신이 부족해서 그런지 지금은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어떤 책에서 읽은 것인데 한국사람들은 냄비라고 써있었다. 그 이유는 끓을 때는 너무나 강한 열의를 가지고 일어서지만 금방 식어 버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은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나부터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 모든 사람은 누가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어쩜 서로에게 국가의 앞날을 맡기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아 반성하게 되고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이육사의 일편단심으로 해방, 즉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모습, 조국을 걱정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시와 그의 삶에서 배우게 되면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 것 같고 조금 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을 것 같다.